목회자와 설교의 악용  
 

교훈과 책망

설교가 목표하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 하나는 회중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말씀 자체가 표방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공동번역. 딤후 3:16). 가르침, 즉 교육에는 청중들이 진리를 옳게 이해하도록 돕고, 신앙에 있어서 올바른 가치기준과 판단력을 지니도록 하며, 혹시 잘못을 행하거나 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냉엄하게 꾸짖는 일이 포함된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책망, 꾸짖음, 훈계는 신앙교육뿐만 아니라 설교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요즈음 교회에서는 권징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걱정들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요소들을 적용할 때 상당히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칫 설교자의 인간적 감정과 오해 혹은 사욕이 개입될 여지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목회방향과 철학을 무리하게 관철시키기 위하여, 비민주적이거나 불합리한 과정과 절차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목회자 자신의 허물이나 실수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혹은 회중들이 목회자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갖지 않도록 조장하기 위해서 이를 악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교훈과 책망이라는 명분하에 폭언, 비난, 조롱, 저주, 욕설, 악담, 위협, 협박 등을 일삼는 경우도 없지 않다. 청중들의 신앙인격과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는 예도 있다. 설교를 들으면서 자괴감을 느끼거나 인간적 수치심과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경우도 있다.

청중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정당한 꾸짖음과 책망은 기꺼이 받아들이겠지만 설교자의 욕망으로부터 촉발되는 지극히 인간적인 핀잔과 모욕은 견디기 힘들어 한다. 청중들은 인격체다. 이성적인 존재임과 아울러 감정적인 존재이다. 생각이 있고 판단력이 있다. 도덕성과 윤리성이 설교자들보다 탁월한 경우도 많고 전문적인 영역에서는 목회자들을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따라서 비인격적이고 부당하며 불합리한 설교는 지양해야 한다.

위로와 격려

성도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목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곤 한다. "저희들은 일주일 내내 모진 세파에서 시달리다 주일에 예배하러 교회를 가는 것이니 가급적이면 책망 받고 꾸지람 당하는 설교보다는 세상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과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위로받고 격려 받을 수 있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이런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앞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설교가 추구하는 지향점 가운데는 성도들을 신앙적으로 옳게 지도하기 위하여 허물과 죄를 지적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결코 가볍게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설교뿐만 아니라 하나님 말씀 자체가 이를 엄중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균형 있게 접근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도들이 요청하는 바와 같이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이다. 이 또한 성서 자체가 지향하는 것이다. 성서는 냉엄한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희망과 소망을 노래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계 21, 22장). 이는 마치 부모가 잘못을 저지른 자녀에게 눈물이 날 정도로 야단을 쳤다가도 끝내는 넓고 따스한 가슴으로 품어주며 용서를 베풀고 나아가 그에게 밝은 내일을 꿈꾸게 하는 것과 같다.

주로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목회자들은 자칫 성도들이 어떤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고 힘겨워하며 밤잠을 설치는지 체감하지 못할 수가 있다. 그들이 왜 한숨 쉬며 피눈물을 쏟는지 간파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성도들은 자신이 직면해 있는 아픔을 목회자들에게 생각만큼 깊이 말하지 않을 때가 많다. 대신 속으로 아파하고 가슴앓이 한다. 그러면서 설교를 통해서 위로받고 용기를 얻기 원한다. 목회자들도 자신들이 힘겨울 때는 다른 목회자가 하는 설교를 통해서 위로 받기를 갈망하지 않는가? 성도들은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것에서가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소망의 빛에서 그들이 흘리는 눈물을 조용히 닦아 주는 설교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언어 사용

연설이든 설교든 청중들을 대상으로 말을 할 때는 '언어 예절'에 대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인격, 도덕성, 지적 수준, 내면세계, 정신상태 및 영적 현주소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청중들의 정서와 신앙에 치명적인 작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이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지금도 그런 이들이 더러 있기는 한데 과거 한 때 어느 목회자는 부흥회 중에 성도들을 향하여 입에 담기조차 곤란한 정도의 농도 짙은 욕설을 섞어가며 설교하였다. 어디 욕설뿐인가? 어떤 이들은 외설스럽고 음흉한 단어와 이야기를 즐겨 쓴다. 설교 중에 음담패설을 즐기기까지 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거룩하시고 성결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한다는 자리에서. 또 듣는 이들을 마치 아무런 생각이나 판단력도 갖지 않은 어린 아이 마냥 취급하면서 자존심을 짓밟는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비속어가 입에 배인 것 같다. 부모님 같은 어른들에게 반말로 무례를 범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어떤 경우는 청중들을 분노에 떨게 하고 자괴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때도 있다. 아무래도 신앙과 신학 그리고 교회생활 분야에서 아마추어일 수밖에 없는 청중들의 한계를 가차 없이 공격하여 그들을 제압하려 드는 언어폭력꾼들도 심심찮게 있다.
 
설교자 자신의 인격이 소중하고 정서가 가치 있는 것이라면 듣는 이들의 그것들 또한 마찬가지다. 만일 어느 청중이 설교자를 향하여 거품을 물고서 욕을 하거나 빈정거리거나 혹은 송두리째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말을 한다면 과연 설교자는 어떤 반응을 일으킬까?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우러러 모시고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답변을 할 때에는 부드러운 태도로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공동번역. 벧전 2:15~16a).

청중들을 향하여 말을 하는 사람은 거기에다 자신의 인격과 품위를 온전히 걸어야 한다. 말이란 곧 그 사람이다.

신완식 목사 / 대구성서아카데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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