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說敎)의 명칭과 의미


설교란 말은 일본 명치(明治) 초년에 일본교회가 헬라어의 또는 해당하는 말을 설교라고 번역해서 사용하던 것을 해방이후 우리교회가 받아 사용하고 있다. (해방전에는 강도라는 말을 썼다). 한국교회가 영어에서 설교란 말을 번역할 때 그 용어들이 서로 다른 어근에서 나왔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설교(Sermon), 설교하는 것(Preaching)은 어근이 각각 다르다.

 

영어의 Sermon은 라틴어의 sermo에서 나온 말로서 본래는 담화나 연설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근대적인 의미로는 교회에서 예배의 중심으로서의 설교형식을 갖춘 연설로 이해되었다. 이때 Sermon은 넓은 뜻으로서 설교를 말할 때 쓰여 진다.

 

그러나 Preaching은 설교하는 행위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것은 곧 헬라어의에 해당하는 말의 번역으로서 말씀의 선포 또는 복음내용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preach란 말 자체는 라틴어의 praedico에서나온 말로서 선포하다, 찬미하다, 예언하다의 뜻을 가진 말이며, 이는 또한 헬라어의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예언을 말하거나 신적 계시인 말씀을 선포하는 의미를 가진 뜻이다

 

설교가 무엇인가라는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설교학자들이 많은 시도를 해보았으나 "말씀의 봉사라는 의미의 사도적 계념이나, 바울디모데에게 말한 엄숙한 부분인 "하나님 앞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씀을 크게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설교를 몇가지로 생각해 보면 설교는 첫째, 복음적인 설교이다. 다음은 교훈적인 설교이고, 치유설교, 사회를 향한 예언적 설교이다 .

첫째, 복음적인 설교(Kerygmatic  Preaching)이다. 

그 대상은 주로 믿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 믿으십시요, 그리고 예수를 믿어 참길에, 참 생명에, 참 진리에  머무십시요! 하는 것이 복음적인 설교이다. 물론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미 구속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에게도  이 진리를 다시 한번 깨우쳐 주는 각도에서 이러한 설교를 계속 할수 있는 것이다 . 이 설교를 아리는 일명 전도 설교 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사건, 부활의 사건 등 여러 가지의 설교를 할 수 있다. 이 복음적인 설교를 한국 교회는 매우 줄기고 있다. 이 설교가 약 20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을 발견 했다. 20 퍼센트라는 것은 적은 비율인데 그 적은 이유는 그들이 설교를 쓸 때에 특별이 구원에 대한 전도의 목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나름데로 생각해 본다.

둘째, 교훈적인 설교(Didacti Preaching)이다.

사도들의 설교를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케리그마적인 설교요, 또 하나는 디다케적인 설교가 그것이다.

순수하게 구원을 위해 외친 멧시지를 복음적인 설교로 보고, 그 다음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그들이 예수를 믿고 들어 왔을 때에 음식을 먹지 말라 또는 먹으라는 거기에 대한 어귀가 있을 때 거기에 대한 해명,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든지, 윤리적인 문제는 어떻게 한다든지 하는 것을 낱낱이 가르치는 것이 거기 많이 나온다.

그래서 이 부분, 소위 신자된 사람이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는 것을 가르친 것을 디다케적인 설교라고 말한다. 이와같은 설교는 장로교 합동측에서 많이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십일조 내는 문제로부터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살도록 부탁하고 가르치는 것이 이 교리 설교인 것이다. 이 설교가 뜻밖에도 장로교회에서는 많아서 47.3퍼센트가 나오고 있다. 이 수치는 매우 엄청난 것으로 그만큼 장로교가 성도들의 신앙을 엄격하게 규제할 뿐만 아니라, 엄격하게 이 길로 살도록 청교도적인 정신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데 대해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

셋째, 치유설교(Therapeutic  Preaching)이다.

치유 설교는 우리가 구태여 심리학자 칼 융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현대인들은  정치, 경제, 사회, 윤리 속에서 완전히 그 범주에 뒤덮여서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본래적인 자신을 다 상실해 버리고 정치라는 물결과 경제라는 물결과 여러 가지의 물결에 휩싸여 오늘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말은 즐긴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병든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다 병들어 있다. 이와 같이 병든 사회에 있어서 교훈 설교 즉 교리 설교는 교인들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는 설교였다. 치유 설교를 일명 목양 설교라고 부르짓는다. 목양설교를 선택한 교회는 자연적으로 교인이 늘고, 그렇지 못한 교회는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리하여 그러한 방향으로 전환해 같고 또한 그것을 반대할 생각도 없는 것이다.

넷째, 사회를 향한 예언적 설교(Socil-Prophetic preaching)이다.

우리나라는 상당히 핏줄이 있는 나라이다. 그 말은 우리나의 역사가 핍박과 같은 어려움으로 얼룩진 나라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핍박의 역사속에서 성장해 왔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서 사회를 향한 예언적 설교가 없어졌다. 약9퍼센트만이 겨우 사회를 향한 예언적 설교를 하고 있을 뿐이다. 목양설교는 23퍼센트로 나왔는데 물런 이것은 정확한 비율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우리는 진리를 거지고 이 사회를 조명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라고 말 한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연간 156회의 설교를 하다보니 반복 설교를 하게 된다. 특히 원고가 없는 목회자들은 많이 반복해서 설교를 한다. 원고 설교를 착실히 해간다면 반복할 이유가 없다. 자신의 설교 구조에 대해서 정신을 쓴다면 늘 새로운 구조가 그들에게 흘러나갈 수 있다. 눈을 버쩍 뜨고 설교의 자료의 수집을 위해 힘쓴다면 설교의 내용이 그렇게 미흡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간절이 매달리고 하나님꼐서 나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기다리면서 충실하게 엎드린 종에게 그 말씀의 생명력이 없을 리가 없다.

한 가지 형태속에 머무는 어리석고 무미건조한 설교로 계속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성령과 설교에 대해서 인데, 성령이 도우시면 되겠지 그러나 인간의 최선이 없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없으리라고 생각해본다.


이제는 21세기를 내다보면서 복음과 교회에 있어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음을 본 연구자는 주장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설교는 더욱 본문을 중심으로 한 구원론적 기독론적 설교이어야 하고, 더 나아가 설교는 목양적 관점에서 양떼들을 위한 실생활 중심의 설교를 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제는 긍정적인 설교, 열정적인 설교야 하고 멀티미디어와 같은 종합적인 설교의 방법들 도구들을 활용할 수 있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자료출처/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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