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영성의 이해

1. 영성이란
기독교 영성은 인간이 창조시에 부여받은 하나님의 영이 현실의 삶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구원받은 성도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한다. 일상의 삶 속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통해 온전한 영성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영성을 하나의 틀로 정의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다양한 형태로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영성은 매우 탄력적이고 유연하며 다양하지만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성이 지향하는 것은 성도의 전인격적 삶의 변화이다.
일반 사람들도 영적인 삶의 모습을 가질 수 있으며 요즘은 동양 종교의 여러 형태로 - 기(氣)에 대한 관심, 단전호흡과 좌선(坐禪), 행선(行禪), 마음수련 - 사람들에게 퍼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동양종교의 명상이나 영성은 자신을 벗어나 자기를 비우는 무(無)의 상태를 지향점으로 한다면 기독교 영성은 죄로 오염된 하나님의 형상을 벗어버리고 우리를 새롭게 하는 그분의 말씀으로 본래 창조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고 채워지는 것이다.


2. 영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

1)인간의 이성(理性)과 합리적 사고에 대한 비판으로 동양종교 및 신비주의적인 삶에 대한 동경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2) 서구의 과학주의와 단일화된 종교관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이상적인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다.

3)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과 인간과 자연, 우주를 연결하는 새로운 시도가 영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

이런 현대인들의 변화와 요구 앞에서 기독교는 전통과 교리를 내세워 비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창조된 인간이 어떻게 현실세계 속에서 진리를 찾고 실천하는 적극적인 신자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3. 한국 기독교의 영성의 흐름

1) 영성을 개인적, 내면적, 정신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흐름
영성훈련을 개인의 신앙훈련과 동일시한다. 성령운동을 내세우는 교회나 보수교단이 이런 입장을 취한다. 이 입장의 단점은 성도 개인의 삶의 변화 보다는 일시적인 심리치료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복적인 신앙형태로 흐를 수 있는 위험도 있다.
보수교회에서는 영성이라는 말보다 경건훈련이라는 말로 대신하는데 이런 교회의 문제는 성(聖)과 속(俗)을 구별하는 이원론적인 삶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2) 영성을 사회적, 실천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흐름
진보적인 교회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영성을 신앙인의 사회적 실천이나 그 힘의 공급처로 여긴다. 이들의 문제는 영성적 이해를 통한 실천의 영성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실천적인 행동에 영성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4. 기독교 영성에 대한 오해

자기 중심적인 문화에 메몰되어 있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는 중요해도 이웃과의 관계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인 막 12:30-31(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은 이렇게 번역될 필요가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달리 표현하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런 면에서 기독교 영성을 개인적인 것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1) 기독교 영성은 개인적인 문제다.
영성을 개인적인 영역으로만 제한하면 자칫 한 개인의 심리치료나 기복적인 영성으로 흐르기 쉽다. 역사적 책임이나 공동체적인 삶을 무시하는 독선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은 개인과 개인 속에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드러나는 공동체적인 영성이다. 개인의 영성은 공동체의 영성을 통해 순화되기도 하고 고양되기도 한다.

2) 기독교 영성은 인간의 내면적인 영역에 국한된 문제다.
영성이 인간 존재의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영성의 힘은 우리의 존재, 삶의 영역, 모든 사회적 관계속에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영성은 관계속에서 나타나며 사회적으로 사랑과 평화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3) 영성은 정적인 것이다.
성령의 구원 역사는 역동적이다. (오순절 강하고 급격한 성령강림사건) 또한 성령은 생명의 온유한 호흡으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부드럽게 한다. 영성이 깊어질수록 이 부드러움과 역동적인 감사의 표현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부드러우면서도 생동감 있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런 흐름이라 할 수 있다.

4) 영성은 오로지 순수하게 영과 정신의 세계와 관계한다.
이것은 영과 몸, 정신과 물질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잘못된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의 영성은 우리가 접촉하고 보고 행동하는 모든 삶의 유형들을 통해서 영향을 받고 또한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

5) 영성은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있는 문제다.
영성을 특정한 장소나 시기에만 적용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일상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경험하고 깨달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 영성생활이다. 일시적으로 정해진 장소나 시간을 통해서 자신의 영성을 새롭게 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일상의 삶에서 일상화(日常化)될 때 참된 영성이 된다.
우리의 영성이 일상속에서 영글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부재’의 삶을 사는 것과 같다.
일상의 영성은 하나님의 현존(現存)의식에서 시작되는 생명의 호흡이다.

따라서 신자의 영성은 일상적인 삶을 통해 표현되고 심화되는 생활속의 영성이어야 한다.
신자의 영성은 통전적인 영성이어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 몸과 영혼, 초월과 내재, 개인과 공동체, 성과 속의 관계속에서 조화롭게 피어나야 한다.
또한 기독교 영성은 공동체적이고 실천적인 영성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의 영성은 우리의 삶을 위한 힘이다. 영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행위나 실천은 공허한 것이며, 신앙 행위로서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기독교 영성의 출발

1) 기독교 영성의 출발은 그리스도의 영을 통한 구원사건에서 시작된다.
우리에게 영성이 중요한 것은 보고, 듣고, 맛보고, 듣거나 냄새 맡지는 못하지만 우리에게 느낄 수 있는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영혼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이 영혼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영성은 이 영혼과 관련이 있지만 인간의 총체적인 삶 속에서 형성되고 표현되고 성숙되어 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삶의 총체적 모습으로 나타나는 영성은 시대마다 그 이해를 달리했는데 초대교회에서는 세례나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으로, 5C 이후에는 하나님의 영을 만나는 생명의 감각적 체험으로 12C 이후에는 물질적인 것에 반대되는 것으로 17C 이후에는 헌신된 삶으로 이해되었다.
영성은 내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 다양하고 역동적인 관계에서 체험되고 표현되는데 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은 구원사건을 통한 인간의 생명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기독교 영성은 구원받은 영혼을 통해서 표현되는 삶의 총체적인 변화와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건강한 영혼, 살아있는 영성은 현실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활력을 주고, 인생을 궁극적으로 가치있게 만들어주며 소망을 가지고 불꽃처럼 살 수 있는 열정을 주기도 한다. 또한 건강한 영성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를 알게 해 주어서 진정한 자신과 하나되어 인격적인 괴리감 없이 통일된 인격으로 살아가게 해준다. 영성은 형태로 보이지 않지만 한 사람의 삶 속에서 드러나고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영성은 알코올 중독자가 술 없이도 취기를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의 새로운 삶의 변화와 인간다운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하여 자유와 기쁨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2)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이해가 출발이다.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이해 즉 타락하여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능성이 전혀 없는 존재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기쁨과 행복한 존재로서 인간을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이지도 않는 외형이나 속성 같은 것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이미지가 드러나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무형의 인상이고 기운인 것이다. 우리의 영성이 바르고 건강해 질수록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미지가 드러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 다른 말로 이미지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라는 것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 안에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정적인 인간이해는 자신에 대해서 무가치하게 인식하게 되면서 죄를 짓는 것을 당연시 한다거나 자신의 삶을 포장하는 이중성으로 나타나게 한다. 결국 부정적인 인간이해는 자신을 파괴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상처를 주게 된다.
살아있는 영성 생활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죄의 구속을 받아 새롭게 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참된 영성은 자신과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왜곡된 자신의 허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6. 성령과 영성

영성생활에서의 성령과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령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을 영성생활을 통해서 변화와 성숙으로 이끌어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으로 인도하며, 그리스도의 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으로 인도한다.
기독교 영성이 다른 종교의 영성과 다른 요소는 성령의 활동과 임재를 통한 역사하심이다. 성령은 한분 하나님이시지만 각 사람의 성향, 심성, 성격 등을 통해서 다양하게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각자의 영성도 모두 같을 수는 없다.
성령의 이미지를 성경은 ‘바람’, ‘불’, ‘비둘기’, ‘물’로 표현하는데 상징이 실제는 아니지만 이 상징이 의미하는 바를 통해서 실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1)바람
행 2:2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이때 바람은 생명의 기운을 의미한다. 창세기에서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었던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마가의 다락방에도 임했던 것이다.
또한 바람은 자유를 상징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없고 거추장스러운 것을 쓰러뜨리고 새롭게 하듯이 성령의 사람은 자유한 사람이 된다. 영성이 깊을수록 자유한 존재가 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2) 불
행 2:3 -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불은 변화의 상징. 이 변화는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급변하고 아주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또한 불은 열정의 상징이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마음이 불같고 이웃을 향한 사랑의 마음도 뜨거워지는 것이다.
3) 비둘기
이스라엘 문화에서 비둘기는 창조나 새로운 존재, 시대의 변화를 상징한다.
노아의 방주에 있었던 사람들과 동물들은 비둘기의 움직임으로 변화된 세계를 감지하였다. ‘비둘기 같은 성령’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을 의미한다.

4) 물
생명의 기원(창조 때에 수면위에 계셨던 하나님의 기운)이나, 삶과 죽음, 정화의 의미를 내포(노아의 홍수는 심판과 죽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물은 자연스러움을(無爲) 뜻하는데 물로 상징되는 성령의 역사로 우리를 우리의 영적 상태나 현실에 맞게 자연스럽게 변화로 이끄신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의 물은 이러한 삶의 변화와 생명을 시작하게 하는 성령의 임재요 능력으로 봐야 할 것이다.

성령의 다양한 상징적 의미처럼 영성의 모습이나 빛깔도 다양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성령의 역사도 다양할 수 밖에 없다. 영성훈련을 통해서 자신의 영적 색깔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고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도록 보완하는 것은 지혜로운 행동이다.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영성프로그램에 무분별하게 참여하고 따라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영성의 모습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도 영적 상태에 따라 어떤 때는 찬양하고 기도함으로 어떤 때는 명상과 관상을 통해서, 어떤 때는 다양한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 표현되고 성령을 체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지금 내가 어떤 영적 수련의 훈련을 받고 있으며 이것을 통해서 나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는 현재의 영적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

7.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

그리스도인이 삶 속에서 성령을 체험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성령이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인데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가 그것이다.
성령의 열매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성령의 은사는 ‘우리를 둘러친' 거룩한 영의 기운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성령의 열매
성령이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켜서 영의 사람이 되게 하는 존재의 변화로 나타나게 된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를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성령이 나를 통해서 맺게 하시는 소산물이지 나의 노력이나 인격적인 의지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나의 영혼에 성령의 씨를 뿌리고 자라게 함으로써 맺을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의 본질적인 변화를 형상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변화 없이는 맺을 수 없는 신적이고 근원적인 생명나무의 열매인 것이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 사랑은 뿌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여덟 가지의 존재 이유와 가치와 생명력을 부여하는 뿌리와 같은 것이 사랑이다.
이 사랑은 우리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는 힘이면서 동시에 열매로 드러나는 것이다.

2) 성령의 은사
존재의 변화가 성령의 열매로 말미암는다면 이 세계의 변화를 향한 실천은 성령의 은사로 추진된다. 다양한 형태의 성령의 은사는 하늘에서 부어준 선물이며,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면서, 받는 사람에게는 이전에 자신에게 없던 것을 받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비록 자신에 주어졌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유욕을 가지면 곧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또한 성령의 은사는 각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른 사람의 은사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으며 질투해서도 안된다. 성령의 열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었듯이 성령의 은사에서도 사랑이 중요하다. 바울은 가장 좋은 은사가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그 사실을 고전 13장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의 행위에 궁극적 가치를 부여하는 실천의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3) 은사의 분별
① 자신이 받은 영적은사를 분별하면 자신의 소명(calling)과 사명(Mission)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② 은사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동력을 재충전할 수 있다.

③ 자신의 은사를 발견한 사람은 다른 지체들과 조화롭게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게 된다.

④ 자신의 은사분별을 위해서
∙진지한 기도의 시간과 영적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 자신의 은사를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분별케 하신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한다.
∙은사의 분별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성령의 영감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의 이성적 판단도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과 보여주심을 믿고 지속적인 갈망의 기도와 영적 지도자의 지도를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⑤ 은사를 주신 목적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고전 12:7 -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영성이 타인과 사회에 유익하지 않다면 그것은 화석화될 것이다.
∙은사가 섬김과 봉사의 도구이지 지배하거나 다스리려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벧전 4:10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하게 하고 교회 공동체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고전 14:26 -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때, 자신도 타인도 교회도 유익하게 되며 이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영성의 삶인 것이다.
교회 안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적인 세상의 삶 속에서도 나의 은사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게 되며 이로서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의 빛되심과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이 영성생활을 통해서 얻게 되는 영광이다.

⑥ 성령의 열매와 은사의 관계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존재변화를 드러낸다면 성령의 은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의 씨앗을 퍼뜨리는 변화된 존재의 실천적 삶 속에서 나타난다.
성령의 열매로 가득 채운 존재의 변화 없이 은사는 오래 유지될 수 없고, 은사로 드러나지 않는 성령의 열매는 메말라 사라지기 쉽다. 이 둘을 내용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사랑이이다.


8. 날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영성

1)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개인의 삶과 역사와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체험하는 사람이다. 기독교 문화에서 태어나고 속해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며(문화로서의 그리스도교) 종교적 예배나 형식에 참여한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다.(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경험한 구원의 사건을 증거하고 삶으로 증명하는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살게 되는데 이것이 영성의 삶이다.

2) 그리스도를 체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더 많은 죽음의 체험을 하듯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 깊이 알 때 구체적이고 깊은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지성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더 알고 싶어하도록 만들고 그 앎을 통해서 실제적인 체험으로 이끈다.
체험은 만남이다. 존재와 존재의 만남, 주체와 실재의 만남을 통해 변화로 이끄는 만남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 현실 속에서의 예수 체험이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고, 역사 속에서 자연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을 보고 듣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열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우리의 생활습관이 지금 여기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도록 하는데 매우 익숙하게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한 인간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시면서 체험했던 하나님 체험, 진리체험, 생명체험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고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구원사건 속에서 바라보면서 체험하고 순종하며 나아갈 때 이것이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그리스도가 오늘의 현실 가운데 계신 것을 믿는가?
‘살아계신 하나님’ ‘살아계신 주님’이라고 기도는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시공간 속에 임하여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너무 교리적으로 해석하여 과거나 미래의 사건으로 여기거나 한번도 현실 속에서 체험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보자.

①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계신다. (마 18:20 -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② 그리스도는 약자들의 모습으로 현실 속에 임하신다.(마 18:5 -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 25:35-36 -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어린이, 굶주리거나 목마른 자,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이다.
이들을 돕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위이며 돕지 않는 것은 범죄 행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일이다.

③ 성만찬 속에 그리스도의 계심이 드러난다. (마 26:26-27 - 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와 그리스도가 연합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4) 그리스도를 어떻게 체험할 것인가?
어느날 성 프란시시코가 숲 속에서 길을 잃었다. 이틀 동안 헤메다가 집 한 채를 발견했다. 그 집에는 ‘여기에서는 날마다 신선한 빵을 구워내고 있습니다’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프란시스코가 안주인에게 먹을 것을 구하자 안 주인은 ‘우린 그저 이런 표지판을 만들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오늘날의 교회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여기계심)을 말로는 이야기하지만 정작 체험하지는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살아계신 예수를 체험할 수 있을까?

① 내가 예수님이 머물 수 있는 존재가 되면 된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지고, 철저하게 가난해지고, 정의에 목말라 하고, 선을 위해서 일하다가 남에게 외면 당해보고, 의를 위해 싸우다가 억압 당해보고, 내 자신이 빵과 포도주가 되어 누군가의 밥이 되어지는 자리에 설 때 내 삶 속에 그리스도는 매 순간 성육신하실 것이다.

② 내가 역사적 예수와 동일할 수는 없지만 예수의 삶을 살아가는 또 하나의 예수는 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요, 제자의 삶일 것이다. 작은 예수로서 살아가는 제자의 삶을 통해서 나는 예수의 여기계심(현존) 체험을 계속해서 할 것이며 더 많은 체험의 장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이다.

체험은 몸으로 앎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몸소 체험하지 못하면 그 예수와 진리도 나에게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다. 계시는 감추인 것을 드러내 보여지는 것으로 인간에게는 무지의 어두움 가운데서 진리의 빛을 통해서 실체를 보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깨달음이요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영성생활은 지속적인 깨달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며 믿게 되면서 행동으로 구체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삶을 통해서 인간은 이 세상에서 맛 볼 수 없는 자신이 존재됨의 기쁨과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고 이것을 통해서 자신이 현존(現存)하는 예수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영성수련의 방법은 다양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맞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수준을 높여가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영성생활이 주는 유익과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된다면 수련의 방법은 다양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이 다양한 방법들은 이미 교회 역사를 통해서 검증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지기도 했다. 우리는 이런 방법들을 하나씩 습득하고 실천해 가면서 자신의 영적 은사에 맞는 영성생활의 패턴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영성수련은 이런 과정의 하나이며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행동하게 하는 중요한 통로요 영향을 주는 안내자가 될 것이다.


(cafe.daum.net/cgsbong)

 

'기독교 이야기 > 영성.치유.회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성이란 무엇인가 ?  (0) 2012.07.09
내적치유와 기도  (0) 2012.05.14
영성의 9가지 종류  (0) 2012.03.11
신유의 은사   (0) 2011.12.21
신유의 은사와 영적치유의 연관성   (0) 2011.01.2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