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의 은사와 영적치유의 연관성


                                                                                                                                                                              오성춘  장신대 신대원 원장


  신유의 은사와 영적  치유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여기에 계신 여러분이  어떠한 신앙의 자리에 앉아 있는지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똑같이 성경 말씀을 우리의 최종   권위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를   삶의 최우선 순위로  정하고 있는  신실한 기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신유의 은사나 하나님의 기적을 이야기  할 때는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자리에  따라서 성도들은 신유의 은사와 하나님의 치유라는  글의 제목만 보아도 반응이 달라질 수 있고,  자기 입장에 굳게 서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무시하거나 간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은  먼저 우리의 신앙의 자리를 점검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신유의  은사와 영적 치유를 이야기 하려고, 첫 번째 제목으로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를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첫 번째, 오순절운동의 사람인가?

  (1) 오순절운동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두  번째 주시는 하나님의  복으로서 성령 세례를 강조합니다. 성령  세례는 방언을 증거로 하여  주시며 방언은 성령 세례를 받은자의 증거입니다.

  (2) 오순절운동은  공적 예배에서의  방언을 말하며  은사 집회를 통하여 방언 받기를 구합니다.

  (3)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과거에 어느 교단에  속해 있었던지 그 교단을 떠나서 오순절 운동에 속한 교단으로 들어갑니다.

  (4) 오순절 운동은   신유의 은사와 기적을  믿고 강조하지만 방언보다는 덜 중요시합니다. 이들은 방언과 신유를 강조하는 외에 생활이나 신조에 있어서는 엄격한 근본주의 신앙에 서서 철저한 생활의 순결을 강조합니다.


두 번째, 은사운동 혹은 신오순절주의에 속한 사람이 아닌가요?

이 운동은 1960년 4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벤나이스시 성 마가 성공회  담임 데이빗 바녀  신부가  예배 도중에 교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5개월  전에 자기가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실을  고백한 사건에 비롯되었다고 보고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자기 교단을 떠나지 않고 방언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바녀신부처럼 공개적으로  자기 교단에 머물겠다고 선언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은사 운동의 특징을 네 가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방언과 함께 성령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도 방언을 받아야만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은  아니라고 약간 부드러운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데 정통 오순절주의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2) 공중 예배 시에 방언  말하는 것을 자제하게  합니다. 그러나 은사 집회에서는 방언을 사모하며 신유를 구합니다. 이런 점에서 역시  오순절운동과 약간 다른 점이 있습니다.

(3) 방언의 은사를  받은 후에도 자기 교단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데서 결정적으로 오순절운동과 차이가 있습니다.

(4) 은사운동은 방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 기적의 체험등을  같은 무게로 강조하며, 2,000년 전에   이스라엘 가운데서 기적을 베풀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신유의 은사를 베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전통적 복음주의운동에 속한 것이 아닌지요?

제가 임의대로 이렇게 이름을  붙여본 것인데  여러분께서 고치셔도 괜찮습니다. 특별히 합당한 제목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통적 복음주의운동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이름은 복음주의운동 가운데서도 방언,  방언통역, 신유, 기적행함 등의 은사들이 사도시대가 끝나면서 중지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뿌리는 프리스초닉 벤자민 위필드와  존  칼빈에게 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전통적인 복음주의운동은 개혁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믿고있는 그룹을  제가 이렇게 따로 구분해 보았습니다.


존 스토트는 1966년  베를린에서 있었던 세계복음주의 대회에서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은 병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기적적인 치유사역을  행할 권세가 없습니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전통주의 복음주의의 입장을 j. i 페커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은사운동  그룹이  오순절운동주의로  부터 이어받은 사도시대의   은사들이 현재에도  나타난다는  이론은  적용이 불가능하다.

신약성경의 은사들 -  방언, 방언통역, 신유, 기적행함등의  은사가 현재에도 나타난다는 것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고 또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네 번째, 제 3의 물결을 지지하지는 않습니까?

피터 와그너는 빈손 사이넌과 제임스 왕을 인용하면서 제  3의 물결을 주장합니다. 와그너는  오순절운동이나  은사운동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은사가 오늘에도 나타날 뿐 아니라  이 은사들은 교회성장과 그리스도의  복음확장과 성도들의 삶에  생명을 공급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네가지 점에서 제  3의 물결은 오순절운동이나 은사운동과 다릅니다.


  (1) 신약성경에서 보는 성령의 힘으로 가득 채워지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성령세례라는 표현보다는 성령 충만으로 보아야  하며, 성도들은 계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아야한다.  이 입장의  뒷면에 보면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성령을 받는 것이다'라는 주장이 깔려  있습니다

  (2) "성령세례는 일회적인   사건으로 성령을 받아 교회의 지체로 가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방언도 성령의 은사이나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받아야 하는  것은아니다."

  (4) "성령께서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필요에 따라 성령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사람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실 수도  있고 안 주실 수도 있다" 라는 것입니다.

  (5) 신유의 은사는 매우 중요한 성령의 은사로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를위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은사라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대체로 이 4가지 입장 가운데서  어느 한  가지에서 있을  것입니다. 그중에서  오순절운동이나  은사운동이나 제3의 물결의 입장은  그  정도나 강조의 차이점은   있을지라도 신유의 은사가 오늘에도 나타난다고  믿기 때문에 신유의 은사를  이야기 할 때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복음주의는 상당한 저항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먼저 치유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를  하고 하나님의 역사와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사건들을 종합하면서 하나님의 치유를 하나님께서  단순히 우리의 병을  고치는 은사로 이야기하는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의 치유의  과정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두 번째로 치유의 네 가지 유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퀴나스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강의하다가 병으로 고통하는  형제들과 자매들의 상담을 받으면서  그들을  돕고자 기도하던 중에  신유의 은사를 받은 프란시스 맥넛이라고 하는 신부가  있었습니다.이 프란시스 맥넛은  이론적이고, 합리적이고, 어떠한 기적도   믿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그러나 그 지역의  많은 수도원과  수녀원에서 있던  분들이 찾아와서 자신들의 질병으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것을 상담할  때 그는 이것을 어떻게  도울수 있을까 하는 과정에서  이런 신유의 은사를 받은 분이십니다. 이 분은 질병의 종류와  질병의 발병원인에  따라서 네 가지 형태의 치유로 유형을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질병은 같은 원인으로 오지  않습니다. 어떤 질병은  개인적인 피해로 인해 발생할  수도  있으며, 또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감정의 상처로 인해  발생한 병도 있으며,  사고나 바이러스로 발생한 경우도 있으며,  귀신으로 말미암아 오는 병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질병의 원인들이 여러  가지라는 뜻은 질병을 고치는 데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필요하며 그 질병을 위하여  기도할 때도 여러 가지 다른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적이면서도 임상적인  지혜를 포괄한 치료는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프란시스  맥넛의 분류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의 네가지 유형으로 이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영적인 원인으로 오는 질병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죄가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질병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2장 1-12절에 나오는  중풍병자에  대하여서 성경에  자세한 언급은 없으나 예수님께서 지붕을 뚫고   자기앞에 내려온 침상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를 보실  때에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병이 죄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가 파괴된 인간은 흔히 정서적인  질병을 앓게 되며 그것이 때로 신체적인  질병까지도 일으키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의 기도는 그 개인적인   죄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도를 먼저  드려야 하며, 죄의 용서

없이는  온전한 건강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감정의 상처로 오는 질병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질병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가운데서 입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오는 병입니다. 현대심리학은  인간이  얼마나 상처입기  쉬운 존재인가 하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동기 경험과 감정억압이  무의식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여있다가 정신장애와  질병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건들과 관계들이  인간을 스트레스에 쌓이게 만듭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억압, 상처, 스트레스  등은 흔히 영적인  질병을 일으켜 하나님을 떠나게  하며   육체를 병들게 만듭니다.  펠레티어는 스트레스를 연구,조사한 후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지난 십여년동안 의학적 정신적인 문제발생의 제 1의  원인은 스트레스이다. 스트레스가 모든  병의 발병원인중 50-80%를 차지하고  있다. 스트레스는 그 사람의  뇌파의 활동, 면역의 균형,  혈압과 피공급,  호흡의 속도와  호흡량, 내분비 소화과정등에 현저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렇게 감정이 원인이 되어 질병을 일으켰을 때에는  의학적인 치료와 함께 상담이 필요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도 과거의  상처들과 억압들과 스트레스를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카터 대통령의  여동생되는 스테이픈  카터의 '내적치유'(Inner  Healing)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서 보면 사람들과의 감정으로 입은 상처를  어떻게 기도로 고치는가 하는 내용을 주로 써놓은 책입니다. 우리 말로도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책인데 지금은 구하려고 해도 구하기 어렵더군요.


  세 번째, 육체적인 질병입니다.

이것은 질병, 사고,   심리적 스트레스 등의  정신,신체적인 원인에 의하여 발생하는 질병으로 성경은 이러한  질병을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육체적 질병의 환자가 신체적 장애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자에게 총체적인 장애를 초래하고 있다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조금 뒤에 설명하겠습니다만,  예컨대 마가복음 1장 40-45절에 나오는  문둥병자를  봅시다. 그의  질병은 분명히 문둥병라는 육체적인 원인에서  왔습니다. 그 문둥병은 그에게  정신적으로 공포,불안, 수치, 분노, 스트레스   등의 정서적 질병을 가져다  주는 정서적 장애, 가족과 사회, 사랑하는   이웃과 격리되어 문둥병자촌에 수감되는 사회적  소외를 당해야 하는  사회적 장애, 이웃과의 친밀관계가 단절되는 아픔을  경험해야 되는 관계의 장애, 하나님께 재앙을 당하고 있다는, 저주받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영적인 장애가 겹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체적   장애는 다양한 질병과 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며, 그의 삶을  총체적으로   위태롭게 만듭니다. 이렇게 신체적인 원인에 의하여   발생한 질병은 의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면서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를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특히  신체적인 병이 총체적인 장애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신체적인 질병의  치유와 함께 총체적인 건강회복을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귀신에 의한 질병이 있습니다.

성경은 귀신들려 질병에   빠진 사람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딸은 귀신들려  정신적으로 미쳐있었으며, 간질병에 걸리기도 하며, 눈멀고 벙어리가 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오늘날  어떤이들은 모든 질병의 원인은  귀신들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극단에  흐르기도 하고, 반대로다른 이들은  귀신들리므로 병이 온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극단에 빠지기도 합니다.


  모든 질병이 귀신 때문이 아닌 것은 사실이며, 질병  가운데는 귀신에 기인하는 것이 있다는 것도 성경이  가르치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귀신에 기인하는 질병은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의  방법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기 이후에는  기도의  방법으로만 귀신을  쫓아 내도록  제한시키는 것이 교회의  전통이 되어 왔습니다. 귀신에 의해 질병을 앓고 있을 때에는 귀신의 속박에서 구출하여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하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실 때는 그 귀신을  책망하여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마이클  그린이라는 사람은 귀신에 의한   병을 분별한 11가지 특성을   제시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귀신에 들린 병인지,  정신적인 장애로 오는 것인지, 육체적인  것

에서 오는 질병인지를  분류하여 그 가운데   귀신에게서 온 것이라는 특징 11가지를 써놓았는데,  예수 그리스도, 성경, 십자가등 하나님께 속한 것에 이상 반응을  일으키는 환자,  이상한 힘을 발휘하는  환자, 우상숭배와 이단과 관계가 있는  환자,  우상이나 이단이  숭배하는 목적물을 접촉하거나 가지고 있을때 발병할 수  있고, 조상이 귀신병에 있을 때에 자주 나타나기도 하고, 성적인 집착,   또는 성적인 도착에 빠지기도 하고, 분위기에  강하여 강하게 반발하고, 목소리 변화가  심하고,  이상한 두려움에 자주  사로 잡히고, 기도하기가 아주 어렵고, 눈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등으로 분류하게 됩니다.


  이상과 같이 질병의 유형이 다양하다고 한다면 병든  사람을 치유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알아 보겠습니다. 프란시스 맥넛은 다음과 같이 3단계의 치유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 1단계, 근본적으로  어떠한 질병인가? 그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  인가? 어디가 아픈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어 나가는 단계입니다. 원인조사를 뜻합니다.

   제 2단계, 질병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왜 이런   질병을 앓고 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제 3단계, 어떠한  기도가 필요한가? 상담이나   의료 혹은 약물 치료가 필요한가? 등의 결정을 하는 단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 과정을 거쳐서 환자를 총체적으로 치료하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질병을 고치실  때에  기도라는 단 한가지 통로만을 통해서  고치지 아니하시고 그 외에도 그   발병의 원인에 따라서 약물치료, 의학적 치료수단,  축사, 상담, 목회 등의 통로를 통해서 얼마든지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라는 한가지 통로를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신유의 은사를 주신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조그만 하나의 통속에  가두는 위험스런 일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세 번째, 신앙과 치유의 상관관계

고침을 받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대체로 치유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고침을  받든지 또는 믿음이  치유의 전제라고 하든지 아니면 고침을 받으려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구절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옷에 손을댄 여인을 향하여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디메오 또한 곧 보게 되어 예수님을 좇았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실 때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러한

구절들만 보아도 우리는 믿어야  고침을 받으며 고침 받으려면 믿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과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지병과 구원의 사건들 가운데는 수혜자 즉 고침을 받거나 구원을 받은 자들이 믿음과  치병과  구원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찾기에 어려운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38년 동안 병이 들어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던 병자는 자기를  고쳐준 이가 예수님이신지를 알지  못했는 데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문제는 여러분들께서 성경구절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세요.


예수님이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만난 군대귀신 들렸던  병자는 예수님이 떠나기를 간구 했으나 고침을 받았읍니다. 마가복음 5장1절로 20절을  읽어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에 있던  제사장의 하인과 왕의 신하의  아들은 집에 누워만 있었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었으나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런 경우에 믿음으로   고침을 받는다는 명제를 정당화  시키고자 한다면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신유의 사건들 가운데  수혜자의 믿음이 신유의  조건이 되는 사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건들도 있다면 우리는 수혜자의 믿음과  신유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성경은 수혜자에게  전혀 믿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사건을 해석하면서  신유를 믿음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사도행전  3장의  앉은뱅이 거지의  치유사건은 초대교회의 선교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갈 때에  그 앉은뱅이는  사도들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쳐다  본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단순히 무엇을 얻을까  하여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는 사도들에게 더 많은 동정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단순히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며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  앉은 뱅이가 고침을 받았을 때에 이것이 결코  베드로와 요한의 권능과 경건의 결과로 온것이 아님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앉은뱅이의 믿음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는  믿음도 앉은뱅이를 고친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베드로는 믿음의 결과로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낳게 하였느니라." 믿은 사람은 없는데 믿음으로 고쳤다는   거예요. 거기에서 보면  성경해석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이해하여야  합니까? 신유의 수혜자인 앉은뱅이에게도 믿음은 없었고, 신유의 은사를  실천한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권능이 없었다면, 이   앉은뱅이를 고친 권능 즉 믿음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신유의 사건들  속에서 공통된 요소들을 분석하면서  그 대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신유의 사건의 공통된 요소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사건들은 그것이 수혜자의 믿음으로 일어난  것이든, 또는 수혜자에게 어떤 믿음의  근거도  없는데 일어난 사건이든 간에 몇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째로 모든   신유의 사건에는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관심의 촛점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은 여인, 맹인이되어  거지차림을 하고 있는  바디메오, 38년동안 고생한 앉은뱅이, 백부장의 하인,  또는 모든 치유의 사건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의 촛점을 모으고 있습니다.


성경에 쓰여진 신유의 사건들은 그  병이 어떠한 병이냐,  또는 어떻게 해서 그런 병에  걸리게  되었느냐, 또는 어떠한  방법으로 고쳤느냐 하는 것

에  그렇게 중요하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 환자가 그 질병으로 인하여 얼마나  고통당하고 있느냐, 그 질병으로  어떠한 장애를 만나고  있느냐, 또는 어떻게 그 환자를 고통 가운데서 건져내어 생명이 넘치는 풍성한 삶을 살게 할 것이냐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의  신유의 사건들 중 첫번째 공통점은 환자 자신의 고통과  완전한 인간회복, 즉  구원에 관심의 촛점이 맞춰져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성경의 신유의 사건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을  질병의 고통 가운데서 건지실 뿐 아니라  생명이 넘치는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의 권능이나, 경건이나,  믿음이 신유의 사건들을 일으키는 힘이라고  암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는 사건 속에서  사람들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그들의  병을 고치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스가랴선지자의 예언대로 신유의 은사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신유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 가운데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지휘에 따라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서 행하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유를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사역의  하나로 이해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공통점은   성경에 기록된 또하나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손을 사용하여 신유를 베푸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대부분의 신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인간 예수님의 치유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와 달리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치유는 인자의 치유요, 예수님 자신 한 인간으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병고치실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 자신에게는 영광을  돌리지 않은 것은 예수님을  우리곁에  서 있는 한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통점은 사도행전에서도  분명해 집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치유는 전적으로 인간이라는 통로를 거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고칠때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의 치유의 통로가 되고  있으며, 유두고를 살릴 때 바울이 하나님의 치유의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신유의 전과정이 믿음의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모든 신유의 사건,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환자에게 사랑의 관심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그가 선택하고  위임한 사람들을 통하여 고통당하는 환자를  치유하고 넘치는  생명으로  치유하시는 구원의 사건인것입니다. 즉   신유의  사건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일어나는 사건이요, 고통당하는 인간을 회복시키시고  완전케하시는 구원의 사건이시요, 하나님이  선택하고  위임한 하나님의 종들을 사용하여 일으키신 하나님의  목회를  일으키시는 믿음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신유의 은사의 중심은 환자의  확신에 있는 것도  아니요 질병을 고치는 신유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유의  중심은 하나님께서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환자를 사랑하시고 그를 고치시기를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에 있는 것이며, 그  환자를 고쳐 완전한  인간 --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한 인간으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유는 하나님의  사건이요, 하나님의 구원이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 속에  믿음으로 넘치게  만들어 가는  과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즉

신유의 사건 그  자체는 믿음의 사건이요, 믿음의  과정이요, 믿음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인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져 나가는 하나님의   역사의 과정, 그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네번째 영적치유와 전인 회복입니다.

흔히 하나님께서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신유의 은사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적인 병인 죄를 용서하고 영생을 선물로 주신 구원,  소위 영적치유를 구별하여 보는 것은 신유와  영적치유 하나님의 구원의 외형에 너무 지나치게  관심을 모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외형상으로 볼때 신유는 단순히 우리의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치유는 인간의  삶의 구석  구석을 좀먹고  썩게 만드는 죄의 독소를 물리치고 씻어내어  진정한 인간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더깊이 들여다보면 보이는 신유와 영적치유는 이처럼 명백하게 구별할  수 있는  경계선을 찾기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즉 신유와  영적치유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의 양면이요, 영적치유의  한 과정 곧 신유의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문둥병 환자의 치유의 사례를 우선 소개하고자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마가복음 10장  40-45절에서 읽은 문둥병자의  사건을 예를 들어 살펴봅시다.   이 사건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신유의 사건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네가지 입장 가운데 전통적  복음주의 입장에 따른 이 사건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기적적인 신유의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사건의 목적은   단순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입장을 따르면 문둥병으로 고통 당하는 문둥병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든가 문둥병자의  구원등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문둥병자를 고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이 사건은 단순한 신유의 사건이요,  영적인  치유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세번째 입장입니다. 문둥병자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몸의  질병으로 고통당한다고 생각하는  이 문둥병자는


   첫 번째,육체적인 질병 뿐  아니라 총체적인 인간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인간적인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육체적인 결함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이 환자는  문둥병이라는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습니다.

(2) 정신적인 결함입니다.   이 환자는 문둥병으로  말미암아 절망, 분노, 수치, 죄책, 불만, 불안, 공포, 무기력, 부정적 사고 등  정신적,정서적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3) 사회 속에서   그는 사랑의 공동체로부터 강제로 격리되어 문둥병자촌에  수용되어 살고 있으며,  모든 인간의 특권과 정체성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4) 영적인 단절입니다.  이병은 저주의 병입니다. 하나님은 더이상  사랑이나,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저주와 재앙의 하나님이 되고 있습니다.

(5) 복합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 환자에게 가정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관계의 문제 등을 가져다 주었으며, 죄의 삶을 살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게 만들고 있습니다.


   두 번째,예수님의 관심과 치유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이 환자를 치유하고 있느냐? 정서,  정신의치유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을 민망히 여기사  그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문둥병자의 마음과 자기의 마음을  하나로  공감하므로 문둥병자의 상처입은 정서를 치료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사회적 소외의 치유입니다.

예수님은 교제가  금지된 문둥병자를 만나시며 그의  몸에 손을 대시며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게  하므로 소외되었던 문둥병자에게 사회적  환원과 친밀 공동체 회복을 성취시키십니다.


   네 번째, 육체의 치유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므로 문둥병이  그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함을 받게 하십니다.


   다섯 번째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입니다.

문둥병자는 예수님이  문둥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이 있는   자신의 몸에 손을 대시고 말씀으로 그

병을 고쳐주셨을 때  저주의 하나님은 치유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더이상  그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사 그를  고치셨습니다. 이제  그 문둥병자는 하나님께 감격하며  헌신하는 새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섯 번째, 치유와 구원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본  대로  문둥병자의 근본문제가 육체의 병인 것은  사실이나 그의 질병은  육체의  질병에만 머무르지  않고 있습니다. 정신적, 사회적,  영적인  병까지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치료하실  때도 그 문둥병자의 문둥병을 고치는 데만  관심을 집중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의 정신, 정서의 상처를 치료하고 사회적  소외를 극복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도우며,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치유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문둥병의  치유에만 그치지 않고 그가 하나님과의 사이에 사랑의 관계, 감격적인 친밀관계를 회복시켜주는 데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치유는 문둥병의  치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둥병자의 모든 결함을 총체적으로 치유하사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  출발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분명한 한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치유가 단순히 한  인간의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전인적으로 회복시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육체의 치료와 영적인 구원을 구분하는  것은 치유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오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 존재 차원의 연계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폴 틸리히는   인간의 관심사를 예비적 관심과   궁극적 관심으로 구분하여 삶의 차원을 두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예비적인 관심은 우리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필요와 욕구에 대한 관심이며,  궁극적 관심은 인간의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관심입니다.  전자는 육체적인 건강, 정신, 정서적인 건강,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사회적  관념과 정의사회 구현,자연의 보존 등에 관한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 촛점을 맞추고,  후자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그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양자는 서로 배타적이거나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며 양립적입니다. 그 뜻은   예비적인 관심이 보다 효과적인 충족을 보장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틸리히에 따르면 먼저, 인간의 육체적  질병의 치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촉진시키며   그 다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육체의 질병치료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치유는 육체의 질병만 치료하는   의사나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만을 회복하는 제사장이 아니라  육체의 질병과 함께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  까지도 회복할 수 있는  의사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의사  제사장의  완전한 치유자의  모델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중점을  둔 제사장들은 육체의 건강과 질병의  치료에 관심을 가지고 질병의 치료를  담당한 의사는 영적인 관계  회복을 지향할 때에 진정한  치유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브리스터는 상담학자로서 조직신학자인 틸리히와   다른 입장에서 질병의 치료와  영적인 구원의  관계를  논하고  있습니다. 그는   목회상담이 목적인 독특성을 논하면서 일반 상담자들의   질병 그 자체에  치유에 관심을 가진데 비해서 목회  상담자들은 고통당하는  인간에게 관심의 촛점을 모으기 때문에 내담자의 전인 건강과  더불어 영적인 구원이라는 이중의 목표를 가지고 상담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전인 건강이라는 것은  수평적인 삶의 차원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것이며 몸의 건강,   정신,정서의 건강, 건전한 인간   관계, 정의로운 사회 구현, 자연의 보존 등을  통하여 인간의 삶의 전인성을  회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영적구원이라고 브리스터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우리의  모든 삶의 차원을 하나님의 영적 질서 안에서 조화로운  삶을 살게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브리스터의  입장은 틸리히와   다른 용어를 사용할  뿐 실제로 이 두 학자가 주장하는 삶의 차원은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학자들은 한 사람은  조직신학자로서  다른 한 사람은  상담학자로서 그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에  구체적인 설명의 방법이나 사용하는 용어에 차이가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두고 있는 주장은 이 세상에서의 수평적  삶의 차원들과 하나님과의 수직적 삶의 차원에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양자 모두의 치유가 없이는 건강한 인생을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워드  클란벨에서 좀   더 구체적인 삶의  차원들의 연계성을 볼 수 있습니다. 클란벨은 상호   의존적인 삶의 차원을 여섯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그  중에 오차원들은 수평적인 삶의  차원이요 나머지 한 차원은  수직적인 또는 영적인 차원입니다.

1, 정신 정서적 차원, 2, 몸의  차원, 3, 이웃과 관계의 차원,  4, 사회적 삶의 차원, 5,  자연과의  관계의 삶 이 다섯   개의 차원은 수평적 차원의삶이고  6, 하나님과의 관계의 차원은 영적인 차원입니다.


클란벨에 따르면 다섯 차원의 수평적  삶은 상호 연결이  되어있어 하나의 결함은 다른 차원들의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며 한 차원의  치유도 다른 차원이 치유에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클란벨은 수평적인 차원의 삶이  서로 연계되어 있으므로 상담이나 목회는 전인적인 회복을 염두에 두고  상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지만 그가 이처럼  여섯개의 삶의 차원을 이야기 할 때 그 핵심은 영적인 차원에 중심을 둔 인간회복이라는 데 있습니다.

즉 모든 수평적인  삶의 차원들은 영적인 삶의 차원에   연결이 되어 있으며, 모든 수평적인 삶의   차원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하에 놓일 때에

영적인 차원으로 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말로 말하면 실제로 영적인 차원에  속한 제 6의  삶은 존재하지 않으며 수평적인 다섯개의 삶의  차원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에 그것들이 곧 영적인 차원으로 변화된 것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의 영'이란 뜻은 인간의  수평적인 삶의 차원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고리의 역할을 하는 인간의 삶의 차원입니다.


이상에서 우리가 논의하는  것을 요약하면 인간의 모든 삶의 차원으로  상호연계 되어 있기 때문에  (1) 육체의 치유와 영적인 구원을 구별하여 이야기 할  수 없고, (2)  육체의 치유는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우리 영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며  영적인 구원은 우리의   육체의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치료는 저절로 영적인 가치가 생겨나는 것인가?

그리고  영적으로 구원을 받으면  모든 질병이 치유되는 것인가?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대답할 수있습니까?


치료, 구원, 그리고 믿음 모든  치료가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모든 의사들은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 사역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 틸리히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치유를 논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틸리히의  주장은 우리 논의 밖에 있는 일입니다.  신유의 은사는 육체의 질병의 치료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에서 의사의 관심과 비슷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점에서 의사의 관심과 목사의 관심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가 없습니다.


(1) 신유의 은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의사가 병자  앞에서 치료행위를 하는  것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프리스터가  지적한 대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이 환자 앞에 설때에 그 환자는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거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으며 그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웁니다. 즉 신유의  은사는 그 시작에서부터  몸의 질병의 치료와 함께 그 환자를  하나님앞에 서게 만든다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2) 교회 공동체에서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고칩니다. 가끔 약품이나  기름이나 물이나 술을 병행하여  사용할 수 있으나 이 때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안수하며 병을 고칩니다. 이 때에   환자는 자기에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자가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자기에게 임재하신 주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신유의  은사가 주 예수님을 그  환자와 직접 연결시켜주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유는 그 자체가  영적인 행위요, 영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3)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질병을 고치신다는  믿음에 근거 합니다. 즉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 속에 오셔서 병으로  고통하는 환자를 병의  고통속에서 해방시켜 건강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유를 통하여 환자에게 들어오시며 환자의 마음과  정서와 삶을 총체적으로 회복시킬 뿐  아니라 그 환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거나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갖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앞서 언급한  인간존재의 차원의  연계성을 거듭 확인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수평적인 삶의 여러 차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수평적인  삶은 하나님과의 영적 삶의 회복에서 완성되었다는것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수평적인  삶에 관심을 가지고 또 수평적 차원의  삶을 건강하게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 내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불구자를 완전하게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억압과 폭력에서 구원하시며 모든  대적자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지십니다. 이 모든 사건은 하나님 구원의 한 부분입니다.


(2) 모든 수평적인 차원은  그 자체의 건강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회복이라는 두  가지 삶의 차원을 가집니다.  예를 들면, 몸의  건강회 복만으로 몸의 가치가  완성되지  않으며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목적의 가치를  발견하여 영적인 몸이 되었을 때에만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몸이 되었을 때에만 완전한 건강을 회복합니다.


(3) 신유란 몸의 치료에만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건강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우리의 질병을 고치실 때에  그 질병의 치유와 함께 영적인 구원까지  관심을 가지시고 치유합니다.  하나님은 교회공동체를 통하여 환자를 고치시며, 치유된 환자에게 더욱 영적 건강과 몸의 건강을 증진 시키도록 교회에게 위임했습니다.


(4) 신유는  고침받은 자를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계속하여서  신실하게 살수 있을까를 도와주는데 까지 포함이 됩니다. 요약하면,  모든 신유의 과정은 영적인 구원에서   완성되며 영적인 구원은 몸의  치료와 전인 건강을  회복시킬  때에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넘치는  삶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이 모든 치유의 과정을 통하여서 믿음은 환자와  신앙 공동체에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웹사이트에서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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