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장과 절(신성종 교수)


성경에는 다른 책과 달리 장과 절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1214년 전까지는 없었다. 처음 시작은 켄터베리의 대주교인 스테판 랭턴(Stephen Langton)에 의해서이고, 13세기 중엽 위고(Hugo) 추기경에 의해서 구약의 장이 만들어졌다. 절은 그 후 1661년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아티아스(Athias)에 의해서 구별되었다.

따라서 장과 절까지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가끔 괄호 안에 묶여진 구절들이 있고 밑의 주에 보면 고대사본에 없음이라는 말이 나온다. 또 어떤 절은 ‘없음’이라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

무엇 때문인가? 이것을 알려면 성경이 인쇄된 경로를 이해해야 한다. 처음에 흠정역같은 성경이 나와서 사용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원본은 현재 존재하지 않고 사본들만 있다. 그런데 사본 대부분이 파피루스라는 종이에 기록된 것이어서 마모된 부분이 많다. 소위 송아지 가죽이나 양가죽은 비싸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콘스탄틴(콘스탄티누스 대제)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성경을 양피지에 사본하여 두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유명한 바티칸 사본이며 시내산 사본 같은 것들이다.

4세기에 기록된 이런 사본들을 고대사본이라고 부른다. 이것들이 뒤늦게 발견되었기 때문에 흠정역같은 성경을 번역할 때에는 활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발견되면서 고대사본에 없는 것들을 그냥 성경에서 제거하지는 못하고 넣기는 하되 고대사본에는 없음이라는 말을 추가해 인쇄하였던 것이다. 또 어떤 절수는 고대사본에 없기 때문에 뺀 후에 그 다음 절을 앞으로 옮기면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없음이란 말만 붙여놓고 절수는 그대로 유지하는 방법을 취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사본학이란 무엇인가?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에서 이 사본들을 다루는데 가능한 한 원본에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 목적이다. 옛날에는 성경을 손으로 베꼈다. 베끼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먼저 기록된 원본이나 사본을 보고 서기관들이 직접 베껴 기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사람이 불러주고 서기관들이 쓰는 형태였다.

그러므로 사본학에서는 이 두 가지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찾아내 역으로 원본을 찾아내는 일을 한다. 첫 번 째의 경우는 시각적 오류를 찾아내고, 두 번 째 경우는 청각적 오류를 찾아낸다. 원본을 찾는 몇 가지 원리가 있는데 가능한 한 오래된 사본을 따른다. 어려운 구절이 쉬운 구절보다 원본에 가깝고, 긴 것보다는 짧은 것이 원본에 가깝다고 본다. 이런 과정으로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을 만들고 그 후에 각 나라말로 번역하는 것이다.

*. 성경의 영감론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고 우리는 믿고 고백한다. 그러면 성령의 영감이란 무엇인가? 딤후3:16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했고, 벧후 1:21에는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하였다.

따라서 셰익스피어나 바흐가 영감을 받았다는 말과는 전혀 그 뜻이 다른 것이다. 구태여 구별한다면 셰익스피어나 바흐는 자연적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작품 뒤에는 언제나 이런 자연적 영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영감은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 영감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처럼 입김을 불어넣었다는 뜻이다.

영감론에는 크게 네 가지 이론이 있다. 완전 영감론(Plenary Inspiration), 부분 영감론(Partial Inspiration), 축자 영감론(Verbal Inspiration), 유기적 영감론(Organic Inspiration)이 그것이다.

완전 영감론은, 전체적인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부분적인 오류가 있을 수 있어 문제가 있고,
부분 영감론은,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축자 영감론은, 성경의 무오류성을 강조하는 것은 좋으나 성경 저자들의 문체의 차이나 강조점의 차이 같은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네번째 견해인 유기적 영감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보수 교단의 추세이다. 그것은 성경의 무오류성을 강조하면서도 성경 저자들의 특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감론에서 중요한 것은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것이 원본을 말하는 것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사본을 믿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원본과 사본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차이점이 있는가? 물론 지금 우리들에게는 원본이 없고 사본들뿐이다. 그런데 사본학을 연구해보면 그 차이점이란 예수를 그리스도 예수라고 표현하는 식의 차이점이 대부분이고, 지금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괄호 안에 몇 구절이 들어가 있는 정도로 아주 미미하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본들을 그대로 믿어도 좋다. 물론 사본학자들에게는 단 한 구절이라도 원본에 가까이 가려고 하기 때문에 점 하나가 문제될 수 있으나, 교리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원본과 사본의 차이는 학자들에게는 계속적인 연구가 필요하지만 일반 성도들은 지금 있는 성경을 원본이라고 믿어도 좋다.

*. 성경과 과학의 관계
역사를 보면 가끔 성경과 과학이 서로 상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과연 성경은 과학적으로 모순이 있는가를 살피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때때로 현상학적인 언어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말이 나오는데 과학적으로 보면 틀린 말이다. 우리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과학적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른다고 표현했을 때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해군의 달력에도 몇 시에 태양이 뜨고 몇 시에 태양이 진다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군의 달력의 기록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더구나 성경은 과학교과서가 아니다. 따라서 이런 현상학적 표현을 과학적으로 모순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점은 우리의 선입관이 우리의 결론을 결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무신론자들은 이적은 불가능하다고 연역적으로(a priori) 결론짓는다. 과학과 성경간의 모순도 다 이런 사고에서 생기는 것이다.

두번째 문제는 성경에 있는 숫자적 차이점이다. 어떤 것은 사본할 때 생기기도 하고 최근에는 고고학적 발굴에서 연대적 모순이 생기기도 한다.예를 들어서 어떤 왕이 통치하다가 죽고 다른 왕이 들어섰을 때 어림셈으로 계산하는 경우가 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실 우리가 성경의 영감을 믿는다고 해서 역사적 자료와 모순이 되는 문제들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오늘의 고고학적 발굴이 성경의 사실을 확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고고학을 통해서 성경을 증명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 것은 그것이 과학적 사실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배울 때 고고학이나 과학에 의존해서 따지고 연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학자의 하나님이나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께서 역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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