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주요내용정리[27권,260장]

 

 

신약 성경 맥 잡기 [27권,260장]


이창국 목사(순신원 교수)

 

1. 신약성서 (New Testament)는 어떤 책인가?

 

A. New Covenant: 남 유다가 멸망할 때 예레미야의 예언--이것이 나와 내 백성 사이의 계약의 마지막이 아니다. 언젠가 나의 백성과 새 계약을 맺겠다. (예 31:31-33).

이 구절이 반영된 신약 구절들: 고후 3:6; 갈 4:24-26
고후 3:6이하에서 바울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조하면서 출 34: 29-32을 강해
바리새인이었던 바울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던 모세) vs. 새언약의 직분을 받은 바울

교회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과의 계약을 갱신했다 혹은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고 처음부터 믿었음. 기독교인들은 새 계약이 옛 계약을 대체했다고 믿었지만 (히 8:6; 9:15; 12:24),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옛 계약의 책인 히브리인들의 경전을 던져버리지 않고, 자신들의 경전의 일부로 계속해서 읽었다. Heb 8:6 참조


B. 신약성경은 어떻게 기록되었는가? (기록)


--예수는 그의 생전에 자신의 가르침을 직접 기록하지 않았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종말이 곧 다가올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고전 16:22, “마라나타”),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하려고 처음부터 노력하지 않았음.

서신: 그러던 중, 가장 먼저 등장한 것들은 편지들 (그 중에서도 바울서신들).
왜냐하면, 바울은 순회하는 전도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설립한 교회들에 문제가 생기거나, 급히 가르침이 필요할 때마다 편지를 써서 보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의 편지가 그 당시 자신이 가르치던 가르침들을 모두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 닥친 문제들을 중심으로 가르침 (가르침의 어떤 한 측면들에 국한)

60년 중반부터 1 세대 기독교인들이 죽기 시작. 그들의 가르침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시작.

복음서: 가장 먼저 씌여진 것은 마가복음(마가 복음 우선설). 대체로 60년대, 혹은 70년대에 기록된 것으로 추측.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그보다 10-20년 이후로, 요한복음은 90-100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측.
-- 복음서들도 기록될 당시, 예수가 가르친 모든 가르침을 다 기록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임. 각각 나름대로의 관심사에 따라서 당시에 존재하던 예수에 대한 전승들 중에 취사선택하여 복음서를 작성.


-- 복음서의 정의

 

사도행전: 누가의 신학 (누가 복음 기록 목적 참조)
행 1:8이 전체 구조와 주제를 설명.
행 1:6-11은 주의 재림의 날이 언제인지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바 없으며, 전도를 통한 기독교의 확장이 하늘만을 쳐다보면서 재림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중요함을 강조. 이것은 당시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재림에서 돌려, 이제 예수의 영, 혹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계속 발전하고 퍼져나가는 것에 주목한 것을 보여줌.

공동 서신: 특정 수신자를 지칭하지 않는 흩어져 있는 교회에 보내는 서신. 실천적 삶의 지혜를 담고 있는 서신 (ex. 야고보서)

요한계시록: 원래 유대교에 이미 묵시문학 장르가 존재. 유대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던 기독교인이 이 장르를 이용한 것. 묵시문학은 박해라는 상황에서 등장. 저자는 땅위에서 일어나는 일과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함께 설명. 이렇게 함으로 독자에게 땅위에 일어나는 박해와 같은 일들이 하나님의 통제 안에 일어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승리할 것임을 알려주어, 성도들이 박해를 견디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줌.

 

2. 마 가 복 음

 

A. 마가 복음 우선설 (cf. 마태 우선설)


1) 마태,누가가 마가를 참고 인용하여 자신들이 더하여 길게 쓰게된 이유는 쉽게 이해가되나 그 반대는 그렇지가 않다. ex) 산상수훈 cf. 미미하거나 의미없는 부분을 덧 붙임.
2) 마태, 마가, 누가의 자료 순서. 눅//막, but 마태는 7번 변경.
3) 마태와 누가는 마가의 세련되지 못한 문체를 다듬거나 혹은 군더더기나 잘 쓰여지지 않는 단어등을 자주 삭제하거나 고치고 있음이 목격.


B. 마가복음의 구조


마가복음은 예수의 수난을 기준으로 해서 1부와 2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수의 수난에 관한 이야기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마가복음은 “긴 서문을 단 수난사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1부: 예수의 갈릴리 사역
1:1-3:6 세례요한의 소개, 사역의 첫째 날, 가버나움에서의 논쟁
3:7-6:6 열두 제자의 선발과 비유와 능력행함을 통한 훈련
6:7-8:26 열두 제자의 파송, 5000명 먹이심, 물위를 걸으심, 논쟁, 4000명 먹이심,
예수에 대한 오해

2부: 수난 예고와 예루살렘에서의 죽음, 부활
8:27-10:52 세 번의 수난예고, 베드로의 고백, 산상변화, 예수의 가르침들
11:1-13:37 예루살렘에서의 사역 (성전소란사건, 종말에 관한 예고)
14:1-16:8 기름부음을 받음, 최후의 만찬, 수난, 십자가, 매장, 빈무덤
16:9-20 후기 (부활한 예수의 나타나심들)


C. 주요 내용 분석


* 세례요한의 등장과 선포 (1:1-8)
1:3의 역사적 배경: 사 40:3의 인용. 이 구절은 4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고 이것은 이 구절이 당시 교회 안에서 상당히 중요한 구절이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길을 예비하고 길을 평탄하게 하는 것은 누가 오는 것을 위한 것이며 누가 길을 닦아야 하는 것일까?
원래 이사야 40:1-4의 역사적 배경: 이것은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구절이다. 이것은 성전의 파괴와 그 결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나신 사건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교회는 후에 달리 해석:
길을 평탄하게 하라는 “소리”를 세례요한으로 보고, 오실 분을 예수 그리스도로 봄.

1:4 “회개의 세례”: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출 32:13-14에 근거해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됨의 의미를 과신했다. 그들은 메시야가 왔을 때에 이방인들이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자신들은 구원의 대상이 된다고 봄. 그런 유대인들을 향해서 회개하라는 요구는 매우 역설적인 것이었다.

-- 그가 광야에서 이 회개의 운동을 한 것은 조상들의 첫 가나안 땅 입성을 모방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구성되어 새롭게 가나안 입성(메시야의 통치에 들어감)을 준비하려 함.

-- 세례요한의 준비에서 나타나듯이 예수의 사역의 목적은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내
어, 종말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기에는 새로운 하나님의 “선택”과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있었으며, 예수가 이룬 이 종말의 공동체는 곧 교회.

* 광야에서의 시험 (1:12-13) - * 갈릴리 전도의 시작 (1:14-20)

* 예수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1:21-28)
마가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가 귀신을 쫓아낸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의 사역을 소개.

-- 마가복음에서는 유독 예수가 병과 신체적 불구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는 일들을 한 것들이 집중적으로 소개. 예수의 선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 담당. 마가복음에서 이런 귀신을 쫓는 이적 이야기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함께 긴밀하게 연결.

--이적을 행한 기본적인 목적은 예수께서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이 땅위에서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기(demonstrate) 위한 것이었다. 마가복음에서는 특히 축사의 이적기사와 예수의 선포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 예수의 비밀명령 (1:34)
예수는 귀신들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금하셨다.
1) 예수가 메시야 였다.
2) 사람들은 몰랐으나, 초인간적인 감지능력을 갖고 있던 자들을 모두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 또 가까이에서 예수를 모신 제자들은 그것을 알고 고백했다.

* 마가의 샌드위치 기법 1 (3:20-21/3:22-30/3:31-35)

1) 먼저 예수의 친족이 찾아옴. 그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말을 듣고 예수를 데리러 옴
2) 마가는 서기관들이 예수가 “바알세불이지폈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주장. 예수의 반박. 예수는 이것을 “성령을 훼방하는 죄”로 규정. 왜냐하면, 예수가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사역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사탄의 일로 규정하므로.
3) 다시 예수의 가족이 찾아온 이야기로 돌아감.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예수에 대한 오해가 어느 정도 심각했는지 그의 가족조차도 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빠졌음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샌드위치 기법.

* 마가의 샌드위치 기법 2 (5:21-24/5:25-34/5:35-43)

1) 5:21-24, 회당장 야이로가 딸을 구해줄 것을 청함
2) 5:25-34, 혈류증 앓는 여자를 고쳐주심.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심.
3) 5:35-43, 딸이 죽었다고 말하나 예수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심.

이것은 예수의 이적이 인간의 반응없이 기계적으로 수행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예수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은혜로 주어짐을 보여주기 위해 이 두 이야기를 샌드위치로 만듬.

* 예수가 고향에서 배척당함 (6:1-6)

* 마가의 샌드위치 기법 3 (6:7-13/6:14-29/6:30-32)

1) 6:7-13, 열두 제자의 파견 이것은 복음을 위해 파송당한 제자들의
2) 6:14-29, 세례요한을 헤롯이 죽임 장래의 운명이 세례요한의 운명과
3) 6:30-33, 파견된 제자들이 돌아옴 다름이 없을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

* 5000명을 먹이심과 물위를 걸으심 (6:34-52)

--출애굽 때 광야에서 만나로 이스라엘을 먹이신 것과 홍해를 걸어서 건너게 한 것을 연상.예수를 “양식 주시는 분”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이것은 곧 그가 하나님의 대행자임을 보여 줌.

* 정결법에 대한 논쟁 (7:1-23): 유대교와 기독교의 극명한 차이점

* 벳새다에서 소경을 고치심 (8:22-26)

* 베드로의 고백과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8:27-9:1)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은 큰 발전이었으나, 제자들은 아직 예수를 수난의 메시야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유대교 안에서 수난당하여 죽음을 당하는 메시야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가 처음으로 자신의 수난을 예고했을 때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꾸짖은” 이유이다 (막 8:32). 베드로의 주장을 사탄의 뜻과 동일시.

*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11:1-11)
예수가 환영받은 것은 “다윗의 나라”를 회복할 정치적인 메시야로서 환영받았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대중들은 예수가 어떤 종류의 메시야인지 오해하고 있었다.

* 마가의 샌드위치 기법 4 (11:12-14/11:15-19/11:20-25)

* 마가의 샌드위치 기법 5 (14:1-2/14:3-9/14:10-11)
1) 14:1-2,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잡을 궁리를 함.
2) 14:3-9, 어떤 여자가 예수에게 향유를 부음
3) 14:10-11, 유다가 배반을 약속함.
예수의 죽음과 장사를 예시하면서, 이것이 그의 제자의 배반과 연결해서 설명하려는 시도.

* 제자들과 한 청년의 도망 (14:50-51)
* 빌라도의 심문 (15:1-20)
예수가 빌라도의 심문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하심.

*처형, 죽음, 매장 (15:20-47)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이 생전에 예수가 주장한 모든 것이 옳다고 인정하여 주신 것 (vindication).

* 부활 (16:1-8)
여자들은 증거의 능력이 없으므로 증인이 되지못함에도 불구하고 마가가 여자를 증인으로 삼은것은 곧 성경의 역사적 신실성을 증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누가복음

 

A. 누가복음 기록 목적
누가가 어떤 상황속에서 어떤 필요를 충족시키려고, 어떤 목적으로 복음서를 썼는가? 그 청중은 어떤 사람들인가?
i) 예수의 재림이 늦어짐에 따라, 승귀한 그리스도가 교회와 함께 하고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썼다.

ii)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명하기 위해 썼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획에 따라 승귀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잘 이끌어 감을 강조함. (이방인, 보편 주의)

그래서

a) 누가 복음에 성령에 대한 강조가 나타난다.
다른 복음서보다 성령에 대한 강조가 강하다. 예수의 사역이 성령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사도행전에 특히 더 그렇다). 예수 스스로가 성령을 힘입은 자로 그의 사도들도 예수의 일을 계속하는 것으로 그린다. 성령은 예수의 alter ego 로서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보여준다.
b) 현재에 완성된 구원의 강조가 나타난다.
구원이 현재에 완성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오늘”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2:11; 4:21; 5:26; 13:32-33; 19:5-9; 19:42; 23:42-43) 구약의 약속이 현재적으로 성취됨이 강조되고 있다.
c) 예루살렘이 구원사의 중심으로 나타남. (cf. 행 1:8 => 이방 선교)
i) 사도행전에서도 예루살렘 교회가 구원사의 중심으로 나타난다.
ii) 심지어 바울도 예루살렘교회에 종속되어 선교여행후 반드시 그곳으로 돌아왔음을 보임.
iii) 사도행전 뒷부분은 로마를 향한 끊임없는 바울의 여행기록으로 되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예루살렘이 중심이다.
iv) 선교 목적지인 로마보다 예루살렘이 더 중요한 것은 구원사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4. 요한 복음

 

A. 공관 복음서와의 차이점

관점의 차이: 공관 복음(특히 마가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갈릴리 선교를 시작하여 11:1에 이르기 까지 예루살렘에 가지도 않으시며 불과 일주일후에 십자가 죽임을 당하신다. 반면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선교를 시작하며 갈릴리보다는 이 지역에서 시간을 보내신다. 적어도 세 번 예루살렘을 방문 (2:13, 5:1, 7:10): 사역기간도 2-3년.
-- 1:1 (Jesus = God)
--공관 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의 의미에 대해서 공개적인 선언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에 초점을 두고 있다. 반면 요한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한 주장을 거듭 밝힌다. ex. I am ... "나는 ...이다” 6:35, 8:12, 10:9, 10:11, 11:25, 14:6, 15:1 cf. 8;24, 28, 58; 13:19; 18:5). 이는 출 3:14의 야훼 하나님의 어투와 비슷하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성 모독으로 돌에 맞아 죽을 죄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8:58-59).


B. 요한 복음서에 나타난 유대인들


C. 복음서의 결론 (20:30-31): 집필의 목적
D. 7개의 표적들

2:1-12:50에서 요한은 일곱개의 예수의 이적들을 서술한다.
1) 물을 포도주로 (2:1-11)

2) 왕의 신하의 아들고침 (4:46-50)

3) 베데스다 연못 (5:1-15)

4) 오천명 먹임 (6:1-15)

5) 물위 걸음 (6:16-21)

6) 소경보게 함 (9:5)

7) 나사로 부활 (11장)
마지막 표적--예수는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는데, 그가 주는 생명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주어짐이 나타남.

*** 이 이적들은 윗 세상의 것을 아래 세상에 예시해 주는 것으로 이적(표적)이다. 이 이적들에 대해 유대인들의 오해가 일어난다. 이들은 아래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윗 세상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한 바를 아랫 세상의 관점으로 해석을 하고 판단을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늘 오해한다. 예수는 긴 강론으로 자신이 일으킨 사건들이 아래 세상의 현상이지만, 윗 세상의 어떠한 진리를 표시하는 이적인지를 해설한다. 예수는 생명 혹은 영생을 예시하여 준다. 이런 이적은 그러므로 표적(semeia)이다.

 

5. 로마서


(기록 목적)

로마서는 바울 서신 연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리 연구에 있어서도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주 중요한 서신으로 자리매김하여 오고 있다. 이렇듯 중요한 기독교 교리를 담고 있는 서신인 로마서는 바울이 개척하지도 않았고 왕래도 거의 없었던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보내어진 서신임을 고려할 때 특이하다고 할 수가 있다. 자신이 개척하지도 않은 교회의 교인들에게 16장에 걸친 장문의 서신을 쓰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교인들에게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주제를 담고 있는 교리 서신을 쓰고 있는 것이 특이한 일이다. 자신과는 별다른 유대 관계가 없는 생면 부지의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바울은 일반적인 안부와 자신을 소개하는 정도로 서신을 기록했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인데도, 왜 바울은 자신이 개척하지도 않은 로마 교회에 중요한 기독교 교리를 담고 있는 서신을 써야 했었을까?
로마서의 기록 동기에 대해서 바울은 15:19-24에서 피력하고 있는데 그 주된 내용은 이제까지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통하여 지중해 동부에서의 선교를 마치고 당시의 로마 사회에서 세상의 끝으로 알려진 지중해 서부--서바나(스페인)--선교를 앞두고 자신의 복음을 소개하여 로마 교회의 도움과 지원을 얻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서바나로 가는 길에 로마에 들러서 교회를 방문하여 친교도 나누고 선교 후원도 받기 위하여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가 있다. 이제까지 바울은 안디옥 교회로부터 후원을 받아 동부에서의 선교를 하여 왔으나 이제는 제국 서부에로의 선교를 시작하려는 중대한 전환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바나 선교를 위해서 로마 교회의 후원을 염두에 두고서 서신을 써야 하였다면 로마서는 바울 자신에 대한 소개와 서바나 선교의 필연성을 역설할 것이지 왜 신학적 논쟁으로 일관하고 있나에 대한 설명으로서 선교 후원의 동기는 미약해 보인다. 로마서를 기록한 이유나 동기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상이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말미암는다고 할 수가 있다. 학자들의 견해는 로마서의 기록 목적은 15장에 기록된 기록 목적을 넘어서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연관이 있다고 하는 데에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로마 교회는 언제 어떻게 세워졌으며, 어떠한 역사적 상황에 있었으며, 그리고 바울과는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에 대해 학자들의 관심이 쏠려 있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과 연관하여서, 로마서 기록 동기에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 사도행전에서 발견되고 있다 (행 2:5-42; 18:1-3).

 

A. 클로디우스 황제의 추방령과 로마 교회
바울은 직접 로마 교회를 세우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어떤 사도나 선교사에 의하여 로마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사도행전을 근거로 추측은 해볼 수가 있는데, 복음은 아마도 유대인들 사이에 가장 먼저 들어가서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구성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누가의 기록인 사도행전 2장은 로마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오순절 마가 다락방 사건을 목도(2:10)하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2:14-40)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2:41-42)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회심하여 로마로 돌아가서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유력한 견해이다.
행 18:1-3에 따르면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에 로마에서 온 성도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났는데, 이때가 A.D. 50년 경으로 본다면 로마 교회는 50년 훨씬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고린도에 오게된 이유를 누가는 클로디우스(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행 18:2), 당시의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클로디우스 황제가 A.D. 49년에 칙령을 내려 로마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시켰다고 한다. 클로디우스 황제의 칙령은 로마서 기록 동기를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1세기 로마에는 약 4-5만 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클로디우스 황제가 이러한 대규모의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시켰다는 것은 상당히 중대한 사건에 속한다. 이것이 중대한 사건임은 오늘날 미국에 사는 유대인들의 경우에서 유추해 볼 수가 있다. 현재 미국 인구의 1% 정도가 유대인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1%의 유대인들이 미국 정치, 경제, 사회 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시의 로마 인구가 얼마나 되는 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100만이라고 한다면 인구의 약 5% 정도가 유대인이라는 계산이다. 50만이라고 한다면 10%대에 육박하는 수치이다. 이 정도의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살고 있었다면 유대인들이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쳤는 지는 알 수가 없겠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할 수가 있다. 당시 유대 상인들과 그리스 상인들이 로마 제국내에서 상당한 규모의 상권을 형성하였고 이 두 집단이 경쟁 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 오는 사실이다. 오늘날 미국의 유대인들이 전체 인구의 단 1%만 되어도 경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볼때, 당시 도시 전체 인구의 5-10%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전 유대인들을 하루 아침에 로마에서 추방시킨다는 것은 로마 황제의 편에서는 상당한 결단을 요구했던 중대한 사건이었음이 확실해진다. 클로디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내려진 유대인 추방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로마 도시 사회에 끼쳤음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경제적 힘이 상당하였다는 것은 클로디우스 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네로 황제가 추방된 유대인들이 불과 5년만(A.D. 54)에 로마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는 사실로 입증이 가능해진다.
이렇듯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을 유대인 추방을 가져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역사가인 수에토니우스(Suetonius)가 저술한 <클로디우스 황제의 생애 (Life of Claudius)> 25장 4절에 따르면 클로디우스 황제가 크레스투스(Chrestus)라는 사람에 의해 유대인 사이에서 야기된 상습적인 소요사태로 인하여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였다고 한다 (Claudius expelled Jews from Rome because of their constant disturbances impelled by Chrestus.). 여기서 크레스투스는 누구를 가르키고 있을까? 크레스투스(Chrestus)는 크리스투스(Christus)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 이유는 1세기에 헬라어에서는 ‘에(e)’와 ‘이(i)’를 거의 동일하게 발음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당시 로마 유대인 사회에서 그만한 분쟁을 이끌 역사적 인물을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다면 클로디우스 황제는 로마 유대인 사이에서 그리스도로 야기된 소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유대인들을 로마 도시밖으로 추방한 것이 된다. 황제의 추방령은 49년에 있었는데, 이것은 49년 이전에 이미 로마에서 복음의 증거가 활발히 진행되어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 회당에서 충돌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행 18:1-2).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고 주장하였을 것이고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들은 이를 극렬히 반대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소요가 상습적으로 끊임없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당시 로마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수의 유대 그리스도인으로는 황제의 추방령을 이끌 정도의 대규모 소요사태를 야기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기 7-10여년 전에 로마 황제가 4-5만의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할 정도라면 로마 교회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추측이 가능하다.


B. 클로디우스 황제의 추방령과 로마서
클로디우스 황제의 추방령은 로마서를 기록하는 바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유대인 추방령은 가장 먼저 로마 교회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가 있다. 로마 교회는 마가 다락방 사건을 목도하고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돌아온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세워졌지만 시간이 갈수록 유대인보다는 더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나아 온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는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들이 유대식 이름들(아굴라, 브리스가, 안드로니고, 유니아, 헤로디온등)이 있는 가 하면 많은 이방인들의 이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증거들에 의하면 49년 당시의 로마교회는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혼합 교회임을 알 수가 있다. 로마서의 곳곳에 나오는 이방인에 대한 언급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 (1:5, 13; 11:13, 23-24, 28, 31; 15:7-9).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로마 교회는 클로디우스 황제의 추방령으로 중대한 전기를 맞은 것으로 보여진다. 추방된 유대인들 중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포함되었어야 하기 때문이다 (cf. 브리스 길라, 아굴라: 행 18:1-2).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추방된 유대인들이 54년의 클로디우스 황제의 사망과 네로 황제의 등극으로 인하여 다시 귀환하였다. 하지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돌아 왔다 하더라도, 5년간의 공백 기간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 교회의 주도권을 넘겨 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따라서 교회내에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귀환한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서신에 심화된 양자사이의 갈등에 대한 화해의 시도가 여러곳에서 나타나고 있음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1:18-4:25; 9-11장, 11:18-21, 28-30; 14-15장, 15:8-13, 18; 16:17-18등).
이상의 정황들은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염두에 두었을 사항들이다. 로마서의 기록 목적과 연관하여 고려하여야 할 중대한 사안은 추방되었을 당시에 추방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이 개척한 여러 교회들의 교인들과 접촉하였으리라는 가능성이다. 바울의 교회와 직접적 접촉을 갖고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고 로마 제국내 각지로 흩어져야 하였기 때문에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을 통하여 바울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들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로 귀환한 이들이 바울에 대한 나쁜 소문들도 듣고 돌아갔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의 다른 서신들을 보면 여러 곳에서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과 암시들이 나오고 있고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의 교회에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를 기록하는 시점까지도 바울은 갈라디아, 고린도등의 지역에서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의 방해와 또한 회심자들의 잘못된 이해와 오류에 직면하고 있었다. 로마서 3:8에도 바울을 대적하는 자에 대한 암시가 나타나고 있다.

C. 유대인 추방령과 로마서 기록 목적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중에 자신의 복음에 동의하는 자도 있었겠지만 동의하지 않는 자도 있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방인 선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자신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가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고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신의 복음의 본질에 대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확신을 심어 줄 필요가 있었다. 마찬 가지로 곧 방문할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앞에서도 자신과 복음을 변호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로마서는 바울의 복음을 변호하고 변증하는 성격을 띠고 있는 서신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자신의 복음과 입장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로마에 있는 비방자들의 공격과 비방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가 있다. 특히 서바나 선교를 앞두고 로마 교회의 후원을 얻고자 하는 바울이라면 비방자들에게 자신의 복음을 반증하고 변호해야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에서 우리는 왜 로마서가 기독교의 진수를 담고 있는 교리서신이며 로마서의 기록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

 

6. 고린도 전서

 

A. 고린도 (역사와 도시)

-- 항구도시 (헬라 본토와 펠라폰네소스를 연결). 서(2km 지점에 레헤움 항구), 동(7km 지점에 겐그레아 항구, 롬 16:1). 남북으로는 육로, 동서로는 해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군사적으로 상업적으로 번창
--B.C. 146년에 폐허(시민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감)
--B.C. 44년에 줄리어스 시이져가 로마의 식민지로서 새로 건설.
--B.C. 27년에 로마 총독이 부임함으로써 아가야 지역의 행정 수도가 됨.
-- 행정 수도가 됨으로써 다시 국제적인 상업 도시로 번성.
: 다양한 헬라종교들이 공존하였고,
: 약 3만의 유대인들이 이곳에 거주: 49년의 Claudius황제의 칙령.
-- 당시 고린도에는 12개 이상의 신전이 존재.
: 사랑의 여신을 섬기는 아프로디테 신전 (1000여명의 종교적인 창녀)
: 사회적 종교적 환경이 고린도를 방탕하고 부패하고 만들었고
(Corinthiazo란 풍자적인 신종어)


B. 고린도 교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로마에서 고린도로 이주 (행 18장 참조).
--바울 18개월 머물며 교회를 개척(예외적).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행 18:5). --성공적 교회 확장중 유대인과의 충돌로 52년 쯤 아굴라 부부와 에베소를 거쳐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떠나고 아볼로가 후임으로 사역 (행 18:27-28).
--아볼로가 유대인과의 변론에서 이김.


C. 고린도 교회의 구성

-- 1:26 (상류층) vs. 1:27-28 (하류층)
--구성원의 대부분이 하층 노예 출신 이방인(1:26-29).
--계층간의 갈등과 위화감이 조성되어 있었음 (10:27; 11:17-34). 성만찬시
-- 교회의 지도자의 이름을 내세워 파당 (1:11, 12).
--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여러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
: 교회내에 계층간, 파벌간 갈등을 늘 안고 있었다.


D. 고린도 교회의 문제

--다양한 구성원의 상황(이원론적 영향, 이교 사회의 혼합주의)은 교회내에 많은 문제점을 야기: 성도덕의 문란, 우상 숭배, 지혜와 지식 자랑, 윤리등.

--대표적인 문제는 성령 열광 주의자들(pneumatic enthusiasm)에 의한 자유 방종주의(5-6장)와 극단적 금욕주의(7장): 성령의 은사를 구원받은 증거로 생각하여 지나친 열광주의에 빠지게 되었고 양 극단의 상황으로 나타남.

-- 분파 문제
아볼로파: 철학과 수사학을 숭상하는 문화의 영향으로 성경 해석의 능력과 수사적 기술을 가진 아볼로에 상당한 호감을 갖게 되어 따르게 됨 (행 18).
-- 부활 문제: 이원론적 사상의 배경에서 ‘육신의 부활’은 이해 불가.
:자신들의 영혼은 이미 구원받은 존재이기에 부활은 불필요없다고 봄.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영적으로 부활하였다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다(4:8).
-- 은사 문제: 따라서 그들은 미래의 부할보다는 현재 자신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에 관심을 갖게 됨. 경쟁과 질시와 교만과 상호 무시의 분위기 형성.


E.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관계
1) 50/51-52년동안, 행 18:1-3의 기록에 따르면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천막업에 종사하면서 교회를 개척.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켜 proconsul로 있던 갈리오에게 끌고감. 바울은 풀려나고 소스데네는 태형을 당함 (행 18:12-17).

2) 52-56년. 바울이 52년에 고린도를 떠난 뒤에 다른 선교사들이 고린도에 도착.
3) 고전 5:9에서 바울이 언급하는 편지(현재 남아 있지 않음)를 바울이 보냄. 음행하는 자들에 대해 경고함.

4) 56년경 바울이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글로에의 집안 사람들을 통해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들음(고전 1:11; 11:18).

5) 거의 동시에(혹은 약간 뒤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편지를 받음(고전 7:1). 이 편지는 아마도 바울이 먼저 보낸 편지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답장으로 보임.

6)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 전서를 써서 보냄.


7. 고린도 후서

 

A.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 (고린도 전서에서는 1-6번, 연결해서 계속되는 것)

1. 교회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이 고린도 전서를 썼고 고린도 전서를 쓸 당시에 바울은 오순절 까지 에베소에 머물러 있다가 마케도니아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하고 나서 고린도로 와서 겨울을 나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고전 16:5-9). 디모데가 고린도 전서를 전달하기 위해서 고린도로 들어 갔다.

2. 바울이 고린도 전서를 보낸 뒤, 56/57년 초에 디모데가 고린도에 옴 (행 19:21-22; 고전 4:17-19; 16:10-11).

3. 고린도 지역에 위기 상황이 발생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심각한 신학적 문제가 발생하였음을 듣게 된다 (아마도 디모데로부터). 문제의 발단은 고후 11:13-15에 기술되어 있듯이 자신들을 사도라고 지칭하는 외부로부터의 대적자(침입자)들이 들어 와서 바울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10:10
--11:12 (교회로부터 지지를 받기위해 사도권을 자랑)
이 거짓 사도들은 유대적 배경을 가진 자들이 었다.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와 연관이 있는 자들이 아닌가? 추측됨. 11:22하에서 그들은 유대 배경을 자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헬라파 유대인 이라기 보다는 예루살렘 (유대파) 유대인에 더 가까움.
--바울의 대적자들은 Jews, Jerusalem Jews, Judaising Jews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세력을 등에 업고 바울의 사도직에 도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cf.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성

--여기서 바울이 공격을 당한 빌미를 제공한 단초가 하나 있다. 고전 16:1-2
당시의 로마 사회에서 유사 이단 종교 단체들이 이러한 헌금 강요를 통하여 착취하고 있었다. 대적자들이 이런 문제를 들고 나와서 사도권 침해.

4. 상황이 심각한 것을 알게 된 디모데가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로 감.

5. Painful Visit: 디모데의 소식을 들은 바울이 긴급상황이므로 원래의 여행계획을 취소하고 (원래의 여행계획은 고전 16:5-7), 에베소에서 뱃길로 직접 고린도로 감. 이 방문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하였고 심한 상처를 입었다. (고후 2:5; 7:12; 12:21), 이에 따라 바울은 매우 짧은 기간 동안 고린도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잠시 냉정을 찾기 위해 마케도니아로 갔고, 다시 고린도로 돌아오지 않고, 마케도니아 방문 후에는 다시 바로 에베소로 돌아감.

9) 눈물의 편지: 고통의 방문에서 에베소로 돌아온 바울은 다시 고린도를 방문하는 대신 그의 고통스러운 경험(“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painful visit, 그 구체적인 내용이 1:23-2:4에 나옴)에 대해 언급하는 편지를 에베소에서 써서 디도를 시켜 고린도로 보냄. 이것이 “눈물의 편지”(2:4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 눈물의 편지는 현재 남아 있지 않음. 이 편지는 디도에 의해서 전달 (고후 7:6-7). 디모데 보다는 디도가 강인한 성격을 가져서 이러한 편지를 전달하는데 적격자였기 때문이다.

10)디도가 돌아오지 않자 바울은 마케도니야로 건너가서 디도를 기다리다 57년 가을 경에 그를 만남(2:12). 디도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해줌 (7:6-7).
--눈물의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로 돌아옴.
--디도는 고린도 교회의 위기가 해소되었다고 보고함(고후 7:5-16에 바울이 언급)
--연보 문제도 해결: (고후 2:14-6:13; 7:2-3) 7:2 참조

11) 마케도니아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문제가 잠잠해 진 후에 쓴 네 번째 편지가 바로 이 고린도 후서. 1:3-4에서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서신을 시작해서 13:11-13의 축도로 마침. 이 편지를 디도가 갖고 다시 고린도로 감.

12) 바울이 고린도에 감 (고후 12:14; 13:1-2). 57/58년 겨울을 고린도에서 보냄. 여기에서 로마서를 씀.

고린도 전서에서는 교회 내부에서 대적자들이 바울을 대적하였고 고린도 후서에서는 교회 외부에서 침입한 자들이 바울을 훼방하였다. 고린도 교회에서 당한 바울의 고통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실패하였다면 바울의 이방인 선교 사역 전체가 무너질 수가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바울과 함께 하였다. 그의 복음은 로마 제국을 거쳐서 지금 우리의 손에 전하여 져 왔고 우리의 손을 통하여서 세계로 전하여 지고 있다.


8. 갈라디아서


(교리 서신, Why?)

A. 바울의 사도권 논쟁
1:1에서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갈라디아 교회들 안에서 누군가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의심하면서,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사람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바울이 그것을 편지의 서두에서 미리 반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누구로 부터 (source), 누구를 통해서 (agent) 바울이 사도가 되었다고 주장하였을까? 그들은 아마도 바울에게 사도권을 준 사람들 (그를 안수하여 이방 선교사로 파송한 사람들)은 안디옥 교회의 당시 지도자들(행 13:1-3)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사도가 되도록 중간에서 중개한 바나바 (행 9:27)와 같은 인물이 있음으로써 그의 반대자들의 눈에는 바울이 인간을 통해서 인간에 의해서 사도로 세움을 받았다고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바울이 1:17 이하 자신이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을 통해서, 예루살렘교회로 부터 사도로 임명되었다고 주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B. 바울의 적대자들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 교회들(“갈라디아 여러 교회들”, 갈 1:2)을 세우고 나서 그 교회들을 떠난 뒤, 일단의 기독교인들(복수,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이 이 지역의 교회들에 나타났다. 이들은 할례를 주장하는(6:12) 유대주의자들(Judaizers)로서, 이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복음”(1:7)을 전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었으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이었지만, 이들은 여전히 이방인들이 구원받으려면 할례를 받아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5:2,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5:3) 유대인이 먼저 되고,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다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이 선포하는 복음은 “믿음”만을 통한 구원이 아니라, 할례와 율법준수(“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4:10)를 전제로 하는 구원이었다. 이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동기는 “박해를 면하려는 것”(6:12)이었다 (당시 유대인회당에서 기독교인들이 박해받음. 바울도 고후 11:24에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다섯 번” 맞았음). 이들은 갈라디아교회의 설립자인 바울과 그 교인들의 사이를 떼어 놓으려고 했고(4:17), 심지어, 이들은 바울도 할례를 인정한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보인다(5:11).

바울의 적대자들의 출신 지역은 아마도 예루살렘교회인 것 같다. 바울이 두 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해서(2:1), “유명한 자들”(2:6, 야고보, 게바, 요한)과 만나 이야기 할 때, 그 자리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형제(들)”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 거짓형제들은 디도가 헬라인임을 들어 그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 때문에 바울과 논쟁이 벌어졌다. 갈라디아 교회들을 어지럽힌 사람들은 이 예루살렘의 “거짓형제들”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점은 2:11-14에 나오는 안디옥 사건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2:12) 도착하자, 식탁에서 물러났다. 바울은 베드로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갔다”(2:13)고 말한다. 이 그룹은 베드로조차도 두려워하는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 출신들임이 분명하다.

바울의 적들은 구원이 믿음뿐만이 아니라, 할례, 율법, 유대교 절기 등을 지키는 것에 의해서 보충되어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방인으로서 할례를 받는 것은 완전히 유대인으로 개종하고 유대인으로 다시 태어나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이방인들이 사실상 할례를 통해서 완전히 유대인이 되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바울은 할례를 안 받아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이 단일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3:28)을 다시 이 편지를 통해 강조하고 있고, 자신이 세운 교회들에 와서 이런 잘못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거짓형제들로부터 자신의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

 

출처 : 인터넷로고스선교회
글쓴이 : David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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