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예배 

 

 이사야1:10-15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과 단절되고 하나님의 임재가 그친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하면 바로 제사(예배)라는 의식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바로 제사(예배)라는 의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의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입니다 (컵과 물, 컵은 의식이며 물은 본질, 결혼반지)

의식은 본질을 위한 수단이요 (콩 껍질은 알맹이가 자라기 위한 수단)

의식은 본질을 나타내는 수단입니다.

따라서 본질과 의식도 모두 중요합니다(동전의 양면, 손바닥과 손등과 같음).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원하신다” 우리와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더 많은 어떤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원하십니다. 여러분과 친밀한 사랑을 나누길 원하십니다. ‘난 널 원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위해서 예배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은 하나님을 추구해야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추구해야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그분을 알기를 구하여 나아가야합니다. 그분의 영광을 보기를 구하여 나가야 합니다. 그분의 의중과 의도를 알아 내 삶을 조정하여 그분이 계신 곳에 나도 같이 있음으로써 그분을 더욱더 알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며 그분이 계신 곳에 나도 같이 있기를 위해 그 열망을 가지고 나가는 이것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현실

신앙적 열심        (예배)

하나님평가      (문제원인)

 하나님징계

        특징

이사야시대

(유대인)

사1:2-4

사1:10-15

사1:12, 

사29:9-13

사29:14

마당만 밟는 예배

예레미야시대

(유대인)

렘2:13

렘6:20

렘12:2

렘23:35-37

렘6:20

렘7:21-23

렘6:16-19

입술뿐인 예배

예수님시대

(바리새인)

요5:42

눅18:10-12

마12:2

요5:10,빌3:6

마15:7-9

요5:37-38

마23:16-22

외식뿐인 예배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면 반드시 예배가 타락하게 됩니다.


〈 이사야 시대〉

 

-  예배모습 (이사야1:10-15)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그 무수한 제물, 분향, 월삭과 절기,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

 

-  하나님을 떠난 현실(사1:2-4)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 하나님의 평가/ 사1:12, 사29:13

(사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사야1장의 예배를 가리켜 마당만 밟는 예배가 하는 것을 봅니다.

(사29: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무슨 말입니까? 입술뿐인 예배라는 겁니다.


〈 예레미야시대〉 

 

-  예배모습

렘6:20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시바->에멘 원방->인도) 결코 정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렘12: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영어 NIV성경에서는 “주님이 항상 저들의 입술에 있습니다” 즉 입반 벌리면 주님이야기 했다는 말입니다.


(렘23:35-37) “35-너는 또 말하기를 너희는 서로 이웃과 형제에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응답하셨으며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뇨 하고 36-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이 되리니 이는 너희가 사시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씀이니라 하고 37-너는 또 선지자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무엇이라 대답하셨으며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말씀 하셨느뇨” 당시 습관일 만큼 목회자를 만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라고 습관적일만큼 물었지만 그러나 마음이 멀다는 겁니다. 즉 입술뿐인 예배였습니다.

실제 심판이 임한 시대로 영적으로 시대말 적인 상황으로 예레미야가 40년 동안 외쳤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듣지 않으므로 실재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습니다. 많은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고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바벨론에서 이주시킨 5개의 민족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인도로 애굽으로 도망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때 그들의 예배는 어떠했을까요?


-  하나님을 떠난 현실(렘2;13)

렘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 하나님의 평가

렘6:20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시바->에티오피아 원방->인도)


렘7: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 고기는 너희나 먹으라 - 하나님이 안 받으시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시대 바리새인〉

-  예배모습

눅18:10-12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마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마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요5:10 38년 된 병자 고친사건

- 하나님을 떠난 모습

요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  예수님의 평가

(마15:7-9) “7-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이 세시대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신앙이 타락하면 예배가 타락한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타락했다고 하니 혹시 ‘정성이 부족 했구나’ 아니면 ‘근성을 대충 드린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예배는 정성이 부족한 예배가 아닙니다.


탁락한 예배는 정성이 부족한 예배가 아닙니다.

이사야 시대나 예레미야 시대 마당만 밟고 입술뿐인 예배라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외부적 모양에 둡니다. 지각에, 옷도 대충입고, 슬리퍼 신고, 껌을 씹고, 설교 중에는 옆 사람과 애기하다 축도하기 전에 나가는 이러한 것을 가리켜 마당만 밟는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0분전에 나와서 마음으로 준비라고 옷도 깨끗한 것으로 입고 정성스럽게 예배를 드려야 참다운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레미야 시대에 정성이 부족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의 정성으로 따지면 우리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그들의 희생, 기도를 우리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근데 그들에게 마당만 밟는다, 입술로만 존경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번제를 어떻게 드렸느냐?

 

바리새인들의 정성을 보세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보면 우리는 발 벋고도 못 따라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평가는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평가합니다.

 

여러분 신앙이 타락하면 반드시 예배가 타락합니다. 예배가 타락한다는 것은 정성이 부족하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그럼 타락한 예배가 뭐냐? 본질이 없는 예배가 타락한 예배입니다. 의식은 있는데 하나님을 추구하는 본질이 없는 예배를 가리켜 타락한 예배라 말합니다.

위의 세 시대는 의식은 가득한데 본질이 없었습니다. (반지는 있는데 사랑은 없으며, 컵은 있지만 물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신앙이 타락하면 예배가 타락하게 되는데 예배가 타락하면 나타는 특징이 있는데 ①형식적인 예배, ②보편적인 메시지, ③성령의 자리가 없는 것(자기중심적) ④기복신앙으로 흘러갑니다.


1. 형식적인 예배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형식적인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형태가 형식적일수록 형식적이 될 때에 성령께서는 덜 나타나시며 예배의 형태가 형식적이 될 때 성령의 역사가 줄어듭니다. 여러분은 신약에서 떠나게 된다는 것을 언제나 주목할 것입니다. 신약교회의 매우 중요한 특징은 즉흥성, 삶, 살아있는 친밀감, 활력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성령의 감화에서 떨어지게 되면 모든 것이 형식적이 됩니다. 침체에 빠진 교회는 예배가 형식적입니다. 예배의 형식을 채용하여 기도문 등을 낭독하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형식적 종교에 의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침체기에 빠지면 의식적으로 돌아갑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부흥을 만날 때마다 그러한 모든 일이 멈추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약의 단순 속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어떤 의식이나 공기도서나 어떤 절차나 예복의 문제를 떠나 성령께 속한 자유와 일어나는 일들이 있을 뿐입니다. 마음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부터 찬양을 부릅니다. 각성과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교회에서 부흥이 떠나면 성가대를 강조합니다. 돈을 주고 성가대를 사오기도 합니다. 그들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아, 찬양 좋았어 하면서 평가합니다. 성가대가 성도들 위해 노래합니다. 이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생각도 안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문은 기대조차 안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마음도 없습니다. 예배 시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도 안합니다. 아니 우리는 주일아침마다 언제나 이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이게 습관입니다. 그리고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자기들에게 찾아오셔서 임하시고 하나님의 존전에서 사람들 전체가 사로잡힘을 당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느낄 수 있는 것 등의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이 형식적으로 잘 되어가는 것 같은 자만에 빠집니다. 이게 형식화된 예배의 특징입니다. 오늘날 예배가 이렇습니다. 이 상태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옷을 잘 차려입고 예배에 오고, 또 늦지 않게 늘 빠지지 않고 오니까 우리는 예배를 잘 드리는 거야”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잘 들으십시오. 예레미야 시대 때에도 그렇게 예배를 잘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은 수단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 제사, 헌금을 드렸던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기를 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부흥이 오려면 신앙의 본질이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없이는 아무리 그 예배가 예배다운 모습을 가지고 드려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형식적인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본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정성을 다하고 아름답게 드려도 형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본질이 살아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흥을 예비하는 자들의 예배를 바꾸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부흥이 올 때 담을 수 있으니까요. 그럼 형식적인 예배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바른 예배가 되려면 본질이 살아있는 예배로 바뀌어야 합니다. 호세아 6:6은 본질이 무엇인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질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는 겁니다. 그 분을 성령의 조명으로 발견하면 그 분 앞에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 분이 가장 소중하기에 그렇습니다. 의식은 담는 그릇일 뿐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통해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주일날 예배에 왜 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 분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인격체이신 예수님을 더 알기를 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을 쫓아다니던 백성들 모두가 다 “할렐루야” 외쳤지만, 다 감격하고 눈물을 흘렸지만, 사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주님을 아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그들이 그랬지만 베드로처럼 예수님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올 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치유나 기적이나 감격을 위해서 오면 주님을 아는 게 아닙니다. 큰 교회에서는 한 시간 전에 와야 교회당 안에 입장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그렇게 열심을 내어도 그 목표가 주님을 알기 원하고 전존재로 사랑하는 일에 맞추어지지 않고는, 주님과의 살아있는 교제가 없으면 언젠가는 떠납니다. 오래가지 못합니다. 자신의 목적이 달성되면 얼마가지 않아 떠납니다.


우리나라 성도들 보십시오. 전에는 참으로 기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리 많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살만큼 살기 때문입니다. 어려웠을 당시에는 얼마나 많이 사모했는지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 나오는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수많은 군중들의 차이가 보이시나요?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 분을 찾아서 오는 게 예배입니다. 그 분을 만나러 오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 분을 만나 경배하고, 그분의 행하심을 감사하고, 찬사하기 위해서 오는 게 예배입니다. 예수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게 예배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게 찬양과 경배입니다. 사실 부흥 때마다 찬양이 넘쳤습니다. 부흥 때에는 찬양을 멈추라고해도 멈출 수가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니까 그렇습니다. 밤새도록 찬양합니다. 그런데 찬양하되 5대독자가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기뻐하며 찬양하는 겁니다. 열린 예배를 목적으로 찬양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이 없는 예배는 아무리 그럴듯한 형식을 갖추었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을 높이며 사모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놀랍게 임하실 것입니다.


2. 보편적 메시지를 좋아합니다.

 

예배가 타락하면 보편적 메시지를 좋아합니다.


(사30:10)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신앙이 타락하면 그 자세가 이렇게 됩니다.


(렘6;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예레미야 당시는 국가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이 바로 목전에 다가온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경고했음에도 돌이키지 아니하였기에 이방나라를 들어 저들을 치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12,13절은 그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13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하나님의 임재는 걷혔고 하나님은 분노하시고 계십니다. 이러니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승리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나 실재는 걷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죄의 억압이 끊기지 않습니다. 사탄의 억압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에서 끊기지 않습니다. 세상의 억압이 끊기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상황인대도 불구하고 당시의 선지자들이 외쳤던 메시지를 보십시오. 이 상황에서 선지자들이 외치는 메시지는 “평화라! 평화라!” 였습니다. 이게 보편적인 메시지의 특징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축복이라! 축복이라!” 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형편이 어떠합니까? 교회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 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눌립니다. 이런 애기를 듣고 싶어 하질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서와 목회자들의 가정에 있는 억압을 보시나요? 수많은 그리스도인 가정들이 깨어집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억압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습관적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엄청난 사탄의 궤계와 다툼과 후욕과 시기, 질투, 미움이 성도들 삶 속에 가득합니다. 성도들이 세상과 죄를 이길만한 힘을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경험되어지지 않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십시오. 그곳에는 성령님이 임하니까 일어났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42-47 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교회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말입니다. 또 교회 안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재와 승리와 생명과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가운데 이런 일이 있나요? 걷힌 지 오랩니다. 성경에서나 찾을 뿐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죄의 억압이 있음에도 그럼에도 여전히 축복을 외칩니다. 이것이 죽은 정통주의의 특징입니다.


죄의 억압이 가득한대도 평화와 축복을 외친 이유가 뭡니까? 그래야 대중에게 인기가 있고, 사람들이 자기에게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심판을 앞에 두고도 왜 축복을 외치는 걸까요?  그 이유를 “탐심” 때문입니다.  당시의 선지자들이 평화를 외쳤던 가장 주된 이유는 그래야 인기가 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좋아하고 모이니까 그랬던 겁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축복을 외치는 이유는 그래야 성도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마음의 중심 배경에는 사람들을 모으려고 하는 야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타락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이 있는 곳에는 부흥이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사람이 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면 타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보편적인 메시지 즉 축복의 설교를 왜 선호하는지 아시나요? 우선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이유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함이고, 사람들이 보편적인 메시지를 듣고자 하는 이유는 역시 탐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수단이 되니까 축복을 들으려고 합니다. 이 상태로는 절대로 신앙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절대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많이 모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통치가 함께 하시는 역사는 없습니다. 경외함도 있을 수 없으며 순전한 기쁨과 죄를 이기는 승리가 없습니다. 영적인 의로움과 거룩함이 그곳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일은 없습니다.


죽은 정통주의는 보편적인 메시지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까 “어떻게 하면 행복한 가정을 꾸밀 것인가?” 하는 것과 같은 등등에 관심을 가집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것도 문제이고 그렇다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도 문제이고 해서 하나님과 적당히 거리를 둡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필요하면 하나님을 끌어다 씁니다. 적당히 고무시켜주는 메시지를 선호합니다. 목회자들은 적당히 그것을 부추겨줌으로서 그들로 교회에 머물게 하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보편적인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어야 합니다.


메시지가 회복되려면 보편적인 메시지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어야 합니다. 혹 이런 말을 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교회가 어디 있어? 말도 안 되는 얘기야!”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세 구절을 보겠습니다. 이 구절들을 보시면 교회가 전해야 할 메시지를 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전해져야 삶이 변합니다. 그래야 성도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됩니다. 교회 가운데 임재와 활력이 회복됩니다.


고린도전서 1장부터 보아야 합니다. 17-18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구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 복음을 다른 말로 “십자가의 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에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안한 이유는 말의 지혜로 하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소멸될까봐 그랬다는 겁니다.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하면 십자가의 능력이 소멸됩니다. 그것으로는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서도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다른 말로 십자가의 도라고 하고, 십자가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헛되지 않게 하려하기 위함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능력이 소멸되지 않게 함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4 절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여기 구절에 보니 바울이 누구를 전한다고 쓰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무엇이 능력이고 지혜라고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잘 들으십시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전해야할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교리는 초신자 공부할 때 한 시간이면 끝납니다. 십자가에 관한 사실에 관한 공부는 아무리 길어도 신학교 한 학기면 다 배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들을 배우려고 치자면 금방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에 관한 역사적인 배경, 십자가란 단어가 나오는 배경, 십자가에 관한 유대인들의 문화인식, 십자가와 관련한 근동아시아의 역사, 십자가란 단어가 쓰인 문헌들을 조사하자면 더 많은 시간을 들이겠지만 일반적으로 십자가에 관한 일들은 그렇게 긴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가 전할 메시지는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지식이 아닙니다.


교회가 전할 메시지는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능력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사실이 능력이 아닙니다. 뭐가 능력인가 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30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사실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지혜요, 의로움이요, 거룩함이요, 구속함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 분이 말입니다. 복음은 인격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먼저 인격체되신 예수님만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5 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도 바울은 아마 이 편지를 3차 전도여행 때 썼을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철저하게 구약성경을 연구했었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을 알았고 그 가운데 살았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사용하셨던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에 관한 지식이 많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부활하신 주님 직접 만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삼층천에 다녀왔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니까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복음을 배웠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난 것만 해도 성경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를 통해서 나타났던 능력이 참으로 엄청났었습니다. 그를 통해 교회가 세워졌고,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세워졌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 지금 원하는 것은, 그가 지금 현시점에서 원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만을 알기로만 작정합니다.


우리가 전해야할 복음은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지금 그 예수님만을 알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또한 전할 때에도 그 예수님만을 전한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도움으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본 것처럼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면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변할 것이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고백이 단순히 이론이 아니요 성령의 도움으로 한 것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예수를 발견하면 그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할 것이니까 예수님만을 알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터인 것을 다들 압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아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보이십니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마는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결코 다른 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다른 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를 원했는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론이 아닌데, 바울은 성도들을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 중매하기를 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바울은 베드로가 보았듯이 먼저 그리스도 예수를 알기 원했고 그 분만을 전하기로 하였습니다. 이게 우리가 전해야할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 터 위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메시지가 얼마나 잘못된 것을 아시겠습니까?


성도들이 예수를 듣고 예수를 만나면 모든 것으로 그 분께 고백하게 되어있고, 모든 것으로 사랑하고,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에서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지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은혜와 승리가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생명이 넘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넘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외에는 아무 것도 전하지 않는다” 고 하는 겁니다. 또한 말의 지혜인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방법”,“사업에 성공하는 기독교적인 법칙” 등과 같이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들은 보편적인 법칙으로서 십자가에서 능력을 소멸하는 것이기에 말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보편적인 메시지로는 절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사업에 성공하는 기독교적인 법칙”등은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위로와 격려는 되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능력이 쏟아질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자, 메시지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보이시나요?


3. 사람 중심적 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지만 실재는 사람중심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방문과, 하나님의 임재와, 만남,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이 있는데 이렇게 역사하실 성령님이 설자리는 없습니다. 대신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특히 무대효과로 사람들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참 예배는 성령이 그 예배의 주도권을 잡고 인도해 가십니다. 그러나 예배가 타라가하면 인간이 주도권을 잡고 나갑니다. 성령님의 자리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자, 여러분, 이제부터 찬양하겠습니다. 일어서십시오. 힘차게 부르세요. 자, 박수칩시다. 더 세게 치세요. 더 세게 치세요. 자, 기쁨의 춤을 추셔야지요” 이것은 예배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성령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이 임하시면 춤을 추며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 춤은 조작된 춤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에서 그 분의 은혜가 너무나 감격스러워 그 분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추는 춤이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가 돌아오니까 너무 좋은 나머지 바지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추었던 춤과 조작된 춤과는 다릅니다.


감정과 감정주의는 다릅니다.


어떨 때에 우리는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세뇌와 같습니다. 이것은 감정주의입니다. 물론 성령이 함께 하시는 예배에는 감정이 따라갑니다. 그러나 감정은 있지만 감정주의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감정에 빠져들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동일하게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물론 감정은 있게 되어 있지만 감정주의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기쁨이 있어 감정이 솟구치는 것과 감정을 조장하는 것은 달라요.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이 만나 포옹할 때 “포옹은 천천히 하는 거야. 너무 오래 있어도 안 되는 거야. 일어서. 앉아” 이렇게 하는 연인들은 아마 없을 겁니다. 사랑하니까 만나면 감정이 솟구치는 것과 감정을 조장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 예배 가운데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격과 기쁨은 주님과의 만남에서 나와야 합니다. 기법을 동원하고 사람들을 동원하고 감정을 조장하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부흥이 임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집을 방문하셨기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기에 그곳에는 감사와 감격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져주시니까 감사와 감격 가운데 눈물을 흘립니다. 때로는 애통합니다. 감정과 감정주의는 차이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날 여러분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매우 두려운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주목하셨습니까? 모든 것이 다 짜여 있습니다. 어느 한 시점을 향하여 모든 일들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모든 항목이 미리 정해져 있고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시작하여 어느 시점에 마쳐야 하는 것이 다 되어 있습니다. 목회를 하는 제 친구 가운데 어떤 이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일마다 다른 교회에 가서 순회 설교를 하면 할수록 이러한 일을 더 많이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교회에서마저도 강사로 오는 목사에게 순서가 적힌 종이를 준다는 것을 저는 반복적으로 듣습니다. 그리고 그 문자 그대로 그 앞에다 그 순서지를 놓고 그대로 행할 것을 종용합니다. 11시에 시작합니다-성경을 봉독하고 또 거기 순서지에 적힌 모든 것을 다 진행하여 12시가 됩니다-그런 다음에 축도가 이어집니다. 제가 볼 때 이건 아주 심각합니다. 그처럼 길지 않은 설교가 덕이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설교의 길이를 위해서 설교를 길게 늘어뜨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께 기회를 드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프로그램에 너무 매여 있어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처럼 형식적이 되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이처럼 묶어놓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께서 갑자기 임하시면 어떠하시렵니까? 저는 매우 심각하게 이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과 똑같습니다. 11시 시작해서 12시가 되면 마칩니다. 너무나 똑같습니다. 시간이 정해져 있어 좋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성령을 소멸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까 우리는 빌립보서에서 참다운 성도의 특징 중 하나가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였다고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라디오 설교도 하지 않았습니다. 라디오 설교를 하다가 성령이 임하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라디오 설교는 정해진 시간에 마쳐야 하는데 성령이 임하시면 어떻하느냐 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성령이 주관하시는 예배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성령이 주관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의 한 모습을 고린도전서 14:26에서 보겠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여기서 “모일 때”는 예배를 일컫습니다. “계시”는 문맥적으로 볼 때 예언을 뜻합니다. 이 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초대교회의 예배는 성령이 주관하셨습니다. 찬송시도 있고, 설교가 있고, 예언이 있고, 방언도 있고, 방언 통역함도 있었습니다. 이 토대 위에서 질서 있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을 감당하되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하라는 말입니다. 순서지에 정해진 순서를 따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십시오. 그 분의 사역에는 말씀과 성령이 같이 갔습니다. 사도들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의 사역에도 말씀과 성령이 같이 갔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의 자리를 마련해 드릴 수 있을까요?


첫째는, 성령님이 통치하시며, 주관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과 연관이 있습니다. 즉, 예배 가운데 본질이 있고, 메시지가 회복되어 하나님을 알고자 함이 추구되면 그곳에 성령님이 임재하십니다. 반면에, 두 부분이 회복이 안 되면 성령님께서 임하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령님을 구해도 회복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세 부분이 함께 가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둘째는 성령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올 때에 주님을 만나기를 기대하고, 또 성령님의 임재를 환영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셋째, 성령님이 주권자이시기에 그 분이 원하시는 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 분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환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배 시간에 갑자기 강사목사님이 몇몇 분과 의논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자리에 선교사로 나가실 분들이 계시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분들을 축복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로 나가실 분들을 나오게 해서 축복해드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함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행하시는 일을 환영한 것입니다. 만약 인도하시던 목사님이 생각하기를 “아이고, 다음 순서 진행해야지” 했더라면 성령님의 역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님이 예배의 주권자이시기에 그 분의 움직이심을 환영해야 합니다. 어느 예배에서는 인도자를 통해서 “여기 이 자리에 구원받을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게 하여 구원을 베푸는 역사도 있었습니다. 어느 경우에는 그 사람의 이름까지도 떠오르게 하셔서 역사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사데교회와도 같습니다.

지금까지 죽은 정통주의의 특징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예배가 정확히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의 사데교회같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어 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정통이고 살았는데 실제로는 생명이 없습니다. 목회자들과 장로들이 더 살아있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합니다. 저 역시 목사이지만 성도들을 보면서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형식적인 예배, 보편적인 메시지, 성령님이 없는 예배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실제가 경험되질 않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에는 뿌듯해하지만 이틀을 못가서 쏟고 또 교회에 와서 채워야 하는 게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람쥐 챗바퀴돌 듯 신앙생활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기를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생수의 근원을 따라 날마다 살아가야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교회에 가서 생수 한 모금 주면 그것 마시고 와서 며칠 견디다가 또 목마르면 교회에 또 가서 마시고 와야만 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본질이 살아있는 예배,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예배, 성령님이 주관하시는 예배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담대하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담대하셔야만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게 아닙니다. 회복이 안 되면 더 이상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분위기나 전통, 주변 사람의 평가 때문에 주님의 길에 서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예배의 회복을 위해 힘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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