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다운 예배

김영재(합동신학대학원 교수)

 

성경에는 예배를 "섬기다"(latreuo)는 뜻과 "절하다"(proskunio)라는 뜻을 가진 말로 표현한다. 그리고 성경에는 꼭 예배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면서도 예배를 의미하는 곳이 수없이 많이 있다. 많은 시편들은 모두가 예배를 위하여 예배시에 부른 찬송이다.

우리 사람은 지각이 있는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지각이 흐려져서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깨닫지도 못한다. 그런 대로 하나님을 찾고 진리를 찾는다는 사람들도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그저 희미하게 알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창조주 하나님을 깨달아 알아 그를 경배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 보여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큰 행사를 경험하고서부터이다. 그들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동기는 예배를 시작할 때 가장 즐겨 읽는 시편 100편에 잘 표현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가 되시며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심을 알고 드리는 감사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시고 죄악의 생활에서 건져 주심을 감사하여 예수님께 와서 감사함을 표시한 예를 볼 수 있다. 죄인으로 알려진 한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옥합의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누가복음 7:36-50). 이 사건은 다른 복음서에도 다 기록되고 있다. 죄사함을 받은 여자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사죄의 은혜에 대하여 자기를 지극히 낮추고 예수님을 높이며 귀한 선물을 드려 감사한 것이었다. 또한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 와서 은혜를 입고 나음을 받은 열 사람의 나환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돌아와 주님께 감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예수님께 와서 그냥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절함으로써 감사하였다(누가복음 17:11-19).

죄 많은 여자가 새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한 것처럼, 썩어가는 병에서 나음을 얻은 사람이 그 은혜를 감사하며 절한 것처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하나님께 마땅히 그 은혜를 감사하며 예배를 드려야 한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구원의 하나님께와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셔서 우리를 사리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예배이다. 예배의 참 뜻을 이해한다면, 예배 드릴 때 우리는 자기의 감정에 좌우되거나, 예배를 드리면서 감정적인 만족만을 추구할 수가 없다. 병 나음을 얻은 환자가 주님께 와서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했듯이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뿐, 다른 생각을 할 여념이 없는 것이 예배이다. 예배를 드리면서 사람의 눈치나 동정을 살필 여념이 있을 수 없다.

예배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드리고 그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언제부터 예배 의식을 문서화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2세기 중엽의 기도문 등을 발견하게 된 것을 보면 교회가 성장하면서 형식을 갖춘 예배 의식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만큼 엄숙하고 규모있게 예배를 드렸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며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말씀을 강해하거나 설교하는 예배 형식을 갖추었었는데 이러한 형식은 유대교 회당에서 행하던 예배 형식을 자연스럽게 본 받은 것이었다.

예배 후에는 서로 애찬(the Feast of Love)를 나누어 친교를 하고 또한 떡과 포도주로 성찬을 나누며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였다(고린도전서 11:17-34 참조).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는 교회 건물이 없이 신자들이 가정에서 모였으므로 예배 후에 애찬을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나 교회 건물이 서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서 애찬은 자연 생략하게 된 것으로 안다.

초대 교회에서는 예배와 함께 늘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종교 개혁자들은 초대 교회에서 행하던 것처럼 예배와 성찬식을 매주 거행하려고 하였다. 루터교와 앵글리칸 교회에서는 반드시 예배에 이어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주일마다 성찬식을 거행한다. 개혁파교회는 최소한 일년에 네 번은 성찬식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례가 칼빈이 목회한 제네바교회에서 그렇게 시행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으므로 그것이 칼빈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칼빈이 자신은 매주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을 이상(理想)으로 여기고 평생 이를 실현하는 것을 소원했으며, 제네바 시의회와 당회를 설득하려고 노력하였다.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는 개신교 교회는 설교만을 위주로 하는 예배가 아니고 찬송과 기도와 성경 봉독과 설교에 이어서 성찬식을 거행하는 엄숙하고 경건한 예배를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기념하고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임을 우리는 적어도 알 필요가 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예전(禮典)에 충실하고 기도서를 따라 기도하며 성찬식을 동반하는 이러한 전통적인 교회의 예배를 배우기보다는 부흥회나 사경회 식의 설교를 중심하는 예배를 배우게 되었다. 예전이나 기도문을 사용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것을 가져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예배 순서나 의식이 인도자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예배에 대한 신학이 없다 보니 예배 의식이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부흥 집회에서는 목사가 설교를 길게 하고 시간을 독점하며 쇼맨쉽을 발휘한다. 그러나 예배에서는 그 어느 사람이 돋보여서는 안된다. 목사는 예배를 인도하기 때문에 두려움과 겸손함으로 예배를 진행하고 예배 전체에 맞게 설교를 해야 한다. 종교 개혁자 쯔빙글리를 이어 쥬리히 교회의 목사가 되어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공헌을 한 불링거는 그가 작성한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에서 예배에 관하여 말하면서 예배를 사람들이 지리하게 느낄 정도로 오래 드려서는 못쓴다는 얘기를 한다. 또한 공중 기도를 오래하여 다른 순서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도 한다. 설교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기도나 설교를 하면서 지나치게 자기 기분에 사로잡힐 때, 기도나 설교가 길어질 수 있다. 진심으로 하는 기도는 사람들의 공감을 사고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는 기도에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기를 기대하거나 그런 것을 의식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하는 순수한 기도가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든가 설교를 해서는 안된다.

한국 교회에서 우리는 기도문 없이 자유롭게 기도하기 때문에 그러한 유혹에 빠지기 쉽다. 아닌게 아니라 말의 실수도 많이 한다. 설교를 통하여 신자들이 감화를 받는 것은 성령께 맡겨야 한다. 설교자 자신이 지나치게 그 일에 관심을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 구속의 은총에 관한 말씀이든 신자의 거룩한 생활에 관한 말씀이든 설교자는 그 날 주신 말씀을 그대로 성실하게 전하면 된다. 사람들이 자기의 설교를 통하여 감동을 받았으면, 그것은 성령께서 하신 일인 줄 알고 감사할 뿐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왜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지 않는가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설교를 잘했다거나 기도를 잘했다는 칭찬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예배에서는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하고 영광을 받으셔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을 높이고 하나님께 감사하느라고 여념이 없어야 하는 예배에 사람이 조금이라도 높임을 받고 칭찬을 받으면 그것은 월권이다. 하나님께 대단히 죄송한 일이다. 한국 교회에서 예배시에 기도를 장로가 하면서 목사를 위하여서도 기도한다.

그럴 경우 목회자에 대한 존경도에 따라서 목사에게 붙이는 수식어를 달리한다. 목사를 추켜 올리며 기도하거나 아니면 부족함을 채워 달라는 식으로 경고하는 기도를 하기도 한다. 목사가 듣기에 언짢은 말을 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들어서 기분 좋은 말을 하면 더욱 잘못이다. 전통을 존중하여 예배를 예배답게 엄숙하게 드리는 교회에서는 목사가 예배의 모든 순서를 주관하고 장로가 기도하는 일이 없으므로 목사를 추켜 올리거나 경고하는 일이 없다. 혹은 기도를 통하여 교회의 문제점을 노출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의아한 생각을 갖게 하거나 심지어 시험에 들게 하는 일도 없다.

예배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높이며 하나님께만 경배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사람들은 남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고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사회적인 욕구의 충족을 찾는다. 교회가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모인 곳이므로 그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교회의 그런 요소가 최대한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장로가 기도하는 것이 이러한 사회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행위가 된다면, 장로가 예배에서 기도하는 것을 지양하고 말씀 선포와 성례를 집행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목사에게, 다시 말하면 준비한 가운데서 두렵고 떨림으로 예배를 인도해야 하는 목사에게 모든 것을 다 맡겨 버리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일이다. 예수님께서 부족한 신앙을 가진 사람, 기복 신앙을 가진 사람을 다 받아들이셨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잘못된 신앙을 방치하거나 조장하시지 는 않으셨다. 늘 참 신앙이 무엇이며, 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다. 그러나 위선하는 것은 처음부터 나무라시고 용납하지 않으셨다.

예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표로서 헌금을 한다. 십일조든 주일 헌금이든 특별 감사 헌금이든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드린다. 감사하는 사람은 딴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목사가 헌금한 사람의 이름을 일일이 들어 가며 축복 기도를 해 주어야 하는 것으로 한국 교회가 이상한 관습을 만들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만 높여야 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하는 예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엄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해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치심에도 맞지 않는 관행이다. 참으로 감사하여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사람은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으로 족하게 여길 뿐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요한이 눈을 들어 하늘을 향했을 때 영물들과 천상의 장로들과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광경을 보았음을 말씀한다.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있는 생물들이 밤낮 쉬임 없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때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광경을 보았다(요한계시록 4:1-11).

감사하면서 무슨 또 축복을 바라거나 자기의 감사하는 행위에 대한 무슨 인정이나 칭찬이나 대가를 추호라도 바라면 그것은 감사가 아니다. 그것은 비열하고 역겨운 위선적인 생각이요 행위이다. 은총을 입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사람은 그저 감사할 뿐이다. 감사하는 사람은 감사하여 절하는 것, 그 이상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그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우리는 예배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야 한다.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혜와 축복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예물의 대가로서가 아니고,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므로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도하는 가운데서 빌고 또한 마지막 예배를 마칠 때 축복을 빈다. 하나님께 많이 바친 사람이나 적게 바친 사람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된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하므로 목사가 축도를 한다.

예배를 마칠 때 행하는 목사의 축도는 성경에서 사도가 교회를 위하여 비는 말씀으로 혹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던 말씀으로 교회와 회중을 위하여 축복을 비는 기도요 축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오래 지켜 내려오는 예배의 전통이다. 그러므로 축도를 하면서 보통 다른 기도를 할 때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긴 수식어와 설명을 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말이 많이 붙을수록 축도다운 무게와 전통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축도는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례하도록, 즉 예배를 인도하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가 위임한 목사의 직무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교회와 회중에 같이 있기를 비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말씀으로 축도를 하나, 유럽과 미국의 교회에서는 주로 민수기 6장 24-26절의 말씀, 즉 "아론의 축도"로 축도한다. "주께서(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주께서(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주께서(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기독교 신앙과 생활」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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