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신조)

 

[사도신조(신경)]

- 나는 전능하사〔천지를 만드신〕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

-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 이는 성령으로〔잉태하여〕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

- 본디오 빌라도에게[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죽어] 장사 지낸 바 되시고[음부에 내려 가셨으며}

- 삼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 하늘에 오르사〔전능하신 하나님〕아버지 우편에 앉으시고

-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나는 믿기를〕성령과

- 거룩한〔공〕교회와〔성도가 교통하는 것과〕

-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 몸(육체)이 부활하는 것과〔영생〕을 믿사옵나이다.

 

오늘날 교회가 사용하는 사도신조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 아멘 -

 

 사도신조 새 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 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1. 사도신조의 유래와 그 변천과정

 “사도신조”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권위를 더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붙인 명칭일 뿐 12 사도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에 12사도가 모여서 우리가 믿고 가르치고 전파해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한 분의 사도가 한 가지씩 말해서 모아 보니까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신조가 나왔다고 해서 사도신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아는 대로 사도 야고보는 일찍 순교해서 거기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그 외에 다른 사도들도 일찍부터 여러 곳으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12사도가 한 자리에서 신조를 만들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과 거의 같은 형태의 사도신경이 채택된 것은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 431년의 에베소 회의, 451년의 칼케돈 회의를 거치면서 확정되어진 것이다. 이런 형태의 신앙고백문이 만들어진 것은 당시의 이단성 규명을 위해서였으며, 매회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수정(修訂)되어졌다. 그래서 사도신조를 니케아 신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초의 종교회의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인 "아리우스"가 그보다 몇 년 젊은 "아타나시우스"와의 논쟁한데에서 출발하였다.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에 관한 것이었는데, 사실 이 문제는 초대교회 이후로 계속 거론되어 왔던 것이었다.

 아리우스는 이교에 있어서 많은 신들이 있는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이 계실 뿐만 아니라, "아들 하나님이 별도로 계시다"라고 하는 두 하나님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모든 피조물의 제일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분이지만,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아버지와 같은 관계이지만 본질이 아니라는 이론이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라고 가르쳤다. 
 니케아 회의에는 300명이 넘는 감독들이 참가했고 결국 아리우스를 이단자로 정죄하고 끝냈으나 완전한 논쟁의 종결에는 실패했다. 다시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성령의 신성에 관한 신앙적 의결이 첨부되었고, 다시 451년의 제 4차 종교회의인 칼케톤 회의에서는 예수의 양성론이 제기되어 정리되었다.

 교회들이 암송하고 있는 사도신조는 A.D. 4세기경 라틴어 “Symbolum-Apostolicum”(= 사도들의 상징 )이란 신조가 바탕이 된 “로마교회 구 신조”에서 형성되어 서방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를 통하여 보급되었다. 그러나 동방교회(= 희랍 정교회 )에서는 한 번도 사도신조를 공식적인 신앙 고백서로 채택한 적이 없다. 대신 그들은 이것과 비슷한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2. 사도신조에 대한 질문들

1)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사도신조에 그 내용이 찜찜한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이다. 이 구절은 한글 사도신조로 번역되면서 천주교의 연옥 기분이 나고 개운하지 못하다 하여 삭제되었지만 영어 사도신조에는 그대로 남아 있어 가끔 질문을 받는다. 이 표현대로라면 예수님은 무덤에 장사되어 계셨던 삼일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뜻이 된다. 물론 성경에도 주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말씀이 있으니까, 이 구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2) “거룩한 공회”

 영어의 the Holy Catholic Church(거룩한 공교회)를 번역한 것이다. Catholic이란 뜻은 “보편적 혹은 세계적인, 우주적인” 이라는 뜻으로서 한영 사도신조를 보면 Catholic의 뉘앙스 때문에 Universal로 번역해 놓은 것도 있다. 이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개신교도 catholic church(보편 교회)라고 해서 별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사도신조가 쓰여진 배경을 살펴보면 이러한 보편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이 아니란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인정하고 있던 당시의 가톨릭 교회로서는 땅 위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유일한 교회가 가톨릭 교회라고 주장하고 이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던 터였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것을 거룩한 공회로 번역하여 난관을 넘기고 있지만 한영 찬송가 등에서는 여전히 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표현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공회”란 표현은 애매하기 그지없다. 성경에서의 “공회”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10:17, 마 26:59; 눅 22:66; 요 11:47)

3)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많은 사람들이 사도신조의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모든 세상의 성도들이 서로 영적으로 함께 교제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의 성도는 믿는 성도들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죽은 가톨릭의 성인들을 말한다. 그래서 이 말은 본래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것을 “성자 숭배”의 근거로 삼고 있으며 “산 자와 죽은 자가 교통”하는 교리적 근거로 삼고 있다. 이러한 신앙고백으로 인하여 가톨릭 교인들은 지금까지도 죽은 자들의 이름으로 봉사하고 헌금하기도 한다.

 물론 성경적인 의미의 “성자” 또는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신자들(= 고전 1:2 )을 가리키지만, 로마 가톨릭의 “성도”는 죽은 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뒤에 특별 심의를 거쳐 서품 되는(= 복자, 성자 ) 죽은 자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책망하고 있는 바 강신술을 권장하는 것과 같은 미신에 속한 것이다.(= 신 18:11; 사8:19-20 ) 트렌트 회의에서 결의한 교리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성인들이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실제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오늘날 크리스마스에 싼타크로스에게 선물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 될 것이다.

4)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원래의 사도신조는 이단분별의 기준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사도신조의 끝에 이러한 표현이 있는 것은 그들에게 당연한 논리이다. 그러나 현재의 사도신조에서 끝 부분에 붙어 있던 이러한 표현을 빼버린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초창기에는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라는 말로 사도신조는 끝맺음되어 있다.

 결국 사도신조라 하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사도들이 기록한 것이 아니며, 여러 차례 수정하였고 변형되어 왔으며 가톨릭적인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으며, 외우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이단의 판별을 위한 것이었다. 오늘 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여전히 주일 예배 시간에 “사도신조”를 고백하지 않는 교회는 이단이라고 정죄한다.

 그러나 사도 신조를 예배 시간에 암송하지 않는다고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만약 사도신조에 명시한 어떤 교리를 인정하지 않고 다르게 가르친다면 이단일 가능성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들의 신경(= the Apostles Creed )은 예수님 당시의 사도들이 만든 신조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영어로 된 사도신조를 한글로 번역하면서 가톨릭적인 냄새가 나는 부분을 삭제한 것으로 이해하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3. 사도신조의 작성배경 및 논쟁 내용

사도신조에 대해서 우리는 크게 칼빈(John Calvin)과 바빙크(Herman Banck)의 설명을 통해서 자세한 내용을 배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1) John Calvin

칼빈의 1536년판 기독교 강요는 본문이 크게 6장으로 구성되어(= 1장: 율법-십계명 해설포함, 2장: 믿음-사도신경 해설포함, 3장: 기도-주기도문 해설포함, 4장: 성례, 5장: 거짓 성례, 6장: 기독교인의 자유, 교회의 권능, 그리고 정치 조직 )있는데 그 중에 사도신경은 십계명이나 주기도문과 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다. 사도신조가 성경에 없다고 하여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칼빈은 종교개혁 당시 그의 저서에서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고 있는 바이다.

칼빈은 사도신조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얼마나 커다란 가치가 있으며, 그 내용이 성경과 어느 정도나 일치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1559년도 판의 내용을 발췌하는 것으로 칼빈의 입장이 얼마나 분명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신조는 우리의 구속의 중요한 점들을 간단히 요약하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분명히 보여 주는 일람표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나는 신경이라고 부르지만, 그 저자 문제는 전연 고려하지 않는다. 고대 저술가들은 신경을 사도들에게 돌리는 점에서 상당히 의견이 일치했다. 사도들이 공동으로 써서 발표했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전한 가르침을 충실히 수집하며 요약한 것이므로 넉넉히 사도들의 이름을 붙일 만하다고 생각했다.

사도신조가 어디서 나타났든 간에, 교회의 바로 초창기 즉, 사도 시대에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그것을 공중 고백서로 인정했다고 나는 확신한다. 어느 한 개인이 사적으로 쓴 것 같지 않고, 사람들이 회상할 수 있는 가장 오랜 옛날부터 확실히 모든 경건자들이 그것을 신성한 권위로 인정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유일한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전연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즉, 우리의 믿음의 역사 전체가 신경에 간명하고 질서 정연하게 요약되었으며, 성경의 순수한 증언에서 보증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저자 문제로 불안을 느끼거나 남과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물론 성령의 진리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누가 그것을 말했다거나 썼다는 것까지 알지 못하면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가 다르다.”

이상으로 사도신경의 내용이 성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의 보증을 받고 있음과 칼빈 자신이 그 가치를 일찍이 깨닫고 기독교 강요를 집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Herman Bavinck

바빙크는 사도신조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되는 줄의 역할을 했다고 우리에게 밝히 가르쳐 주고 있다.

“사도신조는 가장 오래된 신조다. 그것은 사도들 자신들이 규정한 것은 아니지만 일찍이 2세기 초에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주신 삼위일체적인 세례 명령으로부터 발전되었던 것이다(= 마 28:19 ) 근원에 있어서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짧지만 기초형태는 같았다. 즉 그것은 기독교가 의존하고 있는 그 큰 사실들의 짧은 요약이었고 그와 같이 계속해서 그것은 공동체적인 근원이 되어 왔고 모든 그리스도 왕국의 통일의 끊을 수 없는 줄이 되고 있다.”

바빙크는 사도신조의 처음 논쟁이 되었던 주제는 “당신은 그리스도를 누구라 하느냐?”였다고 한다. 이것은 교회가 주님의 말씀 자체로부터 모든 세계에 대하여 대답해야할 전 지배적인 물음이었는데 이것으로부터 잘못된 형태들이 나왔는데, 그 예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유대주의를 따르는 무리들이란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의 인간, 기이한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 선지자적 영으로 영감 된 인간, 말에나 역사에 능력 있는 인간, 그러나 그 나머지에 있어서는 하나의 인간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하려는 모든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교주의 편에서는 예수 안에서 신들의 아들, 하늘로부터 온 신 형체(神形體, Godsgestalte)로 보려는 자들, 구약의 천사들과 같이 잠시 땅에 나타나 그림자의 몸을 취하였던 인물로 보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를 육신이 되신 아버지의 독생자로서는 고백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단 )

이 두 이단들을 대항하여 교회는 성경에 맞게 그와 같이 그리스도는 참으로 육신으로 오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참된 독생자이심을 주장해야 했다. 이것을 교회는 긴 싸움 끝에 위에서 말한 신앙고백서들로 고백했고, 사도 요한과 더불어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모든 교리를 거절했다(= 요일 2:18, 22; 4:2,3 ). 그와 같이 그리스도적 교회는 그의 본질이요 핵심이 기독교의 특별한 전체 특성을 주장했다.

이것이 이 큰 일을 행한 공의회와 종교회의가 전체 기독교에 있어서 근본적이고 커다란 의의를 가진 이유다(= 작성배경 ). 사도신조에서 요약하고 있는 기독교의 사실들, 그리스도의 인격과 하나님의 삼위적 본질 속에 그리스도 교회들 사이에 존립하는 통일점이 있으니, 이 통일점은 그들 모두가 서로 유대주의와 이교주의를 반대하는 데 하나가 되게 하고 교회를 분리하는 무서운 의견 차이에서도 잊게 되거나 무시될 수 없게 한다.”

 

4. 사도신조의 특징 및 영향

  사도신조의 특징은 먼저 가장 오래된 신조라는 것과 매우 단순하고 간결하여 어떤 수준에 있는 사람이건 어떤 예배를 위해서건 다 만족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적 지식이 매우 수준급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적인 교리를 규정해줌에 있어서도 매우 적절하다는 것이다.

  사도신조는 다른 신조들의 기초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니케아 신조는 사도신조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를 보다 분명하게 확대시켰고,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사도신조의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품위에 관한 교리 전체를 더욱 확대시켰다.

 

5. 사도신조에 대한 평가

  칼빈은 사도신조가 성경의 내용과 잘 일치한다고 평가할 뿐만 아니라 사도신조를 믿음의 요약이요 총체라고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사도신조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도신조는 우리의 구속의 중요한 점들을 간단히 요약하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분명히 보여 주는 일람표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A.A.Hodge)는 영국에서는 소요리문답을 처음 출판했을 때 “주 기도”와 십계명과 사도신조를 첨가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사도들이 작성했다거나, 성경의 일부분으로 여길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의 요약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며 그리스도의 고대 교회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라고 설명을 첨부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많은 평가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이상의 평가만으로도 사도신조가 초대 교회 이후에, 종교개혁 시대조차도, 아니 오늘도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6. 사도신조를 고백해야 하는 이유

1) 신자에게 신앙고백은 참으로 중요하다. 바른 믿음인지 거짓된 믿음(= 이단 )인지는 개인과 그 공동체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분별되어지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은 이단 침투를 막고 기독교의 진리 수호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2) 신자에게는 그가 믿는 믿음의 대상과 내용이 있어야 한다. 사도신조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이유는 내가 누구와 무엇을 믿는지 믿음의 대상과 내용이 있어야 하며, 또 마음으로 믿는 신앙의 내용이 입술로 고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니케아(Nicaea) 신조]  A.D. 325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 전능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자를 믿는다.

또한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이는 아버지로부터 특유하게 나시었고, 즉 아버지의 본질(= substance, 즉 ousia )로부터 나신,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이시오. 빛으로부터의 빛이시요,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으로 출생하시되 만들어지지 아니 하시었고, 아버지와 동일본질(= homousios )이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다 그를 통하여 만들어졌다. 그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고 성육신하시고 사람이 되시었다.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시사 하늘에 오르시었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신다(= is coming ).

또한 성신을 믿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들은, 즉 그는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시기 전에는 그는 계시지 아니하시었다. 또한 그는 없는 것들로부터 생겨나셨다고 말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다른 존재물이나 본질로부터 되었다거나 창조되었다거나 변할 수 있다거나 달라질 수 있다거나 주장하는 자들을 카톨릭적이요 사도적 교회는 정죄한다.

 

[콘스탄틴노플(Constantinoplis) 신조]  A.D. 381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만물을 만드신 자를 믿나이다.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시요, 모든 세대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신(出生) 자요, 빛으로부터의 빛이시요,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이시요, 나시되 만들어지신 것은 아니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니라. 이를 통하여 만물이 생겨났으며, 그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시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육신하시었고, 사람이 되시었고,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시었고, 고난 받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시었다가 성경대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니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무궁하리라.

또한 성령을 믿사오니, 이는 주 되시며 생명을 주시는 자이시니, 아버지로부터 발출(發出)(proceeds)하시며, 곧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함께 경배 받으시며, 함께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여 오신 분이시니라.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를 믿나이다. 우리는 죄의 사유를 위한 한 세례를 고백하나이다.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과 오는 세상의 생을 바라고 있나이다. 아멘.

 

1)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작성배경 및 논쟁 내용

이 신조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인 에큐메니칼 공회에서 150명의 감독들이 채택한 신조로 알려져 있고, 승인을 받은 것은 451년의 칼케돈 에큐메니칼 회의라고 한다. 신조들의 작성 배경에는 이단의 잘못된 사상을 대항하기 위함이었고, 바른 교리를 지키려는 끊임없는 싸움이 있었다. 우리는 콘스탄티노플 신조도 그러한 환경에서 작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작성 배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아리우스가 일어났을 때에 니케아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그 권위로 저 불결한 사람의 악한 노력을 분쇄해서, 그가 흔들어 놓은 교회들의 평화를 회복하며 그의 모독적인 가르침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주장했다. 그 후에 유노미우스와 마케도니우스가 새로운 소동을 일으켰을 때에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그들의 미친 생각에 대해서 대책을 강구했다(작성 배경). …사탄이 흉계를 꾸밀 때마다 교회는 처음부터 이런 방법으로 단결을 유지하는 것이 통례였다.”

 

2)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중요한 차이점

(1) “성부의 본질에서”라는 문구가 생략되었다.

이 표현에 대해서 아리안주의나 성령 피조설과 조화를 이루려고 했다는 비평도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고 뒤에 “성부와의 동일”이란 말이 생략되지 않고 있기에 이 표현으로 충분한 것으로 보여진다.

(2) “신에게서 나온 신”이란 말이 빠졌다.

이 표현도 피상적으로 보면 성자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그 다음에 “빛의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은 참 하나님”이란 말이 있기 때문에 생략되어도 성자의 신성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차적 신이거나, 혹은 일부분일 수도 있다”라는 의혹을 없애버린 효과도 있다.

(3)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성령론에 대한 부분이 많이 보완되었다.

즉, 성령의 신성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주님” 혹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 의미가 확고히 되었다. 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란 표현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와의 동일을 드러내 주고 있다.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나오시고”라는 표현을 통해서 성령은 구별된 위격으로서의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성령의 독립적인 자리가 아니라 삼위일체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분으로 소개되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라는 표현을 통해서 위에서 말한 내용, 즉 삼위가 동질일 뿐만 아니라 동등하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3)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특징 및 영향

이 신조는 “초대교회의 예배의식에서 사용되어 세례예식 때에 고백되었고, 또 성만찬 예식의 고백으로서도 6세기부터 사용되었다가 칼케돈 공회 후에는 모든 신조들 가운데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4)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대한 평가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동방교회의 형식으로 된 초기의 신조이지만 니케아 회의 시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성령에 관한 언급에 있어서도 사도신조 보다도 더 명확하고 자세하게 밝혀놓고 있다. 동질(coessential), 동등(coequal), 창조 이전의 발생, 참하나님의 참 하나님, 발생되고 피조되지 않으심 등과 같은 용어들은 동방교회가 반세기 이상 끌어오던 아리안 이단과의 피나는 싸움 끝에 얻어낸 트로피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욱이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이어 받고 있으며(단지 첫 두 항목을 약간 수정했고) 가장 중요한 점은 니케아 신조에서 문제시되었던 성령에 대한 문제가 극복되었다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os) 신조]  A. D.420-450

 

누구든지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세계교회의 신앙을 보유해야 한다. 이 신앙을 완전무결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의심의 여지없이 영원한 멸망에 이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교회의 신앙이니,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즉 하나이신 삼위 하나님을 예배한다.

인격을 혼동해서도 안 되고, 본질을 분리해서도 안 된다. 한 분 성부와 또 다른 분 성자와 또 다른 분 성령이 존재한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신성과 동등한 영광과 함께 영원한 위엄을 가진다. 성부의 본성이 바로 성자와 성령의 본성이다. 성부도 피조 되지 않았고, 성자도 피조 되지 않았고, 성령도 피조 되지 않았다. 성부도 무한하고, 성자도 무한하고, 성령도 무한하다. 성부도 영원하고, 성자도 영원하고, 성령도 영원하다.

그러나, 영원한 본질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그와 같이, 피조 되지 않은 본질이나 무한한 본질도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성부도 전능하고, 성자도 전능하고, 성령도 전능하다. 그러나 전능한 본질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이와 같이, 성부도 신이고, 성자도 신이고, 성령도 신이다. 그러나 신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이와 같이, 성부도 주님이고, 성자도 주님이고, 성령도 주님이다. 그러나 주님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기독교 진리가 우리에게 세분이 각기 신이며 주님임을 인정하도록 요구하지만, 동시에 세계교회의 신앙은 우리에게 세 신이나 세 주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금한다.

성부는 타자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피조 되거나 출생되지 않았다. 성자는 만들어지거나 피조 되지 않았지만, 오로지 성부에 의해 출생되었다. 성령은 만들어지거나 피조 되지 않았지만,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왔다. 그러므로 세 아버지가 아니라 한 아버지가 있으며, 세 아들이 아니라 한 아들이 있으며, 세 성령이 아니라 한 성령이 있다. 이 삼위일체에서 선후나 대소가 없다. 세 분 모두 다른 분과 같이 영원하고 동등하다. 따라서 상술한 대로, 일체가 삼위로, 삼위가 일체로 예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삼위일체를 믿어야 한다.

또한, 영원한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따라서 올바른 신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신과 인간임을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는 신으로서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에 출생하였으며, 인간으로서 시간 안에서 그 어머니의 본성을 가지고 탄생하였다. 그는 완전한 신이며, 이성적 영혼과 인간의 육체를 가진 완전한 인간이다. 그가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등하지만, 인성에 있어서는 성부보다 열등하다. 비록 그가 신과 인간이지만, 그는 둘이 아니라 하나의 그리스도이다. 그가 하나인 것은 그의 신성이 육신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인성이 신에게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인 것은 본성의 혼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에 의한 것이다. 이성적인 영혼과 육체가 한 인간인 것처럼, 신과 인간이 하나의 그리스도이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어 음부에 내려갔으며, 사흘 만에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셨다. 그는 하늘에 올라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으며, 거기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가 오시면, 모든 인간이 자기 육체와 함께 부활될 것이며, 자기 자신의 행동에 따라 심판받게 될 것이다. 선행을 한 사람은 영원한 삶에, 악행을 한 사람은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세계교회의 신앙이다. 모두가 그것을 확실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아멘.

 

1)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작성배경

이 신조는 사도 신조처럼 저자가 명확하지 않다. 9세기 이후에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가장 두드러지게 옹호했던 아타나시우스(= 296-373 )가 이 신조의 저자로 알려져 왔으나, 17세기 중엽 이후로는 이 견해가 배척을 당했다고 한다.

“이 신조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되었는데, 제 1부는 삼위일체론으로 사도 신조와 니케아 신조보다 더 분명하게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삼위일체를 고백하면서 삼위 사이에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종속은 없게 되어 있다. 제 2부는 기독론인데 아폴리나리우스와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 등의 이단설들을 반격하고 있다.”

 

2)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특징 및 영향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제4차 에큐메니칼 회의 때까지(= 325-451 )의 교리적 결정들과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한 어거스틴의 사상을 분명하고도 자세하게 요약하고 있으며, 간결한 문장들은 기술적으로 배열되었고 리드미컬하게 표현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비 논쟁적이고 평화로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사도 신조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삼위일체와 성육신 등을 믿는 공교회의 신앙은 구원의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며, 이 신앙을 반대하는 자는 영원히 멸망을 받으리라고 하는 엄숙한 선언으로 시작하고 또 끝을 맺는 저주문이 있다. 이런 저주문이 후기에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4)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대한 평가

Philip Schaff의 글에 의하면 제 3차와 제 4차 세계 교회 회의는 니케아 신조 이외에 다른 신조를 작성하거나 출판하는 것을 엄격하게 규제하였음에도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범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아 “정통 교리의 아버지”란 찬란한 이름을 얻었다고 평가한다.

 

 

[칼케돈(Chalcedon) 신조]  A. D. 451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 우리는 한 분이시요 동일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모두가 일치하여 가르치는 바는 그 동일하신 분은 신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동일하신 분이 인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참으로 사람이시며, 동일하신 분이 이성 있는 영혼과 육신으로 되시느니라.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며 동일하신 분이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니 죄 이외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같으시니라. 신성에 있어서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 나시었으며 그 동일하신 분이 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위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사 인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어머니(= theotokos )이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었느니라.

한 분이시요 동일하신 그리스도, 아들, 주, 독생자는 두 성품에 있어서 인식되되 혼합됨이 없으시며 변화됨이 없으시며 분리됨이 없으시며, 분할됨이 없으시며 ― 이 연합으로 인하여 양성의 차이가 결코 제거되지 아니하며, 오히려 각 성의 특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한 품격 한 개체에 있어서 결합되어 있다.― 그리하여 두 품격으로 분할되거나 분리되거나 하지 않으며 한 분이시오, 동일하신 아들, 독생하신 하나님,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는 옛적에 선지자들이 가르친 바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자신에 대하여 가르치신 바이며 교부들이 신조로서 우리에게 전하여 내려오는 바와 같으니라.

 

1) 칼케돈 신조의 작성배경 및 논쟁 내용

콘스탄티노플 신조와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분임을 밝혔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완전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들 사이에 이론(異論)이 많았다. 즉 그의 한 존재 안에 신성과 인성이 어떤 모양으로 연합되어 있느냐의 어려운 문제였다. 신인양성(神人兩性)을 믿으면서도 그의 신성을 더 우세한 것으로 강조한 사람들은 주로 알렉산드리아 학파(= 네스토리우스파,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레 )에 속했었고, 그의 인성의 약화를 막으려는 사람들은 주로 안디옥 학파(= 유티케스 )였다. 이러한 기독론의 역사적인 논쟁들을 일괄하여 종식시키고 정통신조를 확립할 목적으로 로마의 감독 레오(Leo)가 449년 6월 13일에 플라비안(Flavian) 황제에게 보낸 편지 톰(The Tome)에서 논쟁의 해결을 위한 신학적 시론을 발표하였었다.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451년에 칼케돈에서 제4차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회의를 소집하였다.

 

2) 그릇된 교리 - 네스토리우스(Nestorius)와 유티케스(Eutyches)의 주장

벌코프(Louis Berkhof)는 당시 그릇된 교리를 주장하였던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몹시수에스티아의 데오도레(Theodore of Mopsuestia)와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했고, 그 안의 로고스의 내재를 신자들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똑같이 누리는 단순한 도덕적 재주로만 이해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람을, 곧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동참하지만 단일한 인격적 생명의 하나 됨에서는 그와 하나가 아닌 사람을 보았던 것이다. 즉, 두 인격으로 구성된 한 중보자를 보았다. 이에 반대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단일성을 강조했고, 그의 반대자들은 그가 양성을 부인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반대자들이 오해한 듯싶지만, 유티케스와 그 일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의해 흡수되었거나 양성이 융합하여 단일한 본성이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그 근거로 시릴을 인용하였다.”

 

3) 바른 교리(= 칼케돈 회의의 결정 내용 )

Louis Berkhof는 칼케돈 신조의 진술에 관한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4가지를 들고 있다.

① 양성의 특성은 일위에 속한다. 예를 들면, 전지(全知)와 제한된 지식과 같은 것이다.

② 신인의 수난은 참으로 무한한 것일 수 있으나, 그 신성은 감각할 수 없다.

③ 그리스도의 인격의 근거와 기초를 이루는 것은 인성이 아니고 신성이다.

④ 로고스는 어떤 독특한 인간 개체와 연합한 것이 아니라, 인성과 연합한 것이다.

처음부터 신격의 제2위와 연합된 개인이 있은 것이 아니라 동정녀의 복중(腹中)에서 인간의 본질과 연합한 것이다.

 

4) 칼케돈 신조의 영향고 평가

이러한 칼케돈 신조는 동방, 특히 발칸 반도의 저속화 된 기독교를 정화하기 위하여 753년 콘스탄티노플 노회에서 결의한 “성상 반대 결의”에 기본 정신이 되었다. Louis Berkhof는 칼케돈 신조는 “양극단의 견해를 전부 정죄하고, 위(인격)의 단일성(unity)과 양성을 함께 주장했다"는데 큰 의의를 두지만 아쉬운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케아 회의가 삼위일체 논쟁을 끝마치지 못한 것처럼 칼케돈 회의도 기독론 논쟁의 종결을 짓지 못하였다”.

신조가 작성된 배경에는 성경의 진리를 파괴하는 이단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대항하여 고대 신조들은 교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또한 고대 신조들은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고백하기 위해서 작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단을 대항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원리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빙크의 표현처럼 우리의 적들은 “대문 밖에 있는 적”들과 “기독교 안에 있는 적”들이 있다. 초대 교회 이후, 많은 학자들은 위와 같은 바른 견해를 갖지 못해서 잘못된 주장을 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귀한 유산들이 남겨진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잘못된 주장을 펴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개혁주의 신조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고자 하는 노력들은 참으로 귀한 것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아타나시우스나 바실, 그리고 카릴루스 같은 진정한 교리의 옹호자들을 주께서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서 일으키신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진리는 교회 안에서 죽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한다. 한 회의가 진리를 억압할지라도 주의 놀라운 보호를 받아, 때가 오면 진리는 다시 일어나 승리한다.”

 

 

출처 : http://kr.blog.yahoo.com/visions72000/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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