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열심히, 많이 드려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달 신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기도가 매일 드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은 아무런 목적 없이 기도하는 법이 없습니다.

 

무언가를 이룰 목적을 가지고 기도를 합니다.

우선 우리는 식사 때마다 기도합니다. 

좀 더 적극적인 신자들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남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도 먼저 기도부터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기도하기도 합니다. 

또한 슬픔이나 좌절감에 빠져있는 상대방을 위로할 때,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를 어려운 일에 빠지지 않도록 미리 대비한다는 생각에서 기도하기도 하며, 심지어 편지를 보내면서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우호적인 평가를 받으려고 합니다.

 

이상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신자라면 당연히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기도합니다.

○ 신자들 상호간의 예의 표명 수단으로 기도가 사용됩니다.

○ 문제 해결의 방편으로 기도가 사용됩니다.

○ 하나님의 힘을 빌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어 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기도합니다.

 

물론 이런 의도 이면에는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전능하시고 우리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고마우신 분으로 믿고 의지하는 마음 자세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능하시고 고마우신 분으로 믿고 기도한다고 해서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해도 무방하다고 여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영어성경에 기도를 뜻하는 단어 중에서 Ask(묻다, 요구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성경 구절로는 누가복음 11:9~10절을 들 수 있습니다.

“구하라(Ask)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Ask)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

 

그런데 이처럼 기도의 의미를 요구(Ask)로 이해하게 되면 그 말과 함께 나오는 응답(Answer)도 아울러 머리에 떠오르게 됩니다. 

즉 요구가 있으면 반드시 응답이 뒤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응답을 전제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을지 부심하는 것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 응답을 받는 기도는 옳은 기도이고, 응답을 받지 못하는

기도는 그릇된 기도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응답을 많이 받는 사람이 훌륭한 신앙인이라는 생각도 바로 이 점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를 열심히

드려도 응답이 없으면 기도를 잘못하거나, 그 사람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일쑤고, 본인 역시 응답이 없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좌절하고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급기야는 기도를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더욱이 응답의 형태에 대해서도,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에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쯤 되다 보니 물질적인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은 곧 기도의 응답을 많이 받은 사람이고 따라서 그는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칭송받습니다. 반면에 물질적으로 어렵게 사는 사람은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요,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았거나 열심히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잘못된 기도를 하는 문제 있는 신앙인으로 오인되기 십상입니다.

 

이런 오해들은 결국 기도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방편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이해입니까

성경 말씀을 검토하면서 이 문제를 정확히 규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앞의 누가복음 11:9~10절은 ‘구하면 응답하신다.’는 원리를 지지하는 성경본문은 무척 많고 또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구해도 응답지 않으시는 예도 함께 나옵니다. 하박국 1:2절을 보면 “여호와여 내가(하박국)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여호와께 구하였지만, 하나님은 그의 간구에 응답지 않으신 것입니다. 도대체 이럴 수가 있습니까? 구해도 응답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박국이 응답받을 수 없을 만큼 잘못된 기도를 한 것입니까?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먼저 하박국은 ‘부르짖고’ ‘외쳤’습니다. 즉 그는 간절하게 기도한 것입니다. 또한 그는 오랫동안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어느 때까지리이까’하고 당당하게 물을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더구나 하박국 선지자는 자기 개인을 위하여 간구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하여 간구하였으며, 믿음 없이 간구하거나 형식적으로 간구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간구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선지자, 그것도 요나처럼 거역하는 선지자가 아닌 순종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애절하고도 열심히 오랫동안 간구하였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응답지 않으셨습니다.(“듣지 아니하시니……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신약성경에도 보면 사도 바울이 육체의 가시가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세 번 주께 간구하였으나, 응답을 받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8) 따라서 구하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주장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구하지 않아도 응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나서 1:3절을 보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러나”)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다로 내려갔다가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 요나는 기도를 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형통한 길이 열린(응답)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요나는 기도를 하지 않아도 원하는 대로 행하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배에 올랐을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는 악인이 형통한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시편 73편에는 이 문제로 아삽이 고민하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악인은 기도 없이도 능히 소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눅 11:9~10)

○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합 1:2)

○ 기도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욘 1:3)

○ 기도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기도를 하면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기도하지 않아도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문제 해결의 만능열쇠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한 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기도가 전혀 무익하니 폐지해버리자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지므로, 무언가 소원하는 바가 있을 경우에는 기도하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기도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기도해야 하는 이유

앞의 결론을 받아들이면 매우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즉 기도해도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기도할 필요가 무엇이며, 지금까지 기도한 것은 모두 헛수고요, 시간낭비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시53:4, 사43:22, 렘29:13, 마7:7, 살전5:17, 마18:19~20, 엡6:18, 대상16:11, 마26:41) 그렇다면 아무 소용도 없는 기도를 하도록 성경이 요구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성경이 잘못된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기도는 결코 헛수고나 시간낭비도 아닙니다.

이런 고민은 기도를 소원 성취의 수단으로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어리석은 일입니다.

 

앞의 누가복음 11:9~10절 말씀을 다시 살펴봅시다. 

이 구절에 나오는 세 가지 명령형 동사는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동사는 모두 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부족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일들을 표현해 줍니다. 

 

따라서 기도란 완전한 상태에 있는 주인이 종들에게 이것저것을 이루도록 요구하는 식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입니다. 

즉,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시인하면서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을 헤아리려고 끊임없이 묻고(Ask) 찾으며(Seek) 문을 두드리는(Knock) 행위가 바로 기도입니다.

 

물론 기도에는 반드시 응답(Answer:인간 편에서의 성취가 아님)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성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도록 명하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우리와 더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노크만을 기다라지 않으시고, 직접 우리에게 노크하셔서 우리에게로 들어와 우리와 더불어 먹고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먹기를 바라십니다.(계3:20) 이러한 영적 교류를 위한 교량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 중에서 - 임세일​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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