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히11:10)

창세기를 보면 오히려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는 부분들만 나오는데 그렇다면 히브리서에서 얘기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사람 마음의 믿음(확신)이 아닌 것인가요?

-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6)

그 이후의 아브라함의 행동들을 보면 믿음이 없는 행동들이 많이 있는데 그렇다면 로마서와 히브리서에서 얘기하는 아브라함의 믿음도 그 주체가 사람의 믿음이 아닌 것인가요? 그렇다면 그것이 로마서1장 17절에서 얘기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의

그 믿음에 속하는 부분인 것인지 궁금합니다.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히11:24)

이 부분역시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왕궁에서 떠나 광야로 나오는 동기를 본다면 과연 믿음으로 세상의 영광을 버리고 나온 것인가? 라는 의문점이 들게 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믿음이라는 것도 결국 그 주체는 사람의 믿음(확신)은 아닌 것인가요?

[답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faith)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작금 정확하게 설명되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단순히 인간이 기독교 교리를 마음에 확신하는 바만 믿음으로 간주합니다. 심지어 히브리서 11장 1절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의 문자적 해석에 집착하여 스스로 큰 계획을 세워서 긍정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것까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질문자님과는 달리 대부분의 신자와 목회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겪는 문제나 성경을 접하면서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전혀 의심조차 품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치부하여 큰일 나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저 은혜로 일단 믿고 보라는 식입니다. ‘은혜’ 또한 무슨 의미인지조차 모르면서 말입니다.

자신의 설교를 유심히 듣고 있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에게서 바울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행14:9)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럼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을 의미합니까? 또 귀신을 쫓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막9:19)라고 견책하셨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도 믿음이 없다면 대체 누가, 어떤 내용의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까?  

질문자님이 의아해 하시는 대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롬1:17) 한다는 말씀만 보아도 앞의 믿음은 분명히 뒤의 믿음과는 그 내용이 다를 것입니다. 아무리 양보를 해서 둘의 질이 같다고 치면 그 양이 달라야만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믿음이 다시 같은 믿음의

양을 늘릴 수 있는 방편이 되는지 언뜻 이해가 안 되지 않습니까?

이처럼 믿음에 대해 성경에 기록된 경우마다 따져볼 내용은 참으로 많습니다. 물론 그 모든 구절들을 일일이 열거해서 알아 볼 수는 없습니다. 마침 세 가지 예를 들어서 질문을 주셨기에 각각의 믿음을 알아 본 후에, 믿음을 가장 크게 오해하는 측면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라의 믿음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히11:11)

창세기를 보면 오히려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는 부분들만 나오는데 그렇다면 히브리서에서 얘기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사람 마음의 믿음(확신)이 아닌 것인가요?

지금 질문자와 성경의 진술만 정확하게 비교해 보아도 왜 이런 오해가 생기는지 그 답이 금방 나옵니다. 우선 질문자는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한 것 같다고 여겼습니다. 반면에 성경은 사라가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성경 기록부터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했는지 온전히 믿었는지에 관해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약속하신 이 즉, 하나님 그분을 또 그분이 미쁘시다는 것을 “믿었다” 고 하지 않고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fact)이나 진리(truth)이기에 구태여 믿으려 노력할 것 없이 그냥 그대로 알게 된 것입니다. 예컨대 아침에 자기가 밥 먹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1+1=2라는 것도 너무나 명료한 진리인지라 구태여 믿을 필요조차 없는 경우입니다.

“미쁘시다”라는 원어도 영어로 “faithful”로 번역되었듯이 “믿을만한”, “신뢰가 가는”, “진실한”의 뜻입니다. 사라에게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믿을만한 분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자 진리였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인간이며 또 살아 있다는 것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진리이자 사실인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 그분을 불신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알기 쉽게 말해 하나님 그분이 존재하고 믿을만한 분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분의 약속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기에 당장에 믿기는 힘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항상 신실하고 입이 무거운 사장이 말단 직원에게 갑자기 내일부터 부장으로 승진시키겠다는 말을 듣는 경우와 같습니다. 사장이 절대 함부로 농담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 약속은 쉽게 믿어지지 않을 것 아닙니까?

창세기의 사라의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녀는 분명 하나님이 아들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들었지만(18:10) 늙어 경수까지 끊어졌기에 속으로 웃으며 곧바로 믿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사실을 분명히 지적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18:13) 그런 지적을 당하자 사라는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거짓말로 둘러대기까지 했습니다.

당시의 사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래도 하나님의 약속은 금방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두려운 분인 것만은 즉,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며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았지 않습니까?

또 그간에 그녀가 약속을 믿지 못할 만한 사정도 있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뭇별처럼 많게 해주시겠다고 처음 약속하신 것이 75세 때(사라는 65세)였는데 지금은 99세가 지난 때(17:17, 24)입니다. 그 24년 동안에 충실한 종이나, 하녀에게서 난 아들로 기업을 물리려 인간적인 잘못된 노력도 해봤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라가 90살 때에 또 다시 잉태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물론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낳을 테니 이름을 이삭으로 지으라는 구체적인 약속이었지만(17:21) 반신반의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나이가 너무 차서 경수까지 완전히 끊긴 상태니까 아무리 세밀한 약속을 들었어도 아마 처음 약속을 받았을 때보다 더 믿기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하나님이 두렵고도 미쁘시다는 것만은 확고한 진리이자 사실임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11:11에서 믿음이란 용어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라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설명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믿으려고 의지적으로 노력하는 믿음과는 다릅니다.

오늘 날의 신자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며 각 신자에게 가장 합당하며 유익한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과 진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때로는 너무나 이해가 안 되는 사건과 여건에 부딪히면 그분의 약속에 대해선, 자기가 기도한 내용 내지 응답 받은 것이든 아니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든 간에, 반신반의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항상 하나님이 주실 복을 기대하거나 붙들기 보다는 그분신의 미쁘심을 묵상하며 믿으라고 권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성경은 자구 하나조차 땅에 떨어질 것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의 진술은  참으로 정미합니다. 단 한 치의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의심이 들수록 말씀을 붙들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묵상하고 연구해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6)

그 이후의 아브라함의 행동들을 보면 믿음이 없는 행동들이 많이 있는데 그렇다면 로마서와 히브리서에서 얘기하는 아브라함의 믿음도 그 주체가 사람의 믿음이 아닌 것인가요? 그렇다면 그것이 로마서1장 17절에서 얘기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의 그 믿음에 속하는 부분인 것인지 궁금합니다.

아브라함은 위에서 설명한 사라의 경우와는 조금 맥락을 달리합니다. 물론 성경은 “여호와의 약속을 믿으니” 대신에 “여호와를 믿으니”라고 표현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여호와가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확정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사라처럼 하나님은 미쁘신 줄 알지만 약속에 대해선 반신반의했다면 여호와가 그 진심을 몰랐을 리도, 또 그를 의롭다 여길 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라에게 분명하게 웃었다고 지적하면서 당신께서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다시 다짐해주었듯이 말입니다.

말하자면 아브람은 그 약속을 받는 당시에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분의 약속까지 확실히 믿었던 것입니다. 이 일의 앞뒤 상황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지극히 큰 상급이 되어주시겠다고 먼저 약속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상급일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복을 베푸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평생 숙원을 어찌 보면 투정이자 불만 섞인 말투로 즉시 아뢰었습니다.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니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15:2,3)

그가 청원한 내용이 의미심장합니다. 여호와로부터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는 약속을 오래 전에(75세경) 받았습니다. 근 1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 아무 징조가 없기에 이제 종에게라도 가문을 잇게 하는 절차를 밟겠다고 통보하면서 하나님의 의도를 더 확인해보려 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이 이왕에 복을 주시겠다고 또 약속하셨으니 지극히 큰 상급까지는 필요 없고 제발 아들 하나만 달라고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4절)고 구체저인 확답을 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평소 갖고 있던 불만 내지 의심을 한마디로 깨끗이 씻어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로선 안 믿을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사라가 웃은 이유는 90세가 되어 경수가 완전히 끊겼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여자와 달리 늙어서까지 정자가 끊이지 않습니다. 본문의 약속을 받을 때까지는 사라의 태가 닫혀 잉태는 안 될지라도 경수가 끊겼다는 구체적 언급은 없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장수하던 고대인을 현대인의 체질과 단순하게 비교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럼 혹시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는 부분과 모순 상치되는 것은 아닌지 의아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4:18-22)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겼을 때는 약 85세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선 “그가 백 세가 되어  자기 몸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을 알도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서로 다른 시기의 믿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처음 약속을 받은(창12장) 이후 계속해서 믿음이 흔들려 여러 잘못도 범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성경의 어떤 믿음의 위인이라도 믿음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온전한 헌신을 할 수는 없습니다. 사라처럼 하나님의 미쁘심은 기본적으로 알지만 때로는 반신반의하고 불만까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도 믿음, 아니 인간 믿음의 실체입니다. 수시로 흔들리고 실패 하고, 심지어 그분을 인식 못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을 영혼의 중심에 두고 있는 것만은 절대 바뀌지 않지 않습니까? 수도 없는 신앙상의 실수를 겪은 후에야 하나님이 주시는 복 즉, 약속의 성취만 바라보던 자에서 나중에는 그분 당신만을 소망하게 되지 않습니까?

나아가 하나님의 약속은 신자가 기대 예측하는 시기와 방식과는 다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당신만의 때와 방법으로 이뤄지며, 설령 나중에라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도, 모든 것을 합력해서 신자의 유익과 당신의 선을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지 않습니까?

로마서와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가 노년에 이르러서 혹은 그의 인생 전부를 결론적으로 평가하는 관점에서, 바로 그런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그는 자신의 마음의 확신으로 하나님뿐 아니라 그분의 약속까지 믿게 된 것입니다.

모세의 믿음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히11:24)

이 부분 역시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왕궁에서 떠나 광야로 나오는 동기를 본다면 과연 믿음으로 세상의 영광을 버리고 나온 것인가? 라는 의문점이 들게 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믿음이라는 것도 결국 그 주체는 사람의 믿음(확신)은 아닌 것인가요?

모세가 광야로 도망가게 된 계기를 성경은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출2:15)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애굽 관원을 때려죽인 사건이 탄로나 살인자로 처형당할 것이 두려워 피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라고 기술하고 있어서 왕궁의 안락과 영예를 헌 신짝처럼 스스로 차버리고 나온 양 해석됩니다.  

성경은 가장 먼저 앞뒤 문맥과 당시 상황에 비추어 해석해야 합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에게 아들로 입양되었지만, 자기 생모에게서 양육 받으며 자랐습니다.(출2:8) 말하자면 여호와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주일학교 교육을 충분히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또 성경은 분명히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출2:11)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유대인이라는 것과 또 동족이 노예로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증명입니다. 나아가 바로의 왕족 신분으로 직접 그 고역함을 보러 갔다는 것은 동족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뭔가 도울 방법이 없는지 알아보러 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보고는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에 감쳤습니다. 모세가 사람이 없는지 좌우로 살폈기에 순간적으로 격분해서 행한 우발적 살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평소부터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 사람에 대한 증오가 컸다는 뜻입니다. 그가 왕족의 호사를 계속 누리고 싶었다면 애굽인을, 그것도 히브리 사람을 죽이지 않고 단지 치기만 했는데 살인까지 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면 모세는 자기의 처지가 어떻게 바뀌든지 간에 동족을 위해 헌신하고 싶었던 열망에 차 있었던 것입니다. 살인한 다음날 형제들의 다툼을 중재하려 한 것도 그런 뜻이었습니다. 단지 젊은 혈기에 그 방식이 서툴렀던 것입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이 자신을 바로의 궁궐에서 자라게 한 놀라운 섭리에 주목했을 것입니다. 동족을 도울 자로 하나님이 미리부터 준비시킨 것이자 또 자기에게 주신 소명이라고 간주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에서 애굽에서 도망한 것을 믿음에 따른 것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미 그 전에 애굽 사람을 살인한 것 즉, 자기는 어떻게 되든 동족을 돕겠다는 결단과 실천이 모세 자신의 믿음에 따른 행동이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뜻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의 두 가지 믿음에 대한 해석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의지를 동원해 적극적으로 믿으려 노력하면 필연적으로 믿음이 생긴다고 푸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믿음이 있어야 믿음이 자란다는 단순한 신앙 성장 과정으로 보기도 합니다. 혹은 두 믿음을 동일한 뜻으로 보아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으로”라는 의미로도 해석합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무엇보다도 로마서의 전반부 주제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에 관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를 언급하고 있으며, 앞뒤 문맥과 연결해도 구원과 연결되는 의미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바울이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원리만 강조하려 들었다면 구태여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라고 도리어 혼선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을 강조할수록 더 단순하게 “오직 믿음으로”라고 말하는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해석의 키는 바로 앞 구절(16절)에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우선 “모든 믿는 자”라는 표현은 인간 쪽에서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거기에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부언했으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둘을 합해서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구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없이 인간 스스로 믿으려 하한다고 구원이 되거나, 인간은 가만있기만 해도 하나님 다 알아서 해주시는 구원은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써지긴 했지만 그저 인간이 기계적으로 받아쓰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 저자 고유의 지성, 체험, 영성 등도 함께 반영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은 완벽하게 계시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이 복음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유별난  표현을 동원한 이유도 본인의 영적 체험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구원을 어떻게 얻었습니까?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였습니다. 나사렛 이단인 예수 믿는 자를 잔해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늘로부터 내린 빛과 음성으로 직접 대면했습니다. 율법 즉, 인간 선행으로 구원 얻을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그의 옛 사람은 삼일 간 완전히 눈이 먼 상태에서 철저하게 낮아지고 깨트려 없어지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대적이었던 그에게 주님이 먼저 나타나셔서 거듭나는 은혜를 일방적으로 베풀었지만, 그가 꼭두각시처럼 손을 놓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자신의 온전한 지정의에 의해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영적 실체를 되돌아보았습니다. 도덕적 죄 대신에 자신의 전 존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처절하게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자발적으로 고백하고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만이 자신의 죄를 씻어줄 유일한 길임을 온전히 자각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설명한 그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여서 예수를 믿는 자”가 된 것입니다. 또 다른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으로 간섭하여 자신의 영혼에 심어주신 “믿음으로” 인해서 그 믿음에 자신이 반응하여 스스로 믿게 되는 “믿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구원에서 절대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하나님이 심어주는 믿음이 인간의 믿음보다 반드시 먼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심겨주는 믿음의 구체적인 과정을, 예수님이 성령의 거듭남은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 그대로,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믿은 것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스스로 믿은 것 같아도 하나님의 예정, 선택, 간섭이 선행되지 않고는 절대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은 가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궁극적로 판단할 때 구원은 그분에게 선택 받은 한 죄인에게 하나님 쪽에서 베푸신 전적이고도 일방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판단하는 마음의 확신도 사실은 하나님의 그 은혜에 자신의 영이 반응함으로써 시작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에 간섭하는 것과 인간이 자신의 지정의 영역에서의 스스로 믿음의 결단을 하는 것은 절대 서로 상충, 모순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믿음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에 기인하며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얻고 난 뒤에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성화의 과정도, 인간이 의지를 동원해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성령님의 충만을 구하며 그분의 인도에 따라 경건의 훈련을 쌓아가야 합니다. 말하자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바울의 진술이 구원 이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질문자님께서 사라, 아브라함, 모세에 관한 히브리서의 진술이 과연 “사람 마음으로 확신하는 믿음”인지 아닌지 궁금해 하셨습니다. 틀림없이 상기에 진술한 것 같이 하나님이 심어주시는 믿음과 대비한 인간이 스스로 결단하는 믿음의 의미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인간의 믿음과 하나님이 심어주는 믿음을 딱 부러지게 구분할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진정한 믿음이란 항상 성령의 간섭과 인도가 먼저여야 하지만 인간이 판단하고 확신하는 믿음과 절대 모순 상치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가 없는 인간 스스로의 믿음은 자칫 죄악과 사단의 유혹으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결론적으로 히브리서에서 기술한 사라, 아브라함, 모세 세 사람의 믿음은 공(共)히 각 사건마다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과 은혜가 먼저 있었고 그 안에서 자신들의 고유하고도 온전한 판단과 확신이 따랐던 것입니다.              

믿음의 가장 큰 오해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믿음에 대한 다양한 오해 내지 잘못된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질문하신 주제와 연관하여 대표적인 것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상기 설명 중에도 수차 언급되었습니다만 믿음은 “인간이 행하는 일회적 신앙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질문자님이 굳이 “인간이 판단하는 믿음”을 문제 삼은 이면에도 믿음에 대한 이런 오해를 평소에 인식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쉽게 말해 신자가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믿으려 의지적으로 노력하여 마음의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이루는 것을 믿음이라고 판단합니다. 문제는 어느 누구라도 일관되게 요지부동의 마음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종교적 훈련을 통해 그 믿음을 강하게 혹은 성숙하게 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리고 인간 마음의 확신이란 따지고 보면 순간순간의 상태에 의해 판단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특정 여건에서 특정한 사건을 당했을 때의 믿음의 강약이 문제가 됩니다. 예컨대 사라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 과연 그 약속을 순전히 믿었느냐 여부가 믿음의 좋고 나쁨을 가름하는 결정적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순간적인 동작을 찍는 스냅사진처럼 마음의 상태를 그렇게 찍은 것을 믿음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믿음은 자연히 외부적 여건과 사건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복을 받거나 은혜를 입으면 믿음이 아주 좋아지지만, 반대로 벌을 받거나 환난을 당하면 큰 침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외부 환경과 사건에 가장 먼저 접해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감정입니다. 힘들면 괴롭고 염려되며 믿음도 힘을 잃는 것은 인지상정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인데다 원죄로 타락한 이후에 그 본성이 아직도 죄에 물든 상태라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꾸 믿음으로 감정을 죽이고 외부 환경을 보지 말라고 권하지 않습니까?

일회적 마음 상태가 믿음이라면 결국 순간순간 의지력으로 외부 상황에 자신의 의식과 감정이 좌우되는 것을 막아내는 싸움에 불과해집니다. 도덕, 철학, 심리학, 또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공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자신을 이기는 훈련이 기독교 믿음에서조차 가장 중용한 요소가 되어버립니다. 요컨대 혼자서 자기 마음을 최상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노력이 믿음의 전부가 됩니다.

믿음이란 반드시 믿음의 대상이 있고 또 그 대상과 믿는 자와의 상호 교차적 역학 관계에서 만 이해해야만 합니다. 히브리서의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11:6)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단순히 잘 믿고 기도 열심히 하면 상 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상호관계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신자 혼자서 순간순간 마음의 상태를 강하게 붙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믿음에 대한 오해라고 했습니다. 그 반대는 당연히 믿음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서로 형성하여 유지되고 있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다시 알기 쉽게 사진에 비유해 봅시다. 전자는 신자 쪽의 마음상태만 순간적으로 찍어낸 스냅사진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후자는 비디오로 신자가 구원 이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생을 한 순간도 빠트리지 않고 찍어내는 영화입니다.

이 둘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껏 거의 모든 신자가 특정 사건에 직면하여 자기 마음 상태를 스스로 점검해서 의심과 불안과 불만이 차면 왜 이리 믿음이 없나 혹은 약하나 괴로워했습니다. 아주 겸손하고 경건한 신앙 행위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뒷전에 제쳐두고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려는 짓입니다. 자신이 여전히 하나님의 너무나 큰 권능과 은혜 가운데 있다는 즉, 당신께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실 만큼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믿음입니까?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은 단 한치도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신자 스스로 제풀에 자기 믿음만 약해졌습니다. 오직 주위 여건이 이해되지 않거나 힘들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주위가 약해지면 자동으로 믿음도 약해집니다. 이런 믿음은 평생을 가도 절대 강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신자라도 그 주위가 항상 좋다는 법은 절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주위 여건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권면을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그러나 믿음을 자기 마음의 상태라고, 그것도 순간순간 잘라서만 바라보는, 여기는 이상 절대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하나님만 바라보려 해도 자기 믿음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자꾸 믿음을 끌어올리려는 노력은 말로는 기독교식으로 흔들림 없이 성숙한 믿음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도사(道士)가 되려는 헛된 노력입니다. “노력하여 자기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려고” 하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 자체가 바로 믿음의 실체이자 본질”이라고는 아예 생각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더 이상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냥 그대로 믿는, 아니 아는 것입니다. 이미 그분의 은혜 가운데 완전히 들어온 신분, 소속, 위치가 바로 믿음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어떤 것도 그런 특권을, 가끔 훼방은 해도, 취소시킬 수는 절대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신자의 정체성을 당신의 피 값으로 그렇게 완전히 변화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자 그분을 바라보는 방향입니다. 비록 아브라함과 사라가 잘못을 범했지만 여전히 그분의 품 안에서 그분을 바라보면서 지은 잘못입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동일한 도덕적 잘못을 범해도 불신자는 사단에게 묶여서,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벗어나지 않은 채, 짓는 차이만 있습니다. 신자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 말고는 절대로 그분과의 관계가 취소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바로 이 사실과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사방의 유혹을 다 끊은 채 기도와 말씀에만 전무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사방의 유혹과 온갖 핍박과 힘든 환난 가운데서 주님만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믿음을 순간적인 신자 쪽의 마음 상태로만 이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인생 여정 전체의 관점에서 믿음을 이해하고 적용하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신자 쪽에서 하나님의 손을 스스로 놓지 않는 한 하나님은 절대로 신자를 통해 당신의 영원하고도 거룩한 계획을 신실하게 이루시며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의 복음 안에서 자기 믿음을 재점검, 아니 재확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묵히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때로는 실패하고 죄에 빠지고 심지어 사단에게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임을 절대 잊지 않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높이 띄기 일회의 기록에 좌우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골인점만 바라보는 마라톤 경주를 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그런 경주를 잘 마친 자들을 뽑아서 모아놓은 것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입니다. 사라, 아브라함, 모세 모두 순간적인 믿음으로는 약하고 하나님을 의심도 했지만 평생을 두고는 그분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또 순간순간마다 자신이 판단한 믿음으로 행동했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 안에서 이뤄진 믿음, 즉 하나님이 심어준 믿음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 혼자서 자꾸 믿으려 드는 것보다는 사라처럼 하나님이 미쁘신 분인 줄 그저 그냥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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