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3: 9-10.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시는데 곡 회개를 해야 용서을 받는가 하고 회개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

또한 이단에 속한 자들 일부에서는 회개는 한번만 하면 되는 것이므로 항상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죄는 한번만 회개하면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아시기 때문에 용서하신다.

그런데 기성 교회에서는 성도들을 번거롭게 항상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하라고 하는데 한번 회개해 버렸는데 무슨 죄를 회개하라는

것인가” 하고 반문한다.

 

이런 주장을 한다면 하나님은 인가의 모든 중심을 다 아시는 분인데 구태어 회개할 필요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했는데 하나님은 믿을지 안 믿을지 다 아시는데 믿으라 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안에 계시는데 믿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 또한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과 똑 같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 먹을지 안먹을지 다 아시는데 왜 먹지말라 하셨는가 하는 말과 같은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믿는 자들은 양심도 없고 염치도 없는 자들이라고 비난 한다. 왜냐하면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회개 해 놓고 계속 죄를 범하고 또 회개를 반복하기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 런 말은 인간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데서 하는 말이고 기독교 진리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자들의 말이다.

 

인간은 한번 회개하고 죄를 범하지 않을 의지가 있는 인간이 아니다. 본성이 죄로 물들어 있어 본능적으로 죄를 범하게 되고 그 본능적인 죄행이 길들여 있고 인간이 사는 세상이 죄악된 세상이기 때문에 죄를 피할 수가 없다.

 

인간들 가운데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고 살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종교인들이다. 죄를 범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 수양(修養)을 한다. 수양한다는 말은 악한 마음과 행동을 선하게 길들인다는 말이다.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길들인다는 말은 이미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자신도 모르게 이미 길들여 져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나 마음과 뜻대로 안 된다. 인간이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의롭게 살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선행(善行)이나 또는 의행(義行)을 계속 반복 수련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마음과 의지가 악에 길들여져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인간이 선하게 의롭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개입하셨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 된 인간을 용서 하는 것이다. 즉 대속하시고 용서하시는 것이다. 죄를 범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고 그 죄를 해결하는 길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한다. 사랑의 종교라는 말은 인간이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라는 말보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 종교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한 개입(사랑)의 종교이기 때문에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요일 4:9-10]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다. 그 믿는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회개할 필요도 없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제사를 드리도록 명하셨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제를 드렸다.

 

예수께서는 회개를 목욕과 발 씻음으로 비유하셨다.

(요13:9-10)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 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단적으로 말씀하셨다. 이 말은 회개의 두 가지를 말씀하심이다. 하나는 구원의 회개이며 하나는 성화의 회개이다.

 

1. 구원의 회개는 단회 적이다.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구원의 회개는 단회 적이다. 구원의 회개는 두 번할 필요가 없다. 구원의 회개는 멸망 받지 않기 위한 회개이다. 죄인인 내가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천국 백성으로 인정되어 나의 신분이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화되는 회개이다.

 

즉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과 나의 구주되심을 믿고 돌아와 그 안에서 생활하는 회개이다. 이 회개는 두 번 할 필요가 없다.

 

그러기에 믿는 자는 나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는 드리지 않는다. 내가 죄악 된 길에서 돌아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에 나의 원죄가 용서되고 그리고 자범 죄도 용서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

 

이 회개로 사단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망의 종에서 영생의 자녀로 신분이 전환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것이다.

 

(요5: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 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은 구원의 회개에 이른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이는 구원의 회개에 이른 자는 더러운 자가 목욕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지 아니하고 또 구원에 염려하지 아니한다.

 

우리는 주님은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마다. 진실로 진실로 를 강조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웠느니라 하고 말씀하셨고 우리는 그 말씀을 믿는다.

2. 성화의 회개는 반복적이다.

 

죄악 세상에서 성화의 회개는 반복 적이다. 이미 목욕 한 자는 발을 씻어야 한다고 했다.

 

발 씻음의 회개 성화의 회개는 구원의 회개로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하게 되려는 교육이다. 우리가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했다 해서 우리의 모든 성향이 변한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죄인 된 우리가 죄악과 더불어 살았기에 본성이 악으로 물들어 있고 죄행으로 습관 되어 악습이 생활화되어 있다.

(고후7:10)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 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엡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이 말씀은 믿기 전 악한 본성과 악한 행습을 벗겨내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라는 말씀이다. 이 성화의 회개는 나에게 주신 은혜(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를 누리는 선한 싸움이다.

 

사탄은 자기에게 예속된 백성이 하나님께 귀속됨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에게 속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역사한다. 거짓 선지자들을 동원하여 세상 권세를 동원하여 거짓 음행의 영들을 동원하여 대적하고 유혹한다. 그러기에 싸워야한다고 했다.

 

그러기에 언제나 싸움에 대비하여 살라고 했다.

엡 6:12-14.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어둠의 세상 주고나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완전하게 갖추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갖추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한 나라 백성으로 미완성이라는 말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 백성으로 구비하도록 시험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 된 자는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므로 그 뜻대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불신앙으로 길들여진 나이기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길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구비되어야 한다.

 

성화의 희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에 불순종한 죄를 회개함을 말함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완성되기 위한 회개이다. 구원을 받기 위한 회개가 아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보장을 받은 내가 거룩하신 아버지와 살기 위하여 나를 훈련하는 생활이다.

 

우리는 악한 세상에서 살지만 이 회개를 통하여 거룩해진다.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은 바뀌었으나 나의 악습은 남아 있다. 죄의 존재도 이 세상에 남아 있다. 또 죄인들과 합하여 살고 있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 수 없다. 그러기에 회개의 길을 마련하여 거룩해 지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성화의 회개는 구원을 염려하는 회개가 아니라. 성화되려는 훈련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버리시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징계하신다.

 

3. 후회와 자책은 회개가 아니다.

 

마27:3-5)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 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했다.

 

어떤 사람들은 유다의 자책을 회개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후회와 자책이 회개가 아님을 깊이 알아야 한다. 회개는 혼자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가 있는가 주님께 죄를 범하였으니 주님에게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 스스로 뉘우치고 자책하고 목숨을 끊는다 해서 용서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없는 자책이나 후회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사람에게 범죄하였으면 그 사람에게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으면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한다.

 

유다의 사건을 살펴보자.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자신이 범죄하였다고 스스로 자인하고. 제사장들에게 받은 은을 다시 돌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을 의인을 판 무죄한 피를 판자라고 자인하고 괴로워하였고 가슴을 치며 후회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도저히 살아서는 안 될 존재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유다는 자신을 자책하고 후회한 것은 영혼을 위한 믿음의 회개가 아니고 도덕에 의한 자책이고 후회인 것이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죄를 용서한다면 어느 누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사람이 있는가? 그리고 후회와 자책, 그리고 죽음으로 죄 값이 용서된다면 인간들 중에 자책하고 후회하면서 죽는 사람이 많이 있다.

 

가룟 유다가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자신의 용서 받을 죄를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 고백 했어야 하고 그 주님께 죄를 범하였으므로 주님께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죄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강도처럼 염치를 불구하고 나의 영혼만이라도 살기 위하여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다. 돈주머니를 가지고 주님께 와서 영혼만이라도 살려 달라고 구해야 한다. 그리고 빌라도에게 가서 그리스도의 무죄임을 증거 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웠기에 그리스도 구주인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유다는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가 자책하고 후회한 것은 영혼을 위함이 아니라 도덕적인 양심에 의한 질책일 뿐이다. 영혼 때문에 괴로워하고 후회한 것은 아니다. 그가 영혼이 멸망한다는 것을 믿었다면 주님을 배신 할 수 없다 그러기에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가룟 유다의 신앙은 영생이 없었고 그리스도를 영생의 주로 믿는 신앙이 없었다. 그러기에 유다의 죽음은 주님과는 상관이 없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가 모든 기도는 주님의 이름으로 한다.

주님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용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자살할 수 있는가 말이다.

대상이 없는 후회나 자책이나 내세를 믿지 못하는 후회나 자책은 아무 것도 아니다.

자학이며 자책일 뿐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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