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가사의 내용에는

하나님 지향적인 것과 인간 지향적인 것,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범인간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세계적인 것과 국소적인 것,

찬양적인 것과 기복적인 것,

현세 지향적인 것과 내세지향적인 것,

협동적인 것과 권유적인 것,

예배적인 것과 교육적인 것,

고백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성서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등의 내용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내용 중에서 어떤 내용이 바람직한 찬송가사의 내용이 되어야할 것인지는 우리가 깊히 생각해야 할점이다.

"면류관 씌우자"의 가사 내용을 보면 1절 "보좌위의 어린양께 면류관 씌우자" 2절은 "사랑의 주님께 면류관 씌우자" 3절은

"평화의 주님께 면류관 씌우자"로 되어 있다. 영어가사에는 4절까지 있는데 "생명의 주님께 면류관 씌우자"라는 주제가

각절의 내용이 되고 있다. 우주적이고, 교리적이고, 신앙고백적인 가사로 높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잘 찬양한 가사라고 본다.

 

찬송가사의 내용이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둘중 어느 것이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이성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대답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찬송가 가사가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힘이 없을 때 사람들은 진정한 마음으로 영적인 찬양을 드릴 수 없게 된다. 성서적이고 문학적인 것 중 어느 것이냐 할때 성서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대답 하겠지만 문학적인 가치가 없으면 그것도 좋은 찬송가사라고는 볼 수 없다. 

 

19세기에 미국 교회에서 크게 유행이 되어 오늘날 한국교회에 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복음찬송가(gospel hymns)를 예로 들수 있다.

복음찬송가를 분석해 보면 독단적인 신앙과 감상적인 표현으로 비록 그 가사의 내용이 구원에 관한 성서적인 복음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해도

예술적인 가치가 희박하고, 은총으로 구원이 온다는 교리적 풀이도 신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그 표현이 대단히 유치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아무리 복음 찬송가를 예배에서 부르지 말라고 해도 모든 교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애창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간과해 넘길 수 없는 사실이다. 

바로 이점이 찬송가의 발생에서 언급했던 찬송가의 본래적인 요소였던것을 밝히고 싶다. 

이와같은 요소가 우리의 신앙을 잘못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에 초대교회에서 찬송가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문학적인 가치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학적인 가치가 높은 가사만이 훌륭한 찬송가가 된다고는 또한 생각지 않는다.

문학적인 가치가 높으면 높을 수록 기독교적인 가치가 반비례로 낮아진다고는 할 수 없으나 문학적인 가치가 높은 작품은 대개의 경우 범인간적이 못되고 전체적이 못되어 그로 인해 기독교 예배의 핵심인 공동적 또는 협동적 예배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공동적예배(Corperative Worship)가 되기 위해서는 그 예배에서 사용하는 모든 언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언어여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쓴 가사는(찬송가란 개념 없이 쓴 것이기 때문이겠지만) 시어가 너무 많아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많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역대의 찬송가사 작가중 세계적인 시인은 거의 없고 대개 목사들, 그리고 은혜받은 평신도들이 많다.

은혜를 받은 감격적인 상태에서 쓰여진 시는 다른 사람에게도 쉽게 감격적일 수 있으나 고도의 지식을 종합해서 각고의 정신적인 노동작업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가사와 음악은 쉽게 대중에게 불려지지 않게 되고 마침내 작품의 탄생과 함께 사장되고 만다.

대중성과 예술성 그 사이 어디엔가 우리가 차지할 땅이 있는데 그 위치 선정이 또한 대단히 어려운 작업인 것이다.

대중성과 예술성을 논하기 전에 더 근본적인 것은 찬송가의 '맥'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의 흐름'이다. 

 

영혼의 흐름이 없는 찬송가는 예술 가곡은 될 수 있어도 찬송가는 되지 못한다. 

이러한 영혼의 흐름은 영적인 체험 없이 이루워지지 않는다. 

영적인 체험에서 쓰여지는 찬송가만이 영원한 찬송가가 될 수 있다.

 

가사의 토착화 문제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문제가 또 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할렐루야(히브리어) 또는 알렐루야(라틴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실상 우리교인들은 이 뜻을 모르고 노래한다.

이 말의 본래의 뜻은 "주를 찬양하라"는 뜻인데 기쁜 마음으로 주를 찬양하고자 할때 후세인들은 "할렐루야"란 말로 노래하였다.

따라서 "할렐루야"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쓰는 말이란 새로운 개념이 생기게 되었다. 

 

성경에서 "기쁜 마음으로 주를 찬양하라"라고 말한 것을 많이 읽을 수 있는데 우리가 이때 "할렐루야"란 말 대신에 우리말로 어떻게 토착화 시킬 수 있겠는가하고 곰곰히 생각해 본적이 있다. 이飁 생각해 낸 것이 "얼씨구 좋다. 지화자 좋다. 

주님을 찬양하세"란 말이다. 이건용의 작품에 "에헤이야 디어 상사디어"란 말을 써 놓고 그 밑에 괄호를 열어 "할렐루야 할렐루야"로 대치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에헤이야 디어, 상사디어"가 용납되지 않을 경우 "할렐루야"로 대치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에헤이야 디어 상사디어"가 실지로 발표됬을때 연세 높으신 목사님들이 반대 한적이 있다. 

  "얼씨구 좋다. 지화자 좋다"도 즐겁고 기쁜 표현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자칫 술먹고 흥청거리며 주정하는 기분을 불러 일으킬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좋은 토착화 가사라고 볼 수 없다. 

 

 그러면 어떤 가사로 하나님을 탄양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Calvin은 "이 세상의 아무도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것 이외의 것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찬양을 드릴 수는 없다"라고 말한

성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해답을 주고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다윗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로 쓰여진 시편보다도 우리의 목적에 더 적합하고도 더 좋은 노래를 찾을 수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리하여 Calvin은 시편가만을 부르게 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찬송가는 모든 교인들이 공동으로 취할 수 있는 찬양과 기도와 신앙고백의 내용이 있어야 하고 이것을 체험적이고 신비적이고, 고백적으로 기술한 내용이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 신앙의 올바른 모습을 찾기 위하여 시편 찬양을 부활시키고 훌륭한 예배 찬송가를 펴내기 위한 작업은 교회 음악가들에게 맡겨진 중요한 작업이라고 본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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