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리가 보인다.

 

설교는 소리로 전파됩니다.

설교자의 모든 것을 폭로하며 ‘들림’에서 ‘보임’에까지 나아갑니다.

우리는 강대상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설교자의 ‘소리’를 들으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리를 통하여 두 가지가 보입니다.

 

첫째는 숨겨도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설교 준비 부족입니다.

설교 준비 부족은 성도들이 오감으로 느끼게 합니다.

 

1)찬송가 가사를 틀리는가 하면

2)잘못 찾은 구절에 성경을 구겨 맞추느라 하나님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3)얼굴 표정은 경직되며

4)일부러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하다보니 부자연스러워지고

5)설교가 길어지곤 합니다. 너스레를 떨며 프로처럼 보이려고 여유도 갖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영적 나태의 낙숫물이 짜증스럽게 계속해서 떨어집니다.

‘음! 애! 아!’ 하면서 계속해서 간투사를 구사함으로써 생각할 시간을 벌려고 합니다.

웃음 진 얼굴의 표피 뒤의 대뇌에서는 연기가 날 만큼 돌파구를 찾고 있습니다. 다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감으로 느낍니다.

“설교 준비를 하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강단에 나오는 것은 용서 받지 못할 무례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성도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영감 없는 설교를 향하여 스위치를 꺼버렸습니다. 회중의 장의자에는 스위치를 꺼버린 무감각한 사람들이 고개를 쳐들고 공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한 장면입니다.

 

설교 준비는 충실해야 합니다.

단순히 서재에서의 한 시간의 준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에 긴장을 갖고 충실히 공부하며 기도하며 영혼을 깨어놓고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삶의 준비만이 설교를 준비할 최고의 서재입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동역자 들이여, 설교를 준비합시다. 인생을 열어 놓고 준비한 설교가 케네디가 말한 저절로 준비된 설교일 것입니다.

 

소리를 통하여 보이는 두 번째 것은 엄격히 말하면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학에서는 흔히 ‘자기 노출’이라는 단어로 말합니다.

강대상 앞에서 너무도 유창히, 너무도 완벽한 사람인 양 설교하는 사람은 감탄은 자아낼 수 있지만 듣는 이들에게 한없이 작아짐을 느끼게 합니다.

설교자들은 쉽게 자기를 들어내지 못합니다. 솔직하지 못합니다. 약함으로 강해지는 역사를 잘 모르는 듯합니다.

 

월리몬(W.H.Willimon)은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설교자가 말씀의 결정체를 붙들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자아가 깨뜨려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서신 서에서 은혜를 증폭시키는 요소가 있다면 역시 바울의 겸손한 자기 고백이며 자신의 약함에 대한 고백일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서는 가상의 진리가 아닌 실존의 진리인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얘기하십시오. 우월자가 아닌 먼저 순종한 사람으로서 순종을 촉구해 보십시오. 듣는 이들의 가슴에 뭉클한 그 무엇을 만들 것입니다. 설교의 소리에 무한한 하나님의 음성을 담아 보십시오. 아벨이 자신의 제물을 잡는 소리와 노아의 망치 소리와 갈멜산 엘리야의 하늘을 향한 외침을 담아 보십시오. 사방에 소음이 가득한 시대에 눈에 보이는 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메신저가 될 것입니다.

 

2. 험한 세상에 다리 되어

 

설교자는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는 일을 합니다.

다리 한쪽은 하나님의 거룩에, 다리의 또 다른 한쪽은 인간의 삶과 한복판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웬일인지 다리의 한쪽 끝이 닿지 않게 밧줄을 위에서 내려놓고 약 올리듯 밧줄이 흔들립니다. ‘잡아야 사는데….’ 하지만 그 밧줄은 우리의 팔이 미치는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분명 밧줄은 있는데 그 밧줄을 붙잡고 올라간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회중들의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들이 이미 전에 들었던 메시지이다.

 

그들은 주일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그 설교를 알고 있다.

그 설교는 회중들을 ‘사로잡거나’ 흥분시키지 못한다. 그들은 문제를 안고서 교회를 오지만 여전히 문제를 갖고서 교회를 떠난다. 존 스타트(John Stott) "설교가 본문에 푹 빠져서 한 구절씩 해석해 나간다고 할지라도 현실 문제를 전혀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면, 그 설교는 본문이 성취한 것을 성취하는데 실패했다는 의미에서 ‘비성서적’인 것임이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크레독(Fred B. Craddok)

 

설교자는 구름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 주일 동안 성도들이 뭐하던 사람들이고, 어떤 현실에 팽개쳐져 있었는지, 그들의 가슴 속에서는 어떤 욕구가 일고 있으며, 무엇에 목말라 하고 있는지 상상조차 안하고 설교문을 작성한다면 하늘을 향해 들려 있는 스피커를 가지고 설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현실은 복잡합니다. 이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자면 먼저 그들의 삶을 최대한 추적하며 상상하며 느끼려고 애써야만 합니다.

 

“함께 직시하자. 삶은 복잡하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그렇지 않은 것처럼 설교한다.”헤돈 로빈스(Charles Haddon Robinson)

 

저는 설교 부탁을 받을 때 먼저 설교 본문을 찾기 보다 그들의 필요사항을 알려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 그려진 심상을 가지고 가장 적절한 말씀을 찾아 그들에게 다가갑니다. 현실적인, 그러면서 가장 성경적인 본문을 가지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적절한 말씀입니다. “잘못된 설교는 겉보기에는 적절한 설교가 말하는 것과 똑같은 내용으로 말한다.

 

다만 적절한 곳에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뿐이다. 로젠스툭(Rosenstock)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는 설교는 먼저 듣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하는 자체로 만족하지 말고 그 말이 이루어낼 수 있는 결과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의도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성도들의 현실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하는 과제 앞에 놓여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의 정황(context)과 절연된 말씀이 아닌 그들의 삶을 휘저어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설교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자신과 상관없는, 자신의 삶에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얘기에 흥미를 느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설교는 듣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입니다.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십시오. 이 땅의 가난한 영혼들을 주님의 영광에 잇대어 줄 수 있는 다리가 되십시오. 설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3. 신학적인 설교자, 신학을 전하지 않는 설교

 

신학교의 이유는 참 설교자를 위한 구조적 뒷받침이요, 참 설교를 이루기 위한 신학의 형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루한 설교, 실천되지 않는 설교, 정통적이지만 알맹이 없는 설교까지도 신학적 진술이다.”

리처드 리스처(Richard Lischer) 신학적 진술이 아닌 설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신학’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여기에는 많은 이견들이 있겠지만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얼굴에 대한 이해입니다. 성경 66권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의도와 계획과 우주의 비밀을 통하여 하나님을 정확히 알아 가는 도구입니다.

 

성경을 공부한 사람은 누구나 신학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 그것이 그 사람에겐 신학, 즉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학문이 됩니다. 신학은 성경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고 성경 이해와 하나님 이해가 아닌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존재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종교학이 되고 맙니다. 때론 신학이 뭐가 필요하냐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지만 이 말처럼 무지한 말은 없습니다. “까짓 도로가 뭐 필요해. 차만 있으면 됐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설교자는 누구보다도 산학에 대한 풍성한 지식과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설교란, 불타는 사람을 통하여 신학이 나오는 현상이다.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와 체험이 있다면 반드시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e Lloyd Jones)

 

설교자들이여 기본을 익혀라.

신학적 이해가 없는 설교자를 만나 보신 적은 혹시 없으십니까? 그런 사람의 설교는 도대체 중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이랬다 저랬다 잡을 수 없습니다. 신학적 바탕이 없는 설교자는 하기 쉬운 도덕주의 설교에로 유혹 받기 쉽고, 야단치는 설교를 선호하며, 또 너무도 자주 잡담으로 설교가 귀결됩니다. 신학은 어떻게 이 본문이 신앙의 핵심과 관련되어 있는가를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것이 신학의 역할입니다. 때문에 설교자는 누구나 신학자여야 합니다.

 

또한 끊임없이 신학을 연마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더욱 분명한 하나님 이해와 바른 이해를 위해 부단히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성격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정의가 없다면 필요한 때에 헛발질만 하게 됩니다. 반대로 이 기본에 충실한 설교자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바른 가르침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자신있게 선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릇을 먹을 수는 없다. 저는 나름대로 신학을 정의할 때 그 도구적 의미로서 신학은 ‘그릇’이라 생각합니다. 그릇이 없다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를 떠나서 아예 식사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측됩니다. 땅바닥에 퍼져 있는 국물, 온 군데 널려 있는 반찬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은 ‘그릇’입니다. 가장 기본이기 때문에 소중함을 모르고, 가장 기본적이기 때문에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하다고 해도 그릇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성도들의 영육간에 강건함을 위해 식탁을 차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식탁 위에는 그릇만 있고 내용물이 없습니다. 종말론, 기독론, 성령론, 가득하지만 먹을 음식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잔뜩 지식을 자랑하지만 성도들은 굶주립니다. 신학을 설교하지 마십시오. 신학은 이미 당신 속에 용해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치 소금이 물에 용해되듯 신학은 그저 모든 것에 있어야 하며, 복음을 담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4.설교자의 절대 조건, 설교의 필수 요건

 

자동차에는 바퀴가 있어야 합니다.

비행기에는 날개가 있어야 합니다.

설교자에게는 ‘설교자’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도 설교와 설교자를 나눌 수는 없습니다.

설교는 설교자입니다.

 

“설교는 설교자를 만들고 설교자를 전달하는 기술이다.

설교는 말하는 가운데 영혼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설교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설교가 아니라 설교자다.

설교하는 일에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나의 설교자의 업무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 있는 것을 줄 수 있도록 하나의 위대한 영혼을 건축해 나가는 일이다.

오늘날까지 설교가 설교자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미국 감리교 감독 콰일(Quayle)

 

설교는 설교자인데 그 설교자란 다름 아닌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영광의 광채에 두 눈은 휘둥그레지고 다리는 떨리며 입에서는 찬미가 터져나오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설교자의 심장입니다.

주님을 향해 목말라하고 그분을 인해서 심장에 떨림이 있습니까? 당신의 입에 증언할 말이 있으며, 속히 말하고 싶어하는 바쁜 심정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설교자입니다.

 

“마음의 준비는 설교의 준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설교자의 말이 아무리 맑고 힘차다 하더라도 체험에서 잉태된 확신으로부터가 아니라면 참된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다.”존 스타트(John Stott)

“하나님을 향하여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존 스타트(John Stott)

설교자로 부르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 ‘설교학’은 너무도 의미 없는 학문입니다.

수십 개의 학위가 있다 해도 그것은 단지 먹지 못할 케익 위에 놓은 삼류 장식물과도 같습니다.

 

“실패는 설교자에게 있다. 그는 천사의 노래를 들어 본 적도 없고 묵시도 보지 못했고 경이스러운 거룩함의 휘몰아침도 느끼지 못했으며 극단의 자기 부인과 죄의식과 유약감에서 오는 절망 때문에 소리내어 울어 본 적도 없으며 하나님의 제단으로부터 타오르는 불꽃에 인화됨으로 청결케 된다든지 마음에 감격을 받는 다든지 혹은 그의 생활이 새롭게 되는 등 그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전혀 무관하다” 바운즈(E. M. Bounds).

 

설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거룩하신 하나님의 증인이어야 합니다. 이 절대 조건은 종말이 와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교의 필수 요건, 음성도 멋지고, 내용도 좋고, 시간 사용도 적절하며, 회중은 점잖고 열의가 있으며, 예배당은 쾌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설교를 은혜롭게 하진 않습니다. 평신도들은 설교자 여러분이 복음에 붙들린 열정의 사람이길 간절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설교자 여러분 자신이 붙들리어 꼼짝 못하는 복음을 듣고 싶어 합니다.

 

“설교자가 말하는 모든 것이 옳고 거의 완벽하다 하더라도, 살아있지 않고 냉랭하며 감동적이지 않고 차갑다면 이는 설교자 자신이 감동 받지 않았다는 증거이다…열정이란 설교자가 언제나 자신이 말하고 있는 주제에 스스로가 온통 사로잡혀 있다는 인상을 청중에게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e Lloyd Jones)

 

“청중들에게 전달할 메시지가 설교자를 꼼짝 못하게 사로잡을 때에만 설교는 힘을 갖는다. 전달자가 메시지에 사로잡힐 때 그 설교는 살아서 숨을 쉬고 용솟음친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는 일련의 진부한 도덕적 교훈이나 서투른 집단 치료의 시도로 쉽게 전라하고 만다.” 윌리엄 윌리몬(William H. Willimon)

 

현대는 선택사항(option)과 액세서리의 시대입니다. 액세서리와 선택사항의 모든 요소들을 지금 책상에서 말끔히 밀어내 보십시오. 만약 그 자리에 설교자로서의 절대조건과 필연적 설교의 필수 요건이 남아있다면 우리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5. 금단의 열매

 

마치 에덴의 금단의 열매처럼, 설교자들 앞에는 먹지 말아야 할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음을 봅니다.

따먹으면 안됩니다. 따먹는 즉시 우리의 목은 가시로 고통당하며 눈과 코는 눈물로 범벅이 되어 뱀처럼 땅을 기게 될 것입니다. 설교의 가치가 탁월하고 빛날수록 그 현상적 중심에 있는 우리는 그 빛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갔다고 순간 착각하게 됩니다. 정말 순간입니다. 교만의 으뜸, 내가 열심히 노력한 만큼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은 그야말로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잘했다는 소리를 들을 때는 너무나 기분이 좋고, 잘못했을 때는 너무나 낙담됩니다.

 

그러나 설교는 이러한 일반적인 도식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특별한 일입니다. 청지기의 노고는 칭찬받고 격려 받을 수 있지만 교만의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실수 많은 인간들 중의 한 사람인 설교자들은 때때로 사람들의 갈채를 자신의 대한 것으로 착가하고 스스로를 하늘의 구름위에 놓습니다. 주님의 응답, 주님의 은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의 힘은 모두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영감 없는 설교란 얼마나 메마르고 지루하고 답답하며 값어치 없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예뻐서라기보다, 그분의 귀중한 사역을 위한 도구로서 지식과 지혜와 음성을 허락하셨습니다. 만약 그것들을 공무에 사용치 않고 사리사욕에 이용한다면 우리는 도둑질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 또한 교만의 연장선상일 뿐입니다. 물론 때로 어떤 설교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고통을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자신의 걸어온 길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고난의 종’이라는 것을 부각시키면 안됩니다.

 

“주님께 굴복한다는 것은 굉장한 희생도 아니고, 고통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일이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설교단을 자신의 분풀이 장소로 사용치 말라. 설교단이 설교자 자신의 견해 발표 장소나 장로들에게 무엇을 요청하기 위한 협박의 장소로 사용된다면 이는 엄밀히 말해 설교단 “용도 변경”입니다. 강단은 빈정거림뿐만 아니라 ‘사람을 섬겨라, 양복을 사줘라, 먹을 것을 잘 대접하라’는 식의 청구서형 강단으로 전락되기도 합니다. 설교단에서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설교단을 자신의 은혜나 받아 보려는 장소로 사용치 말라.

 

“어떤 경우에는 강사 자신도 침체되고 영적인 짐에 억눌린 상태 그대로 집회에 참석해서 그 모임을 통해 어떤 감동이나 은혜 받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집회를 인도할 때가 있다." 제씨 펜 루이스(Jessi Penn Lewis)

설교자들은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로 ‘어떻게 되겠지’하는 신앙 아닌 신앙을 갖고 설교단에 오릅니다. 자신의 불성실에는 책임을 묻지 않고 무조건 예배를 통한 감동과 영감을 찾아 누리려고 합니다.

“설교자가 스스로의 치료를 위해 청중을 사용한 것이다.” 해돈 로빈슨(Charles Haddon Robinson)

 

설교자는 영광과 함께 유혹의 손짓을 끊임없이 받고 있는 자리에 서있습니다.

너무 많은 일에 수고했기 때문에 “내가 잘 대접받는 것이 곧 주님이 대접받는 것‘이라는 논리에 숨어 보려고도 합니다.

그럴싸한 유혹에 강단을 사탄에게 ’대여‘ 한다면 엉겅퀴가 돋은 돌밭을 헤메이게 될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단지 종입니다.

 

6. 제목 없음

 

제목은 전하고자 하는 내용과 어울리고 또 그 내용물을 잘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목의 역할이며 제목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설교는 언제나 분명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뚜렷합니다. 만약 이 기초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절대로 제목도 바르게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설교의 제목 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설교를 통하여 회중에게 강력하게 도전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가 초점이 흐리다거나 논리성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설교의 주제를 짧고 함축성 있는 한 문장으로 수정과 같이 맑게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는 설교할 준비가 된 것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존 헨리 조윗(John Henry Jowett)

 

제목은 사람들을 설교로 이끕니다.

“무엇이 남자를 남자로 만드는가?”라는 제목에 20%의 출석이 증가했다고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고백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주보를 바라보고 그 설교가 나의 필요에 근접해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가를 궁금해 합니다. 제목은 그러한 면에서 주보만으로도 사람들을 강단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제목은 내용의 보증을 받아야 합니다. 제목은 그럴싸한데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라면 다시는 사람들이 속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신하며 조잡한 Word Play에 머리를 흔들 것입니다. 제목은 언제나 내용의 보증을 받아야 합니다. 제목과 내용이 일치할 때 결국 제목은 자기 몫을 다하고 사라질 것입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사람들이 오해 “어려운 성경적 문제는 피하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에만 쉽게 하는 것 아니냐”는 것 하지만 내용의 보증을 받는 제목이라면 누구도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목만 큰 기대를 주고는 내용이 부실하고 치밀히 못하며 영감도 없는 설교라면 성도들은 목사가 기획한 새로운 반짝 쇼임을 알고 한 달 후면 아무 기대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제목은 얼굴과 같습니다. 현대는 카피의 시대라고 합니다. 머리에 박히지 않은 무구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정말 좋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영 상투적이라 실패할 수도 있고, 안타깝게도 튀는 제목, 사람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제목 때문에 ‘그냥 그런 책들’이 호기심을 일으키며 반짝 팔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7. ‘아직’과 ‘벌써’의 차이

 

‘아직’과 ‘벌써’의 차이는 감동의 차이이다.

성도들의 설교에 감동 받고, 은혜 받고 있다면 ‘벌써’일 것이고, 성도들이 온몸을 뒤틀며 꼬고 있다면 ‘아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시간을 설교하지만 20분밖에 안된 것같이 느껴지는가 하면 어떤 설교자들은 20분동안 설교하지만 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다시 말하지만 ‘아직’과 ‘벌써’의 차이는 시간의 차이가 아니다. 은혜의 차이, 감동의 차이인 것이다.

 

설교 시간에 너무 구애받지 마십시오. 성도들을 충분히 생명의 시내로 이끌 수 있다면 2시간이라도 좋을 것입니다. 저는 간혹 15분에서 20분 사이에 짧게 끝날 때가 있고, 어떤때는 45분이 넘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은혜를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짧지만 은혜롭고 때로는 길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설교시간은 수업시간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때때로 설교의 ‘시간’에 매우 괴로움을 느낍니다. 성도들이 느끼기에는 말씀의 요지가 다 전해진 것 같은데 단 위의 설교자가 시간을 질질 끌며 말씀을 부언할 때 앞서 받았던 은혜마저 잃어버리게 됩니다. 길다고 은혜 되는 설교는 아니다.

 

“좋은 설교는 길 필요가 없고, 나쁜 설교는 길어서는 안된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부흥 강사들 중에는 3시간 내지 4시간 더 나아가 5시간까지 설교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배를 5시간 드렸다는 데에 묘한 승리감과 성취감을 비정형성에서 찾는 듯합니다.

묘사적인 설교는 시간을 많이 점유하기 때문에 부흥 강사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교회 강단의 설교자들이 ‘하얀색의 양복’이라고 1초에 걸쳐 말할 것을 가래가 나올 듯한 목소리로 배 밑에서부터 끌어올리며 “학~얕고 눈송이처럼 회~인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멋진 비로도 양복을 입은” 이런 식으로 묘사합니다.

 

“뜨거운”이 아니라 “뜨거~~~운”입니다. 5분이면 말할 내용을 리얼하게 묘사한다고 30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교자들의 조건은 뻔뻔스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1분의 설교가 긴 침처럼 성도들을 찌를 수도 있으며, 때로는 2시간의 메시지가 성도들의 심금을 울리고 회개케 할 것입니다.

결국 ‘아직’과 ‘벌써’의 차이는 시간이 아닌 감동이라는 것입니다.

 

8. ‘자연스러움’의 아름다움

 

설교는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설교자는 자연스러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연스러움의 강점은,

첫째. 오래도록 바라봐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둘째. 호소력이 있습니다.

셋째. 마음이 행위로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진실되게 보입니다.

자연스러움은 인위적인 것을 거부하고 배제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작위적인 모습이 보이면 부자연스러워집니다.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논리가 아닙니다. 물건이 기울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논리가 아닌 것처럼 ‘그냥 그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부자연스러움의 특징은,

첫째. 피곤해집니다.

둘째. 상투적이라 싫증이 납니다.

셋째.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아 진실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부자연스러운 설교자와 설교를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이 ‘부자연스러움’을 야기하는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말하는 사람이 확신이 없으면 부자연스럽습니다.

여러분은 아르바이트생과 장사꾼의 차이를 아십니까? 아르바이트생은 아무리 꾸며도 얼굴에 ‘나 아르바이트’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생계가 걸린 장사꾼과 같은 설교자는 내적인 확신은 외적으로 자연스럽고 확신 있는 태도를 만듭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말하는 자가 확신이 결여되어 있어서 내적인 진리의 압(壓)이 부족함을 되는데 이 ‘진리의 압(壓)’은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하진만 내적인 이 ‘진리의 압’이 부족하면 하나남 흐트러져도 부자연스럽게 흐릅니다.

 

둘째로, 솔직함이 부족하면 부자연스러워집니다.

숨기려는 사람은 손짓이 이상하고, 눈초리가 불안하며, 인위적인 행동들이 돌출적으로 나옵니다.

숨기려는 자세, 무언가 은폐하고자 하는 자세는 결코 설교자에게 없어야만 합니다.

 

셋째로, 자기를 꾸미고자 하면 부자연스러워집니다.

자연은 꾸미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함이 아닌 ‘위장’ 내지 ‘과장’으로 꾸미려고 시도하면 필연코 그 설교자는 부자연스러운 흐름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자연스러움과 자유함이 있지, 억지로 하는 듯한 ‘작위적’인 냄새가 없습니다. 설교를 만들어 내기 위해 틀에 넣고 짠듯한 느낌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보입니다.

설교자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겸허히 복종하며 말씀에 제일 먼저 감격하고 어린아이처럼 살아간다면 우리의 존재가 설교의 제일 먼저

감격하고 어린아이처럼 살아간다면 우리의 존재가 설교의 자연스러움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9. 설교자의 편식

 

설교자들이 새로운 필요한 성경을 등한시하고 늘 익숙한 본문과 성경 부분을 가지고 설교할 때 성도들은 원치 않게 편식을 하게 됩니다.

늘 듣던 말에 싫증을 내버려 성경의 깊은 맛을 보지도 못하고 성경의 또 다른 내용을 영원히 들어보지도 못하게 됩니다. 설교자도 사람인지라 자신의 취향과 관심분야만 늘 생각하다 보니 의도하지 않았지만 기울어지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단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밖에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설교자가 의도적으로? 성도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비극에 처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고 싶은 설교만을 한다면 반드시 절단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설교자가 실제로 그를 매료시키지 못햇을지라도 성서에서 택한 것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전하며, 실제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교리나 이제까지 회피해 왔던 신앙적인 문제를 연구하여 전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

 

설교자는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 복음의 필요성에 의해서 인생의 전부분과 교리의 전부분을 골고루 연구해서 먹여야 합니다. 존 스타트가 말한 대로 극단적 등한시와 극단적 강조를 벗어나야 합니다. 아직 한 번도 다루지 않은 본문과 문제들을 다루어 보십시오. 만약 익숙하고 어려움을 느끼지 않은 본문만 손에 잡고 있다면, 하나님의 한쪽 얼굴만을 영원히 볼 것입니다.

 

10. 자기교정이 필요하다.

 

더 나아진다는 것은 자기 교정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매일 배우고 새로워지며 고치고 교정한다면 누구나 모든 일에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외국 사람과 앉아서 멋지고 우아하게 영어회화를 하는 사람도 분명 과거에는 톡톡한 값을 치루고 영어를 배웠을 것입니다. 또 지금은 소리만 들어도 자동차 고장을 진단해 내는 정비사도 처음에는 많은 꾸지람을 들으며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교정(Feedback)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했어도 그 발전은 미미할 뿐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설교사역을 해오 신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다 설교의 대가(大家)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나쁜 습관은 교정되지 않으면 화석화됩니다.

 

문장을 교정하십시오.

사람마다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도 독특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원문 비평을 할 때 큰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설교자들의 설교 문을 보면 상투어에 가까운 말들이 많은데 말하는 습관이 너무 고착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원고를 펼쳐놓고 고쳐 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컴퓨터로 설교 문을 작성하는 것이 유익될 때가 있습니다. 설교자들이 조금씩이나마 자신의 설교 문을 새로운 패턴과 문장구성으로 고쳐나간다면 설교들의 해마다 조금씩, 조금씩 간결하고 깨끗하며 명확한 문장으로 변화되는 희열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발음을 교정하십시오.

한번은 울산의 한 교회에 방문하여 삼일 밤 예배를 드리는데 목사님의 발음에 신경이 쓰여서 설교를 제대로 듣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ㅇ’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ㅇ’이 나오는 부분은 꼭 일부러 웃기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져 정말 우스웠습니다. 설교 내용은 둘째치고, 발음 때문에 목회에 커다란 장애가 있으리라 추측되었습니다. 또한 말 뒤끝이 자주 흐려지는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 인식을 하곤 있지만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발음 교정’ 혹은 ‘억양 교정’은 녹음기로 녹음하여 스스로 듣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발음을 확실하게 교정하려면 자기 자신의 말을 들어보는 길 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녹음기를 갖고 있지 않고 친구 중 한 사람이 이 녹음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우리의 설교에 대한 환멸적인 경험을 제시해 줄 것이다."제널드 케네디(Gerald Kennedy)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을 발표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녹음기를 통하여 자기 목소리를 들을 때 가장 먼저 ‘내 목소리가 맞는가?’ 하면서 낯설어 할 것입니다. 촌스럽기 그지없는 억양, 엉뚱한 곳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오버 액션, 음! 애! 하는 쓸데없는 소리, 말 뒤끝이 흐려져서 무슨 말인지 명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 고질적인 습관 등등. 그야말로 케네디가 말한대로 “환멸적인 경험”입니다.

 

비단 설교자만이 아니라 모든 세상 사람들은 자기에게 익숙한 것에 고정되어 버립니다. 변화라는 단어보다는 안정을 더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는 용감한 자, 자기 교정에 익숙한 자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칫하면 일생 동안 한 가지 방법론만 고수하다가 죽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한 가지 설교 준비 양식이나 설교 스타일에 안주하기가 쉽고 따라서 전혀 비판적인 평가를 겪어 본다든지, 다른 방식을 고려해 본다든지 하지를 않게 됩니다.” 크래독(Fred B. Craddok)

 

설교자의 자기 교정은 단순히 문장과 발음에 국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본질적으로 성경을 다루는 자신의 방법과 성경관이 더 건전하고 성숙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자는 결코 성도들을 진정으로 알지 못할 것이며 교회의 잘못된 점도 발견치 못할 것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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