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전통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교단을 막론하고 엄격한 주일성수를 강조해왔다. 주일에 상행위, 여가활동, 친목과 교제, 여행 등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예배와 교회봉사만을 강제했다. 이러한 주일성수 전통은 1980년 대 이후 다양한 현대문화와 세속풍조가 한국교회 내에 유입되면서, 급격한 변화를 경험했다. 일부 보수적인 교회를 제외하고, 요즘 대다수의 한국교회는 더 이상 주일성수를 강조하거나 교육하지 않는다. 다만, 주일 예배 참여와 봉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서 그 잔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주일성수 전통의 몰락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청교도들의 엄숙주의에 근거한 한국교회의 주일성수주의는 율법주의와 종교적 형식주의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1960년대에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원)의 교장 박윤선 박사가 주일에 귀국하는 선교사를 배웅했다는 이유로 해임된 사건은 한국교회 주일성수주의의 정체를 폭로하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신약성서는 율법과 형식과 제도를 벗어나 성령과 내용과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했고, 종교개혁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 근거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일성수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왜냐하면 주일성수주의의 근저에 있는 율법주의와 공로주의는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허무는 치명적인 독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일성수주의의 몰락은 한국교회에 만연한 율법주의와 공로주의의 몰락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1980년대 이후 쏟아져 나온 신앙서적과 신학서적들이 신앙의 의미, 내용, 정신, 일상적인 삶 등을 강조하면서 한국교회의 뿌리깊은 율법주의, 형식주의, 공로주의를 자연스럽게 허무는 첨병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와 공로주의에 근거한 주일성수주의의 몰락이 성서적 복음과 신앙의 부흥으로 이어졌는가? 무엇이 주일성수주의를 대체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미주한인교회를 포함한 현대 한국교회의 주일관을 평가하는 핵심 잣대이다.

확산되는 세속주의

1970년대 까지의 한국교회를 바리새적 율법주의와 종교적 형식주의로 특징짓는다면, 1980년대 이후의 현대 한국교회는 욕망에 사로잡힌 방종주의와 맘몬을 숭배하는 물신주의의 포로로 진단할 수 있다. 바리새적 경건주의가 해체된 후, 한국교회에 본격적으로 민낯을 드러낸 것은 다름아닌 세속주의였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번영하는 것이 축복이라는 싸구려 가짜 복음이 한국인의 심성에 각인된 기복주의와 성공신화를 강조하는 시대정신과 맞불려 한국교회 강단을 순식간에 점령했다. 그 결과 강력한 바리새적 경건을 대체한 것은 십자가의 복음이 아니라, 세속적인 모든 욕망을 자유와 은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정당화한 방종과 타락의 복음이었다. 주일과 신앙과 경건을 제일로 외치던 종교적 형식주의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행복과 소유가 하늘나라의 축복이라는 번영의 복음에 의해 조롱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바리새적 경건주의와 종교적 형식주의가 나은가? 세속화된 방종주의와 물신주의가 나은가?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한국사회가 그 시대의 교회를 어떻게 평가했는가를 살펴보면 모두가 인정할 만한 답을 얻을 수 있다. 1970년대 까지의 한국교회는 내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와 비기독교인들에게 그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의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서 그 존재와 가치를 철저히 부정당해 ‘개독교’로 비하되었다.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사로잡혔던 한국교회는 적어도 종교로서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물신주의와 방종주의의 포로가 된 세속화된 현대교회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종교로서의 존재가치 조차 부정당하고 있다. 대답은 자명하다. 율법주의와 형식주의도 나쁘지만, 이를 대체한 방종주의와 물신주의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치명인 독소이다.

주님은 어디에?

위의 결론은 주일성수주의와 현대교회와 현대인들의 주일관의 비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주일성수를 외치던 교회와 성도들은 최소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고수하려는 열심을 간직하고 있었고, 적어도 그 노력에 대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반면 세속사회와의 경계를 허물고 완전히 하나가 된 현대교회와 성도들은 기독교의 핵심가치를 세속적 가치로 대체하면서 세상의 번영을 위해 종교를 악용하는 이기적 집단으로 전락했다. 그나마 주일이라도 거룩하게 살아보려는 노력을 과감하게 버리고, 주일조차 세상의 번영과 성공을 위해 철저하게 이용하는 영악함으로 중무장했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주일예배는 필수나 의무가 아니라, 선택사항이다. 주일예배와 교회봉사는 개인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취하고 버릴 수 있는 옵션이다. 최고의 덕목은 성공과 번영과 행복이다. 예배와 봉사는 개인 혹은 가족의 성공과 번영과 행복에 유익을 주고 상황에 부합할 때만 우선순위를 갖는다. 예배와 봉사와 헌신을 종교적인 투자로 간주하고, 이 투자를 능가하는 현실적인 결과를 기대한다. 교회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떻게 편안하고 감정을 터치하는 예배 콘텐츠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교인들의 더 많은 헌금과 충성을 이끌어내어 교회를 확장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주님의 눈길이 머물고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는 어떤 모습일까?

참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요4:24). 영으로 드리는 예배는 존재의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드리는 예배이다. ‘마음 따로, 생각 따로, 몸 따로’의 이 시대 예배는 종교적 공연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성서에 기록된 복음이 가감없이 원색적으로 선포되는 예배이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봉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올인한다. 낮고 천한 곳을 찾아 아프고 힘들고 병든 자들을 섬김으로 이웃과 형제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 참 봉사이다. 우리는 과연 주님의 눈길이 머무는 예배를 드리고,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봉사를 하는가?

모든 날을 주일처럼

전통적인 교회를 비판하고 새롭게 등장한 현대교회는 정작 기독교의 본질을 상실할 위기에 처해 있다. 주일예배와 봉사는 기독교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시작이요 출발점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주일예배와 봉사에 실패한 교회와 성도들이 나머지 6일을 거룩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따라서 생명력 있는 참 예배와 진정한 사랑에 근거한 봉사의 회복은 현대교회의 위기 탈출을 위한 지상과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참 예배와 진정한 봉사가 있는 거룩한 주일의 회복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청교도들이 강조한 주일성수주의의 함정이 여기에 있었다. 주일과 평일을 경계짓고,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여, 주일날 교회에서의 거룩을 추구하는 것은 복음과 하나님 나라가 갖고 있는 폭발적인 생명력과 거룩성을 극도로 제한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다. 우리의 목표는 주일의 거룩을 모든 날의 거룩으로, 교회에서의 거룩을 세상을 변혁하는 거룩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거룩으로 충만케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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