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서 론

제1-1과 종교란 무엇인가?

제1-2과 왜 그리스도敎인가?

제1-3과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제2장 우리가 믿는 하나님 (神論)

제2-1과 하나님의 자기 계시(啓示) 방법

제2-2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本質)

제2-3과 세상 중에 계시는 하나님(性品)

제2-4과 일하시는 하나님(使役)

제2-5과 인류와 세계의 구원을 예정(豫定)하심

제2-6과 왜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신가?

제2-7과 이상적 신관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제2-8과 악의 근원(根原)은 무엇인가?

 

제3장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基督論)

제3-1과 기독교의 중심, 그리스도

제3-2과 신앙고백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제3-3과 그리스도 이해의 순서, 방법

제3-4과 그리스도의 선재(先在)

제3-5과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제3-6과 그리스도의 높아지심(昇貴)

제3-7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

제3-8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使役)

제3-9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

 

제4장 우리가 믿는 보혜사 성령 (聖靈論)

제4-1과 성령은 누구이신가?

제4-2과 성령(聖靈), 사람의 영(靈), 악령(惡靈)

제4-3과 성령의 사역(使役)

제4-4과 성령세례(聖靈洗禮)

제4-5과 성령의 은사(恩賜)

제4-6과 바람직한 성령운동

 

제5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人間論)

제5-1과 인간은 과연 누구인가?

제5-2과 인간의 기원

제5-3과 하나님의 형상

제5-4과 죄(罪)에 대해서

제5-5과 원죄(原罪)에 대해서

제5-6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存在)

제5-7과 총체적(總體的) 인간

제5-8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구원

제5-9과 그리스도 안에 창조된 새 사람

 

제6장 교회란 무엇인가? (敎會論)

제6-1과 에클레시아의 의미

제6-2과 교회의 근원(根源)

제6-3과 교회의 특징

제6-4과 거룩한 교회

제6-5과 사도적인 교회

제6-6과 교회가 하는 일

제6-7과 교회의 일과 일꾼들

제6-8과 바람직한 교회갱신

 

제7장 종말은 언제 오는가? (終末論)

제7-1과 시한부 종말론 오류

제7-2과 기쁨의 날, 심판의 날

제7-3과 종말사상의 발전과정

제7-4과 그리스도의 재림

제7-5과 이미 실현된 천년왕국

제7-6과 육체의 부활

제7-7과 최후의 심판과 상벌

 

 

제1장 서 론

 

제1-1과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는 인생 문제의 「근본(宗) 가르침(敎)」이다. 인생 문제라 함은 사람이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문제를 뜻함이다. 그 많은 문제들 중에는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많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우리는 궁극적인 문제, 근본 문제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나는 누구인가?」「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사후의 세계가 있는가? 있다면 그곳에 어떻게 갈 수 있는가?」「인생에게는 왜 이렇게 많은 고통이 있는가? 고통의 원인은 무엇이며 이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하는 것들이다.

 

이상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에 부딪힐 때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한계를 느끼는 인간은 절망하여 스스로 파멸의 길을 택하든지, 아니면 초월자나 절대자를 찾게 된다. 사람이 절대자를 만나서, 인생의 궁극적 수수께끼를 해결해 나가는 것을 종교라고 한다. 종교는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 줄 뿐 아니라, 우주와 역사의 발전 방향을 따라 힘차게 살아가도록 한다. 종교 학자들 중에는 인간의 종교적 본능이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인생과 종교는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종교는 인류역사의 새벽부터 시작되었고 역사와 더불어 발전하였다.

 

종교가 발전해 온 과정을 보면 부족한 시대에는 자연숭배, 정령숭배, 토템 숭배, 다신교, 일신교들이 성장했고,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이 유대교, 유교, 인도교와 같은 민족 종교라고 볼 수 있고, 그 다음 단계가 세계적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불교, 회교 같은 고등 종교의 발달이다.

 

종교는 인류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종교는 반드시 문명을 만들었는데, 유대교가 히브리 문명을, 기독교가 서구 문명을, 불교가 불교 문명을 힌두교는 인도 문명을, 회교는 이슬람 문명을 애굽의 아문 종교는 애굽의 문명을 만들어 내었다.

어떤 종교는 생명이 길고 세계인들에게 널리 확산되었으나 어떤 종교는 단명하였다. 어떤 종교가 인류에게 유익을 줄 때에는 왕성하였고,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반사회적이거나 희망을 주지 못할 때 쇠퇴하였다. 세계 만민에게 유익한 종교가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종교의 구성 요건을 찾아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창시자가 있어야 하고 둘째, 교리가 되는 경전이 있어야 하고, 셋째, 신도들의 모임인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또한 건전한 종교가 되려면 첫째,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생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에 빠지게 하고 고통의 짐을 무겁게 하는 사이비 종교는 경계해야 한다. 둘째, 인류의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는데 기여하여야 한다. 자유와 평등과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어, 인류 공존공영과 세계 평화를 이룩하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셋째, 사람이 사람다워지고 사람답게 살도록 가르치는 윤리적 교훈이 있어야 하고 도덕적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인류역사 속에서 종교적 교리 때문에 종교 전쟁을 일으키고, 음란과 퇴폐를 조장하는 반사회적이고 반윤리적인 종교들이 있었는데 그런 건전치 못한 종교가 개인과 나라를 망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특별히 사이비 종교라고 규정짓는 거짓 종교들은 독버섯처럼 일어나서 극성을 부렸으나 수많은 사람들을 패가망신시키고 결국에는 사라지게 되었다.

 

참된 종교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서 행복한 생활을 하도록 할 뿐 아니라, 인류역사 발전에 크게 공헌하기 때문에 수 천년동안 계속 발전하고 확산하고 있다. 지금 사람에게 가장 유익을 주는 종교가 무엇인가? 영원한 생명을 가능케 하는 종교가 무엇인가? 불교, 유교, 힌두교, 회교, 기독교 중에서 어느 것인가? 만약에 어떤 사람이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기독교라고 말할 때, 그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에 참 생명이 있다면 그 진리가 무엇일까?

 

제2-2과 왜 그리스도敎 인가?

종교나 문화를 다른 것과 비교해서 우열을 가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특별히 문화의 경우, 고유한 문화의 특성을 다른 것과 비교해서 좋다 나쁘다고 판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의 독특성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의 경우는 다소 다른 점은 있다고 본다.

 

모든 종교는 저마다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특수성에는 독선적인 교리(Dogma)가 있다. 자기만이 유일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종교가 성립되지 않는다. 수많은 종교가 있는데 그 모든 종교가 다 진리이고, 구원이 가능하다고 인정한다면, 굳이 새로운 종교를 또 하나 만들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 다원주의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타종교를 박해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믿어서는 안될 것이다.

 

건전하고 유익한 종교를 분별하는 표준 중에서 ‘그 종교의 믿음의 대상이 어떤 분이냐?’ 라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 대상이 최소한 인간 이상의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보다도 못한 존재들을 섬기는 미개한 종교들이 물의를 일으킨 사례를 많이 경험하였다.

 

첫째, 불교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석가모니는 분명한 인간이었으나, 그가 고행을 통해서, 보통 인간 이상의 초인적인 경지에 도달한 존재가 되었다. 그가 큰 깨달음을 통한 진리를 가르침으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그와 같이 수련함으로 초인적인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 석가모니를 믿음의 대상으로 하여 따르는 수련 종교가 불교이다.

 

둘째, 회교나 유대교를 생각해 보자.

이 종교는 신앙의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神이다. 사람들이 신을 믿고 따르지만, 보통 사람들은 신을 만날 수도 없고 신과 교통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히 신과 인간 사이에 중간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선지자와 같은 종교 지도자가 신에 대해여 사람들에게 알려줌으로 일반 대중들이 신을 믿게 되는 것이다. 유대교는 모세나 선지자들이 있었고, 회교는 마호멧을 최후 최고의 선지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 그리스도교의 특수한 경우이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유대교의 神이신 「여호와」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라고 이름한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믿는 종교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중요한 것 하나만은 꼭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처음에는 사람이었다가 수련에 의하여 신적 존재가 된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선지자와 같이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통하는 분도 아니다.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神이었으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세상이 오신 분이다. 그리스도는 신적 존재가 아니라 곧 신이었고, 신의 능력으로 가르치고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셨다. 그래서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똑같이 믿음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불교나 유대교나 회교와 같이 종교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 신을 찾아가는 종교가 아니라, 신이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함을 얻는 특수성이 있다. 사람이 고행이나 수련을 통해서나 율법을 잘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자기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는 논리에 빠지게 되는데, 분명한 한계를 가진 인간이 자신을 구원한다고 주장하는 논리 그 자체가 한계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절대자의 구원을 갈망하는 인간이 종교를 가지게 되었으나, 그 종교가 다시 구원의 한계를 초래할 때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러한 종교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들려 온 「기쁜 소식」 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는 "종교적인 가르침" 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구원 소식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을 찾아내려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열어 놓으신 구원의 문을 믿음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다. 유한한 인간의 노력으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노력을 믿음으로 구원에 도달한다는 「기쁜 소식」은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임에 틀림없다. 왜 그리스도교뿐인가? 영생을 향한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제3-3과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어떤 그리스도인을 붙들고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하나님을 믿습니다. 또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 교회를 믿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당신은 왜 그리스도교를 믿습니까?」라고 질문하면, 「복을 받기 위해서 믿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믿습니다」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서 믿습니다」 때로는 심심해서 취미 삼아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 교회는 이단들에게 많은 신자들이 약탈당한 쓰라린 상처를 가지고 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 역사 가운데,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부흥을 하였다. 그러나 양적인 성장에 비해서 질적인 성장이 따르지 못하고 있음으로 대단히 염려하고 있다. 아직도 그 신앙적인 기초가 심히 허약하다.

그래서 모든 교회가 깊은 깨달음에서 출발하여 성경 공부를 많이 시키고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평신도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대단히 다행한 일이다.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분명한 신앙의 대상이 있고, 확실한 신앙의 내용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믿느냐?」 「왜 믿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분명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무속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처럼, 맹목적이고, 무지한 신앙인 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모든 진리를 깊이 연구해서 많이 아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것보다도 우선 기초적인 신앙의 내용을 분명하게 알고 믿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예수님 당시부터 신앙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해 나가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예수님께서도 3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신 후에 마지막 단계에 가서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받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다(마 16:16). 이러한 신앙고백 위에 그리스도교가 세워졌다. 그 이후에 초대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 또한 이단의 유혹을 받을 때도 그들의 신앙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하여, 고백함으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확실히 지켜 왔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마음으로 영접하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태도를 믿음이라 하고, 이 믿음의 내용을 조목별로 고백해서 정리한 것을 신조(信條) 또는 신경(信經)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조가 여러 개 되지만 가장 오래되고 대표적인 것이 「사도신경」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의 신앙 고백서라는 뜻이다. 사실은 마태복음 16장 16절의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근간으로 해서 그리스도교 교회가 2백여 년에 걸쳐서 발전시킨 것이다. 사도 신조는 그 후 3세기경에 널리 사용하였는데 세례 문답 때 그것으로 신앙고백을 하게 하였고 또한 이단과 박해자들에게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는데 사용하였다.

 

당신이 무엇을 믿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12조항으로 된 사도신경으로 자신이 믿고 있는바 신앙의 내용을 분명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신조는 후에 교리로 발전하였고, 이것을 보다 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인간의 언어로 연구해 나간 것이 신학이다. 신학이 본격적인 학문으로 연구되어진 것은 「오리게네스」라는 교부로부터 라고 할 수 있다.

 

오리게네스는 최초로 교리 학습 학교를 세워서 교회의 신앙 훈련을 시켰다. 신학은 어디까지나 교회의 학문으로 출발하였고, 교회를 위한 학문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 이후부터는 신학이 교회를 떠나서 대학으로, 신학자들의 신학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신앙 없이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하나의 학문이 되었다고 한탄한다.

 

세계 교회는 신학이 교회의 신학으로 돌아오도록 갈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인류에게 주신 것은, 연구나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닌 줄 안다. 그 말씀을 믿고 구원받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삶의 규범으로 주신 책이다.

 

「누구를 위한 신학인가?」라는 질문에 성실히 응답해야 할 것이다. 교회 밖에서 민중 가운데 신학의 자리를 잡거나 신의 죽음까지도 거침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신학은 교회가 받아들이기 어렵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살아가도록 확실한 신앙 위에서야 할 것이다. 이일을 위해서 쉽고도 확실한 가르침이 중요하다.

 

 

제2장 우리가 믿는 하나님

 

제2-1과 하나님의 자기 계시(啓示) 방법

철학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하였으나, 그 결과는 신통치 못하였다. 유한한 인간의 주먹만한 머리로 우주 만물을 초월해 계시는 신을 연구해서 그 존재 여부를 증명해 낸다는 것이 가능치 않다는 말이다. 만약에 어느 누구가 이 일을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아마 그 신이 참 신이 아니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이 사람이 아니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사람이 알아낼 만큼 쉽게 머리 속으로 들어오는 신은 우리가 믿을 만한 그런 신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의 능력의 한계이다. 사람이 무엇을 많이 안다고 하지만, 사람의 머리로 무엇을 알아내는 능력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간 스스로가 겸허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신을 알고자 하는 순수한 욕망을 좋게 볼 수 있겠지만, 무리하게 시도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임마누엘 칸트와 같은 정직한 철학자들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다.

 

神의 존재 여부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은 神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다. 사람이 모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성의 능력으로 아는 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종교에서는 인간의 이성(理性)으로는 神을 잘 알 수 없지만 신앙으로는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열렬한 신앙 훈련을 통해서 신에게 도달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길이 있다고 한다. 그 유일한 길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류에게 열어 보여주시는 계시(啓示)이다. 계시를 통해서만 신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를 자연 계시라 한다.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작품이므로, 그 작품을 통해서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연 계시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알기에는 부족하다. 인간이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알 수는 있지만 간접적이기 때문에 희미하게 밖에 알 수 없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자상하게 알려주신다.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으로 성경 속에 나오는 창조와 섭리와 구원과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확실하게 계시하셨다. 성경 말씀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인격자이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분명하게 알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다. 마치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마지막이며 완전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꼭 같은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본질상 완전히 동일하심으로 그를 본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과 꼭 같다. 요한복음은 이상의 사실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말씀이 육신(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일찌기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 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공동 번역 요한 1:1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8-9)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유한하고, 영적 감각이 마비된 인간이 하나님을 바로 만나 뵙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먼저 주셨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꼭 같으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보내 주심으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게 하셨다.

 

제2-2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本質)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 이전부터 자유롭게 계셨다.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시기 전부터 고유하게 지니신 특성을 편의상 하나님의 本質이라고 표현한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이라는 말은 하늘의 어떤 공간을 의미하는 것보다는 모든 피조계를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특수성과 초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세상의 모든 신들과 다르며, 우리 인간들과 모든 피조물과도 다른 점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후부터는 세계와 인간과 깊은 관계를 맺고 계심으로 그 관계성 가운데 일어나는 성품도 있다. 그러나 그 관계성에 앞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도록 한다.

 

첫째, 살아 계시는 하나님 :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분이시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은 그냥 존재하시는 하나님과는 다르다.

모든 피조물은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유한한 존재이다. 생명이 있는 것이나 생명이 없는 것이나, 똑같이 유한하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소멸되지 않고, 처음과 나중이 되시고, 불변하는 권능으로 활동하신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인류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신다. 살아 계신다는 것은 우상과 같지 않다는 뜻이요, 관념적으로 존재한다는 다른 신들과 구별되어 활동하신다는 뜻이다.

 

둘째, 자유롭게 우주 만물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며, 또한 어떠한 것과도 의존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으시고 홀로 서 계신다는 뜻이다. 세계의 모든 신들은 거의가 다 형상이 있다. 그 형상들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 낸 것이다. 인간의 머리로 고안해 낸 신들은 참 신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은 형상이 필요 없으며 언제, 어디든지 시공간을 초월해서 자유롭게 계신다.

 

셋째, 전능 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 능력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천지 만물의 창조는 無에서의 창조라 한다(Creatio ex nihilo).

有에서 有를 창조한 것은 최초의 창조라 할 수 없다. 창조 이전에 이미 물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無에서 有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절대자가 아니라면, 믿을 수 없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애굽의 아문(Amun)신이나, 가나안의 바알신이나,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신들과 싸워서 승리하신 전능하신 신이시다. 그 뿐아니라 자연도 자유롭게 다스리신다.

 

넷째, 한 분이시며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 성경의 하나님은 유일신이시다. 특별히 구약성경은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증언으로 일관한다. 참 신은 한 분 밖에 없고, 다른 모든 자연계나, 인간과, 신들도 모두가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세계 모든 만물은 땅위에 있다. 구약의 유일신 사상은 다른 어떤 신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구약 성경은 야훼 하나님께서 여성신의 도움 없이도 생명을 창조하셨음을 선포한다. 이러한 신앙은 다른 신들이나 우상을 타파하고 참 신은 오직 한분 뿐이라는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제 일 계명은 {나} 외에 다른 것들은 참 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 분이신 야훼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본질이시다. 이 세상 만물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유한하고 변화무쌍한 세상 가운데서 절대적으로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 계심으로 우주 만물이 파멸하지 않고 지탱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변덕이 심하신 분이시라면 우리는 믿을 수 없다. 또한 여러 분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참 신이 아니라는 말도 된다. 그러므로 참 신은 한 분이라야 하며, 불변하시는 분이라야 한다.

 

끝으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살아 계시고, 스스로 자유롭게 계시며, 우주 만물을 초월해서 언제 어디에든지 계신다.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며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러면서도 유일하신 분이시며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제2-3과 세상 중에 계신 하나님(性品)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초월해서 자유롭게 계시는 본질적인 성품을 가지셨지만, 지으신 만물과의 관계성 속에서 여러 가지 성품을 나타내신다. 성경에는 창조 이전에 홀로 계시던 하나님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일관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셨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를 증거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를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목자와 양과의 관계, 그리고 토기장이와 질그릇과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홀로 계시기를 좋아하시지 않으시고, 지으신 모든 피조물과의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리시고, 지으신 만물을 섭리하신다.

 

하나님에게는 초월적인 본질 외에도 인류와의 관계와 교제를 통해서 인류에게 끼치는 감화력이나 영향력이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 인류와 근본적으로 구별된 다른 분이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과 같은 성품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과 하나님이 관계를 맺고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롬 1:18-26).

 

출애굽기 29장 45-46절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하신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사시기를 기뻐하시는 뜻을 분명하게 밝혀 주신 것이다. 그러한 뜻을 가지신 하나님은 회막이나 성전에 영적으로 임재해 계시다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친히 세상에 내려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 (요 1:14, 빌 2:5-7).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이시다.

 

만남을 강조하는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만나 함께 존재하는 역사와 대화를 경험하게 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오셨다가 다시 승천하신 이후에는 보혜사 성령으로 강림하셔서 온 우주와 인류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 인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속성은 어떠한가?

 

첫째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나, 지으신 만물을 섭리하실 때 나타내신 성품의 근본이 사랑이셨고, 죽어 가던 인류를 용서 하사 구원하신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서 사람이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은 의(義)로우시다 :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바르고, 공평하고, 흠이 없는 세상을 건설하는 기초가 된다. 하나님의 법이 바르게 지켜지고, 사람들끼리도 공평하고 역사가 바르게 굴러가도록 영향력을 끼쳐 주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해서 율법도 주시고 선지자도 보내시고, 종내 에는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못박으시는 일까지도 하셨다. 사람들이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정의를 실천하여, 바르고, 밝고, 공평하게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미가 6:7).

 

셋째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 「너희는 거룩하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하셨다. 「거룩하다」는 말은 「속된 것과 구별된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죄와 악으로 오염되어 있는 이 세상의 것으로부터 깨끗이 구별되어 계신다. 우주 만물은 타락하기 이전에 창조 당시의 원형을 회복하여 거룩하여지도록 해야 한다.

 

넷째로, 하나님은 선하시다 : 하나님은 만물의 선함의 근원이시다. 모든 선한 것들이 그로부터 나온다. 그는 어떤 가치의 판단이 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모든 가치를 초월하시는 동시에 모든 가치의 근원이 되신다. 이러한 신을 철학자 플라톤은 지고선(Summum Bonum)이라고 불렀다. 출애굽기 34:6에서 모세는 이러한 하나님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다섯째로, 하나님은 길이 길이 참으신다 : 하나님은 지으신 만물을 향하여 어머니와 같은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길이 참으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 신가를 알고 그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제2-4과 일하시는 하나님(使役)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고 말씀하신 것은 유대교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깨우쳐 주신 것이다.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우주적이며, 만민의 하나님이요, 살아 계시며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유대교인들이 바벨론 포로 이후 유대 민족주의 운동을 맹렬히 일으켜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유대인의 민족 신으로 만들어 가두었고, 편협하고 배타적이며 비활동적인 왜소한 신으로 만들어 유대교라는 액자 속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경외심 없는 형식주의에 빠지고, 사두개인들은 현실주의로 타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때에 예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제자들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다.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나 헬라인이나, 로마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만민의 하나님이 되시고 만민은 하나님의 자녀로 형제 자매가 되도록 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일하신다」는 점을 강조하시고, 그리스도 자신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도 밝혀 주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깨닫고 있는 하나님은 액자 속에 갇혀 계시는 神이 아니다. 창조 사역과 섭리 사역을 통해서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그 만드신 만물을 붙들고 계시면서 친히 다스리시고, 일하시는 분이시다. 창세기 2:4-25에서 인간을 손수 만드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섭리 사역에 대해서 좀 더 자상하게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창조와 섭리, 두 가지가 있다.

 

1. 하나님의 창조 사역

「전능 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습니다」라는 사도신경 제 1항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대한 신앙고백을 명백하게 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천지창조 사역」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뜻은 첫째로 「無에서 有를 창조하신」「本源的인 創造」를 의미한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 한분 외에 어떠한 「물질」이 있었다고 하면, 처음 창조가 될 수 없고, 하나님도 참 하나님일 수 없다. 하나님 이전에 이미 어떤 神이 존재하여서 이미 창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 이 한 귀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無에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의 시작이라는 것이요,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아무런 질료도 없이 다만 「말씀」만으로 창조하셨다는 뜻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 하는 것이며, 「이미」있는 것으로 다시 있게 하시는 계속적인 창조가 아니었다는 것을 밝히는 내용이다(참고 마카베오下 7:28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인류가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창조자 하나님은 영원하신 능력과 지혜와 선하신 뜻을 모든 피조물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고, 피조물로부터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신다.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면서도, 피조물을 초월해서 자유롭게 계신다. 지음을 받는 세계는 창조주 앞에 꿇어 경배해야 하며, 절대로 창조주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 피조물이 신격화 될 때, 이 세상은 반드시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도 창조 신앙에 포함되어 있다.

 

2. 하나님의 섭리 사역

「섭리」라는 말은 본래 성경 밖에서 기독교 안으로 들어온 말이다. 라틴어의 "Providentia"(섭리)라는 말은 "Provideo" 즉 「미리 pro + 본다 video」는 말에서 나왔다. 그러나 「섭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그냥 바라보시기만 한다는 뜻9이 아니다 「참새 두 마리가 단돈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중의 하나라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는 것과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내 몸에서 머리카락 하나라도 결코 떨어질 수가 없다」(마10:30) 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보존하시고 동반하시며, 친히 이끌어 주심으로 창조 때에 계획하셨던 목표에 도달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도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섭리 신앙이란 창조의 권능으로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낮이나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며 지으신 만물과 인류를 눈동자같이 살피시고 계신다.

 

제2-5과 인류와 세계의 구원을 예정(豫定)하심

1. 오해하기 쉬운 예정론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도록 예정되고, 어떤 사람들은 버림받도록 예정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구원받을 사람들의 숫자까지도 예정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겠는가?

 

첫째, 나는 예정 속에 들어 있을까?

둘째, 저 사람은 어떨까?

셋째, 전도가 필요 없지 않을까?

넷째, 인간의 자유의지는 불필요한 것이 아닐까?

다섯째, 인간이 기계나 동물 같은 운명에 놓이지 않는가? 숙명론에 빠져서 체념하여 사는 것일까? 여섯째, 만약에 구원이 다 예정되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스도는 예정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오셨고 죽으셨는가?

 

위와 같은 끝없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정 교리는 어려워서 크게 하나님의 섭리에 포함시켜 그 의미를 축소시키는 사람들도 있고,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며 예정론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별히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버리셨다」(롬 9:13)라는 이중 예정(二重 豫定)에 대한 논쟁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예정론은 사도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에 의해서 강조되어 오는 중요한 진리 중에 하나이다.

 

2. 예정에 대한 성경의 근거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요 15:16)”는 말씀을 비롯해서 17:6,12과 같은 곳에 요한복음의 예정에 대한 내용이 나타난다. 그리고 바울서신에 가장 많이 나온다.

로마서 8장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하셨다.

 

에베소서 1장 4-5절에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느니라”하였고, 그 외에도, 행 4:28, 고전 2:7, 엡 1:11, 딤후 1:9 등에서도 예정에 관한 말씀이 있다.

 

3. 신앙에 유익한 예정론

성경에 나타난 예정에 대한 말씀은 대부분 사도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예정 신앙은 바울의 신앙고백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이 구원받고 보니, 그 구원이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그 구원의 비중을 더욱 생각하여 소급해 올라가 보니, 결국 창세전까지 올라가게 된 것이다. 죄인들이 구원받게 된 것은 창세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원은 확실한 것이요 견고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정 신앙이 대단히 유익한 것이 된다. 신앙인 에게 유익한 예정론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정이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모든 죄의 짐을 감당하시고 인간을 구원과 생명으로 선택하고자 결정하신 사건, 곧 은혜의 선택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하나님의 예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의 예정의 때는 창세전이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공동으로 뜻을 합하여 예정하신 것이다.

 

셋째, 예정의 범위는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와 세상 전체가 구원의 대상으로 넓게 예정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자나, 악한 자에게 골고루 비를 내려 주시듯이 지으신 만물과 만민을 사랑하시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넷째, 하나님의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타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된다. 그러므로 예정의 범위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버림받는 사람들을 대신하면서 버림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게 된다.

 

다섯째, 그러므로 구원받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안 에서 감사하게 되고 확신을 가지고 예정 신앙을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계속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도하게 된다. 「버림과 선택」은 믿음의 결과로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비밀을 아직도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은 큰 믿음으로 기다릴 것이다.

 

제2-6과 왜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신가?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에 있는 내용과 교회의 신앙을 정리해서 3세기의 터툴리안이라는 신학자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삼위일체론이 형성된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그는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사람이면서 하나님인가? 처음에는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하나님이 되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본래 하나님인데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님이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이 분분할 때,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이때 제자들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聖子)이시요, 그리스도」라고 대답했다. 제자들의 고백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라고 했을 때 그들은 「두 분의 하나님」(二神論)을 섬기는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성경의 전통적인 유일신 신앙이 무너지게 된다. 그 뿐 아니라 또 보혜사 성령의 강림으로 그들은 三神신앙의 혼란에 빠질 수 도 있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통해서나 신앙고백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한 분과 같이 믿고, 섬겼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들이 논리적으로 확실히 정리할 능력은 없었지만 세 분이 같은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삼위일체 신앙은 논리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초기 성도들의 신앙고백에서 시작된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을 후세의 신학자들이 희랍철학의 힘을 빌어서 논리적으로 정리해 나갔던 것이다. 터툴리안에 이어서 오리게네스와, 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같은 신학자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으나, 모두가 완전히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아우구스투스가 정리한 이론이 가장 성서에 가까운 최초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4세기 말에 와서는 삼위일체 신관이 확립되었다.

 

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가? 라는 질문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왜, 삼위로 계시며 한 몸을 이루고 계시는가? 라는 질문과 같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비밀에 속하는 범주이므로, 사람이 알 수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알아본다. 즉 역으로 삼위일체 신앙의 당위성을 이해하자는 것이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똑같은 본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하나는 신은 신인데 성부 하나님과 다른 신이라면, 유일신 신앙이 무너지고, 또 하나는 유대교인들처럼 메시야가 아닌 선지자에 불과한 인간이라고 할 때, 기독교는 성립될 수 없게 된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의 순교로 끝나고 만다.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 자신의 고난이나 죽음이 아닌 한 인간의 훌륭한 죽음으로 끝난다.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도,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질상 똑 같은 분이기에, 그리고 그의 죽음은 하나님 자신의 죽음과 같은 가치를 가졌기 때문에 인류 구원이 가능한 것이다.

 

둘째, 성령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감화력이나, 능력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신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삼신론(三神論)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모든 활동이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 종속되었다든지 성부와 성자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때,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성화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과거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현재에 계시고 활동하기 때문이다.

 

셋째,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독립적으로 계시면서 한 몸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고, 한 분이 세 가지 양태로 나타난다는 주장을 할 경우(양태론), 결국에는 성부의 유일성은 강조되지만 성자와 성령의 위치는 무시되고 만다.

 

넷째,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앙이 무너지면 그리스도교 신앙이 근본적으로 무너지고, 인류의 구원도 성화도 없는 유대교와 같은 여호와 종교에 머물던지, 다신교로 떨어지든지 할 것이다.

 

제2-7과 이상적 신관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1. 삼위일체론의 성경적 근거

①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라는 귀절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② 창세기 1:26, 11:7에 하나님 자신의 호칭에 복수를 사용했다.

③ 마태복음 3:16, 28:19, 고린도 후서 13:13에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동시에 나타나신다.

④ 빌립보서 2:6, 요한복음 10:30, 14:9에 성부와 성자의 동일성이 나타난다. 요한복음 1:3은 성자의 창조 사역을 증거 한다.

⑤ 이사야 48:16, 63:10에서 영을 인격으로 표현하고, 사도행전 5:3-4에서는 성령을 하나님으로 표현했고, 로마서 8:9, 11:14, 고린도전서 2:11-14에서는 성령이 하나님의 영 또는 성자의 영으로 나타난다.

 

위와 같은 성경 귀절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지만 삼위일체란 용어는 없다. 이러한 성서적인 근거를 가지고, 후세의 신학자들이 삼위일체 신관을 논리적으로 정립했다.

 

2. 삼위일체론에 대한 설명

한 마디로 말해서 설명이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사람이 완전히 알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약간의 설명이 가능하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한다.

 

“셋이 하나가 된다” “하나와 여럿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식의 개념은 희랍 철학자들 사이에서 성립되었던 이론이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삼위일체 신관 정립에 최대한 참고했던 것이다. 삼위일체 신관 확립에 가장 공이 큰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본질상 같은 분이지만 세 분이 고유한 인격과 특성을 가지고 존재하면서 일한다는 것이다. 「세 인격」(three persons)과 「하나의 본질」(One substance)을 가지신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한다. 성부, 성자, 성령 한 분, 한 분이 자신의 고유한 인격성과 주체성을 가지지만 사람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 속에서 영원한 사랑과 성령으로 완전한 일체를 이루고 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한 「점유와 순환」의 전통적 신학 개념이 있다. 「점유」라는 말은, 세 인격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설명하는 말로서 창조와 구원과 성화 사역은 세 분 하나님의 공동 사역이지만 창조는 성부께서, 구원은 성자께서, 성화는 성령께서 주체적으로 고유한 사역으로 수행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순환」의 개념은 신적 세 인격이 서로 구분되어 있으나, 서로 다른 인격들에 참여하고, 그들의 삶속에 들어가서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나타낸다는 말이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의 존재와 사역에 참여하고, 성자는 성부와 성령의 존재와 사역에 참여하며, 성령도 성부와 성자의 존재와 사역에 참여하여 서로 분리할 수 없이 영원한 사랑의 힘으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항상 함께 일한다는 것이다. 이 순환의 개념은 서로 구분되어 있는 세 인격들의 일체성을 나타낸 것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창조의 주체는 성부이지만 성자 성령도 창조 사역에 동참한 창조자이며, 구원의 주역은 성자이지만 성부와 성령도 구원자이며, 성화의 주인공은 성령이지만 성부와 성자도 성화의 하나님으로 함께 일한다는 것이다. 서로 구분되어서 존재하고 일할지라도 항상 떨어지지 아니하고, 함께 존재하며 함께 일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신관을 이해하는 가장 어려운 문제는 성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성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성부와 성령은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을 했는가? 성자가 십자가에 달릴 때 성부와 성령도 성자 안에서 함께 고통을 당했다. 성자는 인류의 죄를 위해 죽었고 성부의 성령은 성자의 죽음을 안고 함께 죽음을 경험했다. 그러나 성부는 죽지는 않았다. 마치 아들이 죽어 가는 것을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며,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는 부모와 같다.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3. 삼위일체 신관의 특성과 우월성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신관은 유대교와 회교와 같은 일신론(一神論)이 아니며 그렇다고 다른 여러 종교들처럼 다신론(多神論)이나, 범신론(汎神論)이 아니며 다신론과 일신론의 여러 가지 폐단을 극복하였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류에게 평등과 협력, 일치와 다양성, 자유와 책임과 같은 사상을 일으켰으며 인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가장 우월한 신이시다.

 

제2-8과 악의 근원(根源)은 무엇인가?

일반 종교사에서는 善과 惡, 빛과 어두움을 二元論的 체계로 이해하고 있다. 선과 빛을 지배하는 세력과, 악과 어두움을 지배하는 세력이 있어서 서로 대립하여 싸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이원론을 배격하고 우주 만물의 근원이 창조주 하나님 한 분이심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 악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모든 피조물은 보시기에 매우 선하였다(창 1:31)고 하였으나, 창세기 3장 1절에 유혹자 뱀이 등장함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에 죄악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악의 세력이 가속화되어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비극이 연출되는 모든 것이 궁금하다.

 

우리 인류는 여기에서 몇 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첫째로, 뱀으로 등장하는 악마는 어디에서 나왔으며 그 정체는 무엇인가? 즉 이러한 악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선(善)의 근원이신 데 악이 어떻게 발행하였는가?

 

둘째로, 전지전능하시다 는 하나님께서 악마의 출현을 모르셨다 거나, 사전에 막지 못하셨다는 것은 전지전능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셋째로, 죄 없는 사람 즉 의인의 고난을 어떻게 버려두시고, 악인들의 번영을 눈감아 주시는가?

 

이상의 문제들을 풀어 가면서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옳으심을 설명하려고 한다.

첫째 질문인 악의 근貶?대해서는 명쾌한 대답이 어렵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악이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중에 천사들이 있었는데 천사 중에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천사들이 스스로 하나님 자리를 넘보다가 추방을 받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되었다고 한다.(벧후 2:4, 유 1:6)

 

이것을 사탄이라고 부르고 사탄의 부하들을 마귀라고 한다. 이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자로 등장하여 파괴자, 참소자등으로 활동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인류의 파멸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초대 교부들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해석이다.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창조에는 악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며, 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선이 없는 곳에 악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선이 부족하거나 결핍된 상태를 악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신학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떨어져 있을 때 악이 발생하는 것이고, 악은 인간의 자유의 오용(誤用)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사과가 아름답고 맛이 좋은 것이지만 나무에서 떨어져 나와서 오래 두면 부패하여 독소가 생기는 것과 같다.

 

악의 근원에 대한 또 하나의 설명으로 피조물이 가지고 있는 유한성과 상대성 불완전성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악이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에서 파생되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이다. 모든 생명체는 유한하여 죽고 부패하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에게는 선하지 못한 것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완전치 못한 것이 곧 악이라고 보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왜 악을 막지 못하셨는가? 하는 문제도 앞에서 설명되었다고 본다. 자유의 남용이나, 피조물의 한계에 원인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책임을 돌릴 수 없다.

 

셋째로, 의인의 고난, 악인의 번영에 관한 문제는 인간들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의 기준과 시각이 다르다. 악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시고, 합동해서 유익한 결과를 이끌어 내신다.

 

중요한 문제는 마귀 실체를 인정하고, 이것을 대적하여 악의 문제를 대결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첫째로, 이 세상을 주장하는 분은 하나님이지 악마가 아니다. 다만 악마는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한 사람들과 활동할 뿐이다. 그러므로 악마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존재로서 초인적인 힘은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 아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악의 문제를 해결해 놓은 열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악마와 악의 근원을 해결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회개하면서, 성령의 도움을 받으며 승리의 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옳으심의 영원한 근원이시다.

 

 

제3장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제3-1과 기독교의 중심, 그리스도

“그리스도교”, “예수교”라는 말은 그리스도 중심 또는, 예수 중심 종교란 말이다. “여호와교”, “성령교”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교”라고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가장 중요하게 믿고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역사 속에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우리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신 그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시고 보내신 성령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유대교인들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지 않는 성령운동도 위험한 유령종교가 되기 쉽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령운동을 하는 종교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교리나 신학의 중심도, 그리스도론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그리스도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리스도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방법은 성경이다. 성경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유일한 재료이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예수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예언된 그리스도이다. 역사적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제자들과 성도들이 복음서를 기록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까지 전하여 주고 있다. 성경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이와같이 기록한 것과는 다르다.

 

복음서 기자들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33년 동안 활동하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나, 하나님으로 믿으면서 그 분의 모든 것을 기록하여 남겼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기록이 역사성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역사적 예수의 모든 삶을 사실대로 기록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역사적인 예수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음의 메시야로 확신하면서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존재와 활동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만약에 역사적 예수의 모든 삶을 하나의 역사가의 입장에서 기록했다면 슈퍼 스타, 위대한 선지자, 휴머니스트, 성인 정도로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을 때 마치 제자들과 같은 믿음의 눈으로 읽어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이해할 것이다.

 

오늘 세계교회가 공통적으로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2천 여년 전 성경 시대의 그 상황에서 활동하시던 역사적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로 찾아보는 것이다. 그 때 그 곳에서 예수께서는 무엇을 생각했으며,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가장 바르게 알아내어서 그것을 본받는 것이다.

 

둘째로,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했으며 그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믿고 따랐는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으며, 2천여년 동안 전승되어 왔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넷째로, 2천 여년 동안 그리스도에 대해 연구한 역사를 통해서 밝혀진 결과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상의 여러 가지 노력을 통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가인가?」하는 그리스도의 존재에 관한 질문을 풀어보는 것이고, 그 다음은 「그리스도는 무슨 일을 하였는가」하는 사역을 알아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 것과 그분이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것을 바르게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우리의 이러한 수고는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구원을 얻고, 바르게 살기 위한 것이다. 「바르게」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 생기고, 잘못된 믿음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의 이단과 온갖 종파가 많이 생긴 것은 그리스도를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교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는 것이다.

 

제3-2과 신앙고백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사도신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외아들

2)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3) 성령에 의하여 잉태되심

4)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5)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심

6)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

7) 장사되심(음부에 내려가심)

8)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

9) 하늘에 올라가심

10)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

11) 거기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실 것임.

 

참고적으로 니케아 신조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정리해 본다.

1)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2) 하나님의 독생자

3)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셨으며

4) 하나님의 하나님이시오,

5) 빛의 빛이시오

6)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시다.

7) 그는 지으심을 받지 않으셨다.

8)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와 한 본체를 가지신다.

9) 그는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 오셨고

10) 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몸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셨다.

11)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12) 그는 고난을 당하시고

13) 매장되셨다가

14) 사흘 만에 성경의 말씀대로 부활하셨다.

15) 그는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16) 그리고 그는 영광중에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17) 그의 나라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1)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지혜요, 그 자신의 영광의 본체인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2) 그는 성령에 의해서 한 동정녀의 본체에서 인간의 본질을 받으셨다.

3) 이와 같이 「다윗의 의로운 씨」요, 「하나님의 크신 교훈의 천사」요,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야가 나셨다.

4) 우리는 그를 임마누엘이요

5)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사람이요

6) 완전한 두 본성이 한 분 안에 하나가 되어 결합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인정한다.

7) 따라서 우리의 고백서를 통하여 우리는 아리우스와 말키온과 유티크스와 네스트리우스와 같은 가증스럽고도 유해한 이단들을 저주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성이나 그의 참된 인간성을 부인하거나 또는 혼동하거나 분리하는 사람들을 저주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만 소개한다.

1) 하나님은 영원한 목적을 가지시고 독생자 주 그리스도를 택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게 하셨다.

2) 삼위 중에 둘째 위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은 참 하나님인 동시에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에서 나왔으며, 따라서 아버지와 동일하시다.

3) 그는 때가 이르매 사람의 본체를 입으셨다. 사람이 가지는 근본적 요소와 거기서 나오는 일반적 결점을 가졌으나, 죄만은 가지지 않으셨다(히 2:14,16,17, 4:15).

4) 그는 성령의 힘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그 여인의 몸에서 탄생하셨다.

5) 이와 같이 온전하고 완전하고 독특한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은 끊을 수 없게 한 인격 안에 결합되어 변경되거나 혼성되거나 혼동될 수 없게 되었다. 이 분은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사람이며, 한 그리스도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다.

 

소요리 문답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문답 중에 한 가지만 소개한다. 22 문.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답.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참 몸과 지각 있는 영혼을 스스로 가지심으로써 사람이 되셨으며, 성령의 힘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태내에 임신되어 그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죄는 없으십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앙고백서(1986년)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한 가지만 소개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과 그가 하나님이시요, 또한 사람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 것을 믿는다(엡 2:13-16, 딤전 2:5). 그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시사 완전한 사람이 되어 인류역사 안에서 생활하셨다(마 1:3). 이와같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단 한번으로써 완결된 사건이요, 최대의 기적에 속하는 사건이다(히 9:28).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모든 과정을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며(品格), 무엇을 하셨는가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다음에는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제3-3과 그리스도 이해의 순서, 방법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존재 양태를 시간적으로 역사의 순서대로 하향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그리스도의 본질과 인격에 대하여 먼저 알아본 후에 그 분이 무엇을 하셨고, 앞으로 무엇을 하실 것인가를 아는 것이다. 이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하는 문제를 먼저 알고 나면, 그 분이 하신 일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둘째 방법은, 신약성서 기자들이 주로 채택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알림으로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믿도록 하는 방법이다. 비유하면 꽃나무에 대한 상식이 없는 사람에게 찔레나무와 장미나무를 설명하여 알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장미꽃을 가지고 그 나무를 설명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한번은 예루살렘 솔로몬 행각에서 자신이 메시야이며 하나님과 자신이 동일하신 분이심을 밝히신 일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하였을 때 「그러면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 「내가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않거든 믿지 말라, 그러나 내가 행하는 일이 아버지의 일임을 알게 되면 그 일을 믿으라」고 하였다(요 10:22-49).

 

이상의 두 가지 방법은 모두가 타당하고 좋으나 상황과 대상에 따라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첫 번째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상당한 이해와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역사적인 순서를 따라서 존재 양태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양식을 시간적으로 구분한다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먼저 계셨다는 것(先在)이다.

둘째는, 먼저 계신 그리스도께서 인류구원을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成肉身).

셋째는, 다시 처음 계셨던 곳으로 올라가신 것이다(復活, 昇天).

 

이러한 세 가지 순서를 따라서 성경과 신앙고백서와 교리와 신학적 이해의 발전 과정들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이해한 후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왜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고 희망이 없는가를 규명하려고 한다.

앞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할 때에 강조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구조를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신 것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신 것과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인류 구원의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신 일과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것과, 이 세상 역사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심판주로서 다시 오시는 것 등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신관을 확실히 가져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거듭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라는 문제는 예수님 당시에도 대단히 중요한 토론제목이 되었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항간의 여론을 청취한 일이 있었고 제자들의 이해와 신앙을 점검하신 일이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질문하시니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엘리야, 예레미야, 세례 요한,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한 이해였다. 지금도 유대인들이나 회교도들은 선지자중의 한분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에 대해서, 제자들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했다.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로 믿고 이해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흥망성쇠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그 분과 우리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앞에서 언급한 순서와 방법에 따라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제3-4과 그리스도의 선재(先在)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양식이 세 가지라는 것을 앞에서 언급했다.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계시다가(先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成肉身),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사역을 마치시고, 다시 승천(昇天) 하셔서 지금까지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시간적인 순서대로 세 가지 양태로 정리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 「먼저 계심」(先在)과 「육신을 입으시고 땅으로 내려오심」(成肉身)과 「다시 하늘로 올라가심」(昇天)을 시간적인 개념을 가지고 이해하면서, 성자께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계시면서 일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먼저 계심(先在)」에 대해서 성경과 교회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찾아보도록 하겠다.

 

그리스도의 선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본질을 증거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시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한 확실한 증거를 성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1. 성경적인 근거

첫째 요한복음에 나타난 증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3).” 여기 「태초」라는 시간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시간을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과 만물 사이에 존재한 것이다. 「말씀」은 그리스도를 뜻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함께 동참하셨다는 것이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2,3)”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시며(요6:38),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시며(요8:58), 창세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영화롭게 계셨다(요17:5).

 

둘째, 바울 서신에 나타난 증거들

하나님과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꼭 같으신 분이시며, 한 몸이시고 동등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늘의 자리를 비우시고, 땅으로 내려오셔서 사람의 모양을 스스로 취하셨다(빌 2:6-8) 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으며,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서 있다고 증거한다(골 1:15-17).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계시다가 세상으로 내려오셨고, 다시 승천하셨다(엡 4:9,10). 만물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났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났다(고전8:6).

 

셋째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증거

「그리스도는 알파요, 오메가요 이제도 있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이다」(계 1:8)라고 증거하고 있다.

 

2. 신앙고백에 나타난 증거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분명하게 많이 취급되어 있으나, 선재에 대한 내용은 부족하다. 그러나 탄생에 대한 내용 속에 선재 신앙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도신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고백 속에 이미 先在신앙이 포함되어 있다.

 

안디옥교회의 감독인 이그나티우스(A.D. 35-107)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정리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 분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으며, 그리스도 선재(先在), 처녀탄생, 성육신, 속죄, 부활, 승천 등에 대한 교리를 간결하게 매듭지었다.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에 대해서 분명하게 정리했다.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계셨으며, 지음을 받지 않으셨고, 성부와 같은 분으로 함께 계시다가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 인류와 함께 계시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올라가셨다고 했다.

 

니케아신조(A.D. 351)는 초기교회의 신앙을 가장 잘 정리한 고백서이다. 이재고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조항을 보면 분명하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셨다」는 것과 「그는 지으심을 받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2천년 기독교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그것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신앙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제3-5과 그리스도의 성육신, 낮아지심(成肉身, 卑下)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계시다가, 하늘 보좌를 비우시고 인류구원을 위해서 사람이 되셔서 세상으로 내려오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낮아지심(卑下)은 인류 구원을 가능케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요, 유일한 길이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길이 막혔으므로 성자께서 친히 내려오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되심이 인류구원의 구체적인 방법이라는 말은, 그가 성령수태, 처녀탄생,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같은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구속의 대업을 성취하셨다는 뜻이다. 이러한 삶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자를 통한 구원 사역의 의미를 알아보려고 한다.

 

1. 성령 수태와 처녀 탄생의 의미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으로 수태하시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신앙고백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화 된 교리이기는 하지만, 이에 대하여 이해가 부족한 신자들이 많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 홀로 영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성령과 하나가 되어서 성령 안에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마리아의 태중에 사람으로 임하신 것이다. 이때에 성부께서도 성령 안에서 함께 해산의 수고를 하셨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성령수태와, 처녀탄생 사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건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인간 예수의 평범한 출생으로 이해하고 믿는 것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그 의미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 길밖에 없었다고 본다.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처녀 몸에 수태하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구원의 다리를 놓으신 은혜로운 작업이요,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최선의 수단이었다.

 

십자가 사건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건으로 이해되는 근거는 바로 성령수태사건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건이라는 데 있다. 성령이 성자와 하나가 되시어 수태하였고, 성령이 성자와 함께 일하였으며, 십자가에서도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 성부는 성령 안에서 성자와 함께 늘 계심으로 인류구원의 효험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한 선지자 예수의 출생과 고난과 순교로 끝나고 만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수태는 성자의 인간적인 아버지를 배제하고 「죄의 유전」으로부터 피하도록 하였고, 성령의 성결케 하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의 오염으로부터 보호를 받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으셨지만, 원죄와 죄가 없다는 것은 바로 성령수태 때문이다. 「無」에서 「有」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처녀 마리아가 남편 없이 성자를 수태할 수 있도록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역사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시기에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실 유일한 분이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2. 성육신과 낮아지심의 의미

1) 성육신의 의미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 인류의 일원이 되어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몸은 우리와 똑같은 몸이다. 재세례파(再洗禮派)는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로 부터 마리아의 몸을 통과하여 세상에 왔으나 우리 몸과 똑 같지 않은, 유사한 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우리와 똑 같지 않은 몸으로는 우리와 일치할 수 없고,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와 똑같으나 죄는 없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의미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이다(요 1:14).

 

2) 낮아지심의 의미

빌립보서 2:7-8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를 「비우심」과 「낮아지심」 에 대한 말씀은 왕의 보좌를 사양하시고, 스스로 노예의 신분으로 하야(下野) 하셨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밑바닥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자리까지 내려가 주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말구유에서 부터 십자가와 무덤에 까지 내려가심으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구원할 자격자가 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으신 것은 자신을 낮추셔서 죄 많고 무상한 세상으로 뛰어드신 것이다. 이러한 결단은 성부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구원하시려는 뜻에 순응하신 것이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세상을 더럽다고 피하지 않으셨고 죄인들이 보기 싫다고 산속으로 들어가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물에 빠진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 물속으로 뛰어드신 분이시다. 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세상으로 내려오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늘로 올라가시는 임마누엘의 은혜를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한다.

 

제3-6과 그리스도의 높아지심(昇貴)

그리스도의 높아지신 신분(The States of Exaltation)은 중보자의 인격의 높임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세상에 내려오셔서 모든 굴욕적인 고난을 감당하시고 음부에 까지 낮아지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덤 속에 계시던 그리스도를 다시 일으키사 하늘의 존귀한 자리에 앉히셨다.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과 재림에 관한 신앙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의 승귀(昇貴)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自己卑下)과 높아지심(昇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적절한 표현을 하고 있다. 즉 하늘 보좌를 비우시고 종의 모양을 입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게 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부활, 승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심, 재림, 영원통치 등 다섯 단계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율법 아래에 있는 저주로부터 자유로워지셨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 대해서 승리하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만민들을 완전히 구원하셨다. 이러한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당하신 모든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상하사 존귀와 영광으로 면류관을 씌워 주신 것이다. 세상 만민들은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을 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의로우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인류구원이라는 신령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희생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그대로 방치하신다면,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라는 칭송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의롭게 살아가는 만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도 「스스로 낮아지는 자는 높아질 것이요, 스스로 높아지는 자는 낮아질 것이다. 자기 생명을 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요,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바로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이러한 원리가 온 세상에 널리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수고에 대한 보상을 정확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버림을 당하게 되고, 남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昇貴)에 대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셨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다시 살려주셨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대체로 성자는 성부께 복종하여 철저히 죽으셨고, 성부께서는 완전히 죽으신 성자를 능력으로 다시 살리셨다고 믿는다. 그러면 성자 그리스도 자신에게는 다시 살아나실 능력이 전혀 없으셨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고(요 11:25) 자신의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은 권세도 있다고 선언하셨다(요 10:18).

 

그 뿐만 아니라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재건할 수 있다고도 하셨다(요 2:19-21).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은 나사로나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같지 아니하다. 그리스도는 그 몸으로 고난을 받으시고 그 몸이 실제로 죽으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살리는 영이시다(고전 15:45). 그 영과 함께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그 몸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몸과는 다른 신령한 몸이다. 썩을 것을 심어 썩지 아니 할 것을 이루셨다. 그리스도의 변화는 미래의 천적(天的)인 환경에 완전히 적합한 새로운 몸으로 변화받았다. 이것은 역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안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세상에서도 가장 비참한 상태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몸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성령이 계셨고 성령 안에 성부가 함께 계셨다.

 

그리스도의 높이심은 성부의 단독적인 행위가 아니라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였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롬 6:4)는 것은 성부의 사역 안에 성령께서도 함께 역사하신 것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서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는 말씀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

 

제3-7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

1. 復活 信仰의 뿌리

인류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영혼 불멸에 대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불안한 응답이었다고 본다. 종교마다 표현이 약간 다른 것뿐이지 유한한 인간이 영원을 추구한다는 내용은 같은 것이다. 물론 영원한 추구한다고 모든 종교가 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유일한 신앙의 길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잘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좋아서 죽음이 억울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은 고생만 하다가 좋은 세상 한 번 잘 살아보지 못하고 죽게 되니 억울하다. 그래서 사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특별한 신앙은 죽은 자의 부활이다. 그들은 막연한 영생이나 막연한 사후의 세계를 믿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인류 역사가 반드시 종말이 오는데 그 때에 메시야가 와서 잠든 자들이 다시 살아나고,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 있은 후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고 믿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활 신앙이 뿌리를 깊이 내린 것도 그들의 고난의 역사와 관계가 깊다고 본다. 그들은 강대국들에 의해서 많은 고난을 당하였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믿고 호소하였다. 악한 사람들이 형통하고, 의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불공평한 세상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질문하였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응답이 곧 하나님의 심판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 의인들을 구원하시고 상급을 주시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을 삼는다는 것이다. 그 심판의 내용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모든 죽은 자들을 다시 살려 선악 간에 정확한 심판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의롭게 산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로, 불의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되고, 전자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후자는 영벌의 세계로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현대의 고통을 극복하면서 의롭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이다. 이 신앙 때문에 그들은 고난 속에서도 참고 기다리면서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옳으심」을 증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한다. 그것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증거 해보여 주신 첫 열매라는 뜻과 의인들이 부활을 믿고 기다리는 그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의 의를 증명해 보이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시며 의인의 고난에 대한 최후의 질문을 하셨다. 이 질문은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고난에 역사에 대한 대표적인 질문이었고, 그리스도를 따르던 모든 제자들의 질문이요,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가 안고 있는 궁극적인 질문을 그리스도께서 대표로 하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사흘 동안 침묵을 지키시고 대답하지 않으시다가 그리스도의 무덤을 여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심으로 하나님의 옳으심(義)을 분명하게 증명하시고, 답변해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의 죽음의 문제와 의인의 고난에 대한 문제를 선명하게 해결한 정답이다.

 

3.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속의 예수를 초월적인 믿음의 그리스도로 높이신 사건이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계실 때에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으셨다. 육신으로 계시는 동안에는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장소에서 제한된 사람들만이 구원의 대상이 되었으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시공간을 초월해 계시면서 만민의 구주로 나타나게 되셨다. 어제의 예수께서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요 29:19-30, 마태 19:20).

4.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신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를 불행하게 하는 「죄와 사망」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것이다. 부활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고 악마의 사령부는 이에 정복되었다. 부활의 그리스도와 생명의 관계를 맺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에 동참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성도들이 지금 악마와 싸우는 전쟁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해 놓으신 전쟁을 하는 것이다(고전 15:54-55).

 

제3-8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使役)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내가 항상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일」이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은 인류구원을 위한 일이요, 우주만물과 인류를 다스리시는 일이다. 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이요, 그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직분을 주셨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임하였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마태 3:16-17)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셨다.

 

이 사건을 메시야 임직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 받으신 「그리스도직」(메시야)은 구약의 모든 직분을 통합한 총체적인 것이다. 구약의 중요한 직분은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이다. 중요하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시키시기 위해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직분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직분은 구약의 세 가지 직분을 통합하여 완성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직분을 세우실 때 처음에는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하도록 하셨다. 예컨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족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일, 제사하는 일, 종족을 다스리는 일을 다 맡아서 했었다. 그러나 출애굽 이후 백성의 수효가 창대하여짐으로 모세가 처음에는 혼자서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아론의 자손들을 성별해서 제사장 직분을 분담시키셨다. 그 후에 왕을 세우셔서 백성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선지자를 따로 세우셔서,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바로 수행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봉사하였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왕국이 건설된 이후에는 세 가지 직분이 확실히 구분되어서 상호 협력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세 가지 직분이 예수께 와서 다시 통합되어 한 몸으로 이 세 가지를 수행하는 그리스도(메시야)직분을 맡기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 가지 직분을 수행하신 것을 이론적으로 확립하여 주창한 분은 요한 칼빈이며, 그 이후,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이 세 직분론을 교과서처럼 사용해 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신 모든 사역을 이 세 가지로만 묶어두는 것은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굳이 미흡한 점을 보충한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문제이다. 이사야 후반에 나오는 「고난의 종」의 역할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가진 고난의 종의 직분을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의 직분 어느 것에도 포함시키기에 적합하지 않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세 가지 직분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난의 종」이라는 직분이 구체적으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 가지 직분을 합한 「그리스도의 직분」을 알아보자.

 

첫째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직분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 신속하게 왕이나 제사장이나 백성들에게 전하 는 직분이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따르게 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선포하신 모든 사역은 선지자 직분을 수행하신 것과 같다.

 

둘째로, 제사장 직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장벽을 허물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해를 이루는 직분이다.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 죄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것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음으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친히 제물이 되셔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셨다. 그리하여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시고, 용서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완전한 화해의 길을 열어주셨다.

 

셋째로, 왕의 직분은 통치권을 위임받아 그 백성을 하나님 뜻대로 다스리는 직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확립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왕의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운동을 일으키셨다. 그리고 세상 모든 권세를 가지고 우주를 통치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실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나라운동이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 되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져서 지금까지 계속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가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도 보혜사 성령의 강림으로 계속 이어졌다.

 

제3-9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핵심은 贖罪이다. 이 속죄의 핵심은 십자가 사건이다. 이러한 십자가의 속죄에 대한 연구가 초대교회 시대부터 계속되고 있는데, 그것이 다양하고 어렵고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려오는 속죄론을 정리해 보면서 가장 옳다고 생각되는 뜻을 찾아보려고 한다.

 

1. 배상설

이것은 초기 신학자 이레니우스와 오리게네스가 주장한 학설이다. 인류를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 배상금을 지불하였는데 그 속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범죄한 인류가 사탄의 종이 되었는데, 사탄은 하나님께 대하여 인류를 석방해 주는 대가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예수 그리스도를 요구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요구를 들어주었는데 사탄이 그리스도를 삼켰으나 사흘 만에 다시 토해 내고 말았다고 했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요나가 고기 뱃속에서 나온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탄의 권세를 쳐부수고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성경적이지 않다. 사단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어떤 배상도 받을 권리가 없으며,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범죄케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한 장본인이므로 당연히 멸망 받을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어떤 것도 배상할 책임을 가지지 않으셨으며, 이 이론은 사단적인 이론이다.

 

2. 만족설

11세기 영국의 남쪽 캔터버리 대주교 안셀름이 주창한 것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친 학설이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사람에게는 죽음을 가져왔고 하나님께는 결정적인 불명예를 끼쳤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노여움을 가지고 계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하고, 노여움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고 그리스도가 인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벌을 받으심으로, 하나님께서 명예를 회복하시고 노여움을 푸시고 만족해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는 벌을 받았으며, 그 결과 인류는 구원을 받게 되었다.

 

3. 도덕설

「아베라르」라는 중세신학자는 만족설을 철저히 반대하면서 도덕설을 주장했다.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하면 그 하나님은 무정하고도 냉혹한 신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실 정도로 인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표현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도덕적 감화를 받아 자기도 사람의 생활을 하도록 하신 사건이라는 것이다.

 

4. 형벌 만족설

루터와 칼빈 같은 개혁 신학자들이 안셀름의 만족설을 따르면서, 거기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포함시켰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 심판이라는 것이다. 인류의 죄를 그대로 벌하면 모든 사람이 죽게 되니까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벌을 받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갈 3:10). 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나타난 것이다.

 

5. 통치설

종교개혁 당시「그로튜스」라는 신학자는 인류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너진 통치권을 재확립하기 위해서 죄를 벌하셨는데 그 길은 십자가의 길밖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6. 모범설

17세기 [소치누스]는 용서를 핵심으로 하는 속죄를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향하여 모범을 보이신 것이라는 뜻이다.

 

끝으로 이상에서 여러 가지 주장을 살펴보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상징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공의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매를 드시고 때리시는 하나님의 의가 강하게 나타났는가 하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시고, 고난의 종으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신 의와 사랑의 표현이요, 구원의 손을 내밀어 주신 사건이다. 한편으로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속죄 제사를 드린 사건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을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시고, 대표하여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 완전한 제사가 되었다. 그러므로 천하만민은 믿음으로 십자가 앞으로 나가면 구원을 얻게 된다.

 

 

제4장 우리가 믿는 보혜사 성령

 

제4-1과 성령은 누구이신가?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돌아볼 때,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를 야기시켰다.

 

첫째로, 성령의 역사를 무시함으로서 중세교회나 종교개혁 이후의 현재 유럽과 미국교회들 처럼 교권주의적, 의식 중심적, 예전 중심적, 제도 중심적 교회가 형성되고, 그 결과 교회가 경직화되고 정적인 교회가 되어 결국은 교회의 쇠퇴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성령의 지나친 강조로 말미암아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흘러서 이상하게 신접한 사람들처럼 이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고, 성서적인 정립이 필요하다.

한국교회 성도들 중에는 성령 운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성령 운동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이단으로 몰아버리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성령 운동하는 사람들은 조용히 믿는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매도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있다. 이상의 두 가지 폐단은 모두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그러면 성령은 누구이신 가를 정리해 보자.

 

1. 성령도 성부, 성자와 똑같은 하나님이시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함께 처음부터 계셨다. 성부의 창조사역과 예정과 섭리 사역에 동참하였으며, 성자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원사역에도 동참하셨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본질상 똑 같으시고, 동등하신 동격자이시다.

 

성령의 출처에 대해서 로마 천주교회와 동방 정교회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못해서 논쟁 끝에 1054년에 동서방 교회가 분열되고 말았다. 또한 능력 면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보다 열등하다든지,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되어 있다든지, 성령은 오순절에 강림하심으로 시기적으로 늦게 존재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성령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많은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관을 확립하여 성령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一神論으로나 三神論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三位一體 신관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성령 하나님은 전지(고전 2:10, 눅 2:25-26, 사 40:13) 전능(눅 1:35, 롬 15:13-19, 슥 4:6)하시고, 무소부재(시 139:7-10, 요 14:17)하시며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히 9:14).

 

2. 성령은 인격성을 가지신다.

성령의 인격성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성령을 바람이나 물이나, 비둘기에 비유한 나머지 성령을 물질적으로 오해하여 「충만히 받으라」는 말을 컵에 물을 부어 철철 넘치게 하는 식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성령님」이나 「성령께서」라는 말로 쓰지 아니하고 물상화(物象化)하여 「성령을 받으라」하면 그 무엇(it)을 받는 것처럼 착각을 했다.

 

성령께서는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모시고, 경배하고, 가르침을 받고,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시지 예배 때 일어나는 감화력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을 능력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성령께 사로잡혀 헌신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 지(知) 정(情) 의(意)를 가지고 인간과 만나시고 지도하신다는 뜻이다. 성령께서는 말씀하시고(계2:7), 인간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기도하시고(롬 8:26), 기르시며(요14:26), 인도하신다(행 9:11). 또한 성령께서는 근심하시고(엡 4:30), 탄식하신다(롬 8:26).

우리는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태도를 가져야 한다.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결코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그리스도와 똑 같으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성령 하나님께서 신성과 인격성을 따라서 역사 하시는 모든 사역에 순종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제4-2과 성령(聖靈), 사람의 영(靈), 악령(惡靈)

성경에 나오는 영계(靈界)의 체계는 분명하고 독특하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사와 구원받는 사람들의 영들이 함께 사는 영원한 축복의 세계가 있고, 한편으로는 악령과 마귀와 잡신들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영들이 함께 사는 영원한 고통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과 악령과 사람의 영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한다.

 

1. 성령에 대해서

성령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보혜사라고 부른다. 성령은 성부의 영인 동시에 성자의 영이시고, 그 존재의 시작이 같으시고, 능력과 존귀와 영광이 동등하시다. 성령께서는 창조와 섭리와 구속의 사역에 동참하실 뿐 아니라, 그 모든 사역을 완성하시는 분이시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죄를 회개시키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성화 시키시며, 교회를 창설하시고 지도 육성 부흥케 하신다. 그뿐 아니라 인류역사를 새롭게 하고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실 때는 성령을 통해서 하신다. 그래서 보혜사라는 호칭을 붙이게 된 것이다. 성령께서는 격려와 위로와 중보의 사역을 통해서 사람에게 기쁨, 화평, 사랑, 양선, 자비, 인내, 절제, 온유, 충성 등의 열매를 맺게 하시어 인간의 행복을 주신다.

 

2. 사람의 영에 대해서

사람의 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창 2:7). 그러므로 창조의 영이신 성령과 피조물인 사람의 영은 연관성과 유사성이 있으면서도 엄격히 구별된다. 사람의 영은 피조되었기 때문에 불완전하여서 죄된 영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의 영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타락하여 악령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 결과 실낙원의 비참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의 영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듭나서 선한 영이 되면 하나님의 영과 더불어 살게 되고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들은 계속 악령의 지배를 받으며 악한 일을 행하며 살아간다.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임하였다는 말로 관계를 설명하는데 그것은 성령의 초월적 임재를 뜻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사람의 영 안에 계신다는 것은 영원한 내재가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오신다고 이해해야 한다. 성령의 생각과 사람의 영의 생각은 다르다. 사람의 생각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현실 중심적이지만 성령의 생각은 이타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이며 영원을 지향한다.

 

3. 악령에 대해서

악령의 출처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유 1:4, 벧후 2:4 같은 곳에 「범죄한 천사」「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를 사탄의 출처로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각 자 맡은 직책을 따라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한 천사가 자기의 위치와 사명을 이탈하여 타락한 것이 사탄이 되었다고 한다. 성경은 악령의 존재를 처음부터 인정하는 이원론을 철저히 배격하기 때문에 악령은 하나님의 피조물의 변질로 처리하고 있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을 전문으로 한다. 그러한 일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을 도구로 이용한다. 사탄은 사람을 유혹하여 타락시키고 그 사람을 악하게 만들어서 파괴와 전쟁을 일으키고 슬픔과 근심과 걱정과 불안과 초조와 공포심을 일으켜서 파멸을 초래케 한다. 악령은 인간의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결론적으로 성령이나 악령이 역사할 때에는 사람의 영을 통해서 한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선한 영으로 활동하고 악령의 지배를 받으면 악한 영으로 활동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계속적인 지배를 받으며 헌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울 왕과 가롯 유다와 빌라도와 네로와 히틀러와 같은 불행한 자가 된다.

 

제4-3과 성령의 사역(使役)

성령께서는 성부, 성자 하나님과 같이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사역을 이해할 때에 삼위일체 신관을 가지고 해야만 바르게 할 수 있다. 성부 하나님께서 창조와 섭리사역을 주체적으로 하셨지만 성자와 성령 하나님도 창조와 섭리 사역에 동참하셨으며, 성자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주도적으로 이루어 나가실 때에도 성부와 성령 하나님께서 성자의 사역에 동참하셨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사역에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고, 성령시대에 와서는 주체적인 사역을 수행하신 것이다.

 

성령시대라 함은 성부시대와 성자시대와 구별하는 것인데, 오순절 성령강림절 이후부터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를 말한다. 그래서 성부시대와 성자시대에 활동하신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보조적 사역"이라 부르고, 성령시대의 주도적이고 본질적인 사역을 "주체적인 사역"이라고 한다.

 

1. 성령 하나님의 창조 사역

1) 성부 하나님과 함께 창조와 섭리 사역에 동참하심(창1:2-3, 2:7, 욥26:13, 33:4, 시33:6-7, 104:29-30)

성령 하나님은 창조의 사역에 참여하셔서 천지만물 창조와 인간 창조에 성부 하나님의 주체적인 사역하셨고, 섭리사역에도 항상 함께 하셔서 지으신 만물을 붙들고 계시고 사랑으로 돌보셨다. 그러나 밖으로 주체적으로 나타나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성령시대에 와서는 이러한 사역을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하시게 되었다.

 

2) 성자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사역에 동참하셨다

성령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을 도우셨고 세례 받으실 때 임재하셨으며,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함께 하셨으며 말씀선포와 기사와 이적을 행할 때에 함께 하셨다. 특별히 성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성령께서도 성부와 함께 고통을 당하시며 성자의 아픔에 동참하셨다. 성자는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으셨고 성부와 성령께서는 죽음을 경험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

 

이상과 같이 보혜사 성령께서는 성부의 사역과 성자의 사역에 동참하여서 창조와 섭리와 구원사역의 시작과 모든 과정을 완전히 아시고, 그 일을 완성하시는 것을 본질적인 사역으로 담당하셨다.

 

2. 성령 하나님의 주체적인 사역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성령 하나님 시대의 개막식이다. 성령께서는 지금까지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와 섭리와 구원사역을 완성키 위해 오셨다. 성령께서는 재창조의 활동을 계속하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까지 일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2천년 전에 이루어 놓으신 구속사역을 현재화하셔서, 지금 우리 앞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도록 하시는 믿음을 일으키는 일을 하신다.

 

1) 인류구원을 위한 사역 :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 만은 인간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께서 일방적이며 주권적으로 부르시고, 화해시키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의롭다고 인정받게 하신다.

 

2) 성도들을 위한 사역 :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성도들이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응답하게 하신다. 성도에게 믿음을 주시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힘쓰게 하시며, 사랑과 소망이 넘치게 하시고 기도와 전도와 봉사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교회 안에서 활동하심 :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교회가 창설되었고, 부흥, 성장하였으며, 또한 성령께서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교회를 튼튼하게 하시고, 끊임없이 자기혁신을 하도록 새롭게 하신다.

 

4) 우주만물과 인류역사 가운데서의 활동 : 피조물의 탄식을 들으시고 고통 당하는 인류와 함께 신음하시며, 만물을 새롭게 하실 뿐 아니라, 인류역사를 하나님의 뜻대로 새롭게 하시는 역사 변천의 원동력이 되신다. 지금은 성령시대이며,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일하시는 때이다. 그러므로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온 인류가 동참해야 할 것이다.

 

제4-5과 성령세례(聖靈洗禮)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는 말씀에서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구별하여 두 가지 세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성령이 임하였다」 「성령으로 충만하다」「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성령의 은사를 부으심」 등등의 모든 말씀들은 같은 체험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을 독립적인 어떤 神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일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일이나, 성령을 받는 일이 같은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하면 삼위일체 신앙을 깨뜨리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음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계신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롬 8:9)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이상의 사실을 잘 정리하여 혼돈이 없도록 해야 한다.

 

1.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

「성령충만」이라는 말과 병행해서 많이 사용된 용어로 성령 하나님께서 특별한 자기계시를 나타내실 때, 그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이 성령을 만나기 전과 이후의 변화 받은 사실을 성령세례로 표현하고 성령의 능력을 강하게 경험한 사람들은 「성령충만」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뜨겁게 경험한 사람들은 불세례를 받았다고 표현했고, 강하게 경험한 사람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충만」이라는 용어나 「불과 같은 성령」 「바람 같은 성령」등의 표현 때문에 성령을 물질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고, 또 이상한 神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며 성부, 성자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함께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을 독립적인 이상한 神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2. 성령의 중생 역사와, 성령의 부가적인 역사

성령의 세례는 부가적인 것으로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명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나누어주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중생의 사역을 통해서 생명을 받게 되고, 성령의 세례에 의해 능력을 받는다(행 1:5,8). 이것은 중생과 동시에 능력을 받는 사람도 있고 중생한 성도들에게 능력을 받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행 8:2, 15-16). 

 

3. 성령세례는 자신이 성령의 존재와 능력을 확실히 경험한 사람에게 붙여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그 실상을 분명히 증거할 수 있다는 말이다(행 19:2).

 

4. 성령충만 또는 성령세례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교회를 위해서 유일한 봉사를 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5. 성령 세례는 은사를 동반한다.

이 은사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능력과 재능을 의미하는 것이다(고전 12:4-14). 결론적으로 성령의 세례는 성도들이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하여 그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와 이웃과 세계를 위해서 일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계속적으로 받도록 계속적으로 헌신해서 성령께서 온전히 나를 사로잡아 쓰시도록 순종해야 한다.

  

제6과 성령의 은사(恩賜)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해서 초대교회때 부터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여 교회가 어지러웠다. 그러한 현상은 2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행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1. 성령의 은사의 의미

신약 성경에서 '은사'라는 말을 뜻하는 「카리스마」는 카리조마이(선물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 말로는 「恩惠의 膳物」을 줄여 「恩賜」이라고 부른다.

성령의 은사를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성령의 은사는 ①성령의 기쁘신 뜻대로 성도들에게 나누어주시는 선물이다. 성령께서 마음대로 주시는 것이다. ②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는 보편적 선물이다. ③개개인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기는 하지만,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특정한 봉사를 하도록 주시는 사명이다. ④특별한 경우, 특별한 목적으로,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기능을 부여하시는 경우도 있다. ⑤모든 은사는 사랑의 은사와 함께 주어지며, 사랑으로 결실되는 것이다.

 

2. 은사의 종류

일반적으로 9가지 은사를 말하는데(고전 12:5-10) 그것은 은사의 전부가 아니고 일부에 불과하다. 넓은 의미에서 은사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지어주신 모든 것이나, 좁은 의미에서는 특별한 일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의미한다. 성령의 은사를 크게 나누면 일반 은사와 특별 은사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합해서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1) 일반적인 은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햇빛과 비를 은사로 생각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2) 일반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정도의 은사

기적, 환상, 치병 등은 무당들도 할 수 있는 수준의 것들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 중에도 이상과 같은 것이 있다.

 

3) 한시적(限時的)인 은사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는 말씀과 같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성격의 은사도 있다.

 

4) 항상 있는 은사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고전 13:13) 성령께서 주시는 그리스도교의 은사 중에서 항구적이고, 본질적인 은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이다.

 

5) 제일 중요한 은사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은사가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은사가 사랑 위에서 행해져야 한다. 예언이든 병고치는 일이든 지혜와 지식이든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행하지 아니하면 유익이 없다.

 

어떤 은사이든지 자기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면 안된다. 방언, 천사의 말, 모든 비밀을 다 아는 지식, 산을 옮길만한 믿음, 모든 것을 희사하는 구제, 몸을 불사르는 순교와 같은 행위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기초 위에서 행하여지지 아니하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고전 13:1-3).

 

3. 은사의 목적

첫째,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확립하며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증거하고, 사람을 구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둘째,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도록 주신 선물이다. 이 은사는 사적인 것이 아니다. 공적인 것이요, 형제를 위한 것이다.

셋째,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고, 튼튼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교회의 화평과 일치를 이루는데 목적이 있다. 특별히 사랑의 은사를 통해서 세계의 평화와 일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제7과 바람직한 성령운동

 

1. 성령운동이란 ?

성령운동이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성령의 강한 역사와 같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교회를 부흥시키고, 선교를 열심히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일어난 오순절 성령운동은 특수한 경향을 띄고 있어서 "오순절 성령운동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웨슬리의 성령운동과 피니, 무디, 토레이의 부흥운동과 관계가 있다.

 

오순절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이 대체로 감리교 출신들인데, 감리교회의 제도와 교리에 얽매이기 싫은 사람들이 나와서 군소 교파를 만들었다. 그들 중에 미국 켄사스주의 토페카 성서대학의 파르함(C.F Parham)과 로스엔젤레스의 아주사에 있는 감리교회의 세이모어 목사가 중요인물이었다.

 

1900년 12월 31일 송년집회에서 파르함이 오즈만이라는 여학생에게 안수 기도했을 때, 오즈만이 중국어로 방언 하는 것을 보고 그 집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오순절 성령강림과 같은 성령의 역사라고 믿었다. 파르함의 제자인 목사 세이모어가 1900년부터 아주사 312번지 감리교회에서 성령세례를 주장하면서 집회를 계속하는 가운데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파르함과 세이모어를 오순절파의 창설자로 본다.

 

2. 이러한 성령운동이 일어나는 배경

첫째, 기성교회가 침체한 때에 일깨우기 위해서 일어나는 부흥운동이다.

 

둘째, 제도적인 교회 안에서 답답함과 컬컬한 성도들이 시원한 탈출구를 찾을 때 그것을 충족시키는 성령의 역사이다.

 

셋째, 현재의 물질문명과 정치적 사상적인 압박감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대중들이 영적인 자유를 갈망할 때 역사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넷째, 선교의 열정이 식어가고 현상에 안주할 때 세계교회를 향하여 선교의 뜨거운 영을 부어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강력한 자기계시이다.

 

다섯째, 성령의 실제와 사역을 등한시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성령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3. 오순절파의 잘못된 성령운동

첫째, 「완전한 복음」이란, 마음과 생활의 성결, 육체의 치유, 방언의 증거가 나타나는 성령세례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신조 5항이 문제이다. 성령세례란, 성령의 확실한 체험을 뜻하는 것인데, 반드시 방언을 해야만 성령세례의 유일증거가 된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령의 수많은 중요한 은사 중에 가장 작은 방언을 구원의 근거처럼 주장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그들의 교리대로 하면 방언 받지 못하면 성령 받지 못한 것이요, 엄격히 말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바울은 방언을 인정은 했지만 장려하지는 않았다(고전 14:19).

 

둘째, 신비주의로 치우치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초월적인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령의 역사를 환상, 기적, 치병, 축귀, 방언등 초자연적인 것에 만 치우치는 것은 위험하다. 신비적인 체험을 강조하고 그것에 치우치면 주관주의에 빠지게 된다. 성령의 역사는 포괄적이고 광범위하다.

 

셋째, 지나친 영적인 생활을 강조한 나머지 현실 도피적 염세주의에 빠지게 되고, 현실에 대하여 무책임하게 되며, 자유방만한 생활를 하게 된다.

 

넷째, 교회의 제도나 조직을 경시하고, 성경을 체험보다 경시하며, 성령체험을 극대화하는 교만으로 배타와 분열을 조장하는 경향이 많다. 이상의 잘못을 시정하지 않으면 이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

 

4. 바람직한 성령운동

첫째, 성령을 독립적인 신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 모셔야 한다.

 

둘째, 모든 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도록 해야한다. 성령 충만은 주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이다(행 1:8).

 

셋째, 성령운동과 신비체험은 반드시 성경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넷째, 성령의 은사 중에서 근본이 되고 가장 크고 무거운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령 충만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충만케 하는 것이다.

 

다섯째, 성령운동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세계구원을 동시적으로 지속적으로 일으키는 운동이어야 한다.

  

 

제5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제1과 인간은 과연 누구인가 ?

인간은 누구이며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무엇을 기다리며, 무엇이 인간을 기다리는가?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네가 누구냐」고 질문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희랍의 현인 탈레스의 말과 같이 「인간이 아는 것은 모르는 것뿐이다」라는 표현이 옳다.

 

히틀러의 전범자 재판정에 비누 한 상자가 증거물로 제시되었다. 그 비누 상자에는 「순 유대인의 지방으로 만든 비누」라는 상표가 붙어 있었다. 인간들은 이 비누 앞에서 「인간이 무엇이냐」하고 질문해 보아야 한다.

일본인들의 생체 실험에 사용된 「마루타」앞에서 인간이 과연 무엇인가! 물어 보고 대답해야 할 자가 바로 사람 자신이다. 동물원의 원숭이 앞에서 사람은 자신의 조상을 찾았다고 기뻐하며, 원숭이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지 다윈을 깨워서 물어 보아야 한다. 아니면 모세와 같이 「내가 누구이며, 당신은 누구이십니까?(출 3:11)」하며 神을 향하여 물어 보게 된다.

 

인간은 많은 것을 연구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하지만 인간 스스로에 대해서 아직도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인간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이것을 정확하게 알 사람은 아무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가장 잘 아는 분은 인간을 만드신 분이시다. 인간을 누가 어떻게 만들었으며 무엇을 위해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기록한 책을 통해서 아는 길이 제일 현명하다. 그래서 성경책에 계시된 내용을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한다.

 

첫째, 인간은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다(창 1:26). 그래서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라는 질문에 답한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창 1:26-28).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으므로 다른 피조물과 유일하게 구별된다. 인간에게는 신의 형상이 있으므로 人權은 神權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사람을 학대하거나 살육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는 것과 같다.

 

셋째, 인간은 영과 육으로 구성되었으되 혼연일체가 되어 나누지 못한다. 육은 '흙'으로, 영은 하나님의 생기로 되었기 때문에 사람은 동물과도 구별되고 하나님과도 구별되는 독특한 존재이다(창 2:7).

 

넷째, 인간은 우주 만물의 관리자이다(창 1:28). 우주 만물은 창조주의 소유이나, 만물의 관리는 인간에게 맡기셨다. 관리자는 주인의 뜻대로 관리해야 한다.

 

다섯째, 인간은 남녀 양성으로 되어 있다(창 1:27). 인간은 남자와 여자를 합하여 인간이라고 한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며 상호 협력해야만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여섯째, 인간은 책임적인 존재이다.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무엇을 하였느냐?」고 질문하신다(창 3:9). 「가인아 네 형제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시며 책임을 추궁하신다(창 4:9).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나, 인간 앞에서나 자연 앞에서나, 자신에게나, 역사 앞에 책임적인 존재로 세워졌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인간만이 대답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인간은 그의 형제와 자연과 역사의 파수꾼이다.

 

일곱째, 인간은 죄인이다(창 3:1-7, 눅 5:8).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받았다.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자유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 자유를 남용하여 교만과 불순종의 죄를 범하였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죄인으로서의 자신을 철저히 인식해야 한다.

죄인으로서의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을 모르는 사람이다. 인간은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고 고침을 받아야 바르게 살 수 있다. 인간은 죄인이며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다. 인간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제2과 인간의 출처

사람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대답이 있다. 하나는 창조론 이고 또 하나는 진화론이다. 사람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생명의 기원부터 알아야 하겠다.

 

1. 생명의 기원

옛날 사람들은 대체로 造物主가 생명을 만들었다는 막연한 원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은 옛날부터 모든 생물들이 저절로 생긴 것이라는 자연발생설을 믿고 있었다. 먼지나 진흙이나 썩은 물질에서 벌레나 곤충이 나오는 것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연발생설을 믿게 되었을 것이다.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대석학이 자연발생설을 주장했으니 감히 반대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박물학자이며 진화론의 시조인 뷔퐁(1707-1788)은 약 2만년 전에 원시 바다 속에서 최초의 생명이 우연히 생겨나서 진화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그후 동식물 학자 라마르크(1744-1829)의 「동물 철학」이나 다윈(1809-1882)의 「종의 기원」도 생명의 자연발생설을 기초로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세균학자인 파스퇴르(1822-1895)는 공기 중에 있는 수많은 미생물들을 발견해서 벌레나 곤충 등이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실험을 통해서 증명하였다. 그래서 그는 「생명은 오직 생명에서만 생겨났다」는 주장을 함으로 생명의 자연발생설을 정면으로 공박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세상에는 우연히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2. 사람의 기원

첫째로, 사람이 원숭이의 후손이냐? 하나님의 자녀냐? 하는 문제를 놓고 진화론자와 창조론자간에 오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만약에 진화론자들의 주장대로 한다면, 인간은 짐승에 불과하며, 가정은 작은 동물원과 같고, 이 세상은 거대한 동물원과 같다. 그래서 약육강식의 원리를 따라 상대방을 잡아먹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적자생존과 자연도태라고 하는 동물적인 이기주의와 물질 만능 사상만이 판을 치게 될 것이다. 도덕이나 윤리가 필요 없고, 진선미를 추구하는 문화생활도 필요 없을 것이다. 참으로 다윈의 진화론 위에 세워진 인류 문명은 자연과학뿐 아니라, 사회과학적인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의 허구성과 거짓됨이 만천하에 속속 증명됨에도 불구하고 당장에 이것을 바로 고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당장 무너뜨리면 현대 사회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 중에서 소진화(小進化)는 인정하되, 대진화(大進化)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소진화는 같은 種안에서는 진보라는 개념은 발달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대진화는 種에서 種에로의 탈바꿈도 뜻하는 것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개들 중에 여러 종류가 있고, 소중에서 여러 종류가 생기지마는 개가 소가 되고 소가 개가되고, 원숭이가 사람이 되는 대진화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먼지에서부터 우연히 자연 발생한 생명체가 진화해서 된 존재라고 하는 진화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없고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둘째로, 사람은 창조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이다. 사람의 기원에 대한 근거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 성경이다. 성경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생명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으며, 특별히 사람을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26-27, 2:7). 즉 성경에서는 ①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것과 생명은 생명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②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전에 계획하셨다는 것과 ③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닮게 지으셨다는 것과 ④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제3과 하나님의 형상

 

1.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

성경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중요한 기록들이 많다(창 1:26,27 9:6 고전 11:7 약 3:9 골 3:10). 특별히 창 1:26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는 누구누구이며 [형상]은 무엇인가?

 

[우리]는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의 품성을 복수로 나타낸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서로 서로 사랑의 관계 속에서 하나가 되어 계신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하나님의 존엄성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을 택할 때 복수를 사용하는 히브리인들의 언어 관습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이라 함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을 일컫는다. 하나님의 속성은 이성, 자유, 사랑을 말하는 능력, 양심, 판단력, 정의감, 용기, 선함 등등을 말한다.

 

최근의 신학자들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 [사랑의 관계]로 혼연일체가 되셔서 존재하심과 같이 인간도 사랑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 분 하나님께서 서로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신 것처럼 인간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 분 하나님께서 서로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신 것처럼 인간도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등 세 가지 관계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관계가 사랑으로 유지되면 번영과 행복이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불행이 온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 사랑하며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며 하나님을 공경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나 종래 이 세 가지 사랑의 관계를 바로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실낙원이라는 불행을 자초한 것이다. 

 

2. 타락한 인간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형상

그렇다면 타락 이후의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완전히 파괴되어 없어졌을까? 아니면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을까? 조금 남아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의하면 자연 은사(이성, 양심, 분별력, 정의감, 사랑, 용기 등)는 그대로 남아 있는데 반해 초자연 은사(神知識 神意順從 영생 얻을 가능성등)?상실했다고 한다.

 

둘째로, 개혁 교회는 대체로 사람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다고 본다. 마르틴 루터와 그의 제자들은 전적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요한 칼빈과 그의 제자들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형상]이 거의 파괴되었지만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의 조각이 남아 있어서, 거기서 하나님의 지식이나 영광이 나타나며 그것이 또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게 하는 증거가 된다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죄를 통해서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것은 죄가 하나님의 형상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창9:6 고전11:7 약3:9).

 

셋째로, 최근의 신학자들이 [관계]라는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을 보면 아담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됨으로써 모든 관계가 잘못되게 되었는데 그 결과가 곧 낙원에서의 추방이요 온 인류의 불행이라는 것이다. 관계가 끊어지거나 잘못되면 불행이 따른다고 한다. 신인 관계가 잘못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관계는 맺고 있기는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범죄한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히시고 아우를 죽인 카인에게 표를 주셔서 생명을 보존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카인 속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정하시고 아무도 카인을 죽이거나 해치지 못하게 하셨다. [사랑의 관계]이든 [미움의 관계]이든 아직도 관계 속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리해 보면 ① 인간은 [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다. ② 인간은 타락하여 신의 형상을 거의 잃고 말았다. ③ 아직도 남아 있는 신의 형상만으로도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존귀하다. ④ 그러므로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짓밟아서는 안된다. 인간을 짓밟는 행위는 하나님께 그같이 행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제4과 罪에 대하여

 

1. 죄의 개념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나쁜 짓을 많이 하길래 항상 [죄인]이라고 가슴을 치며 울고, 만나기만 하면 회개하라고 다그치는 것일까? 기분이 나빠서 교회에 나가기가 싫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현상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죄]에 대한 개념과,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죄]에 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난다. 일반적으로 [죄]라고 하면 법률을 위반했다던가 윤리, 도덕상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죄]를 범했다고 한다. 그러나 종교에서의 [죄]개념은 그 종교의 계율을 어기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자주 말하는 [죄]의 뜻은 무엇인가?

 

구약과 신약에서 [죄]라는 뜻으로 쓰여진 단어는 여럿이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말이 [하말티아]라는 히브리말이다. [하말티아]라는 말은 활을 쏘아서 과녁을 적중시키지 못하고 빗나갔다는 뜻이다. 이 말의 뜻은 인간이 신의 뜻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출발해서 인간이 신의 뜻을 반역하는 일, 그 다음에는 악을 행하는 일 등을 [죄]라고 했다. 영어 성경에는 [죄](sin), [죄과](罪過)(transgression), [허물](iniquity), [범죄](fault)등으로 달리 구분해서 쓴다.

 

마음이 머물러 있는 악한 생각에서부터 시작해서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난 나쁜 행위, 그 행위의 결과로 나타난 사건들 등이 모두 [죄]라는 말로 표현된다.

 

 

2. [죄]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

첫째,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는 모든 것이 다 선하였다(창1:31). 그러므로 죄의 기원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둘째, 천사들 가운데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자들이 있어서(유 1:6) 그 천사들이 타락하여 악한 세력이 되었고, 그 타락한 천사가 인간을 유혹해서 사람이 범죄 하게 되었다고 하나, 이것 역시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을 천사에게 전가시키는 경우가 된다.

 

셋째, 우리는 죄의 기원을 하나님에게나 천사에게서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죄의 근원]은 인간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 인간이 범죄한 것은 아담과 하와의 자발적인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왜 인간이 범죄 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인간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이라는 말은 창조주가 아니라는 뜻이요 [피조물]은 [불완전하고 유한하고 상대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인간의 죄는 바로 인간의 [불 완전성]에서 나온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부족한 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인간이 자기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를 완전한 존재 인양 착각하여 창조주와 같아지려고 한 것이 죄의 근본이다.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피조된 인간이 창조주와 같아지고자 한 행동이었다. 우주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주인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자신에게나 모든 피조계에 불행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3. 그러면, 죄란 무엇인가 ?

죄는 피조물의 불완전성에서 파행된 곰팡이와 같은 것이며, 인간이 신으로부터 받은 최고의 선물인 자신의 자유의지를 남용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망각하고 창조주만이 앉을 수 있는 우주 만물의 주인의 자리에 앉으려고 한 노력이 곧 죄가 되는 것이다. 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①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교만]과 ② 피조물이 창조주의 통치를 거부하는 [불순종]과 ③ 자식이 아버지를 불신하는 [불신앙]을 뜻한다.

 

인간이 신을 거부하고,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선언한 아담과 하와의 행위야말로 죄악의 기원이 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피하여 굴레 벗은 야생마처럼 세상을 살아갈 때 인간의 욕망을 아무도 다스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 욕망이 안으로는 부패를, 밖으로는 갈등과 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한 사람 아담의 죄는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고 개인과 인류의 파멸의 원인이 되었다.

 

 

제5과 원죄(原罪)에 대하여

 

1. 원죄(原罪)란 무엇인가 ?

원죄(原罪)라는 말은 인간의 처음 조상 아담의 범죄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기독교적 죄관(罪觀)이다. 원죄에 대한 사상은 구약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사상(창 6:5, 시 53:3, 사 53:6, 시130:3, 시143:2) 즉 죄의 보편성에 대한 내용이 그것이며, 모태에서부터 죄를 얻었다는 사상도 있다(시51:5).

 

그러나 이 원죄 사상이 본격적으로 정립된 것은 사도 바울에게서 부터이다. 바울은 한 사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말한다(롬 5:12-21). 바울에서 태동된 원죄 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신학적으로 확립되었다.

 

2. 원죄라는 말의 문자적 뜻은 [죄의 원뿌리]라는 뜻

죄의 원뿌리가 무엇이며, 그 아담의 죄가 어떻게 후손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는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선 대체로 인간이 가진 [자유의 남용]에서 죄의 원뿌리를 찾는다. 인간은 어떻게 그 고귀한 자유를 남용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는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였다. 자유는 그래야만 참 자유이다. 그 자유는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있었을 정도로 완벽한 것이었다고 본다.

 

이 [자유]를 남용했다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따먹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선택을 통해서 죄인이 되고 만 것이다. [자유] 자체가 죄의 원뿌리가 아니고 그 [자유의 남용]이 죄의 원뿌리이다. 인간이 왜 그 자유를 남용할 수밖에 없었는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인간의 불 완전성 때문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를 누리시나 인간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원죄는 인간 자체의 불완전성과 그 불완전성에서 발생하는 죄된 성품을 말한다.

 

원죄 교리를 통해서 가르치려는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은 죄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는 어려운 점이 많다는 것과, 인간은 죄를 피해서 살 수 없다는 것과, 죄는 사회성과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3. 죄가 어떻게 전해져 내려왔는가 ?

고대 신학자들(이레나에우스, 터툴리아누스)은 이 문제를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고 막연히 바울의 원죄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아우그스티누스는 아담의 죄가 인간의 정욕(특별히 性慾)을 통해서 임신과 분만의 방법으로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전해져 내려온다는 이론을 정립했다.

 

이와같이 죄의 유전성(遺傳性)과 모방성(模倣性) 등이 있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러한 이론보다는 인간 존재 자체가 불완전한 존재이며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아담의 죄가 생물학적인 유전법칙과 같이 후손들에게 전해져서 우리 모두가 원죄를 타고났다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인간 존재 자체가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부패한 성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믿는 것이다 더욱 옳다고 본다.

 

4. 원죄와 자범죄

인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본성을 원죄라고 말한다면 어떤 죄의 행동이 나타나는 것은 원죄(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결과이다. 이 결과로 나오는 죄의 행동을 자범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되고, 죄를 범하기 때문에 죄인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원죄와 범죄의 관계를 설명한다.

 

원죄는 모든 사람이 죄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인간은 스스로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으며,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죄에 대한 형벌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제6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存在)

 

이와 같은 인간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서 온갖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노력이 있었고 의학적인 노력도 있었지만 죄와 죽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사람은 없었다. 인간의 생명과 죽음은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이다.

 

1. 罪와 罰

인간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은 노여워하신다. 하나님의 노여움은 반드시 징벌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노여움은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것이요 하나님의 심판도 복음의 중요한 내용이다. 자식의 죄를 보고도 징계하지 않는 부모는 참 부모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사랑의 관계와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죄에는 벌이 따른다]는 법칙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이 법칙이 무너지면 이 세상은 난장판이 되고 당장에 파멸이 온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것과 같이, 죄를 심으면 형벌을 거두게 되어 있다. 이 법칙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죄를 많이 범하면 자신에게든지 3,4대에 이르기까지 그 죄의 해독이 내려가고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일 천대에 이르기까지 복을 받게 된다(제 2계명).

죄에 대한 형벌은 다양하다. 첫째는 양심의 가책이고, 둘째는 부모나 스승이나 이웃이나 공동체와 국가권력에 의해서 벌을 받는다. 이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벌을 내리기도 하나 인간의 형벌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심판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죄에 대한 최고의 형벌은 사망이다(롬 6:25). 그렇다면 인생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

 

2. 죽음에 대해서

죽음은 모든 생명체의 소멸성이라는 차원에서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죽음을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모든 동식물과 같이 소멸될 수밖에 없는 유한한 피조물임에 틀림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가운데 있는 것이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을 자연의 법칙으로만 돌릴 수 없는 까닭이 있다. 그것이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동식물은 죽음을 모르기에 고통도, 죽음의 의미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임종하는 순간까지 죽음을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한다.

 

첫째, 인간의 죽음은 창조 질서에 포함된 것이다. 인간은 영원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정해져 있는 죽음을 바르게 인식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과욕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창조의 법칙을 깨닫지 못하고 땅 위에서 과욕을 부리다가 [개죽음]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 되겠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어떤 이는 진리를 위해 순교하고 어떤 이는 나라를 위해 순국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애를 무의미하게 버리지 않고 뜻있게 살고 뜻있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自殺)만은 절대로 용서되지 않는 죄악이다. 자신의 생명이든 타인의 생명이든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에 속한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고 관계를 끊어 놓았다. 하나님 없는 인간은 사실상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죄의 삯이요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리스도는 끊어진 神人관계를 회복하신 중보자이시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면하게 된다(요 5:24). 인간은 자신이 죄인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인간을 가장 바르게 아는 것이다.

 

 

제7과 총체적(總體的) 인간

 

인간은 개인이면서도 사회인이요, 영적인 존재이면서도 육신을 가지고 사는 존재이다. 우리 인류는 기나긴 역사의 여정을 탐구해 왔지만 인간 스스로가 풀 수 없는 영원한 수수께끼를 안고 있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 생각하는 二分法과, 靈과 魂과 肉으로 나누는 三分法이 있었지만 최근에 와서는 영과 육을 억지로 나누지 말고 통일체로 보자는 총체적 인간이해론이 있다.

 

우리가 사물을 연구할 때 분석적인 방법도 있지만 종합하는 방법도 있다. 지나치게 분석하다가 보면 전체를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 때도 있다. 특별히 寬@?이해하는 방법으로는 분석적인 태도보다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더욱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창1:28)는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자료가 창세기 2장 7절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명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육체와 영]을 지으셨다는 것을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을 [영]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오해하면 안된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힘을 [육체와 영]에 함께 주심으로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히브리인들은 [영과 육]을 나누지 않고, 전인적으로 이해하였다. 인간의 영과 육은 분리될 수 없고 서로 결합되어 있는 존재이다. 육이 없는 영은 생각할 수 없고 영이 없는 육도 생각할 수 없다.

 

우리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범해 온 오류 중에 육신을 저급하고 죄악된 것으로, 영혼은 고결하고 거룩한 것으로 생각해 온 전통은 그 뿌리가 상당히 깊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성서적인 것이라기 보다, 이교 적인 요소가 기독교 안으로 들어온 것일 뿐이다. 사람이 죄를 범한다고 할 때 육체만이 죄를 범하거나 육체만이 악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육체보다는 오히려 [마음]에서 일만 악한 생각이 나오고, 그 생각이 죄를 범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육체는 어떤 의미에서 중성적이다. 고대로 부터 지금까지 기독교 지도자들은 인간 이해를 쉽게 돕는다는 생각에서 인간의 기본 구성 요소를 [영혼과 육신]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거나 [영과 혼과 몸]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이해할 때 그 사람의 영과 혼과 육을 나누어서 생각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따로 따로 나누게 되면 인간으로서의 통일성을 상실하게 되고, 이어서 향락주의나, 고행 주의가 다시 나올 수도 있으며 영혼 지상 주의의 신비주의가 성행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였다는 말씀 안에는 인간의 영혼과 육신이 똑같이 포함되어 있다. 영혼이나 정신이나 마음이나 육신이 구별되기는 하지만 이 모든 표현들은 全人的 표현이지, 인간의 구성 요소를 나누겠다는 의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신명기 6장 5절 말씀이나, 마태복음 22장 37절 말씀이나,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의 모든 표현들이 인간의 구성 요소를 구분할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성품과 힘] 또는 [영과 혼과 몸]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전 존재를 총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육체도 함께 구원하신다. 이 세상을 다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영과 육으로 하나를 이루고 있는 인간, 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인간,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사는 인간, 땅위에 살면서도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시간 속에 살면서도 영원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제8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救援

 

1. 구원이란 무엇인가 ?

[구원]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만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족할 만한 상태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고침을 받는 것, 가난하게 살다가 부유해지는 것, 속박의 상태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포로 중에서의 석방, 전쟁의 참화 속에서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 파멸의 위기에서의 재건, 죽음의 자리에서의 구출 받음, 좁은 길이 넓어지는 것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의미하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인류나 모든 피조물을 창조 당시의 완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에는 [회복]의 의미와 [완성]의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다.

 

2. 구원받아야 할 세상인가 ?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형편은 어떠한가? 만족할 만큼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시겠는가? 병든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 만사가 파멸의 길을 달리고 있다. 인간들에 의해서 오염되고 훼손되어 자연까지도 신음하며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3. 누가 구원할 것인가 ?

[구원의 주체가 누구냐]하는 문제를 논의할 때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다.

 

첫째, 인간 자신이 노력해서 인류나 세상을 구원해 나가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무신론적인 인간중심주의에서 나오는 사항이다.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며 역사의 책임도 인간에게 있으며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능력도 인간에게 있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인간을 낙관적으로 보면서 유토피아 건설을 꿈꾸고 있다.

 

둘째, 인간과 神이 함께 구원을 성취해 나간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전자보다는 신앙적이다. 인간이 유한하므로 절대자와 함께 손을 잡고 인간의 유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 스스로가 구원을 위한 능력의 절반 정도는 소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인간의 공로나 노력이 구원의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종교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일부에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셋째,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셔야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성서적이며 전통적인 개신교회의 입장이다. 인간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졌고 불행을 자초했으며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죄 아래 있는 인간, 죄 가운데 있는 인간 스스로가 죄로부터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 쪽에서 구원의 손길을 펴실 때에만 인류의 구원이 가능한 것이다.

 

누가 구원하는가 ? 이 물음에는 하나님만이 인류를 구원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신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4.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 ? (구원의 범위)

구원받을 대상과 범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은 우주 만물과 인류 전체이다. 그러나 그 범위와 수가 정해져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구원의 범위나 조건이 있다고 한다면 [믿는 자 마다](요3:16) 라는 [믿음]이 될 것이다.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반성하신다 든지, 창조의 상태로 회복하신다는 개념에서 볼 때 구태여 그 범위와 숫자를 제한하실 필요가 있겠는가 ?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창조 질서의 회복을 통해서 구원받는 다는 사실을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범위는 개인에게서 출발해서 가정과 사회와 자연계 전체를 포함하여 이 땅과 저 하늘과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완성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초점을 한 인간에게 맞추고 계시며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신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이 인류 구원의 근본이요 시작이요 완성에의 첩경임을 알아야 한다. 

 

 

제9과 그리스도 안에 창조된 새 사람

 

1.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는 새 사람 만들기 계획(구원 계획)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의 동기가 된다(요 3:16). 인간의 비참함이 하나님의 긍휼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하나님의 인류 구원계획이 세워졌다(출 3:7-10).

 

범죄한 아담에게 가죽 옷을 입혀 주시고(창 3:21), 살인한 가인에게도 보호의 표로 구원을 약속하셨고(창 4:15),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실 때 방주를 예비해 주셔서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시고 무지개로 구원을 약속하셨다(창 9:8-17). 또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언약을 맺으사 그 후손을 통해서 메시야가 나와서 인류를 구원하게 된다고 하셨다(창 12:1-3, 26:3-5, 28:13-15).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신 출애급 사건은 인류 구원의 대표적인 모델이 되었다. 유월절 양의 피가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인류의 죄를 대속한 것이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2. 구원의 수행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창세기 벽두에서부터 시작해서 계속 진행되어 오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수행자를 보내신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인류 구원의 대업을 완성하셨다. 성자 예수께서는 자신이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선포하셨고(요 14:6),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제물로 오셨다](막 10:45)고 증거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해를 이루시고 끊어진 다리를 다시 연결시키사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3. 성령의 구원 역사

성령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漫?실제적으로 활동하신다. 완악한 인간의 마음을 먼저 다스리셔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역사 하신다(롬 8:15-17).

 

성령께서는 사람의 마음에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일으켜 주시고, 회개하고 거듭나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그의 사역을 통하여 2천여년 전에 이루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현재화시키신다. 성령 안에서 성자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 안에서 성부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며, 구원받은 감격을 가지고, 평안을 누리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4.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인간의 응답

신앙이란 무엇인가? [믿고 맡긴다] [신뢰한다] [의탁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그의 약속을 지킬 만큼 신실하고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탄생과, 고난 당하심과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과 심판 주로 다시 오실 것을 믿는 것이다. 특별히 그의 피의 공효를 믿으며 죄사함을 믿고 영생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롬 1:17).

 

5. 새로 지음 받은 새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5:17) 라고 했으며, 거듭난 이 새 사람은 의롭다 함을 받은 자요 거룩하여 지는 사람이다. [인간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면서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을 증거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새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힘있게 일하는 사람이 된다. 

 

 

제 6 장 교회란 무엇인가?

 

제1과 에클레시아의 의미

 

1. 교회론에 들어가면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앙생활만 잘하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간혹 있지만 그것은 바른 이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교회는 신앙인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와 같고 교회는 신앙인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 본질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하고 그 형태는 본질을 바르게 담아 나가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고 자기가 속해 있는 교회를 바람직한 교회로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2천년 교회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교회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현실 교회란 그 본질적인 의미를 회복해 가면서도 그 형태는 시대에 걸맞게 끊임없이 개혁해 나가야 한다는 당위성을 밝혀 보고자 한다.

 

2. [교회]라는 말의 뜻은 ? (용어 해석)

영어의 church, 독일어 Kirche, 스웨덴어 kyrka등은 희랍어 kyrike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교회]라는 말로서 에클레시아(ekklesia)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kyrike(주님께 속한)를 사용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그것은 루터가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싫어하고 [공동체]라는 말을 즐겨 썼기 때문에 그 영향을 많이 받은 독일 교회와 가까운 교회들이 [주님께 속한 공동체]라는 뜻으로 church(영), Kirche(독), kyrka(스웨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로마를 중심한 나라들은 희랍어 [에클레시아(ekklesia)]를 따라서 라틴어 ecclesia, 스페인어 iglesia, 불어 eglise, 이태리어 chiesa 등등의 말로 교회를 표시했다. 종교개혁 당시 개혁 교회들은 [공동체]라는 개념을, 로마 교회는 보편적인 교회(에클레시아)라는 개념을 강조한 것으로 본다. 개신교회는 [주님께 속한 공동체]라는 의미를 좀 더 깊이 생각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구약 성경에서는 [교회]라는 말이 직접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단어를 찾을 수는 있다. [카할]과 [에다]가 그것이다. [카할]은 [의논하기 위해서 소집된 공동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회중]을 뜻하였다. [에다]는 [택함을 받아 모인 집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70인역에서는 [카할]이라는 히브리어를 [에클레시아]라는 헬라어로 번역했고 [에다]라는 히브리어는 [시나고게]라는 희랍어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에서 [교회]라는 말에는 카할과 에클레시아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셔서 모인 공동체]라는 뜻으로 굳어졌고, [에다]와 [시나고게]는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집](회당)으로 의미가 제한되었다. 그래서 기독교의 교회는 [에클레시아]로, 유대인의 회당은 [시나고게]로 구별해서 부르게 되었다. 이것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구별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찾아보자. [에클레시아]라는 헬라어는 본래 [일반적인 모임]을 뜻했다. 이 말은 기독교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공동체]라는 뜻으로 사용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하나님의 교회][주님의 교회]등으로 말을 붙여서 종교적인 전문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끝으로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며, 사람들만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임재하셔서 머리가 되어 주시고, 성령께서 다스리시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인이 되심으로 성삼위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서, 이 세상의 어떤 권세 아래에도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교회는 神人共同體이며,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여기에서 교회의 존엄성을 찾아야 한다.

 

 

제2과 교회의 근원(根源)

교회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교회의 근원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다. 신학자들에 따라서 그 해답이 다소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한다.

 

1. 교회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

교회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는가? 교회의 시작을 구약에서 찾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해서 하나님의 법을 받아 계약 민족이 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마태복음 16:16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모으시고 훈련시키신 후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교회의 연원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교회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직접 교회를 세우신 일도 없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교회]는 아니다. 복음서에는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이 두번 나온다(마 16:18 18:17).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1백번 정도 나온다. 예수께서 세우시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였고, 그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마태복음 16:18에 나오는 [교회]는 현재 세우신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세워질 교회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제자들을 불러 모아 활동하셨고, 수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지만, 그 때까지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라고 구별하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과 완전히 구별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지도 않으셨고 제자들이 새로운 공동체의 핵심 인물이라고 당장에 구별하여 세우신 것도 아니다. 다만 미래의 일꾼으로 훈련시키신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교훈과 활동이 후에 세워진 교회의 기초가 된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교회]는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전조(前兆)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지향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교회는 예수께서 죽으신 지 사흘만에 부활 신앙으로 다시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오신다는 것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모임으로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종말적인 공동체로 시작되었다.

 

2. 교회의 근원

교회의 근원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 전부이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과 그 모든 것을 믿는 자들에게 임하신 성령 강림까지, 총체적인 것 모두가 교회의 근원이 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서 자기들이 믿는 바를 서로 확인하고 기뻐하며 새 언약의 떡과 잔을 나누면서 구원의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그들은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확신은 그리스도의 교훈과 활동에 대한 확신을 가져오게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부활 신앙이 근본이 되어서,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확립되면서 교회의 기초가 되는 신앙이 정립된 것이다. 12제자와 예수님의 아우 야고보와 바울이 중심이 되어 원시 교회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는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들은 교회의 근원이요, 머리이시며 장차 오셔서 완성하시고 통치하실 분으로 모셨던 것이다.

 

 

제3과 교회의 특징

 

1. 교회의 특성

니케아 신조 가운데 교회에 대한 고백에 보면 [우리는 또한 하나요,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 적인 교회를 믿는다]라고 되어 있고, 사도 신조에는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간단히 취급하고 있다. [거룩한 공회(公會)]는 [거룩한 공교회(公敎會)],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라는 뜻이다. 사도 신조에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다른 신앙 조항은 간단히 한 두마디로 요약하는 정도이다.

 

니케아 신조에는 참 교회의 특성이 네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의 교회(單一性), 거룩한 교회(聖性), 보편적인 교회(普遍性),사도 적인 교회(使徒性), 이것이 참교회의 특징으로, 본질을 떠난 거짓 교회와 구별하는데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2. 하나의 교회

이것은 교회의 단일성 또는 통일성을 의미한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 시니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 도다](엡 4:4-6절).

 

교회의 단일성은 하나라는 숫자나 윤리적 일치나 교회법이나 제도적 일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교회의 단일성은 하나의 보이지 않는 영적 현상이다. 에베소서에서 밝힌 대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활동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일체되심에서 비롯된다.

 

교회의 단일성은 제도적인 획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숫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다수의 지역 교회들과 여러 가지 특성을 가진 교회들 안에서도 하나의 교회가 현존한다는 것이다. 다양성 속에서도 단일성과 공통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분열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들의 약점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분 하나님을 바르게 모시면서 교회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

 

3. 보편적인 교회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7-28). 보편적 교회라는 말은 지방 교회, 지역 교회가 아닌 전체 교회를 말하며 세계적(Universal) 교회를 말한다. [누구든지], [모든 족속에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인종의 차별이 없고, 자유자나 종이나 신분의 차별이 없으며, 남자나 여자나 성의 차별이 없는 만민의 교회를 뜻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시고 인종과 신분과 성의 차별을 무너뜨리셨던 것처럼, 사도들이 세운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모든 차별이 없어지게 되어서 초기 교회에서는 죄인과 종과 여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떡을 떼며 친교 하는 혁명적인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기들만이 보편적 교회(Catholic)라고 하고, 개신 교회는 자신들이 진정한 참 교회라고 한다. 카톨릭은 잡동사니가 되었고, 개신교회는 분열의 죄를 계속하고 있다.

 

아직도 교회 안에서 신분의 차별이나 계급 의식이 있는가 하면 흑인을 차별하는 백인들의 죄악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빈곤의 차별이 있고, 기독교 신앙을 민족주의나 애국 신앙으로 격하시키는 실수도 계속하고 있다. 주 안에서 만민이 평등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한 형제 자매가 되는 만민의 교회, 전체의 교회, 세계적인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제4과 사도적인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았고 보내심을 받았으며,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고, 형제의 발을 씻기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모든 일을 위한 사명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사명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서 일하다가 대부분이 순교하였다. 사도들은 다시 사도라는 사람들을 세우지 않았으나 사도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직분, 곧 사명을 교회에 위임하고 떠났다. 그래서 교회를 「사도의 교회」라고 하지 않고 「사도적인 교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것은 사도 적인 사역(使役)만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들의 직분과 사명을 누가 계승하는 것인가?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이 베드로에게 이양되었고 베드로는 교황에게 권한을 물려주었으며, 교황은 각 지역의 주교에게, 주교는 지교회 신부들에게 이양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로마 카톨릭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셨고 베드로는 교황에게 맡겼으므로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도권을 물려받은 유일한 권위와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요 사도들의 교회이며, 교황의 교회는 주교의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주교가 인정하지 않는 교회, 신부가 가지고 있지 않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인가? 개혁 교회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사도들이 죽으면서 그 권위와 사명과 직무를 누구에게 물려주었는가? 마태복음 16장 16-19절 말씀을 카톨릭 교회에서는 중요한 성서적 근거로 삼고 예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고,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라는 한 개인을 지칭하신 것이 아니고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사도단의 신앙고백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사도들이 사도로서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어느 누구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교회에 맡긴 것이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세운 교회에 사도들의 모든 사명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도들의 말씀과 사도들의 봉사에 대해서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명실공히 사도들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여기에 중요하게 취급해야 할 것은 사도적 계승이라는 실질적 연속성이다. 이 연속성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주어지는 연속성이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보혜사 성령께서 사도들과 함께 역사 하심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사도들이 세운 그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전]이었으며, 성령께서 사도들의 교회와 사도 이후의 교회를 연결하는 영적 계승을 가능케 하였다.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사도들과 사도 이후의 교회와의 실질적 연속성을 가능케 하셨는가? 첫째는, 사도들의 증언, 즉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전하여지고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서 그 말씀에 복종하고 살아가는 일을 통해서 사도적 계승이 가능하게 되었다.

 

둘째는, 주께서 사도들에게 분부하신 봉사를 사도들이 목숨을 바쳐 수행한 것처럼, 교회가 사도들의 봉사의 모범을 따라 복종하며 실천할 때 사도적 계승이 가능하였다. 복음 전파, 세례, 기도, 형제의 발을 씻기고, 구제하고, 친교와 일치, 세계를 향한 선교와 봉사, 인류를 위한 구원 공동체, 섬김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사명을 다할 때, 진정한 사도 적인 교회가 되는 것이다. 사도적 권위는 그의 말씀과 봉사에 있고, 사도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성경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다.

 

제5과 거룩한 교회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딤전 3:15-16).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보존하시며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 공동체이며, 성령께서 지으시고 다스리시며 항상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피조물이며,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시고 세우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면 교회는 흠도 없고 깨끗한 공동체인가? 아니면 온갖 죄악이 아직도 우글거리는 죄많은 공동체인가? 우리가 솔직히 고백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분명히 죄인들이 모인 죄인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온갖 약점들이 모여서 온갖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면 교회는 죄인들이 모여서 죄만 저지르고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죄인들의 수용소와 같은 곳인가? 그렇지 않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임에는 틀림없으나, 죄를 미워하고 죄로부터 떠나고, 죄문제를 해결하여 죄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죄를 책망하고 죄를 회개하고 죄의 용서가 있어, 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거룩한 속죄의 역사가 일어나는 성삼위 하나님의 집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교회의 거룩성을 고집하면서 죄인들을 내어 쫓음으로 거룩한 교회를 만들겠다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된다. 엄격한 의미에서 누가 죄많은 사람인가를 구별할 수 없다. [거룩한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나 법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께서 교회의 주인이요, 머리요, 터전이요, 감독자이시기 때문에 근본이 거룩하고, 뿌리가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죄의 역사를 통해서 죄인들이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의 성품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 거룩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는 세상 어떤 공동체와도 구별되는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는 거룩한 특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인들의 교회이면서도 거룩한 교회이며, 거룩한 교회이면서도 이직도 죄가 남아 있는 인간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여져야 할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레 11:45).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어떠한 박해 속에서도 굴복 당하거나 파멸될 수 없는 끈질긴 영속성이 있으며(마 16:18), 어떠한 죄악의 세력에도 감염되어 소멸되지 않도록 진리의 영께서 보존하고 계시며(요 14:16-17), 교회가 아무리 잘못을 저지르고 상처를 입고 신앙이 약해지고 흔들린다고 할지라도 교회는 변질될 수 없는 확실한 진리 위에서 있다(딤전 3:15).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그리스도의 양이며, 하나님의 자식이다. 교회가 아무리 잘못되어도,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버리지 아니하시고,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포기하지 않으시며, 탕자가 돌아올 때 기쁨으로 영접하시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내어쫓지 않으신다. 거룩한 교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역사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성도들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자기를 쳐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되어 가야하며,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한다.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말씀이 선포되며 회개와 속죄의 역사가 계속 일어나며, 죄인이 거듭나서 물과 불로 세례 받는 수가 많아지며, 거룩한 성례전이 집행되며, 성화의 역사가 일어나고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변화의 역사가 계속 일어나야 한다.

  

제6과 교회가 하는 일

교회는 무엇을 하는가? 교회의 기능이나 사명이나 사역을 묶어서 말한다면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해서 안으로 행하는 일과 세상을 향하여 밖으로 하는 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존재하는 그 본질적 의미가 세상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할 때, 굳이 구분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1. 교회 안에서 하는 일

교회가 자체 안에서 행하는 일은 말씀 선포(케리그마), 말씀 가르침(디다케), 성례전 집행(유카리스트), 친교(코이노니아), 봉사(디아코니아) 등이다.

 

첫째로, 교회는 말씀 사역을 감당한다. 여기에는 케리그마와 디다케가 있다. 말씀 선포(케리그마)는 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개를 선포하고 용서를 약속하는 사역이고 말씀을 가르치는 [디다케]는 말씀을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아서 바르게 살아가도록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룩히 보전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과 성결의 생활을 가능케 한다.

 

둘째로, 교회는 성례전을 거룩하게 집행한다. 성례전(聖禮典)은 [유카리스트]라고 하는데 로마 카톨릭에는 일곱 가지 성례가 있으나, 개신 교회에는 [성찬과 세례] 두 가지만 성례로 인정하고 시행한다. 성찬 예식은 예수께서 친히 세우시고 다시 오실 때까지 시행하라고 명하신 예식이요(마 26:26,28, 막14:22-24, 고전 11:23-27) 세례 예식도 주께서 직접 분부하신 예식이다(마28:19). 나머지 다섯 가지는 성서적인 근거가 희박함으로 종교개혁 이후 개신 교회에서는 지키지 않는다.

 

성찬 예식은 주께서 정하신 대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신자는 성찬의 떡과 잔을 통해서 2천여 년 전 실제로 역사 속에서 계셨던 주님을 기억해 내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재현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 떡과 잔을 받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하게 된다.

 

세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는 예식인데, 그 의미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생명의 관계를 맺는 것과 은혜의 언약의 혜택에 참례한다는 것과, 주님의 소유가 된다는 계약을 표시하고 확증하는 예식이다.

 

셋째로, 교회는 성도간의 친교(코이노니아)를 수행한다. 코이노니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형제됨을 공고히 하는 일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가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 모두가 평등하고 화목해야만 완전한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 때문이다. 인종의 차별, 신분의 차별, 남녀의 차별, 빈부의 차별 등 모든 차별이 없어지도록 주님의 한 피 받아 한 몸을 이루는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 자체가 화목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세상에 평화를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넷째로, 교회는 봉사의 사역을 수행한다. 교회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어렵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은 주님께서 하신 일 중에서 중요한 일이었다. [디아코니아]라고 하는 섬기는 일은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교회의 모든 직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일을 계승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봉사의 뿌리는 사랑이어야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모든 성도들은 섬김의 직책을 받아서 서로 서로가 봉사함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것이다.

 

2. 교회가 밖을 향하여 하는 일

첫째로, 교회는 세계 구원을 위한 복음을 전파한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차원에서 교회는 자체의 모든 힘을 총동원해서 이 세상 모든 분야가 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보전하고 회복되도록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둘째로, 교회는 사랑의 봉사를 수행한다. 교회는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려고 하면 쇠퇴하나, 세상을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면 흥왕 하여 진다.

 

 

제7과 교회의 일과 일꾼들

 

1. 일하기 위해서 세워진 교회

교회가 세워진 목적은 [그리스도의 일]을 계승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일]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하는 일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시고 계속 확장되어 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하나님께서 완성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홀로 그 일을 완전히 수행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진행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기관이다.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그 일을 교회가 계승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2. 교회의 일을 수행할 일꾼들을 세움

교직 제도의 시작 : 교회가 주님의 일을 맡아서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 일을 담당할 일꾼이 필요하다.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복음을 열심히 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교회가 부흥하였다. 그래서 사도들의 업무량이 너무 많아져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도들은 일곱 집사들을 세워 그 많은 일들을 분담하게 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조직의 시작이요, 교직(敎職)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도들은 세상을 떠나면서 그 직무를 누구에게 물려주었는가? 어떤 특정인들에게 물려주었다기 보다는 모든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위임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일을 공동으로 수행해야 할 사명을 받은 것이다.

 

3. 교회의 공동 직무와 특별한 직무의 분화(分化)

그리스도께서 위임하신 일들 중에 그리스도인 하나 하나가 반드시 똑같이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복음 전하는 일이나 말씀을 가르치는 일, 중보의 기도 생활, 화해자의 역할, 형제의 발을 씻기는 봉사의 일, 구제하는 일 등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구성원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모두가 수행해야 할 기본적인 사역이요 필수적인 사역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자라나고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성례식을 거행하고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일들,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 그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그 직무의 목적대로 훌륭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적재적소에 맞는 직무 담당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따라서 여러 가지 직임을 세우게 되었다. 교회의 평신도 모두가 공동으로 수행해야 할 공동 직무가 기본이요 중요한 것이지만, 교회가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특수한 경우에 세우는 특별 직무가 구분되는데 이것은 결코 특권도 아니고 신분의 차등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 근본 정신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가장 효과적으로 섬기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이나 주교나 신부와 같은 신분과 평신도들의 신분을 구별하는 교직 제도는 초대 교회의 정신과는 판이한 것이다.

 

4. 여러 가지 직무들

초기 교회의 여러 가지 직무들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사도와 선지자(예언자) 전도자, 목사, 교사, 장로, 감독, 집사 등이다. 이러한 모든 직무는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경우와, 교인들이 선출한 경우로 나눌 수 있고, 칼빈의 분류대로 [가르치는 직무]와 [봉사하는 직무]로 나눌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직무는 하나님의 은사를 따라 나누어지는 것이고,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튼튼히 세우고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일이요, 봉사하는 일이라는 것이다(엡 4:12).

 

모든 직무는 성령께서 세우시고 성령께서 주장하심으로 성령께 복종함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다(고전12:4-6, 행1:8).

  

 

제8과 바람직한 교회 갱신

 

1. 교회 갱신의 당위성

교회론에 들어오면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여기서도 교회 갱신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교회는 그 본질에서 이탈하지 말고 그 형태를 끊임없이 갱신해야만 살게 된다. 교회는 완성품이 아니다. 예수께서도, 사도들도 교회를 완성품으로 만든 일이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계승자인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역사 속에서 계속 만들어 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교회는 그리스도 재림때 완성되어 하나님 나라로 대치될 것이다. 교회의 형태나 내용에 있어서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란 없다. 다만 변해서는 안될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뿐이다. 교회는 바로 변치 않는 진리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도구일 뿐이다. 구약 시대에도 교직 제도나 제사 제도 같은 것이 끊임없이 변천해 왔다.

 

2천년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는 항상 자기 갱신에 힘써 왔고 그것이 역사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교회의 제도나 의식이나 조직의 개혁뿐만 아니라 말씀을 해석하는 신학까지도 시대에 맞게 항상 변한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하는 진리이지만 그 말씀을 해석하는 신학도 상황의 변화에 맞게 발전해 왔던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복음을 낡은 부대에 오래 담아 두면 안된다. 복음은 언제나 새것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 교회 갱신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2. 바람직한 교회 갱신

교회는 어떻게 개혁해야 하며, 어떤 방향으로 개혁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까?

 

1) 전체적인 개혁보다는 필요에 따른 지역적이고 부분적인 개혁이 바람직하다. 그레고리 1세의 전체적인 제도 개혁이나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같은 획기적인 대개혁을 앞으로는 기대하기 어렵다. 또 그러한 혁명적인 대개혁을 필요로 할 정도로 정체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다.

 

2) 급진적인 개혁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이 좋다. 살아 있는 몸은 부단히 신진대사를 하는 것처럼 꾸준하게 자기 갱신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병이 심해져서 갑작스러운 대수술을 하는 것보다는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통해서 병을 키우지 않도록 해야 한다.

 

3) 외형적인(제도와 조직들) 개혁과 내부적인(신학과 교리) 개혁은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복음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절실할 필요가 안에서 일어나 밖으로 확산되면서 자연스러운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4) 교회 외적인 힘에 의해서 타율적으로 개혁되는 것보다는 교회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순수하게 개혁해 나가야 바람직하다.

 

3. 바람직한 교회상 모색

 

1) 보편적이면서 하나의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 폐쇄적이고 분파적인 약점을 극복하고 교회 일치 운동(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서 세계 교회가 연합하여 공동의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2) 복음 적인 교회는 부흥하고, 문화적인 사업이나 사회 개혁에 역점을 두는 교회는 쇠퇴한다.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에 역점을 두고 성서적인 순수한 신앙 운동을 일으키는 교회가 바람직한 성장을 한다.

 

3) 교회의 제도와 조직을 능률화하고 활성화해야 한다. 교직 담당자나 평신도가 공동 직무를 인식하고,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평신도들의 활동을 극대화시켜야 교회라는 전체 덩어리가 살아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4) 세상을 지향하는 섬기는 교회상을 정립해야 한다.

 

5) 교회는 현실주의에 빠지지 말고 종말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초대 교회와 같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현실을 가장 책임 있게 살아가는 교회상을 정립해야 한다.

 

6) 바람직한 교회는 성경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복음을 선포하며, 뜨거운 사랑으로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게 봉사하여 역사와 세상의 정의로운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제 7 장 종말은 언제 오는가 ?

 

제1과. 시한부 종말론의 오류

 

1.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는 무리들

향후 10년 간은 세계적으로 종말사상 때문에 어지럽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2천년이라는 숫자 때문이다. 일반역사가들이나 교회역사가들도 심심찮게 이야기한 일이 많고, 소위 예언자들이라는 사람들이 떠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병리현상은 2천여년 교회역사 가운데서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모두가 피해를 주고 거짓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이러한 종말신앙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켰던 사람들중에 대표적인 몇 사람을 열거해 보겠다. 미국의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의 경우를 소개한다. 그는 1843년 4월 21과, 1884년 3월 21일 사이에 예수의 재림이 있을 것램라고 예언했으나, 적중하지 못했다. 그러나 밀러의 추종자들중 소수가 모여서 제 7일 안식교를 만들었다.

 

또한 안식교에서 이탈한 촬스 테즈 러셀이라는 사람이 1874년에 예수께서 보이지 않게 재림하고, 1914년에 지상에 보이게 왕국을 건설할 것이며, 1918년 지상에 보이게 재림할 것이라고 했다. 이 사람이 바로 '여호와의 증인'의 창시자이다. 그러나 렛셀의 예언도 맞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은 틀려도 뻔뻔스럽게 연기되었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렛셀의 제자인 러더포드(Rutherford)는 1925년이 종말의 해라고 했다가 1966년, 1975년등 여러번 수정하였으나, 모두가 거짓말이 되고 말았다. 이런 일이 최근 우리에게도 있었다.

 

1960년 3월 25일 새벽 3시에 예수께서 재림하신다고 예언해서 물의를 일으켰던 에덴 수도원의 박인선씨를 비롯해서, 1989년 12월 22일이 종말이라고 떠들었던 전북 남원 샛별교회 김갑택씨와, 1990년 5월 7-12일 사이에 성도들이 공중으로 들려올라간다고 해서 [들림교회]로 모여들었던 사건도 광명시에서 일어났었으나 실패작으로 끝났다.

 

얼마 전 기승을 부렸던 920621호 열차를 타라는 강남구 일원동 [시온교회] 이재구씨는 1922년 6월 21일 예수 재림을 강변하였다. 그뿐만 아니다.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이장림씨와 다미선교회 계통 사람들은 7년 대환란 후 1999년이 종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1999년 7월 14일로 심판일이 정해졌다고 예언한 정명석씨와 서울교회 사람들도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고 있다. 이밖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임박한 종말을 부르짖으면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특별히 걸프전쟁이 발발하여서 더욱 온갖 해석이 난무하는 바람에 어리석은 백성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2. 시한부 종말론의 오류 

1) 2천년 교회 역사를 통해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해서 성공한 사람이 없었다. 성경해석을 잘못 했든지, 계시를 잘못받았든지, 잘못 믿은 믿음이 첫째 원인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런 순진하거나 어리석거나 무지한 이유 외에, 고의적으로 사람들을 속여서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악한 사람들의 소행이 그 원인이 된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시한부 종말론은 틀릴 수 밖에 없다.

 

2)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을 사람의 시간(크로노스)으로 잘못 계산하고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의 시간을 계산하려고 한 것이 가장 중요한 오류의 원인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시간은 하나님외에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사람의 시간을 가지고 계산하고 단정하는 것은, 피조물로써 창조주와 같이 되려 하다가 파멸의 길을 걷게 된 아담과 하와같은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간은 하나님만 아시고 하나님께서만 주장하시는 시간이다.

 

3)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심판이나 종말이 구원의 날이요 완성의 날이기 때문에, 복음의 중요한 내용으로 받아서 감사한 마음으로 맞이해야 한다. 그러므로 동요할 필요가 없다.

 

 

제2과 기쁨의 날, 심판의 날

앞에서는 임박한 종말론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사회병리현상을 언급하면서 잘못된 종말 신앙의 위험을 경계하는 말로 서론을 대신하였다. 여기에서는 그러한 혼란과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서 종말론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1. 종말론의 의의

[종말론] 또는 [말세론]이라는 말의 뜻은 개인과 역사와 우주의 마지막 일들에 관한 이론을 말한다. 영어의 [Eschatology]라는 말은 희랍어 [에스카토스](eschatos)에서 왔는데 성경의 [말일들](사2:2, 미4:1), [말세](벧전1:20), [마지막때](요일2:8) 등에 기초해서 나온 말이다. 희랍어 [에스카토스](eschatos)는 [시간의 끝]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형용사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에서는 첫째, 개인의 종말인 죽음과,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부활, 심판, 영생 등의 문제와 둘째, 인류역사의 종말과 심판과 완성, 우주적인 심판과 영원한 나라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는데 그 종말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와 일치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마지막 날은 [하나님의 날]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이다. 그러므로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구원이 완성되고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 이다. 마지막 날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기쁨의 날이 되고, 악한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재림의 날을 공포의 날로 생각하고 두려워하는가? 잘못된 종말신앙 때문일 것이다.

 

2. 종말론의 여러가지 이론들

대체로 종말론을 구분할 때 개인적이냐, 우주적 또는 역사적이냐에 따라서 개인적 종말론, 우주적 종말론으로 나누기도 하고, 현재적 종말론, 미래적 종말론, 초월적 종말론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시대적으로 보면 어떤 때는 종말론이 중요하게 취급되기도 하지만 어떤 시대에는 종말론이 거의 취급되지 않는 때도 있었다. 또한 원(圓)적인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종말사상이 중요하지 않지만, 직선적인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종말에 대한 관심이 심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불멸사상과 육체의 부활사상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상과 같은 기독교의 종말론 외에도 유사한 종말사상이 다른 종교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이교적인 종말사상이 기독교 종말사상에 영향을 주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혼합되어서 성경적이 아닌 위험한 것으로 변질될 경우도 있다.

 

종말론을 강조하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첫째는 현실도피적인 현상이다. 이제는 말세가 되었으니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책임과 의무를 다 버리고 하늘만 쳐다보면서 피안의 세계만 지향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혼란해진다. 둘째는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맡은 직무에 더욱 충실하게 살고 순간순간 종말적인 샐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3. 성경이 요구하는 종말신앙

1) 개인이나 인류역사나 우주만물에는 시작이 있었으므로 반드시 종말이 있다(롬5:12 마24:6 눅21:9 고전15:24 벧전1:9).

 

2)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반드시 재림하신다(행1:8-11 마26:64 요14:3 살전4:15-16).

 

3) 재림의 시기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알 수 없다. 억지 해석하지 말라.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마25:13).

 

4)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주님의 날을 기다리며 항상 깨어서 준비하는 성실한 생활을 해야 한다(마25:1-13).

 

5) 종말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으니 선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라(요5:27 마25:31-46 히9:27 계20:11-15).

 

6) 종말은 구원의 완성이요 역사의 완성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순간이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기다리라.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새 이름, 완전한 평화, 혼인잔치, 낙원,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적접통치 등(계21:1-7 사62:5 마22:5 계22장).

 

 

제3과 종말사상의 발전과정

 

1. 역사 속에서 발생한 세 가지 종말사상

종말사상이 시작된 것은 창조의식과 병행하게 된 것으로 본다. 성경은 창조와 종말을 알파와 오메가로 표현하고 있다. 시간이 창조된 이후 인간들은 시간의 흐름을 알게 되었고, 끝없이 흐르는 시간의 끝에는 마무리 작업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첫째로, 사람들이 경험한 일에는 반드시 시작이 있고, 그 일이 끝나는 시간이 있으며, 그 일이 끝날 때에는 반드시 그 일이 잘 되었는지 잘못 되었는지, 그 결과가 나타나고, 그 결과의 평가여하에 따라서 상벌이 따르게 된다는 것을 수없이 많이 경험하게 되었다.

 

둘째로, 심각하게 경험한 것은 인간의 죽음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출생하여서 세상에서 어느 정도 살다 가는, 예외없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개인의 종말에 대한 연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로, 우주만물과 역사의 종말에 대한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세상 만물중에는 영원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모든 생명체는 다 죽어 없어지고 모든 물질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질되고 소멸되는 것이라는 사실에 비추어서 우주만물도 언젠가는 멸망할 끝날이 있다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2. 성서에 나타난 종말

 

첫째로,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전통적인 역사 이해 가운데 나타나는 역사의 완성은 이스라엘 민족이 중심이 되어 세계를 다스리는 태평성대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세계만민에게 복을 나누어 주고, 세계만민 가운데서 뛰어난 민족이 되어 머리가 되고 위에만 있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져, 메시야 왕국을 실현하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는 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잘 섬기고 그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둘째로, 후기 유대교 묵시 문학에 나타난 역사이해로서 전자와 다르게 나타난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야 왕국은 오지않고 오히려 왕국은 멸망하고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땅위에서 바라던 메시야 왕국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다. 이때에 일어난 묵시운동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수평적인 사고에서 입체적인 사고로 바뀌고 민족 역사 범주에서 세계사적인 안목으로 눈을 넓게 뜨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의 목표를 세계사의 종말을 가져다 줄 우주적인 드라마로 이해하게 되었고, 이 우주적인 드라마와 함께 낡은 세계는 지나가고 새로운 세계,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된다는 신앙이 자라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의 목표가 세계의 심판, 세계의 완성이라고 보고, 이것이 이루어 질 때에는 우주적인 사건이 초자연적인 세력들의 현현과 함께 하나님의 결정된 시간에 갑자기 도래(到來)한다고 믿었다. 에스겔서 다니엘서 제 2이사야서 같은 묵시문학에서 이러한 역사의 종말의식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셋째로,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에는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역사 이해와 묵시문학적인 역사이해가 공존하기는 했지만, 예수님 말씀에 나타나는 것은 묵시문학적인 역사의식으로 우주적이고 세계적인 [하나님 나라 운동]이었다.

 

인류 역사의 완성이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라 가르치셨고, 그 나라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초림의 때요, 그 나라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라고 하셨다. 초림과 재림의 중간기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나무처럼 자라고, 떡반죽 속의 누룩처럼 확장되어 간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인간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라나다가, 부활의 주께서 재림하심으로 완성된다고 가르치셨다.

 

넷째로, 제자들과 바울에 의해서 전개된 에클레시아(교회)운동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계승이었다고 본다. 특별히 사도 요한과 바울은 묵시문학적인 종말사상을 가지고 주의 재림을 강조했다. 지금 인류는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순례자이다. 그러나 역사의 종말을 맞이 하기 전에 개인의 종말을 먼저 맞이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개인 종말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 할 일이다.

 

 

제4과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신앙은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서 강조된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리스도 자신과 사도들의 일관된 재림신앙은 초기교회의 모든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신앙내용이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신앙이 초기 교회의 핵심적인 신앙이 되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친히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고(막 13:26) 제자들도 그렇게 믿고 가르쳤기 때문이다(벧후 1:16, 3:11-12). 瀏??그 재림의 시기가 그들이 죽기 전에 곧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것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복음서에는 임박한 재림에 대한 말씀과 언제 오실지 모른다는 사상이 엇갈리고 있다. 예를 들어서 마가복음 9:1 이나 마태복음 13:30 같은 곳에서는 예수께서 곧 오시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막 9:1)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주께서 가까이 오신다]는 신앙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이다(행 1:6). 이러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신앙이 초기교회 신앙을 강하게 하였으며 순교적인 신앙으로 교회를 지킬 수가 있었다. 재림신앙은 지금까지도 중요한 신앙내용이다.

 

둘째로, 그리스도 재림의 지연으로 말미암아 초기 교회에는 혼란이 생겼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그들이 기대했던 시간보다 늦어지고, 그들은 늙어가고 기다림으로 지쳐서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냐 라고 속단하는 사람도 있었고, 회의에 빠진 사람들, 신앙을 버리고 낙심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을 것임에 틀림없다. 베드로후서 3:9 에 보면,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된다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재림신앙을 이해시키는 베드로의 노력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된다는 것을 빙자해서 신앙의 긴장을 풀고 해이해진 신자들을 경계하는 교훈이 많다(마 25:1-13, 마 24:44 살전 5:2,3).

 

셋째로, 그리스도 재림의 지연에 대해 어떻게 조치하였는가? 임박한 그리스도 재림 신앙에 대해서 문제가 되었던 막 9:1, 막 13:30, 마 10:23등의 말씀의 내용에 대해 이해부족이 있었던 것으로 성서학자들은 지적한다. 이상의 내용이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산의 사건이나 예루살렘 멸망사건,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사건이나 예루살렘 멸망사건, 보혜사 성령강림 사건등을 지칭하신 것이라는 해석과, 또 다른 해석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사용하신 시간 개념과 구속사에 관한 시간 개념이 [카이로스]라는 하나님의 시간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다(벧후 3:8)는 시간 해석으로 재림지연을 설명하기도 한다.

 

특별히 누가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것이 아니라 잘 모른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노력했다. 누가는 임박한 재림론자들을 따르지 않고 미혹받지 말라고 경계하며(눅21:8), 자신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는 등의 말을 쓰는 대신 [아직은 끝이 아니다](눅 21:9)라고 가르쳤다. 재림을 조급하게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재림지연의 의미와 목적을 바로 가르쳐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철저히 시켰다.

 

 

넷째로, 건전한 재림신앙은 어떤 것인가 ? ①그리스도의 재림은 반드시 있다고(행 1:11 살전 4:16) 확실히 믿는 것이다. ②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잘 알수 없으나 언제 어디서든지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행 1:7). ③재림지연의 목적을 바로 알아야 한다. 회개할 기간을 주시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긍휼의 기간이다(벧후 3:9-15). ④재림 지연 기간 동안에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를 알아야 한다. ⑤회개하여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한다(벧후 3:1). ⑥땅끝까지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 한다(행 1:8). ⑦현재의 일에 충실해야 한다(마 25:19). ⑧그리스도 재림 전에 먼저 죽을지도 모르니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⑨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한다(벧후 3:13 계 21:1-7). 

 

제5과 이미 실현된 천년왕국

천년왕국설은 초대교회 시절의 성도들로부터 전해져 온 종말신앙이다. 이것은 유대교의 묵시문학에서 받은 영향으로 요한계시록 20:1-6 에만 세번 나오는 내용이다.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사탄을 결박하시어 천년간 무저갱에 감금하시고 이 기간 동안에 부활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행복을 누리는 천년왕국시대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천년왕국설에는 前千年, 後千年, 無千年設등 다른 해석과 주장이 있다.

 

1) 전천년왕국설

전천년왕국설은 예수 재림 후에 천년간 부활한 성도들이 부활의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노릇하며 행복하게 살다가 천년이 끝나면 최후 심판을 받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 재림하시기 전에 성도들이 공중휴거되고 지상에는 7년 대환란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공중휴거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데살로니가전서 4:17에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이 귀절을 확대해석하고 있다. 이것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주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더욱 확고히 붙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2) 후천년왕국설

후천년왕국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이후에 있다는 주장이다. 지상의 교회가 전성시대를 이루며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천국과 같은 시대를 천년동안 누리게 되고 그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진행과정을 소개하면, 처음에는 박해가 있고 대환란이 있지만 악의 세력이 약화되어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천년동안 세상을 지배하고, 마지막에 배교사건이 크게 있은 후에야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과 심판이 진행되는데, 구원 받을 사람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고 멸망받을 사람들은 영원한 불못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후천년 왕국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중에는 인간역사의 진보가 천국을 건설할수 있다는 낙관주의자들도 있기 때문에 비성서적인 경향이있다.

 

3) 무천년왕국설

무천년왕국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후로 한 1천년이란 시간을 삽입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께서 초림 때 시작하신 천국운동이 교회를 통해서 계속 자라고 확장되어 그리스도 재림 시에 그리스도의 왕국과 바로 연결된다는 주장이다. 이 설이 가장 성경적이고 가장 많은 교회가 믿는 종말신앙이다. 로마 카톨릭과 요한 칼빈, 말틴 루터, 칼 바르트, 루이스 뻘콥 등 전통적이고 건전한 교회와 신조와 신학자들이 무천년왕국설을 따르고 있다(마 13:24-30, 요 16:33, 단 7:14, 눅1:33, 히 1:8, 계11:15).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환난과 배교 사건이 있고, 그리스도 재림 후에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고, 대심판이 행해지고 악인과 성도들이 각기 정해진 곳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도 계시론에서 말하는 천년왕국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바로 천년왕국시대가 시작되어 실현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천년왕국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교회가 승리의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무천년왕국설은 실현되고 있는 천년왕국설이라고도 부른다.

 

끝으로 한국교회에서 성행하고 있는 전천년왕국설은 미국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특별히 부흥운동을 일으키는 지도자들에 의해서 전천년왕국설과 세대주의적 재림신앙과 휴거에 대한 내용 등이 많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그런 내용들은 성경의 한절 또는 두절에만 나타나는 내용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경향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전체에서 교훈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하신 하나님나라가 겨자씨처럼 자라다가 그리스도 재림시에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왕국과 단절없이 직결된다는 신앙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본다. 승리의 그리스도를 대망하면서 성도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확신으로 현실을 이겨나가야 한다. 

 

 

제6과 육체의 부활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확실한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죽어서 죽음을 연구한 사람들의 보고가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인류전체가 역사를 통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의 주장이 각양각색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1. 의학적, 생물학적 죽음

의학적, 생물학적으로는 폐와 심장과 뇌의 기능이 정지된 상태를 죽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망의 진단을 받은 사람이 며칠 후에 回生하여 소동을 벌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삶과 죽음의 한계를 판정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2. 철학적 의미의 죽음

철학자들은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려고 했거나 [존재의 끝맺음]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나 플라톤만은 영혼불멸설을 확실하게 주장하면서 죽음은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3. 기독교적 의미의 죽음, 부활, 심판, 영생

기독교의 죽음과 부활과 심판과 영생에 대한 견해는 무엇인가?

 

첫째로, 죽음의 원인은 일반적으로 죄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截립袖繭捉?죽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인간을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간은 처음부터 나무나 풀이나 꽃과 같이 수명이 정해진 피조물이다.여기에서 죽음의 의미를 정립할 필요를 느낀다.

 

둘째로, 죽음의 의미는 존재의 폐기나 소멸이 아니다. 일종의 분리현상이요 단절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죽음은 [죽어서 망하여(死亡)] [없어지는(無化)]것이 아니다. 한 인격자로서의 활동정지 상태이다.

 

셋째로, 사람에게는 영혼과 육체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인가? 둘인가? 히브리인들은 원칙적으로 영혼과 육체를 나누지 않는다. 그러나 헬라의 플라톤철학이 기독교와 만나서 신약성경에서는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는 경향이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현대 성서학자들이나 조직신학자들이 서구화된 신학을 탈피하고 히브리사상을 직접 연구함으로 성서적인 인간이해를 전인적으로 하고 있다. 알트하우스같은 신학자는 [육체와 영혼은 구분되기는 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인적이고 총체적인 인간 이해는 육체와 영혼은 분리할 수 없다는 당위성을 초래하고, 이 결론은 [죽음과 부활] 신앙에 큰 변화를 요구하기도 한다.

 

넷째로, [영혼불멸이냐? 죽은자의 부활이냐?] 이 질문은 오스카 쿨만의 저서의 제목이다. 쿨만은 이 책에서 기독교 신앙은 플라톤의 영혼불멸 사상과 같이 육체는 썩고, 영혼만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이 함께 죽었다가 함께 부활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영혼도 함께 죽는다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전통적인 신앙은 육체가 죽을 때 영혼은 죽지 않고 하늘나라로 가서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다가 주님 재림 때 육체와 함께 부활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장 쉽고 적절한 해석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되면 영혼과 육체를 이분하는 이원론에 빠질 우려가 있고 플라톤의 영혼불멸사상과 같아질 수도 있다.

 

죽음 이후의 영혼의 활동이 계속되느냐, 잠자는 상태에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도 신학적으로 논란이 많은 부분이요, 계속 연구해야 할 문제이다. 성경에 [잠자는 상태(고전 15:18, 살전 4:13-14,요 11:11)]라고 기록된 확실한 근거가 있는가 하면, 죽은 후에 영혼의 활동을 강조한 성경구절도 분명하기 때문이다(고후 5:8, 빌 1:23).

 

인간의 죽음은 영혼과 육체가 죽어 없어지는 것(無化)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안에서 보존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혼을 하나님 손에 부탁한 것과 같다(눅 24:46). 그러한 의미에서 영혼불멸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주신 인간들을 그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붙들고 계신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후에 있는 영혼의 존재 상태에 대해서 공간개념에 얽매이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통치)안에 보존되고 있다고 믿어야 할 것이다. 그곳이 하늘이든지 땅이든지 무덤이든지 큰 문제를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과 영혼에게는 공간의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제7과 최후의 심판과 상벌

지금까지 앞에서 고찰한 종말사상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종말이 없다는 낙관주의자들도 있지만 성경은 시작이 있었으므로 반드시 종말이 온다는 것을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 ②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하나님만 아신다. 그 시간을 사람들이 확실히 알게 된다면 여러가지로 좋지 않은 일이 많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③ 종말사상의 내용은 개인의 종말인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것과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종말과 종말 이후의 세계에 대한 것이다. ④ 종말이 올 때 일어날 징조와 현상에 대해서는 예비적 징조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도적같이 갑자기 임한다는 것과 모든 택한 백성들이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구름타고, 큰 나팔 소리와 함께 메시야가 재림하신다고 증거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최후의 심판과 상벌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최후의 심판(히 9:27, 12:20-27) : 최후의 심판의 당위성

무슨 일이든 일이 끝나면 최종 평가가 있어야 하고, 모든 재판에는 최종 결심 공판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이, 한 인간의 최후에도 반드시 심판이 따르게 되고(히 9:27), 역사의 심판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히 12:27). 그래서 성경은 최후의 심판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다. 세상의 재판이나 세상의 모든 일들이나 역사 기록까지도 잘못된 것은 최종적으로 바로 잡아야 되기 때문이다.

 

2. 심판의 주관자(마 25:31, 요 22:27)

아주 옛날에는 자연법이 있었고(롬 1:18-20), 그 다음에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게는 양심의 법이 있었으며, 구약시대 율법을 받은 이후부터는 율법이 기준이 되었으며, 복음이 전파된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표준이 되었다(롬 2:16).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보내신 아들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가 받을 심판의 표준이 된다. 아들을 영접하고 선대하는 사람과 아들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충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들을 거부하고 핍박하고 대적하는 사람과 아들의 말씀을 무시하고 반역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만물과 인류의 표준이다. 이 표준(Canon)에 의거해서 가장 공정하고 정확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마 21:33-43).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은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직접하신다.

 

3. 심판의 대상(마 24:32, 계 20:11-15)

그 날에는 창세 이래 모든 인류가 다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산자와 죽은 자 모두가 심판의 대상이 된다.

 

4. 심판의 방법(마 24:31-46 고전 3:12-15)

마태복음 24장 31-46절에서는 작은 자 하나를 그리스도와 같이 대접하는 사랑의 행위를 따라서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 심판하고, 고전 3:12-15에서는 불로 건축들을 시험하여 건축재료의 질을 따라 공덕을 심판한다고 하여, 은총으로 구원받은 사람도 선행을 많이 해야 한다고 했으며, 계 20:11-15에는 행위를 기록한 책들에 따라서 정확하게 심판을 받는다고 했다. 유대인들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賞善罰惡 사상이 기본,기준이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원만은 값없는 은총으로 받지만 그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고 그 결과에 따라 상벌이 따른다는 것이다.

 

5. 심판의 결과(마 24:25-46, 요 5:29, 계 20:12-15)

영생과 영벌,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의인과 영원한 불못에 던짐받는 악인의 마지막을 가르치고 있다. 착하고 신실한 종들에게는 상당한 보상이 따른다는 것이다. 최고의 보상은 하나님과 어린양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 거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심판은 악인에게는 두려움의 재판석이 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완성의 날이요 승리의 날이다. 그러므로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하고 슬기로운 다섯처녀와 같이 기름을 준비하여 기다릴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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