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일에 대한 오해

  

주일은 단순히 일을 쉬고 노는 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일을 다른 날처럼 보내기 위해서 아침에 예배를 한 번 드리고 나서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생활 중심의 여가를 보내는 날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인들의 형편과 요구에 따라 맞추어 가다보니 결단코 양보할 수 없는 부분까지도 교인들의 세상적인 삶의 형편과 편리를 따라 방조하거나 조장하는 경우가 너무나 만연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기본이 되는 주일에 대하여 바르게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에 초점을 두지 않고 외적 성장에 치중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모으려는 데서 나오는 당연한 결과들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오래 전부터 예배를 2부로, 어떤 교회는 심지어는 5부, 7부까지 드려왔습니다. 예배당이 협소하고 교인들을 다 수용할 수 없어서 부득이 예배의 수를 그렇게 늘려서 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의 사실은 교인이 그렇게 많다는 것과 그렇게 예배 수를 늘려서 해야 교인들이 시간 형편에 맞게 예배를 드릴 수 있어서 예배를 드리는 수가 많아지고 교회도 부흥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실상 교인들이 자기들의 형편에 맞는 시간에 예배를 드린 후에는 충분히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내몰았습니다. 교회가 반드시 주일에 예배를 한 번만 드려야, 또는 아침과 저녁에 드려야만 교인들이 주일성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면 예배를 5부, 7부로 드리면 주일성수를 할 수 없는 것입니까? 문제의 초점은 예배를 드리는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일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게 선하게, 올바르게 지켜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에 대한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21장 7항과 8항에서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일정한 시간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성별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인 것과 같이 모든 시대에서 만민에게 구속력이 있는 그의 말씀 안에서 적극적이고 도덕적이며 영원한 그의 계명에 따라서 하나님도 칠일 중에 하루를 안식일로 특별히 결정하셔서 성별토록 하셨습니다. 태초부터 그리스도가 부활하실 때까지 이 날이 주일의 마지막 날이었으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이후부터는 주일의 첫날로 변하여졌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며, 기독교의 안식일로서 세상이 끝날 때가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안식일은 여호와께서 거룩하게 지킬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에 따라서 사람들은 합당하게 마음으로 준비하고 사전에 일상의 일을 처리한 후에는 자신들의 일, 말과 세상의 일이나 오락에 관한 생각에서 떠나 온종일 거룩한 안식일을 지킬 뿐 아니라, 공적이나 사적으로 하나님을 예배드리고, 필요한 의무와 긍휼을 베푸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주일성수, 그러니까 주의 날을 거룩히 지킨다는 것이 이런 것인데도 교인들이 주일에 교회로 연합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먼저 자기와 또는 자기 식구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 후에 즐길 여가를 계획하고서 그런 상태로 교회에 나와 1부, 2부 예배를 드리고 나서는 곧 바로 야외나 기타 세상 속으로 나가는 이 실태는 분명 교회가 그런 교인으로 만들거나 방조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 교인들은 주일에 예배를 빨리 드리고 나서 자기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이제 주5일 근무제가 도입되어 실시될텐데 주6일 근무제일 때 이미 이러한 비신앙이요 불신앙인 분위기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정부에서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한다는 일로 걱정을 하면서 반대 서명 운동까지 벌인다고 하면서 신문을 통하여 비생산적인 논쟁을 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6일간은 일하게 하셨고, 제 7일에는 안식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러나 6일간의 일은 단지 직장에서 노동한다는 개념입니까? 또한 제 7일에는 안식하게 하신 것이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개념에서입니까? 그래서 예배를 해치우듯이 하게 하고 자기를 위하여 여가를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입니까? 분명 아닙니다. 

  

그런데 주5일 근무제 시행을 걱정하고 반대하는 것은 교인들이 주말에 여행을 떠나서 예배당은 텅 비어버리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시대적 변화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아울러 그런 일에 앞장을 서 본들 아무런 유익을 가져올 수가 없음을 지금이라도 깨닫고 교회가 교회 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동안 교회는 교회로 연합하는 자들의 신앙고백을 검증하며 교회의 생명과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실체로 세워져 가는 일로 나아가지 않고 단지 구령사업이라는 미명아래, 그리고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라는 허망한 목표를 가지고 아무나 교회원으로 받아들여서 허수(虛數)만을 늘려 가지고 종교인만을 많이 양성한 결과,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주5일 근무제를 두려워하는 상태에 이르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막아보겠다는 방법이란 것이 고작 어떤 규례를 만들거나 물리적으로 막으려는 수준밖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교인들이 주일 성수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주일에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를 이루고, 성경에서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본의(本意)를 좇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왕국 생활을 살고, 하나님의 문화를 건설해 가는 마음을 충만히 발휘하는 데서 되어지는 법입니다. 사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예배는 그 총체입니다.  

 

2. 주일과 교회와의 관계성

  

하나님께서 태초에 안식하신 것은 아무 일도 안하고 쉬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시도 쉬지 않으시고 창조 세계를 유지하고 보존해 가시며 또한 그 지으신 목적에 따라서 사용해 가시는 일로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어 가십니다. 6일 창조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경륜 속에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왜 교회라고 하는 형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시조로 아담이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 그 아담은 단순히 개인의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누릴 수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묘하신 신비의 경륜으로 인류를 지으셔서 그 영광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생명을 공유한 지체들이 피차 연합하여 신비스럽게 일체를 이룸으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공동체적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회가 우주적으로 건설되게 하시려고 인간을 세상에 내실 때 작정하셨으며, 신약 성경에서는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또는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란 단순히 기독교적 양상을 띠는 웅장한 건물이나 종교인들이 모여서 적당한 조직을 구성하고 나름대로의 교회적인 사역을 수행해 나가는 데서는 결코 형성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서 한 몸으로 연합하여 교통하는 실질에서 나오는 성격의 교회여야 하는 것입니다(마16:18). 

  

태초에 에덴 동산에 전개되어졌던 하나님 나라의 상황이 바로 이와 같은 교회의 전형이었다는 사실은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신 교회의 모습이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사실로부터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고 완성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출발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며, 아울러 점진적인 계시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이 일을 보존해 나가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다리(창2:15~17)를 딛고 올라감으로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일,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체를 구현하는 그 영광의 정점에까지 발전하여 갔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상과 그 가치는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 안에서 더욱 충만히 발휘되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교회로서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교회의 충만한 구현을 향하여 나아가는 일에 존재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다시금 회복하셨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3) 하였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함께 지체가 되어 교회가 된 것은 영원부터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경륜으로서의 비밀"(엡 3:9-11)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초 인간 아담은 바로 이 중요한 목적을 위하여 이후에 존재하게 될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서 있었으며, 하나의 거룩한 신비적 연합의 사회를 구성하는 그 출발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으로 실패했고, 후손들에게는 생명이 아닌 심판과 저주를 물려주고 말았습니다. 

  

교회란 태초부터 종말 때까지의 역사 속에서 택함을 입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공동체인 까닭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포함하는 시간으로서의 역사의 연속성을 두고서 달성되어지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시대의 교회가 교회답게 존재해 나가는 일은 자연히 역사적인 성격과 사회적인 성격을 수반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완성으로서의 교회를 구현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것은 역사의 진행이라는 가도 위에서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며, 또한 개인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공동의 사회로서 다 함께 성취해 나가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에 연합되는 것을 통하여서만 발생하며, 개인의 성숙은 공동체의 성숙과 더불어 이루어지고, 개인의 사명 또한 공동체의 시대적 사명과 더불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어떻게 충만히 누릴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던 때의 상황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제 7일에 이르러 더 이상의 사역이 필요치 않게 됨으로 완성에 이르렀고, 이때 제 7일에 대한 특별계시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사역을 마치신 일곱째 날을 구별하여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창 2:1-3). 이 날이 거룩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안식하심으로 쉬셨기 때문이며, 이 날에 복을 내리셨고, 이 사실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의 개념을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갖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거룩'이란 '구별하다'는 뜻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는 일곱째 날을 다른 여섯째 날과 구별시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창조로 시작된 일곱째 날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완성됨으로 해서 이제 그 날로 시작하여 창세기 1장 27-29절에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 실현되어가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창조 된 인간에게서 노동(삶)과 종교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노동과 안식 역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 날을 거룩히 여기신 것을 사람들이 알고서 자기들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놀라운 역사를 인식하고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되새기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은 일상에서 신성한 노동의 의무와 함께 신성한 종교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받들어 갑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 모든 사람이 신성한 종교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노동을 자기들의 탐욕으로 행하여 나감으로, 하나님께서는 제7일을 창조시의 일곱째 날의 의미를 다시 부여하여 그 날을 기억하여서 다른 날들과 구별하여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시면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사람은 이 안식의 날이 있음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엄위를 더욱 깊이 알고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사람은 죄 때문에 안식일이 제공해 주는 축복을 누려가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풍성히 맛볼 수 있도록 배려를 했지만 죄에 의해서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후대에 유대교 지도자들이 안식일 계명을 강화하여 많은 안식일 규례를 만들고 이를 백성들에게 가르쳤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품안에서 안식을 누리기는커녕 도리어 온갖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이러한 일이 오늘날 이 시대의 교회를 통해서까지 되풀이되어 안식일을 잘못 지키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안식일을 지킬 때 구약시대 사람들이 지켰던 방식을 기계적으 답습하는 차원에 머룰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안식일의 개념을 창조와 구속의 원리에 기반을 두지 않고,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여 이상한 방식으로 갖가지 안식일 규례를 만들어 내었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엄격히 요구함으로 무거운 짐을 지웠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주일을 구약시대 때의 안식일이 단순히 일요일로 변경된 차원일 뿐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지켰던 정도의 형식과 습관을 그대로 본받으려고 합니다. '주일성수'라는 말을 흔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명령하였으니 그렇게 철저하게,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는 식입니다. 

  

안식일과 주일은 창조와 구속의 원리 안에서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규례는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던 창조 시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창조의 질서가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재창조 사역인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구속 사역의 목적은 타락한 창조의 세계를 처음 상태로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 구속이 적용되는 세계 속에서는 안식일의 원리도 당연히 구현되어야 함은 너무나도 자명해집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출 20:11)는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은 구속의 사실에다 그 근거를 둡니다(출 20:2, 신 5:15). 이스라엘에 있어서 출애굽 역사는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구속 역사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원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을 통해서 구약시대의 안식일 제도가 가지고 있는 실체인 자신 안에서 얻게 될 영원한 참된 안식을 바라다보게 하셨습니다. 안식일 제도는 옛 언약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안식을 바라다보며 누릴수 있게 잠정적으로 사용하신 가시적인 모형이요 제도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약 시대의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안식에 들어갔고 장차 재림하시는 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누릴 안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주어진 안식일 제도에서 본 그 참된 안식을 바라보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와 평강을 현재적으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일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므로 참된 안식을 가져온 구속의 사건을 성취하신 날을 기념하고, 새 피조물인 교인들에게 임한 영적 부활의 기쁨과 그리스도의 왕노릇하는 권세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여 누리는 것이며, 장차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된 유업(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보고 바라보는 것(히 4:9)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일은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모여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의 어전에 부복하여 공적 예배를 드리며 신령한 교제를 가짐으로써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주일은 분명 엿새간의 노동으로부터 따로 떼어짐으로 구별되어야 하며, 동시에 이 날은 교인들이 엿새간에 사적 예배를 드려온 연장 속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됨으로써 거룩해져야 합니다. 

 

3. 주일을 대하는 우리의 신앙적 자세

 

주일을 이해할 때에 구약의 안식일 제도를 거론하며 강조하지 않는다 해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언약의 공동체로서 살아가는 삶의 실질의 중요성을 바르게 알고 그대로 순종하는 터 위에 있다면 교회가 함께 모이는 시간을 소홀히 여기거나 자기 개인을 위하여 사용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교인들이라면 교회를 떠나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의 안식일적 의미에서 '주일성수'를 강조하지 않더라도 주일에 교회의 생명체가 모이는 일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참 생명력을 가진 공동체의 모임을 더욱 사모하며 중요하게 여길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옛언약 하에서 안식일 제도가 지니고 있는 정신과 의미는 가르쳐지지 않고 단지 날을 엄격히 지키는 것으로서 주일성수를 강조한다면 그것은 생명체로서 모여진 교회 공동체의 모임이 되지 않고 안식일 규례에 의해 모이는 지극히 조직체적인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 경우 당연히 주5일 근무제를 걱정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논쟁과 물리적인 힘을 낭비하는 무익한 일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우리들의 참된 안식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 사역을 하시고 일곱째 날에 이르러 안식하시며 그 세계를 유지하고 보존해 가시는 원리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타락한 그 세계를 회복하여 안식하게 하신 원리에 따라 갖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제 7일을 주의 날로 삼고 이 날에 안식하여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하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하고 정성과 힘을 다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분명히 구별시키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위하여 날을 쓰는 것과 구별되게 말입니다. 이런 우리에게서 주일은 분명히 특별한 의미와 목적을 안고 있는 안식의 개념을 갖습니다. 우리는 엿새동안 힘써 일할 것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근본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종교적인 존재라는 데서 우리의 참 모습을 봐야 합니다. 그런 우리가 다 같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서 공적 예배를 드리며 안식하는 것은 참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갖게 하신 선한 것입니다. 그런 주일을 지킨다고 하면서 주일을 내세워 나태와 게으름과 방종의 악을 가리우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며, 또한 주일에 안식한다는 미명 아래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적당히 하고 단순히 쉬어서 몸을 풀고 편안히 지내고 노는 것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은혜 안에서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자신을 드려 나가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자들은 안식의 참 맛을 더욱 증대시키고 풍성히 누리기 위하여 예배와 묵상과 기도와 찬양 그리고 헌신에 마음과 뜻을 다하여 힘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아멘

 

김성주 목사/언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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