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국제신대원, 역사신학)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11월 셋째 주 목요일,

즉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 지나면서 12월 25일의 성탄절 축제 분위기가 일어난다.

그리고 성탄절의 화려한 장식품들이 여기 저기 등장하다가 1월 말까지 장식품들을 진열한다.

 

이러한 흥분된 성탄절은 구속적 의미보다는 축제 그 자체에 도취되어 상업적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상업적 성탄절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아예 성탄절 자체를 부인하는 기독교인들도 간혹 있다.

 

다시 말하면,

성탄절을 지키는 분들을 가리켜 비밀적 로마 카톨릭인들, 우상숭배자들, 2계명을 어기는 자들,

그리고 혼합주의자들 등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성탄절을 성경이 명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교적 풍습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주님께서 성육신 하신 날,

즉 이 세상에 오신 날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 날을 정하여 지키고 추억할 뿐만 아니라,

예배를 드리고 즐거워하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기독교인이면

누구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축하하고 기뻐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기에 즐거운 음악, 가족의 교제, 선물을 주고받고, 그리고 서로를 위해 복을 빈다.

더욱이 이교적 풍습이 있다면 그러한 요소들을 제하고 성탄절을 지킬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팽팽한 두 견해에 관해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가질 것인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일을 위해 반성탄절의 역사적 배경을 간략하게 보기를 바란다.


초대교회시절부터 종교개혁 때까지 성탄절에 대한 적대감은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

기독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성탄절만 아니라 교회에서 시행되는 년 중 축일들을 당연히 지켰던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 이후 프로테스탄트들은 로마 카톨릭 잔재들을 거부하며 자체적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

그래서 성경적이지 않은 여러 관습이나 풍습을 거부하고 의식들을 행치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청교도 혁명을 이끌었던 비국교도들(dissenters)은 1664년 법령(Act of Parliament)에 따라

가게들을 열도록 하고 성탄절을 금지하였던 것이다.

그 날을 ‘교황의 날’이라 불렀다.

 

1659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공식적으로 성탄절을 금지했고,

1870년에 이르러 성탄절에 학교를 닫지 않고 지속적으로 교육을 실시했다고 한다.

1836년 미국 앨라바마 주에서부터 성탄절을 공휴일로 정했다.

점점 성탄절은 공휴일의 개념과 더불어 상업적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인본주의 사상의 흐름인 계몽주의에 이르러,

즉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에 이르러 성탄절에 대한 적대적 견해가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먼저 독일 프로테스탄트 파울 어니스트 야블론스키(Paul Ernst Jablonski)는

12월 25일이 그리스도의 출생일을 축하하는 일은 4세기 교회가 채택했던

기독교의 ‘이교도화’ 된 많은 일들 중 하나라고 말했다.

 

또 순수한 사도적 기독교가 카톨릭주의로 변화된 퇴패된 많은 일들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베네딕트 수도사인 돔 쟌 하도용(Dom Jean Hardouin)도 카톨릭 교회가 기독교 목적들을 위해

이교도 축제들을 채택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에 의하면,

율리스 시저 아래 기원전 45년 경 시작된 율리안 달력에 따라 동지는 12월 25일이었는데

이 날은 이교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로마에는 태양을 위한 두 개의 신전이 있었는데 하나는 8월 9일에 헌제를 드리는 날이었고,

다른 하나는 8월 28일 헌제를 기념하는 날이었다.

 

동방의 태양 축제인 미스라이즘(Mithraism)이 로마에 소개되었던 2세기에 이르러 사라졌다.

황제 아우렐리안(270-275)은 기독교에 적대감을 가지고

‘정복되지 않는 태양의 출생’(natalis invictis solis) 축제를 설립하고자 했다.

그는 동지날을 택하여 어두움을 마무리하고 밝음의 시작을 알리면서 로마제국의 재탄생을 의도했다.


한 편 초대교회에서는 축일 목록에 성탄절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성탄절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d. 215)는 그리스도의 출생 일자에 관해 관심을 가지면서

출생일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28년 파콘(Pachon) 25일, 즉 5월 20일이라고 했다.

 

또 키프리안(200-258)은 그리스도의 출생일을 3월 28일로 언급했다.

이렇게 성탄절에 대한 관심은 출생 일자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그의 죽으심과 연관시키면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 간에

주님의 죽으심 간에 차이가 있었지만 요한복음을 따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유대 달력의 니산월 14일(태양력으로 보면, 4월 7일이나 4월 3일)에 일어났다고 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음력을 따르는

유대인들과 차별을 원했기에 동방교회는 4월 6일을 지켰고

서방교회는 3월 25일에 지켰다.

 

동시에 이 날을 기준으로 하여 수태에 대한 천사들의 알림 후 9개월을 더하게 되면,

즉 3월 25일을 기준하면 12월 25일이 되고, 4월 6일을 기준하면 1월 6일이 되었다.

그래서 전자를 ‘성탄절’이라하고, 후자를 ‘공현일’(Epiphany)이라 칭했다.


위와 같은 두 가지 관습이 함께 어울러 진 것은 기독교의 핍박이 끝나고

로마제국과 교회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시작되었다.

 

대체적으로 12월 25일이 서방교회의 축제일로 정착된 것은 379년이나 380년이었다.

386년 12월 25일에 처음으로 성탄절 행사를 드렸다고 콘스탄틴노플의 대주교였던 존 크리소스톰(d. 407)은 설교했다.

 

또 이러한 전통은 동방교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432년 경 알렉산드리아와 그 이후에 예루살렘에도 지키게 되었다.

또 동방교회의 전통인 공현일도 함께 서방교회가 채택하므로 성탄절과 공현일을 함께 교회가 지키게 되었다.

 

더욱이 콘스탄틴 대제부터 이교도 영향은 날로 더해갔다.

그리하여 황제 아우렐리안 시대에 지켜졌던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출생’을 그리스도의 출생과 연관시켰던 것이다.


이후부터 로마 카톨릭교회는 여러 이교도 풍습들을 성탄절 축제에 채택하였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의미하는 성탄절과는 무관한 비성경적 여러 풍습들이 첨가되었다.

그러면서 성탄절에 대한 반감을 점차 부추겼던 것이다.

 

그 반감은,

 

첫째, 로마 카톨릭적이라는 것이다.

성탄절이란 단어 자체도 ‘그리스도의 미사’(Christ's Mass)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사제와 희생으로 동시에 보는 것이다.

또 성탄절의 그림이나 조각은 대체적으로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가 함께 만들어져있다.

성탄절에 마치 마리아와 예수님을 함께 숭배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듯하다.

 

둘째, 성탄절 나무를 상록수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다산이나 성적 능력을 갖추거나 행운을 가져다주는

이교적 풍습으로서 나무 장식품들은 마치 여성들을 의미하는 듯하다.

 

셋째, 겨우살이(mistletoe) 잔가지는 고대 켈틱 드루이드교(Druids)에서 유래되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잔가지에 입을 맞추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해시킨다.

 

넷째, 산타클로즈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성탄절의 대표적 상징이 되었다.

본래 산타클로즈는 4세기 소아시아의 미라(Myra)의 감독 니콜라스(Nikolaas)를 일컫는다.

이집트 신 베스(Bes)에 따르면 북극에 살고 있는데 어린이들을 위해 선물을 나눠준다고 한다.

화란에서는 그를 ‘신터 클라스’(Sinter Klass)라 불렀다.

 

다섯째, 성탄 전날이라 불리는 ‘유울’(Yule)은‘유아’를 의미했다.

앵글로 색슨족들이 기독교화 되기 전에 ‘유울’의 날, 즉 ‘유아의 날’을 지켰다.

그 전날은 ‘모친의 날’이라 불렀다.

이것이 지금에 와서는 성탄 전날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여섯째, 촛불은 고대 바벨론 사람들이 신들을 섬기기 위해 행했던 것이다.

탁자 중앙에 촛불을 세우고 성탄절 아침이 될 때까지 밝힌다.

동방박사 세 사람들이 선물을 가지고 온 것처럼 선물들을 주고받았다.


이러한 반감이 있는 가운데서도 개혁파 지도자였던 존 칼빈이나 프란시스 털틴은

성탄절을 지키는 일에 대해 인정하였다.

 

비록 이교적인 풍습들이 성탄절에 속해 있을지라도 개혁파교회들은 건전하게 성탄절을 준수했다.

심지어 칼빈은 성탄절, 성금요일, 부활절, 승천일 그리고 오순절 등을 준수하는데 정죄하지 않았고

건전한 방법으로 이런 축일들을 지킬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거의 모든 교회에서는 성탄절을 정기적으로 지키고 있다.


위에서 보았듯이 지금의 성탄절 축제에는 많은 이교적 풍습이 있음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래서 성탄절 자체를 부정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성탄절 의미, 즉 성육신이나 그리스도의 오심에 초점을 맞추어

이교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참된 의미를 되새기자는 자세도 있다.

 

성탄절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는 내적인 요소에 관심을 갖느냐

아니면 외적인 요소에 관심을 갖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지켜왔던 것을 이교적 요소로 인해 포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경솔한 자세라 아니할 수 없다.

 

신앙의 선배들이 성탄절을 지켜온 것은 성탄절의 의미,

즉 성육신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외적인 이교적 요소들이 있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문화에 따라 첨가된 것이기에

그것들을 성경적으로 재조명하며 다듬어서 참된 의미로 성탄절을 지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 믿는다.

 

문화와 지역에 따라 첨가된 이교적 요소는 우리의 형편에도 맞지 않는 것이기에

해마다 성탄절의 참된 의미를 성경에서 찾아서 재조명하고

우리들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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