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오시기 이전 시대사람들의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하여 

 

 - 부제 : 구원 얻는 믿음의 의는 만인적이 아닌 제한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에 따름 -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만 얻는 것인가? 그렇다면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나 오늘날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미처 전파되지 못한 곳에서의 사람들은 모두 전혀 구원 얻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성 있는 질문을 종종 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의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확대되어서 종교 다원주의적 사고에까지도 이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제부터 이 문제를 다루어보고자 하였던 것인데 이제 그 기회를 얻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정독하여 끝까지 읽어 주시기를 바라며. 그러한 독자들의 믿음이 구원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견고히 서서 한층 강화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 얻을만한 다른 이름은 없다'는 믿음의 유일성을 증거하는 복음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4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여기서 베드로가 말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와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했을 때의 '오직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은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름입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며 의심을 달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 '예수 그리스도'를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는다고 단언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유가 있다면 과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바울이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써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 것은 자기 생각과 그에 따른 판단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구약 성경에서 '구원으로 주신 이름'에 의하여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도행전 4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사도행전 4장은 베드로와 요한이 앞장인 3장에서 미문(美門)이라는 성전 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인하여 솔로몬 행각에서 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권능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이제 4장에서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복음을 선포한 일로 인하여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를 책임지는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에 의하여서 체포되어서 그 이튿날 온 유대지도자들과 장로와 율법학자들에 의하여 소집된 산헤드린공회에 서서 대제사장 안나스를 비롯하여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그 밖에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참석한 그들 앞에서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권위로 이 일을 하는 것이냐?"는 심문에 대하여 자신들이 군중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을 변론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와 요한은 앞으로는 예수에 대하여 일절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도는 자신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과 말씀을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당당히 말하였습니다. 이런 두 사도를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위협 후에 풀어주었는데, 풀려 나온 두 사도는 곧바로 다른 제자들을 찾아가서 공회원들이 한 말을 들려 주었고, 그 말을 들은 신자들은 한마음을 다 같이 기도를 드렸는데 그 내용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주께서는 저 옛날 주의 종이며 자신들의 조상인 다윗의 입을 빌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예언한 '기름부음 받은 자'를 거스른다고 하는 그 예언에 있는 그대로의 일이 오늘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헤롯왕과 총독 빌라도, 그리고 온 로마 시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종이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아들 예수를 대적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사도행전 3, 4장에서의 베드로의 설교에서나 신자들의 믿음에서나 공히 드러나고 있는 것은 '구원 얻을만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는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실 것이고 그에 따라서 주께서 마련하신 그 은혜의 새시대요 새날을 맞이하게 될 것인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메시야이신 예수를 다시 보내 주실 것이며 그 때가 오기까지 하늘에 머물러 계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옛적에 모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서 끊임없이 한 사람을 선지자로 세워서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주의 말씀을 전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에 따라서 사무엘을 비롯하여서 모든 선지자들은 그 '한 선지자'를 예언하여 온 것이었으며, 유대인은 그 선지자들의 자손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그 약속 곧 '온 세계가 네 후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신 약속 아래 놓여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아들을 가장 먼저 그들에게 보내신 것이며 이는 실은 그들이 모두 죄에서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의한 구원의 진리는 사도행전 7장에서 집사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게다가 그는 설교하기를 성전 건물 중심의 종교 생활의 신앙이 얼마나 무익한가를 말하며 유대인들의 헛된 신앙을 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닌, 그러니까 성전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것을 가지고 조상들이 선지자를 박해하여온 것과 똑같은 죄를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고 있음으로써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 설교로 인하여 순교를 당합니다. 유대인들이 스데반에게 던진 돌은 스데반의 무덤이 되었습니다. 그런 스데반이 눈을 감기 전에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는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았는데 그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보시오! 하늘이 열리고 인자[메시야이신 예수]가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이 본 것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메시야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보는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하면서 또한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구하였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데 대하여 이를 유일성으로 다루지 않고 다양성 있게 다루는 참으로 위험한 사상 앞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놓여져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할 때 그 하나는, 그렇다면 "그 믿음이 굳이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 하면,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로서 율법 아래 놓여져 있었기 때문에 구원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예수란 이름으로서가 아닌 율법을 지키는데 있었는데 예수란 이름 외의 다른 이름으로는 전혀 구원 얻을 방법이 없다고 하니 이는 모순이 아닌가?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 시대(구약 시대) 사람들의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하여(2)
- 부제 : 구원 얻는 믿음의 의는 만인적이 아닌 제한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에 따름 -

2. 아담과 그 후손들의 구원 얻는 믿음의 성격

여기서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수여하신 율법과의 관계성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인 그 이전부터의 구원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전인류의 타락을 가져왔다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와 인식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가 없으며 오히려 온갖 피조물을 형상화한 우상의 거짓된 것을 믿으며 숭배합니다. 이렇게 하나같이 의로운 사람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롬 3:9-18, 참조. 시 5:9, 10:7, 14:1-3, 143:2).

그런데 이러한 것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이미 선언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는 하나님께서 시험자의 역할을 한 뱀을 저주하시는 것으로 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뱀의 배후에 있는 이 보이지 않는 존재인 사단을 마침내 수치와 부끄러움의 굴욕에 처하게 하실 분이 누구이신지를 15절 하반절에서 알려 주시고 있는데 '여자의 후손'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여자의 후손'은 앞서 언급하고 있는 '여자'에 이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은 2번 언급이 됩니다. 이때 여기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여자의 후손'에서 후자는 앞서 나오는 여자의 후손과는 그 의미상 다른 여자의 후손인 것입니다. 전자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여자의 후손은 그 앞에서 언급한 '아담의 아내'인 여자의 후손으로서 '아담의 아내인 여자를 통하여 출산할 자녀들과 그 후손'인 모든 인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후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이와 상대격이 되는 '뱀의 후손'을 함께 이해하여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뱀'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뱀은 들짐승 중의 하나인 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그 뱀의 배후에 있으면서 뱀을 조종하는 사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뱀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고 하는, 곧 뱀과 원수 관계에 있게 되는 상대자는 '여자'로 뱀을 통하여 사단의 시험을 받은 아담의 아내가 되는 여자인 하와입니다. 이때 '원수가 되게 한다'는 말은 뱀과 여자간에 서로 미워하여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적의를 품고 있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뱀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뱀과 여자간에 '적의'(敵意)를 두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적의'란 원수끼리 서로에 대해 갖는 증오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뱀과 여자 사이에 적의를 둔다'는 것은 서로 원수가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원수가 되게 한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원수가 되는 일이 어떻게 해서 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뱀의 배후에 있는 사단의 존재를 뚜렷이 의식하고서 그 악한 영을 증오하고 적개심을 갖고서 원수가 되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자는 뱀과 원수가 된 사이가 아닙니다. 여자가 뱀의 말을 신뢰하고서 따랐을 뿐만 아니라 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 하나님을 떠나고 뱀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 있는 그녀로서는 마음에 적의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뱀의 편이 되어서 사단을 추종하는 자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그녀로서 뱀에게 적의를 품다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뱀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는 말은, 여자가 자기 마음에 뱀을 증오하는 적의를 품는다는 것이 아니라, 뱀과 여자 사이에 적의를 품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자에게서는 이 마음이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여자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뱀을 미워하고 적개심을 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의 아내인 하와와 함께 하셔서 그녀의 마음을 사단으로부터 보호하시고 그 마음에 뱀의 배후에 있는 실체인 거짓말하는 자인 사단을 미워하고 대적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뱀의 후손'과 원수가 되는 관계에 놓여 있게 되는 '여자의 후손'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뱀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할뿐만 아니라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도 원수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저주는 앞에서 '뱀'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것과 연계해서 볼 때 '뱀의 후손'은 '뱀의 배후 조종자의 후손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뱀의 배후 조종자는 초자연적인 존재인 사단이므로 사람이나 동물과 같은 방법으로 후손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뱀의 배후 조종자의 후손들'이란 말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들짐승인 뱀이 낳은 후손들이 아니며 또한 사단이 낳은 후손들이 아니라 뱀의 배후에 있으면서 그를 조종한 사단을 추종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사단의 나라'를 형성하는 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사단의 나라를 형성하는 세력은 여자에게서 낳음을 입지만 사단에게 속하여서 그의 지배를 받아 죄의 본성을 좇아 사는 죄인된 모든 인류입니다.

그리고 이 '뱀의 후손'과 원수가 될 '여자의 후손'은 앞서 말했듯이 '아담의 아내인 여자를 통하여 출산할 자녀들과 그 후손'인 모든 인류를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담의 아내인 하와와 함께 하면서 그의 마음을 사단으로부터 지켜 나가시고 그에게 사단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적개심을 일으켜 나가게 하셨듯이 하와가 낳은 자손과 그들에게서 나는 후손들인 모든 인류 가운데서 사단과 원수가 되는 관계에 놓일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를 입은 모든 자들을 의미합니다. 곧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이니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악한 세력으로부터 단호하게 지키며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여자의 후손'에게서 뱀과 대적하여 이기는 '여자의 후손'이 나게 하십니다. 후자의 여자의 후손은 전자의 여자의 후손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후자의 여자의 후손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뱀의 배후 조종자인 사단과 싸워서 이길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 부부로부터 먼 훗날 이스라엘의 후손으로 올 분으로 점차 그 존재의 실체성이 계시되어 갈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시험자 뱀을 심판하시는 것을 통해서 악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는 사단을 멸망시킬 존재인 메시야를 언급하시며 이를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여자의 후손에게 약속으로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 3장 15절에는 시험자 뱀을 심판하시는 것을 통해서 아담과 하와 부부에게 메시야에 의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약속으로 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 부부를 시험하는 일을 한 뱀에게서는 엄청난 재앙을 내리시는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저주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 부부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참으로 놀랍고 복된 소식입니다.

훗날 사도 시대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메시야로 오실 이 여자의 후손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데, 아담의 아내인 여자에게서 난 후손들 중에서 아브라함이 있었고, 아브라함 안에서 그 자손[아들]으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과 관련하여서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그]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브라함 안에서 그 자손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받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서 시작하셨으며, 그리고 또한 모든 이방인이 이 복을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왜 이처럼 장황하게 창세기 3장 15절의 의미를 설명하였는가 하면 다름 아닌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면서 그런 인간들 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경건의 의의 보호 속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자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여자에게서 난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단 한 사람도 의로운 사람이 없습니다(롬 3:10).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인간은 하나같이 다 무엇을 하든지간에, 설사 그것이 이런 저런 종교를 갖는 것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다 죄값을 치르기 위하여 자기가 죽을 무덤을 파고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 마음이 전적으로 부패하여 죄성을 띠고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마음을 발휘하든지간에 하나님은 인간을 죄인으로 인정하시며 그래서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간에 악한 죄로 인정하십니다. 이는 인간이 종교를 갖는 것에서도 그렇습니다. 인간이 종교성에 의해서 종교를 갖는 행위를 할지라도 의로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좀더 보겠습니다. 인간은 타락하였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또 인간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리석은 생각을 품고 이것에 의해서 우둔해져 분별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영광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대신에 나무나 돌로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형상을 본뜬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면서도 믿으려 하지 않고 일부러 거짓을 믿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러고는 하나님깨서 만들어 놓은 피조물 앞에서 기도를 하면서 정작 그 피조물을 만드신 하나님께는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인간을 비롯하여서 온갖 피조물의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종교성을 발휘하는 의를 행할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악한 죄로 인정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합니다. 설사 말이죠. 그 온갖 피조물의 형상을 보편적 신의 명칭으로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경배의 행위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보시지 않습니다. 악한 죄로 보십니다. 그러니 인간의 종교 행위가 그들을 의롭게 만들지 못하며 따라서 구원의 방편이 되지를 못합니다. 가령 아담의 자손에게서 가인과 그 후손이 하나님을 찾으며 경배를 한 것에서 이 문제를 짚어 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또한 아담의 자손에게서 셋과 그 후손이 하나님을 찾으며 이들도 경배를 한 것에서 함께 보도록 합시다. 이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신의 명칭은 당시에는 구별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가인과 그 후손들이 믿는 '하나님'은 셋과 그 후손들이 믿음을 가진 '하나님'과는 다릅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서는 구원 얻는 믿음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종교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구원 얻는 의의 믿음으로 여기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종교에서 갖는 온갖 행위는 다 악으로 규정되며 그러한 종교의 행위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그분을 섬기는 종교'와 차별됩니다(창 4:26). 그리고 이 차별은 사람들이 하나님[신]을 부르며 섬긴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종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 구원은 참신이신 여호와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을 이에 대한 믿음에 있게 해 오셨습니다.

가인의 제사에서 보는 것은 그는 제사를 드리는 것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표출하고 있습니다만 그는 그 제사를 '믿음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제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히 11:4)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아벨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리는 믿음이 있었던 반면에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예물을 기꺼이 받아들이심으로써 그 사실을 증명해 주셨다고 함께 말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보는 대로 가인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신 것은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로서 자신이 수확하여 소유하고 있는 농사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만 그런 그의 행위는 죄에 이끌린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6-7)라고 가인을 책망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죄가 가인의 마음이 문에 엎드려 기회만 보고 있다가 틈이 생기면 가인으로 하여금 악한 죄를 짓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인의 마음은 항상 죄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죄에 사로잡혀 있는 가인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에서도 사실은 죄의 힘에 이끌려서 하는 모습을 그대로 나타냈습니다. 이런 사실은 동생인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셨으나 자기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것에 대한 불만과 불평과 함께 동생을 죽이는 살인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졌습니다. 이는 가인의 후손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가인의 후손들이 세상의 온갖 문명의 발달을 일으키며 힘을 보여나가지만 정작 참신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없는 모습을 보여갔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그 악함 가운데서도 '경건한 자'를 세상에 두셨으며 그들이 참신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도록 그들의 마음과 생명을 보존시켜 나가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셋과 그 후손들에게서 봅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도대체 구원 얻는 믿음의 의는 인간이 갖는 종교에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닙니다. 과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에는 구원의 길이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도 아닙니다. 아벨의 제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이 아닌 한에는 어떤 종교의 형태로 믿음의 열심을 보인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전혀 구원 얻는 믿음의 의로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벨의 제사에서 인정되고 있는 '믿음으로'는 단지 그가 가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였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네 교회의 목사들이 일관되게 설교하는 서위 '피 있는 가축'으로 제물 삼았다는 데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속죄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속죄의 피의 의미를 담고 제사를 드리게 한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이끌고 가는 여정에서 비로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벨이 제사에서 하나님께 가진 '믿음'은 그의 부친 아담이 받았던 '약속의 자손'을 바라보며 이를 이루실 하나님을 믿었다는데 있습니다. 비록 그가 바라보는 약속의 자손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믿음에 비하여 참으로 원시(原始)적인 것일지라도 이는 당시 아벨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진 믿음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벨의 믿음은 '약속의 자손'으로 오는 '여자의 후손'에 대한 이해와 그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에서 계시되고 있는 '약속의 자손'에 대한 믿음에 있음으로써 입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시대에 걸쳐서 구원 얻는 믿음이란 여기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산 사람들이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은 바로 이 믿음에 있어서입니다. 신약 시대의 사람들이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듯이 구약 시대의 사람들도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훗날 바울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여자의 후손'에서 계시되고 있는 '약속의 자손'인 한 분, 곧 메시야[그리스도;구원자]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 시대(구약 시대) 사람들의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하여(3)
- 부제 : 구원 얻는 믿음의 의는 만인적이 아닌 제한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에 따름 -


3. 아브라함의 믿음에 의한 의

아브라함에 이를 때까지 '약속의 자손'은 하나님의 언약의 점진적 발전의 계시적 특성상 많은 부분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만큼 '약속의 자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세세한 부분에서가 아닌 총체적 이해 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은혜로 주어져왔습니다. 그러한 것이 아브라함 때에 이르러서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것에서 보다 구체화시켜 나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서 세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첫째는 새로운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 땅을 충만시켜 나갈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이요 셋째는 하나님께서 그 땅의 백성들과 함께 하면서 다스려 나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비는 자를 복 주시며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하나님의 언약을 좇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섬김]를 하나님은 또한 복 주시며 그러한 자를 저주하며 훼방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저주하십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에 의한 의'를 표적으로 내세워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게 하였으며,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신]과 차별화시켜 나가셨습니다. 아브라함[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아브라함이 부인인 사라를 누이동생으로 속인 일로 인해서 부인을 바로에게 빼앗길 뻔한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실은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애굽왕 바로에게 아브라함이 미는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롯이 삼촌 아브라함과 헤어져 요단 들녘을 차지하기 위해 소돔으로 내려가 자리잡고 있을 때 가나안 땅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 롯이 사로잡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아브라함이 가졸[가병] 318명을 데리고 가서 롯을 구출해 낸 일에서도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오 한없이 높으신 하나님이신 여호와이신 것을 알게 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함께 언약을 받은 후 언약을 좇아서 살았습니다. 그런 그는 크고 작은 여러 일들을 겪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는 것을 항상 인식해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신과 함께 하시는 중요한 까닭은 다름 아닌 자신과 맺은 언약을 이루어 나가시는데 있다는 사실도 깨달으며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있습니다. 그런 그는 일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두 가지 큰 일을 겪는데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서 이삭을 낳은 사건과 이삭을 모리아의 한 산에 제물로 바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에 의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언약에 믿음을 견고하게 있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또한 그 아들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 죽음에 처하는 상황에서 살리신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맺은 언약을 신실히 이루어 나가시는 분이심에 대한 절대적 신앙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반드시 신실하게 이루시기 위해서 이삭을 낳게 하신 것이고, 또한 이삭의 생명을 안전히 지켜 보호하고 보존해 나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손이 약속으로 주신 땅인 가나안을 차지하고 그곳에 크게 번성해 나가며 그 이름이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나이 100세에 이르렀을지라도 아들을 낳게 하겠다는 약속을 이루신 것이며 이삭이 모리아의 한 산에 제물로 바쳐지는 순간일지라도 이삭의 생명을 아브라함에게 돌려주신 것입니다. 훗날 바울은 로마서 4장 13-25절에서 이 문제를 '믿음으로 이루어진 약속'으로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20-25절)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의 이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고 그를 '죄 없는 자'라고 선언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받아들여 의롭다고 인정하신 이 복된 선언을 성경에 기록하신 것은 단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아브라함을 받아들인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도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보증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주려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자에 대한 '약속의 자손'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약속이 제시된 하나님의 언약을 좇는 믿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울의 가르침에서 보는 대로 언약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그러니까 조금도 염려하지 않고 신실히 믿은 데 있었습니다. 이 믿음에 의하여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죄 없는 자'라는, 곧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의는 모든 사람에게 죄사함과 칭의의 원리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아브라함에게 믿음에 의한 의 속에 있게 한 것은 단지 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너무나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구약 시대에서나 신약 시대에서나 전시대에 걸쳐 사람들이 무엇으로 구원을 얻는가 하는 것이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참신[하나님]이신 여호와를 예배하지 않고 거짓된 믿음으로 살아가며 죄성에서 나오는 육의 온갖 욕망으로 사는 악함에 있는데, 그런 자들과 구별시켜서 참신이신 여호와를 예배하는 의로움에 있는 참된 믿음에 있게 해 주셔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인 언약의 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삭과 야곱의 믿음은 자기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을 좇는데서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동일하게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도 그렇습니다. 이들이 믿은 믿음의 의는 자기 당대와 후손들에게 이루어질 것으로서 약속으로 주신 땅인 '가나안'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약속으로 주실 자손에 대한 믿음을 이삭과 또한 그의 후손들에게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약속의 자손'에 대한 믿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장차 오실 메시야[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두고서 하나님의 언약을 좇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와 관계성에 의해서 다루어집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의 믿음도 그렇구요.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 시대(구약 시대) 사람들의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하여(4)
- 부제 : 구원 얻는 믿음의 의는 만인적이 아닌 제한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에 따름 -


4.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믿음에 의한 의가 말하고자 하는 것

구약 시대의 사람들의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해서 가장 예민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모세 때부터의 믿음의 성격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의 여정에 있게 하는 과정에서 시내산에 머물게 하셨을 때 모세를 통하여 우리가 율법으로 떠올리게 되는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 판을 주시면서 언약식을 체결하시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율법을 주시면서 이를 '준행' 할 것을 명령하시며 이것에 의해서 생명에 이르는 '복'과 죽음에 이르는 '저주'를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준행하는 자는 '살 것이요' 율법을 준행하지 않는 자는 '죽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실증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율법을 순종으로 지키는 한에는 안연한 삶을 사는 것에 반해 율법을 불순종하여 지키지 않는 한에는 온갖 비참한 상태에 처하게 하신 데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언약을 맺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언약의 백성 삼으셨습니다. 즉 언약의 백성의 관계에 놓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은 이스라엘이 율법의 언약을 지키는데서입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언약 아래 있어서 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나가는데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의 언약 아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또한 제사로 맺은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율법 생활의 중요한 삶은 제사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는 것은 단지 그것을 통해서 종교 행위를 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율법의 언약을 신실히 좇는 믿음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을 제사를 통해서 계시적 의미와 모형으로 담고 있는 속죄의 원리를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이 비로소 짐승의 피에서 속죄의 의미를 알고 그에 대한 믿음에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제사의 율법에 의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제사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실 자가 그 약속을 어떻게 이루어 나가실 것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짐승이 제물로 드려지고 또한 피를 흘리는 일을 하게 하신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히 9:22)는 것은 율법 아래서는 속죄의 원리였습니다. 그러나 이 피 흘림에 의한 죄 사함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요 그림자였습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반드시 피 흘림이 있어야만 했고 피 흘림이 없이는 죄를 용서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속죄의 원리에 의한 믿음에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대대로 제사를 보존해 나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의 율법과 함께 주어진 중요한 것이 절기와 성전입니다. 그에 따라서 이스라엘은 사실 1년 전체가 제사 생활에 놓여져 있었으며 또한 절기를 지키며 성전 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이 모두는 이것의 원형인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율법 아래 놓여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한 이러한 이해 속에서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한 방법으로 율법을 주신 목적에 따른 율법의 기능(역할)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이미 '성경바로알기' 218번에 올려놓았었습니다. 여기서는 그 글에 좀더 설명을 보충하는 것으로 해 나가겠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 오셔서 죄인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려 이루신 속죄 사역, 곧 헌제사역을 알고 그분을 믿음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기에 율법은 이 사실을 알려 주는 하나의 방법과 기능(역할)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먼저는 죄를 깨닫게 하는 것으로, 그리고서는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율법은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해 주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얻고자 하면 계명들을 지켜라"라고 말씀하셨으며, "율법들을 지금까지 다 지켜왔는데 또 무엇이 부족합니까?"라는 질문에 "네가 온전하고자 하면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대답하셔서 그가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좇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얻고자 하는 영생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생명의 주'이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율법에 따라서)율법을 지키면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따르면 영생을 얻습니다. 율법은 언약의 축복과 저주로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성을 말해 주는 것이니 거기에 있는 계명들을 이스라엘 백성이면 의당히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 율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주신 하나님의 본의(本意)를 깨달아 알고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일을 했어야 합니다. 율법에서 사람이 자신의 존재 사실을 아는 것은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이요, 이로 인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이 어떻게 선대들에게 언약되어 왔었는지를 알고서 그 언약 안에 놓여 있는 자로서 언약의 성취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이 자체가) 틀린 것입니까? 이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렇게 묻는 것은 바울이 에베소서 2장 9절에서 말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서의 "율법의 계명들을 다 지켜왔으므로 당신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율법을 지켜온 육에서 드러나고 그래서 본 것은 무엇입니까? 죄 밖에 더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선한 일을 하는 그 육에서 또한 나오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그 선한 일을 하는 것으로 스스로 가슴 뿌듯해 하며 자부심을 가지며 자랑하는 자기 의를 드러내는 죄가 아니었나요? 그런데 율법을 지킨 그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까? "천만에요!. 율법의 행위로는, 곧 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의 그 어떤 사람도 말입니다"라고 말해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이스라엘) 지켜오고 있는 율법의 계명들이 알게 해 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당신은 율법 앞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철저하게 죄인된, 그래서 죄에 사로잡혀 사는 당신의 모습입니다. 이런 당신에게 하나님께서는 죄에서 건짐을 받는 구원의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의를 입혀 주시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율법의 요구(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에 있으면 당신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에베소서 2장 8절의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이해에 의해서 구약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그래서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했다고 하면 이는 틀린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것은 율법으로(율법의 계명들을 지켜온 행위로) 구원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사실, 그러니까 율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 그분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입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한다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의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동일하게 같은 믿음인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이나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이나 믿음에 차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만일 이러한 이해에 따른 믿음은 없이 단지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인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자신의 몸을 드러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듯이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을 준행하는 믿음에 의해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믿음이요 거짓된 믿음입니다. 율법을 준행하는 것의 믿음의 성격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성격과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다룰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관원이며 부자 청년이 "내가 어렸을 적부터 이 모든 계명들을 다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또 부족합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네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너는 가진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고 대답해 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말한대로 너는 어렸을 적부터 율법의 계명들을 다 지켜온 믿음이 있었으니 네가 구하는 영생을 얻는 것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해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좇는 믿음이 없는 율법의 준행이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자기의 생명에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 시대(구약 시대) 사람들의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하여(5)
- 부제 : 구원 얻는 믿음의 의는 만인적이 아닌 제한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에 따름 -


5.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면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받는 교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을 말하며 종말론 강화를 하실 때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는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민족이 그것을 듣고 그 믿음에 있게 되는 일이 있고 나서야 세상 끝이 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승천을 앞 둔 시점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8-20a)라고 말씀하시면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b)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온 세상에 천국 복음이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이 듣고 그 믿음에 있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또한 땅에 있는 자신을 믿는 자들과 항상 함께 하십니다. 세상이 언제 끝나는 것인가 하는 것이 관점이 아니라 온 세상에 천국 복음이 전파되어 모든 민족이 이를 듣고 그 믿음에 있게 하신다는 것이 관점입니다. 그때까지는 세상의 종말은 있지 않으니까 거기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일 때문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면서요.

그렇습니다. 온 세상에 천국 복음이 전파되어 갑니다. 모든 민족이 그 복음을 듣고 믿음에 있게 됩니다. 그런데 말이죠. 천국 복음에서 증거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어찌되는가요? 참으로 유아적인 질문이며 어리석기 짝이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의외로 이런 질문이 종종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게 되었지만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는 자들인데,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이런 저런 종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지 예수님의 이름을 한번도 듣지 못했다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구원 얻지 못하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는 참으로 불공평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더욱이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여기에 대한 설명은 지금까지 말해 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시대의 사람들의 믿음은 '그리스도'에게 있었습니다. 더욱이 기름부음 받은 직분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등장하고 있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을 통해서 끊임없이 '구원자'를 보며 한 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있어왔습니다. 무엇보다 구원 얻는 문제에 대한 성경의 총체적 가르침은 '구원 얻을 의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며 '구원 얻는 믿음의 의'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론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입니다. 그에 따라서 전시대에 걸쳐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받는 자들은 '제한적'[제한적 속죄]이었으며, 당연히 이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은 곧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그 믿음에 있지 못한 자들은 유기[버려짐]된 멸망의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사람은 죄값으로 죽음의 형벌을 받는 상태에 있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께서 불공평하신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가지신 영원한 작정에 따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택한 백성들에게 그 자비를 행하셨습니다. 그 결과물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엡 1장). 오늘날의 신약 시대의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천국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이름이 증거되고 있는데, 그럼에도 천국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나라와 지역이 있다면, 이것이 마침내 세상 끝날에까지도 그러했다고 하면, 저 옛날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시대인 구약 시대의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께서 택함을 정한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시며 그 믿음에 있게 하시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거짓된 믿음에 있도록 내버려두셨듯이 천국 복음을 귀로 듣지 못하게 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그 마음을 완악한 상태에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따른 것인데, 그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지 못해서 그런 것뿐이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그들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담 이래로 전시대에 걸쳐서 구원 얻는 믿음의 의는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져 왔습니다. 우리는 그 구원 얻는 믿음의 의를 하나님의 의로써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이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

*지금까지 장문의 모든 글을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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