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리


글 / 김효성 목사 

 

 

제목 차례


서론

기독교 윤리의 개념

기독교 윤리의 기준

아디아포라

순종

십계명의 중요성

도덕법의 유익

십계명의 해석 원리

제1-4계명의 요약

하나님을 사랑함

인간의 삶의 첫 번째 목적

경건

제1계명

공예배(公禮拜) 

찬송

현대 기독교 음악(CCM) 

열린 예배 

제2계명

제사, 차례, 조상숭배

우상 제물 문제

타종교인들에 대한 태도

마리아 숭배

현대적 우상: 돈, 과학, 육신적 쾌락

제3계명

합법적 맹세와 서약 

제4계명

성수 주일(聖守主日)

의식법들--절기

십일조

제5-10계명의 요약

형제 사랑, 이웃 사랑, 원수 사랑

용서 

친구 

제5계명

효도

자녀 교육

윗사람 공경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제6계명

술과 담배

낙태

안락사

자살

사형

전쟁

혁명

제7계명

결혼 

부부의 의무

성(性) 관계

이혼, 재혼, 별거

동성애

산아제한과 피임

생물의학적 문제들

아름다움, 몸의 단장

변질된 아름다움

제8계명

직업, 노동, 근면

구제

경제 제도

제9계명

거짓말

제10계명

탐심

자족하는 삶

절제

자기 부정

고난

인내

금욕주의 

취미와 오락

기쁨 

질병

감사

윤리적 요약

거룩

의와 선과 진실

겸손

윤리적인 말

결론

기독교 윤리의 목적

기독교 윤리의 원동력

헌신

성화와 상 

 
 

 

주요주제 직접가기

기독교 윤리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의 첫 번째 목적은 무엇인가?

현대 기독교 음악(CCM)에 대해

열린 예배에 대해

성수 주일(聖守主日)의 근거가 무엇인가?

신약교회도 절기를 지켜야 하는가?

신약성도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자녀 교육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술과 담배 문제

낙태는 허용될 수 있는가?

안락사는 가능한가?

자살은 허용될 수 있는가?

사형은 금지되어야 하는가?

모든 전쟁이 악한 것인가?

결혼이 무엇인가?

이혼과 재혼은 가능한가?

동성애는 허용될 수 있는가?

피임은 허용될 수 있는가?

성경적인 경제 제도에 대해

거짓말에 대해

구제에 대해

금욕주의에 대해

기독교 윤리의 목적이 무엇인가?

기독교 윤리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성화에도 상급이 따르는가?
 

머리말

 성경의 요지는 교리와 윤리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문답은 “성경은 무엇을 주로 가르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 믿어야 할 바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를 주로 가르친다”고 대답하였다.

교리는 믿음의 내용이며 윤리는 행위의 원리이다. 교리는 믿어야 할 하나님의 진리를 말로 표현한 것이며 성경 교리들의 체계적 지식이 신학 혹은 조직신학이다. 윤리는 행위의 원리들, 즉 하나님이 주신 생활 교훈이며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윤리학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조직신학과 윤리학으로 정리될 것이다.

성경에 계시된 행위 원리들, 즉 하나님이 주신 생활 교훈은 십계명에 가장 간단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경에 주신 모든 생활 교훈들은 십계명의 순서대로 잘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자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것은 은혜로 얻은 법적 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가 실제적으로도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성화의 과정이다. 성화는 온전함을 목표로 한다.

저자는 이 작은 책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을 깨닫고 온전함에 이르는 일에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을 사모하며 성경을 사랑하는 자들이 이 책을 통해 성경의 바른 교훈을 더 확실히 이해하고 힘써 실천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의 우리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니 우리의 모든 삶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 뜻을 이루는 일에 온전히 바쳐지기를 소원한다.

 

 


서론

기독교 윤리의 개념

일반적으로, 윤리 혹은 도덕이란 사람의 올바른 행위 원리들을 말한다. ‘윤리’라는 영어 에식 ethic은 헬라어 에도스에서 나왔는데, 그 말은 습관이나 관습을 가리킨다. 윤리학 혹은 도덕 철학이란 그것들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윤리는 옛부터 철학의 주요한 세 가지 주제인 존재, 지식, 선 중의 하나인 선(善)의 문제로 연구되어왔다. 역사상 윤리에 대한 여러 견해가 있었다. 예를 들어, 에피큐러스 학파는 개인에게 감각적 즐거움을 주는 것을 선이라고 보았고, 공리주의는 인류 전체의 유익과 즐거움이 되는 것을 선이라고 보았다. 한편, 근세에 유명한 칸트는 양심의 명령을 따라 행하는 것을 선이라고 보았다. 현대에 와서, 실존주의는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는 모든 것을 선이라고 보고, 실용주의는 사람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선이라고 본다.1)

사실, 하나님 없는 죄인들에게서 참된 윤리 개념과 기준을 기대할 수 없다. 일반 윤리는 어둡고 혼미하다. 양심에 근거한 선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이상(理想)에 불과하다. 진정한 선은 오직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다.

일반 윤리의 다양하고 복잡한 개념과 달리, 기독교 윤리란 단순히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여 주신 올바른 생활 원리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뜻과 그의 말씀은 윤리의 근거이므로 하나님 안에서만 참 윤리를 말할 수 있고 그가 주신 성경을 통해서만 참 윤리를 논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윤리학이란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기록인 성경에 나타난 성도들의 올바른 생활 원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고 참된 선이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의 기준

기독교 윤리, 즉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의 기준은 성경이며 오직 성경뿐이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모든 인생들에게, 그리고 특히 성도들에게, 최종적, 절대적 권위이다. 일반 윤리의 개념과 같이, 사람의 전통이나 관습이, 개인이나 사회의 유익과 즐거움과 행복이, 심지어 사회의 여론이 윤리의 기준이나 최종적 권위가 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 최종적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2, “성경 즉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명칭 아래 현재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모든 책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 . . . 이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믿음과 생활의 법칙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행위에 절대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한 명령을 주셨을 때부터 분명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은 온전하게 지켜져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범죄하였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생활에 정확무오한 규범이라는 것은 분명하였다. 신명기 4: 39-40,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 5:32-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道)를 행하라.”

예수께서도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처음부터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4:4, “기록되었으되.” 마태복음 15:2-3,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사도 바울도 구약성경의 신적 권위와 자신들의 가르침의 불변적 권위를 증거한다.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데살로니가후서 2:15,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전해 들은 내용]을 지키라.”

근래에 세속사회의 윤리적 상대주의 혹은 상황주의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은 성경을 절대적 윤리 규범으로 인정하지 않았다(예컨대, 죠셉 플레처, 에밀 부룬너, 라인홀드 니이버, 죤 로빈손 등). 또 어떤 이들은 윤리적 절대주의를 표방하면서도 특수 상황에서 윤리적 규범들이 서로 충돌할 경우 더 작은 악이나 더 나은 선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에서의 성도들의 행동 원리를 성경에 밝히 계시하셨다고 믿는다. 우리는 성경의 생활 교훈과 행위 규범이 결코 애매모호하지 않다고 믿는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그러나 여기에 성경 해석의 문제가 뒤따른다. 하나님의 ‘감추인 뜻’은 불변적이지만(말 3:6; 약 1:17), 하나님의 ‘드러난 뜻’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변경되었다. 구약시대의 율법들 중에는 신약시대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건전하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할 것이다.



아디아포라

도덕적으로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 행위들이나 의식들을 아디아포라 (indifferent things)라고 한다. 교회 역사상, 성경에 명확히 명령되거나 금지되지 않은 어떤 것들에 대해 그것이 아디아포라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는 천주교회의 전통적 예배 형식들 가운데서 성경에 금지되지 않았고 또 복음을 부정하지 않는 것들은 유지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루터교회의 어떤 이들은 미사, 고해성사, 종유성사, 성직자의 복장 등을 선한 양심으로 따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것을 타협으로 간주하였다.

또 17세기에, 오락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오락이 그 자체로는 선이나 악이 아니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것을 선이나 악이 되게 한다고 생각했고, 다른 이들은 어떤 행위든지 그 자체적으로 아디아포라인 것은 없다고 주장하였다.2)

우리는 성경이 아디아포라를 인정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포도주나 술을 마시는 문제에 대해 성경은 그 행위 자체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술을 과도하게 마셔서 술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요(엡 5:18)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큰 죄로 간주된다(고전 6:10; 갈 5:21).

또 할례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할례 자체가 선이나 악이라기보다 그것을 어떤 의도로 행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디모데의 부친이 헬라인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인해 그에게 할례를 행하기도 하였고(행 16:3), 헬라인 디도의 경우에는 반대로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않게 하기도 하였다(갈 2:3).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말하였다(갈 5:6).

우상 제물을 먹는 일도 그러하였다. 우상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나 우상을 인정하고 섬기는 정신으로 그것을 먹으면 큰 죄가 되기 때문에, 바울은 지식보다 사랑을 가지고 형제의 유익과 교회의 덕을 위해 처신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말하기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하였다(고전 8:12-13).

구약의 의식법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신약 아래서는 폐지되었으므로 다른 이들에게 강요될 것은 아니나 하나님을 위해 그것을 행하는 자들을 정죄하지도 말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에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하였다(골 2:16-17). 

또 그는 로마서 14장에서 말하기를,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고 하였다(롬 14:1-6, 15).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한 것이었다. 즉 예루살렘 총회는 교회 안에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섞여 있었던 당시의 형편을 고려하여 일시적으로 덕스러운 규정을 만들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15:19-20, 28-29, “[야고보의 발언]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총회의 결정]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밝히 교훈된 도덕적 명령에 대해서는 선악 구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공경함이나 살인을 금하고 간음을 금하고 도적질을 금하고 거짓말을 금하고 탐심을 금한 것은 선악 판단이 분명한 규정들이다. 그러므로 낙태는 분명히 살인에 해당하고 안락사도 그러하며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도덕적인 죄악이다. 또 동성애는 허용될 수 없는 생활방식이요 음란한 죄이며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도 허용될 수 없고 또 돈과 재물에 대한 사랑도 허용될 수 없는 죄악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삶의 어떤 부분에 아디아포라 즉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들이 있으며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치거나 치우친 규정과 법을 만들지 않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 교훈이 분명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핑계나 구실을 찾지 말고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주저함 없이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순종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는 한마디로 순종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대요리문답 91문답,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는 그의 계시된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신명기 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사무엘상 15:22-2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전도서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함으로 타락하였고 그로 인해 아담의 후손된 인류는 다 불순종의 상태에 있었다.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역사도 결론적으로 불순종의 역사이었다. 민수기에 기록된 광야 생활의 역사, 사사기에 증거된 반복된 실패의 역사, 열왕기와 역대기에 기록된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국의 패망의 역사,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증거된 포로 귀환 후 부패의 역사가 그러하였다. 인류의 역사는 한마디로 죄와 불순종의 역사이다.

죄인들이 하나님께 순종치 않는 까닭은 무지와 교만과 전적 부패성 때문이다. 죄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롬 3:11). 그들의 마음은 교만하고 완고하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신뢰한다. 그들의 본성은 심히 부패되어 구제 불능이다.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구약시대에 믿음의 사람들은 다 순종의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방주를 지었다(창 6:22).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지키려 하였다(창 22:2, 12).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좇았다(민 14:24). 그들은 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깨달음을 가지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온전히 순종한 자들이었다.

특히,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의 본이 되신다. 로마서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빌립보서 2:7-8,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히브리서 5:8-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우리는 그 순종을 본받자.

순종의 결과는 평강과 생명이다. 이사야 48:18,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로마서 6:22, “. . .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십계명의 중요성

도덕법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순종의 법으로 주신 것이 도덕법이다.

[92문] 하나님은 처음에 순종의 법칙으로 인간에게 무엇을 계시하셨는가?

[답] 무죄 상태에 있는 아담과 그 안에서 모든 인류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특별한 명령 외에도 계시된 순종의 법칙은 도덕법이었다

[93문] 도덕법이 무엇인가?

[답] 도덕법은 인류에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 것인데, 각 사람에게 전인(全人) 즉 영육의 구성과 성향에서 또한 그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가지는 거룩과 의의 모든 의무 수행에서 이 법에 대한 개인적이고 완전하고 영속적인 순응과 순종을 지시하고 속박하며 또 그것을 다 지킬 때 생명을 약속하고 그것을 어길 때 죽음으로 위협한다.

[98문] 도덕법은 어디에 요약되어 있는가?

[답] 도덕법은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는데, 그것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으로 전달되었고 그에 의해 두 돌판에 쓰여졌고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되어 있다. 처음 네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담고 있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담고 있다.



도덕법의 유익

도덕법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다. 그것은 중생치 못한 자들에게 뿐 아니라 중생한 자들에게도 유익하다.

[94문] 타락한 후의 사람에게도 도덕법이 유익이 있는가?

[답] 비록 타락 후에는 아무도 도덕법에 의하여 의와 생명에 이를 수 없으나; 도덕법은, 중생하지 못한 자나 중생한 자에게 각각 유익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크게 유익이 있다.

[95문] 도덕법은 모든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답] 도덕법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뜻과, 그들이 따라야 할 의무를 알게 하며; 그들이 그것을 지키는 데 무능함과 그들의 본성과 마음과 생활의 죄악된 더러움을 확신케 하며;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와 불행을 느껴 겸손케 하며, 또 이로써 그리스도와 그의 완전한 순종의 필요성을 더 분명히 알게 하는 유익이 있다.

[96문] 도덕법은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 무슨 특별한 유익이 있는가?

[답] 도덕법은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 그들의 양심을 일깨워 다가올 진노를 피하게 하며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거나; 혹은 그들이 죄의 상태와 길에 계속 머물러 있을 때 그들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고 그 저주 아래 있게 하는 유익이 있다.

[97문] 도덕법은 중생한 자들에게는 무슨 특별한 유익이 있는가?

[답] 비록 중생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행위 언약으로서의 도덕법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따라서 그 율법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받거나 정죄를 받지 않지만;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그 일반적 용도 외에, 도덕법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그리고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 법을 다 지키시고 그 저주를 견디셨으므로 그들이 얼마나 많이 그리스도에게 매여 있는지를 보여주며; 그럼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더 많이 감사케 하고, 그들의 순종의 법칙으로서 그 법을 따르기를 더 많이 조심함으로써 그 감사를 표시하는 유익이 있다.



십계명의 해석 원리

[99문] 십계명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법칙들이 지켜져야 할 것인가?

[답] 십계명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법칙들이 지켜져야 할 것이다:

1. 율법은 완전하며, 각 사람을 전인적(全人的)으로 그것의 의(義)에 완전히 순응하고 영원히 전적으로 순종하도록 속박하며; 따라서 각 의무의 최대한의 완수를 요구하고 또 가장 작은 정도의 죄도 금지한다는 것.

2. 율법은 영적이며, 따라서 말과 행위와 몸짓뿐 아니라, 이해와 의지와 감정과 기타 영혼의 모든 능력들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

3. 몇 가지 계명들에서, 동일한 것이 여러 가지 면들에서 요구되거나 금지된다는 것.

4. 의무가 명령된 곳에는 그 반대되는 죄가 금지되고, 죄가 금지된 곳에는 그 반대되는 의무가 명령되듯이; 약속이 첨가된 곳에는 그 반대되는 위협이 포함되고, 위협이 첨가된 곳에는 그 반대되는 약속이 포함된다는 것.

5.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은 어느 때든지 행해서는 안 되며; 그가 명령하신 것은 언제나 우리의 의무이며; 그러나 모든 특정한 의무를 항상 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6. 한가지 죄 또는 의무 밑에 같은 종류의 모든 것이 금지되거나 명령되며; 그것의 모든 원인과 수단과 기회와 모양, 그리고 그것을 자극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것.

7. 우리 자신에게 금지되거나 명령된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직위의 의무에 따라 피하거나 행하도록, 우리가 우리의 직위에 따라 힘써야 한다는 것.

8.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된 것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지위와 소명에 따라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금지된 것에 있어서는 그들과 함께 피하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


 

제1-4계명의 요약

기독교 윤리, 곧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교훈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리될 수 있겠지만, 아마 십계명의 순서를 따라 가장 쉽고 분명하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십계명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함

먼저 십계명의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의무를 보인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들 가운데 가장 첫째 되는 것은 인간이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2:37). 그것은 신명기 6:5에 근거한다. 대요리문답 제102문답,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담은 처음 네 계명의 요지는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우리의 혼을 다하고 우리의 힘을 다하고 우리의 생각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마음과 영혼(네페쉬, 영혼 혹은 생명)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총동원하여 즉 전인격적으로 사랑한다는 뜻이다. 실상, 우리는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큰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큰 죄인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바는 여전히 우리가 우리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총동원하여 전인격적으로, 최선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목적과도 통한다.



인간의 삶의 첫 번째 목적

인간의 삶의 첫 번째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설정하고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부귀와 명예와 영광을 목적으로 삼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자녀들을 위해, 불쌍한 이웃을 위해, 조국을 위해, 혹은 세계의 평화를 위해 산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었다. 이사야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 진리는 구약성경의 다른 말씀들에서도 확증된다. 신명기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시편 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예수님의 말씀도 이 진리와 부합한다. 마태복음 10:37-39,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10:31,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문답은, 인간의 삶의 첫 번째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충만하게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이란 하나님께서 성경에 계시하시고 교훈하신 모든 말씀을 다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삶, 즉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순종하며 사는 삶이다.

예수께서는 땅의 일들이 다 썩을 양식을 위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29).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생이 그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요구하신다고 밝히 가르친다. 신명기 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전도서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경건

하나님께 대해 성도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는 경건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경건은 모든 윤리의 기초요 근거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 없이는 결코 도덕법을 지키거나 윤리적 삶을 살 수 없다. 잠언 16: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경건은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예배의 태도요 행위이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전도서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콜, ‘모든 것’)이니라.” 디모데전서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이스라엘과 유다의 열왕들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여러 가지 우상숭배에 떨어져 하나님의 큰 진노를 일으켰다. 우상숭배의 죄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죄이다. 그러나 의인들은 경건하였다. 창세기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 5:22,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세기 6:9,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8:20,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창세기 12:8, ”[아브라함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21:33,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말씀 묵상

경건 혹은 개인적 예배의 한 요소는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다. 옛날부터 경건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묵상하기를 힘썼다. 욥기 23:12,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시편 1:2, “[복 있는 자는 악한 자들과 동류가 되지 않으며]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편 119:97, 103, 105, 127, 147-148,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믿음과 온전함과 큰 평안을 얻는다.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누가복음 1: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시편 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기도

경건의 다른 한 요소는 기도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도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성부 하나님께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한다.

기도의 내용은 감사와 찬양, 죄의 고백, 간구 등이다. 우리의 간구의 내용은 먼저 영적인 것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육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이어야 한다. 또한 먼저 자신의 영적 생활을 위해 기도하고 그 후에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께서는 기도의 주요 내용을 가르쳐 주셨다(마 6:9-13): ①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② 주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이것은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영광의 천국이 오기를 구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어 택한 백성들이 모두 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일, 즉 전도와 교회의 설립과 확장을 구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6:19,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③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일차적으로 우리 개인과 온 인류의 구원에 관한 것이다. 요한복음 6:39-4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④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⑥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기도의 방법에 관하여는, 우선 개인적 경건 시간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안식일 계명과 절기 규례를 주신 근본적 이유들의 하나이다. 사람은 어리석은 짐승과 같아서 경건의 시간을 구별하지 않으면 세속적 일들에 분주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한국 교회의 전통인 새벽기도회는 규칙적 경건 생활과 기도 생활을 위해 유익이 많다.

기도의 장소는 어느 특정한 장소(산이나 예배당)에 국한시킬 것이 없다. 어디서든지 조용한 장소는 기도의 골방이 될 수 있다. 기도의 소리에 관하여는 소리내어 기도하는 것이 좋다. 묵상 기도는 졸음이나 잡념의 침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공예배시에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소리로 해야 한다.

성경에서 기도 생활에 힘쓴 대표적 예는 다니엘이다. 다니엘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기도의 큰 본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새벽 기도). 마태복음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밤 기도). 누가복음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철야 기도).

기도는 성도에게 큰 복이다. 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경건의 유익

이러한 경건한 삶 즉 말씀과 기도의 삶은 성도에게 영적으로 유익할 뿐 아니라, 육신 생활에도 유익이 많다. 디모데전서 4:7-8,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금생과 내생의 약속은 건강과 경제적 안정과 천국과 영생의 약속이다. 시편 37: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잠언 3:7-10,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리프웃)[건강, 치료]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먹는 것과 입는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제1계명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1계명에서 요구된 의무와 금지된 죄

[104문] 제1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무엇인가?

[답] 제1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하나님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하나님이신 줄 알고 인정하는 것과; 따라서 그에게 예배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되, 그를 생각하고, 묵상하고, 기억하고, 높이 여기고, 공경하고, 찬양하고, 선택하고, 사랑하고, 사모하고, 경외하고; 그를 믿고; 그를 의지하고, 소망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를 위하여 열심을 품고; 그의 이름을 부르고, 모든 찬송과 감사를 드리고, 전인적(全人的)으로 그에게 모든 순종과 복종을 드리고; 범사에 그를 기쁘시게 하기를 조심하고, 무슨 일에든지 그가 노하실 때에는 슬퍼하고; 겸손히 그와 동행함으로써 하는 것이다.

[105문] 제1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무엇인가?

[답] 제1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모시지 않는 무신론; 하나 이상의 신들이나, 혹은 참 하나님과 더불어 혹은 대신 어떤 신을 두거나 예배하는 우상숭배; 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또 우리 하나님으로 모시고 고백하지 않는 것; 이 계명에서 요구된 그에게 합당한 무엇을 빠뜨리거나 소홀히 하는 것; 그에 대한 무시, 잊어버림, 오해들, 잘못된 견해들, 합당치 않고 악한 생각들; 그의 은밀한 일들에 대한 대담하고 호기심을 가진 탐구; 하나님께 대한 모든 불경(不敬), 미움; 자기 사랑, 자기 추구, 또 그밖에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나 감정을 과도하고 무절제하게 두며 그것들로 그를 떠나게 하는 모든 것; 헛되고 경박한 믿음, 불신앙, 이단, 그릇된 믿음, 불신, 절망, 완강함, 심판들 아래서의 무감각함, 마음의 완고함, 교만, 뻔뻔함, 육신적 안심,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함과 불법적인 수단을 의지하는 것; 육신적인 기쁨들과 즐거움들; 부패하고 맹목적이며 무분별한 열심; 하나님의 일들에 있어서 미지근함과 죽어 있음; 하나님에게서 멀어짐과 배교(背敎); 성도들이나 천사들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들에게 기도하거나 어떤 종교적 예배를 드리는 것; 마귀와의 모든 약속들과 의논, 그리고 그의 제안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 사람들을 우리의 신앙과 양심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 하나님과 그의 명령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것; 그의 영을 대적하고 근심시키는 것, 그의 처분들에 대해 불만하고 조급한 것, 그가 우리에게 내리신 재앙들에 대해 어리석게 그를 비난하는 것; 또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선에 대한 칭찬을 운명이나 우상이나 우리 자신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돌리는 것이다.

[106문] 제1계명의 ‘나 외에는’라는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특히 어떤 가르침을 받는가?

[답] 제1계명의 ‘나 외에는’ 혹은 ‘내 앞에서’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모든 것들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다른 신을 두는 죄를 특별히 주목하시고 대단히 불쾌히 여기신다는 것과; 따라서 그것이 그 죄를 단념시키는, 그리고 그것을 지극히 뻔뻔스럽게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일이 되게 하는 근거가 되고, 또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그를 섬기면서 하는 무슨 일이든지 그의 앞에서처럼 하도록 설득하는 근거가 되게 하는 것이다.



공예배(公禮拜)

공예배(公禮拜)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기본적 의무이다.

예배의 대상

공예배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신명기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이사야 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이사야 45:5-7,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밖에 신이 없느니라. . . .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예레미야 10:10,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요한계시록 5:12-13,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 . .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예배와 제사

신약시대의 공예배는 구약시대의 성전 제사의 대치물인가? 그렇지 않다. 구약시대의 성전 제사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예표이며 또한 성도들의 신앙 생활의 상징이었다. 넓은 의미에서 공예배도 하나의 제사이지만, 예배만 제사라는 관념은 비성경적이다.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의 선한 삶 전체가 제사이며 그런 의미에서 예배도 제사일 뿐이다. 로마서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히브리서 13:15-16,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예배의 순서

공예배의 요소는 찬송, 기도, 설교 혹은 강론, 헌금 등이다. 고린도전서 14:26,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계시와 방언과 통역함은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중단됨).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히브리서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고린도전서 16:2,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 이익)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빌립보서 4:18, “에바브로디도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공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는 설교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단순히 예배 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악을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전도서 5:1,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사무엘상 15:22-2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누가복음 10:41-42,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그러나 한가지가 필요하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배의 목표

공예배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공예배가 성도에게 영적 유익을 주는 것은 단지 부수적일 뿐이다. 찬송과 기도도 그러하다. 우리는 예배 의식을 사람의 기분에 맞추려 하거나 회중을 즐겁게 하도록 조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공예배의 초점은 하나님께 대한 단체적 경배이다. 예배 시 설교까지도 목사는 두렵고 떨림으로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성실히 선포하려 해야 하고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심으로 받으려 해야 한다. 그럴 때 그것은 전하는 자나 받는 자들에게 은혜와 유익이 될 것이다.

예배의 방식

예배의 바른 방식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요 제사장이시다. 그를 통해서만 죄인이 구원을 받고, 그를 통해서만 성도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그를 섬기며 예배할 수 있다. 에베소서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히브리서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와 의를 힘입지 않고서 드려지는 예배는 다 인본주의요, 윤리 종교에 불과하다.

둘째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져야 한다. 요한복음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프뉴마)[성령 혹은 심령]과 진정(알레데이아)[진리 혹은 진심]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신약의 예배는 어떤 장소나 시간이나 형식에 구속되지 않고, 두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또 언제나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으며 어떤 외형적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인간의 부패성은 종교를 형식화하고 의식화(儀式化)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우리는 그러한 잘못을 경계해야 한다.



찬송

찬송의 정의, 요소, 목적

찬송이란 하나님을 높이어 노래하는 것, 곧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속성들과 그가 하신 일들을 인정하고 높이어 노래하는 것을 가리킨다. 찬송가 19장, “내 영혼아 찬양하라, 주님 앞에 엎드려/ 구속하신 넓은 은혜 높이 찬양하여라.” 찬송가 책에서 직접 하나님을 높이어 찬송하는 가사들은 55장 이전에 ‘찬양과 경배’라는 주제의 가사들과 73장부터 203장까지의 가사들 중의 다수이다.

성도의 노래들에는 하나님을 직접 찬송하는 것들뿐 아니라, ‘영적인 노래들’도 있다.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영적인]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도의 기도와 간증, 위로와 권면의 말이 여기 속한다. 찬송가 책의 많은 노래들은 이런 부류의 것이다. 예를 들어, 278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 자매 한 자리에 크신 은혜 생각하여 즐거운 찬송부르네. 내 주 예수 본을 받아 모든 사람 내 몸같이 환난 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세.” 이렇게 보면, 찬송가 책 이름은 ‘찬송가’라고 하기보다는 ‘찬송들과 영적 노래들’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성도의 찬송과 영적 노래는 물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 첫째 목적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부수적으로이지만 사람들에게 교훈과 유익을 주는 목적도 가진다.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 말씀의 원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며 모든 지혜로,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들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마음에 감사함으로 주께 찬양하라”고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찬송과 영적 노래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뿐 아니라, 회중에게 교훈을 주는 의미도 있음을 증거한다. 신명기 3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노래를 가르치게 하셨는데, 그 목적은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깨우치시기 위함이었다. 찬송과 영적 노래에는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교훈과 유익을 주는 목적도 있다.

찬송의 이유

우리는 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가? 첫째로,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므로 우리는 그를 찬송해야 한다.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자의 이름과 그 영광, 그 지혜와 그 능력의 무한하심, 그 선과 그 인자의 풍성하심을 마땅히 찬송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4:10-11,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구원자이시므로 우리는 그를 찬송해야 한다. 시편 96: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우리로 하여금 그를 찬송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에베소서 1:6, 12, 14,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해야 한다. 구원의 경험과 지식과 감격이 없는 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마다 그를 높이고 자랑하고 찬송해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5:9,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 . .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7:9-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요한계시록 14:1, 3,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 4천이 섰는데 . . .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救贖)함을 얻은 14만 4천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찬송의 방법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는 바른 가사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세상 음악은 단지 육신적 감정과 갈망을 토로하는 것이지만, 성도의 찬송과 노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과 하나님 앞에서 간증하고 감사하고 고백하며 간구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 가사의 노래나 찬송이 될 수는 없다. 찬송에서 가사는 곡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찬송가책의 노래들도 다 똑같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가사의 내용에 따라 더 가치 있는 것도 있고 덜 가치 있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찬송의 가사는 우선 복음 진리에 일치해야 한다. 그 내용은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특히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신 주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어야 한다. 속죄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며 진수이다. 그러므로 속죄의 찬송들은 가장 귀한 찬송들이다. 예를 들어, 145장, “오 거룩하신 주님.” 147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186장, “내 주의 보혈은.” 188장, “만세반석 열리니.” 189장,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196장, “날 구원하신 예수를.” 200장, “주의 피로 이룬 샘물.” 210장, “내 죄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403장, “나 위하여 십자가의.”

뿐만 아니라, 찬송의 가사는 성경의 교리 체계에도 일치해야 한다. 성경의 교리 체계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어떤 노래는 찬송이나 영적인 노래가 되기에 부적합하다(예를 들어,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 272장, “인류는 하나되게 지음받은 한 가족”). 자유주의 교단들과의 연합 활동은 이런 오류의 포용을 초래하였다. 신성한 찬송가 책 안에 찬송답지 않은 가사들이 포함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근심시키고 노엽게 할 일이다.

우리가 쓰는 통일찬송가는 한국교회의 영적 퇴보의 산물이다. 한국 교회가 여러 해 동안 썼던 새찬송가의 서문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1959년 예장 총회가 WCC를 탈퇴하고 에규메니칼 운동 반대를 결의한 후 그 때까지의 ‘합동찬송가’ 출판 사업도 에큐메니칼 계획의 하나라는 것을 선언하고 그와 인연을 끊음과 동시에 . . . . 이것은 영구히 한국 기독교계 보수 진영 전체의 찬송가책이 되기를 기원하고 끝이는 바이다.” 이것이 바른 정신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보수적 교회들은 이런 정신에서 퇴보하였다.

또 성령에 대한 어떤 찬송도 성경적 교리에 맞지 않는다(예를 들어, 172장, “빈들의 마른 풀같이.” 173장, “불길 같은 성신여.” 177장, “성령이여 강림하사”). 성령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이미 오셨고 그들 안에 영원히 거하시기 때문에 이 사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표현의 가사는 옳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성령의 오심을 간구할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 속에 오신 성령께서 우리 속에 충만히 역사하셔서 우리의 인격 전체를 주장하시기를 구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곡으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시편 96: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행위이다. 히브리서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러므로 예배와 찬송은 가장 좋은 방식으로 드려져야 한다. 빌립보서 1:10,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

음악의 아름다움은 질서와 조화와 안정성에서 나오며, 그것은 정상적 화음과 박자, 적당한 소리세기와 빠르기에서 나온다. 기본적 정상 화음은 도미솔, 도파라, 시레솔이며, 기본적 정상 박자는 강-약-중강-약(4박자의 경우) 혹은 강-약-약(3박자의 경우)이다. 불협화음이나 빈번한 싱코페이션의 사용, 과도한 소리세기나 빠르기는 질서와 조화와 안정성을 깨뜨리고, 결국 음악의 아름다움을 해친다.

음악의 조화와 안정성을 저버린 현대음악은 인간의 육신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음악은 될지 몰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곡으로서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 오락적인 음악은 옛날부터 우상숭배와 어우러졌다(출 32:6, 19). 그러므로 우리는 찬송과 영적 노래에 있어서 얼마큼 세속적일 수 있는가를 생각지 말고 가능한 한 세속적 풍조를 배격하고 가장 경건하고 아름다운 곡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세상 음악은 인간을 만족시키는 것이지만, 성도의 찬송과 영적 노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에베소서 5:19,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아름다운 목소리나 공교한 악기 연주가 진실한 믿음과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아름다운 목소리나 악기 소리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나 악기 연주를 원하신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이다(히 13:15).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원하신다. 때때로 외적으로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진실한 믿음과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 감동도 줄 것이다.

이와 같이 찬송은 성도의 영적 생활의 표현이므로 우리는 진실한 속죄 신앙을 가지고 늘 말씀과 기도로 은혜 충만함을 누리는 가운데 은혜의 찬송을 하나님께 올려야 하겠다. 난 지 몇 개월 만에 시력을 잃었던 파니 크로스비가 평생 약 8천개의 은혜로운 찬송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부터 할머니를 통해 성경을 많이 배웠고 주 예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늘 보는 첫 번째 얼굴이 나의 구주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라.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눈이 멀어 그를 더 잘 찬송할 수 있게 하기를 원하셨다고 믿는다. 내가 만일 시력이 있었다면 나는 결코 나의 찬송시들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중에는 그가 쓴 찬송시가 많이 있다.3)

 

현대 기독교 음악(CCM)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서 음악이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 이전에 술집과 댄스홀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종류의 음악들이 버젓이 교회 안에서 연주되고 있다. 이러한 음악의 변화는 우리 주변에 이미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그 증거를 수집할 필요는 없지만, 최근에 보도된 몇 가지 예들만 보자.

1994년 미국의 텍사스주 휴스턴 제일침례교회(담임목사: 죤 비새그노 박사; 남침례교단 소속)는 그 교회의 솔리드 록 카페에서 엘비스 대회와 비틀즈 음악 연주를 가졌다.4)

1998년 7월 25일 밤 미국의 달라스 제일침례교회(원로목사: W. A. 크리스웰; 남침례교단 소속)의 하드코어-어돈 연주회에서 청년들은 떠들석하게 춤을 추었다. 그 지역 신문은 보도하기를, “떠들석한 춤과 천둥 같은 기타들과 크리스챤의 경건으로 어울러진 연주회로 인해 그 교회의 부속건물인 장엄한 스펄젼 해리스 빌딩은 흔들린 것 같았다”고 하였다.5)

2000년 미국의 남침례교단의 신년 전야제 ‘유스링크 2000’은 일곱 지역들에서 삼일 밤, 이틀 낮 밀레니엄 축제로 치루어졌다. 네 개의 남침례교회 기관들에서 후원한 이 행사는 남침례교회 역사상 가장 큰 청년 모임이었다.6) 그 모임은 4만 6천명 이상의 남침례교회 청년들을 모았고 그들은 미국 내에서 알려진 ‘기독

교’ 록 밴드들에 의해 귀가 찢어지며 심장이 두근거리는 찬양과 예배 음악을 즐겼고 약 새벽 2시까지 웃으며 노래하며 소리치며 춤추었다.7)

현대 기독교 음악(CCM)의 다수는 록 음악이다. 록 음악은 1950년대에 생긴 것으로서 50년대에 엘비스 프레슬리와 60년대에 비틀즈로부터 80년대 마이클 잭슨까지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음악 형태를 가리킨다. 록(rock)이라는 말은 로큰롤(rock and roll, ‘흔들고 굴리라’)의 줄인 말이다. 이 말은 미국의 방송 음악 진행자인 알란 후리드(Aland Freed)가 처음 사용했는데 육체적, 성적 움직임을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8) 시카고 대학의 알란 블룸 교수는 “록 음악은 성적 욕망이라는 오직 한가지에 마음을 끈다”고 말한다.9)

록 음악10)의 한 특징은 드럼이나 씸벌즈나 기타를 사용한 반복적이고 자극적인 비트(두드림)에 있다. 촬

스 브라운은, “아마도 록 음악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것은 비트이다. 록 음악은 비트 때문에 다른 음악들과는 구별된다”고 말한다.11) 반복적인 비트는 사람의 감정을 강하게 몰아대고 자극한다. 록 음악의 다

른 한 특징은 당김음(약약강격)를 많이 사용하고, 불협화음이나 단조(短調)를 빈번히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음악의 질서와 안정성을 파괴한다. 록 음악의 또 하나의 특징은 고음(高音)과 시끄러운 소리이다. 대형 제트기는 이륙 시 대략 120데시벨(db)의 소음을 내며, 천둥소리의 최고 기록은 약 125데시벨인데, 록 콘서트에서의 고음은 대략 130-140 데시벨이라고 한다.12) 고음은 사람의 감정을 사로잡고 어지럽히

고 흥분시키고 격화시킨다. 또한 록 음악의 가사들은 폭력, 반항, 자살 권면, 마약, 음란, 사탄 숭배 등의 나쁜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현대 기독교 음악(CCM), 특히 크리스챤 록 음악은 세속적 록 음악과 매우 비슷하다. 현대 기독교 음악의 곡은 세속 음악과 별로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의 작곡 형식은 전통적 형식과 매우 다르다. 그것은 전통적 음악이 가지는 질서와 조화, 안정성, 아름다움 등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반복적, 자극적 비트와 리듬을 사용하며 또 당김음이나 불협화음과 단조를 빈번히 사용한다. 따라서 현대 기독교 음악은 매우 육감적이다.

O. T. 스펜스13)는, 거의 모든 복음성가들에 록 음악의 형식이 들어있으며 그것들은 대부분 은사주의자들

이 만들며 주로 사람의 감상적 체험과 느낌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가스펠 록은 육신적 음악이라고 평가한다. 또 그는 “[사람이] 현대 기독교 음악(CCM)에 젖으면 몇 년 후에 록 음악으로 갈 것이다”라고 경고한다.14)

하나님은 거룩하고 존귀하시다. 그는 무질서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고 질서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우상숭배자들은 오락적 춤과 노래를 좋아하지만(출 32:6, 19), 성도들은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해야 한다(시 96:9). 성도들의 찬송과 노래는 하나님 앞에서 부르는 것이므로 경건하고 질서와 안정성이 있고 조화와 아름다움을 가져야 한다. 성도의 노래는 세상의 것과 구별되어야 한다. 성경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하며(롬 12:2) 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말한다(요일 2:15). 성도의 노래는 결코 세상 노래처럼 자기만족적이거나 자기도취적이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 음악은 육신적 즐거움과 만족을 줄지는 모르나, 확실히 성도들의 찬송이나 노래로는 부적합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노래에 영향받은 현대 기독교 음악(CCM) 특히 크리스챤 록 음악과 그런 유의 복음성가들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 문화 속에 있는 죄악된 요소들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현대 복음송들의 곡과 가사를 신중하게 검토하며 선별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옛날부터 즐겨 불렀던 찬송가들을 부르도록 권장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노래해야 하지만, 그 노래들은 경건하고 조화롭고 안정적이고 아름다워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고 말한다(빌 1:10). 우리는 음악에서도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한다.



열린 예배

오늘날 교회들에서는 전통적 형식을 버리고 예배 시간에 멀티비젼, 드라마, 무용, 세속적 형식의 성가와 밴드를 도입하는 경향이 있다. 또 어떤 교회들은 ‘문화학교’를 개설하여 영어 회화, 꽃꽂이, 바이올린 등을 가르친다. 이런 경향은 예전부터 자유주의적 교회들에서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복음주의적이라고 하는 교회들에서도 볼 수 있다. 이것이 ‘영성’이 있는 활동이라고 선전된다. 또 교회들은 이런 방식으로 많은 청중을 모으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대형교회가 목회의 성공이라는 인식 속에서, 많은 목사들은 ‘여하튼 교회가 수적으로 커지고 봐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열린 예배’는 미국의 빌 하이벨스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고 릭 워런 목사에 의해 인기를 얻고 있는 예배 형식으로서 구도자들(seekers)을 위해 밴드와 현대음악, 멀티미디어와 드라마 등을 사용한 예배이다.15) 열린 예배의 특징은 시청각적 효과와 축제적 분위기이다.16)

열린 예배를 주장하는 이들은 교회의 외형적 구조 변경을 강조한다. 강대상을 큰 강대상 대신 작은 이동식 탁자로 대치한다. 의자는 등받침이 없는 것을 놓고 거기에 걸터앉는다. 강단을 무대로 전환하여 노래나 춤이나 연극을 할 수 있도록 요란스런 조명 세트를 장치한다. 조화 또는 생화로 강대상 좌우를 가득채운다. 대형 자막이나 전광판을 세우고 고도의 방송용 음향 장비를 설치한다.

에드 답손은 열린 예배가 형식에 매이지 말 것, 현대적일 것, 강요하지 말 것, 편안하게 해줄 것 등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형식에 매이지 않기 위해 목사나 안내 위원이나 성가대원은 모두 청바지나 또는 가벼운 옷들을 입으며, 현대적이기 위해 전자 기타, 드럼들, 심벌즈, 키보드 등을 사용하여 기독교적 록 음악을 연주한다. 또 강요하지 않기 위해 공개적으로 초청하거나 앞으로 나오도록 하는 부담을 주지 않는다. 또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강대상 주변을 단장하여 교회 강단처럼 보이지 않게 한다.17)

새들백 교회의 릭 워런은 1998년 한 세미나에서 전통적 교회를 극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로 변형시키려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1) 현대적 스타일의, 비(非)위협적 ‘구도자(求道者) 집회’가 전통적 일요일 예배를 대체해야 한다. (2) 복장은 평상복이어야 한다. (3) 음악은 현대적이어야 한다. (4) 설교는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똑같이, 종종 심리학과 격려적 성경본문을 섞는 설교 후에, 자신들에 대해 좀더 기분 좋게 생각할 수 있도록 오직 긍정적 내용이어야 한다. (5) 교회의 사역들은 대중의 필요를 충족시키도록, 우울증, 무절제한 식사, 불임(不姙), 동성애자들의 가족이나 친구, 낙태 후의 일, 별거(別居) 등을 위한 후원 그룹들을 가지고 준비되어야 한다. (6) 교리적 교훈은 일요일들에 교회 전체에게 주지 말고, 예배 시간과 별도로 소그룹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한다.18)

열린 예배를 보는 교회들은 찬송 대신 현대 기독교 음악(CCM), 곧 기독교 록 음악을 부른다. 릭 워런은 크리스챤 록 음악을 새 노래라고 말하며 새 노래를 부르라고 강조하면서 주장하기를, “음악은 현대적이어야 한다. 음악의 가사가 더 근래의 것이어야 할 뿐 아니라, 음악의 스타일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날마다 듣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새들백 교회의 음향시설, 밴드, 노래하는 이들과 연주 등 오락구성물은 어떤 세속적 록 연주회의 것과도 경쟁할 만하다. 릭 워런은 교회가 해야 할 첫 번째 일 중의 하나가 오르간을 밴드로 대체하는 것이며, 교회 찬양대는 독창 연주자를 배경 음악으로 후원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말하기를, 몰아대는 비트를 가진 큰 소리의, 쉰 목소리의 음악이 그의 회중이 듣는 종류의 음악이라고 하였다. 또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주말 집회 때 정말, 정말 소리가 크다. . . . 나는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낮추지 않을 것이다.’ 자 그 이유는, 어린아이 같은 대중은 음악을 느끼기를 원하지, 단지 그것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는 심지어 전통적 음악의 사용을 주장하는 것을 우상숭배의 죄와 동일시하였다.19)

릭 워런은 “여러분은 여러분의 음악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교회가 전도하기를 원하시는 종류의 사람들에게 맞춰야 한다”고 말하며 “우리는 클래식, 칸츄리, 재즈, 록, . . . 심지어 랩 음악을 사용했다”고 한다.20) 또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 교인(people)의 96퍼센트가 자기들이 중도적 성인 현대음악을 듣는다

고 말하는 것을 발견했다. . . . 우리는 우리가 전도하고 있는 자들을 설문조사한 후 우리의 구도자 집회들에서 찬송가를 부르지 않기로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21)고 한다. 이와 같이, 열린 예배는 기독교 2천년 역

사에 일찍이 없었던, 지금까지의 전통적 예배 의식과는 전혀 다른 예배이며 현대의 세속적 문화와 표현 방법을 도입한 새로운 예배 형태이다.22)

그러나, 열린 예배를 주장하는 자들의 말이 옳은가? 열린 예배가 과연 오늘 시대에 바람직한 예배 형식인가? 우선, 열린 예배가 정말 오늘날 바람직한 예배 형식이라면, 먼저 기도와 성경 연구와 신중한 토론을 통해, 목사들과 장로들이 임직서약 때 하나님 앞에서 수락했던 예배 모범을 고쳐야 할 것이다.23) 어떻게

 목사들이 하나님 앞에서 서약했던 예배 모범과 역행하는 예배 형식을, 신앙 양심의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 있는가?

더욱이, 성경에 비추어볼 때, 열린 예배와 이런 전도나 목회방식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찬송과 기도와 설교가 예배 순서이며 그 중에 설교가 가장 중요함을 보인다.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고린도전서 14: 26,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또 성경은 예배가 엄숙하고 질서 있게 드려져야 하고 예배 음악이 아름답고 안정되어야 함을 계시한다. 시편 96: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빌립보서 1:9-10,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고린도전서 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나 열린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한 예배가 아니고 충실한 설교가 빠진 인간 중심적이고 흥미 위주, 의식 위주의 예배이다. 그러므로 이런 예배는 비성경적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는 기쁨을 줄지 모르나 하나님께는 근심과 불쾌함을 드릴 것이 분명하다.24)

또한 교회의 문화적 행사들도 성경 교훈들과 초대 교회의 모범에 맞지 않는다. 교회는 본연의 임무가 있다. 그것은 예배와 영적 성장과 전도다. 특히 전도는 주님 자신의 사명이었고 그가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일이었다. 초대 교회는 이 일에 충실하였다. 어느 시대든지 교회는 오직 이 일에 충실해야 한다. 교회는 이 일에서 벗어나는 세속적 일들을 계획하거나 행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목회에서도 정확무오한 법칙이다. 혼란스런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 속에서도,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지시하는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인간적 지혜와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말고 성경의 교훈대로 예배드려야 하고, 또한 목사들은 인간의 지혜와 방법으로 목회하지 말고 성경의 교훈대로 목회해야 할 것이다.


 

제2계명

출애굽기 20:4-6,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제2계명에서 요구된 의무와 금지된 죄

[108문] 제2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무엇인가?

[답] 제2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제정하신 모든 종교적 예배와 규례를 받아들이고 준행하고 순수하고 온전하게 지키는 것; 특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와 감사; 말씀 읽는 것과 전파하는 것과 듣는 것; 성례들을 거행하고 받는 것; 교회 정치와 권징; 교회의 목회와 유지; 종교적 금식;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 또 그에게 서원하는 것; 또한 모든 거짓된 예배를 부인하고 미워하며 반대하는 것; 또 각자의 지위와 부르심에 따라서 그것과 모든 우상숭배의 기념물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109문] 제2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무엇인가?

[답] 제2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지 않으신 어떤 종교적 예배를 고안하고 의논하고 명령하고 사용하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승인하는 모든 것; 하나님 즉 삼위의 전체든지 그 중 어느 하나든지, 내적으로 우리 마음으로나 혹은 외적으로 어떤 피조물의 어떤 형상이나 모양으로나 표현하는 것; 그것을 경배하거나, 혹은 그것 안에서나 그것에 의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것; 거짓된 신에 대한 모든 표현과, 그것들에 대한 모든 경배나 그것들에 속하는 섬김, 우리 자신에게서 발명되고 채택되었든지, 혹은 비록 고대성(古代性), 관습, 헌신, 선의(善意)나 다른 어떤 구실의 이름 아래서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전통에 의해서 받은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부패시키거나 그것에 더하거나 그것에서 빼는 모든 미신적 고안물들; 성직 매매; 신성 모독;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와 규례들에 대한 모든 태만과 경멸과 방해와 반대이다.

 

[110문] 제2계명을 더 강화하려고 거기에 부가된 이유는 무엇인가?

[답]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신 말씀 속에 담긴, 제2계명을 더 강조하기 위해 첨가된 이유들은;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에 대한 정당하심 외에, 자신의 예배에 대한 그의 뜨거운 열심과, 영적 간음으로 여기시는 모든 거짓된 예배에 대한 그의 보복적 분노; 이 계명을 어긴 자들을,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로 여기시고 그들에게 여러 세대에 이르도록 벌하시겠다고 위협하시는 것과; 그것을 준행하는 자들을,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로 여기시고 그들에게 많은 세대들에 이르도록 긍휼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제사, 차례, 조상숭배

우리나라의 추석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명절이 되고 있다. 제사와 차례는 조상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행해지지만 실상 우상숭배에 해당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제사하면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겠지만, 어떤 이들은 믿음이 약해서 제사에 동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점을 알아야 한다.

첫째로,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제사한다고 그들의 영이 와서 음식을 먹거나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의 영은 돌아와 대접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제사나 차례로 결코 죽은 조상들을 위할 수 없다. 실상, 참된 효도는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해야 한다.

둘째로, 제사를 드리면 귀신들이 기뻐하며 영광을 받는다. 고린도전서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제사나 차례는 귀신에게 하는 행위요 귀신과 교제하는 행위이다. 성도가 귀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셋째로, 제사나 차례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숭배하는 것을 미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귀신을 섬기는 것을 노여워하신다. 그러므로 친지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다. 그 때 사람들의 마음은 상하지 않게 되겠지만, 하나님은 심히 노여워하신다. 하나님께서 노하실 때 그것이 사람에게 무슨 복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제사는 사람에게 복이 아니고 화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선친들이나 사랑하는 이들의 묘에 가서 절하거나 묘를 섬기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묘지를 둘러보고 풀을 자르고 깨끗하게 돌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또 명절을 당해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좋은 모습을 기억하고 음식을 같이 먹고 교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상 제물 문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에서 우상 제물에 관해 몇 가지 점을 강조한다. 첫째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4절). 우상은 어떤 신적인 존재나 어떤 초인간적 존재가 아니다. 이 세상에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둘째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의 생각을 가지고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양심이 더러워진다(7절). 우상의 생각을 가지는 것은 우상을 어떤 신적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상숭배이다. 그러한 생각은 마귀가 주는 헛되고 거짓된 것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건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다.

셋째로, 우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으로 연약한 형제를 범죄케 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했다(9절). ‘자유함’이라는 원어(엑수시아)는 ‘권리’라는 뜻이다.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먹을 자유와 권리가 성도에게 있을지라도, 그 행위가 연약한 자들에게 거리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으로 연약한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행동을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위해서도 죽으셨기 때문이며, 그를 넘어지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타종교인들에 대한 태도

세속사회는 사상적으로 다원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이런 사회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인들에 대해 사랑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타종교인들의 사상은 잘못된 것이지만, 실상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모든 사람의 사상이 그러하며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이 어두움과 무지 가운데, 허무함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그들은 우리가 전도하고 구원해야 할 대상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움이나 정죄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접근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며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계 안에는 이방 종교들에도 구원이 있다고 잘못 생각하며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종교 간의 대화 위원회 의장인 더크 멀더는 “당신은 불교인이나 힌두교인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느끼십니까?”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물론이죠, 물론이죠”라고 대답하였다25) WCC의 타종교들과 이념들과의 대화 위원회 의장인 웨슬리 아리아라자는 WCC를 통해 출판한 성경과 타종교인들이라는 그의 책에서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였다.26)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종교적 다원주의 혹은 혼합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방 종교의 신들은 참 신이 아니다(출 20:3; 신 4:39; 시 96:5; 사 43:10; 45:6). 이방 종교들은 헛되고 마귀적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엡 2:2-3). 여기에 전도의 필요성이 있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지 않는 유대교인들을 향해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요 8:24). 유대교인들이 그러하다면, 그 외의 다른 이방 종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마리아 숭배

천주교회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평범한 인간 이상으로 높이고 숭배한다. 천주교회는 우선,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와 승천을 주장한다.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선언하였고, 1950년 피우스 12세는 마리아의 승천을 선언하였다. 제2 바티칸 회의도 똑같이 선언하기를, “마침내 원죄의 모든 더러움 없이 보존된 그 순결한 동정녀는 . . . 그의 지상생애가 끝났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림을 받았다”고 하였다.27)

또한, 천주교회는 신도들에게 마리아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카톨릭 교리서에 보면,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항상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에게 신뢰하는 마음으로 각별한 공경과 기도를 드리고 모든 위험과 어려움에서 도와주시기를 청해야 한다”고 말하였다.28)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는 마리아에게 부당한 많은 칭호들을 돌린다. 제2 바티칸 회의는 선언하기를, “[마리아는] 그의 지상 생애가 끝났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림을 받았고 주님에 의해 만물 위의 여왕으로 존귀케 되었다”고 했다.29) 제2 바티칸 회의는 또 선언하기를, “하늘로 올림을 받은 후 그

는 이 구원하는 직책을 버리지 않으셨고 여러 가지 중보사역에 의해 계속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선물들을 가져다 주신다. . . . 그러므로 그 복된 동정녀에게 우리는 교회에서 변호자[보혜사], 돕는 자, 은혜 베푸는 자, 및 중보자 등의 명칭으로 빈다”고 하였다.30)

그러나 성경이 밝히 가르치는 대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기도해야 하며,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신적 경배와 기도를 올려서는 안 된다(출 20:3; 요 14:6; 행 4:12; 딤전 2:5). 마리아 자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에 불과하다. 누가복음 1: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높임을 볼 수 없다. 무리 중 한 사람이 ‘당신을 밴 태와 먹인 젖이 복이 있다’고 말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눅 11:27-28). 또 그의 모친과 형제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그의 모친을 다른 제자들보다 달리 특별히 높이지 않으셨다. 그는 오히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50).

그러므로 천주교회가 마리아에 대하여 신적 명칭과 속성을 돌리고 신적 영광을 돌리는 것, 특히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보혜사, 중보자, 천국의 문, 구원의 길, 천상천하의 어머니와 여왕 등으로 부르는 행위는 확실히 비성경적이고 우상숭배적이다.



현대적 우상: 돈, 과학, 육신적 쾌락

마리아상이나 불상 같은 우상들 뿐만 아니라, 또한 오늘날 돈이나 과학이나 육신의 쾌락이나 인간 자신이 우상이 되고 있다. 그것들은 현대적 우상이다. 많은 사람이 돈이나 스포츠나 영화나 성적 즐거움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때에 고통하는 때가 올 것인데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할 것이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딤후 3:1-5). 또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세상이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고 물질적 부요로 사치하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계 17:3; 18:2-3).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물질과 가정의 합법적 즐거움 외에 더 많은 물질적 부요와 육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탐심의 죄이다. 주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6:24). 또 사도 바울은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했다(골 3:5). 또 그는 디모데에게 말세에 물질주의적, 쾌락주의적 풍조를 분별하고 그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교훈하였다(딤후 3:5). 우리는 현대적 우상들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돈 사랑, 쾌락 사랑의 풍조를 물리쳐야 한다.


 

제3계명

출애굽기 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제3계명에서 요구된 의무와 금지된 죄

[112문] 제3계명에서 요구된 것은 무엇인가?

[답] 제3계명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그의 칭호들, 속성들, 규례들, 말씀, 성례들, 기도, 맹세들, 서약들, 추첨들, 그의 사역들 및 그가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는 그 외의 모든 것을, 생각과 묵상과 말과 글에 있어서 거룩함과 경외함으로, 거룩한 고백과 합당한 행실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자신과 타인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113문] 제3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무엇인가?

[답] 제3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하나님의 이름을 요구된 대로 사용하지 않음과; 그것을 무지하게, 헛되이, 불경하게, 속되게, 미신적으로 혹은 사악하게 언급함으로 남용함이나 그의 칭호들, 속성들, 규례들 혹은 사역들을 신성모독적으로 즉 위증함으로 사용함; 모든 죄악된 저주들, 맹세들, 서약들과 추첨들; 합법적인 경우에 우리의 맹세들과 서약들을 위반함과, 불법적 경우에 그것을 지킴이며;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에 대해 원망함과 불평함, 이를 호기심을 가지고 파고들거나 잘못 적용함;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것의 어느 부분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지 곡해하여 속된 농담들, 호기심의 혹은 무익한 질문들, 헛된 말다툼 혹은 그릇된 교리를 지지하는 데 쓰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나 피조물들이나 하나님의 이름 아래 포함된 어떤 것이든지 주문이나 죄악된 정욕과 행위들에 오용함이며;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와 도를 훼방하고 경멸하고 욕하거나 어떻게든지 반대함이며; 외식으로나 악한 목적으로 종교를 고백하는 것이며; 종교를 부끄러워하거나, 합당치 않고 지혜 없고 결실 없고 무례하게 행함으로써 종교에 수치거리가 되거나 종교를 배반하는 것이다.

[114문] 제3계명에 어떠한 이유들이 첨부되었는가?

[답] “너희 하나님 여호와”와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신 이 말씀에 나타나 있는 제3계명에 첨부된 이유들은, 그가 여호와시요 우리 하나님이시며, 그러므로 그의 이름이 우리에 의해 남용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지 오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특히, 비록 이 계명을 범한 많은 이들이 사람들의 비난들과 형벌들을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무죄자(無罪者)로 여기고 용서해주시기는커녕 그들로 하여금 그의 의로운 심판을 피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합법적 맹세와 서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장)

합법적 맹세(oath)는 정당한 경우에 엄숙히 맹세하는 자가 하나님을 불러 그가 주장하거나 약속하는 것을 증거하시게 하고, 그가 맹세하는 것의 진실됨 혹은 거짓됨에 따라 그를 판단하시게 하는 종교적 예배의 한 부분이다(신 6:13; 10:20; 마 26:63-64; 히 6:16).

하나님의 이름만 사람이 맹세해야 할 이름이며(사 65:16), 맹세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거룩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스럽고 두려운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되이 혹은 경솔히 맹세하는 것이나(레 19:12) 어떤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죄악되며 매우 미워해야 한다(렘 5:7; 마 5:34-36). 하지만, 중대한 일들에서 맹세는 구약 아래서 뿐만 아니라 신약 아래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보증되므로, 합법적 맹세는 합법적 권위에 의해 부과될 때 해야 한다(롬 1:9; 고후 1:23; 빌 1:8).

맹세하는 자는 누구든지 마땅히 그러한 엄숙한 행위의 중대함을 생각하고 그가 참되다고 완전히 확신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공언(公言)해서는 안 된다(렘 4:2). 또한 누구든지 선하고 옳은 것과, 그가 그렇다고 믿는 것과, 그가 행할 수 있고 행하기로 결심한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맹세로 속박되어서는 안 된다(창 24:2-9). 하지만, 합법적 권위에 의해 부과되었을 때 선하고 옳은 어떤 것에 관한 맹세를 거절하는 것은 죄이다(민 5:19-22).

맹세는 명백하고 일상적인 의미의 말로 해야 하고, 애매함과 생각의 보류(保留)가 없어야 한다. 그것이 죄를 짓도록 속박할 수는 없지만, 죄악되지 않은 어떤 것을 맹세했으면 비록 자신에게 해가 될지라도 이행할 의무가 있고(시 15:4), 이단자나 불신자에게 맹세했을지라도 그것을 어겨서는 안 된다(수 9:18; 삼하 21:1).

서약(誓約, vow)은 약속적 맹세와 같은 성질의 것이며 같은 종교적 조심성을 가지고 해야 하며 같은 신실성을 가지고 이행해야 한다.

서약은 어떤 피조물에게 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께만 해야 하고(렘 44:25), 그것을 받으시도록 자원함으로, 믿음과, 의무의 양심으로, 받은 자비에 대해서나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을 것에 대한 감사의 방식으로 해야 하며, 서약으로 우리는 필요한 의무들에, 또는 그 의무들에 적당히 도움이 되는 한 다른 것들에, 우리 자신들을 더 엄격히 속박한다(창 28:20-22; 삼상 1:11).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에 금한 것이나, 거기에서 명령된 어떤 의무를 방해하는 것이나, 그의 능력 안에 있지 않고, 그것의 이행을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의 약속을 받지 않은 것을 행하기로 서약해서는 안 된다(민 30:12). 이러한 점에서 영속적 독신 생활과 공언(公言)된 가난과 규칙적 순종에 대한 천주교의 수도원 서약들은 더 높은 완전의 수준이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며 어떤 그리스도인도 거기에 자신을 얽어매서는 안 될 미신적이며 죄악된 올무들이다(마 19:11-12; 고전 7:2, 9).


 

제4계명

출애굽기 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7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7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제4계명에서 요구된 의무와 금지된 죄

[116문] 제4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답] 제4계명이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 지정하신 시간, 특히 7일 중에 하루를 온종일 하나님께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데; 그것은 세상의 시작 때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때까지 주간의 일곱째 날이었고 그 후부터는 그 첫째 날이며 세상 끝날까지 계속 그러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며 신약성경에서 주의 날[주일]이라고 불린다

[117문] 안식일 혹은 주일은 어떻게 거룩히 지켜야 하는가?

[답] 안식일 혹은 주일은, 단지 언제나 죄악된 일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날들에 합법적인 세상적 직업들과 오락들로부터도 온종일 거룩하게 안식하며; (부득이함과 긍휼의 일들에 사용되는 것 외에는)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 대한 공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예배에 사용하는 것을 우리의 기쁨으로 여김으로써 거룩하게 지켜야 하며; 이를 위하여 우리는 그 날의 의무들을 위하여 더 자유롭고 적당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고 미리 부지런히 절제 있게 우리의 세상일을 배치하고 적절히 처리해야 할 것이다.

[118문]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왜 더욱 특별히 가장들과 기타 윗사람들에게 주어지는가?

[답]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더욱 특별히 가장들과 기타 윗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까닭은, 그들 자신이 그것을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통솔 아래 모든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는 지 보아야 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이 때때로 그들 자신의 일들로 저들을 방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119문] 제4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무엇인가?

[답] 제4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요구된 의무 가운데서 빠뜨린 모든 것들과 그것들에 대한 모든 부주의하고 소홀하고 유익되지 못한 수행과 그것들을 피곤해 하는 것; 그리고 게으름에 의해서와 그 자체가 죄악된 일을 행함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세속적 일들과 오락들에 관하여 모든 불필요한 일들과 말들과 생각들에 의해서 그 날을 더럽히는 모든 것이다.

[120문] 제4계명을 더 강화하려고 거기에 붙여진 이유는 무엇인가?

[답] 제4계명을 더 강화하려고 거기에 붙여진 이유는,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는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일들을 위해 7일 중 6일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그 자신을 위해서는 오직 하루를 남겨두신 그 계명의 공평성으로부터, 또 “제7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이라는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그 날의 특별한 타당성을 강조하심으로부터, 또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제7일에 쉬신 하나님의 모범으로부터, 또 하나님께서 그 날을 그의 예배를 위한 날이 되도록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그것이 우리에게 복의 수단이 되도록 정하심으로써 그가 그 날에 주신 복으로부터 생각된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121문] 왜 제4계명의 시작에 기억하라는 말씀이 있는가?

[답] 제4계명의 시작에 기억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기억함으로써 얻는 큰 유익 때문인데, 그것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지키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다른 모든 계명들을 더 잘 지키고, 또한 신앙의 간략한 요지인 창조와 구속(救贖)의 큰 두 가지 은택을 계속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하도록 준비하는 데 도움을 얻기 때문이며; 또한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그것을 매우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인데,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본성적 빛[지식]이 더 적지만 그것이 다른 때들에 합법적인 일들에 대해 우리의 본성적 자유를 통제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7일 중 한번만 오며 많은 세속적 일들이 그 사이에 와서 그것을 준비하거나 그것을 거룩하게 하도록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게 너무 빈번히 우리 마음을 빼앗기 때문이며; 또한 사탄이 그의 수단들로 그것의 영광과 심지어 그것의 기억을 지워버려 모든 불경건과 불신앙을 들여오려고 심히 노력하기 때문이다.



성수 주일(聖守主日)

구약의 안식일

오늘날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구약시대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을 본받은 것이다. 십계명의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것이다(출 20:8). 구약의 안식일은 어떻게 지켰는가?

첫째로, 시간은 제7일 하루 종일이었다. 출애굽기 20:9-10,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7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 .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구약에서 하루는 저녁부터 저녁까지로 보았다(레 23:32).

둘째로, 대상은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었다. 출애굽기 20:10,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셋째로, 이유는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시 제7일에 쉬셨고 그 날을 구별하여 복 주셨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7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넷째로, 방법은 세속적 일들을 중단하고 쉬며 성회(聖會)로 모이며 특히 매매(賣買)나 오락을 금하는 것이었다. 출애굽기 23:12, “너는 6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7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출애굽기 34:21,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7일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출애굽기 35:3,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레위기 23:3,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성회(聖會)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그의 말씀을 듣는 모임을 가리킨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훈련과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하였다. 느헤미야 13:15-22에 보면, 안식일에 노동이나 매매하는 일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므로 금지되었다. 이사야 58:13-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다섯째로, 벌칙은 사형이었다. 출애굽기 31:14-15,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7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민수기 15:32-36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통과할 때 안식일을 어기고 나무하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돌로 쳐 죽임을 당하였다.

여섯째로, 중요성은 언약의 표이었다. 출애굽기 31:16-17,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에스겔 20:10-26에 지적된 이스라엘 백성의 죄는 특히 하나님의 언약의 표인 안식일을 더럽힌 것이었다(13, 16, 21, 24절; 겔 22:8; 23:38).

일곱째로, 예표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안식이다. 안식일 계명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하고 영원한 안식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참된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성수 주일(聖守主日)의 근거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참 안식을 예표하였다. 이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죄의 결과로 왔던 땅의 저주와 인생의 수고와 죽음(창 3:17)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으로 극복되었다. 주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참 안식을 주셨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마가복음 2:28,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31)

초기의 교부들은 관례적으로 이 계명을 예표라고 불렀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된 한 날의 외적 준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 . . 말하자면 그는 안식일의 참된 성취이시다. . .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미신적인 날들의 준수를 완전히 피해야 한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은 또한 성회로 모이는 날, 즉 하나님께 공적 예배를 드리는 날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구약 안식일의 성취는 위축된 경건 생활로의 성취가 아니고 풍성한 경건 생활로의 성취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 자원적으로 하루 이상을 구별하여 지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 가운데 주일을 교회의 공적 예배의 날로 주셨으므로, 신약의 성도들은 짐스러운 마음으로가 아니고 자원함과 즐거움으로 이 날을 거룩히 지켜야 할 것이다.

칼빈은 강조하기를, 안식일 계명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으나 오늘날도 교회의 공적 모임이 여전히 필요하며 따라서 신약교회는 주일을 공적 모임의 날로 힘써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32) 또 개혁교회

의 정통적 도르트 대회(1618-19년)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의 제4계명에는 의식적 요소와 도덕적 요소가 있다. 의식적 요소는 창조 이후 제7일의 휴식과,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그 날의 엄격한 준수이었다. 도덕적 요소는 어떤 특정한 날이 종교를 위해 적합하다는 사실과, 그 목적을 위해 종교와 그것의 거룩한 묵상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휴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폐지되었으므로, 주일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엄숙하게 성별되어야 한다. 사도들의 시대 이후, 그 날은 이미 초기의 카톨릭 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다.3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7은 안식일에 관해, “그것은 세상의 시초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때까지는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고, 그리스도의 부활 때부터는 주간의 첫째 날로 바뀌었고 성경에서 주일로 불리고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서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약성경은 교회의 공적 모임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또 엿새 동안의 육체적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은 신약시대에도 필요하다. 초대 교회는 모이는 교회로서 후시대를 위해 본이 된다. 사도행전 1:13-15,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 . .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모인 무리의 수가 한 120명이나 되더라.” 사도행전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도행전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교회는 모이는 데 의미가 있고 모일 때 힘이 있다. 교회는 모이지 않으면 무의미하고 무기력하다. 교회는 모여야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고 교제할 수 있다. 교회는 모일 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성령의 감동의 역사가 일어난다. 마귀는 교회의 모임을 두려워하며 그것을 폐하려 한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모여야 한다. 히브리서 10:23-25,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교회는 공적 예배의 날이 필요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과 안식을 위해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곧 주일을 신약교회의 공적 예배의 날로 주셨다.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도 시대로부터 일곱째 날 대신 첫째 날 곧 주일에 모이기를 시작하였다. 드로아의 성도들은 안식일 후 첫째 날 곧 주일에 떡을 떼려고 모였다(행 20:7).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매주 첫날 곧 주일에 각 사람이 이익을 얻은 대로 헌금하라고 교훈하였다(고전 16:1-2).

하나님께서 주일을 구별하셨다는 추가적 증거들도 있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인 오순절은 주일이었다(행 2:1-4; 레 23:15-16). 또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날이 ‘주의 날’ (계 1:10) 곧 주일이었다.

사도시대 직후의 여러 교부들도 주일 집회에 대해 말하였다. 주후 70-100년경 바나바 서신의 저자는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8일을 기쁨으로 지킨다”고 말하였다.34) 2세기초 익나시우스도 “만일 옛 습관

들로 살았던 자들이 새로운 소망에 이르러, 더 이상 안식일들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따라 그들의 삶을 산다면 . . .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를 떠나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35)

순교자 저스틴(165년경에 순교)도 “그 도시에 사는 자들뿐 아니라 그 나라에 사는 자들도 다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날에 성경 읽기와 기도와 권면과 성찬을 위해 모이곤 하였다. 그 회중은 일요일에 모였는데, 그것은 이 날이 하나님께서 어두움을 변화시켜 세상을 창조하신 첫째 날이기 때문이며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36) 2세기말, 터툴리안도 “우리는 일요일을 기쁜 날로 즐거이 지킨다. 주일에 우리는 금식하거나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37)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교회의 공적 예배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하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이 식어지면 교회는 쇠잔해질 수밖에 없다. 대체로 주일 없이 사는 자는 하나님 없이 사는 자리로 나아간다. 주일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회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사회로 타락하고 말 것이다.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 죤 라일은 말하기를, “영국 기독교의 번성과 부패는 기독교인의 안식일 보존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대의 안식일을 제거해 보라. 그러면 그대의 종교는 곧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일반적 규칙으로, 사람의 걸음은 안식일 없는 데(No Sabbath)로부터 하나님 없는 데(No God)로 나아간다”고 하였다.38)

우리는 교회의 공적 예배들과 우리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주일을 매우 귀하게 생각하고 거룩히 구별해야 한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들 간의 거룩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 이 날에 교회로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성수 주일의 방법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주일을 거룩히 지킬 수 있는가? 첫째로, 우리는 주일을 온종일 지켜야 한다. 출애굽기 20:10, “제7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장로교회의 예배모범은 “이 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라고 말한다(1로, :2).

둘째우리는 온 가족이 주일을 지켜야 한다. 출애굽기 20:10,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부모는 교회에 나와 주일을 지키지만 자녀가 학교나 학원에 가거나 집에서 텔레비젼을 보거나 놀이터에서 논다면, 또 자신은 주일을 지키지만 자신의 가게나 사업체를 주일에도 열고 직원들로 일하게 한다면, 그것은 성수 주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일에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과 우리가 경영하는 곳의 직원들도 쉬게 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우리는 주일에 세속적 일을 중단해야 한다. 출애굽기 20:10,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은 주일에 쉬는 직업과 직장을 구해야 한다. 또 자신의 권한 안에 있는 일은 주일에 쉬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주일을 거룩히 지키며 버는 돈이 복된 돈이다. 주일을 저버리고 번 돈은 어느 날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일주일 내내 일하며 돈을 벌어도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신 돈만 복되다.

의사의 응급실 근무, 군인과 경찰 등의 비상근무 등 직업상 부득이 주일에도 일해야 할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주일을 지키도록 애써야 하고 부득이한 경우 그 형편과 처지에 따라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주부는 부득이한 것 외에는 주일에 빨래나 대청소를 하지 말고 학생은 주일에 학교나 학원에 나가지 말고 시험공부도 쉬어야 한다. 우리는 주일에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사 먹는 일 등도 하지 말아야 하며(느 13:15-17) 자동차 주유도 미리 해야 한다. 성도는 주일에 세상의 회의나 행사나 잔치 등에 참여하지 않고 축구나 테니스 등의 운동이나 등산, 낚시, 텔레비젼 시청, 영화 감상, 스포츠 관람 등도 피해야 한다.39)

이사야 58:13-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장로교회의 예배모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리 육신의 모든 사업을 정돈하고 속히 준비하여 성경에 가르친 대로 그 날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없게 하라(1:1).

종일토록 거룩히 안식하고 위급한 일밖에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폐할지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1:2).

먹을것까지라도 미리 준비하고 이 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1:3).

넷째로, 우리는 주일에 교회의 공적 예배들에 참석해야 한다. 교회는 오전에 뿐만 아니라 오후에도 모여야 할 것이다. 교회의 공적 모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도들이 영적으로 자라고 새로워지는 시간이다. 교회의 공예배 시간을 귀중히 여기며 지키는 자는 영적으로 자랄 것이지만 그 시간을 소홀히 여기며 자주 빠지는 자는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고 영적 손실이 클 것이다.

장로교회의 예배모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1:2).

주일 아침에는 개인으로나 혹 권속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히 저희 목사가 그 봉직하는 가운데서 복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함으로 공동예배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준비하라(1:4).

개회 때부터 일심 단합함으로 예배 전부에 참여하기 위하여 정한 시간에 일제히 회집함이 옳고 마지막 축복 기도할 때까지 특별한 연고 없이는 출입함이 옳지 않다(1:5).

이와 같이 엄숙한 태도로 공식예배를 마친 후에는 이 날 남은 시간은 기도하며 영적 수양서를 읽되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며 묵상하며 성경문답을 교수하며 종교상 담화를 하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불신자에게 전도하며 경건하고 사랑하며 은혜로운 일을 행함이 옳다(1:6).

끝으로, 성수 주일은 그리스도인의 순종과 불순종, 성공과 실패의 시험물이다. 신약시대의 성도는 구약시대의 성도보다 더 큰 은혜를 받은 자이므로 하나님께서 여러 날을 지키라고 명하셔도 지켜야 할 터인데, 주일 하루를 거룩히 지키라 하시니 그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요 특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으로 주일을 거룩히 지키자!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참고도서

Bannerman, James. The Church of Christ. Vol. I. Banner of Truth Trust, 1960. pp. 392-405.

Beckwith, R. T. and Stott, W. The Christian Sunday. Baker, 1978.

Carson, D. A. ed. From Sabbath to Lord's Day. Zondervan, 1982.

Edwards, Jonathan. "The Perpetuity and Change of the Sabbath," Works. 1834. Reprint,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4. Vol. II, pp. 93-103.

Hessey, James A. Sunday: Its Origin, History, and Present Obligation. Bampton Lectures, 1860.

Holwerda, D. E. ed. Exploring the Heritage of John Calvin. Baker, 1976.

Jewett, P. K. The Lord's Day. Eerdmans, 1971.

Lee, F. N. The Covenantal Sabbath. Lord's Day Observance Society, 1972.

Murray, John. "The Sabbath Institution," "The Pattern of the Lord's Day," "The Relevance of the Sabbath,"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Vol. I, pp. 205-228.

Owen, John. Exercitations on the Epistle to the Hebrews. in The Works. Goold's Edition. Vol. XIX, pp. 264-460.

Ryle, J. C. "The Christian Sabbath, or Lord's Day," Knots Untied. Cambridge: James Clarke, 1977.

Warfield, B. B. "The Foundations of the Sabbath in the Word of God." in Selected Shorter Writings. Vol. I. pp. 308-324.

Wilson, Daniel. The Divine Authority and Perpetual Obligation of the Lord's Day, 1830.


 

의식법들--절기

구약의 율법에는 도덕법, 재판법, 의식법(儀式法) 등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에 의식법은 할례, 성막 제도, 제사, 절기, 음식, 정결, 십일조 등에 대한 법이다. 의식법은 일차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특히 그의 속죄사역을 모형적, 예표적으로 보이며, 도덕법에 의해 드러난 죄를 씻는 방법을 예시한다.

그러나 의식법은 또 도덕적 교훈도 준다. 예를 들어, 할례는 언약에 당연히 내포된 성결과 순종을 교훈한다. 제사들은 일차적으로 속죄를 예표하지만 또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과 헌신과 감사와 교제의 삶도 교훈한다. 절기들은 우리의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교훈하며, 정, 부정의 음식에 관한 법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교훈한다. 또 십일조는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임을 교훈한다.

의식법이 보이는 도덕적 교훈들은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우리는 눈과 귀와 마음의 할례를 받아 거룩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과 헌신과 감사를 드리며 그와 항상 교제해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며 섬겨야 한다. 또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물질적 소득의 십분의 일뿐 아니라 그 이상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구약의 의식법 자체는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고 그것은 더 이상 신약 성도를 속박하지 않는다. 신약 성도는 더 이상 구약의 의식법의 의무 아래 있지 않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3은 “이 모든 의식법은 이제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고 말했다.

특히 히브리서는 의식법을 포함하여 율법 제도의 폐지를 분명히 가르쳤다. 히브리서 7:18-19,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브리서 8: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다음의 성경 구절들도 이 사실을 밝히 증거한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안식일들]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로마서 14:5-6,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전통사본]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그러므로 어떤 이가, 예를 들어, 오늘날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성경에 명령된 바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잘못이다. 성경에는 유월절만 지키라고 명령하지 않고 열 가지의 절기들에 대해 다 명령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할례와 제사도 명령하였다. 우리가 구약의 의식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순종하는 것이다.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구약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고 지키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면 신약 교회에서 부활절이나 맥추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을 지키는 것은 잘못이며 무의미한 일인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들을 지킨다면, 그것은 그것들이 성경에 명령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단지 그것들이 가지는 종교적 의미와 유익 때문이다.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고, 맥추절은 겨울이 지난 후 처음 한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고, 추수감사절은 가을에 하는 모든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다. 성탄절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다. 그런 절기들은 교회가 스스로 정하여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절기들을 지키거나 안 지키는 것 때문에 서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십일조

십일조는 십분의 일이라는 뜻이다. 십일조(十一條)의 ‘조’(條)라는 말은 ‘세금’(租)이라는 뜻이 아니고 ‘가지’라는 뜻이다. 십일조라는 말은 단순히 열 개 중의 하나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헌금의 표준으로 소득의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령하셨다. 구약성경에서 십일조에 관해 교훈하는 대표적 구절은 다음과 같다.

레위기 27:30-33,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贖)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그 우열(優劣)을 교계(較計)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贖)하지 못하리라.”

신명기 14:22-23, 28-29,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 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말라기 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는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들이나 소나 양의 새끼들 등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말라기서에 증거된 대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의 집에 드려야 한다(말 3:8-10). 십일조는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 생활비로 쓰게 하였고, 레위 사람들의 십일조는 제사장들에게 주어 생활비로 쓰게 하였다(민 18:21, 26, 28). 또 매 3년 끝에는 십일조를 저축하여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로 먹게 하였다(신 14:28-29). 이것은 아마 매년 드리는 십일조에 추가되는 것일 것이다.

십일조나 첫열매의 헌금은 하나님의 풍성한 복이 약속되어 있다. 말라기 3:10,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잠언 3: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구약의 의식법은 신약 아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고 따라서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 법들에 담긴 원리들은 신약 아래서도 우리의 생활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명하신 최소한의 헌금이다. 구약의 율법은 우리의 생활 원리를 보인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라고 해서 너무 반작용하여 물질적 소득 전부를 내가 쓸 수 있는 돈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십일조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지만 구약시대보다 못한 방향으로가 아니라 더 풍성한 방향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헌금은 십일조 이상이 바람직하다. 구약보다 더 풍성한 은혜를 받은 신약 성도는 소득의 십일조 이상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40) 고린도후서 8:7, “오직 너

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헌금하는 일]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십일조와 첫열매에 대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도 신약 성도에게 적용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먼저 그에게 드려야 할 것이다.




제5-10계명의 요약

[122문] 사람에 대한 우리 의무를 포함하는 나머지 여섯 가지 계명의 대강령은 무엇인가?

[답]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포함하는 나머지 여섯 가지 계명의 대강령은 우리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우리도 남을 대접하는 것이다.



형제 사랑, 이웃 사랑, 원수 사랑

마태복음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사랑은 인간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하였다(롬 13:8-10).

형제 사랑

우선, 우리는 믿는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요 13:34). 주님의 사랑은 자신을,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 주신 희생적 사랑이다(마 20:28; 마 26:26, 28). 그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시며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셨다(엡 5:2). 이 사랑을 본받아 형제를 사랑하라고 교훈하신 것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4-7에서 사랑에 대해 잘 설명하였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친절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보기 흉하게]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또 그는 로마서 12:9-10에서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말했고,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같은 감정을 가지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하였다(벧전 3:8).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은 우리가 주 예수의 제자라는 표가 되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3:35).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의 제자가 아닐 것이다.

또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어두움에서 나와 빛에 거하는 증거이며(요일 2:9-10),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온 증거이고(요일 3:14),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합당한 응답이며(요일 4:10-11),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라고 말하였다(요일 4:20-21; 5: 3). 서로 사랑하는 것은 모든 성도의 필수적 덕목이다.

이웃 사랑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도, 아니 우리 주위의 모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주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웃 사랑을 교훈하셨다.

누가복음 10:33-35, 37,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비용]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웃 사랑과 선행이 영생의 조건은 아니지만, 예수의 십자가 구속(救贖)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받은 성도는 사마리아인처럼 어려움당한 이웃을 사랑하며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가장 큰 사랑은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전도하는 것이다. 무지와 죄로 인해 영원한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는 그들을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전도는 가장 중요한 이웃 사랑의 행위이다. 직접 나가 말로 전하지 못하나 전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는 것도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웃 사랑은 그밖에 이웃을 돕는 여러 가지 봉사와 구제의 행위로 표현된다. 성도는 기회 있는 대로 봉사와 구제에 힘써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교훈하기를,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하였다(갈 6:10). 히브리서 13:1-2, 16은 말하기를,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고 하였다.

원수 사랑

우리는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주께서는 교훈하시기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전통본문)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다(마 5:44-48).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다(롬 12:17-21).



용서

사랑과 용서

사랑의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용서이다.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요 13장). 그것은 그들에게 용서의 본을 보이신 것이었다. 발을 씻기는 것은 용서를 상징하였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그 형제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인간 관계에서 상대의 실수와 허물을 용서함이 없다면, 인간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다 깨어지고 말 것이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가르쳤다(골 3:12-14). 성도의 교제에 있어서 사랑과 용서는 서로 뗄 수 없이 상관되어 있다.

용서의 중요성

주께서는 용서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가르치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라고 말씀하셨고(마 6:12),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덧붙여 말씀하셨다(마 6:14-15). 즉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받는 자가 될진대, 우리는 반드시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야 하며, 만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치 않으실 것이라고 경고하신 말씀이다. 이와 같이 용서는 성도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이다.

용서의 근거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야 할 근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8장에 기록되어 있는 빚 탕감의 비유를 통해 이 사실을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1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자는 우리에게 100데나리온 빚을 진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셨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며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다. 1데나리온을 오늘날 노동자의 품삯으로 환산하여 약 6만원만 쳐도 1만 달란트는 6,000만 데나리온으로서 약 3조 6천억원에 해당하지만, 거기에 비해 100데나리온은 600만원에 불과하다. 그 둘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크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했던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의 잘못을 기꺼이 용서해주려고 해야 할 것이다.

용서의 횟수

우리는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는가? 주께서는 누가복음 17:3-4에서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18:22에서는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형제가 우리에게 잘못을 범할 수 있지만 회개한다면 언제든지 용서하며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아니,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즉 무한하게 용서해야 한다고 교훈하신 것이다.



친구

사람의 삶의 여정에서 친구는 매우 중요하다.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잠언 18:24,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좋은 친구

좋은 친구는 사람에게 유익을 준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잠 13:20).  잠언 27:5-6,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잠언 27:9,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전도서 4:9-10, 12,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아브라함은 롯의 삼촌이지만 그에게 좋은 친구 이상이었다. 그는 롯과 헤어질 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하며 양보심을 발휘하였다(창 13:9). 또 그는 롯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그 가신(家臣)들과 함께 쫓아가서 조카 롯을 구출하였다(창 14:14-16). 또 하나님께서 소돔성을 멸하려 하실 때 그는 그에게 나아가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하며 롯을 생각하며 간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구원해주셨다(창 19:29).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백성에게 좋은 친구 이상이었다. 그는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큰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을 위해 간구하여 그의 진노를 막았다(출 32:14). 또 그는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라는 간곡한 기도까지 하였다(출 32:32).

다윗과 요나단은 신하와 왕자(王子)의 관계이지만 또한 좋은 친구 관계이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다(삼상 18:1, 3; 20:16-17). 그는 자기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에게 범죄치 말 것을 간청하였다(삼상 19:4). 그는 숲속에 피신 중인 다윗에게 찾아가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라고 격려했다(삼상 23:16). 다윗은 요나단의 중심을 알았기 때문에 헤어질 때 요나단보다 더 심하게 울었다(삼상 20:41). 그는 요나단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사랑이 참으로 컸음을 고백하였다(삼하 1:26).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요나단의 아들 절뚝발이 므비보셋을 왕자들 중 하나처럼 자기 밥상에서 먹게 하였고 그의 모든 재산을 회복시켜주었다(삼하 9:7-11).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이면서 좋은 친구 이상이었다. 사도 바울은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증거하였다(빌 2:20-22).

나쁜 친구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좋은 친구들이 있는 반면, 나쁜 친구도 있다. 상대에게 해를 끼치는 친구나 죄 짓게 하는 친구는 나쁜 친구이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뱀은 하와의 친구는 아니나 나쁜 교제가 어떤 나쁜 결과를 주는지에 대한 좋은 예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부정한 뱀의 나쁜 말은 마침내 하와 속에 의심을 심었고 불순종을 가져왔다. 고린도후서 11: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광야에서 모세를 대적했던 레위의 증손 고라와 르우벤 자손 다단과 아비람과 온은 나쁜 친구들의 예이었다(민 16:1). 그들은 악한 일을 위해 당을 지었고 하나님과 그가 세우신 모세를 대항하였다.

다윗의 아들 암논에게는 요나답이라는 심히 간교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암논에게 잘못된 조언을 해서 그로 이복 누이동생 다말을 범하게 하였고 그 때문에 결국 다말의 오빠 압살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삼하 13장).

유다 왕 여호사밧은 악한 이스라엘 왕 아합과 더불어 연혼(連婚)하고 친근히 지내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였다(대하 18:1; 19:2). 또 이로 말미암아 유다 왕국에 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들어왔고 그것은 결국 유다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가룟 유다는 나쁜 친구의 한 예이다. 그는 삼년 동안이나 따르던 주님을 배신하고 은 삼십을 받고 그를 넘겨주기로 약속하고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 그에게 나아와 인사하며 입맞춤으로 그를 넘겨주었다(마 26:14-16, 49-50). 또 유대의 지도자들도 나쁜 친구들의 예이다. 그들은 새벽부터 모여 예수를 죽일 의논을 하였다(마 27:1).

좋은 친구와 사귀고 나쁜 친구를 멀리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교제]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말했고(고전 15:33) 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고후 6:14).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

성도가 영적 교제를 나눌 좋은 친구를 가지기 어려운 시대도 있다. 엘리야나 미가야 같은 선지자들은 좋은 친구를 많이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사도 바울은 말년에 외로운 사역의 걸음을 걸었다(딤후 1:15; 4:9-11, 16).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 중에는 좋은 친구들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크게 여겼고 하나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고 부르셨다(사 41:8; 대하 20:7; 약 2:23). 또 예수께서는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셨다(눅 12:4; 요 15:14-15). 요한복음 15:14-15,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성도는 나쁜 친구를 멀리하고 좋은 친구와 사귀어야 하고 또 상대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또 특히 좋은 친구가 없을 때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친근히 하며 교제하자.



제5계명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제5계명에서 요구된 의무와 금지된 죄

[124문] 제5계명에 있는 부모는 누구를 뜻하는가?

[답] 제5계명에 있는 부모는 혈육의 부모뿐 아니라 연령, 은사의 모든 윗사람과 특히 하나님의 규례에 의하여 가정, 교회, 국가를 막론하고 우리 위에 권위의 자리에 있는 자들을 뜻한다.

[125문] 왜 윗사람을 부모라 칭하여야 하는가?

[답] 윗사람을 부모라 칭함은 아랫사람에 대한 모든 의무를 가르쳐 육신의 부모같이 그 관계에 따라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부드럽게 대하게 하고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그들 자신의 부모에게 하듯 자기 윗사람에 대한 의무를 더욱더 기꺼이 유쾌하게 행하게 하려 함이다.

[126문] 제5계명의 일반적 범위는 무엇인가?

[답] 제5계명에 일반적 범위는 아랫사람, 윗사람 혹은 동등자로서 상호관계에서 우리가 서로 지고 있는 의무를 행하는 것이다.

[127문]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어떻게 존경을 표시해야 하는가?

[답]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표시해야 할 존경은 언행심사 간 모든 합당한 경의와 그들을 위한 기도와 감사, 그들의 덕행을 본받음과 그들의 합법적인 명령과 권고에 즐거이 순종함과, 그들의 징계에 당연히 굴복함과 그들의 여러 등급 및 그들의 지위의 성질에 따라 윗사람의 인물과 권위에 충성하고 옹호하며 지지함과 그들의 연약성을 참고, 이를 사랑으로 덮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들과 그들의 다스림에 영예가 되게 함이다.

[128문]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하여 범하는 죄는 무엇인가?

[답]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짓는 죄는 그들을 향해 요구되는 의무에 대한 모든 소홀함; 그들의 합법적 조언과 명령과 질책에 있어서 그들의 인격과 지위에 대한 시기와 경멸과 반항; 저주함, 조롱함, 그리고 그들과 그들의 다스림에 수치와 불명예로 판명되는 그런 모든 다루기 힘들고 부끄러운 태도 등이다.

[129문] 아랫사람에 대해 윗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

[답] 윗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권세와 그들이 가진 관계에 따라서 그들의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며, 그들을 가르치고, 권고하고, 훈계하며, 잘하는 자들을 격려하고, 칭찬하고, 포상하며, 잘못하는 자들을 반대하고 책망하고 징벌하며, 영혼과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들을 위하여 보호하고 예비하며, 정중하고 지혜롭고 거룩하고 모범적인 태도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자신들에게 영예가 있게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권위를 보존하는 것이다.

[130문] 윗사람의 죄란 무엇인가?

[답] 윗사람이 짓는 죄는, 요구된 의무를 소홀히 하는 일 외에 자기 자신들, 자기 자신들의 명예, 평안함, 유익 혹은 쾌락을 과도히 추구함과 불법하거나 아랫사람의 권한에 있지 않는 일을 하라고 명령함이며, 악한 일을 권고하고 격려하거나 찬성함이며, 선한 일을 못하게 말리며 낙심시키거나 반대함이며, 그들을 부당하게 징계함이며, 부주의하여 잘못된 일, 시험, 위험에 그들을 내놓거나 내버려둠이며, 그들을 격동하여 격분케 함이며 혹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들 자신을 욕되게 하거나, 불공평, 무분별, 가혹하거나, 태만한 행동으로 그들의 권위를 삭감함이다.

[131문] 동등자의 의무는 무엇인가?

[답] 동등자의 의무는 피차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여 피차 경의를 표하며, 피차 받은 바 은사 및 승진을 자기 자신의 것처럼 기뻐하는 것이다.

[132문] 동등자끼리의 죄는 무엇인가?

[답] 동등자끼리의 죄는 명령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람의 가치를 과소평가함, 그의 은사를 질투함, 그의 승진이나 형통을 슬퍼함; 무리하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려고 함이다.

[133문] 제5계명을 더욱 강화하도록 부가된 이유는 무엇인가?

[답]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말씀에 담긴 제5계명에 부가된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 자신의 선을 이룰 수 있는 한에 있어서 이 계명을 지키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려는 장수와 번영의 분명한 약속이다.



효도

효도는 성경에 명시된 하나님의 명령인 동시에, 자식을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의 노고(勞苦)에 대한 자식편에서의 마땅한 보답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5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셨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고 보답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십계명의 제5계명은 인간관계에 관한 계명 중의 첫 계명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관계의 윤리의 시작이다. 가정 윤리는 사회 윤리의 시작이다. 가정이 바로 서야 사회가 바로 서며, 가정이 바로 서려면 먼저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불경건이 모든 부도덕의 근본이듯이, 불효는 인간관계의 악 중에 첫 번째 악이다. 자녀가 가정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그들의 교훈을 순종하면, 그는 어느 정도 윤리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부모에게 불효하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자녀는 사회에서도 문제아가 될 것이다.

‘주 안에서’

에베소서 6:1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말한다. ‘주 안에서’라는 말씀은 효도의 근거와 한계를 보여준다.

효도의 근거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도덕 질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효도는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한 행위이다.

그러나 효도는 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효도의 한계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크신 부모님이시다. 그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또 우리의 육신의 부모보다 높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되,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범위 안에서 해야 한다. 즉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부모의 명령까지도 순종하라는 뜻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과 부모님,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택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께서는 너희 집안 식구가 너희 원수라고 말씀하셨고 또 우리가 우리의 가족들을 미워하지 않으면 주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마 10:34-37; 눅 14:26).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나님께서는 제5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셨다(출 20:12). 사도 바울도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교훈하였다(엡 6:2). 부모는 자녀를 낳으시고 기르신 분들이며, 그러므로 자녀는 그들을 마땅히 공경해야 한다. ‘공경하라’는 말은 ‘높이라, 귀히 여기라, 존중하라, 존경하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표현하셨다(레 19:3). 그는 심지어 “너는 센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고 명하셨다(레 19:32).

또 성경은 부모를 경홀히 여기고 조롱하고 업신여기거나 구박하고 쫓아내는 것은 어리석고 악한 일이며 저주를 받고 수치를 당할 일이라고 말한다. 신명기 27: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잠언 15:20,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잠언 19:26,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즉 수치와 욕을 당할] 자식이니라.” 잠언 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하나님께서는 특히 부모를 치거나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하셨다. 출애굽기 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애굽기 21:17,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레위기 20:9, “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였은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잠언 20:20,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행복]이 유암[幽暗, 어두움]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 디모데전서 1:9는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를,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의 목록에 둔다.

하나님의 뜻은 자녀들이 그 부모를 공경하고 높이고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존경하고 존대하고, 경홀히 여기지 말고 조롱하거나 업신여기거나 구박하거나 쫓아내지 말고, 특히 부모를 치거나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마다 이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절대순종해야 한다.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성경은 또한 자녀들이 그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교훈하였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교훈하였다(엡 6:1).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 곧 의로운 일이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불의한 일, 곧 죄악된 일이다. 성도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의와 거룩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은 자들이다(엡 4:22-24). 그러므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당연한 일이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20에서도,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하였다. 자녀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 곧 죄 짓는 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에 있어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자녀의 도리이다. 그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잠언은 자녀들이 그 부모의 경건하고 선한 교훈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할 것을 반복해서 말했다. 잠언 1: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잠언 3:1,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잠언 4:1,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잠언 4: 10,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 잠언 23: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라.”

그러나 지혜로운 아들만 부모의 훈계를 들을 것이며 교만한 자는 듣지 않을 것이다. 잠언 13:1은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한다. 엘리의 아들들은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않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 때문이라고 사무엘상 2:25는 말한다. 로마서 1:30은 죄인들의 목록 가운데 부모를 거역하는 자를 두었다.

특히 신명기 21:18-21은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녀를 사형시켜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엄하게 규정하였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큰 악이다.

성경에서 룻과 에스더는 효도를 실천한 좋은 모범이다. 룻은 그의 남편이 죽은 후에도 시어머니 곁에서 그를 섬기며 그와 고락을 같이했다. 그는 어머니의 말씀을 순종하였다. 룻기 3:5,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또 에스더도 그를 길러준 모르드개에게 끝까지 순종하였다. 에스더 2:20,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명한 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고하지 아니하니 저가 모르드개의 명을 양육받을 때와 같이 좇음이더라.” 구원받은 성도는 이처럼 범사에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네 부모에게 보답하라

성경은 또 자녀들이 부모에게 보답하라고 교훈한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보답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자녀가 자기를 낳으시고 기르신 분들의 수고에 대해 보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부모에게 보답하지 못하는 자녀는 짐승보다 못한 자들이다. 짐승도 제 주인을 알아본다. 개도 제 주인에게 충성을 바친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은 짐승보다 못하게 배은망덕한 자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자녀들이 그 부모를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라고 교훈한다. 잠언 15:20,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잠언 17:25,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잠언 23: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자녀가 부모를 공경치 않고 경홀히 여기고 조롱하고 구박하고 쫓아내고 심지어 구타하고 저주하는 것은 배은망덕의 극치이다. 또 잠언 28:24는, “부모의 물건을 도적질하고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니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5:4에서 교훈하기를,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고 말한다. 자녀들이나 손자들이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것은 마땅한 일이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선한 일이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자녀들은 부모님의 건강을 늘 살피며 문안하고 또 떨어져 사는 자들은 자주 부모님을 방문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살펴야 하며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전화로라도 자주 문안해야 할 것이다. 또 자녀들은 부모님의 의식주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살피며 공급하고 섬겨야 할 것이다.

특히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자기 어머니같이 생각하고 섬겨야 하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시어머니도 며느리를 딸같이 생각하고 한 가족으로 대하며 사랑해야 한다. 또 남편은 어머니의 심리도 잘 헤아리고 아내의 고충과 수고도 깊이 이해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양쪽에 다 마음의 상함이 없도록 조심스럽게 또 지혜롭게 잘 처신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인간관계에서 매우 어려운 일이다.

효도의 복

제5계명은 약속이 있는 계명이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네 생명’이라는 원어(야메카)는 ‘네 날들’이라는 뜻이다. 에베소서 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제5계명, 즉 부모 공경의 계명에 약속된 복은 첫째, ‘잘 되는 것’ 즉 형통의 복이며, 둘째, 장수(長壽)의 복이다. 우리가 이 세상의 삶에서도 잘 되고 형통하기를 원한다면, 또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건강하고 장수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지켜야 하고, 그 가운데는 부모 공경의 계명도 들어 있다. 효도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효도하는 사람은 복 받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효도치 않고 배은망덕한 자녀는 결코 복 받는 경우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땅 위에서 복받고 건강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고 그들에게 순종하며 보답해야 한다.

노아의 아들 셈과 야벳, 사사 시대의 룻, 또 파사 시대의 에스더는 다 부모를 공경한 자들이고 복을 받은 자들이다. 노아가 술 취하여 그 장막에서 벌거벗었을 때, 함은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였으나, 셈과 야벳은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고 얼굴을 돌이켜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않았다. 셈과 야벳은 복을 받았으나, 함과 그 아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았다(창 9:20-27). 또 경건하고 효성어린 룻은 복을 받아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고(룻 4:17), 믿음과 순종의 사람 에스더는 파사의 왕후가 되어 유대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하였다(에스더).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의무는 분명하다.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순종하고 보답해야 한다. 그것은 마땅하고 선한 일이며 형통과 장수의 복이 약속된 일이다.


자녀 교육

자녀들을 어떻게 하면 잘 키울 것인가 하는 생각은 부모들의 공통적인 큰 관심사일 것이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며 상급이다(시 127:3). 그러나 이렇게 귀한 자녀이지만, 그는 미성숙한 존재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잘 양육하고 교육하고 관리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22:6도,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바른 교육이 없는 출산은 좋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도 아니고 사회에 공헌하는 일도 아니고 또 부모를 위한 일도 아니다. 주께서는 자신을 팔 가룟 유다에 대해,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6:24).

자녀 교육의 책임자

그러면 자녀 교육은 누구에게 맡겨진 일인가? 신명기 6:6-7은,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하였고, 또 에베소서 6:4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하였다. 여기에 자녀 교육의 책임자가 제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 교육의 책임을 세속학교에 주신 적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심지어 교회에 주지도 않으셨다. 정부가 자녀 교육의 책임을 가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 교육의 책임을 그 부모에게, 그것도 그 아버지에게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요 명하신 바이다.

물론, 우리는 부모가 자녀를 교육할 자격이 갖추어져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배우면서라도 잘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녀를 낳은 부모로서의 책임이다. 부모는 자녀에 대한 그 책임을 다해야 하며 자녀를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부모는 자기가 아는 만큼, 또 자기가 경험한 만큼, 그리고 자기가 깨달은 만큼 모든 좋은 것을 자기 자녀에게 가르쳐 주려고 힘써야 할 것이다. 훌륭한 교사나 교수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준비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듯이, 부모는 열심히 배우면서 자녀를 가르치려고 힘써야 할 것이다.

자녀 교육의 내용

그러면 자녀 교육의 내용은 무엇인가? 부모는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 것인가? 부모는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다 가르쳐야 하겠지만, 특히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사도 바울은 “너희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했다. 부모는 자녀에게 ‘주의 교양과 훈계’ 즉 성경 말씀을 가르치며 그 말씀으로 훈계해야 한다.

성경이 자녀 교육의 교과서이며 교재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성경을 부지런히, 충실히 가르치면, 자녀는 필요한 모든 내용을 다 배울 것이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디모데후서 3:16-17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한다.

잠언 22:6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마땅히 행할 길’이란 인생의 본분을 말한다. 성경에 제시된 인생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계명을 지키며 선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섬기며 순종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첫 번째 내용이다. 신명기 6:4-5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또 잠언 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말하고, 전도서 12:13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믿고 실천한다.

성경이 가장 요긴하게 가르치는 바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다. 사람은 다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요 3:5-6).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도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다(딤후 3:15).

또 성경은 의롭게 살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모든 죄를 버리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가 계명을 잘 지키는 자가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교훈을 믿고 순종해야 하며, 또 우리 자녀도 바른 교리사상을 가지고 바른 윤리생활을 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또 부모가 가르쳐야 할 내용 중에는 예절, 고운 말씨, 양보심, 겸손, 인내, 정직함, 부지런함 등의 훈련, 좋은 독서습관, 정서생활, 하루에 여러 번 양치질하기, 손 자주 씻기, 옷 단정하게 입기, 식사 태도, 또 적당히 운동하기 등도 포함될 것이다.

물론, 자녀 교육의 내용 속에는 이런 인성 교육 외에, 언어와 수학, 역사, 지리, 동식물학, 과학 등의 교양적 지식과 또한 전문적 지식과 기술 습득도 포함될 것이다. 또 이런 것들은 부모의 지식이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학교교육의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세속학교들은 교육이념이나 교사들이 불경건하고 도덕성이 의심스럽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성도의 자녀들을 그들에게 맡겨두는 것은 최선의 길이 아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세속학교에 세속주의의 영향 아래 내버려두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여기에 기독교 학교의 필요성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경건한 학교를 세워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 일을 위해서는 지식 있는 기독교 교육가들이 필요하고 바른 교육이념과 실천 의지가 필요하고 각 분야에 유능한 교사들이 필요하고 또 충분한 재정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자녀 교육의 방법

그러면 부모는 자녀를 어떤 방법으로 교육해야 하는가? 첫째로,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모세는 말하기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라”고 했다(신 6:6-7). 부모는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부모는 자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심한 자가 되지 말고, 관심을 가지고 항상 대화해야 한다. 자녀의 문제는 부모가 자녀와 대화가 없어서 그를 바르고 선하게 지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예배의 실천은 이런 문제의 좋은 대책이 된다. 가정예배는 경건한 가정의 당연한 의무일 뿐 아니라, 또한 자녀 교육의 좋은 방법이다. 부모는 가정예배를 통해 자녀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대화하고 지도할 수 있다.

부모는 아이의 출생 때부터 그를 안고 기도하며 찬송가를 들려주고, 6개월부터는 성경 이야기를 해주며, 2살부터는 쉬운 성경구절을 암송시키고, 5살부터는 스스로 성경을 읽게 하고, 7살부터는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 부모는 바쁜 일이 있다고 자기 자녀를 쉽게 또 자주 남의 손에 맡기지 말아야 한다. 아이는 짧은 시간에라도 나쁜 본을 받고 나쁜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로서 자녀 교육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또 부모는 자녀의 생활을 늘 주목해야 한다. 그가 학교에서 언제 돌아오는지,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노는 장소는 어디인지, 좋아하는 책이나 놀이는 무엇인지, 즐겨보는 텔레비젼 프로나 컴퓨터 게임은 무엇인지 등에 주목해야 한다. 또 필요한 때에는 언제든지 교훈하고 지도하며 잘한 일은 칭찬하고 격려하며 잘못한 일은 즉시 지적하고 고쳐주어야 한다. 부모는 자녀가 생활의 여러 구체적 상황에서 성경의 교훈을 스스로 적용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사람은 무엇을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부모는 반복해서 가르쳐야 한다.

둘째로, 모범을 보이면서 가르쳐야 한다. 가장 좋은 교육은 모범을 보이는 교육이다. 사람은 무엇을 잘 본받는다. 어린아이는 백지상태와 같아서 선악간 흉내를 잘 낸다. 그는 좋은 본을 보면 그것을 잘 따라하며, 나쁜 본을 보면 그것도 잘 따라할 것이다. 아이가 부모의 좋은 본을 보는 것은 좋은 인격 형성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4:16),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했다(고전 11:1). 또 그는 디도에게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가르쳤다(딛 2:7).

그러므로 부모는 먼저 성경 교훈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고 온유 겸손하고 진실하며 자기 감정을 다스리며 참고 인내하는 본을 보여야 한다. 부모가 욕하거나 거짓말하면 자녀도 똑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면, 자녀는 폭력적이게 될 것이다.

셋째로, 필요할 때는 벌을 주고 매도 때려야 한다. 체벌이 없는 교육은 바른 교육이 아니다. 매가 없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인격을 병들게 하고 망하게 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를 버릇없이, 교만하게 키우지 말아야 하고, 자녀의 기를 꺾어야 한다. 부모는 자녀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게, 자기만 위해 달라는 자로 키우지 말아야 한다. 부모는 자녀의 마음이 너무 유약하지 않고 책망을 듣는 자가 되도록 좀 강하게 키워야 할 것이다.

성경은 매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잠언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늦지 않게] 징계하느니라.” 잠언 20:30,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지옥]에서 구원하리라.” 잠언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어떤 이는 자녀에게 벌을 줄 때에 주의할 점들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였다: ① 부모는 단순히 권위 의식을 가지고 자녀에게 위압적으로 대하거나 자기 감정과 기분을 따라 큰 소리로 야단치거나 손으로 머리를 때리는 등의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② 실수와 고의적 잘못을 구별해야 하며, 잘못을 행한 경우도 먼저 그것에 대해 설명하여 아이로 하여금 이해케 한 후에 벌을 주어야 한다. ③ 매는 엄하고 아프게 때려야 하며 반복된 잘못은 더 엄하게 벌해야 한다. ④ 벌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같은 잘못에 대해서는 항상 벌을 주어야 하며 벌을 줄 때는 부모가 한편이 되어야 한다. ⑤ 벌을 뒤로 미루면 아이가 잊어버리므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라도 아이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나가 즉시 벌을 주어야 효과가 있다. ⑥ 부모는 벌을 줄 때 사랑과 침착한 마음을 가져야 하며 벌을 준 후에 함께 기도하고 아픈 마음을 달래주고 아픈 곳을 싸매어 주어야 한다.41)

부모가 자녀를 부당하게 책망하고 벌을 주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므로 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6:4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했고, 골로새서 3:21도,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하였다. 책망과 매는 자녀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 또 부모 자신이 잘못했을 때는 자녀 앞에서라도 그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도 완전한 자가 아니며 단지 하나님 앞에서 노력하는 자라는 것을 말해주어야 한다.

교회 교육의 중요성

끝으로, 교회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한마디 첨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교회가 어른들의 영적 성장에 유익하듯이, 주일학교는 아이들의 영적 성장에 유익하다. 그들은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좀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중요한 말씀의 교훈을 들을 수 있다. 이 일에 교역자와 교사들의 인품과 역할이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교육이 가정 교육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자녀 교육은 부모에게, 특히 아버지에게 맡겨진 일이다. 자녀 교육의 내용과 교재는 성경이다. 성경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자녀 교육은 부지런히, 또 본을 보이면서, 또 필요한 경우 매도 들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부모는 이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자녀 교육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며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것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경건한 히스기야 왕에게서 악한 므낫세가 날 줄을 누가 알았으며, 또 악한 므낫세에게서 경건한 손자 요시야가 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이 교육은 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으시면 그 교육은 다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바른 교훈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일반적 방법이다. 그러므로 잠언 22:6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부모의 최대의 유산은 자녀를 바르게 교육하는 것이다.


윗사람 공경

부모 공경의 원리는 여러 방면에도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너는 센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고 말씀하셨다(레 19:32). 우리는 자신을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만 공경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나이 드신 노인들을 공경해야 한다. 또 부모 공경의 계명은 주인과 종의 관계에나, 학교에서 선생과 학생의 관계에나, 직장에서 상사와 직원의 관계에나, 또는 국가에서 통치자와 백성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전체적으로 말해,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공경해야 한다. 물론 윗사람도 아랫사람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주인과 종의 관계

부모 공경의 원리는 집에서 주인과 종들의 관계42)에도 적용된다. 성경은 비록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가

운데서도 주인과 종의 관계가 사랑과 존경의 인격적 관계이어야 함을 가르친다. 우선, 종은 주인을 두려워하며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순종해야 하며 사람에게 하듯 눈가림만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 단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선행을 갚아주실 것이다.

에베소서 6:5-8,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골로새서 3:22-24,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또한 주인은 종에게 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부당하게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 에베소서 6: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골로새서 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선생과 학생의 관계

부모 공경의 원리는 학교에서 선생과 학생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선생과 학생의 관계가 많이 나빠지고 있는 것 같지만,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사랑과 존경의 관계이어야 한다. 선생은 학생을 공정함과 사랑으로 대하여야 하며 자기 감정을 성급하게 혹은 옳지 않게 내어 그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하며 학생은 선생에게 합당한 존경심과 예절을 가지고 대하여107

야 한다.

상사와 직원의 관계

부모 공경의 원리는 직장에서 상사와 직원들에게도 적용된다. 현대사회의 직장 구조는 비록 노예제도는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일종의 주종(主從) 관계이다. 물론 그것은 상호 계약에 의한 비강제적 주종 관계이다. 그것은 한 쪽에서 원하지 않을 때 언제나 그 관계를 해제할 수 있는 관계이다. 그러나 과거의 노예제도에서의 비인간적 폐해들이 현 사회의 직장이라는 새로운 구조 안에서도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는 것이 현실이다. 금력(金力) 앞에 사람의 인격이 무시되고 짓밟히는 일이 드물지 않다.

주인과 종에게 주신 교훈은 직장 생활에서 상사와 직원들의 관계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것이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두려워하며 주님께 하듯 성실한 마음과 단 마음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며(엡 6:5-8),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위협하지 말고 그에게 의롭고 공평하게 대해야 할 것이다(엡 6:9; 골 4:1).

통치자와 백성의 관계

부모 공경의 원리는 세속국가43)의 통치자와 백성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통치자는 백성을 위해 공의와 법

과 사랑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모범적인 다윗은 모든 백성에게 공(公)과 의(義)를 행했다(삼하 8:15). 장차 평강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도 “다윗의 위(位)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 . .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다(사 9:7). 한편, 백성은 통치자를 존경하고 복종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우리가 사는 사회가 바르고 좋은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시민이 바라는 바이며 그리스도인이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사실상 주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의 심령이 악하므로 주께서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악인들을 제거하시고 의의 세계를 만드시기 전까지 세상에는 불의와 불법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직 우리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온 세상의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다. 사도행전 3:19-21,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속사회가 주의 재림 때까지 조금이라도 바르고 좋은 사회가 되기를 바라며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 대해 가지는 책임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속 국가의 통치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로마서 13:1-2, 4-5,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거스름]이니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 . .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베드로전서 2:13-14,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褒奬)[장려]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베드로전서 2:17, “왕을 공경하라.”

이 말씀들에 의하면, 우리는 세속적 통치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들이 가진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우리가 그들에게 복종치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존중하고 복종해야 한다. 사회에 통치자들을 두신 것은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이다. 이러한 은혜 때문에 세속사회는 너무 급격하게 부패되거나 타락지 않으며 하나님의 허락하신 기간 동안 어느 정도 그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법령을 공포할 때, 우리는 그보다 더 높으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법령에 복종할 수 없고 그것을 저항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바로의 명령을 거절했던 히브리 산파들처럼(출 1:17), 아합 시대에 선지자 100명을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던 궁내대신 오바댜처럼(왕상 18:4),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던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단 3:16-18), 사자굴에 던지울 줄 알면서도 여전히 그의 방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창을 열어 놓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던 다니엘처럼(단 6: 10),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유대인 공회의 명령에 불복종했던 사도들처럼(행 4:19-20) 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우리는 오직 합법적, 비폭력적 방법으로 저항해야 한다. 잠언 24:21,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또 부득이한 경우, 성도는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세속적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디모데전서 2: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에게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말씀과 동일하다. 예레미야 29: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우리는 우리나라와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세속적 통치자들을 위해 세금을 내어야 한다. 불법적인 탈세는 그리스도인에게 옳지 않은 일이다. 로마서 13:6-7,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주께서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22:21,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의 두 영역에서 살고 있고 그 두 영역에서 해야 할 의무를 다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세속사회의 개선을 위해 다음 몇 가지의 일들을 실천해야 한다. 첫째, 전도하는 일이다. 성경이 보이는 사회 개선의 근본적 방법은 심령의 구원을 통해서이다. 인간의 본성은 심히 부패되어 있어 치료 불가능하므로(렘 17:9) 단지 어떤 강압적 법규나 최선의 교육 등으로 개선되지 않는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거듭남을 통해서만 죄성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도는 사회의 개선에 대한 최상의 성경적 대답이다. 잠언 16:6은 사람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둘째, 모범을 보이는 일이다. 성도는 말과 행위로 세상 사람들에게 의와 선과 진실의 본을 보여야 한다. 마태복음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디모데전서 3:7, “[장로는]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기독교가 진리 운동이고 새 생명 운동일진대,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사회 속에서 빛으로, 모범된 인격자들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정치, 경제, 법률, 과학, 교육, 신문 방송, 예술 등 직업의 각 분야에서 모범을 보임으로써 우리가 책임 있는 윗사람일 경우 직접적으로 혹은 우리가 아랫사람일 경우 간접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하며 또 기회 있을 때마다 다른 동료들을 겸손히 설득하며 그들의 양심에 호소함으로써 사회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셋째, 사회의 개선을 위한 합법적 일들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사회적 악을 제거하고 사회를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 개인이 하는 것을 의미하고 교회가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와 국가는, 그 구성원이 서로 중첩되지만, 그 성격과 존재 목적과 기능이 엄격히 다르다. 요한복음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는 자들의 모임이며 예배와 영적 성장과 전도의 임무를 가진다(요 4:24; 엡 4:12; 마 28:19). 그러므로 국가가 교회의 활동들에 간섭해서는 안 되듯이, 교회도 국가의 활동들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교회가 단체로서 세속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바일 뿐 아니라 주께서 성경에 가르치신 교회의 본분에서 이탈하는 행위라고 본다. 교회는 단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진술대로, “비상한 경우들에 겸비한 청원의 방식으로; 혹은 정부의 관리들로부터 요구된 경우에 양심의 만족을 위해 충고의 방식으로”(31:5) 국가와 관계되는 세속적 사건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단체로 세속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리스도인 개인이 세속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나 소명감을 가진 정치가, 국회의원, 공무원, 법조인 등으로서 그리스도인은 국가나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정당하게 활동할 수 있다. 여기에, 단지 물질적 여유나 육신적 행복이나 출세 등의 근시안적 목표를 넘어서 고상하고 원대한 꿈과 비전을 품는 그리스도인 인재들이 요청된다.

물론, 사회 개선을 위한 참여는 혁명이나 과격한 폭력적 방법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혁명이나 폭력적 방법은 악하며 사회의 발전을 보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만 초래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시민으로서 그가 속한 사회가 허용하는 합법적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사회의 법이 허용하는 서명 운동이나 성명서 발표나 합법적 시위, 선거에의 참여 등이 필요하다. 사회 개선은 매우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인간 본성의 개조 없이는 사회의 개선이나 사회 정의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인내와 여유를 가져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속에도 불완전이 있다면 세속사회 속에서 온전함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실상,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자들에게 참되고 온전한 도덕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제6계명

출애굽기 20:13, “살인하지 말지니라.”



제6계명에서 요구된 의무와 금지된 죄

[135문] 제6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무엇인가?

[답] 제6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주의 깊은 연구와 합법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니 누구의 생명이든지 불법하게 빼앗아 가려는 모든 사상과 목적에 대항하고 모든 격분을 억제하고 그런 모든 경우와 시험과 습관을 피함으로; 폭력에 대한 정당방위, 하나님의 손길을 참아 견디는 것, 마음의 조용, 영의 유쾌와, 고기, 음료, 약, 수면, 노동 및 오락의 온당한 사용으로; 자비로운 생각, 사랑, 민망, 온유, 우아함과, 친절, 화평, 부드럽고 예의 있는 언행과, 관용, 화해할 준비가 됨, 모욕에 대해 참는 태도와 용서, 또 악을 선으로 갚음과, 곤궁에 빠진 자를 위로하고 구제함, 죄 없는 자를 보호하고 옹호함으로 할 것이다.

[136문] 제6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무엇인가?

[답] 제6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공적 재판, 합법적 전쟁 혹은 정당방위 외에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모든 것, 합법적이며 필요한 생명 보존의 수단을 소홀히 하거나 포기하는 것, 죄악된 분노, 증오심, 질투, 복수하려는 욕망을 가지는 것, 모든 과도한 격분, 마음을 어지럽히는 염려와, 육류와 음료, 노동 및 오락을 무절제하게 사용함과, 격동시키는 말과, 압박, 다툼, 구타, 상해, 다른 무엇이든지 사람의 생명을 죽이기 쉬운 것이다.



술과 담배

성경에서 술은 주로 포도주이었다. 술을 위해 가장 자주 사용된 히브리어는 야인이다(141회). 포도쥬스를 가리키는 티로쉬와 미쉬라라는 말도 있다. 티로쉬는 본래 발효되지 않은 신선한 포도쥬스를 가리켰지만, 점차 ‘약간 발효된 포도쥬스’도 의미하게 되었다. 독주(毒酒)를 뜻하는 쉐카르라는 말도 있다(22회). 구약 헬라어 70인역(LXX)에는, 야인과 티로쉬는 오이노스로 구별 없이 번역되었고, 쉐카르는 주로 시케라로 번역되었다(14회).

성경에서 술 즉 포도주는 좋은 음식으로 언급되기도 하였다. 살렘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야인)를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나왔다(창 14:18). 이삭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티로쉬)로” 그에게 주시기를 축복하였다(창 27:28). 야곱은 열두 아들 중 유다에게 “그 옷을 포도주(야인)에 빨며”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다”고 예언하였다(창 49:11-12). 예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그것도 ‘좋은 포도주’를 만드셨다(요 2:3, 9-10).

또, 포도주는 제사의 재료로도 사용되었다. 출애굽기 29:40, “전제(奠祭)로 포도주 힌의 4분 1을 더할지며.” 포도주는 아름다운 사랑에 비교되기도 하였다. 아가 1:2,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또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의 말씀을 포도주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이사야 55:1,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또 포도주는 약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누가복음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디모데전서 5:23,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그러나 이러한 포도주의 좋은 면과 달리, 성경은 포도주가 사람을 취하게 하고 실수와 방탕과 범죄의 원인이 됨을 말한다. 예를 들어, 노아의 실수의 원인은 술 취함이었다. 창세기 9:20-21,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또 롯의 딸들은 근친상간적 행위를 위해 포도주를 사용하였다. 창세기 19:32,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야인)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오늘날도 술은 사고, 폭력, 살인, 자살 등의 원인이 된다. 2001년 검찰청의 보고에 의하면, 살인범, 교통사고 특례범, 폭력범의 63-64퍼센트가 음주자라고 한다.44) 특히 오늘날 음주 운전은 자신과

다른 이들의 생명과 몸을 손상시킨다.

술의 이런 폐해 때문에, 성경은 금주(禁酒)를 교훈한다. 잠언 20:1,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 잠언 23:20, “술(야인)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잠언 23:3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특히 제사장은 실수하지 않기 위해 성막 봉사에서 술을 마셔서는 안 되었다. 레위기 10:9,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더욱이, 신약성경은 술 취함이 육체의 일이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큰 죄라고 밝히 말한다. 갈라디아서 5: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술 취함과 방탕함.” 고린도전서 5:11, “[어떤 형제가 술 취하거든 그와]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고린도전서 6:10, “[술 취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그러므로 성경은 감독[장로]이나 집사는 술을 즐기지 않는 자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디모데전서 3:3, “[감독은]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디모데전서 3:8, “[집사는]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그 외에도,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은 몸에 해롭고 위궤양, 심근경색, 암, 간경화 등의 원인이 된다. 또 술은 경제적 낭비도 가져온다. 우리나라에서 음주로 인한 질병 비용은 연간 2조 7917억원에 달하며 질병별로는 과도한 알코올로 인한 정신,행동장애, 간암, 간 질환, 뇌혈관 질환, 고혈압 등이라고 한다.45) 또 음주

폐해로 인한 조기사망과 의료비 지출, 생산성 감소, 사고피해 등 사회경제적 손실비용을 추산해보면 연간 14조 9천억원에 이른다는 연구보고도 있다.46) 그것은 서울시 1년 예산과 맞먹는 금액이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발효된 술은 유익보다 해가 많다. 그러므로 루터, 칼빈, 웨슬리 등 경건한 신앙인들은 금주(禁酒)를 역설하였다. 술의 심각한 폐해들과 중독성을 생각할 때, 또 더욱이 오늘날 많은 술들이 알코홀 성분이 매우 높아 조금만 마셔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47) 경건한 성도에게는 완전 금주가 가

장 합당하다.

담배는 술처럼 실수와 범죄의 원인이 되지는 않으나 술처럼 몸에 매우 해롭다. 담배 연기 속에는 발암 물질을 포함한 독한 물질들이 많이 있어서 담배를 오래 피운 사람은 폐암, 후두암, 위암 등 모든 종류의 암과 위궤양, 심장 질환 등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48) 1994년 10월에 열린 ‘제9차 담배와 건강에 관한

세계회의’는 질병, 자살 등을 포함하여 모두 54종류의 사망 원인 가운데 흡연과 직접 관련된 질병이 25가지나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질병 중 암으로 분류된 것이 17종이며, 이러한 암에 걸릴 확률은 흡연자가 비흡연자보다 무려 14배나 높았다. 1997년, 대한 결핵 및 호흡기 학회는 폐암 환자 10명 중 8명이 흡연자이었다고 보고하였다.49)

1990년 미국에서 담배로 인해 죽은 자가 약 40만명이라고 한다.50) 옥스퍼드대학 공중보건과 마틴 베세이

박사는 “통상 성인이 된 후 흡연기간을 35년 정도로 계산했을 때 흡연자의 사망률이 비흡연자보다 두 배 이상 높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고 말했다.51) 1999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전 세계 흡연자가 11억명에

 달하며, 이 중 5억명 이상이 담배로 인해 죽을 것이며 매년 400여만명이 흡연 관련 질병으로 죽는다고 발표하였다.52) 우리나라에서 흡연으로 인한 질병 비용은 무려 연간 2조 9676억원에 달한다고 한다.53)

그러나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몸의 건강도 잘 관리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므로 술의 폐해뿐 아니라, 담배도 몸에 해롭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완전 금주(禁酒)와 완전 금연(禁煙)은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좋은 전통이요 건전한 생활 방식이다.



낙태

오늘날 인공임신중절수술 즉 낙태는 성적 문란과 더불어 행해지는 매우 심각한 사회악이다. 낙태로 죽어가는 어린 생명은 셀 수 없이 많다. 1990년의 한 보고서는 “전세계적으로 인공유산은 매년 5천 5백만건에 이르고 있는데, 이 중 소련이 가장 많아 연간 650만건이고 미국이 150만건에 달한다”고 말하면서 “진짜 놀라운 것은 한국이 150만건(1985년)에 달하고 있어 인구 비례로 따지면 세계 최고”라고 말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통계는 1960년도의 10만건에 비해 25년 만에 15배나 급속하게 증가한 것이라고 한다.54)

우리나라에서 한 아기가 태어날 때 약 2.5명의 태아가 낙태로 죽어간다. 한 해에 60만명이 태어나고 150만명이 낙태당한다. 이것은 세계 제2위의 낙태율이다. 한 해에 150만건, 하루에 4,000건, 20초당 1건이다. 기혼 여성의 59.3%와 18세 이상 여성의 38.8%가 낙태를 경험하였다. 전체 낙태 건수의 30%는 미혼 여성의 경우이고, 이들 중 50%는 2회 이상 낙태 경험을 가진 자들이었고, 85%는 10대이었다. 낙태의 이유로는 태아의 건강 문제는 2.7%에 불과하였고 피임 실패나 원치 않는 임신이 대부분이었다.55)

알란 구트마허 연구소(Alan Guttmacher Institute)의 1980년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의 합법적 낙태건수 중 79%는 미혼자에 의한 것이고 30%는 청소년에 의한 것이며 심지어 1%는 15세 이하의 경우라고 하였다.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사망한 군인들의 수는 약 50만명, 1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의 사망자수는 약 12만명, 2차 세계대전에서는 약 41만명, 한국의 6.25전쟁에서 미군의 사망자수는 약 5만명, 베트남 전쟁에서는 약 6만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낙태가 합법화된 1973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에서 낙태된 유아들의 수는 약 1,500만명이라고 하며, 또 세계적으로는 연간 5,500만명이라고 하니, 이는 유아 대학살이 아닐 수 없다.56) 낙태는 현대사회의 가장 심각한 죄악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낙태를 용납하고 있다. 1970년대 초 낙태를 합법화한 미국의 대법원 판결이 있기 전,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총회는 낙태가 더 이상 범죄가 아니며 여성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결론을 내렸었다. 1986년에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 총회도 낙태에 관해 281대 266으로 ‘각자의 자유의사에 맡긴다’(pro-choice)는 입장을 재확인하였다.57) 미국 연합그리스도교회(UCC)도 공식적으로 낙태를 지지하였다.58)

그러나 낙태는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범하는 죄, 즉 살인죄이다. 출산 이전의 인간 태아는 인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1) 태아는 ‘아이’라고 불린다. 누가복음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브레포스 βρέφος, child)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2) 또 태아를 가리킬 때 인칭대명사가 사용된다. 예레미야 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59) (3) 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출생하기 전에 그를 택하시고 부르신다

. 갈라디아서 1:15,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4) 특히, 출애굽기 21:22-25는 명백히 낙태가 살인임을 증거한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 . 갚을지니라.

본문에서 ‘낙태케 하였다’는 원어(웨야체우 옐라데하)는 단순히 ‘그 여자의 아이들이 나온다’는 뜻이다(KJV). 이것은 유산(流産)(NASB)이 아니고 조산(早産)(NIV)을 의미한다. 낙태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히브리어는 쉭켈(‘유산하다’)과 네펠(‘유산[流産], 낙태’)이다. 그러므로 ‘다른 해가 없으면’이라는 말은 엄마에게나 아기에게나 다 적용된다.60) 다시 말해, 만일 조산된 아기가 죽었으면 살인죄가 적용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태아는 인간 생명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낙태는 분명히 살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낙태는 태아 살해 즉 살인이다.

의학적으로도, 인간 생명이 임신되는 순간 시작된다는 것이 의학자들의 일반적 신념이다.61) 유전학적으

로도, 수정란은 정상적 인간의 특징을 가진다.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는 각각 23개씩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고 임신이 된 수정란은 46개의 염색체를 가진다. 이것은 정상적 성인의 염색체 수와 같다.62)

실제적으로, 임신 3주째면 벌써 태아의 심장 근육은 움직이고 머리, 팔, 다리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40일에서 42일이면 뇌파가 감지되고, 2개월이면 코, 눈, 귀, 발가락이 나타나며, 심장이 뛰며 혈액이 흐르고 뼈가 형성되고 모든 육체 기관들이 존재하며 활동한다. 3개월이 되면 태아는 곁눈질하고 주먹을 쥐고 혀를 움직이며 손가락을 빨 수 있고 육체적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며, 4개월이 되면 몸무게는 6배로 늘어나 출산 시 몸무게의 약 2분의 1이 되고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5개월이 되면 피부, 머리털, 손톱이 생기고 꿈을 꿀 수 있고 공기가 있다면 울 수 있고 자궁 밖에서도 살 수 있다고 한다.63)

그러므로 낙태는 성경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허용될 수 없는 태아 살해의 죄악이다. 낙태를 위한 불가피한 경우란 있을 수 없다. 강간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의 경우나, 어머니가 태아로 인해 생명의 심각한 위험을 받는 경우도 낙태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런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모든 일을 맡겨야 할 것이다. 시작된 생명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어머니에게도 의사에게도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낙태는 곧 살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스스로 조심하고 자녀들에게 바른 교훈을 주어야 할 것이다.



안락사(Euthanasia)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는 ‘편안한 죽음’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고통 중에 있는 생명을 고의적으로 죽이거나, 물이나 공기나 음식물 등 자연적 생명유지수단을 중단시킴으로 죽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자비로운 살인’(mercy killing)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오늘날 세상에는 안락사를 허용하려는 경향이 있고 또 안락사의 개념이 점점 더 확대된다고 한다.

안락사는 화란에서 많이 시행되는데, 한 보고서에 의하면, 1995년 화란의 안락사(安樂死)의 거의 3분의 2가 법이 요구하는 대로 보고되지 않았다.64) 1999년 화란에서 7천명 이상이 안락사로 죽어갔다.65) 또 화

란에서 안락사는 가망 없는 환자를 위한 안락사로부터 만성적 환자를 위한 안락사로, 또 신체적 질병을 위한 안락사로부터 심리적 고통을 위한 안락사로, 또 자발적 안락사로부터 비자발적 안락사로 움직여왔다고 지적된다.66) 미국에서도 ‘죽음 박사’라는 별명이 있는 잭 케보키안은 적어도 45건의 ‘자살’을 도왔으

며 그 중 많은 이들은 최종적으로 아픈 상태가 아니었고 몇 경우는 질병의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67)

안락사를 허용하는 생각이 교회 안에도 들어왔다. 1991년 미 연합그리스도의 교회(UCC)는 안락사를 지지하고 자살을 허용하는 최초의 대교단이 되었다.68) 1999년 미국의 프린스톤 대학교의 생명윤리학 교수

인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갓난 아기가 돼지와 소와 개보다 더 큰 생명의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척추장애나 혈우병(血友病) 등을 가진 자를 죽일 권한을 환자들이나 의사들에게 주기를 원한다.69) 그는 “불구가 된 어린아기를 죽이는 것은 한 인간을 죽이는 것과 도덕적으로 똑같지 않다”고 말했다.70)

안락사 옹호자들이 제시하는 근거는 두어 가지다.71) 첫째로, 안락사 옹호자들은, 인간이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고 심각하게 고통스런 생활은 죽음보다 못하기 때문에 안락사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인본주의(humanism)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든 일을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하며 인간이 모든 것의 기준이라고 본다. 인본주의는 인간이 자기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인본주의자들은 자살, 낙태, 안락사의 권리를 주장하며 그런 행위를 사생활의 자유와 권리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로, 안락사 옹호자들은 안락사가 선하고 자비로운 일이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안락사가, 심각하게 고통당하는 병자들을 그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때문에 병자들 자신에게나 가족들에게 선하고 자비로운 행위라고 말한다. 그들은 또 그것이 가족의 무거운 정신적, 경제적 부담이나 사회적 부담을 덜어준다고 말한다. 그들은 심지어 노인은 죽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하나님 앞에서나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나 올바르지 않다. 첫째, 하나님께서 허용하지 않는 경우들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그의 계명을 어기는 악한 일이다. 출애굽기 20:13, “살인하지 말지니라.” 창세기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선한 목적이 악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둘째, 사람의 생명을 죽일 권한은 오직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은 다니엘이 벨사살 왕에게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사람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이시다(단 5:23). 또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밤에 우리의 영혼을 도로 찾으실 수 있는 분이시다(눅 12:20). 인간은 그 누구도, 사형이나 합법적 전쟁 외에, 남을 죽일 권리가 없다. 아무리 고통스런 형편과 처지라 할지라도 우리는 선지자 요나처럼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고 구하는 것 이상으로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욘 4:3).

셋째, 사람은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한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허무한 존재이며 얼마나 죄악된 지를 깨닫고 또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거룩과 의임을 깨닫고 또 천국이 얼마나 사모할 만한 곳인지 깨달아야 한다. 다윗은 병중에서 사람의 삶이 그림자 같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였다(시 39:6). 또 시편 119편의 저자는 고백하기를,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하였다(시 119:67, 71).

넷째,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생각할 때, 세상 것들 중에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 물질적 이익이 생명의 가치를 대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경제적 부담 때문에 생명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비인간적인 생각이다. 주께서도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셨다(막 8:36).

안락사는 일종의 살인 행위이다. 인간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그것은 자신이나 타인에 의해 고의적으로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 남의 생명에 대한 고의적 손상은 분명히 살인이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해야 한다(벧전 4:19).

단지, 의학적으로 치유 불가능한 질병의 경우, 의학적, 인공적 수단(인공호흡기 등)이 병을 고치기보다 단지 죽음의 자연스런 진행과정을 방해할 뿐이라면, 그러한 무의미한 생명 연장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항하는 것일 수 있다. 사람은 죽어야 할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지 않고 대항하여 죽음을 피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치유 불가능한 질병이라는 의사의 판정이 있는 경우, 환자가 동의한다면 혹은 환자가 의식이 없는 경우 가족들이 동의한다면, 무의미한 생명 연장의 인공적, 의학적 조치는 중단될 수 있다고 본다.


자살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자살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미국의 플리머스 락 재단의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에서 매 20분마다 한 사람이 자살하는데, 하루에는 80명이고 1년에는 29,000명 이상이다. 매 100분마다 15세부터 24세 이하의 청소년이 한 명씩 자살하며 매년 6,000명 가량이 자살하며 또 매일 약 1,000명의 젊은이들이 자살을 기도한다고 한다.72) 전세계적으로는 매년 100만명 이상이 자살한다고 한다.73)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자료에 의하면, 2008년 우리나라는 인구 10만명당 24.3명의 자살률을 가지고 있고 세계 1위라고 한다.74) 자살자 수는 연간 약 12만명이나 된다. 자살은 심각한 사회 문제이다.

 

고대에 세네카와 스토아 학파는 각 사람은 고통에서 자신을 자유케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살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심각한 질병이나 천재지변이나 큰 사고나 노환으로 죽는 것은 사람이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며 섭리이고, 또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경우나, 전쟁에서의 희생적 죽음이나 합법적 권위에 의한 사형 집행으로 인한 죽음은 허용되지만, 사람이 다른 이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나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죄악이다.

자살이 죄악이라는 것은 다음 몇 가지 점을 생각할 때 분명하다.

첫째로, 사람의 생명은 타인의 것이나 자신의 것이나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생명의 소유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시편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편 100: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에스겔 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사도행전 17:25, “이[하나님]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따라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만 그 생명을 끝내실 권한을 가지고 계시며 사람은 그것을 끊을 권리가 없다.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고 빼앗는 것은 분명히 죄악된 일이다.

둘째로,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 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고 살인은 사형의 벌로 엄하게 보응을 받게 하셨다. 창세기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이와 같이, 사람은 다른 이의 생명을 존중해야 하듯이 자신의 생명도 존중해야 하며 그것을 잘 보존하고 지켜야 한다. 그것은 사람의 기본적 의무이다(마 22:39; 엡 5:28). 하나님이 주신 지극히 고귀한 것, 즉 하나님의 형상인 자기 목숨을 고의로 파괴하는 것은 분명히 죄악된 일이다.

셋째로, 사람에게는 존재의 목적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목적이 있게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 즉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사는 것이다. 이사야 43:7, 21,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저버리고 고의로 자기 목숨을 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하고 무책임한 일이다.

넷째로, 더욱이 구원받은 성도의 목숨은 자신의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피 흘려 사신 것이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전통사본). 그러므로 성도는 주의 것을 가지고 주의 영광을 위해 바르게 사용해야지 자기 마음대로 그것을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주의 핏값으로 사신 바된 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것이 아닌 자신의 목숨을 임의로 끊는 행위는 확실히 죄악된 일이다.

비록 자살하는 자에게 인간적으로 동정할 만한,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사정이 있다 할지라도, 비록 자살이 중죄(重罪)가 아닌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또 비록 자살하는 자의 구원 문제는 결국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일이라 할지라도, 자살은 분명히 허용되어서는 안 될 죄악이다. 애국자의 할복 자살이라도 성도에게는 합당치 않다.

성경에서 성도가 자살한 예는 없다. 성경에 기록된 자살의 예들은 다 악을 행하던 자들이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죄를 짓다가 버림당했던 사울은 결국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중상을 입고 자기 칼 위에 엎드려 죽었다(삼상 31:4; 대상 10:4). 다윗의 모사이었던 아히도벨은 후에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왕 다윗을 대적하였고 압살롬 앞에 베푼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 집을 정리한 후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삼하 17:23). 반역으로 7일간 왕이 되었던 시므리는 오므리의 반격을 받고 왕궁 위소에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놓고 그 가운데서 죽었다(왕상 16:18). 3년 동안 주를 따랐으나 그를 배신하고 은 30에 그를 팔아 넘겼던 가룟 유다는 주께서 정죄되심을 보고 스스로 후회하여 그 은 30을 도로 갖다 주며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마 27:3-5).

삼손의 경우(삿 16:28-30)는 전쟁 상황에서 원수들을 죽이는 일을 통해 자신도 죽은 경우로서 자살과 다르다. 자살이란 외적으로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데도 자기 목숨을 고의적으로 끊는 행위를 가리키며, 원수들과의 전쟁에서 자신을 바쳐 죽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과 절망은 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죄인의 구주이신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된 평안과 기쁨이 있다. 여기에 자살을 극복할 좋은 길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픔과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자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써 전하자.


사형

오늘날 많은 이들은 사형제도가 비인간적인 제도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89년 유엔 총회도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모든 조처를 강구하도록 하는 국제인권규약을 채택하였다.

사형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이유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로, 사형폐지론자는 사형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야만적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이 사형을 제정한 이유가 바로 사람의 존엄성 때문이다. 창세기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둘째로, 사형폐지론자는 사형제도가 율법의 폐지와 함께 폐지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형을 명한 창세기 9:6은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에 주어진 말씀이다. 또 구약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고 할지라도 율법의 정신은 유효하다. 로마서 7:12,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셋째로, 사형폐지론자는 성경에 사형으로 처리되지 않은 경우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가인이 살인자이지만 죽지 않았고, 다윗이 간음자요 살인자이지만 역시 죽지 않았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도 그렇다고 한다(창 4장; 삼하 11장; 요 8장). 그러나 하나님이 예외적으로 허용하신 경우가 성경에 명시된 사형제도의 폐지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가인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움을 가졌고(창 4:14), 다윗도 죽어야 마땅한 자임을 인정했고(삼하 12:5, 7), 간음했던 여인의 경우도 주께서 단지 사람들의 죄성을 일깨우시고 용서와 구원을 교훈하신 것이지 사형제도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

넷째로, 사형폐지론자는 사형이 인간의 개선이나 범죄의 억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형의 일차적 목적은 인간의 개선이 아니라 공정한 형벌이며, 사형은 여전히 범죄 억제를 위한 최상의 방책이다. 신명기 17:13, “그리하면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천자히 행치 아니하리라.”

다섯째로, 사형폐지론자는 사형이 신약의 사랑의 원리에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마태복음 5:39,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나 이러한 말씀은 성도 개인이 취할 행동 규범을 말한 것이지, 사회적 질서를 위해 필요한 사형제도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도 사형을 인정한다. 요한복음 19: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그 외에도, 사형폐지론자는 국가가 사람의 생명을 죽일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런 권세를 국가의 통치자들에게 주었다. 또 그들은 흉악범에 대한 책임이 많은 경우 범죄한 당사자에게만 있지 않고 사회 환경에도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회환경적 요인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은 자신의 극악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또 그들은 재판이 항상 오판(誤判)의 가능성이 있으며 사형에 대한 오판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된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가능성이 성경에 명시된 사형제도를 부정할 정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위의 고찰에서 사형의 정당성에 대한 성경적 이유들이 제시되었다.

첫째로, 사형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옹호이다. 창세기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귀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살인과 간음 등 인간에 대한 큰 악은 사형이라는 형벌을 받을 만하다.

둘째로, 율법, 특히 도덕법은 하나님의 본성과 의지를 반영한 것이며 그 율법의 정신은 신약 아래서도 유효하다. 구약의 사형제도는 그것이 심각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보응임을 나타낸다. 마태복음 5:17-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로마서 7:12,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디모데전서 1:8,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셋째로, 사형은 사회의 질서 유지와 범죄 억제를 위해 최상의 방책이다. 심각한 악은 사회에서 제거되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의 도덕 질서가 바르게 유지되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경고가 최선의 범죄 억제책이라는 것은 상식적이다. 성경도 그것을 말한다. 신명기 21: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신명기 13:11; 17:13; 19:20에도 같은 말씀이 있다.

넷째로, 신약성경은 사형을 인정한다. 요한복음 19: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사도행전 25: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死罪)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로마서 13:4,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면 구약의 율법은 어떤 죄를 사형에 해당한다고 규정하는가?

첫째는, 우상숭배의 죄이다. 무당(출 22:18), 다른 신에게 제사하는 자(출 22:20),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자(레 20:2),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레 20:6), 거짓 선지자(신 13:5), 이단을 전하거나 따르는 자(신 13:6-10)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죄이다. 레위기 24:16,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셋째는, 안식일을 범하는 죄이다. 출애굽기 31:14-15,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7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넷째는, 부모에게 악을 행하는 죄이다. 부모를 치는 자(출 21:15), 부모를 저주하는 자(출 21:17; 레 20:9), 부모를 거역하고 패역한 자(신 21:18-21)가 여기에 해당한다.

다섯째는, 살인하는 죄이다. 사람을 쳐죽인 자(출 21:12), 짐짓 모살한 자(출 21:14)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여섯째는, 간음하는 죄이다.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레 20:10), 계모와 동침하는 자(레 20:11), 며느리와 동침하는 자(레 20:12), 남자와 교합하는 자(동성애자)(레 20:13), 장모를 취하는 자(레 20:14), 짐승과 교합하는 자(레 20:15), 자매를 취하는 자(레 20:17), 월경하는 여인을 취하는 자(레 20:18), 이모나 고모를 범하는 자(레 20:19), 백숙모를 범하는 자(레 20:20), 남의 약혼한 자를 범한 자(신 22:23-24), 남의 약혼한 자를 들에서 강간한 자(신 22:25)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외에도, 인신매매자(출 21:16)와 무례하게 제사장이나 재판장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신 17:12)도 사형에 해당하였다.

이와 같이, 우상숭배와 이단, 안식일을 범한 자, 부모를 거역한 자, 살인한 자, 간음한 자 등이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이었다.

사형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율법에 정하신 제도이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사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는 정당한 재판을 통해 사형을 시행함으로써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유지하고 극악한 범죄를 억제하고 방지해야 했다. 우리는 심히 부도덕한 오늘날에도 사회의 질서 유지와 극악한 범죄의 억제를 위해 사형제도가 여전히 필요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불변하신 뜻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든 죄를 피하되, 특히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를 피해야 한다.



전쟁

인류는 일찍부터 많은 전쟁을 치루어왔다. 영토의 확장이나 경제적 동기나 지배권을 위한 전쟁으로부터 종교와 이념의 실현을 위한 전쟁까지 인류 역사는 많은 다양한 전쟁을 경험하였다. 특히 20세기 초엽과 중엽에 인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을 경험했다. 1, 2차 세계대전으로 전세계에서 7천 8백만명 이상이 사망하였다.75) 전쟁의 참혹한 결과는 말할 것도 없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인류는

 원자폭탄을 비롯하여 화학무기, 생물학무기 등 대량 살상무기로 인해 심각한 두려움 가운데 놓여 있다. 전쟁은 참혹한 일이다.그리스도인은 전쟁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어떤 이들은 모든 종류의 전쟁이 악하며 우리는 어떤 종류의 전쟁에도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평화주의적 견해를 가진 자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로, 평화주의자는 전쟁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살인이 항상 옳지 않으며 특히 전쟁은 대량 학살을 가져오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말한다.

둘째로, 평화주의자는 전쟁의 동기와 결과가 악하므로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든 전쟁이 다 탐욕에 근거하고, 가족과 친구들의 죽음, 신체 불구, 가정 파탄 뿐만 아니라, 또한 여러 가지 질병과 기아 등의 많은 불행한 일들을 만들며, 또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므로 모든 전쟁이 악하다고 말한다.

셋째로, 평화주의자는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전쟁을 명령하신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구약시대의 전쟁의 예들은 신정국가의 특수한 경우들이며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넷째로, 평화주의자는 성경이 악을 악으로 응징하지 말라고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는 주의 말씀을 인용하며(마 26:52), 또 악한 자를 대적지 말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도 인용한다(마 5:39, 44; 롬 12:17-21).

그러면 과연 평화주의자들의 이런 주장들은 타당한가? 그리스도인의 바른 전쟁관은 무엇인가? 성경은 전쟁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우리는 전쟁과 관련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국가 혹은 정부의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정부의 권세를 인정하셨다. 요한복음 19: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사도 바울도 국가와 통치자들의 권세를 인정하고 거기에 복종할 것을 교훈하였다. 로마서 13:1-4,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디도서 3:1,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라.” 사도 베드로도 교훈하기를,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고 하였다(벧전 2:13-14).

국가나 정부는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로 주신 기관이다. 하나님께서는 사회의 질서와 평안을 위해 통치자들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옛날 헬라 철학자 플라톤의 생각대로, 국가는 백성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는 역할을 하고 백성들은 자기 나라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 물론 자기 나라에 불만족한 자는 기회가 된다면 다른 나라로 이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나 정부는 사회의 혼란을 막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악한 정부라도 무정부(無政府)보다 낫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우리는 국가 혹은 정부의 역할과 권세를 인정하고 그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

물론, 국가나 정부가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는 악한 명령을 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그 명령을 복종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더 높고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그런 예들이 많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학대를 받고 있었을 때, 히브리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남자 아이가 나면 죽이라는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 아이들을 살렸다(출 1:17, 21).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금신상에 절하라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명령에 복종치 않았다(단 3장).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유대인 공회의 명령을 복종치 않았다(행 4:18-20).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은 국민으로서 국가와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

둘째로, 군인은 결코 나쁜 직업이 아니고 경건한 군인이 가능하며 세속 국가에서 군대 조직은 필요하다. 세례 요한은 군대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단지 군인들에게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誣訴, 거짓되이 비난]하지 말고 받는 요(料, 봉급)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했다(눅 3:14). 예수께서는 자기 하인의 중풍병을 위해 간구한 한 백부장이 이스라엘의 그 어떤 사람보다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증거하셨다(마 8:5-10). 성경은 온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한 고넬료라는 백부장에 대해 증거하며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는 천사의 증언을 기록하였다(행 10:2, 4). 또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로마 총독 베스도의 심문을 받았을 때, 그는 로마 시민으로서 가이사에게 호소하면서 그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위협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행 25:8-11). 군대는 악한 조직체가 아니고 사회의 질서와 평안을 위해 필요한 조직체이다.

셋째로, 정당한 전쟁은 인정되어야 한다. 정당한 전쟁이란 이성과 양심에 비추어 정당성을 가지는 전쟁을 말한다. 한 국가가 상대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 자기 나라와 그 국민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행하는 정당방위적 전쟁이나, 또는 다른 나라를 부당하게 침략했거나 악한 테러를 일삼는 나라에 대해 여러 나라들이 연합하여 응징하는 전쟁 등은 정당한 전쟁이다. 국가가 이러한 정당한 전쟁을 수행하려 할 때 모든 국민은 그 전쟁에 참여하고 협력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공의의 응징에 대해 가르친다. 이것은 국가가 행하는 사형의 정당성에서 확인된다. 창세기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또한 성경은 정당 방위를 옹호한다. 출애굽기 22:2,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아마 그런 의미에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검 없는 자는 검을 사라고 말씀하셨다(눅 22:36).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행한 전쟁은 이런 전쟁이었다(창 14장). 또 유다 왕 아비야 때에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침공한 이스라엘 군대를 쳐서 패하게 하셨고(대하 13:15-16), 여호사밧 때에도 침략한 이방 나라를 패배케 하셨다(대하 20:22-23, 29).

물론, 가능한 한 전쟁을 피하는 것은 선한 일이므로 전쟁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전쟁은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신명기 20:10-15,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할 때에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평화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온 거민으로 네게 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만일 너와 평화하기를 싫어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붙이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속의 남자를 다 쳐 죽이고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육축과 무릇 그 성중에서 네가 탈취한 모든 것은 네 것이니 취하라. 네가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것인즉 너는 그것을 누릴지니라.” 이와 같이 합법적 전쟁이라 할지라도, 포로들이나 여성과 어린이의 학대나 민간인 살상 등을 피해야 하며, 특히 오늘날 화학 무기, 생물학 무기, 핵무기 등 대량 살상무기의 사용은 금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개인적 보복과 공적 보복은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의 교훈(마 5:38-44)이나 원수를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사도 바울의 교훈(롬 12:19-21)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 개인적 보복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주님 자신이나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에서 볼 수 있듯이(눅 23:34; 행 7:60) 상대방의 영혼 구원을 위하는 사랑의 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말씀들이 사회의 평안을 유지하기 위한 정당한 전쟁을 부정하는 구절로 사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개인적인 보복적 살인은 허용되지 않으나 공적인 사형 집행이 정당하듯이, 국가는 이성과 양심에 비추어 정당성을 가지는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장로교회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2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정당하다고 본다. “그리스도인들이 정부의 관리들의 직분에 부름을 받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며 수행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그것을 수행함에 있어 그들은 각 국가의 건전한 법들에 따라 특히 경건과 의와 평화를 유지해야 하므로, 그 목적을 위해 지금 신약 아래서도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에 합법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



혁명

혁명이란 급격한 방법으로 기존 질서를 전복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역사상 이루어진 혁명들의 방법은 보통 비합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이다. 폭력 시위로 사회 질서를 전복시키는 것도 같은 종류이다.

죄악된 인간은 반역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그 성향은 사회에서도 나타난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자주 반역적이었다. 열 정탐꾼의 불신앙적 보고를 들은 백성은 밤새도록 통곡하였고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민 14:1-4). 또 고라와 그 동료들과 이스라엘의 유명한 족장 250명은 모세를 대적하는 반란을 도모하였다(민 16:1-3).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를 대항하여 반역을 도모하였다(삼하 15장).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 집을 배반하여 북쪽 왕국을 세웠다(왕상 12:19). 북방 이스라엘의 후기 역사는 반복된 혁명과 반역의 역사이었다(왕하 11:1; 15:10, 25, 30).

세계사는 수많은 혁명들로 이어진 역사이다. 성공한 혁명은 정통적 역사로 이어지기도 하고 실패한 혁명은 반역으로 단죄되고 처형되어 역사에서 속히 잊혀지기도 하였다.

혁명들 중에 인류 역사상 근래에 일어난 세계적 혁명이 공산 혁명이었다. 공산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개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하고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보장하는 제도이다. 이것을 자유시장제도라고도 한다. 한편, 사회주의는 생산수단(토지, 노동력, 자본)의 국유화에 근거한 경제적 평등 사회를 추구하는 제도이다. 사회주의는 분배를 강조한다. 우리나라의 고교 평준화의 사고방식이나 빈부격차를 줄이는 부의 재분배에 대한 관심과 강조는 일종의 사회주의적 사상이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의 한 형태로서 혁명적, 강제적 방식으로 경제적 평등 사회를 이루려는 제도이다.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와 사회철학자인 칼 마르크스가 엥겔스와 함께 쓴 공산당 선언에 영향을 받은 레닌은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을 일으켰고(1924년 사망) 오늘날 공산국가들은 이러한 공산혁명에 의해 세워졌고 공산당의 독재적 통치를 받고 있다.

자본주의의 약점은 빈부의 격차가 크다는 데 있지만, 그것의 장점은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 가난을 모면하고 물질적 유여함을 가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구 소련과 중국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실험하였으나 그 결과는 실패이었다. 그들은 다같이 못 사는 나라가 되었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은 자본주의적 방식을 채용하여 경제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공산주의는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대학살을 저질렀다. 후버연구소의 러시아 전문가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는 엄청난 폭력(The Great Terror)이라는 책에서 구소련의 전 수상(1958-64년) 후로시초프의 1956년 2월 전당대회에서의 증언에 근거하여 1936년에서 1938년 사이에 1917년 10월 혁명 이전에 공산당에 입당한 사람의 90%와 그 후에 입당한 사람의 50%, 그리고 군 장성의 60%가 처형되었다고 말했다.76)

스탈린77)은 혁명에 방해되는 대상에 대해서 무자비한 처형을 단행하였다. 그는 소위 ‘에조프시치나’ 대학

살로 세계를 경악시켰다. 스탈린의 군부 대숙청으로 5명의 원수 중에서 3명, 15명의 군사령관 중에서 13명, 85명의 군단장 중에서 57명, 195명의 사단장 중에서 110명, 406명의 여단장 중에서 220명 등 5,000명이 넘는 고급장교가 처형되었다. 혁명에 방해되는 군부의 고급 장교들은 두하체프스키 원수의 죄목에 뒤집어 씌워 처형되었다.

공산주의 흑서라는 책에 실린 통계를 보면, 1917년 러시아의 공산혁명 이후 지구에서 8,500만 내지 1억명의 생명이 숙청, 굶주림, 집단 추방, 강제 노역 등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 가운데는 중국이 6,500 내지 7,200만명, 구 소련이 2,000만명이다.78)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1950년 6월 25일에 남한을 무력 침공하여 약 3백30만명의 우리 동족을 죽게 하였다. 그 외에 미군 등 UN군 사망자가 3만7천명이며 중공군 사망자가 90만명으로 추산된다.79) 그것이 공산혁명의 결과이다. 또 북한은 현재 일인 독재 체제이며 국민의 자유와 인권이 보장

되지 않는 공포사회이다. 또 북한은 그 동안 온갖 테러를 행해왔고, 1990년대 이후에는 약 300만명의 주민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군사력 증강에 몰두했다. 또 수용소 체험을 한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에는 지금도 5, 6개의 정치범 수용소에 20, 30만명가량이 노예 같은 생활을 하고 있고, 1998년부터 2001년까지 당 간부 2만여명을 처형하는 등 1950년대부터 2001년까지 약 150만명의 정치범이 죽임을 당했다.80)

그리스도인은 혁명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혁명에 대한 바른 평가와 대책은 무엇인가?

혁명은 옳지 않다. 폭력적 혁명은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은 일종의 불법적 테러이다. 그것은 조직 폭력배의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비록 의도가 좋을지라도 방법이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첫째로, 혁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고의적으로 범하기 때문에 옳지 않다. 혁명은 많은 사람을 부당하게 학살한다. 집단 학살은 악마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산주의를 악마적 사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 일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로, 혁명은 세속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 성도는 세속 권세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로마서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베드로전서 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 성도는 세속국가의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하고(딤전 2:1-2) 정해진 세금을 내며(롬 13:7)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왕이나 세속 권세자들을 반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경은 반역을 정죄한다. 잠언 24:21,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혁명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보장이 없다. 그것은 오히려 더욱 사회적 퇴보와 악화와 혼란을 가져왔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인간은 다 악하고 이기적이다. 공산주의 국가를 보라. 그것은 공산당의 일당 독재국가이며 공포사회이었다. 공산주의 사회는 인권의 존중, 신앙의 자유, 언론과 집회의 자유 같은 것이 없는 사회이었고, 모두가 다 평등하게 잘 사는 사회이기는커녕 일종의 귀족계급 사회로 전락하였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는 최선의 사회 구조가 아니다.


 

제7계명

출애굽기 20:14, “간음하지 말지니라.”



제7계명에서 요구된 의무와 금지된 죄

[138문] 제7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무엇인가?

[답] 제7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몸, 마음, 애정, 말, 행위상의 정절과 우리 자신들 및 다른 사람들 안에 정절을 보존하는 것, 눈과 기타 모든 감관(感官)들에 대하여 방심치 않고 주의하는 것, 절제, 정절 있는 친구와 사귀며 온당한 의복 차림, 금욕의 은사 없는 자들의 결혼, 부부의 사랑과 동거, 우리의 사명에 근실한 노력, 모든 경우의 부정을 피하는 것과 그것에 향하는 시험을 저항하는 것이다.

[139문] 제7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무엇인가?

[답] 제7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요구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 외에 간통과 사통, 강간, 근친상간, 남색, 모든 부자연스런 정욕, 모든 부정한 상상과 생각, 목적 및 애정이며, 부패하거나 더러운 모든 서신왕래, 혹은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음탕한 표정, 뻔뻔스럽고 가벼운 행동, 근신치 않는 무례한 옷차림을 하는 것, 또 합법한 결혼을 금지하고, 불법한 결혼을 시행하는 것이며, 매춘(賣春)을 허락, 관용, 보존하며 그들에게 종종 가는 것이며, 독신생활의 서약에 몰아넣는 것, 결혼을 부당하게 지연시키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 이상의 아내나 남편을 가지는 것이며, 불의한 이혼 혹은 [상대를] 버림이며, 또 게으름, 폭식, 술취함, 음란한 친구를 사귀는 것이며, 음탕한 노래와 서적, 춤, 연극, 우리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음란을 자극시키는 것이나 음란의 행위 자체이다.



결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남자를 만드시고(창 2:7) 사람의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 그를 돕는 자를 만들기 위해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 하나로 여자를 만드셨다(창 2:18, 21-22).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를 그 남자에게로 이끌어 오셔서 부부가 되게 하셨다. 이것이 최초의 결혼이었다. 결혼제도는 하나님께서 창세 초에 만드신 제도이다. 그것은 사람의 타락 전부터 있었던 제도이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설명인 창세기 2:24는 결혼이 무엇인지 보이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거기에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했다.

이 말씀은 결혼이 무엇인지 증거한다. 첫째, 결혼은 자녀가 성장하여 부모와 분리되어 독립가정을 형성하는 것이다. 결혼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이다. 둘째, 결혼은 남자가 그 아내와 연합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부관계가 부모와의 관계보다 더 친밀한 연합의 관계임을 보인다. 셋째, 결혼은 부부가 영육으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결혼의 신비를 보인다.

결혼은 부부가 한 몸으로 사는 것이다. 부부는 두 별개의 인격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부부는 친구 정도로 살아서도 안 된다. 결혼은 단순한 동거(同居)가 아니다. ‘한 몸’이라는 말은 심오한 표현이다.

‘한 몸’이라는 말은 생각과 의향과 목표와 가치관, 그리고 심지어 돈주머니까지 하나이어야 함을 보이는 표현이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인 성관계도 부부간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창세기 2:25는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벌거벗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부부관계에서만 가능하다. 한 몸은 그러한 친밀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결혼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 비유한다. 에베소서 5:30-32, “우리는 그[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결혼은 또한 언약적 성격을 가진다. 주 예수께서는 결혼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마 19:6)이라고 말씀하셨다. 잠언 2:17은 음녀를 “소시(少時)의 짝을 버리며 그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고 말한다. 말라기 2:14는 하나님께서 부부간의 증인이셨다고 말하며 아내를 “너와 맹약한 아내[네 언약의 아내]”라고 표현한다. 결혼은 적어도 이 세상에서 죽을 때까지 계속 성실히 지켜져야 할 언약적 관계이다.

결혼의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로, 결혼은 상호 협조를 위해 제정되었다. 창세기 2:18,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돕는 자]을 지으리라.” 사람은 다른 이와 함께 사는 사회적 존재이다. 사람은 서로 돕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친구가 필요하고 교제가 필요하다.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친구요 협조자다. 가정은 피곤한 세상 생활에서 휴식과 위로의 보금자리이다.

둘째로, 결혼은 자녀의 출산을 위해 제정되었다. 성경은 결혼의 한 목적이 출산이며 많은 자녀들의 출산 즉 다산(多産)이 하나님의 복임을 증거한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세기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시편 127:4-5,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箭筒)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화살통에 화살이 가득한 전사와 같이, 자녀들이 많은 가정은 복되다. 그러므로 부모의 건강이 매우 나쁘거나 경제 형편이 매우 어려운 경우가 아니라면 자녀의 수는 많은 것이 좋다.

역사상 위대한 어떤 인물들은 부모의 다산의 결과이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요 경건했던 요한 웨슬리는 그 부모의 15번째 아들이었다. 오늘날도 경건한 가정들이 많은 자녀들을 둔 예들을 볼 수 있다. 미국의 보수적 루터파 신문인 크리스챤 뉴스(Christian News)의 편집자 헤르만 오톤 목사는 6, 7명의 자녀를 두었고, 밥 죤스 대학교 음악교수인 멀핑거 교수는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셋째로, 결혼은 부정(不淨)의 방지를 위해, 즉 음행을 피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고린도전서 7:2,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사람에게는 성적 감정과 요구가 있고 그 감정은 결혼으로 해소된다. 악하고 음란한 세상 속에서 정당한 부부관계가 없다면, 사람은 음행의 죄에 떨어지기가 더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가르치기를 “서로 분방하지 말라[서로 거절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고전 7:5).

그러나 주를 위해 홀로 사는 것도 가능하며 때때로 더 나을 수도 있다. 고린도전서 7:8,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고린도전서 7:38, “처녀딸을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독신생활은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필요하다.

성도의 결혼 대상은 반드시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도는 불신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 신명기 7:3, “너는 가나안 족속들과 혼인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7: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6:14,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창세기 6:2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 것)”은 경건한 셋의 아들들이 불경건한 가인의 딸들과 결혼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 결혼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다. 또한 유다의 역사에서 유다 왕들은 믿음 없는 아내들로 인하여 범죄한 일이 많았다. 역대하 21:6, “저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자과 결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나 이방 종교인이나 천주교인이나 이단 종파에 속한 자나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자와 결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자와 결혼하는 자에게는 영적 고통이 뒤따른다. 그런 자에게는 성수주일, 십일조, 술 담배, 제사, 장례식 등 실제 문제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다.

또 친족간의 결혼도 합당치 않다. 레위기 18장은 근친상간뿐 아니라 또한 친족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으로 이해된다. 거기에 금지된 대상은 어머니, 계모, 자매, 손녀와 외손녀, 고모, 백숙모, 자부, 형제의 아내 등이다.

성경적 결혼은 일부일처(一夫一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 둘이 부부가 되게 하신 사실에서 확증된다(창 2:21-24). 그러므로 신명기 17:17은 왕에게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명령했고 디모데전서 3:2는 감독이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세상에 태어나는 남녀의 비율이 거의 같은 것도 일부일처가 하나님의 뜻임을 보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1,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남자이든지 동시에 한 아내 이상을 가지거나, 어떤 여자든지 동시에 한 남편 이상을 가지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다.”

성경 역사상, 야곱, 솔로몬, 르호보암(대하 11:21), 그의 아들들(대하 11:23), 아비야(대하 13:21), 요아스(대하 24:3) 등이 여러 아내를 취했다. 그러나 성경이 그것을 기록한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보이는 역사적 사실을 증거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셨거나 권장하신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특히 야곱의 경우는 본인의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솔로몬의 경우는 많은 아내들로 인하여 결국 신앙의 실패를 맛보았다(왕상 11:4-8).

젊은이가 결혼을 위해 준비할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믿음의 준비이다. 이를 위해 신랑과 신부는 결혼 전에 성경읽기와 기도생활에 힘써야 한다. 자녀들이 생기고 힘들고 바쁜 시간이 오기 전에 그렇게 하여야 한다. 잠언 19: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잠언 31: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잠언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이상적 결혼 관계와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워주셔야 세워진다(시 127편).

둘째로, 결혼할 자는 인격적 성숙을 준비해야 한다. 인격적 성숙은 참 믿음에서 나온다. 결혼은 사랑과 순종의 인격적 관계이며 부부는 사랑, 이해심, 관용, 인내, 명랑함 등의 덕을 가져야 한다. 잠언 12:4, “어진 여인은 그 남편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남편으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잠언 14:1,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잠언 15:17,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肉饍, 고기 반찬)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2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잠언 21:19,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셋째로, 결혼할 자는 건강을 준비해야 한다. 건강은 이 세상의 삶을 위해 매우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적절한 운동과 영양 섭취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특히, 집안 일은 중노동이므로, 여자가 시부모님을 모시는 경우, 건강은 필수적이다. 몸이 허약하면 가사의 일을 잘 감당하기 어렵다.

넷째로, 결혼할 자는 경제적 안정을 준비해야 한다. 잠언 24:27,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 이것은 결혼 시기와도 관계된다. 학생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가진 후 결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같이 고생을 나눌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전에도 가능하며 더 친밀해지는 유익도 있지만 많은 고생이 따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혼을 준비하는 이들은 교제시 범죄치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남녀의 친근한 교제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항상 공개적이어야 한다. 방에서나 차를 타서나 단 둘만의 은밀한 교제는 삼가야 한다. 또한 결혼 전 남녀교제는 인격적이어야 하고 육감적이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결혼할 자는 춤, 수영, 음란한 영화나, T.V. 프로나 인터넷, 손을 잡거나 포옹하는 것 등을 삼가는 것이 좋다.



부부의 의무

결혼은 부부가 한 몸으로 사는 것이며, 그것은 아내의 순종과 남편의 사랑의 관계로 사는 것이다.

에베소서 5:22-24는 아내의 의무에 대해 말한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18에서도,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교훈하였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3:1-6에서 같은 교훈을 하였다.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위의 구절들에서 분명히 교훈된 대로, 아내는 자기 남편을 주님처럼 생각하며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남편을 아내의 머리[우두머리]가 되게 하셨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이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고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순종하는 아내는 남편과 다투지 않는다. 교회가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다툴 수 없듯이, 아내는 남편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 다툼은 부부의 좋은 관계를 깨뜨리고 그들의 사랑을 식게 만들 것이다. 혹 남편이 잘못을 범했을 때라도 즉시 비판하거나 다투지 말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기회를 봐서 그에게 조용히 충고해주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지혜로운 여자는 남편을 존중하고 자기 집을 세우지만, 어리석은 여자는 사사건건 남편과 다투며 자기 집을 허물 것이다(잠 14:1).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가사의 의무에 충실한 주부가 될 것이다. 남편을 돕는 일은 우선 가사의 일을 포함할 것이다. 참 사랑은 봉사, 희생, 수고를 동반한다. 훌륭한 아내는 모범적인 주부이어야 할 것이다. 시편 128:3은 아내를,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라고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매끼 식사 준비는 아내에게 맡겨진 중요한 의무이다.

잠언 31장은 모범적인 여성상(像)을 증거하는데, 그를 ‘현숙한 여인’이라고 표현한다. ‘현숙한 여인’이라는 원어(에쉣 카일)는 ‘지혜와 덕성과 현실 대처능력이 있는 여인’을 의미한다고 본다. 거기에 보면, 그는 살아 있는 동안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며(12절),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13절),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하루일과를 준비하며 집사람들에게 일을 배정하며(15절),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20절), 그 집안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는 자이며(27절), 무엇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다(30절).

사도 바울도 디도서 2:4-5에서 나이든 여자들에게 교훈하기를, 젊은 여인들에게 가르치기를,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고 했다.

또, 아내는 하나님 외에는 자기 남편을 가장 사모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는 자기 남편 외에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부모나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자기 남편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

아내가 이런 선한 자가 되려면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도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여성도가 아담한[단정한] 옷을 입고, 머리 단장이나 금은보석이나 값진 옷의 단장을 조심하고, 심령의 온유함과 조용함, 또 염치와 정절로 단장하라고 교훈한다(딤전 2:9-10; 벧전 3:4).

에베소서 5:25는 남편의 의무를 말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 말씀은 남편이 조건 없이, 희생적으로 아내를 사랑해야 함을 보인다. 골로새서 3: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7에서 교훈하기를,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아내에 대한 사랑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남편은 아내에게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주어야 할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을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내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이나 욕을 해서는 안 되며, 따뜻한 말과 사랑의 고백 그리고 적절한 칭찬과 감사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3500년 전 옛날에, 모세는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교훈하기를,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1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고 하였다(신 24:5).

남편은 아내를 인격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남편은 어떤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 아내의 의견을 듣고 그와 의논하고 하나님께 함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아내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태도이다. 또 가사의 일이 무미건조하고 피곤한 일임을 인식하고 시간과 힘이 있으면 설거지, 청소, 빨래 등 집안일을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또 남편은 아내의 취미나 관심 분야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할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라도 남편은 아내를 구타하거나 말로라도 학대해서는 안 된다.

또 남편은 가정의 경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부지런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손으로 수고한 대로 먹는 것을 복이라고 말한다(시 128:2). 물질의 복은 근면한 남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남편이 자기것으로 여겨 아내를 가난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내가 매우 불성실하고 낭비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가정 경제의 관리를 아내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경은 사랑이 무엇인지 잘 증거한다. 잠언 10:12는,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말한다. 특히, 고린도전서 13:4-7은 사랑의 성격에 대해 자세히 증거한다. 거기에 말하기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한다. 남편은 이처럼 아내를 배려하고 자신의 유익보다 아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며 사랑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사랑과 순종의 관계이다. 진실과 신뢰를 동반하는 참된 사랑과 순종은 주 안에서만 가능하므로 이상적 부부관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신앙 안에서만 가능하다. 두 사람이 함께 기도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함께 구할 때, 부부의 온전한 사랑과 순종이 가능할 것이다.


성(性)관계

성(性, sex)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즉 사람이 타락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것은 결코 나쁘거나 죄악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창 2:24-25). 그러므로 부부의 성관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이요 부부의 사랑을 유지하고 증진시키는 방편이다. 흔히, 부부의 성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부부의 사랑에도 문제가 생긴다. 잠언 5:18-19,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전도서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라.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분복이라.”

또 부부의 성관계는, 육신의 연약한 감정을 가진 인생이 음란한 이 세상에서 음행을 피하는 정당하고 선한 방편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7:2-5는, 부부가 분방하지 말고 서로의 몸을 거절하지 말라고 교훈한다: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서로 거절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물론, 성은 반드시 정당한 부부관계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부부관계 이외의 모든 성행위, 예를 들어, 간음, 음행, 결혼전 성관계, 성 매매, 동성애 등은 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레위기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레위기 18:22,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출애굽기 22:19,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레위기 18:23,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가 된 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

또 성은 부부관계에서만 허용되므로 은밀함이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남녀의 키스, 애무, 성행위까지 영화나 인터넷 동영상으로 표현되고 공개되는 풍조는 한마디로 사람의 죄악된 감정을 자극하는 죄악된 음란 풍조이다. 소위 성인 영화는 하나님 앞에서 다 음란물로서 그것은 세상을 더욱 음란한 세상으로 만드는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른이나 아이나 이런 풍조를 대적하고 깨어 대처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을 이런 풍조로부터 멀리하지 않으면 우리는 죄 가운데 빠지게 될 것이다.

또 성 문제에 있어서, 한가지 첨가할 교훈은 절제에 대한 것이다. 성은 아름답고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 절제가 필요하다. 절제는 금욕(禁慾)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금욕은 성행위를 완전히 끊는 것을 의미하지만, 절제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조건 아래서 그것을 끊는 것을 의미한다. 금욕은 그런 은사를 받은 자에게만 가능하지만, 절제는 모든 성도에게 요구된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첫째이고, 하나님이 주신 부부의 사랑은 둘째이므로, 성도가 너무 육신의 즐거움에 빠져서 경건 생활이나 봉사에 지장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이든지 지나친 것은 죄가 된다. 성도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6:12-13,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이혼, 별거, 재혼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신성한 제도이다. 그것은 일평생 동안 유지해야 할 관계의 시작이다. 그러나 오늘날 여러 가지 이유로 이혼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혼은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경우에 가능한 것인가? 또 별거는 바람직한 것인가? 또 이혼한 성도는 재혼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말해, 결혼은 일평생 동안 유지하고 성실히 지켜야 할 언약 관계이다. 사람은 결혼을 할 때도 신중히 해야 하지만, 결혼한 후에는 그 결혼 관계를 성실히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미워하신다. 말라기 2:16,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옷으로 학대를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마태복음 19: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그러면 이혼은 어떤 경우에도 불가능한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물론, 성격적 혹은 인격적 결함, 경제적 문제, 질병, 자녀를 낳지 못함, 집안 상호간의 문제 등이 이혼의 합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다음 몇 가지 경우는 이혼의 합당한 경우일 것이다.

첫째로, 상대가 간음을 행했을 경우이다. 마태복음 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마태복음 19: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음행’이라는 말(포르네이아 πορνεία)은 부당한 성관계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 경우는 결혼한 사람이 행하는 간음을 가리킨다(Thayer). 즉 상대가 간음을 행했을 때 정당한 이혼이 가능하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약혼 후에 범한 간음이나 음행은, 결혼 전에 발견될 때, 순결한 편에서 약혼을 취소할 정당한 이유가 된다. 결혼 후 간음의 경우에는, 순결한 편이 이혼 소송을 제기하는 것과, 이혼 후 범죄한 편이 죽었다는 듯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진술했다(24:5).

둘째로, 신앙적 이유로 나뉘는 경우이다. 고린도전서 7: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이 말씀은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믿는 문제 때문에 믿는 자와 헤어지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는 교훈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가족 관계보다도 더 중요하다. 같이 살기를 원하면 같이 살고 또 가능하면 같이 살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신앙 문제 때문에 나뉘기를 원하면 거절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셋째로, 고의적으로 상대를 버린 경우이다. 이것은 남편 혹은 아내가 일방적으로 상대를 버리고 떠난 경우이다. 이것은 버림을 받은 쪽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상대가 떠나는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며 또 그것이 과연 합당한 이유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남편 혹은 아내가 일방적으로 상대를 버리고 떠난 경우 이혼은 불가피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6은 진술하기를, “비록 사람의 부패성은 하나님께서 결혼에서 짝지어 주신 자들을 부당하게 나누려는 변론들을 궁리하기 쉬울지라도; 간음이나, 혹은 교회나 정부 관리가 치료할 방법이 없는 고의적 버림 외에는 아무것도 결혼의 속박을 풀 충분한 원인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공적이며 질서 있는 소송 절차가 준수되어야 하며, 당사자들이 그들 자신의 사건에서 그들 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버려두어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교회나 정부 관리가 치료할 방법이 없는 고의적 버림’의 경우를 이혼의 합당한 사유에 포함하였다.

그 외에, 구타나 학대 등의 심히 비인간적인 고통을 당하는 경우나 전쟁으로 인한 분리의 경우도 이혼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결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결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며, 또 하나님은 사람의 행복을 원하시며 사람의 큰 심적, 육적 고통을 동정하시기 때문에, 극히 부득이한 경우 가능하리라고 본다.

이와 같이, 이혼은 원칙적으로 없어야 하지만, 부득이 몇 가지 경우 가능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혼은 사사로이 당사자들에게 맡겨져서는 안 되고 교회와 사회의 합법적 절차를 따라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앞에 인용한 신앙고백의 진술대로, 그것을 위해, “공적이며 질서 있는 소송 절차가 준수되어야 하며” 당사자들의 “의지와 판단에 버려두어져서는 안 된다.”

부부가 별거하는 문제도 이혼의 원리와 비슷하다. 부부의 별거는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의 정하신 결혼 이유들 중에는 음행의 방지라는 이유가 있다. 고린도전서 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부부는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함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정상적인 생활이다.

그러나 이혼의 경우와 같이, 부득이한 경우, 부부의 별거는 가능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교훈하기를,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하였다(고전 7:10-11).

또 잠언의 세 구절들은 그런 일에 대해 말한다. 잠언 2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잠언 21:19,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잠언 25:24,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성도가 재혼(再婚)하는 것은 가능한가? 가능하다고 본다. 성도가 재혼이 가능한 경우는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는 결혼한 상대가 죽었을 경우이다. 로마서 7:2-3,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淫婦)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고린도전서 7: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이것은 남편의 경우나 아내의 경우에 다 해당한다.

둘째는 정당한 이혼이 이루어진 경우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연약함을 아신다. 그러므로 정당한 이혼이 이루어진 경우에 재혼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죄가 아니라고 본다. 마태복음 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 말씀은 정당하지 않은 경우 재혼이 간음의 죄가 되지만 정당한 이혼의 경우에는 재혼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진술하기를, “약혼 후에 범한 간음이나 음행은, 결혼 전에 발견될 때, 순결한 편에서 약혼을 취소할 정당한 이유가 된다. 결혼 후 간음의 경우에는, 순결한 편이 이혼 소송을 제기하는 것과, 이혼 후 범죄한 편이 죽었다는 듯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했다(24:5).

물론 재혼도 신중히 결정해야 하며 또 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재혼한 자는 그것을 남은 평생 지키려고 성실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결혼 제도를 통해 이 세상에서 범죄치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동성애

동성애(同性愛)는 동성(同性) 간의 성행위를 말한다. 성경에서 맨처음 동성애를 말한 것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성의 이야기에서이다. 소돔 성의 사람들은 그 날 저녁에 롯의 집에 들어온 사람들과 성관계를 갖기를 원하였다. 어떤 이들은 소돔 성의 이야기가 동성애 문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것은 명백히 잘못된 해석이다. ‘그 성 남자들(안쉐) 곧 소돔 남자들(안쉐)’은 “네게 온 그 남자들(하아나쉼)이 어디 있느냐? 그 남자들을 이끌어내라(호치엠). 우리가 그 남자들과(오담) 상관하리라”고 말했다(창 19:5). 이것은 분명히 남자들이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를 갖겠다는 뜻이다. ‘상관한다’는 말은 성경에서 17번 이런 의미로 쓰였다.

사사 시대에도 소돔 성의 일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기브아의 이야기이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은 거기 살던 노인의 집에 유숙하기 위해 들어온 레위인을 내어놓으라고 요구하며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고 말했다(삿 19:22). 그 구절을 재번역하면, “벨리알의 아들들(베네)인 그 성의 남자들(안쉐)은 . . . 말하기를, 네 집에 들어온 남자(하이쉬)를 끌어내라. 우리가 그 남자와 상관하리라(웨네다엔누)”이다. 그들이 동성애 관계를 원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동성애를 용납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고 교회 안에서도 그것을 용납하려는 움직임이 널리 일어나고 있다.81)

1972년, 미국 연합그리스도의 교회(UCC)는 윌리암 존슨(William Johnson)의 안수를 허락하였다. 그는 대교단에서 안수받은 첫 번째의 공공연한 동성애자이었다.82) 1980년, UCC는 현행적 남녀 동성애자들을 목사로 봉직하도록 공식적으로 허용한 최초의, 유일한 대교단이 되었다.83) 1985년, 2년마다 모이는 UCC 총회는 동성애자들을 목사로 허락하는 것을 압도적 표수로 결정하였다.84)

1988년, 카나다 연합교회(UCC)는 카나다에서 동성애자의 목사 안수를 합법화한 최초의 교단이 되었다.85)

1993년 11월,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 리-이메이징(Re-imaging) 대회를 후원하였다. 그 대회 연사들 중 다수는 여성 동성애를 조장하였고, 약 100명의 여성 동성애자들은 동성애를 자축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와 기립 박수를 받았다.86)

1997년 9월 미국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의 제일 연합감리교회(UMC)의 지미 크리치(Jimmy Creech) 목사는 그의 교인들 중 두 명의 여자 동성애자들을 위해 결혼식을 거행하였다.87) 1998년 1월, 연합감리교회 소속 목회자들 일부가 동성애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88)

1999년 1월 16일, 한 여성 동성애 부부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서 1,500명의 사람들 앞에서 95명의 연합감리교회 목사들에 의해서 ‘축복’을 받았다.89) 그들은 그 의식을 동성애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동성애자들의 결합에 대한 그들 교단의 금지 조치에 항의하기 위해 사용하였다.90)

미국의 대표적 동성애교회인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교회 세계협회의 지도자 그윈 깃보드(Gwynne Guidbord)는 1999년 미국 교회협의회(NCC) 총회에서 연사로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회집된 교회협의회 대표들 중 최소한 절반은 서서 그 여자에게 갈채를 보내었다.91) 2001년, 그 여자는 캘리포니아 교회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92)

1999년,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는 동성애 전도자 제인 스파(Jane Spahr)를 그 해의 ‘신앙의 여성’ 수상자로 지명하였다. 두 명의 자녀를 둔 이 이혼모는 그 교단을 섬기는 첫 번째 공공연한 동성애자이었다.93)

2000년 2월 12일, 미국 감독교회(ECA)의 올림피아 교구 세인트 마크 대성당에서는 공공연한 동성애자 로버트 테일러 주교의 수석주교 임명식이 거행되었다. 200명에 달하는 교구 대표들과 세계 각지에서 온 수백명의 성직자와 교회 대표들이 그 의식에 참석하였다.94)

2003년 6월 7일, 미국 뉴햄프셔 주 관구는 미국 감독교회 역사상 최초로 공공연한 동성애자 진 로빈손(V. Gene Robinson)을 주교로 선출하였다. 그는 13년 전, 엄숙한 결혼 서약을 깨뜨리고 그의 아내와 두 어린 딸을 버리고 그의 남자 파트너와 함께 이사하였다.95)

오늘날 이런 풍조가 교회 안에까지 이렇게 들어오고 있지만, 동성애는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큰 죄악이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셔서 연합케 하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위배될 뿐 아니라,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을 위반하는 음란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악하고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 성을 유황불로 심판하셨다. 또 사사 시대에 심히 음란했던 기브아와 베냐민 지파 전체는 거의 전멸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었다.

율법은 부부 관계를 벗어난 성행위, 즉 결혼 전 혹은 결혼 외의 성행위를 음란으로 정죄하며, 특히 동성간의 성행위를 가증한 죄악으로 간주한다. 레위기 18:22,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신명기 23:17,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美童, 카데쉬, 동성애자)이 있지 못할지니.” 열왕 시대에도 남색(男色, 동성애)은 큰 악으로 정죄되었다(왕상 14:24; 15:12; 22:46; 왕하 23:7). 동성애의 죄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다. 레위기 20:13,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신약성경도 동성애를 큰 죄로 간주하며 그 죄를 짓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히 증거한다. 로마서 1:26-27,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매춘, 여자 동성애),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디모데전서 1:10, (불법한 죄의 예들)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탐색하는 자’(말라코스 μαλακός)는 남색의 상대자를 가리키고, ‘남색하는 자’(아르세노코이테스)는 ‘남자 동성애자’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동성애가 죄라는 것은 신구약성경에서 너무나 명백하다.

오늘날 교회들 안에 있는 동성애를 용납하는 경향은 현대교회의 배교의 한 증거일 뿐이다. 동성애는 사형에 해당하는 가증한 죄이며, 그것은 다른 큰 죄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고 오직 철저히 회개해야 할 죄이다.

특히, 오늘날 동성애를 통해 에이즈 전염병(AIDS, 후천성 면역결핍증)이 많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징벌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 보도에 의하면, 미국의 에이즈 환자 12,067명 중 남성이 92%인데, 그 중에 78%가 동성애자라고 한다.96) 유엔 에이즈 계획(UNAIDS)에 의하면, 2002년 7월 현재 에이즈 바이러

스(HIV) 감염자수는 세계적으로 4천여만명이며, 향후 20년간 약 7천만명이 에이즈로 사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97)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시대적 재앙이다. 동성애는 죄악이다. 참 교회는 이 죄로부터 성별되어야 한다.



산아제한과 피임

산아제한은 임신과 출산을 자연적 혹은 인위적 방법으로 제한하는 것을 말한다. 낙태가 태아 살해의 죄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이므로, 자연적 혹은 인위적 방법을 통한 피임만 관심사이다. 산아제한은 성도에게 합당한 생각인가? 성도에게 피임은 합당한 일인가?

결혼의 한 목적은 자녀 출산이다. 사람이 결혼해서 자녀를 출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자녀를 많이 가지는 것은 성도에게 복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사람을 창조하시고 복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창 1:28). 또 홍수 심판 후에도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창 9:1). 시편 127편은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했다(시 127:4-5).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뜻이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산아제한과 피임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인구 폭발이나 식량 고갈을 염려하여 산아제한을 주장하는 것은 인간적 염려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을 알지 못하고 지구의 장래를 오직 인간 스스로만 해결해야 할 과제로 보는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니다. 지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섭리 안에서 그의 정하신 종말을 향해 진행하고 있다. 유엔인구기금(UNFPA)의 "2013년 세계인구현황보고서"에 의하면, 2013년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1.3명이다(조선일보, 2013. 10. 31).

촬스 프로반에 의하면, 루터는 산아제한을 동성애와 같다고 말하였고 칼빈은 그것을 미래의 인격들에 대한 살인이라고 주장했으며 도르트 회의는 피임이 낙태와 동일한 것이라고 진술한 성경주석을 출간하였고 웨슬리는 피임법을 사용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그것을 행하는 자들의 영혼들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98)

오늘날 피임이 음란과 부도덕의 은폐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심히 죄악된 일이다. 임신만 안 하면 결혼 전 혹은 결혼 외의 성관계가 가능하거나 허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명백한 죄악이다. 특히, 오늘날 피임의 방법 중 ‘사후 피임약’(RU-486이나 Norlevo)을 사용하는 것은 피임이 아니고 태아 살해에 해당한다. ‘사후 피임약’은 ‘응급 피임약’ 혹은 ‘경구 피임약’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수정란의 자궁 착상을 방해하여 피임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정란은 생명의 시작이므로 그 약은 일종의 낙태약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피임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지만, 특별한 경우, 예컨대, ① 부모의 건강이 심각히 나쁘다거나, ②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이 있다든지, ③ 목사나 선교사의 사명 때문에 자녀를 많이 가질 수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등에는 피임이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생물의학적 문제들

현대 의학의 발전 속에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생물의학적 윤리 문제가 제기되었다(노르만 가이슬러, 기독교윤리학, 220-248쪽 참조).

1. 장기 및 조직의 채취

신체의 장기나 조직의 일부를 채취하여 남에게 사용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혈액을 기증하듯이(헌혈), 예를 들어, 한쪽 눈이나 신장이나 간의 일부를 남에게 주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것은 선한 일이기 때문에, 기증자의 신체에 특별한 해나 위험이 없는 경우 기증자가 그것을 동의한다면 그러한 채취와 사용은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돈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 즉 신체의 일부를 매매하는 것은 합당치 않아 보인다.

2. 장기 기증

장기 기증은 죽은 후 자신의 장기를 남에게 주겠다는 약속에 근거하여 장기를 남에게 제공하는 것을 가리킨다. 고도로 발달된 의술에 의해 눈이나 폐나 신장 등의 장기를 남에게 이식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도 선한 일이며 제공자가 죽기 전에 확실히 약속했거나 동의했다면 가능하다고 본다.

3. 배아 줄기세포 연구

난치병 치료를 목표로 한 줄기세포 연구 중, 인간의 난자에 체세포를 이식하여 인간 배아를 만든 후 그것으로부터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연구가 있다. 그런데 이 연구에 의하면, 여러 개의 난자들에 체세포 핵이식을 하여 인간 배아들을 만든 후 그 중에서 몇 개의 줄기세포를 확보한 후 그 배아들을 폐기처분한다.99)

 그러나 인간 배아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유전정보를 지니고 있고 자궁에 착상되어 영양분만 공급받으면 성인으로 자랄 수 있는 인간 생명이므로, 인간 배아들의 폐기처분은 배아살해에 해당한다.100) 그러므로

이런 실험은 즉시 중단되어야 한다. 그러나 환자의 골수나 피부에서 분리한 ‘성체 줄기세포’나 태아의 탯줄에서 분리한 ‘제대혈 줄기세포’를 이용한 줄기세포 연구는 가능하고 난치병 치료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본다.

4. 인공 수정

인공 수정은 부부 관계가 아닌 다른 인위적 방법으로 임신케 하는 것을 가리킨다. 남편에 의한 인공 수정, 즉 남편의 정자를 채취하여 의료기구를 사용하여 아내의 자궁에 집어 넣는 것은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인공 수정에서 남편 이외의 다른 기증자의 정자를 사용하는 것은 간접적 간음에 해당한다. 그것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은 일이다. 그런 시도보다는 양자(養子)가 더 나은 일이다.

5. 시험관 수정

시험관 수정이란 남편의 정자와 아내의 난자를 채취하여 시험관에서 결합시켜 수정란을 만든 후 아내의 자궁에 넣어 착상토록 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자연스러운 방법은 아니지만, 남편과 아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알려져 있듯이 여러 개의 수정란을 만들고 그 중에 몇 개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폐기하는 것은 일종의 배아살해이므로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6. 대리모(代理母)

대리모(代理母)란 남의 자궁을 고용하는 것을 말한다. 즉 아내의 자궁이 임신이 불가능한 경우 시험관 수정으로 남편과 아내의 유전자가 다 있는 수정란을 대리모의 자궁에 착상시켜 출산케 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리모를 허용하는 나라들이 있으나 대리모의 심리적 고통과 모권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부부 관계에서의 임신과 출산이므로 대리모는 성경적으로 합당치 않다.

7. 성 전환 수술

성 전환 수술은 태어날 때 가진 성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의술 행위이다. 오늘날 의술의 발달로 그런 수술이 가능하다고 한다. 또 남자로 태어났지만 본래 여성적 본성을 가진 자가 있고, 반대로 여자로 태어났지만 본래 남성적 본성을 가진 자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성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 질서를 거역하는, 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8. 냉동보존술

냉동보존술은 사람의 몸을 냉동 상태로 보존하였다가 훗날 고도의 의술이 발달된 때에 다시 소생시키겠다는 방법이다. 그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 같다. 그러나 냉동된 몸은 생명이 떠난 상태이므로 그 영혼이 현재 천국 혹은 지옥에 있을 것인데, 장차 생명이 소생된다면 그 영혼이 과연 그에게로 돌아올 것인가? 또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일이므로, 냉동보존술이 죽음을 회피하는 생각으로 행해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합당치 않다.

9. 인간 복제(human cloning)

인간 복제란 체세포 핵이식 기술로 인간을 복제하는 것을 말한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된 수정란은 수정 후 3-4일까지는 2개, 4개, 8개 등으로 분할해도 분할된 수정란들은 동일한 유전자 구조를 가질 뿐 아니라 정상적 상태로 성장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으며, 또 분할된 수정란은 2-3일 정도 배양하면 다시 원래 상태로 성장하며, 끊임없는 세포분열을 통해 완전한 태아로 성숙한다고 한다. 이런 수정란 복제는 일란성 쌍둥이의 출산 원리와 같다.101)

그러나 수정란 복제라 하더라도 인간 복제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혼란시키고 창조자 하나님께 도전하는 행위이다. 또 복제된 인간은 부모도 없고 원본 인간과 구별할 수도 없으므로 심리적, 사회적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102) 그러므로 인간 복제는 옳지 않은 일이다.

10. 유전자 접합

유전자 접합은 유전자 조작 기술을 통해 더 개선된 인간, 예를 들어 지능이 좋고 건강한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식물계나 동물계에서 얻은 유전학적 기술을 인간에게도 적용해보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간을 창조의 주인으로 만들려는 인간의 교만일 뿐이며, 옳지 않은 일이다.

인본주의(humanism)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간이 생명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절대적 윤리 기준이 없다. 그러나 주 예수를 믿는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말씀을 도덕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고 결혼과 부부 관계를 존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인과 간음 등을 금지하는 도덕 기준에서 모든 생물의학적 문제들을 보아야 할 것이다.


아름다움, 몸의 단장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한 속성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6번 나오며(창 1:4, 10, 12, 18, 21, 25, 31) 일곱 번째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증거한다(31절).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산들과 들판들, 울창한 나무들과 숲들, 강들과 골짜기들, 맑고 푸른 바다들과 호수들, 봄이면 아름답게 피는 수많은 꽃들, 나무들, 풀들, 아름다운 각양 색깔의 새들과 크고 작은 들짐승들과 물고기들--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천지만물의 모습이다.

그 가운데 인간은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의 모습이 아름답지는 않지만, 인간의 본래의 모습은 심히 아름다웠을 것이며 천국에서 영생할 인간의 모습도 그러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나이가 상당히 많았을 때까지도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창 12:14). 욥의 딸들도 매우 아름다웠다(욥 42:15).

사람은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표현하고 승화시키기도 한다. 예술적 아름다움은 실상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훌륭한 미술가요 조각가이시며 훌륭한 음악가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다양한 색상과 모양으로 단장시키셨고 또 다양한 음색과 소리로 장식하셨다. 인간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하나님의 만드신 가장 훌륭한 악기이다.

몸의 단장--머리, 화장, 옷

사람은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단장하려고 한다. 머리도 아름답게 단장하고 화장도 하고 옷도 아름답게 입으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미적 감각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교훈하기를, 외모를 단정하게 하지만 너무 호화롭게나 사치스럽게 하지 말고, 외모의 단장보다 오히려 내면적 단장을 힘쓰라고 한다. 이것은 여자들에게 주신 교훈이지만, 남자들에게도 원리는 같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교훈하는 대표적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디모데전서 2:9-10,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3:3-4, “[아내들에게]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이 말씀들은 머리 단장이나 금은보석 치장이나 값비싼 옷 착용을 성도답지 못한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3:3의 ‘머리를 꾸민다’는 말은 디모데전서 2:9의 ‘머리를 땋는다’는 말과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이다. 얼굴 화장 문제도 같은 원리라고 본다.

외적 단장이 전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여성들의 20세 안팎의 고운 피부가 30대, 40대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이 아니므로 꺼칠하고 초췌해 보이는 피부를 위해 가볍게 기초화장을 하는 것은 필요할 것이다. 또 적절한 머리손질도 기본적인 일일 것이다. 남자들도 매일 면도하고 애프터 쉐이브와 스킨 로숀을 바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경이 금하는 것은 지나친 외모단장이다. 그것은 불경건한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아합왕의 아내이며 열렬한 바알숭배자이었던 이세벨은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있다가 죽임을 당하였다(왕하 9:30). 장차 주의 재림으로 올 영광스런 세상을 바라며 사는 성도는 외모단장에 큰 의미와 가치를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나친 외모 단장, 예를 들어 값비싼 파마와 고데, 최고급 화장품, 값비싼 금은보석으로의 치장, 값비싼 의복들 등으로 외모를 치장하는 것은 성도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여성이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많이 쓰거나 눈썹을 부치거나 아이쉐도우를 긋거나 입술에 루즈를 짙게 바르거나 손톱에 짙은 색 매니규어를 칠하는 것 등이 하나님을 존중하고 내세 소망을 가진 성도에게 적절한지 의문이다.

옷에 대해서도, 성경은 아담한 옷을 입으라고 교훈한다. 디모데전서 2:9의 ‘아담한’이라는 원어(코스미오스 κόσμιος)는 ‘단정한, 품위 있는, 수수한’이라는 뜻이다. 옛날 영어성경은 “단정한 의복(modest apparel)으로 단장하라”고 번역하였다(KJV).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아담한 옷, 단정한 옷, 품위 있는 옷 입기를 원하신다.

또한 성경에는 여자는 여자다운 옷을 입고 남자는 남자다운 옷을 입으라는 교훈도 있다. 신명기 22:5,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아직도 우리에게는 여자의 전형적 복장이 치마라는 관념이 있다. 여자는 바지보다는 치마를 입는 것이 여성답다고 본다. 물론, 계절이나 경제여건을 고려해야 하지만, 할 수 있는 대로 여성도는 치마를 입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외적 단장을 조심하고 내면적 단장에 힘쓰라고 강조한다. 특히 여성도들에게 염치와 정절, 온유와 안정된 심령, 선행 등으로 단장하라고 말한다. ‘염치’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고, ‘정절’은 조심하는 마음이다. ‘안정한’이라는 말은 ‘고요한, 조용한’이라는 뜻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조심함, 단정함, 부드럽고 조용함, 선행 등이 여성의 참된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변질된 아름다움

음란한 풍조--음란한 복장과 예술

오늘날 세상에는 변질된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풍조가 많이 있다. 세상은 유혹적인 미(美)를 좋아한다. 많은 여성들이 자기 몸의 노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성적이다’(sexy)라는 말을 부끄럼 없이 사용한다. 세상 사람들은 노출이 심한 복장을 좋아한다. 이것은 다 변질된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풍조 곧 음란한 풍조이다.

단정치 못한 아름다움은 옛날부터 있었다. 잠언 7:10-11은 창녀가 그의 특유의 옷을 입고 떠들며 억세고 그 발이 집에 머물지 않는다고 묘사한다. 창녀의 복장이란 자극적이고 음란한 복장이다. 또 에스겔 23:40은 창녀들이 “눈썹을 그리며 스스로 단장한다”는 표현도 있다.

오늘 시대의 풍조인 미니 스커트, 어깨 파인 옷, 딱 들러붙는 바지류 등은 성도다운 복장이 아니다. 성도는 이런 풍조를 대항해야 한다. 성도의 치마는 기장이 무릎 밑으로 내려가는 단정한 것이어야 한다.

예술의 영역도 그러하다. 예술은 도덕적으로 중립적 요소도 있으나 인간의 죄성 때문에 죄악된 요소들도 없지 않다. 특히 오늘날의 영화와 연극, 음악 등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을 떠나 무질서하고 음란하고 부도덕한 요소들이 많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변질되고 부패된 아름다움을 분별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 음란물

현대 사회는 제2의 산업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컴퓨터의 인터넷망을 통해 거의 무한대한 정보를 활용하며 신속하고 종합적인 정보 처리와 통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컴퓨터는 음란물을 개인의 방과 책상에 가져다 주며 음란 풍조를 조장하는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플랜티넷에 의하면, 전세계의 유해사이트는 2013년 5월 현재 약 641만개이며, 그 중 98.5%(약 631만개)가 음란사이트라고 한다.103) 이런

 음란물들은 결혼 전 혹은 결혼 외의 성관계, 성 매매의 확산, 성폭력, 감금과 인신매매, 각종 성병들, 가정 파탄, 기형아 출산 등의 수많은 사회악을 낳고 있다. 인터넷 음란물은 현대인의 큰 시험거리이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한 음란 풍조를 극히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성에 대한 호기심과 충동은 누구에게나 있다. 특히 성적 충동은 보는 데서 자극된다. 음란한 영상(影像)은 사람의 머리 속에 각인(刻印)되어 상당히 지속된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을 더럽히고 죄악된 행동을 자극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음란물을 보지 말아야 한다. 다윗은 여인의 목욕하는 것을 보았을 때 음욕을 품었다(삼하 11:2).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하는 것과 같다(마 5:28). 성도는 악에 대해 미련한 것이 좋다. 성경은 “너희가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 16:19),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고전 14:20)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컴퓨터를 가급적 공개적인 곳에 두고 특히 자녀들을 위해 음란물 차단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한다. 그래도 자녀 통제가 어려우면 인터넷 사용을 중단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인터넷 때문에 죄 짓게 하는 것보다 인터넷 없이 죄 안 짓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마 5:28-30). 어른들도 컴퓨터 사용을 조심해야 한다.

세상적 미(美)와 가치의 표준은 외적인 것,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표준은 다르다. 잠언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며 이 세상이 장차 불타 없어질 허무한 ‘장망성(將亡城)’임을 참으로 믿는 자라면, 외적 단장보다 내면적 단장에 힘써야 하며, 변질된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죄악된 세상의 풍조, 곧 음란한 풍조를 조심해야 한다.


 

제8계명

출애굽기 20:15,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제8계명에서 요구된 의무와 금지된 죄

[141문] 제8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무엇인가?

[답] 제8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들과 상거래에서의 진실과 신실함과 공정함과; 각 사람에게 당연히 줄 것을 주는 것과; 그것들의 바른 소유주로부터 불법적으로 점유된 물건들을 돌려줌과; 우리의 능력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아낌없이 구제하며 또 값없이 빌려주는 것과; 세상의 물건들에 대한 우리의 판단들과 의지들과 애착들의 절제와; 우리의 본성[몸과 마음]의 유지에 필요하고 편리하며 우리의 조건에 적절한 것들을 얻고 지키고 사용하고 처리하기 위한 주의 깊은 관심과 연구와; 정당한 직업과 그것에 근면함과; 검소함과; 불필요한 소송들과 보증 서는 일이나 기타 그와 같은 일들을 피함과; 우리 자신의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부(富)와 외형적 재산을 얻고 보존하고 증진하기 위해 모든 공정하고 합법적인 수단으로 노력함이다.

[142문] 제8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무엇인가?

[답] 제8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요구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 외에, 절도, 강도, 사람 납치, 훔친 물건을 무엇이든지 받는 것; 사기, 거짓된 저울과 측량, 땅 경계표를 제거함,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들에 있어서나 신용 문제에 있어서 불공정함과 불신실함; 억압, 착취, 고리대금, 뇌물, 짜증나는 소송들, 불공정하게 담을 두르는 것들과 거주민을 내쫓는 것들; 값을 올리기 위해 일용품을 매점하는 것; 올바르지 않은 직업들과, 기타 우리 이웃에게 속한 것을 빼앗거나 우리 자신을 부하게 하는 모든 정당치 않거나 죄악된 방법들; 탐욕; 세상의 물건들에 대한 지나친 애착; 그것들을 얻고 보존하고 사용하기 위한 마음 약하고 마음 산란케 하는 염려와 연구들; 다른 사람들의 형통을 질투함; 또한 게으름, 방탕, 노름; 기타 우리들의 외형적 재산에 대해 부당하게 편견을 가지게 하는 모든 방식들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재산에 대한 정당한 사용과 즐거움을 빼앗는 것이다.



직업, 노동, 근면

다양한 직업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직업은 다양하다. 첫사람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토지를 경작하였다(창 2:15; 3:23). 가인은 농사를 하였고 아벨은 양을 쳤다. 가인의 후손인 유발은 수금과 통소 잡은 자들의 조상이 되었고,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가 되었다(창 4:21-22). 노아는 거대한 배를 짓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창 6장).

오늘날 사회는 고도로 복잡해졌다. 오늘날도 여전히 인간 생활에 기본적인 직업들이 있다. 예컨대, 농작물을 재배하는 농업, 가축들을 기르는 목축업, 석탄이나 광석 등을 캐는 광업, 집, 기계, 자동차, 배, 비행기 등을 만드는 공업, 고기 잡는 어업, 물건을 사고 파는 상업 등이 있다. 또 이런 분야들이 기술화되고 그 규모도 매우 커졌고 어떤 부분들은 세계적인 규모로 거대해졌다. 그 외에도, 과학의 여러 분야들, 의술과 약품, 신문과 방송, 통신과 출판, 교통과 서비스업, 금융업, 미술과 음악, 영화와 드라마 등의 예술 분야, 또 고아원, 양로원, 장애인 복지 등 자선사업 등 실로 매우 다양해졌고 복잡해졌다.

이런 것들 위에, 사회를 지도하고 사회의 안보와 질서를 유지하는 자들이 있다. 정치가, 경제정책가, 공무원, 법조인, 교육가, 신문 방송 언론인, 경찰, 군인 등이 있고, 또 이런 자들보다 앞서서 정치 이념, 사회 이념, 경제 이념, 역사관 등을 정립하고 보급하는 철학, 역사 등 각 분야의 사상가들이 있다.

성도의 직업 선택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재능을 주셔서 그것에 맞는 직업을 가지게 섭리하신다. 그래서 직업을 흔히 천직(天職, vocation)이라고 부른다. 모든 재능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각양 좋은 은사와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약 1:17).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롬 11:36).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지혜의 영을 주셔서 성막을 만드는 모든 일을 잘 수행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셨다(출 31:2-6; 35:30-35; 36:2).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직업이든지,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재능과 적성에 맞는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그 일에 충실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은 천하지 않다. 범죄한 아담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받았다(창 3:19). 하나님은 그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셨다(창 3: 23). 바울은 우리에게 교훈하기를,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고(엡 4:28),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한다(살후 3:12). 노동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성도가 직업 선택에서 고려할 점은 그것이 적성에 맞는가 하는 것과 그것이 계명에 위반하는 죄악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뿐이다. 죄악된 직업은 비록 아무리 물질적 소득이 좋을지라도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잠언 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20:17,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잠언 28:6,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사곡히 행하는 부자보다 나으니라.”

불의의 이익

성도는 불의의 이익을 멀리해야 한다. 디모데전서 3:3[전통본문], 8,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신명기 23:18,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어떤 것이 불의한 것인가? 예를 들면, 도적질한 것, 속여서 취한 것, 저울이나 되를 속이는 것(레 19:35-36; 신 25:13-15; 잠 11:1; 20:10), 땅의 경계표를 옮기는 것(신 19:14; 27:17; 잠 22:28; 23:10), 계약 위반(롬 1:31), 돈 떼어 먹기(딛 2:10), 품삯 안 주기(신 24:14-15; 약 5:4), 강도, 강탈, 착취, 토색(고전 6:10), 인신 매매(출 21:16; 신 24:7; 딤전 1:10), 고리대금(네쉐크)(출 22:25; 레 25:35-37; 신 23:19-20; 시 15:5; 잠 28:8), 뇌물(출 23:8; 신 16:19; 27:25; 사 1:23; 5:23; 암 5:12; 미 3:11), 매점, 부동산(땅, 집) 투기, 투기성 주식 투자 등이 그러하다.

빚 보증

성경은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고 가르친다(잠 17:18; 22:26). 돈을 대신 갚을 경제적 힘이 있거나 상대를 충분히 신뢰할 수 있거나 아니면 손해를 볼 각오를 한다면, 보증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이 보증을 서는 것은 어리석은 명예심이나 모험심에 불과하고 그런 자는 속임을 당하고 큰 손해를 입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빚의 보증이 되는 것은, 사랑의 행위일지는 몰라도,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남에게 빚 보증을 요청하지도 말고 빚 보증을 해주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근면

성경은 특히 잠언에서 근면에 대해 많이 교훈하고 강조한다. 잠언 6:6-11,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언 10:26,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 잠언 12:24,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잠언 18:9,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敗家)하는 자의 형제니라.” 잠언 21: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잠언 22:29,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성도의 직업의 목표

성도는 직업을 가질 때 어떤 목표를 가져야 하는가? 우선, 성도는 물질적 부요에 목표를 두어서는 안 된다. 세상과 물질은 다 허무하다. 전도서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주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요 6:27).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간다(요일 2:16-17).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고 교훈한다. 잠언 23:4-5,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디모데전서 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소유물이다. 창조자 하나님은 천지 만물과 인류의 주인이요 소유자이시다(시 24:1; 대상 29:11, 14, 16).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요 구원받은 우리에게 마땅한 일이다. 이사야 43:7, 21,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여기에 성도의 직업의 목표도 있다.



구제

성경은 구제에 대해 많이 가르친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또 그것은 역사상 경건한 성도들이 힘썼던 바이었고 의인들의 특징이었다. 또 교회의 헌금의 주용도는 전도와 구제이다. 또 성경은 우리가 구제할 때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에 대해 교훈하고 또 구제에 대한 하나님의 복에 대해 증거한다.

하나님의 뜻

구제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율법에서 구제에 대해 자세하게 강조하여 교훈하셨다. 신명기 15:7-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7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 경내에 사는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펴서 그 요구대로 반드시 넉넉히 꾸어주라고 명령하셨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고 경고하셨다. 구제는 하나님의 엄숙한 명령이다. 그것은 우리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주 예수께서도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에 대해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누가복음 12:33-34,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마태복음 19:21,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사도들도 구제에 대해 많이 교훈하였다. 로마서 12:13, “성도들의 쓸 것[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라[함께 나누라].” 고린도후서 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성도 섬김, 즉 구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에베소서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히브리서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요한일서 3:17-18,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구제는 선행의 열매요 형제 사랑의 증거로서 강조되었다. 구제는 확실히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다.

성도들이 힘쓴 일

구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힘쓴 일이었다. 욥은 고백하기를,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査實)하여 주었었느니라”고 하였다(욥 29:14-16). 구제는 의인들의 특징이었다. 시편 37:25-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잠언 21:26,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시제(施濟)하느니라.”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 내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였다. 사도행전 2: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사도행전 4:32, 34-35,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또한 예루살렘 교회는 교인들을 구제하는 일을 위해 일곱 명의 봉사자들[집사들]을 뽑았다(행 6:1-6).

신약 성도들도 개인적으로 구제에 힘썼다. 사도행전 9: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사도행전 10:2, “[고넬료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갈라디아서 2:10,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교회 헌금의 주용도는 구제이었다. 로마서 15:25-26,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16:1-2,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고린도후서 8:1-4,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고린도후서 9:1,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구제의 태도

성경은 우리가 구제할 때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에 대해 교훈한다. 첫째,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신명기 15:7-8, 10,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것은 헌금의 정신을 보이는 말씀과도 같다. 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둘째, 은밀히 해야 한다. 마태복음 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구제--전통본문]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복 주심

성경은 구제하는 자가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고 증거한다. 신명기 15: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마태복음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드러나게](전통본문) 갚으시리라.”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빌려드리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그러므로 구제하는 자는 그와 그 자손이 풍족함과 복을 얻는다. 잠언 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잠언 28:2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 하려니와 못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 시편 37:25-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일진대, 우리는 구제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경제 제도

사회의 경제 제도에 대해 몇 가지 이론들이 있다. 첫째로, 자본주의는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 선택과 자유 경쟁에 의한 경제 활동을 보장하는 제도이다. 자본주의는 자유기업제도 혹은 자유시장제도라고도 한다.

둘째로,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국유화, 즉 개인이 아니고 국가가 토지, 노동력, 자본 등을 소유하는 것과 계획에 의한 경제 활동으로 경제적 평등 사회를 추구하는 제도이다.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와 사회철학자인 마르크스는 1848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쓴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에서 기본적 사회주의 개념들을 발표하였다. 그는 그 책에서, 역사는 지배계급과 노동계급의 투쟁의 연속이며, 자본주의는 결국 사회주의에 의해 대치될 것이며, 승리한 노동계급은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에 근거한 경제적 평등 사회를 세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셋째로, 민주적 사회주의는 칼 마르크스의 이론에 영향을 입었으나 혁명과 폭력적 방법이나 독재적 통치를 반대하며 민주적 방식을 통한 부(富)의 공평한 분배를 추구한다.104) 서양의 국가들에는 이런 이념을

 가진 정당이나 인물들이 많이 있다. 요즘 우리나라에 있는 고교 평준화의 사고방식이나 빈부격차를 줄이는 부의 재분배에 대한 강조는 일종의 사회주의적 사상이다.

넷째로, 공산주의는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사회주의의 한 형태로서 혁명적, 강제적 방식을 통해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을 일으켰던 레닌(1924년 사망)이 마르크스의 글들로부터 발전시킨 것이다. 오늘날 공산주의 국가들은 공산혁명에 의해 세워졌고 공산당의 독재적 통치를 받고 있다.105)

그러면 성경적 경제 제도는 무엇인가? 이 문제를 위해 생각해야 할 몇 가지 점이 있다. 우선, 성경은 절대적 혹은 궁극적 의미에서 만물의 소유권을 하나님께 돌린다. 레위기 25:23, “토지는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시편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그러므로 실상 세상에 ‘나의 것’이나 ‘우리의 것’이란 하나도 없다. 개인이나 공동체의 모든 소유는 궁극적으로 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자요 소유자이시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상대적 혹은 위탁적 의미에서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도적질이나 강제로 남의 물건을 빼앗는 강탈과 토색(討索)은 큰 죄로 간주된다. 출애굽기 20:15,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출애굽기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신명기 19:14, “선인(先人)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 잠언 22:28,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고린도전서 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국가가 강제로 국민의 재산을 몰수한다면, 그것도 같은 종류의 악이다.

또 성경은 이런 위탁적 의미의 사유재산권을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말로 표현한다. 예수께서는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소유가 하나님이 맡기신 것임을 교훈하셨다(마 25:14-30; 눅 19:11-26). 또 그는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도 비슷한 교훈을 하셨다(눅 16:1-13).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며 우리가 성실하게 관리하고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현 세상에서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 경제 제도를 인정한다. 개인의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생산수단의 공유를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성경적이지 않다. 특히, 공산주의와 같이 개인의 자유(예를 들어, 종교의 자유)와 인권을 빼앗고 침해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공산주의는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대학살을 저질렀다. 1917년 러시아의 혁명 이후 지구에서는 8,500만 내지 1억명의 생명이 숙청, 굶주림, 집단 추방, 강제 노역 등으로 죽임을 당하였다.106) 또 지금까지도 공산세계에는 개인의 자유, 특히 종교의 자

유가 매우 통제되고 인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북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성경이 부자들의 이기주의나 불법적 행위를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이기주의적 부(富)의 축적을 책망하고 정죄하며 그 부를 선하게 사용하라고 교훈한다. 에스겔 16:49,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마태복음 6:24,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디모데전서 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야고보서 5: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디모데전서 6:17-18,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부의 역할은 개인이나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이 질서 있게 이루어지도록 최대한 보장하고 권장하는 것과 또 법에 근거하여 도덕적 비리들을 단속하고 징벌하는 것이다. 정부의 지나친 통제는 사회 전반의 경제 활동을 위축시킬 것이다. 소외 계층에 대한 배려는 어느 때나 선한 일이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적 평등은 원칙적으로 기회의 균등한 제공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현실적 약점들을 가질지라도 그것은 체제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죄악된 심성의 문제이다. 자유경쟁에 의한 부의 추구는 기본적으로 정당하다. 빈부의 격차가 크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약점이지만,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 가난을 모면하고 물질적 유여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의 장점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구 소련과 중국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실험에 실패하였고 다같이 못사는 나라가 되었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는 자본주의적 방식을 채용하여 경제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성경은 부지런한 자가 부해지고 게으른 자가 가난해진다고 말한다.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단지, 얻은 물질적 부를 이웃 사랑의 원리에 따라 선하게 사용하는 마음이 모든 이에게 요구된다. 그러나 구제와 선행은 강제적으로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제9계명 

출애굽기 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



제9계명에서 요구된 의무와 금지된 죄

[144문] 제9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무엇인가?

[답] 제9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과 우리 이웃의 좋은 평판을 우리 자신의 것같이 보존하고 조장함이며 진실을 위하여 출두하며 이를 옹호함이며, 재판과 처벌의 사건들에 있어서, 무슨 일에서든지 마음으로 성실히, 자유로이, 명백히, 충분히 진실만을 말함이며, 우리의 이웃을 관대히 평가함이며, 이웃의 좋은 평판을 사랑하며 소원하며 기뻐함이며, 그들의 연약을 슬퍼하며 덮어줌이며, 그들의 재능과 미덕을 너그러이 인정하고 그들의 결백을 변호함이며, 그들에 관한 좋은 소문을 즐거이 받아들이고 나쁜 소문 시인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음이며, 고자질하는 자, 아첨하는 자, 중상하는 자들을 좌절케 함이며, 우리 자신의 좋은 평판을 사랑하고 보호하여 필요시에는 이를 옹호함이며, 정당한 약속을 지킴이며, 무엇이든지 참되고 정직하고 사랑스럽고 좋은 평판 있는 것을 연구하여 실천함이다.

[145문] 제9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무엇인가?

[답] 제9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우리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웃이 가지고 있는 진실과 좋은 평판을 특히 공적 재판 사건에서 해치는 모든 일이니, 거짓증거를 제공하고 위증을 시키고 고의적으로 나와 악한 소송을 변호하고 진실을 외면하고 억압함이며, 불의한 판결을 하고 악을 선하다 선을 악하다 함이며, 악인을 의인의 행위대로 갚고 의인을 악인의 행위대로 갚음이며, 문서를 위조하고 진실을 은폐하고, 공의의 소송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침묵을 하고, 불법 행위에 대해 우리 자신의 책망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항의가 필요할 때 잠잠함이며, 진실을 때늦게 말하거나 그릇된 목적을 위해 악의로 말하고, 혹은 그릇된 의미로 혹은 의심스럽고 애매한 표현으로 진실이나 공의에 불리하도록 진실을 왜곡함이며, 비진실을 말하고 거짓말하고 중상하고 험담하고 비난하고 고자질하고 수근수근하고 비꼬고 욕하는 것이며, 조급하고 심하고 편파적이게 비난하는 것이며, 또 오해하는 의도와 언어와 행동이며, 아첨이나 허영심에 가득찬 자만이나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과대평가 혹은 과소평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사와 은혜를 부인함이며, 작은 잘못들을 더 악화시킴이며, 자유로이 죄를 자백하라고 요청된 때 죄를 숨기거나 변명하거나 축소함이며, 약점을 쓸데없이 찾아내는 것이며, 거짓 소문을 내는 것이며, 나쁜 소문을 받아들이고 찬성하고 공정한 변명에 대해 귀를 막는 것이며, 악한 의심을 품는 것이며, 누구 것이든 받을 만해서 받는 신임에 대해 시기하거나 배 아파하는 것이며, 그것을 손상시키려 노력하거나 원하고 그들의 불명예와 나쁜 소문을 기뻐하는 것이며, 비웃고 멸시하거나 어리석게 칭찬하는 것이며, 정당한 약속을 위반함이며, 좋은 소문이 있는 일들을 무시함이며, 우리 자신이 누명을 입을 일들을 행하고 피하지 아니하거나, 다른 사람이 못하도록 할 수 있는 데도 막지 아니하는 것이다.



거짓말

서로 사랑하는 좋은 인간 관계는 진실 위에서만 세워질 수 있다. 거짓 위에서는 아무것도 세워질 수 없다.

진실은 하나님의 속성, 거짓은 마귀의 속성

진실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거짓은 마귀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수많은 구절들이 하나님의 진실하심, 신실하심, 성실하심에 대해 증거한다. ‘진실,’ ‘신실,’ ‘성실’이라고 번역된 원어(에메스, 에무나)의 뜻은 비슷하다. 출애굽기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시편 40:10-11, “내가 . . .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 여호와여 . . .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시편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 . .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그러나 마귀는 거짓말쟁이이요 거짓의 아비이다. 요한복음 8:44, “[마귀는]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모든 이단은 거짓말이요 마귀적이다. 요한일서 2:21,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요한일서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말하라고 교훈한다. 시편 15:2-3, “[하나님의 성산에 거할 자는]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 . .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잠언 6:19,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6, 7가지 중에]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스가랴 8:16-17,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 . .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에베소서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골로새서 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디모데전서 1:10, “[악인의 목록]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디모데전서 3:8, “[집사의 자격]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지 아니하고.” 베드로전서 2:1,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거짓, 속임]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

거짓의 예들은 많을 것이다. 그것은 사소한 약속 위반(롬 1:31)에서부터 중요한 계약 혹은 국가적 동맹의 고의적 파기를 포함하며, 학생들이 학교에서 친구 대신 출석 호명에 대답하는 일과 시험 때의 부정행위도 포함하며 또 각종 위조문서, 가짜 졸업증명서, 가짜 성적증명서, 가짜 학위증명서 등이나, 과장된 추천서나 거짓된 기부금 증명서, 또 위장전입 등도 포함한다.

거짓말은 남을 해치는 일

거짓말은 대체로 남을 해치는 일이다. 남에 대한 거짓된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남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악한 일이다. 출애굽기 23:1,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 남에게 아첨하는 것도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과 같이 해롭지만(잠 29:5), 거짓말로 남을 비방하는 것은 악한 일이며 쓸데없이 남의 약점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것도 악하다. 그것은 남을 무시하고 미워하거나 시기 질투하는 데서 나온다.

사도 요한은 교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악한 말로 자신들을 부당하게 비난한 일에 대해 지적하고 그를 경계하라고 교훈하였다(요삼 10). 성경은 감독과 집사의 아내들이 ‘참소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한다(딤전 3:11). 그러나 성경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되면 사람들이 참소하는 풍조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딤후 3:3). 사실, 일반적으로 말해 악을 선하다고 말하거나 선을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다 악한 일이다(잠 17:15). 그것은 고의적 거짓말이든지 무지함이나 편견에서 나온 악한 말이다.

‘선의의 거짓말’

사람들은 ‘선의의 거짓말’(an officious lie)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선한 의도를 가진 거짓말이라는 뜻이다. 그런 거짓말도 악하다고 정죄될 수 있을까? 선의의 거짓말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인용되는 두 개의 대표적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자.

출애굽기 1:19, “[히브리]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매튜 풀은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주석하였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추상하듯이 거짓말이 아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에 대한 진실일 것이며, 또 그 산파들은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 . . 그러므로 여기에는 진실 외에 다른 것이 없다. 비록 그들이 전체의 진실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할 의무는 없었다.107)

여호수아 2:4-6, “그 여인[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매튜 풀은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그의 대답은 . . . 명백히 거짓되었고 따라서 의심할 수 없이 죄악되었으나, 그의 의도는 선하였다. 그러나 매우 가능한 사실은, 그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고 말한 바와 같이 선의의 거짓말은 불법적이지 않다고 생각했거나, 혹은 최악의 경우, 이것이 그의 연약함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것을 용서하셨고 그의 믿음을 크게 상 주셨을 것이라는 것이다.108)

그 외에, 엘리사가 자기를 잡기 위해 도단 성을 포위한 아람 군대에게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도 아니니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의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왕하 6:19)고 한 말은 감추인 의미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셨으므로 그것을 그들에게 알려줄 의무는 없었다.

또 여호수아가 아이성을 정복할 때 쓴 복병전술도 은폐 행위이지 거짓 행위는 아니었다. 그들은 적군에게 자신들의 퇴각 행위의 목적을 알려줄 의무가 없었다. 아이성 사람들은 이스라엘 군대의 퇴각의 목적을 몰랐기 때문에 속은 것뿐이었다.

우리는 선의의 거짓말을 허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을 허용한다면, 자기 합리화에 능숙한 부패된 인간 본성은 거짓말에 익숙해질 것이다. 성도는 어떤 경우든지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거짓말하는 자는 지옥 형벌을 면키 어려움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구약의 잠언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잠언 19:5, 9,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잠언 21:28,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요한계시록은 거짓말하는 자들이 지옥 형벌을 받고 천국에서 제외될 것을 분명히 증거한다.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제10계명

출애굽기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제10계명에서 요구된 의무와 금지된 죄

[147문] 제10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무엇인가?

[답] 제10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우리 자신의 처지에 온전히 만족하고 우리의 이웃에 대해 온 영혼으로 인자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그에 대한 우리의 모든 내면적 동작과 사랑이 그의 모든 이익에 도움이 되고 그것을 촉진하게 하는 것이다.

[148문] 제10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무엇인가?

[답] 제10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우리들 자신이 소유한 재산만으로 불만함, 이웃의 소유에 대해 질투하고 마음 상해 함, 또 이웃의 소유에 대한 모든 부적절한 동작과 사랑이다.



탐심

탐심은 정당하게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려는 마음, 즉 과도한, 지나친, 불의한 욕심이다. 예를 들어, 다른 이의 소유물을 취하려는 욕심은 불의한 욕심 곧 탐심이다. 탐심은 특히 돈에 관계된다. 돈을 필요 이상으로 가지려는 마음은 탐심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성경은 부자가 되려는 마음을 정죄한다. 물질적 부요는 신앙에 시험거리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과 재리의 유혹에 대하여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6:24,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마태복음 19:23-24,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그러므로 부자 되기를 힘쓰지 말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성경은 교훈한다. 잠언 23:4-5,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디모데전서 6:9- 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히브리서 13: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이런 교훈은 넓은 의미에서 ‘세상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는 교훈에 속한다.

탐심은 이단들의 특징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거스르고 땅의 것을 구한다. 베드로후서 2: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利)를 삼으니.” 베드로후서 2:14-15,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저희가 . . .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유다서 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 . .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성경은, 교회의 장로나 집사는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디모데전서 3:3, 9,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전통본문) . . .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올 것이며 사람들이 돈을 사랑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딤후 3:2).

탐심은 불경건과 분쟁 등 다른 죄악들의 원인이 된다. 시편 10:3,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가룟 유다는 은 30개에 주님을 배신하였다. 잠언 28:25,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야고보서 4:1-2,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성경은 탐심을 큰 죄로 여긴다. 로마서 1:29, “[죄악의 목록에]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고린도전서 6: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특히 탐심은 우상숭배로 간주된다. 그것은 돈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사랑하는 큰 죄악이다. 에베소서 5:3, 5,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자족하는 삶

우리가 탐심을 버리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천국에 두며 자족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잠언 30:8-9,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디모데전서 6:6-8,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히브리서 13: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빌립보서 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절제

절제는 자신을 통제하는 덕이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성숙한 인격의 모습이다. 절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마지막에 언급된 덕이다.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절제는 무엇보다 술에 관계된다. 디모데전서 3:2, 11, “감독은 . . . 절제하며,”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 . . 절제하며.” ‘절제하다’는 원어(네팔리오스 νηφάλιος)는 ‘깨어 있다, 절제하다’는 뜻이다.

절제는 우리의 감정과 말과 지식에도 관계된다.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베드로후서 1:6, “지식에 절제를.” 야고보서 1:19, “말하기는 더디하며.”

특히, 잠언은 말의 절제에 대해 많이 교훈한다. 잠언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1:12,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16:28,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잠언 17:9,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언 17: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잠언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잠언 26:20,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사도 바울은 신자가 범사에 절제하는 덕을 가져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 고린도전서 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고린도전서 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고린도전서 9:25, 27,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자기 부정

자족과 절제는 자기 부정과 더불어 혹은 자기 부정 위에서 가능하다. 자기 부정은 성도에게 매우 기본적 덕목이다. 주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 부정을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16:24-2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누가복음 9:23-2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자기 부정은 자기의 생각과 견해, 고집, 교만, 자존심, 자랑, 명예심, 감정, 욕망, 생에 대한 애착 등을 부정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절제와 자족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자기 사랑은 자존심과 교만을 동반하고 불신앙과 불순종에 도달한다. 디모데후서 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그러나 자기 부정은 겸손을 동반하고 믿음과 순종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자기 부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깨닫고 자신을 주님께 헌신할 때 가능하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난

세상에는 고난이 많다. 인간의 삶은 고난이다. 인생은 고난을 위해 태어난 자와 같다(욥 5:7). 욥은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고 말하였고(욥 7:1)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다”고 했다(욥 14:1). 야곱은 하란에서 20년 동안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다고 말했고(창 31:40-41), 또 바로 앞에서 그의 나그넷길 130년 동안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고 말했다(창 47:9).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했다(시 90:10).

인간에게 고난이 있는 까닭은 근본적으로는 죄 때문이다. 욥기의 주제는 인간의 고난인데, 욥의 친구들은 인간의 고난의 한 이유가 죄라고 증거하며 그것은 욥도 인정하는 성경적 진리이다(욥 4:7-9; 8:4; 11:6; 15:20-35; 18:5-21; 20:5-29).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서 이 진리를 분명하게, 강조하여 증거하셨다. 그것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레위기 26장은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각종 질병들이 생기고 전쟁에서 패배하고 큰 기근이 들 것을 경고한다. 신명기 28장도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식생활과 자녀들과 산업에 저주를 받고 각종 질병들이 생기고 큰 기근을 당하고 마침내 온 세상에 흩으러뜨림을 당할 것을 경고한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간의 힘든 생활은 그들의 불신앙의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민 14:33-34). 사사기나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죄의 대한 징벌로 전쟁에서 패배하거나 국가적인 큰 기근과 질병의 재앙에 대해 많이 증거하였다. 주 예수께서는 죄악된 세상에 사는 인생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로 표현하셨고(마 11:28), 사도 바울은 “파멸과 고생이 그[그들의] 길에 있다”고 말하였다(롬 3:16). 히브리서 12장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있음을 증거하였다(히 12:6, 8). 또 야고보서 5:16은 병든 자들이 죄를 고백하면서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까닭 없이 당하는 고난도 있다. 구약의 욥기의 주제는 바로 이런 진리이었다. 즉 인간의 고난 중에는 어떤 특정한 죄 때문에 오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 안에서 주어지는 고난이다. 욥이 당한 고난은 어떤 특정한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으신 뜻 안에서 주어진 고난이었다(욥 1:9; 2:3). 바울의 ‘육체의 가시’도 이런 유의 고난이라고 보인다(고후 12:7).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바로 이런 높은 의미에서의 고난이었다. 이사야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또 주 예수께서는 이런 고난에 대해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5:10-1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 . .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성경은 이런 고난에 대해 많이 말한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이런 고난을 많이 당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포함하여 마게도냐 교회들은 많은 환난과 핍박을 당한 교회이었다(살전 1:6; 살후 1:4; 고후 8:2).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고 말했고, 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다(딤후 3:12). 히브리서는 고난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히 10:32, 34; 13:13).

사도 베드로도 핍박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그는 그의 서신에서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말했고(벧전 2:19)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했다(벧전 4:12-13). 또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받는 고난’(벧전 4:16),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벧전 4:19)에 대해 말했다. 요한계시록도 마지막 대환난 시대에 적그리스도의 큰 핍박이 있을 것을 예언한다(계 13:7).

특히 전도자들은 주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의 길을 갔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에서 전도 사역을 위해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많은 수고와 욕과 핍박과 비방을 당했으며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고백했다(11-13절). 또 그는 고린도후서 1장에서 그가 아시아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심한 환난과 고생을 했다고 증거했고(1:8-9), 또 6장에서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욕됨과 악한 이름 등의 고통을 당했음을 말했고(6:4-8), 11장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그는 골로새서 1:24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했다. 또 그는 디모데에게 “너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교훈하였다(딤후 1:8; 2:3; 4:5). 또 사도 요한은 자신을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다(계 1:9).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많은 유익이 있다. 죄 때문에 당하는 징벌의 고난이라면 성화의 유익이 있다. 시편 119:67, 71,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히브리서 12:10-11, “저희[인간 부모]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죄 때문이 아닌 고난도 우리에게 유익하다.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말했다(욥 42:5).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히 준비되셨다고 표현한다(히 5:8-9). 구원받은 성도는 환난과 시련을 통해 인격이 단련되어 온전케 된다(롬 5:3-4; 약 1:2-4). 그는 더욱 믿음 있게(고후 1:9), 겸손하게(고후 12:7) 된다.

그러면 고난에 대한 성도의 대책은 무엇인가? 우선, 회개할 죄가 있으면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회개할 죄가 없으면 그 고난을 즐거움으로 받고(마 5:12; 벧전 4:1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벧전 4:16)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벧전 4:19).



인내

특히 고난 중에 성도는 인내해야 한다. 인내는 성도에게 귀한 덕 중의 하나이다. 주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눅 8:15). 또 주께서는 재림 직전의 환난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다(마 24:12-13).

사도 바울도 인내에 대해 많이 교훈하였다. 성도는 환난 중에 인내함으로 인격의 단련을 가진다(롬 5:3-4). 사랑의 첫 번째 속성은 인내이다(고전 13:4). 또 성령의 열매의 하나는 오래 참음 곧 인내이다(갈 5:22). 야고보는 인내에 대해 교훈하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하였다(약 5:7-8).

욥은 고난 중에 인내한 한 대표적 인물이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하였다(약 5:10-11).

요한계시록은 주의 재림 직전의 대환난 시대에 성도에게 인내가 필요할 것을 증거하였다: 13:10,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성도에게도 고난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부정하고 인내로써 믿음을 지키며 힘써 달려가야 한다.



금욕주의

금욕주의는 인간의 모든 육체적 욕심을 끊으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것은 탐심과 정반대의 태도다. 옛날 헬라 철학자들은 사람의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라고 말하며 육체적인 것을 정신적인 것보다 낮추어보았다. 이런 사상은 초대 교회에도 침투하였다. 또 중세 시대의 수도원들은 기존 교회들의 세속화적 풍조에 반발하여 경건함과 순수함을 회복하려는 장점을 가진 반면에 일평생 가난한 생활이나 독신 생활의 서약 등 금욕주의적 요소들이 없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이단들의 금욕주의적 교훈에 대해 경계하였다. 골로새서 2:20-23,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儀文)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自意的)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또 바울은 장차 금욕주의적 이단이 나타날 것도 예언하였다. 디모데전서 4:1-3,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절제는 성도의 선하고 바람직한 삶이지만, 금욕주의는 잘못된 생각이다. 또 금욕주의는 성화(聖化)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성화는 단지 모든 육체적 욕구를 금함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도의 내면적 싸움은 단순히 육체와 영혼의 싸움이 아니고, 육체의 남은 죄성과 성령의 싸움이다. 성화는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의 영혼이 육체의 남은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로마서 7장과 8장의 ‘육신’이라는 말은 단지 육체를 가리키지 않고 육체에 남은 죄성을 가리킨다. 로마서 7:25,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8:5-7,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성령]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베드로전서 2:11, “영혼을 거스려[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앞의 구절들에서 ‘육체,’ ‘땅에 있는 지체,’ ‘육체’도 ‘육체의 남은 죄성’을 가리킨다.

영의 세계뿐 아니라 물질의 세계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그러므로 물질 세계는 악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몸과 영혼의 두 요소의 결합체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감사한 일이다. 디모데전서 4:3-5,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결혼도 하나님 앞에 선하고 아름답고 귀한 일이다. 실상, 결혼 제도는 사람이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신 제도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다음과 같이 교훈한다: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거절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5절),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8-9절),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28절). 히브리서 13:4도 결혼을 귀히 여기라고 교훈한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혼인은 모두에게 귀하며 잠자리는 더럽지 않은 것이지만--원문직역].

그러므로 탐심도 죄악이지만, 금욕주의도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을 감사히 사용할 수 있다. 모든 음식을 감사히 먹을 수 있고, 결혼도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욕구를 적절히 사용할 수 있다. 경건한 삶은 모든 욕구를 금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죄성을 따라 행하여 범죄치 말아야 한다.


취미와 오락

취미와 오락에 대해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자연만물을 주셨고 그 속에서 사람이 그것을 즐기며 살게 하셨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며 휴식과 즐거움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정서적 존재이다. 자연을 즐기는 것은 사람에게 주신 기본적 행복이다. 밤은 하나님이 주신 복된 휴식의 시간이다. 가정이나 좋은 친구도 행복의 요소들이다.

성경은 모든 종류의 오락과 생의 즐거움을 정죄하거나 배격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너무 쾌락에 빠져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문제이지만, 적절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다. 그러므로 금욕주의는 치우친 인생관이다.

세상의 허무함을 증거한 전도서는 반복하여 먹고 마시는 즐거움에 대해 말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며(전 2:24) 하나님의 선물이며(전 3:12-13) 인생의 분복이라고 말하며(전 3:22; 5:18), 심지어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전 8:15). 또 전도자는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고 말한다(전 9:9).

사람이 자신의 일상적 의무들이나 직업에 충실한다면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기분 전환이 되는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본다. 건전한 미술, 음악, 조각, 운동, 등산, 여행, 낚시, 게임, 스포츠 관람 등은 건전한 취미생활의 예들일 것이다.

연극, 영화, 텔레비젼 등도 그 자체가 죄악되지는 않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이나 도덕성을 가진 일반인들에 의해 건전하게 창작되고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분야의 작품들의 다수는 음란과 폭력 등의 부도덕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런 내용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하며 사회에 매우 악영향을 미친다. 한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의 텔레비젼 방송 프로그램들을 주관하는 자들의 다수가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도덕성의 견해가 낮다고 한다.109) 그러므로 우리는 연극, 영화, 텔레비젼의 프로들을 선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운동들 중에 권투, 레슬링, 미식 축구, 자동차 경주 등과 같이 생명에 위험한 것은 성도들이 보기에 합당치 않다.110) 또 남녀가 어울려 추는 춤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그런 춤은 육신적 욕망을 자극하며 음란

의 죄에 빠지게 한다. 오늘날의 광란적 춤은 말할 것도 없다.

장기, 바둑, 당구 등은 머리와 기술을 요하며 건전한 게임으로 사용될 수 있고, 카드나 화투 놀이도 소박한 오락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박성을 가진 놀이나 슬롯머신 등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청소년의 오락실이나 PC방 출입도 유익보다 해가 더 많은 것 같다. 이런 곳은 청소년들에게 시력 장애, 정서적 장애, 시간 낭비, 돈 낭비, 중독성, 학습 지장 등을 가져온다. 특히 게임들은 내용적으로 난폭하거나 음란한 것들이 적지 않다.

비록 건전한 취미생활이나 오락이 허용된다고 보지만, 성도가 그런 것들에 너무 많은 시간과 돈과 정력을 소모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성도의 삶의 목적에 어긋난다. 무슨 일이든지 지나치면 좋지 못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하면서 안일하게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정죄하였고(암 6:5), 주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와 같은 경우, 즉 “이생[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부]와 일락[쾌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에 대해 말씀하셨다(눅 8:14).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즐거움들을 누리되 모든 일을 적당하게 하고 절제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질병

질병은 성도가 빈번히 당하는 고난들 중의 하나이다. 질병의 이유는 무엇이며, 질병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바른 태도는 무엇인가?

질병의 이유

세상의 모든 불행한 일은 근본적으로 인생의 타락과 세상의 저주받음에서 비롯되었다. 그것들은 본래의 창조 질서에 속하기보다 죄로 인해 저주받은 상태에 속한다. 본래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고 거기에 나쁜 요소들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았는데 왜 때때로 병에 걸리는가?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질병의 이유가 두 가지라고 말한다.

죄에 대한 징벌

첫째는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은 불순종에 대한 징벌로 질병을 주실 것을 경고하셨다. 거기에 언급된 질병들은 염병(데베르, 악성 유행병), 폐병, 열병, 상한(傷寒, 염증), 학질, 종기, 치질, 괴혈병, 개창(옴), 미침, 눈멂, 경심증(驚心症) 등이다(21-22, 27-28, 35절). 물론, 이 외에도 다른 병들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사람의 질병들이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임을 증거한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 모세의 누이 미리암,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 유다왕 웃시야 등은 범죄함으로 문둥병[나병 혹은 한센병]에 걸렸다(민 12:9-10; 왕하 5:27; 15:5). 그들은 다 하나님의 징벌로 그 병에 걸렸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 범죄함으로 염병(네게프, 무서운 전염병)으로 고생한 적이 있었다(민 16:46). 또 유다의 악한 왕 여호람은 말년에 창자에 고치지 못할 병이 들었다(대하 21:18).

신약시대에, 예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고(막 2:5), 또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후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5:14). 이 말씀들은 죄와 병이 관련이 있음을 보인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은 우리의 부족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인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 저자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고백하였고(시 119:67),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사생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참 아들일진대 징계가 있다고 말하였다(히 12:8). 그 고난과 징계는 육신의 질병을 포함한다.

단순히 신앙 인격의 훈련

그리스도인의 질병의 두 번째 이유는 죄와 직접 상관없이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의 신앙 인격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인생이 몸이 쇠약한 노년기를 통과해야 하는 것은 조물주의 이런 뜻이 있다. 모든 사람은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시편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이사야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베드로전서 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도 모든 사람이 가는 그 동일한 길을 간다. 인생의 노년기는 인간에게 주신 마지막 훈련 과정이며 그 끝은 죽음이다. 구약의 욥기는 고난이라는 주제를 다룬 성경이다. 욥은 그 많은 재산과 열 명의 자녀를 잃는 고난에 더하여,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온 몸에 악한 종기가 생겨서 심한 고통을 당하였다(욥 2:7). 그러나 욥의 고난과 질병은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를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인정하시고 칭찬하셨다(1:8; 2:3). 욥이 당한 고난의 이유는 단순히 그의 인격적 성숙을 위한 것이었다.

신약성경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연약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 아마도 어떤 질병을 주셨다. 그것은 그가 범한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는 예방적 이유 때문이었다(고후 12:7). 바울의 고난은 그의 인격을 훈련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충성된 일꾼인 에바브로디도의 병(빌 2:26-27)이나 디모데의 위(胃) 병(딤전 5:23)이나 드로비모의 병(딤후 4:20) 등은 그런 종류의 병이었을 것이다.

질병의 유익, 건강의 약속

사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은 그것이 직접 특정한 죄로 인해 왔든지 아니든지 간에, 하나의 훈련 과정이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훈련을 통해 점점 더 거룩해진다. 앞에서 인용한 대로, 시편 119편의 저자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고백한다(67절). 또 시편 39편의 저자는 병중에서 인생의 헛됨을 깨닫고 그의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게 되었음을 고백한다(4-7절). 히브리서 12장은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도 우리의 거룩과 의를 위함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도 약속한다. 죄의 징벌로서의 질병에 대한 경고는 실상 순종과 의(義)의 삶에 건강이 보장됨을 암시하고 내포한다. 출애굽기 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잠언 3:7-8,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良藥)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양약’이라는 원어(리프우스)는 ‘건강’(KJV, NIV) 혹은 ‘치료’(NASB)라는 뜻이다. 믿음과 순종과 의(義)로 사는 자에게 건강이 약속된다.

질병에 대한 성도의 태도

그러면, 질병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의술과 약도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산물이므로,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감사히 사용할 수 있고 배척할 것은 아니다. 야고보서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러나 우리는 또한 병을 주신 자도, 병을 고쳐주실 자도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출애굽기 15:2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시편 103: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모든 질병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 오며 하나님은 인간의 질병의 원인을 아시고 능히 치료하실 수 있다. 경건한 왕 아사는 말년에 그 발에 심히 중한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한다(대하 16:12). 이것은 아사의 말년의 행위가 바르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어떤 병에 걸렸을 때 회개치 않은 죄가 있는지 자신을 살피고 생각나는 죄가 있으면 철저히 고백하고 청산하며 새로운 결심을 굳게 하면서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야고보서 5:14-16,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위의 본문은 성도가 병들었을 때 대처할 방법을 지시한다. ① 병들었을 때 기도하라, ② 교회의 장로[목사]들을 청하라, ③ 죄를 고백하라[회개하라], ④ 병 낫기를 위해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라.

또 우리는 비상한 경우에 금식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 마가복음 9:29,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전통사본).111) 금식은 육신의 기본적 욕구까지 중지하고 결사적으로 하나님

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며 기도의 최후적 방법이다.



기쁨

성도의 생활은 기쁨의 생활이다. 기쁨은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이요 성령의 열매이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갈라디아서 5:22,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천국에서 평강과 희락의 충만함을 누릴 자들은 지상에서도 주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평안과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이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말했고(느 8:10) 모든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 즉 그들이 들은 말씀을 밝히 알았기 때문에 크게 즐거워하였다(느 8:12). 시편 19:8은 하나님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말했다. 또 시편 119편 저자는 주의 말씀이 나의 즐거움이라고 반복해 말했다(24, 77, 143절).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육신적, 물질적, 가정적 복을 인해 즐거워할 수 있다. 신명기 16:15, “. . .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초막절]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전도서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수고하며 심령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난 것이요(2:24) 그의 선물이며(3:13) 그의 분복이며(3:22) 선하고 아름답다고(5:18) 말하며 또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라고 말한다(9:9).

그러나 성도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구원을 인해 기뻐한다. 누가복음 10:20,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사도행전 16:34,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죄인이 의인이 되고 지옥 갈 자가 천국 백성이 되고 영생을 누리게 되었으니 이것보다 더 기뻐할 일이 또 무엇이랴!

죄와 불신앙은 슬픔과 염려를 가져오지만, 참된 믿음과 의(義)는 기쁨과 평안을 준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마다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이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기쁨이 주제인 빌립보서를 썼다. 그는 거기서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2:18),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3: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고 교훈하였고,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항상 기뻐하라. . .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했다(살전 5:16, 18).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경험하였다. 사도행전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고린도후서 8:2, “(마게도냐 성도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베드로전서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특히, 전도자는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고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얻는 것을 기뻐한다. 빌립보서 1: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인 아흔 아홉 사람을 기뻐하심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기쁨과 같다(눅 15:7).

성도는 또 다른 형제가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며 사는 것을 볼 때 기쁨이 넘친다. 요한이서 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요한삼서 3-4,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성도는 특히 천국을 소망하며 기뻐한다.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하지만(10절), 곧 이어서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14-15절). 그 기도는 천국에서 충만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말하였고(롬 5:2), 또 우리에게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고 교훈하였다(롬 12:12).

성도는 또한 고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1-12).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고 성경은 기록한다(행 5:41). 또 사도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말했고(롬 5:3) 또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라”고 했다(빌 2:17). 베드로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교훈하였다(벧전 4:13).



감사

성도의 생활은 또한 감사의 생활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감사하다’는 히브리어(야다)는 찬송하다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며112) 또 ‘찬송하다’는 다른 말(할랄)과 매우 빈번히 함께 사용된다. 역대상 16:4, “여호와를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송하게 하였으니.”113) 감사는 하나님과 그의 하신 일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행위이다.114)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참 믿음에서 나온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은혜로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들과 우리의 누리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마 15:36; 26:27; 행 27:35).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구원의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115)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면서 불평과 원망을 많이 하였다(출 15:24; 16:2; 17:3; 민 11:1; 14:2; 21:5). 민수기 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그들이 항상 원망하고 불평한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수기 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여러 성경구절들이 그것을 증거한다(신 1:26-27, 32; 시 78:22; 106:24-25; 히 3:18-19).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주권적 섭리를 믿어야 감사할 수 있다.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 개인적, 가정적, 국가적, 세계적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하고(잠 3:6) 또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알아야 한다(롬 8:28).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고 원망하였던 또 하나의 이유는 탐심 때문이었다(민 11:4; 시 78:18).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에 만족하지 않았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동시에, 물질에 대한 탐심을 버리고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딤전 6:7-8). 그 때에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원망하지 말라고 교훈한다(고전 10:10; 빌 2:14; 약 5:9; 벧전 4:9). 우리는 원망과 불평을 버리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에베소서 5:4,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에베소서 5:20,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라.” 골로새서 3:17,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감사하라.”

물론, 우리는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푼 사람들에게도 감사해야 한다. 특히 자녀들은 부모에게 감사해야 한다(딤전 5:4). 우리는 배은망덕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윤리적 요약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덕목은 다음 몇 가지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거룩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룩해야 한다. 거룩은 하나님의 기본적 속성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피조 세계를 초월해 계시는 그의 초월성을 내포할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도덕적 불결로부터 떠나 계심, 곧 도덕적 성결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의 이 속성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셨다(레 11:44-45; 19:2; 20:26 등). 사도 베드로도 교훈하기를,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였다(벧전 1:14-15).

거룩의 반대는 죄와 불결이다.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의 모든 더러운 죄악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할지를 명백히 보인다. 레위기 18:24-25,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성경은 성도가 버려야 할 죄악들의 목록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였다. 그 대표적인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로마서 1:29- 31, “불의, 음란(전통사본),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약(背約, 약속 어김), 무정(無情), 원통함을 풀지 않음(전통사본), 무자비.” 고린도전서 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간음과(전통사본)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과(전통사본)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요한계시록 21:8,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우리는 이 모든 더러운 죄악들로부터 자신을 깨끗케 하여야 한다. 고린도후서 7:1,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구원받은 인격의 특성은 거룩이다. 죄를 떠난 거룩한 인격이 이상적 인격이다.



의와 선과 진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의롭고 선하고 진실해야 한다. 율법의 내용은 의와 선과 진실이다. 의는 율법 즉 도덕적 표준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은 곧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진실하시며, 성도도 의롭고 선하고 진실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우리에게 의롭게 살아야 할 것을 명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거나 부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거나 공평치 않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고(출 23:2-3, 6), 또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하고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고 하셨다(레 19:15, 35-36).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의롭게 사는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우리에게 선하게 살아야 할 것도 명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고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고(출 22:21-22; 23:9; 레 19:33-34)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면 반드시 그에게로 돌려주며 우리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면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라고 명령하셨다(출 23:4-5). 또 그는 우리가 땅의 곡물을 벨 때 가난한 자와 타국인을 위해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고, 우리의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갖고 있지 말며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몸과 같이 하라고 명령하셨다(레 19:9-10, 13-14, 17-18). 이것이 선한 삶이다.

주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온유와 의와 긍휼과 청결과 화평의 삶을 강조하셨다(마 5:3-12).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들에서 의와 선과 진실을 강조하였다. 고린도전서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에베소서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야고보도 말하기를,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하였다(약 3:17-18). 이와 같이, 성도는 사언행(思言行)에 있어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해야 한다.



겸손

그리스도인의 삶은 또한 겸손해야 한다. 겸손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덕이다. 겸손은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며 죄인임을 깨닫고 자신을 낮추는 태도이다. 그것은 참된 신앙과 순종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인간의 부패된 본성의 대표적 한 요소는 교만이다. 교만은 우주적 악의 근원인 마귀의 범죄의 내용이었다. 마귀는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항하였다. 디모데전서 3: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인간의 교만도 하나님을 대항하고 거역하는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나아간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을 항상 거역하였고 그를 속히 떠났고 목이 곧았는데(신 9장) 그것은 그들의 교만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며 범죄하는 죄인들은 한마디로 교만한 자들이다.

그러나 교만은 큰 악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을 매우 미워하신다. 잠언 6:16-17,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교만한 사람은 망한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교만은 또 다툼과 분열을 낳는다. 잠언 13:10,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원인은 교만이었다. 고린도전서 4:6-7,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성도의 중요한 덕은 겸손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한 분이셨으며 또 우리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주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기는 자가 되고 자신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이셨다. 마태복음 20:26-28,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또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요 13:4-15)은 서로 용서할 것을 교훈하신 것이지만, 그 속에는 겸손과 섬김에 대한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겸손으로 일치단합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에베소서 4:1-3,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빌립보서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빌립보서 2:5-7,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은 온유와 겸손의 삶이다.



윤리적인 말

그리스도인의 덕목은 그의 윤리적인 말로 나타난다. 말은 인격의 표현이다. 거짓되고 위선적인 말도 있으나, 대체로 사람의 인격은 그의 말에서 나타난다. 성경은 우리의 말에 대해 많이 교훈한다. 그것은 여러 윤리적 측면들에 관계되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리는 말을 절제해야 하며 경솔하게 말하지 말고 신중하게 말해야 한다.

잠언 11:12,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16:28, “패려한[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잠언 17:9,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언 18:2,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 잠언 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잠언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잠언 26:20,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잠언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17: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잠언 25: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야고보서 1:19,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

둘째로, 우리는 남에 대한 비난과 저주의 말을 버리고 선하고 유순하고 덕스럽고 유익한 말을 해야 한다.

레위기 19:16,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라.” 잠언 10:20-21,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잠언 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잠언 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 25:15,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마태복음 5:22,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에베소서 4: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에베소서 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야고보서 4:11, “피차 비방치 말라.” 베드로전서 2:1,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

셋째로, 우리는 거짓된 말이나 아첨의 말을 버리고 진실한 말만을 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권면과 책망의 말도 필요하다.

출애굽기 23:1, “너는 허망한 풍설[헛소문]을 전파하지 말라.” 잠언 6:19,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6, 7가지 중에]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잠언 14:25,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잠언 20:10,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디모데전서 3:8,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지 아니하고.”

잠언 29:5,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로마서 16:18,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유다서 16, “이 사람들[이단자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利)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2: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에베소서 4:25,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잠언 27:5,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잠언 27:9,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잠언 28:23,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갈라디아서 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 3:2의 말씀대로, 온전한 자란 말에 실수가 없는 자이다. 주 예수께서는 사람이 평소에 쌓은 선과 악에서 선한 말과 악한 말이 나오며 마지막 심판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든 말에 대해 엄히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2:34-37,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결론

기독교 윤리의 목적

기독교 윤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율법을 지키는 것은 무슨 목적에서인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얻기 위해서나 구원의 어떤 공로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윤리 생활은 의를 이루기 위한 율법주의적 차원의 행위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의를 이루셨다(롬 10:4).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께서 법적으로 이루신 의를 실제로 삶 속에서 적용하고 나타내는 것뿐이다. 즉 의의 실천이다. 도덕법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에 근거하고 그것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영속적이며 신약 아래서도 지켜져야 한다.

믿음과 행위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을 행함에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지만(롬 3:28),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죄를 버려야 하고(마 3:8; 눅 13:3; 고전 6:9)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요일 3:10).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 2:17, 26). 또 그 믿음이 죽은 것이라면 그의 구원 확신도 헛될 것이다. 이와 같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지만, 선행은 구원의 증거이며 열매이다.

물론 구원받은 자의 행위는 하나님의 도덕적 표준이나 그리스도의 이루신 완전한 의에 비교하면 보잘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에 무엇을 첨가하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그 의는 우리가 무엇을 첨가할 것이 없는 완전한 의이다. 우리의 거룩하고 선한 생활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완전한 의에 합당하게 살아드리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삶을 요구하신다. 또 이러한 삶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성을 증거하는 것이 되며 죄악되고 부도덕한 세상에 빛이 될 것이다.



기독교 윤리의 원동력

기독교 윤리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혹시 기독교 윤리는 불가능한 이상(理想)이 아닌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거역한 역사나 신약교회의 부패의 역사, 특히 현대 교회의 배교적 현실을 볼 때, 성경적 윤리가 불가능한 이상(理想)이 아닌가 하고 의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는 불가능한 이상(理想)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윤리적 생활을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의롭게 만드셨고 의로운 법을 지키도록 명령하셨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십계명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에 근거한 계명이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사람, 특히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을 본받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레 11:45; 마 5:48).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그 의로운 법을 지키지 못하였다. 구약의 전 역사는 사람의 전적인 부패성과 무능력을 보여준다. 어찌할 수 없는 죄인! 그것이 구약성경의 결론이다.

그러나 신약시대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은 윤리적 원동력이 되는 새로운 원리들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의로운 삶을 실제로 가능케 하는 원리들이다. 그것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와 새 생명이며, 둘째로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이다. 오늘날 교회의 배교(背敎)는 성경에 예언된 바이다. 그러나 신약 교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선한 생활을 실천하는 수많은 진실한 성도들이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생활의 원동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와 새 생명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 이 의는 우리로 율법의 정죄와 공포를 극복하게 하는 힘이 된다. 죄는 더 이상 우리에게 위협적이지 못하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롬 6:14). 우리는 율법의 체계에서 벗어났다(롬 7:6; 갈 3:24-25; 5:1).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새 삶의 동기가 있다(롬 12:1; 고후 5:15; 엡 4:1).

의는 또한 생명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또한 새 생명을 얻은 자이다. 새 생명은 곧 새 생활의 씨앗이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3:9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새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새 생명의 씨를 가졌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의 영혼의 성향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구원받기 전에는 죄만 즐거워하던 그가 구원받은 후에는 죄를 미워하고 의를 소원하는 자가 되었다.

옛 죄악성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옛 죄악성이 이 새로워진 성향을 거슬러 싸움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옛 죄악성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인이 완전한 의와 영원한 새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받은 그 의와 새 생명 때문에 항상 새 힘을 얻는다.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은 바로 이 의와 새 생명 때문이다(롬 7:24-25).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이미 보장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윤리적 삶을 살 수 있도록 구원함을 얻었다(롬 8:28-30).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생활의 원동력은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의롭다고 하시고 그 속에 새 생명을 심어주실 뿐 아니라, 그 의와 생명이 열매를 맺도록 성령으로 그 속에 거하셔서 도우신다.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은 신약 성도들이 누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복과 특권이며 은혜이다.

이 복은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 에스겔 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성령]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 예언대로 성령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셨고 성도들 속에 보혜사 곧 위로자와 격려자로 오셔서 영원히 거하신다(요 14:16).

성도들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그들의 윤리적 생활, 곧 육신의 죄성을 이기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삶을 지도하시고 도우신다. 로마서 8:4, 13-1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물론, 성도들의 윤리적인 삶에는 그들 자신의 성실한 노력이 요구된다(살전 4:1; 벧후 1:5-7, 10).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덕적으로 온전케 하시려고 성경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온전함을 위해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시편 119:9, 11,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디모데후서 3: 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헌신

헌신은 성도의 삶의 매우 기본적인 원리이다. 그것은 성도의 삶의 시작이다. 참된 헌신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모든 도덕적 삶이 나온다.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헌신(獻身)은 몸을 드린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구약에 번제로 상징되었다. 번제(燔祭)는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여러 조각들로 자르고 그 조각들과 머리와 기름을 번제단 위에 벌여 놓고 물로 깨끗이 씻은 내장과 정강이와 더불어 그 전부를 불사르는 제사이었다(레 1:6-9). 번제는 온전한 헌신과 순종을 상징하였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번제물이 되셨고 온전한 헌신과 순종의 본이 되셨다.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삶의 일부분의 문제가 아니라 삶 전체의 문제이다. 몸이라는 말 속에는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포함된다. 몸은 우리의 재능과 목소리, 우리의 건강과 힘, 우리의 시간과 수고, 우리의 돈과 생명까지 다 포함된다. 우리의 몸이 없으면 이런 것들은 다 우리에게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며 없는 것과 같다.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의 뜻을 위해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제자들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들이었다(막 10:29). 헌신은 제자의 길과 같다. 또 마게도냐 교인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림으로 성도 섬기는 헌금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구하였고 극한 가난 중에서도 풍성한 헌금을 넘치도록 하였다(고후 8:2-5). 또 하나님께 헌신한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말했다(행 20:24).

성도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 때문에 헌신한다. 헌신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우리의 응답이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와 같이 성도의 헌신은 이방 종교의 금욕적 행위와 같이 구원의 공로를 이루는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미 주신 구원의 결과요 열매이다. 이제 우리의 몸이 우리 것이 아니고 주의 핏값으로 사신 바 되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몸을 드려 그의 영광을 위하고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로마서 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하나님께 헌신하려면,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알아야 하며 그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되, 그 일부분만 아니라 그 전체를, 즉 그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도록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며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즉 성경에 정통함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화와 상(賞)

그리스도인의 선한 인격과 생활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점진적이다. 중생은 영적 출생이며 성화는 영적 성장이다. 사람이 출생한 후 자라듯이, 성도는 영적으로 중생한 후에 점점 성화된다. 중생(重生)과 회개와 칭의는 단회적(單回的)이며 즉각적이지만, 성화는 중생에서 시작되어 일평생 동안 계속되는 점진적 과정이다. 야곱의 생애를 흔히 성화에 비교하듯이, 성도의 일생은 성화의 훈련 과정이다. 성도들의 성화는 오랜 기간과 많은 훈련들이 필요하다. 구원받은 성도가 점점 더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지만, 성화는 매우 더디어 보인다.

또한 성화는 지상에서 불완전하다. 육신의 죄악성은 죽을 때까지 완전히 극복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며 경험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성도의 구원은 불완전한 성화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단번 속죄의 의(義)에 의존한다.

성경은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도 끊임 없는 내적 싸움이 있음을 증거한다(롬 7:7-26). 성도가 혹 의식적 죄들로부터 떠나는 성숙함을 가졌다 할지라도 탐심과 마음의 음욕과 미움 등의 죄를 떠나기는 어려워 보이며, 더욱이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제일 큰 계명을 지키기에는 매우 미달된다.

성도는 죽을 때 그 영혼이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케 되어 즉시 영광의 천국에 들어간다(히 12:23). 그것은 성도가 죽을 때 그 영이 즉시 천국에 들어갈 것을 가르친 성경 구절들(눅 23:43; 고후 5:8; 빌 1:23 등)에 당연히 내포된 진리이다. 또한 장차 몸의 부활 때, 성도는 비로소 영육으로 완전케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성화가 불완전하지만, 우리의 성화 과정에서의 선행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을 약속하셨다. 상(賞)은 선행과 봉사의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를 것이다. 마태복음 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특히,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전도자들에게 각각 수고하고 충성한 만큼의 상이 약속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3:8, 14,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되지 못하며 성도가 받을 그 상조차도 실상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의 선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고 오직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다. 또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에 비추어볼 때 여전히 부족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공로가 되지 못한다.

우리의 의는 여전히 예수님의 보혈 공로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해야 마땅하다(눅 17:10).

 

 복습 문제

 1. 공예배의 요소, 목표, 방식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2. 찬송의 정의, 이유, 방법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3. 현대기독교음악(CCM)의 문제점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4. 열린예배의 문제점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5. 제사와 차례의 부당성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6. 우상제물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7. 현대적 우상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8. 합법적 맹세와 서약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9. 구약의 안식일 계명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10. 성수주일의 근거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11. 제4계명에 대한 도르트 대회의 견해는 무엇인가?

12. 성수주일의 방법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13. 구약의 의식법들의 폐지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14. 오늘날 십일조 생활의 정당성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15.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16. 효도의 내용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17. 자녀 교육의 책임자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18. 자녀 교육의 내용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19. 자녀 교육의 방법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20.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21. 금주(禁酒)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22. 낙태의 부당성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23. 자살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24. 사형의 정당성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25. 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26. 공산주의에 대해 간략히 비평하라.

27. 혁명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28. 결혼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29. 부부의 의무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30. 성관계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31. 이혼, 재혼, 별거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32. 동성애의 부당성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33. 산아제한의 부당성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34.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35. 인공 수정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36. 대리모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37. 인간 복제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38. 몸의 단장(머리, 화장, 옷)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39. 그리스도인의 직업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40. 구제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41. 경제제도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42. 거짓말의 부당성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43. 금욕주의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44. 질병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45. 성도의 윤리적 생활을 요약하는 단어들을 열거하라.

46. 말에 대한 잠언의 교훈들을 요약하라.

47. 기독교 윤리의 목적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48. 기독교 윤리의 원동력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49. 헌신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50. 성화와 상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미주

1) 김영철, “윤리학,” 철학대사전 (학원사, 1976), 857-860쪽; Gordon H. Clark, “History of Ethics,” Baker's Dictionary of Christian Ethics, pp. 220 -221.

2) Robert D. Preus, "Adiaphora," Baker's Dictionary of Christian Ethics (1973), pp. 8-9; Richard A. Muller,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Baker, 1985), pp. 25-26.

3) 43, 46, 204, 219, 231, 275, 295, 300, 337, 424, 434, 476, 492, 508장 등.

4) 하이머즈는 말하기를, “나는 단지 이 저녁 예배가 완전히 은사주의적이라고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 . . 안내 위원들은 귀걸이를 하고 짧은 바지와 모자를 쓴 남자들이었다. . . . 우리는 나이트 클럽이나 록 컨서트나 마약 소굴에 들어왔을 때 느꼈을 것처럼 부적절하다고 느꼈다. . . . [그러나] 그 교회는 남침례교단에서 ‘보수적’ 교회들 중의 하나라고 간주된다”고 하였다. R. L. Hymers, Jr. Preaching to A Dying Nation; Calvary Contender, 15 October 1999.

5) Dallas Morning News, 1 August 1998; Fundamentalist Digest, July-August 1998; Calvary Contender, 1 September 1998.

6) Sword of the Lord, 18 February 2000.

7) Calvary Contender, 15 March 2000.

8) Webster's New World Dictionary, 3판, p. 1161; O. T. Spence, Straightway, vol. 25, p. 3.

9) Allan Bloom, 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 (1987), p. 73.

10) 조영엽 박사의 록 음악에 대한 논평을 참고하라.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 (미스바, 2001), 19-114쪽.

11) Charles T. Brown, The Art of Rock and Roll (1983), p. 42.

12) Frank Garlock and Kurt Woetzel, Music in the Balance, p. 153.

13) 고(故) Dr. O. Talmadge Spence는 미국의 Foundation 성경대학과 신학교의 창설자이다. 그는 피바디 음악학교도 나왔고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14) O. Talmadge Spence, 1993년 10월 24일, 서울 잠실동교회 설교에서.

15) ‘열린 예배’는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에 의해 처음 구상되었다. 1988년 하이벨스 목사는 대예배의 하나로 토요예배를 추가하여 드리기 시작하였고 현재 그의 교회는 똑같은 형식으로 토요일과 주일 각각 두차례씩 4번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새들백교회, 월드하비스트교회, 갈보리 채플, 한국의 온누리교회, 사랑의 교회, 소망교회, 만나교회 등이 이런 예배를 드린다. “열린 예배, 찬.반 앞서 분명한 이해 요구,” 기독교연합신문, 1999. 11. 7.

16) 위의 글; 기독신문, 1999. 8. 11, 17쪽;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 (미스바, 2001), 19-114쪽; Carl F. George, The Coming Church Revolution; Prepare Your Church for the Future; Robert Logan, Beyond Church Growth.

17) Ed Dobson, Seeker Sensitive Service.

18) Foundation, March-April 1998, pp. 4-5.

19) Ibid., pp. 8-9.

20) Rick Warren, The Purpose Driven Church, p. 280.

21) Ibid., p. 285.

22)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 19쪽.

23)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예배당에서 연극이나 유희를 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결의한 바 있다(1923년 제12회 총회록, 35쪽; 1953년 제33회 총회록, 235쪽).

24) Calvary Contender, 15 June 1998.

25) M. H. Reynolds,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The Cup of the Lord or the Cup of Devils?, p. 8.

26) S. Wesley Ariaraja, The Bible and People of Other Faiths (WCC, 1985), pp. 6, 9-11, 21-22, 24, 26-27, 56, 67.

27) Lumen Gentium, VIII. 59.

28)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카톨릭 교리서 (1967), 114쪽.

29) Lumen Gentium, VIII. 59.

30) Lumen Gentium, VIII. 62.

31)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2. 8. 28, 31.

32) 위의 책, 2. 8. 32-34.

33) J. K. van Baalen, The Chaos of Cults, 4th rev. ed. (Grand Rapids, Mich.: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38), pp. 246-247에서 재인용함.

34) 바나바 서신, 15.

35) 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 9.

36) Dialogue with Trypho, p. 34; R. L. Dabney, Lectures in Systematic Theology, p. 394에서 재인용함.

37) Dabney, p. 394에서 재인용함.

38) John C. Ryle, Knots Untied, pp. 236, 243.

39) 고 박윤선 박사는 말하기를, “. . . 주일이 구약 안식일의 성취이므로 주일을 지키는 법이 안식일을 지키는 법과 똑같지는 않다. 그러나 원리에 있어서 양자(兩者)는 서로 공통점을 가졌으니, 신자들이 그 날에 안식함(육신의 사업과 노동을 정지함), 하나님을 예배함, 기뻐함 등이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주일 성수의 중요성이다. 주일 제도는 진리니만큼 우리가 그것을 파수해야 한다. 이것을 파수하지 않음은 불경건이다. 다만 그 파수하는 방법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인만큼 은혜로 실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박윤선, 구약주석 사기서: 제4권 에스라서.느헤미야서.에스더서 (서울: 영음사, 1985), 160쪽.

40) 박윤선 박사는 말하기를, “교회가 이것[십일조 헌납]을 법제화 할 것은 아니고 그 이상 헌금이나 비록 그 이하 헌금도 감심으로 하도록 권장해야 한다. 그 이유는 신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되기 때문이다. . . . 그런데 신자들이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여 즐거움으로 드리는 헌금은 십일조 이상을 바치게 되어진다”고 하였다. 박윤선, 구약주석 사기서: 제4권 에스라서.느헤미야서.에스더서, 163쪽.

41) 김복년, “그리스도인 가정의 자녀 교육,” 1996년 7월 24일 합정동교회 유치부 자녀교육세미나에서.

42) 성경은 노예 제도를 인정한다(출 21:2; 21:20-21; 엡 6:5). 옛 시대에 종 혹은 노예는 전쟁 포로이거나 가난하여 팔린 자이었다. 노예 제도는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극복해야 할 폐해를 가진 제도이었다. 특히 주인과 종의 비인격적 관계가 그러하다. 그러나 정치적, 사회적 제도는 급격히 변화되기 어렵다. 어떤 제도든지 변화를 원하는 계층이 있고 변화를 원치 않는 기득권 계층이 있다. 역사상 인류는 사회 제도의 변화를 위해 많이 싸워 왔고 지금도 지구의 어떤 부분에서는 싸우고 있다.

43) 국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의 개인적 선택과 관계 없이 이미 정해진, 상당히 통제된 사회 단위이다. 오늘날 자유 선택에 의해 원하는 국가로 이민하는 것이 제한적으로 가능하지만, 국민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국가적 환경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세속국가는 사회의 도덕적 질서와 평안을 위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안정된 신앙생활도 안정된 사회환경 속에서만 가능하다(딤전 2:2). 성경이 보이는 이상적 국가 형태는 독재적 왕정 국가나 하나님 없는 인본주의적 민주국가 혹은 사회주의적 국가가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계 11:15) 모든 성도가 자율적으로 통치에 참여하는 국가 형태라고 생각된다.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계 22:5).

44) 연합뉴스(서한기 기자), 2006. 8. 29; http://blog.empas.com/seoulsihe/154836 91 에서 인용함.

45) 이것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건강증진사업지원단이 최근 내놓은 ‘우리나라 국민의 건강결정요인 분석 보고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술.담배 인한 질환 비용 6조원 육박,” 식품환경신문, 2006. 12. 25.

46) 연세대 보건대학원 정우진 교수팀의 2006년 연구결과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연합뉴스(서한기 기자), 2006. 8. 29; http://blog.empas.com/ seoul-sihe/15483691에서 인용함.

47) 맥주의 알코홀 농도는 2-6퍼센트이며 포도주는 8-20퍼센트이지만, 증류시켜 만들어진 위스키나 보드카 같은 술들은 40-50퍼센트라고 한다.

48) "Smoking," Encyclopedia of Biblical & Christian Ethics, ed. R. K. Harrison (Nashville: Thomas Nelson, 1992), pp. 387-389.

49) 조선일보, 1998. 11. 30, 30쪽.

50) AMA Journal; Calvary Contender, 15 December 1993.

51) 조선일보, 1994. 10. 13, 7쪽.

52) 조선일보, 1999. 10. 27, 9쪽.

53) “술.담배 인한 질환 비용 6조원 육박,” 식품환경신문, 2006. 12. 25.

54) ‘새생명 사랑회’가 주최한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낙태문제”라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발표한 장병숙 간사의 “낙태실태에 대한 보고”에 의한 것임. 기독신보, 1990. 6. 16, 7쪽; 한국 인구보건연구원의 조사에 의한 통계도 동일함. 크리스챤 신문, 1990. 11. 3, 5쪽.

55) 교회연합신문, 1995. 11. 19, 9쪽; 1998년의 한국 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15-44세 기혼 여성의 44퍼센트가 한번 이상 낙태 경험을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함. 조선일보, 2001. 11. 17, 21쪽.

56) Haven B. Gow, "Is Abortion in America Like the Holocaust?" Christian News, 24 June 1985, p. 8; 교회연합신문, 2002. 5. 26, 11쪽.

57) Religious News Service, 18 June 1986.

58) Calvary Contender, 1 January 1999.

59) 본절에 네 번 나오는 ~카라는 말은 남성 2인칭대명사 어미이다.

60) Calvin, Matthew Poole, Keil-Delitzsch도 그렇게 생각한다.

61) 1981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Dr. Micheline M. Matthews-Roth, Dr. Jerome Le Jeune, Dr. Hymie Gordon 등의 의학자들은 이 같은 사실을 증언했다. 노르만 L. 가이슬러, 기독교 윤리학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190쪽.

62) 가이슬러, 기독교 윤리학, 189쪽.

63) 가이슬러, 기독교 윤리학, 190-191쪽.

64) Journal of Medical Ethics, February 1999; World, 13 March 1999; Calvary Contender, 1 April 1999.

65) Byron Northwick and Edward Fehskens, "Euthanasia: A Matter of Death and Life," Christian News, 6 December 1999, p. 6.

66) Reader's Digest, September 1997.

67)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7.

68)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1.

69) New Americans, 27 September 1999; Calvary Contender, 15 October 1999.

70) Reader's Digest, October 1999; Calvary Contender, 15 October 1999.

71) 가이슬러, 기독교 윤리학, 199-202쪽.

72) Haven Bradford Gow, "Why So Many Suicides?" Christian News, April 28, 1986.

73) 기독교보, 2008. 3. 22, 7쪽.

74) 중앙일보, 2007. 2. 14; 조선일보, 2010. 9. 4, A10쪽.

75) 최 석, “전쟁,” 동아 세계 대백과사전, 24권, 481쪽.

76) 김필재, “인류를 파괴해온 ‘악마적 사상들’ (1): 러시아 공산혁명의 배후세력은 ‘일루미나티’,” 미래한국, 2004. 8. 7, 12쪽.

77) 1922년에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고, 1934년 이후 전제적(專制的) 대숙청을 행했고, 1953년에 사망하였다.

78) The Black Book of Communism--Crimes Terror Repression, 1997; 미래한국, 2004. 8. 7, 12쪽.

79) 그 중에는 국군 전사자가 23만명, 민간인 사망자가 99만명, 북한군 전사자가 54만명, 북한 민간인 사망자가 150만명으로 추산된다. 김상철, “악의 인정과 부정,” 미래한국, 2005. 6. 25, 1쪽; 미래한국, 2004. 6. 5에 실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간 “한국전쟁피해 통계집”의 숫자도 참고할 것.

80) 김성욱, “북한인권문제 원인은 수령독재,” 미래한국, 2005. 5. 7, 3쪽; 오스틴 램지, “사악한 독재자 김정일 조명,” 미래한국, 2005. 5. 28, 10쪽, Time, 23 May 2005에서 재인용함.

81)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100-122쪽.

82)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83) Christian News, 13 April 1992.

84) Christian News, 29 April 1985, p. 3.

85)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86)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87) Christian News, 24 November 1997, p. 11.

88) 크리스챤신문, 1998. 1. 26, 2쪽.

89) Christianity Today, 1 March 1999.

90) Calvary Contender, 15 March 1999.

91) National Liberty Journal, February 1999; Calvary Contender, 15 February 1999.

92) Calvary Contender, 15 April 2001.

93) Calvary Contender, 1 April 1992.

94) 기독신문, 2000. 3. 15, 8쪽.

95) ENI, 10 June 2003; Friday Church News Notes, 13 June 2003; Christian News, 23 June 2003, p. 2.

96) Times, 12 August 1985.

97) 조선일보, 2002. 7. 9, 13쪽.

98) Charles D. Provan, "The Bible's View of Birth Control," Christian News, 29 February 1988, pp. 1, 11-14.

99) 황우석 교수는 그의 실험에서 185개의 난자에 체세포 핵이식을 통해 인간 배아를 만든 후 여기에서 11개의 줄기세포를 확보했다고 한다. 즉 줄기세포가 추출된 배아들과 나머지 배아들은 폐기처분된 것이다. 박상은, “인간 배아는 생명체,” 기독교보, 2005. 5. 28, 12쪽.

100) 이상원,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 기독교보, 2005. 5. 28, 12쪽.

101) 수정란 분할에는 ‘미세조작기계’라는 의료 장비가 사용되며 이것은 국내의 몇 개의 불임전문병원들에도 있다. 수정란 복제는 국내에서도 가능한 시술이라고 한다. 조선일보, 1993. 10. 28, 30쪽.

102) 기독신문, 1998. 1. 14, 16쪽; 크리스챤신문, 1998. 1. 26, 2쪽.

103) 파이낸셜 뉴스, 2013. 11. 3.

104) The World Book Encyclpedia, XVIII, 560-62.

105) The World Book Encyclpedia, IV, 893-99.

106) The Black Book of Communism--Crimes Terror Repression, 1997; 미래한국, 2004. 8. 7, 12쪽.

107) Matthew Poole,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I, 118.

108) 위의 책, 410쪽.

109) 1980년대 중반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에서 텔레비젼 방송 프로그램들을 주관하는 자들 가운데 59%가 유대인이며, 25%가 개신교, 12%가 카톨릭이고, 93%는 교회에 거의 혹은 전혀 출석치 않으며, 97%는 낙태찬성론자이며, 95%는 동성애에 대해 괜찮다는 입장을 취한다고 하였다. Calvary Contender, 1 September 1986.

110) 1970년대의 한 글에 의하면, 1945년 영국에서의 시합 이후 적어도 6명의 직업 권투선수들이 죽었고, 미국에선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미식축구에 관련하여 매년 약 26명이 죽는다고 한다. Christopher T. Reilly, "Sports," Baker's Dictionary of Christian Ethics, pp. 645-646.

111) Byz p45vid A C D ita b d ff2 vg syrp s copsa bo arm 등의 고대 사본과 역본의 본문이 그러하다. א* B

 

 등 극소수만 ‘금식’이라는 말을 생략하고 있다. 같은 내용의 구절이 전통사본 마태복음 17:21에도 있다. 그 본문은 Byz C D W ita b d ff2 vg syrp cop(meg) arm Origen Diatessaron 등에 있고, א* B ite syrs c co

psa 등에만 빠져 있다. 전통본문은 확실히 원본의 본문이다.

 

112) 영어 킹제임스역에서 약 53회 ‘찬송하다’로 번역되었고 약 32회 ‘감사하다’로 번역되었다.

113) 그 외에, 대상 23:30; 25:3; 시 30:4; 95:2 등.

114) 히브리어 동사(야다)는 헬라어 70인역에서 대부분 ‘고백하다’(엑소몰로게오)는 말로 번역되었다.

115) 롬 1:8; 6:17; 고전 1:4; 엡 1:16; 빌 1:3; 골 1:3; 살전 1:2; 살후 1:3; 몬 4; 딤후 1:3 등.



(받은메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