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주요맥락
글 / 조병수 교수
신약의 맥락을 정리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책별로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일괄적으로 살펴보거나, 책의 성격에 따라 복음서, 역사서, 서신서, 묵시서 등으로 고찰하거나, 조직신학적으로 신론, 인간론, 기독론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신약의 흐름을 정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신약의 주요인물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 예수 그리스도, 사도 바울, 사도 요한, 그 외의 공동서신 기자들 (야고보, 베드로, 유다).
제1강. 세례자 요한
세례자 요한은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만 언급되고 그외에는 신약성경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사복음서는 모두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자세히 보고하는데, 중요한 사항들에 관하여는 일치하게 보고하며 특이한 사항들에 관하여는 상이하게 보고한다. 공관복음에 묘사된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요한복음에 들어있는 세례자 요한의 설명을 비교해 보면 가장 큰 다양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삼 공관복음서도 세례자 요한을 설명하는 범위와 내용에 관한 한, 서로 다른 점들을 가지고 있다. 각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을 기술함에 있어서 각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는 반복적으로 요한의 세례가 지시된다 (행 1:5; 1:21-22; 10:37; 11:16; 13:24-25; 18:2; 19:1-7).
1. 세례자 요한의 출생
1) 요한의 부모
세례자의 출생에 대하여는 단지 누가 만이 말한다 (눅 1:5-15,39-45,57-80). 요한은 제사장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요한의 부모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었다. 요한의 부모들은 둘다 헤롯의 악정하에 살면서도 하나님앞에서 의인이며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들이었고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행하였다" (눅 1:6). 그들은 인격의 본질적인 면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유지하였고, 생활의 행위적인 면에서도 주님의 규범을 철저하게 준수하였다.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공적인 면에서는 제사장으로서 성전봉사에 있어서 보수적인 충실함을 보여주었으며 (눅 1:8-9), 사적인 면에서는 가장으로서 신앙계승을 위하여 적극적인 기도생활을 하였다 (눅 1:13).
2) 천사의 예언
요한의 출생은 하나님의 사자가 예언한 것이었다 (눅 1:15-17). 하나님의 사자는 요한에 관하여 두가지로 예언하였다. 첫째 예언은 요한의 인물됨에 관한 것이다 (눅 1:15). 요한은 주님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며,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며, 모태로 부터 성령으로 충만할 것이다. 둘째 예언은 요한의 사명에 관한 것이었다 (눅 1:16-17). 요한은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회적인 회복을 위하여 태어났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회복하고,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상호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요한의 인생의 목적이었다 (눅 1:17).
3) 요한의 이름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름을 얻었다 (눅 1:63). 요한의 이름은 "여호와는 위로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성령으로 충만한 요한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며 기쁨이 될 자로 출생하였다.
4) 요한의 성장
요한은 성장할 때 신체와 영혼이 강함을 얻었다 (눅 1:80). 요한은 광야에서 성장하였다 (눅 1:80).
요한이 광야에서 성장한 것은 부모의 용단에 의한 것이었다. 요한의 부모들은 요한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영적인 용단을 내렸다.
요한은 부모의 기도에 힘입어 성장하였다.
2. 세례자 요한의 활동
1) 요한의 등장
세례자 요한은 예수께서 나사렛에 거주하고 있을 때 (마 2:23; 3:1)에 등장하였다. 이것은 로마의 정치로 보면 티베리우스 (Tiberius) 황제 15년이었으며,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재지하고 있을 때였으며, 유대의 정치로 보면 헤롯과 빌립과 루사니아가 각기 분봉왕으로 유다와 갈릴리를 다스리고 있을 때였으며, 유대의 종교로 보면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였다 (눅 3:1-2).
이때 세례자 요한은 유대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눅 3:2), 유대의 광야에서 등장하였다 (마 3:1). 그는 처음부터 도시에 대하여 어느 정도 적대적인 입장에 있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는 인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약속을 인내와 은혜와 신실가운데 이루셨다. 하나님의 승리이다.
2) 요한의 세례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모두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주었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마 3:11/막 1:8/ 눅 3:16; 요 1:26,31,33; 행 1:5; 11:16). 요한의 세례는 흐르는 물에서 시행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바리새인 종파와 쿰란 (엣세네) 공동체가 시행하던 결례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하게" (마 3:11)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요한의 세례의 대상은 예루살렘과 유다와 갈릴리 그외의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세리와 창기, 군인 등의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마 3:7; 21:32; 눅 3:10-14). 요한의 인상적인 세례운동은 폭넓은 영향력을 가지고 심지어 소아시아에까지 퍼져나갔다 (행 19:1이하).
3) 요한의 생활방식
요한은 생활방식은 아주 특징적인 것이었다. 그는 약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 (마 3:4; 막 1:6).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의상과 음식에 대한 간명한 설명이다. 사람들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 11:18/눅 7:33). 세례자 요한의 생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로 이것은 문화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자 요한이 험한 옷을 입고 험한 음식을 먹은 것은 문화와 어느정도 거리감을 가진 것을 뜻한다. 둘째로 이것은 쾌락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자 요한이 거친 의복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은 것은 인간 자신의 욕심과의 싸움을 의미한다.
4) 요한의 교훈
공관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은 회개설교, 메시야설교, 신분설교를 한다.
(1) 회개설교 (마 3:2,7-10; 막 1:4; 눅 3:3,7-9)
세례자 요한은 가장 먼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마 3:2)고 외쳤다.
회개요구는 천국이 임박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왜냐하면 회개는 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지성적인 각성이나 감정적인 회심이나 의지적인 결단을 넘어서는 것이다. 회개는 영적인 변화이다. 그래서 회개를 외치는 것은 인간에 의한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요구이다. 인간세계 밖으로부터 오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회개를 외칠 수가 없다.
천국이 임박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천국의 임박은 부정적인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온 것을 의미한다. 세례자 요한의 말을 빌자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것이다 (마 3:7).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마 3:10). 쭉정이를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는 것이다 (마 3:12). 천국의 임박은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이 가까이 온 것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마 3:9). 그것은 "능력이 많으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마 3:11). 이것은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는 것과 같다 (마 3:12).
천국의 임박에 대한 인식은 구원과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는 것이다. 천국의 임박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천국의 임박에 비추어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인간의 성품을 보고, 하나님에 비추어 인간을 볼 때 회개를 외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세상에 대하여, 인간의 성품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회개를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인식에서부터 나온다.
(2) 메시야설교 (마 3:11-12; 눅 3:15-17)
세례자 요한의 설교가운데 중요한 것은 메시야가 올 것에 대한 설교이다.
메시야설교에서 요한은 먼저 자신의 신분과 활동의 한계성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요한의 신분은 메시야에 비하면 그의 신들메도 풀기에 감당치 못할 사람이다. 요한의 활동은 단지 물세례를 주는 것이었다.
요한은 이어서 메시야의 신분과 활동의 위대성을 드러냈다. 메시야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다. 메시야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메시야의 세례는 두가지 효력을 발휘한다. 구속을 위한 성령세례의 역할과 심판을 위한 불세례의 역할이다. 성령은 구속을 의미하며 불은 심판을 의미한다 (마 3:12; 눅 3:17; 참조. 마 13:30,40,42,49). 메시야는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실 것이다.
요한은 자신과 예수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예수를 신랑으로, 자신을 친구로 비유한다 (요 3:29-30). 요한은 자신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를 않는다. 그는 오히려 자기의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의 주인으로 소개한다. 예수는 신랑이며 요한은 그의 친구일 뿐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음성을 듣고 기뻐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한다" (요 3:29).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일이 성취되기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예수가 드러나기 때문에, 그의 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쁘다. 우리에게도 바로 이러한 요한의 태도가 필요하다. 예수를 이용하여 자신의 일을 성취하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의 일을 이루어 기쁨을 가지려 하기에 예수의 일이 망쳐지도록 해서는 안된다. 자기의 일을 성취하는 것을 기뻐하는 대신에 예수의 일이 성취되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 3:30)고 말한다. 세례자 요한은 구속사의 발전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 구속사에 새로운 장이 펼쳐진다. 예수의 시대가 오고, 요한의 시대는 지나간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 앞에서 자신이 물러나야 하는 것을 명백하게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사람들을 확보하는 일이나, 자기를 내세우는 일같은 어리석은 행위를 하지 않는다. 요한은 자신을 쇠하도록 허용한다. 예수가 흥하도록 돕는다. 이것은 참으로 하늘의 일을 알며 말하는 자의 태도이다. 예수와 관계를 맺은 자는 예수가 흥하고 자신은 쇠하기를 노력한다. 예수가 드러나고 자신이 감추어지기를 애쓴다. 이렇게 하여 예수의 사업이 흥왕해지도록 한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말하는 자는 예수가 흥해지도록 하며 자신은 쇠해지도록 한다.
(3) 신분설교 (눅 3:10-14)
세례자 요한은 세 부류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다.
첫째로 무리에게 (눅 3:10-11). 요한은 무리에게 의복과 음식의 문제를 설교한다. 옷 두 벌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이설교는 인생의 가장 절박한 문제를 건드린다. 가장 절박한 인생의 문제에서 회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적게, 작게 가진 상태에서 변화가 있어야 한다. 가장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그 옆에는 더 부족한 자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세리에게 (눅 3:12-13). 요한은 세리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것 ("정한 세")에 관하여 설교한다. 불법적이며 부당한 "더 이상"을 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불법적인 "더 이상"을 추구하면 그로 말미암아 불법적인 "더 이하"에 빠지는 사람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의 균형을 파괴하고 결국 자멸하고 말 것이다.
셋째로 군병에게 (눅 3:14). 요한은 군병에게 칼을 버릴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칼이 포학과 억압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설교한다. 검은 질서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강탈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다 (롬 13:4 참조).
(4) 기타 설교
공관복음서와 달리 단지 요한복음 만이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선재하시는 예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거 (요 1:15,30), 세례자 요한과 유대인의 대화 (요 1:19-28), 예수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증거 (요 1:29,36).
4) 요한의 제자들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다같이 분명하게 지적되는 것은 세례자 요한에게 제자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마 9:14/막 2:18/눅 5:33; 요 1:35,37; 행 19:1-7).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 (마 9:12/막 2:18/눅 5:33)과 기도 (눅 11:1)에 힘썼다.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이 예수의 주기도문 교육의 동기가 되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파송을 받고 (마 11:2/눅 7:28), 논쟁을 하고 (요 5:35), 보고하고 (요 5:26), 세례를 베풀었던 것 같다. 이들은 마지막에 요한의 주검을 매장하였다 (마 14:12/막 6:29). 요한의 제자들은 소아시아 에베소까지 퍼져나갔다 (행 19:1-7). 이후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요한의 세례밖에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소개해주었다. 그들은 예수의 세례를 받았을 때 성령을 받게 되었다.
5) 요한의 기도
단지 누가 만이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쳤다고 언급한다 (눅 11:1). 이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께 주기도문을 배우는 동인이 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분명히 기도를 강조한 사람이다. 그래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는 자들은 세례를 받고 나서 기도를 하였다 (눅 3:21). 요한의 제자들은 항상 금식하며 기도를 하였다 (눅 5:33). 요한이 제자들에게 어떤 내용의 기도를 가르쳤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주기도문이 요한기도문에 동인을 두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아마도 주기도문을 역추적하면 요한의 기도내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3.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1) 예수에 대한 요한의 증거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는 동시적으로 활동하였다 (요 3:22-4:3).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 관하여는 사복음서가 모두다 요한을 예수의 선구자와 예비자로 생각한다 (마 3:3/막 1:2-3/눅 3:4; 마 11:10/눅 7:27; 요 1:23). 요한은 예수를 위한 사람이다. 모든 복음서에서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강조되는 것은 예수께서 비로소 요한 뒤에 오신다는 사실이다 (마 3:11/막 1:7/눅 3:16; 요 1:15,27,30; 행 13:25; 19:4). 요한은 물세례자로 설명하고 예수는 성령세례자로 설명함으로써 요한이 예수에게 종속한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 3:11/막 1:7/눅 3:16; 요 1:33). 특히 이 사실은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의 첫번째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요 1:35-42)에서 입증된다.
2) 요한에 대한 예수의 증거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증거하였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마 17:10-13/막 9:9-13).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의 두 아들 비유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이 시대가 어떻게 반응하였는지 알려주신다 (마 21:28-32). 요한복음에도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의 특이한 말씀이 들어있다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 요 5:33-35).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명확하게 증거하신다 (마 11:2-19/눅 7:18-35). 복음서들에서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증거하는 가장 큰 일치점은 요한이 "선지자보다 큰 자"라는 것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아주 명백하게 이것을 선언한다 (마 11:9/눅 7:26). 세례자 요한은 예수의 선구자로서 여자가 낳은 자중에 가장 큰 자이다. 마가복음에서 요한은 분명히 복음의 시작에 속함으로써 (막 1:1이하) 요한은 구약선지자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물이다. 요한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예수에 대한 첫번째 증인으로 묘사한다 (요 1:7; 10:42). 그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옛 선지자들에게 속하는 사람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세례자 요한은 구속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선지자보다 큰 자"이다. (사실상 예수께서 모세와 같은 참 선지자이시다 신 18:18 = 베드로의 설교 행 3:22; 스데반의 설교 7:37. 그러나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400년 공백기에서 갑자기 참 선지자이신 예수께서 등장하면 무리함이 생긴다. 그래서 완충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요한이 큰 선지자로 온 것이다. 요한은 스스로 선지자라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렇게 여김으로써 드디어 새로운 선지자 시대가 도래한 것을 알린다. 예수께서 요한을 구약선지자들과는 다른 큰 선지자로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절대적인 선지자의 안목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절대적인 선지자였기에 요한이 위대한 선지자임을 인식하셨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선지자 상의 도식은 다음과 같다.
구약선지자들 - 더 큰 선지자 (요한) - 그 선지자 (예수)
4. 세례자 요한과 유대인의 관계
세례자 요한은 유대인들을 맹렬하게 비판하였다.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 (마 3:7; 눅 3:7). 요한을 선지자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지도적인 유대인들은 이런 요한을 향하여 "네가 누구냐" (요 1:19)라고 응수하였다. 결국 유대인들은 요한을 귀신들린 자로 정죄하였다 (마 11:18; 눅 7:33). 유대인들은 요한이 의의 도로 온 것을 부인하였고 요한을 죽음의 자리로 내몰았다 (마 21:32).
5. 세례자 요한의 죽음
요한은 아무런 표적도 행하지 않았다 (요 10:40-42). 그러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선지자라고 불렀으며 (마 14:5; 마 21:16/막 11:32/눅 20:6; 눅 1:76), 장차 올 선지자로까지 기대하였다 (마 11:9/눅 7:26; 요 1:21,25). 이것은 복음서들이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증거하는 아주 중요한 공통적인 생각이다. 요한은 선지자로서 심지어 헤롯의 악행을 지적하였다.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를 가로챈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눅 3:19). 요한은 선지자로서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고 죄악을 공격한 것이다. 헤롯은 요한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결국 헤로디아의 의견을 따라 요한을 체포하여 투옥하였다. 헤롯의 악행에 대한 강렬한 비판은 요한이 죽임을 당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롯의 생일잔치에서 참수당했다. 그의 처형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마 14:3-12/막 6:14-29).
6. 세례자 요한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
세례자 요한은 기독교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는 것은 요한공동체와 예수공동체의 관계를 위하여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 몇 명이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은 두 공동체의 동일기반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모범을 따라 동일한 내용을 설교하기도 하고, 비슷한 기도교육에 임하기도 하고, 같은 방식으로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게 하였다. 이렇게 요한은 기독교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때문에 기독교는 요한을 복음도식에서 항상 첫 자리에 두었다 (후론 참조). 심지어 기독교는 세례자 요한을 구약과 신약을 가르는 중심점으로 보았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눅 16:16). 요한을 중심으로 이전에 율법과 선지자가 있고, 이후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있다. 요한 이전의 시간과 요한 이후의 시간이 이렇게 대조된다. 요한을 중심으로 옛 시간과 새 시간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구속사의 분수령에 서있다.
제2강. 예수 그리스도
1. 예수사건을 위한 복음서의 순서법칙
예수사건을 보고하기 위하여 복음서들은 특정한 순서법을 가지고 있다. 이 예수사건의 순서는 초대교회가 강하게 고집하던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간단한 예를 들면 행 1:21-22 (베드로의 예루살렘 사도설교)이다. 여기에서 예수사건은 세례자 요한의 등장으로 시작하여 예수의 승천으로 종결된다. 행 13:23-31 (바울의 안디옥 전도설교)은 이 사이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삽입한다. 행 10:37-43 (베드로의 욥바 초청설교)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앞에 예수의 활동을 덧붙인다. 공관복음서는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던 바로 이러한 예수사건에 대한 특정한 순서법칙을 가장 상세하게 확대한 것이다.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예수께서 처음에는 갈릴리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유대와 예루살렘으로 이동한 것을 알려준다.
(베드로)
행 1: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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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등장 예수승천
(바울)
행 13: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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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등장 예수죽음 예수부활 예수승천
(베드로)
행 10:3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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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등장 예수활동 예수죽음 예수부활 예수승천
2. 예수의 출생과 등장
1) 예수의 출생
(1) 예수의 출생
마태복음은 세 가지 표제어를 사용하여 예수의 출생을 세 가지 방면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의 책" (마 1:1)이라는 표제어를 가지고 계보를 중심으로 설명되며 (마 1:1-17),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은 이러하니라" (마 1:18)는 표제어를 가지고 부모를 중심으로 설명되며 (마 1:18-25), 셋째로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출생하셨다" (마 2:1)는 표제어를 가지고 상황을 중심으로 설명된다 (마 2:1-23).
계보상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왕국이 끝난 시점에 출생하셨다. 마태복음의 예수 계보에 의하면 이스라엘 왕국은 세 단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 왕국의 성립 단계로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이다 (마 1:2-5). 둘째로 왕국의 존립 단계로서 다윗부터 포로시대까지이다 (마 1:5-11). 셋째로 왕국의 멸망 단계로서 포로시대부터 예수까지이다 (마 1:12-16). 그런데 마지막 시점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왕국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 예수께서 오시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계획가운데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한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고 (창 13:15; 삼하 7:12ff.), 아브라함과 다윗에 의하여 이 약속이 깨어질 뻔 하였을 때 (하갈의 사건과 밧세바의 사건),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여주셨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오시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사람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만일에 예수께서 사람을 통로로 삼아 오시지 않았더라면 사람의 구세주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멀리하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사람들이 사는 곳에 거하셨다 (요 1:14). 예수는 철저하게 도시의 사람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나서 도시에 자라고 도시에서 죽었다. 도시에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가득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어주셨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소망이시다 (롬 15:12).
예수의 부모는 요셉과 마리아이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마 1:19).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리킨다. 요셉은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사람을 사용하신다. 그런데 예수의 성육신에서 중요한 것은 동정녀 탄생이다. 예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갈 4:4). 예수의 구원은 성구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셔야 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없이 태어나셔야 했기 때문이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가 없다. 이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마 15:14). 예수께서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심으로써 아담의 원죄의 유전으로부터 전적으로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면 동정녀 탄생이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그것은 성령의 잉태와 출생으로 가능하였다 (마 1:18,20; 눅 1:35).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장 놀랍고 비상한 방식을 사용하신 것이다. 인간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출생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식이다 (임마누엘).
예수께서는 헤롯이 통치할 때 탄생하셨다. 이때 동방에서 먼 길도 마다치 않고, 고급한 신분에도 아랑곳없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거리도, 신분도, 염치도 버리고 예수를 찾아왔다. 그러나 예수께서 태어나신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헤롯은 예수게서 나신 것을 몰랐다. 메시야가 오실 것에 대하여 무지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오신 것을 알았을 때 헤롯은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염치없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물었다. 동방박사와 헤롯대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한 방식을 취했지만 목적은 크게 달랐다. 동방박사는 예수를 경배하기 위하여 찾았고, 헤롯대왕은 예수를 살해하기 위하여 찾았다. 하나님께서는 별을 통하여 동방박사를 도우셨고, 천사를 통하여 헤롯대왕을 방해하셨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는 존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는 멸시를 받는다 (삼상 2:30).
(2) 예수의 도피와 귀환과 성장
예수께서는 부모의 손에 의하여 애굽으로 도피하였고 헤롯이 죽은 후에 갈릴리로 돌아와 갈릴리 사람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마 2:19-23).
(3) 예수의 소년기
누가복음은 12살 예수에 대하여 진술한다 (눅 2:41-52). 예수께서는 소년시절에 부모의 신앙에 순종하여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소년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하였고, 하나님 아버지의 것을 존중히 여겼다. 이런 신앙적인 계승 속에서 예수의 신앙은 부모의 신앙을 뛰어넘었다.
2) 예수의 등장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활동하고 있을 때 등장하였다. 예수에게는 본격적인 활동이전에 두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세례와 시험이다.
(1) 세례
먼저 예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다. 이것은 사제관계나 경쟁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연속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공통성이 드러났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다 (마 3:15). 또한 요한은 예수께 세례를 줌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연속성을 드러냈다. 구속사가 진전 속에서 요한의 준비와 예수의 완성이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세례이후에 예수께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고, 하늘소리가 들렸다.
(2) 시험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사탄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시험의 순서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다르게 진술되어 있다.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시간적인 순서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영의 세계에는 시간적인 순서가 없다. 사탄의 시험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시험한 것이다. 사탄은 시험을 통하여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신분을 깨뜨리려 하였다. 사탄은 떡의 시험으로 예수를 초인간적인 능력자로 인정해주는 것처럼 하면서 떡에 매인 인간적인 연약자로 만들어버리려는 무서운 간계를 꾸몄다. 또한 사탄은 성전과 성경을 곡해시키는 시험을 하였다. 이것은 성전과 성경을 하나님의 영광표현을 위한 목적보다 인간의 능력과시를 위한 목적으로 오용하게 하게 하는 시험이었다. 마지막으로 사탄은 예수에게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주어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결국 예수를 짧은 시간 안에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락시키려고 하였다. 사탄의 시험 앞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주 단순한 방법으로 증명하셨다. 매번 하나님을 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 마 4:4;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마 4:7;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마 4:10).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었다.
3. 예수의 활동
예수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말씀하심과 치료하심이다 (마 4:23; 9:35).
1) 예수의 말씀
첫째로 예수의 말씀부터 살펴보자. 예수의 말씀에는 사람과 관련하여 제자들에 대한 설교와 대화가 있고, 유대인들과의 논쟁이 있다. 하나님과 관련하여는 기도가 있다.
(1) 예수의 설교
예수의 설교는 선포 (케리그마)와 교훈 (디다케)으로 복합적인 구성을 가진다 (마 4:23; 9:35). 보통 선포는 교회의 대외적인 것이요, 교훈은 교회의 대내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선포와 교훈은 설교의 양면이었다. 이것은 후에 사도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행 5:42).
예수의 설교가운데는 아주 짧은 설교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 4:17), "화있을진저" 설교 (마 11:20-24), 고난예고 (마 20:17-19), 예루살렘에 대한 설교 (마 23:37-39)이다. 이에 비하여 아주 큰 설교들도 있다. 이 가운데 마태복음에 나오는 다섯 가지 설교는 유명하다. 그것은 산상설교 (마 5-7장), 제자파송설교 (마 10장), 비유설교 (마 13장), 교회설교 (마 18장), 종말설교 (마 24-25장)이다. 이 설교들은 종결될 때마다 "예수께서 말씀 (명령, 비유)을 마치시매" (마 7:28; 11:1; 13:53; 19:1; 26:1)라는 어구가 나온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고별설교 (요 14-16장)도 긴 설교에 속한다.
예수께서 행하신 설교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가운데 하나는 비유를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다. 예수의 비유는 여러 종류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가장 간단한 것은 직유와 은유로서 이것은 격언이나 표어처럼 똑똑 떨어지는 말이다. 직유는 "...과 같다"라는 말을 지닌다 ("저희가 목자없는 양같이 유리하였다" 참조. 마 9:36/막 6:34). 은유의 예를 들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마 10:6)이라는 표현이다. 직유와 은유가 조금 더 발전되어 보다 복합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비유를 직비유라고 부른다. 이것은 직유를 기본으로 하여 발전한 것으로써 그림처럼 다소 서술적이며 상세한 내용을 지닌다. 예를 들면 잃은 양의 비유를 말할 수 있다 (눅 15장). 예화는 직비유가 좀더 실제적인 이야기로 발전한 것이다. 예를 들면 탕자의 비유를 말할 수 있다 (눅 15장).
예수의 비유가 드러내는 내용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보다도 공간적인 의미로 나타난다. 이것을 위하여 공간성을 뜻하는 전치사들 (안에, 안으로)이 자주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사용된다 (마 5:19,20). 천국의 공간성에 대하여는 신학적으로 오랫동안 의심받아 왔으나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천국비유에서 인격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자주 "사람"이란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행위자로서의 사람을 강조하거나 (좋은 씨와 가라지 비유 마 13:24), 성격명사 (장사꾼, 왕, 집주인)와 함께 사용되거나 (진주장사 비유에서 "진주 구하는 한 사람 장사꾼" 마 13:45; 회계하는 왕 비유에서 "한 사람 왕" 마 18:23; 포도원 비유에서 "한 사람 집주인" 마 20:1; 혼인잔치 비유에서 "한 사람 왕" 마 22:2), 또는 비유 중에 "사람"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겨자씨 비유에서 "한 사람이 취하여 자기 밭에 뿌린 겨자씨" 마 13:31; 누룩 비유에서 "한 여자가 취하여 가루 서말 속에 넣은 누룩" 마 13:33; 보화 비유에서 "한 사람이 발견하고 숨겨둔 보화" 마 13:44). 이렇게 비유에서 자주 "사람"을 강조하는 것은 사람의 성품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는 천국비유를 통하여 천국이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마치 다윗의 나라는 다윗 왕의 성품을 나타내고 이루어가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 이루어간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표현되며, 하나님의 성품으로 실현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며 종말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 종말론 또는 종말론적 현재이다.
(2) 예수의 대화
예수께서는 자주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셨다. 이것은 주로 질문과 답변으로 이루어진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시는 경우가 있다 (인자, 마 16:13-20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예수께 질문하는 경우가 있다 (천국에서 큰 자 마 18:1이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용서 마 18:21-35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종말현상 마 24:3이하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세례자 요한의 질문 (마 11:2-19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과 서기관의 질문도 있다 (마 19:16-30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어떤 사실을 두고 답변하신 경우들도 있다 (문둥병자 치병 마 8:2-4; 백부장 하인 치병 마 8:5-13; 제자도 마 8:18-22; 폭풍진정 마 8:23-27; 가족 마 12:46-50; 오병이어 마 14:13-21 [마 15:32-39]; 간질아들 치병 마 17:14; 가나안 여자의 딸 마 15:21-28; 누룩 마 16:5-12; 베드로의 만류 마 16:21-28; 엘리야 마 17:9-13; 하나님 나라의 자리 마 20:20-28; 소경개안 마 20:29-34; 바리새인 마 23:1-36; 성전파괴 마 24:1-2; 향유 마 26:6-13; 만찬 마 26:17-29; 부활예고 마 26:31-35; 선교 마 28:16-20; 니고데모와의 대화 요 3:1-21).
(3) 예수의 논쟁
또한 예수의 말씀가운데는 논쟁이 있다. 이것은 주로 상대방이 논쟁적인 질문을 던졌을 때 답변으로 주신 말씀이다. 예수의 논쟁의 대상은 주로 유대인의 종교지도자들이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서기관, 제사장). 논쟁의 쟁점은 유대인의 규례와 교리에 관련되었다. 규례에 관한 논쟁에는 죄인식사 (마 9:9-13), 금식 (마 9:14-17), 유전 (마 15:1-20), 안식일 (막 2:23-28; 마 12:1-8; 참조. 마 12:9-21), 성전세 논쟁 (마 17:24), 세금논쟁 (마 22:15-22) 등이 있다. 교리에 관한 논쟁에는 구원 (눅 10:25-37; 18:18이하), 하나님나라 (눅 17:20-21), 이혼 (마 19:3-12), 부활 (마 22:23-33) 등이 있다. 때때로 질문없이 (그러나 내심질문) 논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사죄권세 (마 9:1-8), 귀신논쟁 (마 12:22-37), 표적 (마 12:38-45; 참조. 마 16:1-4), 고향 (마 12:53-58), 권세출처 (마 21:23-32), 율법조항 (마 22:34-40) 등이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질문하심으로써 논쟁을 일으킨 경우도 있다 (다윗자손 마 22:41-46).
(4) 예수의 기도
예수께서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기도로 시작하셨고 (눅 3:21), 기도로 마치셨다 (마 26:36-46). 예수께서는 결정적인 전환점들에서 항상 기도하셨다. 예수의 기도는 특히 누가복음에 자세하게 진술되어 있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마 3: 눅 3:21), 열두 제자를 부르시기 전에 (눅 6:12), 베드로가 신앙고백하기 전에 (눅 9:18), 십자가 죽음을 준비하면서 변화산에서 (눅 9:28이하), 수난 전에 (눅 22:40-44), 십자가 위에서 (눅 23:34,46). 예수께서는 홀로 (눅 5:16; 9:18; 11:1), 산에서 (눅 6:12; 9:28; 22:39,41), 들에서 (눅 5:16), 오랫동안 (눅 6:12), 무릎을 꿇고 (눅 22:41,44) 기도하셨다. 기도의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신뢰와 고집을 가지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시고 (눅 11:5-8,9-13), 기도를 경시하거나 중지해서는 안될 것을 가르치셨다 (눅 18:1; 21:36). 예수의 대표적인 기도는 복음사역 중에 드린 감사기도 (마 11:25-27), 제자들을 위하여 드린 중보기도 (요 17장), 고난을 앞두고 드린 수난기도 (마 26:36-46)를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하여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다 (참조. 조병수, 하늘과 땅을 엮는 사람들. 주기도문 해설, 도서출판 하나 1998, 103쪽). 주기도문은 기도의 잘못된 내용을 교정한다.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방지한다. 중언부언은 기도응답이 사람의 노력에 달려있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게 기도해야 하는 것을 알려주신다. 따라서 주기도문은 처음부터 잘못된 기도에 대한 회개요청이라고 부를 수 있다. 주기도문은 주님의 관심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는 분으로서 기도의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의 교통이다. 기도를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천상적인 세계에 참여하며, 하나님이 사람의 지상적인 생활에 참여하신다. 이것이 기도의 영광이며,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영광이다. 기도를 통하여 사람은 세상과 인생을 다르게 보게 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생활에 참여해주시는 사람으로서, 영광된 신분을 가지고 세상과 인생을 본다. 기도하는 사람은 영광된 하나님의 위치에서 비참한 인간의 형편을 바라본다 (변화산 하산 눅 9:37-43).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세상 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있는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간의 비참을 치료하는 일에 능력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2) 예수의 치병
둘째로 예수의 치료하심을 보자. 예수께서는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질병과 죽음이 예수에게 굴복하였다. 예수께서 치료하시는 주요동기는 사람의 비참함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이며 (마 9:36), 주요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요 9:3). 예수께서는 치병기적으로써 구약성경을 성취하신다 (마 8:17). 예수께서는 치병시에 자주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린다 (마 9:27 등등). 이것은 예수께서 당시의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정치적인 통지자로서의 다윗의 아들인 메시야 상을 깨뜨리고 인간적인 치료자라는 새로운 메시야 상을 설립하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의 치병기적은 주로 십자가에서 죽음당하실 것을 예언하시기 전의 시간에 몰려있다. 물론 십자가에서 당하실 죽음을 예언하신 후에도 병을 고치시기는 하였다 (마 17:14; 19:2; 눅 22:51). 그러나 치병기적의 비중은 십자가 죽음예언 이전에 무겁게 놓여있다. 이것은 예수의 치병기적이 예수사건을 구속사의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 증거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실현된 동반사항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4. 예수의 제자
예수께서는 활동의 처음부터 제자를 만드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셨다.
눅 6:13,17에 보면 예수의 제자그룹에 대한 사분법적인 표현이 나온다. 제자들 (눅 6:13), 열두 제자 (눅 6:13), 제자의 큰 무리 (눅 6:17), 백성의 큰 군중 (눅 6:17). 예수는 열두 제자가운데 특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측근으로 두었다. 예수께서 특히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다.
예수의 제자는 어떤 사람인가? 눅 14:26-35에 보면 예수께서는 자기와 함께 가는 사람들에게 제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르쳐주신다 (눅 14:26,27,33 "능히 나의 제자일 [ ] 수 없다). 이것은 예수의 제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수의 제자가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가?
1) 미워하는 사람 (눅 14:26): 인간관계, 혈육의 상대화
첫째로 예수의 제자는 미워하는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일 수가 없다" (26)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미움을 가르치신다. 이 말은 상당히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께서 부모를 미워하라니. 예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째 계명을 포기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후에 영생을 얻는 길에 관하여 묻는 관원에게 다섯째 계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려주셨다 (눅 18:20). 예수께서는 결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일이나 가족을 멸시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면 예수께서 미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예수의 제자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목숨에 절대성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들을 상대화하라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는 절대성을 오직 예수에게 두어야한다. 미워하라는 말은 덜 사랑하라는 말이다. 예수를 더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와의 결속 외에 다른 모든 결속은 "미움"아래 놓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배타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목숨을 예수로부터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서 있는 모든 관계들은 "주안에서" 비로소 그 권리와 의미를 얻는다". 모든 관계를 예수로부터 이해하면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 왜 그런가? 첫째로 예수로부터 사람을 이해하면 인간의 연약함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에 의하여 인간의 필요와 부족과 비참함이 드러난다. 이때 예수의 제자는 이 연약한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수의 제자는 실제로 완벽하게 이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다. 예수에게 의존할 때 인간에 대한 사랑이 완전하게 실현된다. 둘째로 예수로부터 사람을 이해하면 예수의 마음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통해 보면 사람이 그처럼 사랑스럽고 귀하게 보인다 (특히 이것은 생명의 존엄이 땅에 떨어진 우리 시대에 중요한 일이다). 예수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사랑하게 된다. 인간의 작은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큰 사랑으로 사랑한다. 그래서 예수로부터 사람을 사랑하지 아니하면서 그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결은 예수에게 절대성을 두는 것이다.
2) 십자가를 지는 사람 (눅 14:27): 자기관계, 자기의 상대화
둘째로 예수의 제자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좋지 아니하는 자는 능히 나의 제자일 수가 없다" (27)고 말씀하신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로마에 반역한 노예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은 처참하게 십자가형을 당하였다. 예를 들면 로마의 노예인 스파르타쿠스 (Spartacus)가 주전 73-71년에 일으킨 반란에서 결국 그의 추종자 6000명을 로마의 장군 크라수스 (Crassus)가 로마에서 카푸아 (Capua)로 가는 길인 비아 압피아 (Via Appia)에서 십자가에 달았다. 노예들이 당한 십자가처형은 전설적인 이야기로 당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임을 의미했다. 십자가는 처형의 표시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처형의 길에 서 있는 죄인을 생각하게 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진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죽음에 처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자주 십자가를 진다는 표현을 쓴다. 자녀의 문제나 사업의 실패나 육체의 질병 등을 만나면 우리는 종종 "이것은 내 십자가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의 고통스런 짐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예수의 제자들이 십자가를 진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 때문에 죽음를 당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를 얻은 자들이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로부터 생명을 얻은 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로부터 생명을 얻은 예수의 제자들은 이제 예수 때문에 손해를 당한다.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다. 순교. 예수의 제자들은 목숨을 잃는 순교를 각오한 자들이기에 일상생활 중에서도 순교의 길을 간다. 목숨을 잃는 큰 순교 앞에서 이익을 잃는 작은 순교를 받는다. 죄악을 멀리하고 의로운 삶을 산다. 불결을 제거하고 거룩한 삶을 산다. 예수의 제자들은 의를 뿜어낸다.
이것이 예수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예수의 제자들의 능력은 신비로운 행위를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손해를 보는데 있다. 이 세상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놀라는 것은 그들이 기적을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위하여 손해를 본다는데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자들로서 예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은 하지 못할 일이 없다.
3) 재물을 멀리하는 사람 (눅 14:33) 재물관계, 물질의 상대화
셋째로 예수의 제자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모든 재물을 떠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될 수가 없다" (33)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기본적인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고, 물건을 소유하지도 않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물질을 상대화시키라는 말이다. 물질주의적인 사고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거나, 물질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의 비유 중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 (눅 12:16-21)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 (눅 12:21)이다. 자기를 위하여 지식을 쌓아두고, 자기를 위하여 재능을 쌓아두고, 자기를 위하여 명예를 쌓아두고, 자기를 위하여 시간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들이 이와 같다. 오히려 예수의 제자는 물질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라" (눅 12:33).
예수의 제자는 미워하고 십자가를 지고 재물을 멀리한다는 사람이다. 예수의 제자는 자신의 신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라는 존재의식은 결국 모든 인간관계를 변화시키는 동인이 된다. 신분에 대한 의식이 사회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끝끝내 세상 욕심을 버리지 못하였다 (누가 큰 자인가. 좌우편 보좌 다툼 마 20:20-28).
5. 예수의 죽음과 부활
예수 사건에서 최고의 절정은 죽음과 부활이다.
예수의 죽음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뜻에 순종하는 것이며 (막 8:31 "... 당해야만 한다" 신적 당위성). 예수의 부활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실현하는 것이다 (고전 15:4; 참조. 눅 24:44-49).
1) 죽음
예수의 죽음은 일찍부터 예고되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이후로부터 (마 16:21). 예수께서는 여러 차례 죽음에 관해서 말씀하셨다 (마 막 10:32-34). 복음서들은 예수의 죽음에 관해서 거의 동일하게 자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1) 입성
예수의 죽음은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시작한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예언대로 (슥 9:9)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마 21:1이하). 나귀를 타신 것은 그의 겸손함을, 빌린 나귀를 타신 것은 그의 가난함을, 예언대로 나귀를 타신 것은 그의 순종함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선지자로 입성하시지만 겸손하고 가난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가지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존귀하게 만들기 위하여 낮아지시고, 사람들을 부요하게 만들기 위하여 가난해지시고, 사람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하여 종이 되셨다.
(2) 만찬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만찬을 베푸셨다. 예수께서 유월절 만찬을 베푸신 곳은 빌린 다락방이었다 (막 14:15). 이것도 역시 예수의 겸손함과 가난함을 보여준다. 이 곳에서 예수께서는 떡으로는 몸을 상징하시고, 잔으로는 피를 상징하셨다. 이것은 언약제정이었다. 예수께서는 잔을 주시면서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막 14:24). 예수의 언약만찬은 살과 피를 내놓는 사랑과 은혜의 만찬이었다. 이 만찬에 참여하는 자는 예수의 사랑과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3) 수난
배신. 유월절 만찬에서 한 제자가 예수를 배신할 것이 예고되었다 (막 14:7-21). 이것은 가장 가깝고 중요한 사람에 의한 배신이었다. 예수께 가장 가까이 있던 유다가 발꿈치를 들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이다.
체포. 예수께서는 감람산에서 체포당했다. 예수께서는 이때도 무력과 폭력에 대한 경고하였다 (막 14:48-49). 사랑은 폭력에 의해서 횡포를 당하지만, 폭력은 사랑에 의하여 용해된다.
도망. 제자들은 모두 도망하였다. 예수는 홀로 남아 고독한 상태에 있었다. 모든 사람을 위한 한 사람이 되셔야 했기 때문이다 (요 11:50; 고후 5:14). 예수는 한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을 대신해야 했던 것이다.
(4) 심문
예수께서는 헤롯과 빌라도에게 각각 심문을 받고 결국 바라바를 택한 백성에 의하여 버림을 당했다. 정치가는 본래 자신의 뜻보다 백성의 뜻에 좌우되는 경향을 지니고 있고, 인간은 원래 의인보다 강도를 좋아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예수는 인간의 본성에 의하여 심문을 당하고, 인간의 본성에 의하여 버림을 당한 것이다.
(5) 처형과 매장
예수는 십자가에서 다른 두 죄수와 함께 처형을 당하고 몇 시간만에 절명하여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예수는 죽음으로써 죽음과 싸우셨다. 예수의 죽음은 사망에 대한 대결이다. 예수께서는 죽음으로써 죽음을 철저하게 죽였다.
2) 부활
예수께서는 안식일 첫날에 부활하셨다. 이로써 기독교인은 안식일 준수대신에 주일을 성수하게 되었다. 예수의 부활은 무덤을 비게 만들었다. 여자들이 제자들보다 먼저 빈 무덤을 방문하였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부활의 몸을 가지고 폐쇄적인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평강을 전하시며 성령을 주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하늘에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시고 만유의 주로 다스리신다.
6. 초대교회의 예수에 대한 고백
초대교회는 이러한 예수사건의 도식과 함께 예수에 대한 분명한 고백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예수의 활동을 받아들일때 자연적으로 결과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고백적인 반응은 선포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고백을 가지고 다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게 된다. 기독론은 예수를 이해시키고 예수를 승인하게 하는 것을 지향한다. 기독론은 이러한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비록 예수께서 지상의 생애 중에 한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정확하게 기독론적인 칭호들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인자칭호), 그의 활동과 설교는 이미 기독론적인 칭호들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는 예수를 고백하고 선포하는데 적합한 기독론적인 칭호를 마련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주님, 그리스도, 다윗의 아들, 인자 등등).
제3강. 사도 바울
우리는 사도 바울에 관하여 두개의 자료로부터 알 수가 있다. 바울서신과 사도행전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바울의 글과 누가의 글은 서로 보완적이라는 점이다.
1. 바울의 신상
바울은 베냐민 지파의 일원으로서 (빌 3:5) 정통 유대인이었다 (고후 11:22).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고 - 바울의 유일한 약점은 예루살렘 또는 유대에서 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가말리엘에게서 수학하였다 (행 22:3). 바울은 엄격한 바리새인으로서 (빌 3:5) 유대교를 신봉하였다 (갈 1:14). 이것이 바로 바울이 기독교회를 극심하게 핍박하는 원인이 되었다 (갈 1:13; 빌 3:6; 딤전 1:13). 바울은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길을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나주셨다 (행 9장, 22장, 26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주신 이후에 그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유대교적 유산과 헬라주의적 유산을 모두 버렸다 (빌 3:7-8).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체험한 후에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갈 1:15).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 1:14). 바울은 다메섹 사건 이후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일군으로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고전 4:1), 그리스도를 위한 사신 (고후 5:20)이 되었다. 바울은 전도자와 사도와 교사가 되었다는 자기의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다 (딤후 1:11).
2. 바울의 여행
바울은 먼저 바나바의 인도로 안디옥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행 11:19-26). 바나바는 바울과 같은 훌륭한 인물이 오해로 말미암아 사장될 위험에서 구원해냈다. 바나바는 바울을 면밀히 관찰한 후에 바울의 예수체험과 신학내용과 전도방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여 환영하게 하였다 (행 9:27). 바나바가 없었더라면 바울도 없었을 것이다. 이후에 바울은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복음을 전도하기 위하여 여행을 하게 되었다 (행 13:1). 중요한 것은 바울의 선교가 목회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1) 세 번의 전도여행
바울의 일차 전도여행은 주로 소아시아를 대상으로 하였다 (행 13:1-14:28). 바울은 이차 전도여행에서 소아시아를 넘어 그리스 반도로 나아갔다 (행 15:36-18:22). 삼차 전도여행은 이미 전도한 교회들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행 18:23-21:16). 바울은 세 번에 걸친 자신의 전도여행을 총결산하기를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롬 15:19) 여행하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드디어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나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롬 15:23,28). 군선을 타고서라도!
2) 예루살렘
바울의 전도여행에서 나타나는 중요점 가운데 하나는 자주 예루살렘을 전도여행의 최종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여행을 마치면서 거의 언제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이차 전도여행 행 18:22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삼차 전도여행 행 21:17 "예루살렘에 이르니"). 이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사실 (갈 1:18; 2:1)과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계획 (롬 15:25; 고전 16:3; 고후 1:16)에 대하여 여러 차례 언급한다. 사실상 바울의 예루살렘 지향성은 그의 사역 아주 초기부터 나타난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위하여 부조금을 가지고 갔다 (행 11:27-30).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회의에도 참석을 하였다 (행 15장). 말하자면 바울은 예루살렘 모교회 및 원사도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예루살렘없이는 세계선교도 없고, 원사도가 없이는 이방교회도 없다. 바울은 이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독립하여 자기의 추종자들을 모으지 않았다. 여기에서 한가지 덧붙일 것은 바울의 사역과 원사도들의 사역에는 내용상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 선교에 주력하였고, 원사도들은 유대인 전도에 관심하였다 (갈 2:7-8).
3) 전도방식
바울은 전도여행중에 바울은 우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서 전도를 하였다. 구약성경을 가지고 쉽게 유대인들에게 접근하였다. 바울은 소아시아와 유럽에 많은 교회를 세웠다. 바울은 교회를 설립한 후에 직분자들을 세움으로써 교회를 조직화하였다 (참조. 빌 1:1). 이렇게 하여 교회는 외부적인 핍박을 당해도 쉽게 와해되지 않는 든든한 조칙체가 되었다. 바울의 전도전략은 대도시중심적 사역이었다. 우선 대도시에서 전도를 하여 교회를 설립하면 여기에서 동역자들을 다른 곳으로 파송하여 전도하게 하였다 (아래 동역자들을 보라).
3. 바울의 편지
1) 종류
바울은 많은 편지를 기술하였다. 바울은 편지의 사람이다. 바울의 편지는 눈물어린 편지이다 (고후 2:4). 그의 서신은 13편이 남아있다 (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 히브리서는 고래로부터 자주 바울의 서신으로 인정되지만, 실제로 히브리서에는 바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저작권이 아직도 논쟁 중에 있다. 물론 잃어버린 편지도 있다 (고린도전편지? 고전 5:9; 라오디게아서 골 4:16). 이것들이 사도 바울의 분실된 편지일 경우에 혹 언젠가 뒤늦게 이것들이 발견된다 할지라도 더 이상 다른 하나님의 계시를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바울의 13서신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로부터 다른 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충분하게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가 있다.
바울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의 이름을 빙자한 서신들이 있었다. 살후 2:2에 보면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라는 표현이 나온다. 바울이 살아있는 동안에도 그의 이름을 사칭하는 거짓 편지들이 나돌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약성경에 들어있는 바울의 편지들은 연대에 따라 이른 편지에서 늦은 편지 순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규모에 따라 큰 편지에서 작은 편지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2) 분류
바울의 서신들은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1) 발신자와 수신자의 성격에 따라
바울의 서신들은 발신자와 수신자의 성격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 발신자 쪽에서 볼 때 개인적인 발신과 공동적인 발신이 있다. 개인적 발신은 사도 바울이 혼자서 발신한 서신들이다. 여기에는 로마서, 갈라디아서, 엡베소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가 있다. 공동적 발신은 사도 바울이 다른이와 함께 발신한 서신들이다. 여기에는 고린도전서 (바울 + 소스데네), 고린도후서 (바울 + 디모데), 빌립보서 (바울 + 디모데), 골로새서 (바울 + 디모데), 데살로니가전서 (바울 + 실루아노 + 디모데), 데살로니가후서 (바울 + 실루아노 + 디모데), 빌레몬서 (바울 + 디모데)가 있다.
둘째로 수신자 쪽에서 볼 때 공신과 사신이 있다. 공신은 교회가 받은 서신이다. 이것들은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이다. 이 가운데서 특히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라는 넓은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가 받은 서신이다. 사신은 개인이 받은 서신이다. 이것들은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이다. 그러나 딤전, 딤후, 딛은 목회와 관련된 서신이기에 어느 정도 공신의 의미를 가진다.
(2) 발신자의 상황에 따라
옥중서신은 바울이 옥중에서 쓴 편지들이다 (엡, 빌, 골, 몬). 목회서신은 바울이 제자들에게 목회를 맡기면서 쓴 편지들이다 (딤전, 딤후, 딛). 여행서신은 바울이 여행을 하는 동안에 쓴 편지들이다 (롬, 고전, 고후, 갈, 살전, 살후). 바울은 전도여행 중에 한 체류지에서 편지를 쓰기도 하였고 (고린도전서는 에베소에서 기록 고전 16:8), 한 경유지에서 편지를 쓰기도 하였고 (고린도후서는 마게도니아에서 고후 2:13; 7:5), 옥중에서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옥중서신인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엡 6:20). 초기서신으로는 갈라디아서와 데살로니가전서를 들 수 있고, 후기서신으로는 디모데후서를 말할 수 있다.
3) 구조
바울의 편지는 대체로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교리를 말하고 후반부에서는 윤리를 말한다. 바울이 진술하는 교리는 하나님, 인간, 구원, 교회, 종말과 관련한다. 바울이 편지를 쓴 목적은 구원의 도리를 설명해주기 위하여 (로마서 롬 15:15), 교회가 제출한 여러가지 질문에 관하여 답변하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고전 7:1), 이단적인 교리를 막기 위하여 (갈라디아서), 교회의 조직을 세우기 위하여 (목회서신인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등등 여러 가지 면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4) 상황
우리는 바울의 편지들을 통하여 바울이 싸웠던 문제들을 엿볼 수가 있다. 바울에게는 두개의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안과 밖의 문제였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적으로 설명한다.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7:5하; 참조. 고후 11:23-27,28). 사도 바울은 "밖으로는"이라는 말로 교회 밖에서 침투하는 문제점을 가리키며, "안으로는"이라는 말로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지시한다. 실제로 그는 세상적인 고통과 교회적인 고통을 분리한다 (고후 11:28 참조). 사도 바울은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교회와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1) 밖의 상황
우선 사도 바울은 세상과의 관계에서 심각한 환난에 처해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중에 당하는 핍박이 있었다 (살전 2:1-2). 사도 바울은 이것을 "우리의 모든 환난" (1:4; 7:4)이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 (1:8)의 정도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말로 설명한다.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 (고후 1:8), "살 소망까지 끊어짐" (고후 1:8), "마음에 사형선고 (직역하면, 사망선고)를 받음" (고후 1:9), "큰 사망" (고후 1:10). 사도 바울이 당한 환난은 끝없는 것이었다. 그가 당한 환난의 내용을 열거하는 것을 읽노라면 문득 몸에 전율을 느끼게 된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고후 6:4이하).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이하). 사도 바울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으며 답답한 일을 만나고 있으며 핍박을 받고 있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있다 (고후 4:8-9 현재시제! 고후 7:5 참조). 그러나 사도 바울은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싸임당하지 않는다. 낙심하지 않는다. 곤경에 빠지지 않는다. 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환난을 기뻐한다 (고후 12:10). 왜 그런가? 사도 바울은 본서의 중간에서 그 이유를 밝힌다. 왜냐하면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하기" (고후 4:17) 때문이다.
(2) 안의 상황
또한 사도 바울은 교회와의 관계에서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었다.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고민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당한 수많은 환난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 11:28)고 고백하였다.
사도 바울은 물질적인 부족으로 고난을 당하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교회들 때문에 상심하고 있었다. 또한 마게도냐 교회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고후 8:3) 예루살렘과 유다의 교회들을 위하여 연보에 참여하였을 때, 이 일은 사도 바울에게 한 편으로 예루살렘과 유다의 교회들이 보충을 받는다는 점때문에는 기쁨이 되면서도, 한 편으로 마게도냐 교회들이 가난해진다는 점때문에는 근심이 되었을 것이다.
교회가 사도 바울을 괴롭힌 문제들은 다양했다. 첫째로 교회에는 불의를 행한 자가 있었다 (고후 7:12). 사도 바울은 이 사람 때문에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근심에 빠졌다 (고후 2:1-12; 7:5-16). 둘째로 교회는 사도 바울을 오해하고 있었다. 교회는 사도 바울에 대하여 손해감정과 박탈감정에 사로잡혀 있어서 (고후 7:2; 12:14) 마음이 굳게 닫혀 있었다 (고후 6:11-12; 7:2). 셋째로 교회에는 사도 바울에 대한 대적자들이 있었다. 대적자들은 진리를 어지럽히는 행위 (고후 2:17; 4:2)와 사도를 공격하는 행위 (고후 10-12장)를 하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교회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를 위하여 자신까지 허비할 것을 각오한다 (고후 12:15). 왜 그런가? 사도 바울은 그 까닭을 밝혔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 (고후 1:1)이기 때문이다.
4. 바울의 동역자와 대적자
1) 바울의 동역자
바울에게는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다. 바울을 일군으로 세운 동역자가 있었고 (바나바), 실제로 함께 전도여행을 하면서 파송을 받는 동역자들이 있었고 (실라와 디모데), 바울과 줄곳 동행하는 동역자들이 있었고 (누가), 지역교회에 머물면서 바울을 지원하는 동역자들이 있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롬 16:3-4), 지역교회가 파송하여 바울을 돕는 동역자 들이 있었다 (에바브로디도 빌 2:25-30; 에바브라 골 1:7). 바울의 동역자가운데는 뵈배와 같은 여자도 있었다. 뵈배는 바울의 "보호자"가 되었다 (롬 16:1-2). 뵈배는 무명의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서 유명한 로마교회에 추천을 받은 여자였다.
2) 바울의 대적자
사도 바울은 빌레몬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서신에서 대적자들을 언급한다. 사도 바울에게는 여러 종류의 대적자들이 있었다. 로마서에는 교회를 망치는 자들 (롬 16:17-20), 고린도전서에는 교회의 질서를 망가뜨리는 분리주의자들과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 (고전 15장), 고린도후서에는 바울을 비방하는 자들 (고후 10장), 갈라디아서에는 거짓 형제들 (갈 2:4)과 구원의 방도를 혼돈시키는 유대주의자들, 에베소서에는 불순종의 아들들 (엡 5:6), 빌립보서에는 십자가의 원수 (3:18-19), 골로새서에는 그리스도를 떠난 자들 (골 2:10), 데살로니가전서에는 평안주의자들 (살전 5:3), 데살로니후서에는 사칭자들 (살후 2:2), 디모데전서에는 다른 교훈을 전하는 자들 (딤전 6:20), 디모데후서에는 믿음에 파선한 사람들 (딤후 2:18), 디도서에는 이단자들 (딛 3:10)이 언급된다.
5. 바울의 신학: 하나님과 인간
1) 하나님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었다. 삼위일체도식은 성령, 그리스도, 하나님 순서로 나타나기도 하며 (고전 12:4-6), 그리스도, 하나님, 성령 순서로 보여지기도 하고 (고후 13:13),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순서로 표현되기도 한다 (엡 1:3-14).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고전 8:6; 엡 4:6). 하나님은 창조조이시다. 바울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자주 아버지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만물의 아버지이시다. 만물은 하나님에 의하여 섭리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롬 11:36).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사랑과 책망을 공유하신다. 하나님은 유일한 의지의 대상이시다. 그분은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죽음가운데서 구속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신성과 인성이 완벽하게 조화된다. 예수는 부요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롬 1:2). 그분에게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 있다 (골 2:3). 그러나 예수는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오셔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연약한 분이시다.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그의 가난하게 되심으로 사람을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다 (고후 8:9). 예수는 중보자이시다 (고전 8:6), 중보자로서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시는 구속주가 되셨다 (엡 2:14). 이것을 위하여 예수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피를 흘리는 화목제물이 되셨다 (롬 3:25). 승천하여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으신 예수는 만물의 주가 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엡 1:22-23).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롬 8:9). 따라서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아신다 (고전 2:10).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롬 8:9). 그래서 오직 성령으로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다 (고전 12:3). 성령은 생명과 자유의 영이시다 (롬 8:2; 고전 3:17). 성령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매인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 성령은 우리의 영혼에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 중보의 역활로써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키시는 분이다. 신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고전 12:13), 항상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며 (엡 5:18), 한 가지 이상의 은사를 가지고 (롬 12:3이하; 고전 12:7이하),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갈 5:22-23).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 (갈 5:25).
2) 인간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존재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또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관계하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연속성을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다. 이것은 바울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내용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론은 신론적 인간론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은 본래 범죄한 존재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나,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간은 하나님께 의미가 있게 되었다. 인간은 영과 육, 또는 속사람과 겉사람의 이분법으로 설명된다 (고후 4:16; 참조. 롬 7:22). 그런데 모든 인간은 영과 육에 있어서 전적으로 타락하였다 (롬 3:23). 인간의 타락은 아담의 범죄에 기인한다 (롬 5:12). 아담의 범죄가 모든 인간의 범죄의 기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범죄에 있어서 아담은 모든 인간을 대표한다. 아담에게서는 범죄의 행위가 범죄의 존재를 결정했고, 모든 사람에게서는 범죄의 존재가 범죄의 행위를 결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회복한다. 연속성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며, 인간은 다시 시작된다 (딛 3:5). 하나님은 사람을 새 피조물로 회복한다 (고후 5:17).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요청 앞에 서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요청을 신앙으로 받아들인다. 이와 같이 신앙가운데서 새 피조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세례이다. 세례는 인간이 아담적인 존재를 결별하고, 새로운 기원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을 표하는 행위이다 (롬 6:1ff.. 참조. 딛 3:5). 이렇게 하여 바울에게서 인간에 관한 또 다른 방식의 분류법이 성립된다. 바울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롬 6:6; 엡 4:22,24; 골 3:9). 이 같은 구분은 "이전"과 "그러나 지금"이라는 시간적 표현에 따른 종말론적인 존재의 변화에 기초한다 (엡 2:11-13; 골 1:21-22; 3:7-8). 이것은 구속사적으로 설정한 구분이다.
새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일 뿐 아니라 살려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처럼 고전 15:45; 성령처럼 고후 3:6). 바울에게 새로운 인간에 대한 이해는 존재적인 것에서 활동적인 것으로 전진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은 활동개념이다. 인간은 능력이다. 인간은 행동하는 인격이다. 인간은 능동적이다. 새 사람에 대한 이해가 "있는 인간"에서 "하는 인간"로 나아간다.
3) 구원
바울은 구원을 일차적으로 죄사함이라고 생각한다 (엡 1:7). 그러나 구원은 사죄의 단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구원은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이며 (칭의), 하나님의 거룩함에 도달하는 것이며 (성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영화) (롬 8:29-30).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영원에서의 행위와 시간에서의 활동을 구성하셨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구속은 확실하고 안전하다 (롬 8:39).
4) 교회
구속받은 신자들은 교회를 이룬다.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교회를 소개한다. 가정교회와 지역교회와 보편교회이다.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다양한 용어를 사용한다. 교회는 에클레시아이다. 이것은 신자들의 모임이라는 영적 의미와 지역에 위치한다는 사회적 의미를 가진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다양한 지체들이 연결된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전도하기와 가르치기를 중요한 기능으로 가진다. 또한 교회는 코이노니아이며 디아코니아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임무를 가진다. 그것은 예배와 봉사이다. 또한 교회는 성도를 향한 교제와 섬김을 이룬다. 이것은 인격과 물질의 사귐과 나눔으로 구성된다. 이때 성찬과 애찬은 중요한 기능을 한다. 교회는 사회를 향한 사명을 가진다. 또한 교회는 플레로마이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전달되어 교회를 충만하게 한다. 이 때문에 교회는 세상과 만물에 대하여 충만함을 전달하게 된다 (엡 1:22-23).
5) 종말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종말기대가운데 살았다. 첫째로 개인의 종말에 대한 기대이다. 바울은 삶을 죽음과 연관시켜 이해했다. 그는 살든지 죽든지 그의 인생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함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생각하였다 (빌 1:20-21). 그러므로 바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고백하였다 (롬 14:8).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날마다 죽는 것을 체험하였다 (고전 15:31). 사실상 이런 신앙은 부활에 대한 소망에서 나온 것이다 (고전 15장). 이 때문에 바울은 죽음을 바라보면서 살았다.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딤후 4:6). 그는 죽음 후에 주어질 면류관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살아있는 동안 선한 싸움을 최선을 다해서 싸웠던 것이다. 사도 바울의 다른 종말기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된다. 현세에는 불법과 불의가 지배하지만 결국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을 기대하였다 (살후 2:1-12). 예수의 재림은 놀라운 광경가운데 이루어질 것으로서 밤에 도적같이 갑자기, 잉태한 여인의 산통같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재림 날은 빛의 아들과 낮의 아들된 하나님의 성도들에게는 경성하고 근신하여 그 날을 예비하고 있으므로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다 (살전 4:13-5:11).
바울은 모든 환난에도 불구하고 전도를 굽히지 않은 위대한 전도자였으며,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위대한 신학자였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 (고후 13:8).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 2:17). 바울은 전도자였으며 신학자였다. 바울은 결코 이 둘 중에 하나 만을 선택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제4강. 히브리서와 사도 베드로 (공동서신 1)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유다서는 공동서신이라고 불린다. 공동서신이라는 표현은 여러 사람이 이 서신들을 함께 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서신이 모든 사람에게 보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서신은 땅에 흩어져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편지들이다. 말하자면 발신자의 공동성이 아니라 수신자의 공동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공동서신들에서 교회의 눈이 세계로 열리고 있다. 공동서신을 통하여 교회가 미래로 연결된다. 공동서신은 세계의 교회를 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 (약 1:1; 벧전 1:1).
히브리서
히브리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하였다는 의견과 그렇지 않다는 의견이 초대교회 이후로 계속 갈리고 있다. 바울서신들과 달리 발신자가 분명하게 사도 바울로 소개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후자의 견해를 무시할 수가 없다.
히브리서는 수신자들이 고난의 큰 싸움을 통과하고 나서 (히 10:32), 교회를 인도하던 지도자들이 죽은 후에 (히 13:7,24 참조), 때가 오래 지났지만 듣는 것이 둔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히 5:11이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하여 보낸 편지이다.
1. 히브리서의 구조
히브리서의 요점은 히 4:14-16에 나온다.
이것을 중심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구조를 분석할 수 있다 (14절: 하나님의 아들, 14-15절: 대제사장, 16절: 은혜의 보좌, 16절: 담대히 나아감.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1:1-4:16)
* 주제어: 하나님의 아들 (1:2 등등)
1) 아들의 본질 (1:1-4)
2) 천사보다 뛰어난 아들 (1:5-2:18)
3) 모세보다 뛰어난 아들 (3:1-4:13)
4) 결론 (4:14-16)
2. 대제사장 예수 (5:1-8:1)
* 대제사장 (2:17; 3:1; 4:14 - 5:1 - 8:1)
1) 예수의 대제사장되심 (5:1-10)
2) 초보신앙책망 (5:11-6:20) * 부록
3) 멜기세덱 - 예수 (7:1-28)
3. 성소 (하늘보좌)에 들어가신 예수 (8:1-10:18)
* 보좌 (성소) 4:16 - 8:2 - 10:19
1) 옛 시대 (8:1-9:10)
2) 새 시대 (9:11-28)
3) 더 나은 제물 (10:1-18) - 시 40:6-8 해석
4. 성소에 들어갈 담력 (10:19-13:17) - 신앙론!
* 담대히 나아감, 담대 (믿음) 4:16 - 10:19
5. 결론 (13:18-25)
2. 히브리서의 내용
1) 기독론
히브리서는 초대교회 설교의 전형이다. 히브리서에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 잘 나타나 있다. 세번 신앙고백 ("믿는 도리")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히 3:1; 4:14; 10:23). 신앙고백은 기독론적인 동의를 의미한다. 예수의 이름을 "더욱 아름다운 이름" ( )이라고 부른다 (히 1:4).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사보다도, 모세보다도, 대제사장보다도 크신 분임을 밝힌다. 특히 멜기세덱 대제사장론을 통하여 예수께서 구약시대의 대제사장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밝힌다. 물론 대제사장과 그리스도 사이에 유사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히 5:1-10). 신분과 관련하여 볼 때 대제사장이 되는 존귀는 사람이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되듯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신 영광도 스스로 취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다 (히 5:4-5). 그러나 대제사장과 그리스도 사이에는 대단히 큰 차이점이 있다. 첫째로 대제사장은 자기를 위하여 속죄해야 하지만 (히 5:3; 7:27; 9:7),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시므로 자신을 위하여 속죄하지 않는다 (히 4:15). 둘째로 대제사장은 죽음으로 인하여 바뀌고 (히 7:23) 제사의 시효가 제한되어있기 때문에 (히 9:25) 반복적인 제사를 드려야 하지만, 예수께서는 영원하시며 (히 6:20; 7:21,24) 자신을 단번에 영원히 드리셨기 때문에 (히 9:26. 참조. 히 10:10,12) 반복적인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셋째로 대제사장은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만 (히 5:4),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다 (히 5:6,10; 6:20). 멜기세덱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인물이다 (히 7:1-3), 아브라함보다도 높은 자이며 (히 7:4-10), 레위보다도 먼저 계신 분이다 (히 7:5,10). 넷째로 대제사장은 땅에 있는 성소에서 섬기지만, 그리스도는 하늘에 있는 성소에서 섬긴다 (히 8:1-2).
2) 성경관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계시라는 차원에서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주장한다 (히 1:1-2).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 부분을 가지고 있다. 천사로 하신 말씀 (히 2:2), 주로 하신 말씀 (히 2:3),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이다 (히 2:4).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다윗)의 글이지만 (히 4:7) 성령의 말씀이며 (히 3:7) 성경의 말씀이다 (히 3:15).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능력적인 것이다 (히 4:12-13). 히브리서에는 구약성경이 수없이 간접적으로 직접적으로 인용된다. 사실상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구약성경을 해설하는 것으로 맥을 이루고 있다. 첫째로 안식 (시 95:7-11; 히 3:7-11). 여기에는 "오늘"에 대한 해석 (히 3:12-14), "격노"에 대한 해석 (히 3:15-17),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에 대한 해석 (히 3:18-4:13)이 나온다. 둘째로 멜기세덱 (시 110:4; 히 5:6). 여기에는 맹세 (히 6:13-20), 멜기세덱 (히 7:1-10), 멜기세덱의 반차 (히 7:11-16),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 (히 7:17-25)이 해석된다. 셋째로 언약 (렘 31:31-34; 히 8:8-12). 여기에는 첫 언약 (히 8:13-9:10)과 새 언약 (히 9:11-22)이 설명된다. 넷째로 제물 (시 40:6-8; 히 10:5-7). 여기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심 (히 10:8)과 하나님의 뜻 (히 10:9-18)이 설명된다. 히 1-2장에 나오는 연속인용이 하나님의 아들을 설명하는 것에 이어서 히 3-4장은 영원한 안식에 관한 해석이며, 히 5-7장은 영원한 대제사장에 대한 해석이며, 히 8-9장은 새 언약에 관한 해석이며, 히 10-13장은 새 제물 (몸)에 관한 해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핵심적인 구약성구의 사용을 중심으로 히브리서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분해할 수 있다.
히 1-2장: 하나님의 아들
히 3-4장: 영원한 안식
히 5-7장: 영원한 대제사장
히 8-9장: 새 언약
히 10-13장: 새 제물 (몸)
3) 구속사
히브리서에서 구속사는 특히 실체와 그림자라는 도식으로 설명된다. 히브리서는 이 도식가운데 여러 가지 구속사적인 변화를 발견하였다. 첫째로 히브리서는 대제사장과 관련하여 그 기능이 매우 제한적임을 밝힌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히 8:5. 문자적으로는: "그들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과 그림자를 섬긴다". 참조. 히 9:23-24). 그 까닭은 대제사장이 "약점을 가진 사람들" (히 7:28)로서 땅에 속하여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섬기기 때문이다.
둘째로 히브리서는 성막을 불완전한 것으로 이해한다. 성막은 모세가 지시하심을 받아 (히 8:5) 사람이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히 8:2). 그러므로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이다" (히 9:9). 왜냐하면 성막이 있는 동안에는 아직 모든 신자가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령이 보여주신 사실이다 (히 9:8).
여기에서 또 하나의 구속사적인 구분이 성립된다. 그것은 첫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이다 (히 8:7-9:22). 대제사장과 성막을 통하여 확증되었던 첫 언약은 낡아지고 쇠하고 없어진다 (히 8:13). 첫 언약은 결코 무흠하지 않다 (히 8:7). 따라서 새 언약이 주어진다 (히 8:13). 새 언약은 "더 좋은 언약" (히 7:22; 8:6)이다. 새 언약의 내용은 예레미야서를 인용함으로써 잘 보여준다 (히 8:10-12).
따라서 마지막으로 위의 모든 것을 율법의 개념으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 (히 10:1).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고 (히 7:28), 율법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막을 지었고 (히 8:5), 율법은 첫 언약에 있던 사람들이 버렸다 (참조. 히 8:10). 이렇게 볼 때 율법은 연약하며 무익한 것이므로 아무것도 온전하게 할 수가 없다 (히 7:18-19). 율법은 반드시 변이하고 폐지된다 (히 7:12,18). 율법이란 것은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을 기다리는 것이다 (히 9:10).
4) 신앙론
히브리서는 믿음에 대한 강도있게 설명한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히 10:37; 합 2:4)는 전제하에 "우리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 10:39)는 고백과 함께 믿음에 관하여 정의를 내리면서 (히 11:1) 선진들의 신앙을 열거한다.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세상을 가치있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아벨은 죽어서 말하는 사람이다. 에녹은 하나님께 만족을 드린 자이다.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을 위하여 준비한 자이다. 아브라함은 나그네였다. 이삭은 장차 오는 일을 기다린 자이다. 야곱은 죽음 앞에서 경배한 자이다. 요셉은 미래를 바라본 자이다. 모세는 죄악의 영광보다 신앙의 고난을 선택한 자이다... 수많은 신앙인들이 명멸하였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에게 가치가 없었다 (히 11:38). 이런 신앙의 선진들은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다 (히 12:1).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할 믿음의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앙고백의 사도이시다 (히 3:1).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시작자이며 완성자이시다 (히 12:2).
사도 베드로
1. 베드로의 신상
베드로는 본래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베드로 (게바)라고 부르셨다. 이것은 작은 돌이라는 의미이다. 베드로의 가정에 관해서 아주 희미하게 알 수 있을 따름이다. 그의 아버지는 요나 또는 요한이라는 사람이었다. 예수께서 신앙을 고백하는 베드로를 가리켜 "바요나"라고 불렀는데 (마 16:17) 이것은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요나는 비둘기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부활 후에 베드로를 가리켜 "요한의 시몬아" (요 21:15,16,17)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가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은 위로라는 뜻이다. 베드로에게는 안드레라는 형제가 있었다 (마 4:18; 요 1:40). 이들은 우의가 좋은 형제였던 것 같다. 베드로는 결혼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장모가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이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마 8:14). 후에 베드로는 그의 부인을 전도사역에 동참시켰던 것 같다 (고전 9:5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어부로 살았다 (마 4:18; 눅 5:3이하). 예수께서는 어부의 일에 충실하는 사람을 제자로 부르셨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큰 일에도 충성하기 때문이다 (마 25:21,23).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직업을 영적인 의미로 변화시키셨다. 물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마 4:19)! 주님은 모든 직업에서 제자를 삼으시며 직업을 영적인 차원으로 변화시키신다.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가 되어 일생동안 복음사역에 투신하였다. 그는 두 개의 서신을 기록하였다 (베드로전서와 후서).
2. 사도 베드로의 서신
1) 베드로전서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벧전 4:16. 참조. 행 11:26; 26:28).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스도인들은 나그네이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나그네된 그리스도인들의 구속과 생활에 대하여 권면하고 증거한다 (벧전 5:12).
(1) 베드로전서의 구조
1. 도입 (1:1-2)
2. 나그네인 그리스도인의 구속과 생활 (1:3-5:11)
1) 나그네인 그리스도인의 구속 (1:3-2:10)
(1) 구속의 확립 (1:3-12)
(2) 구속의 수단 (1:13-25)
(3) 구속의 신분 (2:1-10)
2) 나그네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2:11-5:11)
(0) 서론 (2:11-12)
(1) 사회에 관한 권면 (2:13-25)
(2) 가정에 관한 권면 (3:1-7)
(3) 일반적인 삶에 관한 권면 (3:8-4:19)
(4) 교회에 관한 권면 (5:1-11)
3. 결론 (5:12-14)
(2) 베드로전서의 내용
A. 그리스도인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벧전 4:16). 그리스도인은 나그네이다. 그들은 흩어진 자들이며 (벧 1:1), 피택자들이다 (벧전 1:2). 나그네인 그리스도인은 구속받은 자이다 (벧전 1:3-2:10). 그에게는 삼위 하나님에 의하여 구속이 확립되어 있다 (벧전 1:3-12). 성부께서 거듭나게 하심과 성자께서 다시 오심과 성령께서 미리 증거하심으로 확립된 구속이다. 이 구속의 수단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하나님의 말씀이다 (벧전 1:13-25). 구속된 성도에게는 놀라운 신분이 주어진다 (벧전 2:1-10). 그는 갓난아기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벧전 2:2). 그는 산돌로서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 (벧전 2:5).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두움가운데서 부름받아 하나님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복음을 전하는데 힘써야 한다 (벧전 2:9-10). 그리스도인들은 나그네 시기를 두려움을 가지고 (벧전 1:17) 살아야 한다 (벧전 2:11-5:11). 그리스도인에게는 사회와 가정과 교회가 주어져 있는데 모든 영역에서 선하게 살아야 한다.
B. 선행
베드로전서는 거룩한 행실을 하나의 큰 주제로 삼고 있다.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5). 베드로전서가 거룩한 행실을 권면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이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그 이유이다 (벧전 1:17). 신자는 하나님처럼 거룩해야 한다 (벧전 1:15-16). 신자는 하나님과 동급적인 위치에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선행의 내용은 무엇인가 (벧전 3:11). 베드로전서는 윤리적인 권면을 준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함, 형제사랑, 불쌍히 여김, 겸손함, 보복하지 않음, 복을 빎,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침,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않음, 악에서 떠남, 화평을 구하고 좇음이 선행의 내용들이다.
선행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함을 침묵시키며 (벧전 2:15), 욕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벧전 3:16). 둘째로 아내의 선행은 남편에게 구원을 얻을 기회를 줄 수 있다 (벧전 3:1). 셋째로 선행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벧전 2:12). 그러나 선행을 해도 고난을 받을 수가 있다.
C. 고난
사도 베드로는 나그네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만나는 고난에 관하여 설명한다. 성도의 고난은 다양하다. 첫째로 시험 (peirasmo,j)으로서의 고난이 있다 (벧전 1:6-7; 4:12-19). 이것은 믿음의 연단을 위한 것으로 불시련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계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그 영혼을 조물주께 부탁할 것이다 (벧전 4:19). 이런 사람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다. 둘째로 애매한 고난 (pa,scein)이 있다 (벧전 2:19-20). 이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 셋째로 의를 위한 고난이 있다 (벧전 3:13-17). 선행으로 인한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본을 따르는 것이다. 이때 신자는 요동하지 말고 의에 관하여 대답할 것을 준비하여야 한다. 그러면 선행을 욕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한다. 넷째로 정욕을 제어하기 위한 고난이 있다 (벧전 4:1-2). 육체의 고난을 받으면 죄를 그친다. 이렇게 하여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게 된다. 다섯째로 마귀의 고난이 있다 (벧전 5:8-11).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다닌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형제들이 당하는 동일한 고난이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동안의 고난에 불과하다. 따라서 신자는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2) 베드로후서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의 둘째 편지로서 성도들에게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벧후 3:1-2).
(1) 베드로후서의 구조
1. 도입 (1:1-2)
2.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의 삶 (1:3-11)
3. 진리 회복 (1:12-21)
4. 거짓 선지자들에 관한 변론 (2:1-22)
5. 그리스도의 강림에 관한 변증 (3:1-13)
6. 결론 (3;14-18)
(2) 베드로후서의 내용
A. 그리스도인
베드로후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벧후 1:4).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라는 말을 한 단어씩 뜯어내서 살펴보면 "신의"라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을 의미하고, "성품"은 "본질"을 뜻하며, "참여하는 자"는 "교제하는 자" 또는 "함께 가진 자"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말을 풀어 쓰면 "하나님께서 소유하시는 본질을 공유하는 자"라는 엄청난 내용이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소유하시는 본질을 공유하는 자이다.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부르는 까닭이 무엇인가?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존귀한 자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같은 높은 신분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참조. 마 5:48; 벧전 1:15-16)첫째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을 나란히 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은혜인가! 둘째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을 동일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높은 기대치를 설정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이 존귀한 자임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같은 높은 신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럽게도 사도 베드로가 알려준 이러한 존귀함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존귀함을 스스로 망가뜨리고 있다.
B. 그리스도의 강림
그리스도의 재림은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다 (벧후 1:16). 그리스도의 재림이 더디기 때문에 재림약속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다 (벧후 3:4). 그러나 재림약속이 실현되는 것이 더딘 까닭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에 대하여 오래 참아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벧후 3:9). 하나님께서는 하루를 천년까지 기다리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은 반드시 갑자기 온다. 그 날에는 천지가 사라지고 영원한 나라인 (벧후 1:11) 신천신지가 올 것이다 (벧후 3:10-13).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종말을 생각하면서 (벧후 1:14), 세상의 종말을 바라보면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벧후 3:11).
C. 거짓 선지자들
베드로후서는 거짓 선지자들에 관하여 (벧후 2:1-22) 유다서와 비슷한 내용을 진술한다. 이미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 (2:1-3). 이들은 멸망의 이단을 끌어들이고 구속의 주님을 부인하면서 호색한 것을 따른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진리의 도를 방해하며 지은 말을 사용한다. 이 때문에 이들은 결국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할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의 심판은 확실하다 (벧후 2:4-11). 이들에 대한 심판은 범죄한 천사들에게서 (벧후 2:4),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서 (벧후 2:5), 롯 시대의 사람들에게서 (벧후 2:6-8) 이미 분명한 예를 찾을 수가 있다. 이들은 심판을 면할 수가 없다 (벧후 2:9-11).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벧후 2:12-22. 도입구문 "이 사람들은", "저희가"에 주의할 것. 12,15,17,20). 첫째로 이 사람들은 짐승과 같은 존재로서 불의와 방탕을 일삼는다 (벧후 2:12-14). 둘째로 저희는 발람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다 (벧후 2:15-16). 발람의 길을 따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른 길을 떠나는 것이다 (벧후 2:15). 바른 길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소유한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 (벧후 1:1)의 길이다. 발람의 길을 따르는 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그들이 삯을 위하여 활동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들의 표상이 되는 발람 자신도 "불의의 삯을 사랑하였다" (벧후 2:15).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침투하여 미혹하는 파괴자들의 최종적인 목적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셋째로 이 사람들에게는 허무와 흑암이 가득하다 (벧후 2:17-19). 넷째로 저희는 개가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더러운 구덩에 다시 눕는 것과 같다 (벧후 2:20-22).
D. 성경관
가장 중요한 진리는 성경의 예언이다 (벧후 1:19-21).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것을 "더 확실한 예언적 말씀"이라고 부른다 (벧후 1:19). 이것은 목격담과 큰 차이가 있다. 신자는 마땅히 예언의 말씀에 착념해야 한다. 베드로는 더 확실한 예언적 말씀의 성격을 하나의 비유로 설명한다. 그것은 "어두운 곳에서 비추는 등불과 같다". 예언은 어두운 심령을 밝게 만든다. 따라서 예언은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르듯이 마음 속에 분명한 것이 떠오를 때까지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두 가지를 더 말한다. 첫째로 성경 예언의 해석이다 (벧후 1:20). 베드로는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베드로는 성경의 예언이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의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베드로가 어떤 해석을 거절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성경의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의미일 수 있다. 성경은 사람의 뜻에 의하여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적인 해석은 허용될 수 없다. 오직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 둘째로 성경 예언의 출원이다 (벧후 1:21). 베드로는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이끌려진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활동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하였다"고 설명한다. 성경은 사람의 뜻에 의하여 성립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사람이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지도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성령이다. 성령은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하도록 지도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성경의 예언을 기록한 사람은 모두 성령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다. 성경기록자는 성령에게 종속한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은 사람들이 말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다.
제5강. 야고보와 유다 (공동서신 2)
야고보와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로 알려져 있다.
특히 유다는 자신이 야고보의 형제인 것을 밝힌다 (유 1).
야고보
1. 야고보서의 구조
1. 도입 (1:1)
2. 시험상황 (1:2-18)
3. 듣기와 말하기 (1:19-27)
4. 부자와 빈자의 문제 (2:1-26)
5. 혀에 대한 경고 (3:1-12)
6. 다툼과 화평 (3:13-4:12)
7. 계획과 부자들 (4:13-5:6)
8. 종말론적인 인내 (5:7-11)
9. 교회에 주는 여러 가지 권면 (5:12-20)
2. 야고보서의 내용
1) 다른 성경과의 관계
(1) 복음서와의 관계
야고보서는 복음서와 비슷한 내용을 많이 가지고 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 (약 1:5/마 7:7 par.), 들음과 행함에 관한 말씀 (약 1:22f./마 7:24,26 par.), 레 19:18을 인용하는 이웃사랑에 관한 말씀 (약 2:8/마 22:39 par.), 판단에 관한 말씀 (약 4:12/마 7:1), 맹세에 관한 말씀 (약 5:12/마 5:33-37) 등이다. 이것은 야고보서와 복음서가 상호 의존했거나, 공통적인 자료를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지 중요한 것은 예수의 말씀이 폭넓게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 외에도 예수의 말씀전승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2) 베드로전서와의 관계
또한 야고보서는 베드로전서와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마귀대적에 관한 말씀이 일치하며 (약 4:6=10은 벧전 5:5-9), 잠 10:12를 인용하는 것이 동일하다 (약 5:20/벧전 4:8 "허다한 죄를 덮는다"). 이것은 야고보서와 베드로전서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3) 구약성경과의 관계
더 나아가서 야고보서는 구약성경가운데 지혜문서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잠언 (암시. 약 1:5/잠 2:3-6 지혜구함, 약 1:19/잠 15:1 말과 성냄, 약 2:6/잠 14:21 가난한 자 업신여김, 약 3:6/잠 16:27 혀는 불, 약 4:14/잠 27:1 내일 일; 인용. 약 4:6/잠 3:34 "하나님은 교만한 자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주신다", 약 5:20/잠 10:12 "허다한 죄를 덮는다"), 욥기 (약 1:11/욥 14:2/사 40:7 풀의 꽃 사라짐)를 사용한다. 그 외에도 창세기 (약 2:23/창 15:6 아브라함의 믿음), 출애굽기 (약 2:11/출 20:13; 신 5:17 살인, 간음), 레위기 (약 2:8/레 19:18 이웃사랑)가 사용되며, 예레미아서가 사용된다 (약 5:5/렘 12:3 도살의 날).
(4) 구약인물제시
특이한 것은 야고보서가 중요한 신학을 제시하기 위하여 구약의 인물들을 언급한다는 점이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믿음과 행위의 일치를 보이기 위하여 제시되었다 (약 2:21/창 22:1ff.). 때때로 아브라함에 대한 야고보의 설명은 바울의 설명과 상반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야고보는 바울과 다른 면에서 아브라함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다 (약 2:23). 단지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칭의를 위하여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약 2:21). 아브라함의 칭의에 있어서 행위와 믿음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약 2:22). 아브라함의 칭의를 위하여 믿음과 행위가 나란히 작용하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신앙은 행위하는 신앙이요, 아브라함의 행위는 신앙하는 행위이다.
둘째로 라합도 믿음과 행위의 일치를 보이기 위하여 제시되었다 (약 2:25/수 2:1ff.). 야고보서는 라합의 행위를 강조한다.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대접하여 다른 길로 나아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5). 야고보서는 히브리서와 비슷하게 라합를 묘사한다. 라합은 몸을 파는 여인이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사자들을 대접하였다. 여기에서 야고보서는 히브리서에 비하여 한 가지 사실을 덧붙힌다. 이스라엘의 사자들을 다른 길로 도피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같은 행위로 말미암아 라합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라합은 행위의 여인이다. 라합이 비록 이스라엘의 적군에 속하는 여성이며 몸을 파는 악한 일을 하는 여성이었다 할지라도 행함으로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극복하였다. 이렇게 하여 라합은 아브라함에게 비견되는 행위의 인물로 인정되었다. 야고보는 행위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남자가운데서는 아브라함을 일례로 삼고, 여자가운데서는 라합을 일례로 삼았다. 이처럼 라합은 위대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
셋째로 인내의 모범적인 인물로 욥을 제시한다 (약 5:11). 욥의 이름은 신약성경에서 오직 야고보서에 한 번 거론된다. 야고보는 욥기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야고보서의 구조와 욥기의 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2). 그리고 야고보서는 이렇게 마쳐진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약 5:20). 야고보서의 시작은 시험에 관한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야고보서의 종결은 구원에 관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언뜻 욥기의 처음과 끝을 우리에게 연상시키지 않는가. 욥기는 여러 가지 시험에 관한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욥 1-2장), 여러 친구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에 도착한다 (욥 42장). 야고보서는 욥기로부터 시작과 종결을 위한 구조를 따왔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야고보서가 구약의 지혜서들에 비견되는 신약의 지혜서라고 알려져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러한 구조관찰은 설득력이 있다. 또한 야고보서에는 욥기의 내용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두 책은 다같이 인생의 허무함을 풀의 꽃과 같은 것으로 묘사한다 (약 1:10f./ 욥 14:2). 욕심의 잉태는 죄를 낳는다고 말한다 (약 1:15/욥 15:35).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기억하신다고 설명한다 (약 2:5/욥 34:19). 긍휼의 위대성을 강조한다 (약 2:13/욥 22:6-11). 헐벗고 굶주린 형제자매에게 관심을 가질 것을 언급한다 (약 2:15/욥 31:19-20). 언어의 통제를 요구한다 (약 1장, 3장/욥기 전체).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받으신다고 말한다 (약 4:6/욥 22:29). 생명의 허무함을 선언한다 (약 4:14/욥 7:7). 재물과 인생은 썪고 좀먹는 것임을 밝힌다 (약 5:2/욥 13:28). 욥의 인내를 성도의 인내를 위한 모범으로 소개한다 (약 5:11/욥기 전체).
마지막으로 야고보서와 욥기는 다같이 의인의 간구가 지니고 있는 효력을 제시한다 (약 5:16/욥 42:8). 이렇게 볼 때 야고보서는 구조에 있어서 뿐 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욥기에 상당히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야고보서에서 욥의 의미는 특징적이다. 야고보서는 성도들에게 인내를 가르치는 단락에서 욥을 언급한다 (약 5:7-11). 야고보서가 말하는 인내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인내의 기간으로 말하자면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이다 (약 5:7). 또한 인내의 동력은 주님께서 강림하실 것이 임박했다는 사실에 있다 (약 5:8,9).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인내의 결과이다. 인내는 최후의 심판을 면하게 한다 (약 5:9). 그런데 야고보서는 종말론적인 인내를 설명하면서 이것을 위한 세 가지 예를 제시한다. 첫째로 농부의 인내이다 (약 5:7). 둘째로 선지자들의 인내이다 (약 5:10). 셋째로 욥의 인내이다 (약 5:11). 이렇게 볼때 야고보서는 욥의 인내를 농부의 인내와 선지자들의 인내에 견주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넷째로 기도를 위하여 엘리야를 제시한다 (약 5:17). 엘리야는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인물이다. 야고보서는 이것을 단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해준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 (약 5:17). 이것은 엘리야가 죽기를 구할 정도로 낙심하고, 이세벨의 칼을 피하여 도망하고, 하나님께 송사하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엘리야의 성정이라고 해서 우리의 것과 다른 점은 없다. 그런데 우리와 성정이 같은 엘리야는 기도함으로써 놀라운 일을 행하였다.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니 비가 오지 않고, 비가 오기를 기도하니 비가 왔다. 엘리야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엘리야는 기도하는 사람의 모범이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기도할 것을 요구하는 강력한 도전이 된다.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면, 우리도 엘리야처럼 기도할 수가 있다. 기도에 있어서 엘리처럼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2) 야고보서의 신학 (1) 하나님
가장 먼저 야고보서는 하나님을 창조자로 소개한다. 하나님은 불변적이며 무형적인 분이다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 약 1:17). 하지만 하나님은 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약 1:18).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압권은 인간이다. "그가 그의 조물 중에 우리를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 약 1:18).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약 3:9). 또한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주 아버지" (약 3:9)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약 1:5)이시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자" (약 5:11)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 (약 1:17)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위로부터 주시는 분이시다 (약 1:17).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주신다 (약 4:6). 가까이 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 (약 4:8).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를 높이신다 (약 4:10).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시어 믿음에 부요케 하시고 약속하신 나라를 주시는 분이시다 (약 2:5). 나아가서 하나님은 구원자이시다. 하나님은 진정한 입법자와 재판자이시다 (약 4:12).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의를 들으시는 만군의 주이시다 (약 5:4).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 (약 1:20)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신다 (약 4:12).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시험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받지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약 1:13). 여기에서 말하는 시험은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는 시험이다 (약 1:14). 욕심은 죄악을 낳고 죄악은 사망을 낳는다 (약 1:15). 시험은 이 사슬에 관련된 시험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험을 베풀지 아니하신다.
(2) 예수 그리스도
특이하게도 야고보서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칭이 직접적으로 단 두 번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약 1:1; 2:1). 이것을 근거로 야고보서의 기독론 몇 가지를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선상에 놓여있다 (약 1:1). 야고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 (큐리오스)라고 부른다 (약 1:1; 2:1). 야고보서에서 "주"는 모두 13번 나오는데 (1:1,7; 2:1; 3:9; 4:10,15; 5:4,7,8,10,11,14,15) 대체적으로 하나님을 가리키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것은 야고보서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일선상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3) 교회
야고보서는 교회를 회당으로 묘사한다 (약 2:2ff.). 이것은 아직 유대교적 공동체와 기독교적 공동체가 완전히 구별되지 않은 초기단계의 교회상을 보여준다. 야고보서의 교회는 장로가 있는 조직된 교회이다 (약 5:14). 이 교회에서 기도와 찬송은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약 3:9; 5:13). 야고보서의 교회는 빈자와 부자로 구성되어있는데 상당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행하게도 야고보서의 교회에는 벌써 배도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약 5:19-20). 이런 현상가운데서 야고보서의 교회는 말세 (약 5:1), 재림 (약 5:7), 심판 (약 5:9)와 같은 종말론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4) 윤리
야고보서는 "가난과 부"의 신학을 가지고 있다. 야고보서의 교회에는 낮은 형제들과 부한 형제들이 있었다 (약 1:9-11). 야고보는 낮은 형제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높아진 것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비천을 발견하여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권면한다. 부요함은 풀의 꽃과 같다. 이렇게 권면하는 까닭은 집회시에 가난한 자들이 멸시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약 2:1-13).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첫째로 신앙적 근거 때문이다 (약 2:1):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외모를 취하지 않는다. 둘째로 신학적 근거 때문이다 (약 2:5).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선택하셨다. 셋째로 사회적 근거 때문이다 (약 2:6-7). 부자는 폭행을 일삼는다. 넷째로 성경적 근거 때문이다 (약 2:8). 율법은 이웃사랑을 요구한다. 이에 더하여 야고보서는 부자들에게 경고를 준다 (약 5:1-6). 부자들은 재물의 부패 가능성을 인식할 것이며 (약 5:2-3), 급료를 체불하지 말 것이며 (약 5:4), 사치와 연락에 빠지지 말 것이며 (약 5:5), 의인을 정죄하지 말 것이다 (약 5:6).
(5) 믿음과 행위
바로 이같은 맥락에서 야고보서는 믿음과 행위의 조화 문제를 다룬다 (약 2:14-17). 때때로 야고보의 신학은 바울의 신학과 마찰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약 2:21,24,25)고 말하는 반면에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롬 3:28; 갈 2:16; 빌 3:9)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신학을 야고보서의 교회상황에서 이해하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야고보서의 교회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있었다 (약 2:6). 헐벗고 굶주린 형제자매를 말로만 위로하였다 (약 2:15-16). 따라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약 2:17)이라고 말한다. 물론 야고보는 믿음에 대한 긍정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믿음의 간구 약 1:16;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약 2:1;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약 2:19).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의 문
제를 아브라함을 예증으로 잘 설명해준다 (약 2:21-24). 야고보서는 아브라함과 관련하여 두 가지 사건을 제시한다. 첫째는 창 22:1이하의 이삭제사이다 (약 2:21-22). 여기에서 야고보는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말하면서도 (약 2:21) 믿음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과 행위의 상호기능을 정확하게 밝힌다. 믿음은 행함과 협동하며 (약 2:22상), 행함은 믿음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약 2:22하).
--협동-->
믿음○ ○행위
<--완성--
둘째는 창 15:1이하의 상속자약속이다 (약 2:23-25). 여기에서 야고보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말하면서도 (약 2:23) 행위를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과 행위의 조합관계를 정확하게 밝힌다. 믿음과 행위 의롭다하심의 두 근거라는 것이다 (약 2:24). "믿음 뿐 아니라". 말하자면 믿음과 행위는 칭의를 위한 두 겹의 근거이다. 마치 노랑색과 파랑색의 셀로판지를 겹치면 초록색이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야고보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영혼없는 몸은 죽은 것이듯이,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약 2:26). 영과 몸을 분리할 수 없듯이 행함과 믿음을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유다
1. 유다서의 구조
1. 도입 (1-2)
2. 주제 (3-4)
1) 본래목적 (3상): 일반적인 구원에 관하여 쓰려 함
2) 현재목적 (3하): 단번에 주어진 믿음을 위한 싸움 권면
3) 변경이유 (4): 어떤 사람들이 가만히 들어옴
3. 본론 (5-23)
1) 생각나게 함 (5-16)
(1) 실례 (5-7): 주께서 하신 일
(2) 사실 (8-16): "이와 같이", 네 번 "이들은" (8,10,14,16)
2) 기억나게 함 (17-19)
(1) 실례 (17-18):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말
(2) 사실 (19):
3) 권면 (20-23)
(1) 자신을 위하여 (20-21)
(2) 타인을 위하여 (22-23)
4. 결론 (24-25)
2. 유다서의 내용 유다서는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울 것을 강조하면서 (유 3), 구약을 다시 생각나게 하고 (유 5), 사도들을 기억하게 한다 (유 17).
1) 유다서의 교회
유다서의 교회는 "사랑을 얻은 자들이다" (유 1). 이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사랑이다. 또한 유다서의 교회는 "지키심을 입은 자들" (유 1)이다. 셋째로 유다서의 교회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 (유 1)이다. 이 모든 것은 수동태 완료형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한 편으로 사랑과 보호와 소명이 모두 인간에게 있어서 능동을 배제하는 수동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유 24). 다른 한 편으로 이것은 사랑과 보호와 소명이 불변적인 사항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 24).
유다서의 교회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너희가 범사를 알았으나" (유 5). 이것은 수신자가 잡다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특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식은 구약성경에 관한 지식이다. 이 사실은 유다가 바로 이어서 구약성경의 출애굽사건 등을 기억시키는 것으로부터 쉽게 알 수 있다.
유다서의 교회에게는 "애찬" (유 12)이 있었다. 이것은 함께 먹는 (유 12) 공동체 식사를 의미한다. 수신자들은 애찬을 통하여 상호간에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 이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 (유 4). 또한 권위에 순종하며 영광을 찬송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 (유 8). 그리고 약한 성도들을 공궤하였을 것이다 (유 12). 이때 감사의 말을 하며 칭찬하는 말을 했을 것이다 (유 16). 마지막으로 서로 연합하고 성령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유 19).
2) 유다서의 대적자들
그러나 유다서의 교회에는 대적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정체에 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대적자들에 대한 서론적인 설명이 4절에 나온다. 첫째로 이들은 교회 밖에서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다 (유 4). 둘째로 이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 (유 4)이다. 셋째로 이들은 불경자들이다 (유 4). 넷째로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자들이다 (유 4). 다섯째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유 4). 대적자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론에서 전반적으로 다루어진다. 유 8,10,12,16,19에 반복되는 "이들은" ( )이라는 표현에 주의해야 한다. 이들은 지금 교회의 일부이다 (유 4,12,19,22,23). 이들은 심지어 애찬에 참여한다 (유 12). 이들은 꿈꾸는 자들이다 (유 8-9). 이것은 아마도 환상가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출애굽 백성의 불신 (유 5), 처소들 떠난 천사들의 배신 (유 6), 소돔과 고모라의 간음 (유 7)을 꿈꾼다. 이들은 여러가지 별칭을 가진다 (유 12-13): 암초, 목자, 구름, 나무, 물결, 별들.
대적자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첫째로 신학적인 문제이다. 대적자들은 "경건치 아니한" (4) 자들이다. 불경은 윤리적인 차원보다는 신학적인 차원을 가리킨다. 무엇보다도 대적자들에게는 신론적인 문제가 있다. 대적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으로 바꾼다 (유 4). "하나님의 은혜"는 이신칭의를 의미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멸시한다. 이들은 영광을 훼방한다 (유 8).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한다 (유 24-25). 나아가서 대적자들에게는 기독론적인 문제가 있다. 대적자들은 유일한 주재요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 (유 4). 이들은 예수께서 주재이신 것과 주님이시라는 권위를 멸시한다 (유 8). 이 뿐 아니라 대적자들은 성령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육에 속한 자들로서 성령을 가지지 않은 자들이다 (유 19). 이들은 육체를 더럽힌다 (유 8). 둘째로 교회론적인 문제이다. 대적자들에게서 분당주의가 엿보인다. 그들은 애찬에서 악한 행위를 하였고 (유 12), 자기의 것들만을 목양하면서 (유 12), 당을 짓는다 (유 19). 마지막으로 대적자들에게는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 대적자들은 이성없는 짐승과 같이 본능으로 안다 (유 10). 이들은 육체를 더럽힌다 (유 8).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간음하며 다른 육체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유 7). 그들은 육체적인 타락과 쾌락에 종사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원망하는 자들이며 (유 16), 불만을 토하는 자들이며 (유 16),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이며 (유 16,18),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는 자들이며 (유 16), 기롱하는 자들이다 (유 18). 그들은 가인의 길, 발람의 삯, 고라의 패역을 따르면서 (유 11), 이익을 위하여 아첨한다 (유 16).
대적자들의 결국은 분명하다. 이들은 옛적에 이 심판을 위하여 미리 기록된 자들이다 (유 4,13).
3) 유다서의 신학
이런 상황에서 유다서는 바른 신학을 제시함으로써 교회를 보존하려고 한다. 첫째로 유다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말한다 (유 25). 이 하나님은 능력자이시다. 하나님은 거침없이 보호하실 능력과 흠없이 서게 하실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 25). 이 하나님은 "우리의 구주" (유 25)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아버지" (유 1)이시다. 그러므로 유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유 1,21)과 은혜 (유 4)와 영광 (유 25)을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 (유 1,21)은 성도들이 자신을 지켜야할 규범이다 (유 21). 하나님의 은혜 (유 4)는 단회적인 구원의 믿음을 주시는 근원이다 (유 3). 하나님의 영광은 성도들이 바라보아야 할 궁극적인 목표이다 (유 25). 둘째로 유다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 차례 "주" (4,17,21,25)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성도의 통치자와 주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를 비롯하여 모든 사도들의 주인이시기도 하다 (유 1,17).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이신 주재" (유 4)이시다. 바로 이 유일성은 하나님과 동일한 것이다 (유 25).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됨이 드러난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유 25). "주"이며 "주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긍휼을 베푸신다 (유 25).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얻는다 (유 1). 셋째로 유다서는 성도와 대적자의 차이점이 성령소유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대적자는 성령을 가지지 않은 자들이지만 (유 19), 성도는 성령을 가진 자들이다. 성도들이 성령을 가진 자라는 사실은 "성령으로 기도" (유 20)한다는 점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성령을 가진 자는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도가 성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가장 분명한 표식이다.
성도는 이와 같이 단번에 주신 거룩한 믿음 (유 3) 위에 자기를 건축해야 한다 (20). 성도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보편적인 구원 (유 3), 곧 영생을 가지고 있다 (유 21). 땅에 흩어진 모든 성도는 믿음과 행위의 조화 속에서 (유 3,20,22-23) 이미 주어진 현재적인 구원을 기초로 하여 미래적인 구원으로 계속해서 자라가야 한다 (유 21).
제6강. 사도 요한
사도 요한은 다섯 권의 책을 기록하였다.
그것들은 요한복음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요한계시록이다.
1. 요한복음
1)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비교
요한복음은 특이한 복음서이다. 초대교회는 요한복음을 독수리에 비교했다. 공관복음을 모두 땅에 거주하는 사자 (마태)와 사람 (마가)과 황소 (누가)로 비교하는 반면에 요한복음을 유독히 하늘날며 비상하는 독수리에 비교한 까닭은 그만큼 요한복음이 초월적이며, 특이한 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공관복음도 막상 서로 자세히 비교해 보면 많은 차이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공관복음과 비교해 보면 실제로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른 면들이 있다.
언어적인 면에서 볼 때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비하여 아주 쉬운 그리스어로 되어 있다. 요한복음의 그리스어는 대체적으로 단문으로 되어 있고, 거의 기본적인 쉬운 단어들을 사용한다. 시제도 대단히 쉽다. 하지만 내용적인 면에서 보면 요한복음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는 자주 신학적인 사상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차이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단락의 길이이다. 공관복음은 한 가지 주제를 짧게 다루는 반면에, 요한복음은 한 가지 주제를 길게 다룬다. 공관복음은 수난과 부활을 다루는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는 예수의 개별적인 활동과 개별적인 말씀을 다소 헐겁게 연결하는 결합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에 비하여 요한복음은 한 사건을 깊이 다룸으로써 주제적으로 통일을 이루어 마치 단막극처럼 구성된 체계를 가진다. 공관복음의 기록은 단편적이지만, 요한복음의 기록은 포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공관복음이 작은 점으로 꾸민 그림과 같다면, 요한복음은 큰 면으로 처리한 그림과 같다. 공관복음은 여러가지 사건들을 짧게 보고하는 일간지로 비유할 수 있고, 요한복음은 한 사건을 길게 진술하는 월간지로 비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이 한 사건을 길게 진술한다고 해서 쓸데없는 말을 만연체로 늘어놓은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해이다. 오히려 요한복음은 각 진술마다 압축된 사상을 담고 있다. 마치 압축화일처럼. 만일에 우리가 이것을 모두 풀어낼 수 있다면 엄청난 양의 내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 요한복음의 문학적인 특징
요한복음의 문학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일곱 개의 표적들이 나온다. 공관복음서에 는 대략 29개의 이적들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요한복음은 단지 세 가지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신하의 아들 치료 요 4:46-54; 오병이어 요 6:1-13; 바다 위를 걸으심 요 6:16-21). 이에 비하여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없는 다섯 가지의 이적들을 보고한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적 요 2:1-11; 베데스다 연못의 치료 요 5:1-9; 소경의 치료 요 9:1-7; 나사로의 살리심 요 11:1-44; 이적적인 어획 요 21:1-14). 둘째로 일곱 개의 담화들이 나온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3:1-21),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 (4:7-26), 38년된 병자를 치료한 후 유대인들과의 대화 (5:19-47), 오병이어 표적 후 유대인들과의 대화 (6:25-65), 초막절 논쟁 (7:1-38), 목자설교 (10:1-18), 고별설교 (14-16장). 공관복음에 나오는 비유는 요한복음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선한 목자 (요 10:1-18)와 포도나무 (요 15:1-6)라는 테마는 공관복음에서도 등장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완전히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셋째로 일곱 개의 "나는... 이다" 말씀이 나온다. 생명의 떡 (6:35), 세상의 빛 (8:12), 양의 문 (10:7,9), 선한 목자 (10:11), 부활/생명 (11:25), 포도나무 (15:1), 길/진리/생명 (14:6).
3) 요한복음의 구조
요한복음은 세 번에 걸친 유월절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도입부 (1:1-2:12)
첫번째 유월절 (2:13-5:47)
두번째 유월절 (6:1-11:54)
세번째 유월절 (11:55-19:42)
예수의 부활 (20:1-21:23)
결론 (21:24-25)
4) 요한복음의 신학
요한복음은 이중적인 결론을 가지고 있는데 둘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록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요 20:30-31; 요 21:25). 따라서 요한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두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설명한다. 첫째로 예수는 하나님을 지향한다. 하나님과 함께 선재하시는 로고스이시다 (요 1:1-2). 하지만 예수께서는 자기의 원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원대로 행한다 (요 5:30). 둘째로 예수는 사람을 만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세례자 요한 1장, 가나 혼인 잔치 2장, 니고데모와의 만남 3장, 수가성 여인과의 만남 4장, 38년 된 병자 5장, 오천명의 무리 6장, 초막절 7장, 간음한 여인 8장, 소경 9장 등등). 예수는 사람들의 빛이다 (요 1:4). 그래서 예수는 사랑을 베푸는 분이시며 사랑을 요구하는 분이시다 (요 13장). 예수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한다 (요 21:15-17). 사람들은 바로 이 예수를 신앙해야 한다 (요 20:30-31). 특히 요한복음의 기독론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 로고스 (말씀) (요 1:1-18)
사도 요한은 예수를 로고스라는 특이한 용어로 설명한다. 사도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격을 설명한다. 그 성격 중에 가장 먼저 설명되는 것은 그분의 존재이다 (요 1:1-2). 그분이 "계신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처음 두절(1절과 2절)에서 "말씀이 계신다"을 네 번 사용한다. 말씀이 어떻게 계시는가? 시간적으로 볼 때 그분은 태초에 계셨고 (시간적 존재방식), 공간적으로 볼 때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공간적 존재방식), 성품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셨다 (인격적 존재방식). 그러나 사도 요한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존재 (계심)하실 뿐 만 아니라 활동하는 분임을 설명한다 (요 1:3-5).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활동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만물이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3). 또한 만물이 타락한 후에 로고스는 그것을 회복하는 일을 하셨다 (4-5). 이 회복을 위하여 로고스는 성육신하셨다 (요 1:14-18). 로고스는 세상에 오셨다. 성육신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먼저 육신이 되었고, 사람들가운데 거하셨다.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충만하게 넘친다 (16-17). 그리스도의 충만은 하나님을 나타내주는 것에서 절정에 달한다 (18).
(2) 하나님
로고스와 연관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진술한다. 로고스는 하나님과 동일하다. 로고스의 신분은 분명하게 하나님으로 진술된다 (요 1:1). 로고스가 태초에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점에서 로고스가 하나님이라는 신분은 자연히 결론된다. 로고스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라는 한 단어로 두 인격이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자는 로고스 밖에는 없다 (요 1:18). 이것은 아주 고차원적인 기독론이다. 로고스가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의미에 있어서 로고스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 1:14). 이 때문에 로고스는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누렸던 그 영광을 말할 수 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당신과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당신과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 (요 17:5).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하기에 (10:30,38), 그 일에 있어서도 동일한 기능이 강조된다. "나의 아버지가 지금까지 일하시고 나도 일한다" (요 5:17). 예수와 하나님의 동일성으로부터 예수는 분명하게 하나님으로 고백된다. "도마가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 요일 5:20).
그러나 로고스는 하나님과 구별된다. 하나님이신 로고스가 하나님과 구별된 인격이라는 것은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정리된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요 1:18).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버지"로 묘사되고, 로고스는 "독생하신 자"로 묘사된다. 인격은 둘이며, 성격은 아버지와 나신 자 (아들)이다. 하나님과 로고스 사이에 구별은 있으나 분리는 없다. 이 때문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요 10:30)라는 명제적인 선언이 가능하다.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아버지 안에 있다 (요 10:38; 17:21).
(3) 인자
요한복음에는 인자라는 표현이 13번 나온다 (요 1:51 3:13; 3:14; 5:27; 6:27,53,62; 8:28; 9:35; 12:23,34 (2번); 13:31). 이 명칭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중재성: 요한복음에서 인자의 특징은 인자가 하나님과 사람의 중심점을 차지한다는 데 있다.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요 1:51).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밀접하게 연결된 예수의 참 모습에 관한 주요한 그리스도론적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둘째로 선재성: 요한복음에서 인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 묘사된다 (요 3:13). 인자는 땅에 존재하기 전에 하늘에 존재하던 분이다. 이것은 단순히 인자의 존재에 관한 공간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선재적인 시간과 공간이 연결되어 표현된다.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 (요 6:62).
셋째로 비하성: 인자는 본래 선재하시던 분이지만 세상에 오신다. 그래서 인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이다 (요 3:13). 인자는 분명하게 혈육을 가진다.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 (요 6:53). 인자는 땅에 계시는 동안에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는 분이다 (요 6:27). 이것은 아버지의 확인가운데 이루어진다 (요 6:27 "아버지께서 이 사람을 인치셨다").
넷째로 수난성: 인자의 비하는 그의 죽음에서 잘 나타난다. 인자는 들리게 될 것이다 (요 8:28; 12:34). "들리다"는 영광을 나타내는 말보다는 죽음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요 12:33 참조. 땅에서 들림은 죽음의 방식을 의미함).
다섯째로 승귀성: 비하하여 수난당하는 인자는 결국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간다" (요 6:62). 이것을 가리켜 인자의 영광이라고 부른다 (요 12:23; 13:31).
요한복음에서 인자는 세상에 와서 수난당하고 승귀하시는 분으로 설명된다. 특이하게도 요한복음에서는 공관복음에서와는 달리 인자가 미래의 영광중에 오실 분으로 강조되지 않는다. 물론 인자의 심판권세대하여는 언급된다 (요 5:27). 전능한 성격 (하늘과 관련)과 구속적 성격 (십자가 죽음)가 드러난다 (3:13,14)
(4) 사랑의 주님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사랑의 주님이신 것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새 계명으로 주셨다 (요 13:34). 이 때문에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록하되 가능한 자세히 기록하려는 시도를 한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을 살펴보자 (요 13:4-5).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요 13:1) 사랑하셨다는 것을 놀라운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의 동작 하나 하나가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술된다. 예수께서는 만찬의 자리에서 일어난다. 겉옷을 벗는다. 수건을 취한다. 수건을 허리에 두른다. 대야에 물을 담는다.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닦는다. 마치 영화를 느린 속도로 보듯이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는 한 장면 한 장면이 자세하고 정확하게 묘사된다. 이처럼 예수의 동작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은 예수께서 한 동작 한 동작에 얼마나 깊은 사랑을 담고 있는지를 보이기 위함이다.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의 동작은 하나라도 놓칠 수가 없다. 예수의 움직임은 사랑의 움직임이다. 예수의 각 동작은 사랑으로 엮어져 있다. 예수의 손놀림, 예수의 허리를 굽히심, 예수의 눈동자의 움직임은 제자들에 대한 끝까지 사랑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다. 제자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예수는 자신의 모든 동작을 바치고 있다. 예수는 사랑이시다. 예수는 사랑하심에 있어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2. 요한서신
사도 요한은 세 편지를 기록하였다. 세 편지는 길이에 따라서 성경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가장 긴 편지가 앞에 위치하고, 가장 짧은 편지가 뒤에 위치한다.
요한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서신들에서도 예수를 부인하는 이단과 싸우는데 주력한다.
1) 요한일서
(1) 요한일서의 구조
0. 도입 (1:1-4)
1. 하나님과 교제 (1:5-2:17)
2. 적그리스도 (2:18-29)
3. 소망자의 삶 (3:1-24)
4. 영분별 (4:1-6)
5.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의 관계 (4:7-5:4)
6. 신앙의 증거 (5:5-12)
7. 결론적 권면 (5:13-21)
(2) 요한일서의 내용
요한일서는 특히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가현설과 싸운다 (요일 4:1-3). 요한일서에는 "우리"와 "그들"의 기독론적인 대립이 요점이다. 여기에 요한일서의 분립와 관련된 갈등구조가 설명된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에 대하여는 먼저 2:18-20에 나온다. 첫째로 "그들"은 "우리"에게서 분립하였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다" (2:19). 이것은 출교가 아니라 탈교를 의미한다. 반대자들에 대한 공식적인 출교는 시행되지 않았다. 남은 자가 있고 나간 자가 있다. 둘째로 "그들"은 다수를 이루었다. "많은 적그리스도" (2:18; 4:1). "그들"은 수적으로 열세한 그룹이 아니었다. 요일서의 공동체는 "그들"에게 위협을 받을 정도로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외부적으로 진출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 (비기독교적인 주변세계)와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4:5). 셋째로 "그들"은 적그리스도라고 불린다 (2:18). 적그리스도는 무엇인가. 우선 기독론적인 문제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2:22). 이들이 예수의 메시야성을 부인하는 것으로보아 이들의 정체가 유대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높다 (참조. 요 7:25-27; 9:22; 10:24,36). 특히 이들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 (4:2). 이들이 예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으로보아 이들은 영지주의자들일 가능성이 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자들을 거절하였다.
2) 요한이서
(1) 요한이서의 분해
0. 도입 (1-3)
1. 형제사랑 (4-6)
2. 이단경계 (7-11)
3. 결론 (12-13)
(2) 요한이서의 내용
요한이서에서도 기독론이 중요한 논점으로 등장한다. 요한이서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시는 것을 믿는다 (육체재림설). 이것은 이단을 분별하는 중요한 요점이다. 발신자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미혹자와 적그리스도가 많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7). 이들은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시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 자들"이다 (7). 이 교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된다. 첫째로 이것은 기독론에서 문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거짓된 가르침이다. 이러한 면에서 요일서가 말하는 이단과 관계가 있다 (요일 4:2). 둘째로 이것은 종말론에서 문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거짓된 가르침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재림을 다룬다 (현재분사에 주의하라). 이러한 면에서 요일서가 말하는 이단과 다르다. 요일서가 말하는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한다 (요일 4:2). 셋째로 이것은 신앙고백에서 문제가 된다. "고백하지 않는 자들". 미혹자는 초대교회의 공동적인 신앙고백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이런 이단에 대하여 엄격하고 냉정하게 거절할 것을 권면하였다 (10-11).
3) 요한삼서
(1) 요한삼서의 분해
0. 첫말(1)
1. 첫째 "사랑하는 자여" 단락(2-4): 가이오를 칭찬
2. 둘째 "사랑하는 자여" 단락(5-10): 디오드레베를 반대
3. 셋째 "사랑하는 자여" 단락(11-12): 데메드리오를 추천
4. 끝말(13-15)
(2) 요한삼서의 내용
장로가 가이오에게 보낸 편지이다. 여기에는 선교론적인 문제가 등장한다. 장로는 선교지향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장로의 선교정책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첫째로 선교대상와 관련하여 볼때 이것은 이방인선교이다 (7). 둘째로 선교주체자와 관련하여 볼때 이것은 헌신선교이다 (그 이름을 위하여 7). 개인보다 예수가 앞선다는 강조이다. 셋째로 선교방식과 관련하여 볼때 이것은 방랑선교제이며 (나그네 5, 나간다 7). 교회에 정착하는 사람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보고중심제이다 (교회앞에서 증거 6). 선교자와 피선교자를 철저하게 통제한다. 또한 이것은 무보수제이다 (아무것도 받지 아니 함 7). 선교자가 자비량으로 모든 것을 감당한다. 그러나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장로의 선교정책에 동의하지 않았다. 디오드레베가 선교지향적이 아닌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장로가 행하는 선교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디오드레베는 많은 말로 (여러 면에서) 장로를 비판하였다 (10). 따라서 디오드레베는 방랑선교자들을 접대하지 않았고 (형제들을 대접하지 않았고 10), 접대하려는 자들을 엄금하고 추방하였다 (10). 사도 요한은 이런 분파주의자를 거절한다. 사도 요한은 이방인선교를 방해하는 것은 악한 행위로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경고하였다 (11).
3. 요한계시록
사도 요한의 신학은 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밝히는 것으로 절정에 달한다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반드시 속히 될 일과 관련된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말하다가 체포를 당해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에 이 계시를 받았다. 예수의 계시는 일곱 교회 (1-3장) - 일곱 인 (4-7장) - 일곱 나팔 (8-14장) - 일곱 대접 (15-20장)의 도식을 가진 종말론으로 구성된다.
1) 예수의 명칭
요한계시록에서도 기독론이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은 기독론을 전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명칭을 사용한다. 예수는 그리스도 (11:15-19; 12:10-12; 20:4-6 두 번), 어린양 (29번 사용), 하나님의 아들 (12:18), 알파와 오메가 (21:6; 22:13), 하나님의 말씀 (19:13) 등으로 표현된다. 특히 예수의 고난과 부활과 승귀를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를 충성된 증인, 죽은 자들가운데 먼저 나신 자, 땅의 왕들의 머리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1:5).
2) 예수의 관계성
예수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관계성에서 이해된다.
(1) 교회의 그리스도
예수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그리스도이시다 (계 1:10-18). 예수는 "인자같은 이"의 신분을 가진다 (1:13). 그의 외모는 다음과 같이 상징적으로 설명된다 (1:13-16). 발에 끌리는 옷과 가슴에 금띠는 권위를 (13), 머리털의 희기가 흰 양털과 눈같음은 성결을 (14), 눈이 불꽃같음은 통찰을 (14). 발은 풀무에 단련된 주석같음은 능력을 (15), 음성은 많은 물소리같음은 세계통치를 (15),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은 교회통치를 (16),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은 말씀의 권세를 (16), 얼굴이 해처럼 비치는 것은 생명수여자를 상징한다 (16).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분을 자증하신다 (1:17-18). 예수는 처음과 나중이시며 (17), 산 자이시며 (18), 전에 죽었으나 이제 영원히 살아계시면서 열쇠지니어 사망과 음부를 지배하신다 (18). 이와 같은 예수의 모습은 일곱교회에 대한 말씀에서 다시 한번 각각 반복적으로 설명된다 (2-3장).
에베소 - 일곱 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서머나 - 처음과 나중,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
버가모 -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
두아디라 - 눈이 불꽃같고 발이 빛난 주석같은 이
사데 -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흰 옷 입으라)
빌라델비아 - 다윗의 열쇠가진 이
라오디게아 - 창조의 시작
(2) 우주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에서 우주는 무지개에 둘러싸인 하나님의 보좌와 우편에는 어린 양이 있고 전면에는 일곱 영이 있고 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강이 중심이다. 이것을 중심하여 네 생물, 24장로, 144천의 유다의 성도, 흰 옷을 입은 허다한 무리, 천사들, 만물이 배치된다.
예수는 우주를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5:1-14). 어린 양이신 예수가 보좌와 네 생물, 장로들 사이에 계신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는 책이 들려있다.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있다. 그러나 이 인봉을 떼고 책을 펼 자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다. 이때 유대지파, 다윗의 뿌리이신 (5:5), 어린 양 예수께서 이 책을 취한다. 찬양이 드려진다. 네 생물과 24 장로가 노래하고 (5:9-12), 많은 천사들이 노래하고 (5:12), 만물이 노래한다 (5:13). 이 노래들은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승천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따라 우주를 다스릴 권세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려준다. 하나님은 어린양을 통하여 우주를 다스리신다. 예수께서는 또한 심판의 그리스도이시다 (14:14-16). 그는 흰 구름에 앉으시고, 금면류관을 쓰시고,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을 거두신다.
(3) 영계의 그리스도
예수는 전투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음녀 바벨론 (14:8; 16:19; 17:5; 18:10)을 비롯하여 세 가지 지원세력인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 (16:13)와 싸우신다. 이들이 하르마겟돈에 집결한다 (16:16). 하르마겟돈은 히브리어로 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이다. 야빈과 시스라의 군대는 철병거 900승을 가진 강한 병력이기에 이스라엘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인데 바락과 드보라가 이겼다 (삿 5:19).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전쟁에서도 음녀 바벨론과 세 더러운 영과 온 왕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나 큰 세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여도 승리는 하나님께 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16:15) 이 대적들을 무찌르실 것이기 때문이다 (19:19-20:10).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 (16:14)이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유배를 당하는 고난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예배한 사람이었다. 고난이 신앙을 이기지 못하였다. 비록 그의 육신은 밧모라는 지중해의 먼지처럼 작은 섬에 갇혀 있었지만 그의 영안은 하늘보다도 넓은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비록 그는 고난과 핍박이라는 현재를 살고 있었지만 영광과 승리라는 미래를 기대하였다. 사도 요한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에 의하여 세상나라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며, 영광과 승리라는 미래로부터 고난과 핍박으로 점철된 현재를 이해하는 삶이었다. 이런 시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렬하게 소망하였던 것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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