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파와 교단


기독교에 많은 교파가 있지만 이단이 아닌 이상 기독교로서의 공통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간이 되는 교리는 삼위일체론, 처녀잉태, 구속, 부활, 재림 등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교파들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예배의 형식이나, 성만찬에 대한 견해, 교권체제, 신조,
신학적 바탕 등에서 조금씩 다릅니다.

 

1. 장로교 (長老敎 Presbyterian)

칼뱅의 신학(神學)과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성립한 그리스도교의 개혁교회 교파.

장로란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감독(bishop)·장로(elder) 등과 같은 의미로, 장로교는 이러한 장로들에 의해 치리(治理)되는 교회를 말한다.

창시자는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인 칼뱅(Jean Calvin)으로, 그는 16세기 중엽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회제도를 확립하였다.

이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해 1559년에는 프랑스에서만 2,000여 교회가 장로제도를 채택하였고, 이어 네덜란드·스코틀랜드에서도 많은 장로교회가 생겨났다.

특히 스코틀랜드는 1560년 이후 장로교회를 국교회로 지정해 이후 잉글랜드와 미국으로 전파하는 데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660년 청교도혁명이 끝나고 왕정 복고가 이루어진 뒤 잉글랜드에서는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세계 장로교의 규범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 헌법·예배지침 등을 청교도혁명 기간에 마련했다는 점에서 장로교 역사상 중요한 시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1706년 필라델피아에서 처음으로 노회가 조직되고, 1789년에는 최초의 장로교 총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노예문제·신학·전도방법 등의 이견으로 여러 교단이 출현하였는데, 신학·교리 등에는 차이가 없었다. 18세기 이후 미국 장로교회는 아시아·아프리카 등 해외선교에 앞장서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함으로써 장로교의 세계화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선교가 이루어지기 시작해, 1882년(고종 19) 《누가복음》《요한복음》이 번역 출간되고, 1907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1912년에 총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행정조직으로 운영되던 한국 장로교회는 광복 이후 신앙과 신학노선 등 여러 갈등 요인으로 인해 분열되기 시작해 2002년 현재 40개가 넘는 교단이 활동하고 있다.세계적인 장로교 연합단체로는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이 있고, 세계 장로교 총 교인수는 약 50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측 http://www.yejang.or.kr/, 개혁측 http://www.reformed.or.kr, 통합측 http://www.pck.or.kr/, 고신측 http://kpm.org/
재건 http://www.jaegun.or.kr/  등 270 여개의 파)와 한국 기독교 장로회(기장 http://knp.or.kr/


1953년 김재준 목사 등의 신학적 입장을 이유로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로 나뉘었고, 1959년 에큐메니컬 운동에 관한 이념 갈등 때문에 통합과 합동으로 분리되었습니다.


* 교권체제 : 총회-노회-교회
* 학교: 총신대학교(합동), 총회신학교(개혁), 장로회신학대학(통합), 고려신학대학(고신) 안양대학교(대신)
고려신학교(고려) 한신대학교(기장)

 

2. 감리회 (監理會 Methodist Church)


1729년 영국에서 존 웨슬리(John Wesley)에 의하여 시작된 그리스도교 교파.

옥스퍼드대학교를 중심으로 존 웨슬리(John Wesley)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그리고 G.휘필 등의 대학생 그룹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들은 신성클럽(Holy Club)을 조직하고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데 규칙적이면서도 조직적으로 행동하여 메서디스트(Methodist:格式主義者)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들은 성경 및 신학 연구 등에 힘쓰고, 빈민과 병자, 감옥의 죄수들의 전도에 힘썼다.

1738년 5월 24일 존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들이 모인 올더스케이트 거리의 집회소에 참석하여 오후 8시 45분 경 인도자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로마서(書) 서문을 읽을 때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고 한다. 이 회심의 사건은 존 웨슬리의 생애에서 일대 전환점이 되었고, 감리회의 구원·신앙·성결의 교리를 설명해 주는 산 증거가 되었다. 원래 존 웨슬리는 고교회파(高敎會派)로서 영국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독자적인 운동을 하였는데, 영국교회에서는 그의 교회 내 설교를 금하였으므로 야외설교의 방법을 택하여 그 운동은 점차 확대되었다.

1744년 존 웨슬리는 메서디스트파 신자들을 런던에 모아놓고 전도사업 방침에 대하여 협의하였는데, 이것이 곧 감리회의 최초의 연회(年會)이다. 이때까지도 존 웨슬리는 영국교회와 분리하려는 뜻은 없었고 교회에 속한 채 전도하려 했지만, 1784년 런던 감독에게 미국으로 파견할 선교사를 안수하여 주도록 청하자 감독이 거절하므로 그 자신이 안수를 베풀어 T.코크 박사를 미국의 총감독으로 삼고 그 밖에도 몇 사람에게 안수를 주어 목사로 세우니 이때부터 감리교회는 실제적인 한 교파를 이루게 되었다.

감리회의 발전은 교구제도와 경건한 신앙을 고수하는 데 있었다. 존 웨슬리의 인격 ·조직력 ·지도력, 그리고 야외설교 ·평신도설교 등 꾸준한 복음활동 및 엄격하고 규율적인 생활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1791년 존 웨슬리가 서거하였을 때의 교세는 영국 전역에 확장, 잉글랜드를 본거지로 하였던 감리회 부흥운동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이르렀고 미국에서는 휘필드의 주도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조직의 기본단위는 구역이며, 그것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교회로 조직된다. 구역들은 지역적으로 지방회를 조직, 감리사가 피차 협동하여 교회조직과 사업발전에 힘을 기울이고 지방회는 다시 더 큰 집단을 형성하여 연회를 조직하며, 연회는 감독이 관할한다. 그리고 최고기관인 총회가 있다.

감리회 교리는 사도신경 속에 제시된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에 근거한다. 감리회의 특색은 교리보다도 실제적인 생활과 성경의 진리를 실천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라 하겠다. 사랑에 의하여 구현되는 신앙과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며 이성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신학적 이론을 비교적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는 것도 특색의 하나이다.

감리회에는 모든 신도가 각기 행하지 않으면 안될 규율, 곧 규범이 있고, 25개조의 종교강령이 있으며, 이것은 감리회의 헌법정신이기도 하다. 감리회 전도방법의 특색은 부흥설교를 통한 전도와 평신도를 통한 개인전도 및 심방전도이다.감리회의 신앙과 교리는 존 웨슬리가 발표한 25개조의 종교강령과 그의 53개의 ‘표준설교’, 그리고 그가 지은 신약성서 주석에 잘 나타나 있다.

감리교도 몇 개의 교파가 있는데 기독교 대한 감리회(http://kmcweb.or.kr/), 예수교 대한 감리회,
기독교 대한 자유감리교회 등이 있는데 이들의 신학적입장은 같습니다.

* 교권체제 : 감독회장-연회감독-감리사-목사

* 학교: 감리교신학대학  목원대학  협성신학대학

 

3. 침례교 (浸禮敎 Baptists)


자각적인 신앙고백에 기초한 침례를 시행하는 그리스도교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특히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며, 성서원리(聖書原理) ·침례 ·만인사제(萬人司祭), 각 교회의 독립, 교회와 국가의 분리 등을 강조한다. 영국의 청교도(퓨리턴)의 여러 파 가운데 하나로 생겨났으며, 창시자는 J.스미스(1554?∼1612)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교직자로 1608년 국교회의 압박을 피하여 동지들과 함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는데, 그 중 T.헬위스와 몇몇 동지들이 영국으로 돌아가 1612년 침례교회를 창설하였다.

아르미니우스파(派)의 입장을 취한 일반침례파와 칼뱅적 입장에 선 특수침례파의 구별이 있다. 영국에 이어 미국에서도 크게 퍼져서, 현재 미국 최대의 교파를 이루고, 대소 27개의 그룹으로 형성되어 있다. 한국에는 1890년 캐나다의 M.위크 선교사가 입국하여 함남 원산(元山)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한 것을 효시로 하여, 1905년 제1회 총회를 가지면서 보급되어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총회'와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총회'의 두 그룹이 있었다.

두 그룹은 1959년 '한국침례회연맹'으로 통합하였고, 1969년 재단법인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 유지재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976년 '기독교한국침례회' (http://www.koreabaptist.org/

교회의 직분은 목사, 안수집사, 교사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침례교회는  독립적, 자율적인 면을 중요시 하여 총회나, 연회 등을 두지 않고 '친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 학교: 침례신학대학교

 

4.성결교 (聖潔敎 Holiness Church)


1901년(광무 5) 2월,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OMS) 소속 선교사인 C.E.카우만과 E.A.킬보른(한국명 吉寶倫)에 의해 세워진 프로테스탄트의 교파.

장로교·감리교와 함께 한국에서는 3대 프로테스탄트 교단의 하나이다. 감리교 목사인 이들 선교사는 일본의 도쿄[東京] 간다구[神田區]에 동양선교회 전도관을 세우고 일본인 목사 나카다[中田]의 후원 아래 동양일원의 선교를 시작하였다. 교육에 힘쓰라는 선교회 본부의 지시도 있었으므로 전도관 1층에 성서학원을 개설, 성경 ·신학 등을 가르쳤다. 한국인 유학생 김상준(金相濬) ·정빈(鄭斌) 등이 이 학원에서 공부를 끝내고 귀국하자 1907년 염곡(鹽谷:현 무교동)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마련한 것이 한국성결교의 효시이다. 1911년 이명직(李明稙)·이명헌(李明憲) 등 5명이 동경성서학원을 마치고 귀국, 안수를 받고 장로사(長老師:순회목사)가 되어 선교사들의 후원 아래 아현동 고개 위에 새로이 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을 열면서 본격적인 목회자 양성과 노방전도(路傍傳道) 등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21년 9월 중생(重生)·성결(聖潔)·신유(神愈)·재림(再臨)의 사중교리를 내세운 ‘기독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가 탄생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문제로 수백 명의 성직자 ·신도들이 수난을 겪고, 교단이 강제 해체되기도 하였다. 1950년대 한국 교계를 휩쓴 WCC(세계교회협의회) 가입문제를 둘러싸고 교단이 분열되기 시작, 현재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http://www.kehc.org/

* 교권체제: 총회-지역총회-지방회-개 교회

* 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성결대학교

 

5. 루터교


마르틴 루터에 의해 창립된 가장 오래된 기독 교회

16세기 카톨릭에 반대하여 마틴 루터의 신앙적, 신학적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루터의 대소교리 문담(1529),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1530), 슈말칼트 신앙개조(1580), 콘코드의 신조(1580)를 신조로 삼았습니다.
루터교는 이들 신조들 외에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안 신조를 고백합니다.

교리적 특징은
1) 이신득의 강조
2) 성찬은 은혜의 방도가 된다.
3) 세례에 의한 중생
4)유아세례는 정당하며 합당하다
5)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에 부여된 것
6) 하나님의 은총에서 타락할 수 있지만 구원은 만민에게 보편적
   
한국에서 루터 교회는 문서선교를 통해 확산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수학하고 들어온 지원상 목사를 중심으로 컨콜디아사를 통해 문서선교를 하고 방송(루터란 아워)을 통해 선교했습니다.  한국에서의 루터교회는 그리 큰 교단은 아니지만 베델성서 교육을 통해 한국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기독교 한국 루터회(http://www.lck.or.kr/

이 교회는 회중주의이며, 행정과 결의에 있어서는 대의정치를 추구합니다.

* 학교: 루터신학대학교


6. 성공회 (聖公會 The Anglican Domain) 


영국의 국교회.

영국에서 출발한 성공회는 앵글리칸 처치, 성공회, 에피스코팔처치, 등으로도 불리 웁니다. 1536년 로마감독의 교권을 폐지하고 1570년 교황 피오 5세가 영국왕 엘리자벳을 파문함으로써 로마교회와 완전히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신앙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발생하였고 교회의 신학은 개혁파에 가깝지만 교회 및 예배의식은 카톨릭에 가깝습니다.

영국에서는 영국 왕이 교회의 정점이고  국회가 교회법을 제정합니다. 그렇지만 켄터베리 대교구, 요크 대교구, 웨일스 대교구 로 나눠져 있으며 한국 성공회는 켄터베리 대교구에 속해 있습니다. 영국교회의 교리의 표준은 39신앙개조와 기도문입니다.
한국에 성공회가 전래 된 것은 1890년 코프 감독에 의해서였습니다.
 
정식 명칭은 대한 성공회(http://anck.peacenet.or.kr/)입니다
조직은 주교, 신부, 부제라고 일컫는 종신직 신품이 있습니다.
* 학교: 성공회대학

 

7. 구세군 (救世軍 Salvation Army)


그리스도교 교파로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가 창설한 교파

구세군은 1858년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구세군(salvation army)이란 명칭은 1878.5에 정식으로 명명되었고 1880년 처음 사관학교를 세웠습니다. 구세군의 특징은 사회봉사에 있습니다. 구세군의 정치는 개인의 자유와 기회균등의 인정하에 군대 조직을 차용합니다.

세계의 모든 구세군은 한 대장 아래 통솔을 받습니다. 구세군에서는 목사는 사관 평신도는 병사라고 지칭합니다. 구세군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08년 10.8 명동에서 영국인 호가드 정령에 의해 옥외집회를 한데서 출발합니다. 구세군의 사회사업은 선교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며 남녀평등을 중요시 여겨 사관학교는 반드시 부부가 함께 입교토록 하고 있습니다.

구세군(http://salvationarmy.or.kr/)


 

8.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기하성), 순복음


프로테스탄트 오순절계(五旬節系)의 한 교파.

보통 순복음교회(純福音敎會)라고도 한다.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 삼위일체(三位一體)인 하나님을 믿으며, 중생(重生)·성령충만·신유(神癒)·재림(再臨) 등을 주요교리로 삼고 있다. 1928년 개인 자격으로 M.C.럼시가 오순절적 신앙선교를 목적으로 내한하여 당시 구세군에 근무하던 청년 허홍(許弘)과 함께 정동(貞洞)에 선교본부를 둔 것이 이 교회의 효시가 된다.

1959년 미국의 아시아 선교부장 케참 목사가 내한하여 2만 달러를 투자, 신학교를 신축하고 서대문에 중앙회관을 설립하는 등 전국복음화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순복음(Pure Gospel)' 운동의 주동이 되어 교회 명칭에도 순복음이 들어가게 되었고,1972년에는 분열되었던 교단이 다시 합쳐 선교부와 협력관계를 맺고 조직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2001년 현재 교회수 1,417개, 목사수 3,534명, 교인수 110만 6712명이며, 교육기관으로 한세대학교가 있다.

이 밖에 5개의 농아교회, 경기도 파주시의 오산리 기도원과 2곳의 수양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본부 소재지는 한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222번지이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http://www.ag.or.kr/)

이 계열의 교회들은 성령운동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오순절파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신학적 바탕은 뚜렷하게 어느 것이다 라고 할 수 없지만 대략 웨슬레안에 가깝습니다.
한국의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오중복음과 삼박자 축복이란 것을 중시합니다. 
학교는 순신대학교(순복음), 한영신학대학 등이 있습니다.



기독교 교파들


종교의 파. 흔히 종파·교단·교회 등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넓은 뜻으로는 특정신앙을 유지하는 종교단체·당파를 뜻한다. 다만 형식적으로 보통 교단·교회에 대한 대칭으로서 사용될 때가 있다. 즉 교파라 함은 결성이 없이 정서적 분위기가 주요소(主要素)가 되고 교조(敎祖)·예언자 등의 인격에 의존하며 그들을 권위로 삼고 그 권위에 대한 정감에 따라 협동적으로 신도가 결속해 있을 때를 가리킨다. 한편 교회라 함은 시일이 지남에 따라 인간적 요소보다 오히려 교단조직에 중점을 두어 의례·전도사업 등이 주된 수단이 되며 신도층이 고정화된 기성교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누비아교회


아프리카 북동부 이집트 남쪽에서 나일강 연안수단의 수도 하르툼 부근까지의 누비아 지방에 있었던 그리스도교회. 옛날부터 이집트와 교류가 있었던 누비아에는 3∼4세기에 이미 포교가 시작되어 6세기에 본격화되었다.아프리카 북동부 이집트 남쪽에서 나일강 연안수단의 수도 하르툼 부근까지의 누비아 지방에 있었던 그리스도교회. 옛날부터 이집트와 교류가 있었던 누비아에는 3∼4세기에 이미 포교가 시작되어 6세기에 본격화되었다. 당시 누비아에는 북쪽으로부터 노바티아·마크리아·아로디아의 3왕조가 있었다.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는 이 무렵 이집트를 중심으로 단성론파(單性論派)가 떨어져 나가고 있었고, 단성론파와 칼케논파의 싸움이 누비아 포교에도 반영되었다. 통설에 의하면 노바티아·아로디아 2왕국은 단성론파이고 마크리아는 후에 칼케논파에서 단성론파로 전향했다고 한다. 최근에 행해진 노바티아왕국의 수도 파라스의 발굴에서 출토된 교회벽화와 비문은 비잔틴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누비아교회는 이슬람군의 지배하에 있으면서도 번영을 계속했으나 1173년 사라프 아딘(사라딘)의 침공을 받아 14세기 말 소멸했다.

 

스코틀랜드교회


스코틀랜드에서 장로제(長老制)를 택한 교회. 스코틀랜드에 대한 그리스도교 전도는 4세기 말의 니니안·아이오나 섬에 수도원을 건립한 성 콜룸바 등 켈트계 선교사에 의해서 진행되었으나, 11세기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향으로 재편되었다.스코틀랜드에서 장로제(長老制)를 택한 교회. 스코틀랜드에 대한 그리스도교 전도는 4세기 말의 니니안·아이오나 섬에 수도원을 건립한 성 콜룸바 등 켈트계 선교사에 의해서 진행되었으나, 11세기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으로 재편되었다.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종교개혁을 도입하려다 화형에 처해진 P. 해밀턴·G. 위샤트의 뜻을 이어받은 J. 녹스에 의하여 칼뱅주의에 근거한 개혁이 실현되었고, 1560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과 <규율의 서(書)>에 의한 장로주의 교회가 확립하였다. 1603년 이래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 왕을 겸했기 때문에 주교제가 도입되었으나, 1637년 캔터베리 대주교 W. 로드에 의한 기도서 강요에 반발하여 궐기하였고, 1643년 장기의회(長期議會)와의 사이에 엄숙동맹(嚴肅同盟)을 체결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을 수리(受理)하여 장로파 교회로서 재건하였다. 1668년 명예혁명 뒤 <스코틀랜드의 교회>로서의 지위를 굳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르메니아교회


서남아시아의 아르메니아지방에 있었던 그리스도 교회의 한 파.
르메니아에서의 그리스도교 전도는 2세기에 시작되었다.
서남아시아의 아르메니아지방에 있었던 그리스도 교회의 한 파. 아르메니아에서의 그리스도교 전도는 2세기에 시작되었다. 3세기 말에는 왕가 출신인 그레고리우스가 당시 국왕 트리다테스를 비롯하여 많은 국민을 개종시켰다. 이 때문에 그는 <계몽자 그레고리우스> <아르메니아의 사도>라 불렸다. 451년의 그리스도 양성론(兩性論)을 정통으로 했던 칼케돈 공의회에는 아르메니아의 전란 때문에 불참하였으나 이 교회는 6세기 이후 반(反)칼케돈 입장을 취했고 지금도 역시 대부분은 그리스도 단성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같은 입장에 있는 다른 교회와는 교류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뒤에는 페르시아와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비롯하여 근세 이후로는 터키인과 러시아인에 의한 박해의 역사를 걸어왔으나 교회를 바탕으로 한 민족적 결합은 단단하다. 그들의 교리는 그리스정교회와 비슷하며, 예배는 <바실레이오스 전례(典禮)>에 바탕을 두고 있다. 또 예수의 탄생을, 공현축일(公現祝日, 1월 6일)을 중심으로 축하하고 있는 것도 이 교회 특색의 하나이다.
 
잉글랜드교회


16세기 영국에서 종교개혁의 결과 성립된 교회. 영국교회·앵글리컨처치·영국성공회·잉글랜드교회라고도 한다.
영국에서의 그리스도교 전도는 3세기 무렵부터 로마교황 관할 밖인 켈트계 선교사에 의하여 실행되었다. 597년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영국으로 건너간 이후 로마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로마가톨릭 교회의 일원으로 재편되었으며, 왕권과 교황권이 상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적 관계를 유지했다. 헨리 8세는 왕비와의 이혼문제로 로마교황과 대립한 사실을 계기로, 1534년 <국왕지상법(國王至上法)>에 의하여 영국의 교회를 로마로부터 이탈하게 한 뒤 스스로 그 최고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영국에서 보편적인 교회의 조직을 <국법에 의해 확립된 잉글랜드의 교회>로 개편했다. 1554년 메리 1세 치세하에서 국교회가 로마가톨릭 교회로의 복귀를 실현했으나, 1558년의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오름과 동시에 다시 <교의적(敎義的)으로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정치와 예배양식은 가톨릭>이라고 일컬어지는 국교회체제가 확립되었다. 17세기로 접어들자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퓨리턴은 왕정을 타도함과 동시에 주교제(主敎制)와 기도서(祈禱書)에 의한 예배를 폐지했고, 장로주의(長老主義)에 이어서 회중주의(會衆主義)를 확립했는데, 1660년 왕정복고와 함께 주교제와 기도서가 회복되자 신종(信從)을 거부하고 비국교도(非國敎徒)가 되었으며, 1688년의 명예혁명 뒤에는 자유교회를 창설했다. 근세에 접어들어 영국국교회의 신앙부흥은 18세기의 메소디스트 운동과 19세기의 옥스퍼드 운동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산업혁명에 의하여 도시로 이주한 노동자와 빈민에게 구원의 손을 뻗쳐 회개와 성화(聖化)를 역설한 J. 웨슬리의 메소디스트운동은 국교회 밖으로 나가서 한 교파를 만들었는데, 국교회 안의 복음주의자(低敎會派)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은 무력한 교회 수뇌부 대신에 교회에 필요한 개혁을 위로부터 강요하는 정부에 대하여 반발했으며, 국교회의 자기혁신과 자주성 회복을 목표로 한 J. 키블·J.H. 뉴먼의 옥스퍼드 운동은 국교회 내에 생기를 되찾아 주었고, 예배에 장엄성을 부여했으며, 성직자의 교육 및 도덕수준을 높여 주고 해외전도를 활발하게 했다.


조직
영국국교회는 캔터베리·요크의 2개 관구로 되어 있으며, 지금의 켄터베리에는 39개의 주교구, 요크에는 14개의 주교구가 있다. 웨일스 교회는 전통적으로 국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왔으나, 별개의 관구를 구성하고 있다. 각 주교구는 여러 개의 대집사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대집사구는 다시 여러 개의 교구교회로 이루어져 있다. 켄터베리·요크 양 대주교는 각기의 관구 관할자로서 성직회의를 소집하고 대주교재판소를 주관한다. 교구주교는 각기의 주교구에서 관할권을 갖는다. 종교개혁시대에는 로마로부터의 이탈도, 교의·예배양식의 결정도 모두 의회에서의 입법조치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자 비국교회원도의석을 차지하는 의회의 교회사항 심의에서 의의(疑義)가 제출되었기 때문에, 1919년의 <수권법(授權法)>에 의하여 신도도 참가하는 교회회의가 발족했으며, 1970년에는 영국성공회총회로 개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의와 예배양식
영국국교회의 교의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으로 <39개조(箇條, 1563)>를 들게 되는데, 이는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영국국교회를 모교회(母敎會)로 삼는 다른 지역의 성공회를 구속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회의 교의적 입장은 1888년의 램베스회의에서 승인되었으며, 각 관구에서 받아들여진 《성공회 강헌(聖公會綱憲)》에 의하여 제시되어 있는데,

① 신의 계시인 《구약·신약성서》

② 초대교회에 의하여 작성된 니케아·사도(使徒) 양 신조

③ 구원에 필요한 새크러먼트인 세례와 성찬

④ 사도계승에 바탕을 두는 주교·사제·집사의 3성직위(三聖職位)의 준수에 있다고 여기고 있다. 예배양식은 1549년에 작성되었고, 3년 뒤에 보다 프로테스탄트적인 방향에서 개정된 기도서에 의하여 규정되어 있는데, 옥스퍼드운동 이후 일요일의 주요 예배도 성찬식이 되었으며, 기도서도 보다 가톨릭적 방향에서 개정하는 노력이 실천되고 있다.


오늘날의 영국국교회
근세로 들어선 뒤부터 영국의 해외진출에 따라서 영국국교회도 북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오세아니아로 확대되었으며, 오늘날에 와서는 캔터베리대주교와의 접촉 가운데에 있는 38개의 관구와 4500만 명의 신도가 전성공회(앵글리컨커뮤니언)를 형성하고 있다. 각 관구는 독자적 교회조직·의사결정기관·교회법·기도서를 지니며 다른 관구의 간섭을 받지 않으나, 《성공회 강헌》에 의해 하나의 교회로서의 일체성(一體性)을 보전, 유지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교회일치운동>이 시작되자, 영국국교회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와의 중간적 존재로서 여러 교회간의 대화를 촉진하고 로마가톨릭교회와의 사이에도 <로마가톨릭교회 성공회 국제위원회>를 설치함으로써 중요교의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


로마교황을 정점(頂點)으로 하는 그리스도교회. 그리스도교회에서는 동방정교회·프로테스탄트교회와 구별하여 사용된다
로마교황을 정점(頂點)으로 하는 그리스도교회. 그리스도교회에서는 동방정교회·프로테스탄트교회와 구별하여 사용된다. 가톨릭이란 말은 <보편적> <공동적> <일반적>이라는 의미로서, 스스로를 <유일하고, 성스럽고, 공변되며, 사도(使徒)로부터 전래된 교회(니케아信經·콘스탄티노플信經)>라고 믿고 있는 그리스도교회가 전 인류를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기관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가톨릭교회(ekklesia katholik?)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10년경에 순교한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그나티오스가 스미르나교회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였다. 2005년 현재 가톨릭교회는 전세계에 약 11억 명의 신도를 가진 최대의 공변된 교회이다.


가톨릭교회의 역사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를 그리스도 즉 약속의 메시아, 구세주라고 선교(宣敎)한 12사도와 바울의 활동으로 로마에 전파되었으며, 무서운 박해 뒤에 콘스탄티누스대제의 그리스도교 개종과 313년 밀라노칙령에 의해 로마제국에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 뒤 가톨릭교회는 동·서로마제국 안에서 서로 다르게 발전했다. 동방교회에서는 총대주교구(總大主敎區)가 된 콘스탄티노플·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전례(典禮;공적인 예배집행체계)를 가져, 어떤 의미에서 자율성과 독자성을 지닌 여러 교회가 생겨났다.

이와 같은 다양성을 지닌 동방교회의 발전과는 대조적으로 서방교회에서는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공통의 로마전례를 가진 교회조직이 구축되었다. 그러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전례나 언어에 따른 표현의 차이는 있어도 5세기쯤까지는 똑같은 하나의 사도 전래의 가톨릭교회로서의 일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325년 니케아공의회(公議會) 및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교의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431년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배척하고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그리스도교 단성론(單性論)을 배척함으로써 동방교회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그 사이에 교황 레오 1세는 로마의 주교가 전(全)가톨릭교회에 대해서 수위권(首位權)이 있다는 것을 <마태복음(16:18)> 등을 기초로 하여 분명히 하였다.

이것은 동방교회의 의식과는 다른 것으로, 동방교회에서는 로마의 주교를 동등한 주교들 중에서 제1위인 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화상파괴논쟁(聖畵像破壞論爭),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포시우스의 임면(任免)을 중심으로 한 논쟁, 삼위일체의 교의에서 성령(聖靈)은 성부(聖父)가 아니라 성자(聖子)를 통해서 온다는 단수발생론(單數發生論)의 동방교회를 무시하여, 서방교회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양쪽에서 나온다고 하는 복수발생론의 라틴어 <필리오케(Filioque)>라는 표현을 신경(信經)에 덧붙인 필리오케 논쟁 등이 겹쳐 1054년 동서의 교회는 분열되었다. 로마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는 동방교회는 스스로를 정교회(正敎會)라 부르게 되었다. 그뒤 동방교회의 전례를 유지한 채 로마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여 가톨릭이 된 교회도 있지만 동방교회의 대체적인 경향은 그대로였다.

한편 16세기의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가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었던 것은 신학·전례·신앙생활·교회행정 등 여러 분야에 걸친 것이었으며, 특히 직집적인 계기는 1517년 M. 루터가 제기한 면죄부논쟁(免罪符論爭)이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함께 루터의 개혁운동은 독일과 스위스 지방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져 나가 그의 신봉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운동은 하나의 통일된 프로테스탄트교회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고 많은 교회가 각각의 신앙에 따라 분립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여러 프로테스탄트교회와 가톨릭교회의 신앙내용의 차이를 명확하게 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구원(원죄를 포함하는 모든 죄로부터의 해방) 및 성서·성전(聖傳)·성사(聖事)·주교·교회 등에 관한 차이는 분명하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여러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 가톨릭교회는 1545~1563년 트리엔트공의회를 개최하여 교의(敎義)와 조직 및 제도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반종교개혁이라 불린 것이며 근대가톨릭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16세기 이후 유럽의 통일이 무너지고 근대국가가 탄생하자 가톨릭교회는 이들 국가와 정교조약(政敎條約)을 체결하였다. 1929년 이탈리아 정부와 라테란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교황을 수장(首長)으로 하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 바티칸시국(市國)이 탄생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때 교회는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종교나 인종 또는 국적에 관계없이 도와주었으며, 전후에는 평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열어 교회의 현대화와 교회의 일치 등에 대해 토의했다.


가톨릭교회의 교의와 전례
그리스도교의 근본개념인 죄로부터의 해방, 즉 구원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트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속죄를 믿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에 비하여, 가톨릭에서는 7성사(七聖事)의 하나인 세례에 의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차이는, 원죄로 인간본성이 파괴되고 자유의지를 잃었으며 정욕 그 자체가 죄라고 규정한 종교개혁자측의 생각과, 원죄에 의해 잃은 것은 하느님이 부여한 특별한 초자연적인 은총뿐이며 자유의지를 포함한 인간 본성은 잃지 않았다고 하는 가톨릭교회의 사고방식에서 유래한다.

또한 <신앙만>을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신앙의 원천으로 성서를 유일시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성서와 더불어 사도 이래의 성스러운 전통을 신앙의 원천으로 보았으며, 교회 교도직(敎導職)은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말씀을 권위를 갖고 해석한다. 이러한 차이는 교회의 조직, 신앙생활의 존재방식 전체에 영향을 준다. 가톨릭교회는 교회 자체를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실현하는 도구와 장소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는 구원이 교회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미치게 되고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교회의 유기적 공동체에 속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구원의 은총을 부여하는 7성사를 중시한다. 즉 세례·견진(堅振)·성체(聖體)·고백(告白)·혼인(婚姻)·신품(神品)·병자(病者)성사의 7성사는 말과 행위로 이루어지는 의식이지만, 그와 같은 의식으로 신도는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을 만나 그 성사가 의미하는 은총을 받게 된다.

이러한 성사는 인생의 고비에 필요한 은총의 효과적인 표시가 되며, 특히 성체성사는 가톨릭 신도의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 있다. 성체성사가 행하여지는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의 2부분으로 되어 있다. 말씀의 전례는 성서 낭독, 강론 및 기도이고, 성찬의 전례는 예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성변화(聖變化)된 빵과 포도주를 신도들이 받아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사는 주일(主日)인 일요일에는 신도 전원이 의무적으로 참례한다.


가톨릭교회의 조직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 즉 <하느님의 백성(제2차 바티칸공의회)>이며 동시에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의 사회적·위계적 조직이다. 교회는 12사도와 바울 및 그 후계자들이 선교한 지방에 신자들의 공동체가 만들어짐으로써 시작되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 공동체에 속하게 된 신도들은 보편적인 사도직을 갖게 된다.

그러나 교회에서 전례(典禮;미사성제)의 집행 등의 봉사는 성직자(主敎·司祭·副祭)에 의해 행하여진다. 주교는 그리스도에 의해 뽑힌 12사도의 후계자이며 사제와 부제는 주교를 돕는 자이다.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는 독신남자로 한정된다. 동방정교회에서는 부인이 있는 자도 사제로 서품되지만 사제가 된 뒤의 결혼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주교는 독신사제만 등용된다. 주교는 지방교회인 교구의 장(長)이며 전세계의 교구는 로마의 주교인 교황(敎皇) 밑에 속해 있다.

가톨릭교회의 교황은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교회의 최고권위자이다. 이것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의 교의가 결정(1870년 7월 18일)됨에 따라서 교의적으로 확실해졌으며, 1917년의 교회법전에 의해 법제화되었다. 교황은 또한 바티칸시국의 주권자이기도 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는 교황과 일체가 되어 교회를 관장하는 주교의 단체성과 권한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권한이 가장 뚜렷한 형태로 행사되는 것이 공의회이다. 이 공의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까지 모두 21회 개최되었는데 동방정교회는 제2차 니케아공의회(7회 공의회)까지만 인정하고 있다. 공의회는 드물게 개최되므로, 전(全)주교단에 의한 교회 사목(司牧)의 기능을 행사하는 기구로서 각 지방교회에는 주교협의회가, 전(全)교회의 수준에서는 수년마다 세계대표주교회의(시노드)가 개최된다.

이와는 별도로 교회의 통치에서 교황의 고문으로 교회행정을 담당하며 교황선거권을 가지는 추기경단(樞機卿團)이 있다. 교황이 공석이 되었을 때 후계자를 선정하는 교황선거비밀회의는 추기경들로 구성된다. 전교회에 대한 교회행정의 중추는 로마 교황청(Curia Romana)이고, 중심이 되어 조정 역할을 하는 것은 국무성성(國務聖省)이며, 그 밖에 신앙·교리성성을 비롯하여 주교, 동방교회, 성사·경신(敬神), 성직자, 수도자·재속수도회, 인류복음화, 시성(諡聖)·시복(諡福), 가톨릭교육의 9개 성성(聖省)이 있다.

또한 내사원(內赦院)·항소원(抗訴院)·대심원(大審院)의 3개 법원과, 그리스도 일치사무국, 비그리스도교도사무국, 무종교자 사무국이 있다. 이 3개 사무국은 각각 제2차 바티칸공의회 후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가톨릭교회가 문화적·종교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극히 한정된 것, 즉 <개별적>인 것이 되어 버린 현상을 여러 가지 면에서 검토하여 참다운 의미에서 보편적인 가톨릭교회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의 표현이다. 교황청에는 이 밖에도 평신도평의회, 정의·평화위원회 등 많은 위원회가 있다.

주교 밑에 있는 교구 조직과는 별도로 수도회, 재속(在俗)수도회가 있는 것도 가톨릭교회의 특색이다. 수도회는 청빈·순결·순종의 3개 복음적 권고에 따라 살겠다는 서원(誓願)을 하고 장상(長上)의 지도 아래 공동생활을 하면서 주어진 사명을 통해서 교회에 공헌한다. 수도회는 기도와 노동을 설립이념으로 하는 관상(觀想)수도회(카르멜회·트라피스트회 등)와 활동수도회(프란체스코회·도미니코회·살레지오회 등)로 나누어진다. 서원을 하지만 일반 사회생활을 하는 재속수도회가 최근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의 가톨릭


16세기 중엽 가톨릭은 중국과 일본에 전파되어 큰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1593년 12월 일본에 진출해 있던 예수회는 임진왜란 때 동원되었던 왜군을 교화하기 위해 에스파냐의 신부 G. 세스페데스를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그는 물론 조선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려 했을 것이지만 적대관계에 있던 당시 상황에서는 불가능하였다. 한편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의 선교사들도 베이징[北京(북경)]에 내왕하는 조선 사신들과 볼모로 잡혀 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통하여 간접적인 조선전도를 시도하였으나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저술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만은 계속 조선에 도입되어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이 조선 사신들을 통해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이수광은 1614년 《지봉유설(芝峰類設)》을 지어 가톨릭 및 서양 여러 나라의 사정을 처음으로 소개함으로써 실학(實學)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뒤 실학은 주로 남인 학자들 사이에서 크게 발전하였는데, 특히 이익(李翼)과 그의 제자 안정복(安鼎福)은 가톨릭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 두 학자 사이에서는 가톨릭을 천학(天學) 또는 서학(西學)이라고 불러 다만 학문적으로 연구할 뿐이었으나 안정복의 문인이던 권철신(權哲身)·정약전(丁若銓)·이벽(李蘗) 등에 이르러서는 교리를 연구하는 종교운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들은 경기도 광주(廣州) 주어사(走魚寺)·천진암(天眞庵) 등지에서 강학회(講學會)를 열고 서학을 연구하는 가운데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여, 기도와 재계 등으로 가톨릭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정약전의 매부 이승훈(李承薰)은 그의 부친을 따라 베이징에 건너가 1784년(정조 18) 봄 북천주당(北天主堂)의 신부 J.J. 그라몽[梁棟材(양동재)]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 최초의 세례신자가 되었다.

그는 귀국 후 곧 이벽과 더불어 교리를 연구하고, 친지와 친척들에게 전도하여 그 해 9월부터는 입교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성세성사(聖洗聖事)를 베풀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인(中人)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의 집에 모여 주일행사를 지냄으로써 평신도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창설되었다. 이 때부터 이승훈 등은 오직 하느님만을 믿음으로써 재래의 온갖 미신행위를 물리치고, 서로 교우라고 부름으로써 당시의 엄격한 봉건적 계급제도를 타파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성직자가 밖으로부터 들어와 전교(傳敎)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교회를 창설한 것은 세계 교회사상 한국 교회만의 특징이다.

그러나 한국의 가톨릭은 수용 직후부터 조정(朝廷)의 탄압 대상이 되어 교회 창설 이듬해인 1785년부터 한국-프랑스수호통상조약이 비준된 1887년까지 10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 1785년에는 1784년에 창설한 조선교회가 발각되어 김범우가 유배당하였고, 1791년에는 모친상을 당하고도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살랐다는 고발로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이 처형당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은 계속되는 박해에도 굽히지 않고 베이징교회뿐만 아니라 로마교황에게까지 거듭 편지를 보내어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창설 11주년이 되던 1795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처음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그의 밀입국을 신고한 자가 있어 피신해야만 하였고 관헌의 수색 때문에 사목활동은 극히 제한되었다. 1801년 순조 즉위 뒤부터는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박해가 시작되어, 득세한 노론벽파(老論僻派)가 종교를 빙자하여 남인에게 정치적 보복을 가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이로 인해 주문모와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거의 순교하고 성서도 대부분 압수되었다.

그러나 이렇듯 비참한 상황에서도 신도들의 노력으로 교회는 10년 만에 재기하였고 다시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이에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가 1831년 9월 베이징교구에서 독립된 조선교구를 설정하는 동시에 초대교구장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B. 브뤼기에르를 임명하였으나 그는 조선 입국을 눈앞에 두고 중국에서 병사하였다. 그 뒤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였는데 이들은 토착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최양업(崔良業)·최(崔)프란체스코·김대건(金大建) 등을 마카오로 유학하게 하였다.

1837년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주교 L.M.J. 앵베르가 입국함으로써 조선교구는 독립교구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가톨릭은 다시금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1839년 당시의 세도가인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의 세력다툼으로 인해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기해박해(己亥迫害)이다. 이로 인해 당시 입국해 있던 3명의 선교사와 유진길(劉進吉)·정하상(丁夏祥) 등이 순교하였다. 특히 정하상은 체포될 것을 예측하고 미리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에게 제출할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작성하여 가톨릭에 대한 박해의 부당함을 비판하였다.

1845년 마카오로 유학했던 김대건이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어 귀국하여 교우의 수가 갑자기 늘기 시작하였으나 1846년 그의 체포를 발단으로 병오박해(丙午迫害)가 일어나 김대건과 교우 9명이 순교하였다. 철종 때에 이르러 가톨릭은 조정의 탄압이 완화되어 교세를 크게 떨쳤으며 베르뇌신부를 비롯한 10여명의 신부가 입국하였고 최양업도 신부가 되어 귀국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즉위하여 대원군이 집정하면서 1866년(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었고 불과 3개월 사이에 당시 조선에서 전교중이던 선교사 12명 중 9명과 교회의 지도급 신도들이 처형되었다. 살아남은 3명의 선교사 중 리델신부는 탈출에 성공, 톈진[天津(천진)]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제독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여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초래하였다. 병인양요와 1868년 E.J. 오페르트에 의한 남연군묘 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 등을 계기로 가톨릭에 대한 탄압은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때의 박해는 그 규모나 기간 등에 있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박해로 이 기간 동안 8000~2만여 명의 신도가 처형당하였다.

1886년 한국-프랑스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가톨릭은 불완전하나마 포교의 자유를 얻게 되어 종현성당(鐘峴聖堂;현재의 명동성당)·약현(藥峴)성당 등의 건축, 용산신학교의 개설 등이 이루어졌다. 개화기에는 《경향잡지》 《경향신문》의 창간을 비롯하여 언론과 교육을 통해 개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창씨개명·신사참배 등의 강요, 미국인 선교사 추방, 외국인 선교사 구금 등의 종교탄압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은 발전을 계속하여 여러 교구가 창설되었고 서울교구장직이 노기남(盧基南) 신부에게 넘겨짐으로써 처음으로 한국인 교구장이 탄생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하에서 가톨릭은 프로테스탄트와 함께 우대를 받으며 교세를 더욱 확장하였고, 6·25로 인한 성당·학교 등의 파괴, 성직자·수도자 납치 등의 시련 속에서도 발전을 계속하였다.

1962년 한국천주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되어 자립교회로 승격함으로써 많은 교구가 증설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개최되어 한국교회의 발전과 쇄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8년에는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 중 24위를 복자위(福者位)에 올리는 시복식(諡福式)이 로마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거행되었고, 1969년 서울대교구의 김수환(金壽煥)교구장이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을 맞이하였고, 1984년에는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내한하여 순교자 103인에 대한 시성식(諡聖式)을 집전하였다. 1989년에는 10월 4~8일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2002년 한국 천주교회는 420여 만여 명의 신자가 있으며 교구수는 서울·대구·광주 3개의 대교구를 포함하여 14개 교구이다. 본당은 765개, 공소(公所)는 1578개이고, 성직자는 대주교 3명(한국인), 주교 14명(외국인 3명 포함), 한국인 신부 1298명, 외국인 219명, 수도자는 수사(修士)가 한국인 288명, 외국인 32명이고, 수녀는 한국인 4869명, 외국인 198명이다.

또한 천주교유지재단에서 경영하는 교육기관으로 초등학교 6개교, 중학교 26개교, 고등학교 35개교, 대학교 9개교가 있으며, 그 밖에 농아학교, 정신장애자학교 등 특수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의료사업으로 성모병원 등 30개소의 병원을 경영하며, 사회사업으로 양로원·나환자정착마을·결핵요양원·부랑인의 집 등을 운영하고 있다.
 
아비시니아교회


에티오피아에서 믿는 그리스도교의 일파. 에티오피아교회라고도 한다. 4세기 아타나시우스로부터 주교로 임명된 프로멘티오스에 의해 창설되었다. 5∼6세기는 <9명의 로마성인(聖人)>일행이 방문하는 등 부흥의 시기였으나, 그 뒤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쇠퇴하였다. 또한 이 교회는 오랫동안 이집트교회에 대하여 종속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대부분은 그리스도단성론(單性論)을 받아들여 유대교적 의식을 지키고 있다. 또 고대 에티오피아어에 의한 성서번역도 4∼5세기에 착수되었다고 한다.

 

프렌드교회


프로테스탄트의 한 파(派). 1647년 J. 폭스가 창시하였으며 프렌드(Friend)파라고도 한다.

17세기 영국의 급진적 청교도 신비주의에서 출발하였으며 신자들이 자기 신앙을 육체의 진동(震動)에 의해 표현하였으므로 퀘이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정적(靜寂) 속에서 하느님을 대망하며 깊은 내면적 체험에 의해 <내적인 빛>을 받아 거기에서 구원을 찾는 것을 지향한다.

성서가 성령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보아 세례·찬송도 부인하며, 성령에 관한 교리에 주목하고 신과 인간 영혼과의 밀접한 관계에 의해 갖게 되는 회심(回心)을 무엇보다

중요시하였다.


전부터 이 교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성령주의자로서 이단으로 여겼고 교리는 위험사상으로 간주되어 오랜동안 박해를 받아 왔다.

그들은 국가전복·불경(不敬)·세금체납·징병거부 등의 반사회적 행동으로 벌금·수감·외국추방 등의 벌을 받았다.
미국에서도 박해받게 되자 차츰 로드아일랜드·펜실베이니아가 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퀘이커교는 사회개혁의 원동력이 되어 노예제 반대운동 등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는 1955년 2월 미국인 퀘이커교 신자에 의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영국교회 (英國敎會)


영국에서의 그리스도교 전도는 3세기 무렵부터 로마교황 관할 밖인 켈트계 선교사에 의하여 실행되었다. 597년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영국으로 건너간 이후 로마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일원으로 재편되었으며, 왕권과 교황권이 상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적 관계를 유지했다. 헨리 8세는 왕비와의 이혼문제로 로마교황과 대립한 사실을 계기로, 1534년 <국왕지상법(國王至上法)>에 의하여 영국의 교회를 로마로부터 이탈하게 한 뒤 스스로 그 최고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영국에서 보편적인 교회의 조직을 <국법에 의해 확립된 잉글랜드의 교회>로 개편했다. 1554년 메리 1세 치세하에서 국교회가 로마가톨릭교회로의 복귀를 실현했으나, 1558년의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오름과 동시에 다시 <교의적(敎義的)으로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정치와 예배양식은 가톨릭>이라고 일컬어지는 국교회체제가 확립되었다. 17세기로 접어들자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퓨리턴은 왕정을 타도함과 동시에 주교제(主敎制)와 기도서(祈禱書)에 의한 예배를 폐지했고, 장로주의(長老主義)에 이어서 회중주의(會衆主義)를 확립했는데, 1660년 왕정복고와 함께 주교제와 기도서가 회복되자 신종(信從)을 거부하고 비국교도(非國敎徒)가 되었으며, 1688년의 명예혁명 뒤에는 자유교회를 창설했다. 근세에 접어들어 영국국교회의 신앙부흥은 18세기의 메소디스트 운동과 19세기의 옥스퍼드 운동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산업혁명에 의하여 도시로 이주한 노동자와 빈민에게 구원의 손을 뻗쳐 회개와 성화(聖化)를 역설한 J. 웨슬리의 메소디스트 운동은 국교회 밖으로 나가서 한 교파를 만들었는데, 국교회 안의 복음주의자(低敎會派)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은 무력한 교회 수뇌부 대신에 교회에 필요한 개혁을 위로부터 강요하는 정부에 대하여 반발했으며, 국교회의 자기혁신과 자주성 회복을 목표로 한 J. 키블·J.H. 뉴먼의 옥스퍼드 운동은 국교회 내에 생기를 되찾아 주었고, 예배에 장엄성을 부여했으며, 성직자의 교육 및 도덕수준을 높여 주고 해외전도를 활발하게 했다.


조직
영국국교회는 캔터베리·요크의 2개 관구로 되어 있으며, 지금의 켄터베리에는 39개의 주교구, 요크에는 14개의 주교구가 있다. 웨일스교회는 전통적으로 국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왔으나, 별개의 관구를 구성하고 있다. 각 주교구는 여러 개의 대집사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대집사구는 다시 여러 개의 교구교회로 이루어져 있다. 켄터베리·요크 양 대주교는 각기의 관구 관할자로서 성직회의를 소집하고 대주교재판소를 주관한다. 교구주교는 각기의 주교구에서 관할권을 갖는다. 종교개혁시대에는 로마로부터의 이탈도, 교의·예배양식의 결정도 모두 의회에서의 입법조치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자 비국교회원도의석을 차지하는 의회의 교회사항 심의에서 의의(疑義)가 제출되었기 때문에, 1919년의 <수권법(授權法)>에 의하여 신도도 참가하는 교회회의가 발족했으며, 1970년에는 영국성공회총회로 개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의와 예배양식
영국국교회의 교의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으로 <39개조(箇條, 1563)>를 들게 되는데, 이는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영국국교회를 모교회(母敎會)로 삼는 다른 지역의 성공회를 구속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회의 교의적 입장은 1888년의 램베스회의에서 승인되었으며, 각 관구에서 받아들여진 《성공회 강헌(聖公會綱憲)》에 의하여 제시되어 있는데, ① 신의 계시인 《구약·신약성서》 ② 초대교회에 의하여 작성된 니케아·사도(使徒) 양 신조 ③ 구원에 필요한 새크러먼트인 세례와 성찬 ④ 사도계승에 바탕을 두는 주교·사제·집사의 3성직위(三聖職位)의 준수에 있다고 여기고 있다. 예배양식은 1549년에 작성되었고, 3년 뒤에 보다 프로테스탄트적인 방향에서 개정된 기도서에 의하여 규정되어 있는데, 옥스퍼드운동 이후 일요일의 주요 예배도 성찬식이 되었으며, 기도서도 보다 가톨릭적 방향에서 개정하는 노력이 실천되고 있다.


오늘날의 영국국교회
근세로 들어선 뒤부터 영국의 해외진출에 따라서 영국국교회도 북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오세아니아로 확대되었으며, 오늘날에 와서는 캔터베리대주교와의 접촉 가운데에 있는 38개의 관구와 4500만 명의 신도가 전성공회(앵글리컨커뮤니언)를 형성하고 있다. 각 관구는 독자적 교회조직·의사결정기관·교회법·기도서를 지니며 다른 관구의 간섭을 받지 않으나, 《성공회 강헌》에 의해 하나의 교회로서의 일체성(一體性)을 보전, 유지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교회일치운동>이 시작되자, 영국국교회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와의 중간적 존재로서 여러 교회간의 대화를 촉진하고 로마가톨릭교회와의 사이에도 <로마가톨릭교회성공회 국제위원회>를 설치함으로써 중요교의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기독교 대한복음교회 (基督敎大韓福音敎會)


한국 기독교 교파의 하나. 1935년 12월 최태용(崔泰溶)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민족교회로, 기성교회의 비판과 반성에서 출발했다는 데에 그 특색이 있다. 최태용은 1919년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내촌감삼)]의 영향을 받고 열렬한 무교회주의자(無敎會主義者)가 되었다. 귀국 후 1925년에 잡지 《천래지성(天來之聲)》을 창간하여, 의식·전례·교회당 등 교회제도에 구속받지 않으며 하느님의 말씀은 성서에 의해서만 전해지고 구원은 신앙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복음주의적 측면을 강조하는 무교회주의를 역설하였다. 《천래지성》이 폐간되자 1929년부터는 《영(靈)과 진리》를 발행하였으며, 일본신학사(日本神學社)에서 근대신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야 하며, 교회는 조선사람 자신의 교회이어야 함을 외치며 새로운 교회를 창설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1935년 2월 교회이름을 <기독교조선복음교회>라고 하여 최태용 자신이 초대목사로 취임하였다. 1936년 1월에 총회를 개최하여, 교단의 체제와 조직을 새롭게 갖추어 비로소 한국인 신앙동지들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교파로 자리잡았다. 1974년 기독교 대한복음회는 재단법인으로 등록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종래의 감독·이사장제를 총회제도로 개편하였다. 1989년 4개의 지방회에 30개 교회, 1만 5000여 명의 신도가 있다.

 

예수교 대한성결교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서 신앙노선의 차이로 갈라져 나온 보수적 복음신앙의 성격을 가진 성결교단. 약칭 예성. 본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鍾路區) 행촌동(杏村洞)에 있다. 1901년(고종 38) J. 웨즐리의 성경적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설립한 동양선교회가 교회의 기원이다. 1907년 한국선교가 시작되어 1921년에는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라는 명칭으로 교단이 조직되었다. 1943년 재림사상의 불온성을 이유로 해산당하였다가 광복 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개칭, 재건하였으며, 1961년 4월, 한국기독교교회협회(NCC)와 복음동지협의회(NAE)에 가입한 일로 인하여 교단 내의 분열이 시작되어 1962년 <예수교대한성결교회>를 별도로 조직하였다. 1963년 기관지 《성결》을 발행하였으며, 성결교신학교를 개교하였다. 1984년에는 이탈한 혁신측 50개 교회가 복귀하여 성결교신학교를 확장하였으며, 1988년에는 예성연합측과 재결합하였다. 교리는 중생·성결·신유(神癒)·재림의 4중복음과 7개항목을 지도원리로 삼고, 사도신경을 신앙의 밑바탕으로 한다. 교단조직은 개교회의 당회를 기본으로 하여 감찰회, 지방회, 교단, 총회의 순으로 조직되어 있다. 교세는 1990년 현재 교회수 642개, 교직자수 1192명, 신도수 31만 7085명이다.

 

콥트교회


이집트의 정통 그리스도교회. 정식 명칭은 <콥트 오서독스(정통)교회>이다. <콥트(copt)>는 <이집트인>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이깁토스(Aigyptos)>의 아라비아어 발음에서 유래한다. 알렉산드리아에 주교좌를 둔 이집트의 교회는 2세기 이후 그리스도교 교의(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451년 칼케돈공의회(公議會)에서 채택된 그리스도론(칼케돈신조)을 거부하고, 교리적으로 그리스도 단성론(신과 그리스도는 단일한 본성을 가진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인성보다 신성을 강조하는 설)을 채용하여 비잔틴제국 교회와 결별하였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콥트교회의 내셔널리즘이 있었다. 이 일은 7세기 이후 이집트가 아랍화·이슬람화하여 콥트인이 소수파로 머무르고 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교회  Protestant Church
16세기 M. 루터·J. 칼뱅 등의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그리스도교회. 가톨릭을 구교(舊敎)라고 하는 데 대해 신교(新敎)·개신교(改新敎)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특히 이 신교만을 일러 <기독교>라고도 부른다. 로마 가톨릭교회 및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3대 교파를 이룬다.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역사
1517년 루터의 면죄부 비판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서에 의해서> <만인은 하느님 앞에서 동등한 사제>라는 3가지 원리로 가톨릭교회를 비판하였다. 이것이 1526년 이후 독일의 여러 지방으로, 1530년 독일 루터파 교회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작성된 뒤에는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3국으로 확산되었다. 종교개혁은 스위스에서도 일어나 취리히에서는 U. 츠빙글리, 제네바에서는 칼뱅 등이 프로테스탄트적 종교개혁에 앞장섰다. 이 스위스 계통의 개신교(Protestantism)를 개혁파교회 또는 장로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가톨릭측이 반종교개혁과 정치투쟁으로 반격하여 유럽 각지에서 종교전쟁·정치혁명이 일어났다. 장로교회는 프랑스·영국·스코틀랜드·네덜란드·헝가리·폴란드 등으로 확산되었으며, 영국에서는 유럽 대륙과는 달리 신학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이유에서 가톨릭의 지배에서 벗어나 영국국교회가 성립되어 프로테스탄트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취하였다. 이에 영국국교회의 중립적 위치를 비판하고 종교개혁의 철저한 순화(純化)와 양심의 자유를 주장한 것이 여러 퓨리턴파(청교도)로서 각각 장로파·회중파(會衆派)·침례파·퀘이커파 등 여러 교회로 성장하였다. 이들 여러 교회의 신학적 특징은 칼뱅주의뿐만 아니라 교파에 따라서는 재세례파(再洗禮派)나 스피리추얼리즘(영성주의)의 요소를 함유하고 있거나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8세기에는 관용의 법칙이 성립되어 세속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교회의 영향력은 쇠퇴하였으며 프랑스에서는 유물론과 무신론이 반교회적 태도를 급격히 신장시켰다. 독일과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서는 경건주의운동이 일어나 지식인들에게서는 계몽주의가 싹텄고 농민층 중심의 보수적 사람들은 경건주의를 지주로 신앙부흥운동을 일으켜 반계몽주의 태도를 취하였다.

영국에서는 영국국교회로부터 갈라진 경건주의와 유사한 감리교회가 생겼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파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미국은 퓨리턴파 교회와 감리교회를 주력으로 하는 대표적 프로테스탄트 국가로서 종교가 사상이나 문화형성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들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 가운데 영국국교회·스코틀랜드장로교회·독일루터교회·네덜란드개혁파교회 등은 국가와 결부된 국가교회이지만 퓨리턴 이후에는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기 시작하여 자유교회가 성립하였다. 이 정교(政敎) 분리가 거의 완전히 실현되고 자유교회제도가 전형적인 방법으로 시행된 곳은 미국으로, 국가교회형(型) 영국국교회·루터파교회·개혁파교회 등도 자유교회화되어 있다.
1830년대 프로테스탄트교회는 내외의 복음전도와 성서배포, 도덕 생활의 권장, 자선사회사업 등에 주력하고 역사학의 연구방법을 응용하여 신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려고 하였다. 또한 18세기 말부터 적극적 해외 전도사업에 나서 각 교파는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등 곳곳에 교회에 더불어 미션 스쿨이나 사회사업단체 등을 설립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로테스탄트교회는 복음의 진리가 현대인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것으로 새롭게 이해하려고 하였고, 또 교파의식을 초월하여 세계적인 시야와 관련에까지 도달, 프로테스탄트 이외의 교회와도 협력하여 세계교회 일치운동을 적극화하였다.

 

개혁파교회 (改革派敎會 Reformed Church)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에서 루터파에 대하여 칼뱅파(캘빈파)교회를 가리키는 호칭.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敎會)의 총칭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스위스와 남부독일의 여러 도시는 루터주의와 좀 성격을 달리하는 종교개혁을 하였는데, 이것이 개혁파의 원류(源流)이다. 이 개혁파는 뒤이어 J. 칼뱅과 J.H. 불링거에 의해서 주로 제네바를 거점으로 하여 통합되었고, 1550년대에 프랑스·스코틀랜드·네덜란드·독일·폴란드 남부·헝가리에 침투하였다. 12세기초 P. 왈도의 사상을 이어받은 북부 이탈리아의 왈도파는 1532년부터 개혁파의 한 파에 가입하였다. 정식으로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개혁된 교회>이나 <개혁된 교회>라고 줄여 개혁파 교회라고 말한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J. 녹스)에 기원을 두는 교회는 <장로파 교회>라고 불리지만, 신앙내용과 교회제도는 개혁파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장로와 목사의 회의가 지도권을 가지므로 한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는다. 초기의 지도자가 모두 인문주의자(人文主義者)이고, 또한 이 파의 지반(地盤)이 모두 서구였기 때문에, 서구의 지적(知的) 합리주의와 대결·절충을 거듭하여 서구적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 특색으로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주권(主權)을 강조하고, 교리, 교회의 질서와 규율, 국가에 대한 교회의 자립을 중요시한다. 따라서 교회의 자립의 침해에 대해서는 맞서는 경향이 있다. 신학을 대표하는 것은 칼뱅의 《그리스도교 강요(綱要)》이며, K. 발트의 위치도 근래에 와서 비중이 커졌다. 루터파와는 16세기 이래 <성찬론(聖餐論)>과 그 밖의 것을 둘러싸고 논쟁과 대화를 계속했지만 기풍은 크게 다르다. 1877년 <개혁파 세계연맹>을 조직하고, 1970년에는 회중파(會衆派, 또는 組合派) 세계연맹을 병합하였다. 산하의 교회인구는 4900만명에 달하며, 한국에는 100만명 정도의 신도가 있다.

회중파교회 (會衆派敎會 Congregational Church)


영국 청교도주의에서 파생하여 발달된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하나. 조합파 교회 또는 독립파·분리파라고도 한다. 각 교회의 독립자치의 원칙에 입각, 교회 상호간 교류를 존중하지만 각교회에 대한 위로부터 지배를 부정하고, 국가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한다.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왕조의 R. 브라운·H. 바로 등의 분리파 개혁운동에 기원을 둔 것으로, 엘리자베스 1세의 교회개혁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국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집회를 가짐으로써 기운이 조성되었다. 뒤에 박해를 받아 네덜란드로 피하고 일부는 미국에 이주하였으며 청교도혁명을 거쳐 하나의 교파로 발전하였다. 즉 미국 식민지시대의 초기 퓨리턴·필그림 파더스나 매사추세츠에 상륙한 사람들의 교파로서, 뉴잉글랜드의 지배적인 교회가 되어 미국 정치·사회의 사상이나 제도 조직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퓨리턴 신권정치(神權政治)의 핵심으로서 신학교육뿐 아니라 일반교육에도 관심이 깊어 하버드·예일·스미스·아머스트·오베린 등 여러 대학을 설립하였으며, 노예제도에 반대하여 남북전쟁 후 남부에 흑인들을 위한 대학을 세웠다. 19세기에 이르러 외국전도와 교육에 주력하여 1810년 <아메리칸 보드>라는 외국 선교단체를 설립, 인도·중국·일본 등지에 많은 선교사를 파견하였고, 일본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동지사대학)] 등 학교 설립에 노력하였다. 영국에서는 왕정복고 후 <예배통일법>이 제정되자 또다시 박해를 받게 되었다. 한편 영국 본토에서는 1689년 명예혁명의 결과 <관용법(寬容法)>이 제정되어 회중파도 공식으로 인정받았으나 여전히 사회적 차별은 계속되어, 1832년 회중파계 여러 교회들은 <회중파연합>을 결성,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 회중파는 정통적 교리보다 비교적 자유로웠으므로 장로파 교회로부터 적대시되었고, 최신 신학적 동향에 쉽게 영향을 받았다. 교회로서의 통합·구심력이 약하여 교단으로서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으며 보다 자유로운 유니테리언이나 보다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교파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았다.

 

갱신교회 (更新敎會 〔러〕 Obnvlencheskaya Tserkov)


러시아의 여러 개혁파 교회들로 구성된 연맹. 1922년 러시아정교회의 중앙행정권을 장악한 뒤 20년 이상 소련 내 많은 종교단체들을 통제하였다. 1917년 2월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정교회는 표트르대제가 폐지했던 총대주교직을 부활시키고 티혼을 새 총대주교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티혼이 공산당정권에서 독립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취하자, 1922년 공산당은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총대주교직을 폐지하였다. 이를 틈타 교회에서 혁명을 일으킬 기회를 잡은 A. 베덴스키와 V. 크라스니츠키를 앞세운 사제집단은 임시고등교회집행부를 조직하고, 급진적인 교회개혁 단행을 목표로 하는 운동을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시켰다. 이것이 갱신교회인데 임시집행부는 일부 주교 및 혼인한 성직자들과 진보적인 지식인 그리고 정부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갱신교회의 운동은 그들이 총대주교 및 그 추종자들과 대결하는 동안 그 지도자들은 비밀경찰과 협력했고 티혼 편에 섰던 수백 명 성직자들이 반혁명주의자로 몰려 총살당하는 등 개혁의지가 더럽혀졌다. 티혼 총대주교는 1923년 6월 자기비판을 한 뒤 풀려났고 총대주교 편에 남아 있던 교회들에는 신도들이 몰렸으나, 갱신교회는 점차 입지를 잃었다. 제2차세계대전 동안 I.V. 스탈린이 종교정책을 바꾸어 티혼의 계승자 선출을 허용함으로써 갱신교회는 완전히 무너졌다

 

고백교회 (告白敎會 〔독〕 Bekennende Kirche)


독일 나치스의 종교정책에 반대하여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기 위해 세운 교회. A. 히틀러는 정권을 장악하자, 이에 영합하는 <독일 그리스도 신앙운동>을 이용하여, 종교정책을 추진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서 M. 니묄러의 지도에 의한 <목사긴급동맹>의 결성을 시작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회 내에 저항운동이 일어나, 1934년 5월에 바르멘에서 제1회 고백회의가 개최되있다(바르멘선언). 여기서 K. 바르트가 기초한 신학적 성명을 채택하여 의견의 결집을 본 것을 고백교회라 한다. 국가의 박해나 분열에도 불구하고, 제2차세계대전을 통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나치스 정권에 저항을 계속하여, 이에 소속된 목사 또는 신도 가운데서 많은 희생자를 냈으나, 그 정신만은 전후의 독일 복음주의교회(EKD)에 이어지게 되었다.

 

나사렛교회 (-敎會 Church of the Nazarene)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미국의 홀리네스운동(홀리네스파)에서 생긴 교회로, 1895년 메더디스트교회에서 이탈한 B.F. 브리지에 의해 로스앤젤레스에서 창립되었다.

처음에는 남캘리포니아뿐이었으나 다른 교회와도 합동해서 뒤에는 중서부에도 퍼졌으며, 또한 몇몇 대학과 학교 그리고 병원을 운영한다.

독일개혁파교회 (獨逸改革派敎會 German Reformed Church)
복음개혁파교회 구성 조직의 하나. 재미(在美) 개혁파교회의 전신(前身)으로 18세기에 독일 및 스위스에서 미국 펜실베이니아로 이주한 신자들에 의해서 조직되었다.

처음에는 네덜란드개혁교회의 지도를 받았으나, 1747년 제1회 교회회의를 열고, 1793년 기본규약을 채택하여 독립하였다.

 

강림교회 (降臨敎會 Church of the Nativity)


330년경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와 그 어머니 헬레나에 의하여 베들레헴에 세워진 세계 최고(最古)의 왕립교회. 현재의 건물은 6세기 중엽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건된 것이다. 그 제단의 바로 밑에 그리스도가 태어난 것으로 믿어지는 구유의 성동굴(聖洞窟)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동굴에서 탄생한 것은 원래 신약외전(新約外典)의 《야곱원복음서(原福音書, 150년경)》에 기재되어 있으며, 유스티누스나 오리게네스의 저작에도 인용되고 있다. 제1회 십자군이 라틴제국(帝國)을 창설하였을 때, 보두앵 1세(1100∼18)가 이 교회에서 즉위하였다. 현재 그 북쪽에 성카타라교회 (1883년 건설)가 인접해 있고, 지하에는 E. 히에로니무스가 《구약성서》의 라틴어역(譯)인 《불가타》를 완성하기 위해 살았던 동굴이 있다.

 

독일복음주의교회 (獨逸福音主義敎會 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독일에 있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연합조직.

종교개혁 이후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각영방(領邦;Land)마다 영주를 우두머리로 하는 통일조직으로서 루터파 또는 칼뱅의 전통에 입각한 개혁파 중 어느 한 편에 속해 있었다.
독일에 있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연합조직. 종교개혁 이후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각영방(領邦;Land)마다 영주를 우두머리로 하는 통일조직으로서 루터파 또는 칼뱅의 전통에 입각한 개혁파 중 어느 한 편에 속해 있었다. 뒤에 양파(兩派)의 합동으로 합동파 교회도 생겼으나, 정치형태가 크게 변하여도 이 영방교회(領邦敎會;Landeskirche)의 형태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모든 영방교회는 자립성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공동행동을 취하기 위한 연합체로서 독일복음주의교회(EKD)를 결성하였다. 17개의 영방교회가 가맹하고 있는 EKD는 소속 신도수가 약 2700만 명에 이르고 공통찬송가를 제작하여 사회봉사활동이나 전도에 협력하였다. 한편 처음부터 영방교회에 속하지 않았던 침례교파·감리교파 등의 자유교회는 현재에도 이에 속하지 않고 있다.

 

동방전례가톨릭교회 (東方典禮-敎會 The Uniates Churches)


넓은 뜻으로는 고대 동로마제국 영토에 민족주의 테두리에서 생겨난 여러 교회. 좁은 뜻으로는 정교회(正敎會;Orthodox), 즉 비잔틴전례(典禮)를 따르고 있는 여러 교회.넓은 뜻으로는 고대 동로마제국 영토에 민족주의 테두리에서 생겨난 여러 교회. 좁은 뜻으로는 정교회(正敎會;Orthodox), 즉 비잔틴전례(典禮)를 따르고 있는 여러 교회. 전례용어로서 고대 그리스어·고대 슬라브어·아라비아어·루마니아어 등을 사용하고, 성호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십자(十字)를 그으며, 빵과 포도주 두 가지를 배령(拜領)하는 등의 특징을 가진다. 전세계에 약 2억의 신도를 보유하고 있다. 교리(敎理)·전례·도덕의 면에서 신학상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초대(初代) 7차에 걸친 공의회(公議會)의 결의에 기초한 가르침에 대해서는 로마가톨릭 교회와 거의 같고, 유효성도 다름이 없다. 동·서로마의 분리 이래, 각국 교단이 독립하고 있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總大主敎)의 명예로운 수위(首位)를 인정하고 있다. 로마교황의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수위권(首位權)은 인정하지 않는다.

 

성분묘교회 (聖墳墓敎會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왕립교회의 하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골고다언덕과 그의 무덤을 보존하기 위하여 335년 콘스탄티누스대제가 건립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왕립교회의 하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골고다언덕과 그의 무덤을 보존하기 위하여 335년 콘스탄티누스대제가 건립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현존 교회는 대체로 십자군시대에 재건, 중수된 것이다. 예수의 무덤은 당시 전형적인 유대식 암굴무덤[岩窟墓(암굴묘)]으로, 부활성당(아나스타시스)이라 불리는 돔의 바로 아래에 있다. 그 주위의 벽을 따라서 카타콤(catacomb)식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누가복음 23:50∼53>). 아나스타시스 동쪽의 순교자성당 지하에는 콘스탄티누스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십자가를 발견했던 것으로 알려진 장소(성당)가 보존되어 있다. 예수의 무덤의 위치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현재 다마스쿠스문(門)의 북쪽에 있는 <정원의 무덤(Garden Tomb, BC 7세기)>을 진짜 무덤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基督敎大韓聖潔敎會 The Korea Evangelical Church)


한국 기독교 교파의 하나. 그 중심교리는 중생(重生)·성결·신유(神癒)·재림(再臨)의 4중복음, 즉 중생하게 하는 그리스도, 성결하게 하는 그리스도, 치료하게 하는 그리스도, 재림하는 그리스도이다.한국 기독교 교파의 하나. 그 중심교리는 중생(重生)·성결·신유(神癒)·재림(再臨)의 4중복음, 즉 중생하게 하는 그리스도, 성결하게 하는 그리스도, 치료하게 하는 그리스도, 재림하는 그리스도이다. 이는 감리교의 창시자인 W. 웨즐리의 사상의 일부이기도 하며 복음주의사상의 계승이기도 하다.


연혁
한국의 성결교회는 일본 도쿄[東京(동경)]에서 동양선교회 소즉 선교학원을 졸업한 정빈(鄭彬)과 김상준(金相濬)이 귀국하여 1907년 서울 종로에 복음전도관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모체인 동양선교회 (東洋宣敎會;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는 미국의 C.E. 카우던과 E.A. 킬버른이 극동지방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하여 1901년 일본 도쿄에 복음전도관을 창설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1910년 영국인 J. 토머스가 한국 동양선교회에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1911년에는 현재의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인 성서학원을 설립하여 교역자를 양성하였으며 1913년에는 아현전도관이 설립되었다. 1921년에는 충정로에 성결교회 본부 및 성서학원 준공을 계기로 그 명칭을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하여 전도와 목회의 양면적 선교활동을 시행하는 획기적 발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어 교세의 성장에 따라 1924년 교역자회를 조직, 최초의 해외선교사로 이원근(李元根)전도사를 간도의 용정(龍井)에 파견하였다. 1929년에는 제1회 연회(年會)를 개최하여 교회헌법을 발표함으로써 정식교단의 발족을 보게 되었다. 1933년에는 제1회 총회를 개최하여 박현명(朴炫明)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 이르러 교회에 대한 탄압정책이 심해지면서 1943년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성결교회 복음이 일본 국체(國體)에 배치(背馳)된다는 이유로 강제해산되었으며 많은 신도들이 순교 및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1945년 11월 재건총회를 개최하여 그 명칭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변경하여 독립된 교단으로서의 독립·자주권을 선포하였다. 이후 교회는 다시 성장의 궤도에 올랐으나 6·25로 많은 교회가 파괴되고 최석모(崔錫模)·박현명·이건(李鍵)·김유연(金有淵)·박형규(朴亨圭) 등이 납북되었다. 뒤이어 불어닥친 교회분열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렸다가 몇 번의 합동작업 끝에 재연합되어 1989년 현재 82주년의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교단조직 및 교세현황
교회 본부는 서울 대치동(大峙洞)에 있으며 현재 1549개의 교회와 2695명의 교역자, 57만여 명에 달하는 교인을 가진다. 기구편성은 총회·총회장 밑에 총회 본부, 각 위원회 등이 있으며 부속기관으로는 산하에 서울신학대학이 있고, 협의기구로 국제성결연맹·국내외교회연합회·OMS주한선교회·전국장로회·사회사업유지재단·신학대학동문회가 있다. 그 밖에 교단기관지 《활천(活泉)》을 간행하며 장학회와 기타 사회사업을 한다.

 

고대교회 슬라브어 (古代敎會Old Church Slavic language)


9세기 중엽 큐리로스(슬라브어 이름 키릴)와 형인 메토디오스(메토디이)에 의해 슬라브어 문자가 만들어지면서부터 인위적으로 정해진 11세기말까지의 슬라브어 문헌의 언어. 슬라브어파(語派) 중 최고(最古) 문헌의 문어(文語)이다.
9세기 중엽 큐리로스(슬라브어 이름 키릴)와 형인 메토디오스(메토디이)에 의해 슬라브어 문자가 만들어지면서부터 인위적으로 정해진 11세기말까지의 슬라브어 문헌의 언어. 슬라브어파(語派) 중 최고(最古) 문헌의 문어(文語)이다. 이 시대의 문헌에서도 개개의 슬라브어의 특징이 현저한 경우에는 이를 제거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국가나 학자에 따라 어느 정도 범위가 다르다. 또 이 시대에 존재했었다고 생각되지만 문헌에는 나와 있지 않은 형태를 포함하여 넓게 생각하는 견해도 있어 그런 경우를 고려하여 <고대 슬라브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이 언어는 제1기(유리로스메토디오스어라고도 불림)에 마케도니아(당시 불가리아의 일부)의 방언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리아에서는 <고대 불가리아어>라고 하고 있다. 고대교회 슬라브어는 슬라브어 중에서도 가장 고풍적이며 각각의 슬라브어에서 상실된 오래 된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때문에 인구어(印歐語;인도 유럽어) 비교문법에서는 슬라브 조어(祖語) 대신 사용되고 있는데, 몇 가지의 특징으로 미루어 슬라브어파의 남쪽 그룹에 속해 있었던 것이 명백하다. 이 언어는 현존하는 사본(寫本)의 언어로서 종교적인 면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슬라브문화 전체에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각 지역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하여 지방적 특징을 지닌 교회 슬라브어로 그 모습을 바꾸어 갔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교회 슬라브어는 러시아어 발달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으며, 그 후 수세기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 언어는 우선 글라골문자로 쓰였으며 약 50년 뒤부터는 키릴문자로도 쓰이게 되어 2가지 문자의 문헌이 있다. 현존하는 문헌 중 복음서가 가장 많은데 그 대부분이 그리스어로부터 번역된 것이다. 다만 큐리로스 등의 원본은 없고 그 사본에 지나지 않는다. 이 언어의 특징은 음성면에서는 비모음(鼻母音)·약화음(弱化音)을 지니고 있으며, 명사의 곡용(曲用)·동사의 활용, 나아가서는 분사(分詞)도 형식이 다양하여 통사론(統辭論)에서는 이른바 <독립여격(獨立與格)>이 특징적이다. 유형적으로는 고도로 굴절(屈折)된 형태의 언어이다.

 

 루터파교회


16세기 독일의 루터가 종교개혁으로 성립시킨 그리스도교의 한 교파. 복음주의 교파로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16세기 독일의 루터가 종교개혁으로 성립시킨 그리스도교의 한 교파. 복음주의 교파로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독일·북유럽에서 북아메리카·아시아·아프리카로 전파되었으며, 신도수 약 7000만으로 그리스도교교파로서는 로마가톨릭·그리스정교에 다음가는 교파이다.


발단
가톨릭교회에 대한 개혁의 움직임은 영국의 J.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J. 후스 등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종교개혁은 루터가 성서를 새로운 각도에서 파고들어 하느님의 은혜를 재발견함으로써 시작되었고,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가톨릭교회의 면죄부에 반대하는 95개조의 논제(論題)를 공개함으로써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루터의 개혁은 본래 교회 관습에 대한 비판이나 개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서의 이해를 통한 혁신으로서, 이것을 가톨릭교회 안에서 실행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교회 상황이나 체제, 국제적·국내적 정치상황 등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고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함으로써 동조자들과 함께 자신들의 교회를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개
루터 자신은 <루터파> 교회라는 의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교회는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어야만 한다고 설교하였는데,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루터적 교회>라고 부른 것이 정착함으로써 루터의 종교개혁에 관계한 각지의 교회가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루터파교회는 우선 루터가 대학의 신학교수로 있던 비텐베르크와 그 주변, 작센선제후령(選帝候領)으로부터 중부·북부 독일, 북유럽각국으로 퍼졌으며, 당시 각 지역에서 국교회 또는 이에 준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의 화의(和議)에 의해서 마침내 제국법상(帝國法上)으로도 존재를 공인받아 그 후 서구 그리스도교의 큰 주류의 하나가 되었다. 교리중심의 정통주의 시대 또는 경전주의에서 근대로 거쳐왔는데, 그 동안 미국에서도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을 중심으로 루터파교회가 성립하였고, 18세기 이후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각지에 전도되었다.


세계연맹


세계 각지의 루터파교회의 75%가 1947년 <루터세계연맹>을 결성하여 본부를 제네바에 두고 있다. 현재 가입한 신도수는 전체의 약 93%이다. 에큐메니컬운동에도 적극적이며, 최근에는 로마가톨릭과의 대화와 협력에도 획기적인 전개를 보이고 있다. 현재 한국의 루터파교회수는 24개 교회, 신도수는 약 7000명(1993)이다.


교리
신앙과 교리와 신앙생활의 원천으로서<성서만>을 주장하며 신앙고백을 중시하고 있다. 성서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죄인에 대한 용서와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은혜와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에 있다고 하고, 이 믿음에서 신도들이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책임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강조하고 있다. 루터의 이 <직업소명관>은 근대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교리는 <소교리문답>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잘 밝혀져 있다.

 

칼뱅파교회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에서 루터파에 대하여 칼뱅파(캘빈파)교회를 가리키는 호칭.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敎會)의 총칭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에서 루터파에 대하여 칼뱅파(캘빈파)교회를 가리키는 호칭.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敎會)의 총칭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스위스와 남부독일의 여러 도시는 루터주의와 좀 성격을 달리하는 종교개혁을 하였는데, 이것이 개혁파의 원류(源流)이다. 이 개혁파는 뒤이어 J. 칼뱅과 J.H. 불링거에 의해서 주로 제네바를 거점으로 하여 통합되었고, 1550년대에 프랑스·스코틀랜드·네덜란드·독일·폴란드 남부·헝가리에 침투하였다. 12세기초 P. 왈도의 사상을 이어받은 북부 이탈리아의 왈도파는 1532년부터 개혁파의 한 파에 가입하였다. 정식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개혁된 교회>이나 <개혁된 교회>라고 줄여 개혁파 교회라고 말한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J. 녹스)에 기원을 두는 교회는 <장로파 교회>라고 불리지만, 신앙내용과 교회제도는 개혁파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장로와 목사의 회의가 지도권을 가지므로 한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는다. 초기의 지도자가 모두 인문주의자(人文主義者)이고, 또한 이 파의 지반(地盤)이 모두 서구였기 때문에, 서구의 지적(知的) 합리주의와 대결·절충을 거듭하여 서구적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 특색으로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주권(主權)을 강조하고, 교리, 교회의 질서와 규율, 국가에 대한 교회의 자립을 중요시한다. 따라서 교회의 자립의 침해에 대해서는 맞서는 경향이 있다. 신학을 대표하는 것은 칼뱅의 《그리스도교 강요(綱要)》이며, K. 발트의 위치도 근래에 와서 비중이 커졌다. 루터파와는 16세기 이래 <성찬론(聖餐論)>과 그 밖의 것을 둘러싸고 논쟁과 대화를 계속했지만 기풍은 크게 다르다. 1877년 <개혁파 세계연맹>을 조직하고, 1970년에는 회중파(會衆派, 또는 組合派) 세계연맹을 병합하였다. 산하의 교회인구는 4900만명에 달하며, 한국에는 100만명 정도의 신도가 있다.

 

아르미니우스派敎會 The Arminian


반(反)칼뱅주의 프로테스탄트 일파. 네덜란드의 개혁파 신학자인 J.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적 견해에 따라 그가 죽은 뒤, 도르트레히트회의(1618∼19)에 <레몬스트란티아(이의신청)>라는 문서를 제출하여 이후 레몬스트런스파라고도 하게 된 집단 및 신학적 입장을 같이 하는 여러 교파를 통틀어 이른다. 신이 처음부터 인간을 구제할 것인가 멸망시킬 것인가를 선택하고 있다는 엄격한 예정설에 반대하고, 신은 인간에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제 또는 멸망을 선택한다는 예정설을 주장하였으나 도르트레히트회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18세기 J. 웨슬리에서 비롯된 감리교회, 홀리니스교회, 구세군 등이 있다. 신의 은총과 그리스드 속죄 행위의 보편성, 신의 선행하는 은총 밑에서 인간의 자유나 책임 등을 강조한다. 영국에서 북아메리카로 퍼졌고 거기에서 세계전도에 의해 각지로 퍼져 전도·교육·봉사의 여러 활동을 전세계에서 실시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감리교파, 영국에서는 웨슬리파라고 한다.

 
감리교 (監理敎 Methodism)


프로테스탄트 교파(敎派)의 하나. 창립자는 영국의 J. 웨슬리이다. 영국교회 사제(司祭)로서 모교인 옥스퍼드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동생 찰스 등과 함께 <성서에 나타나 있는 방법(method)에 따라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한 종교클럽에 속했기 때문에 메소디스트라 불리게 되었다. 웨슬리는 1735년부터 2년간 식민지시대의 미국 조지아에 전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귀국했다. 좌절감에 빠져 있던 어느날 회심경험(回心經驗)을 하고부터는 열심히 길거리나 야외에서 설교하고 각지로 전도여행에 나섰다. 이 설교운동이 영국교회로부터 분리하여 독립한 감리교회로 된 것은 웨슬리가 죽은 뒤였으나 그것은 그가 1784년에 미국에 파견한 선교사들, 특히 F. 아스베리의 전도가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개척자들이 점차 서부로 이동함에 따라 감리교 순회설교자는 말을 타고 개척지에 전도하여 개척자의 종교로서 서부로 퍼져 갔다. 칼뱅주의와 달리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은, 자력으로 개척하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금욕주의와 결부된 근면한 윤리적 생활을 추진하는 힘이 되어 급속히 교회 신도수가 증가해 갔다. 남북전쟁 때 교회도 남북으로 분열되었으나, 1939년에 교세가 확장하였다. 감리교의 발전은 교구제도와 경건한 신앙을 고수하는 데 있었다. 1791년 웨슬리가 사망했을 때의 교세는 영국 전역(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에 확장하였고, 미국에서는 G. 휘필드의 주도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감리교의 교리는 사도신경 속에 제시된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에 근거하고 있으며, 교리보다도 실제적인 생활과 성경의 진리를 실천하는 데 중점을 둔 조직의 기본단위는 구역이며,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교회로 조직된다. 각 구역은 지역적으로 지방회를 조직, 교회조직과 사업발전에 힘을 기울이고, 지방회는 다시 더 큰 집단을 형성하여 연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최고기관인 총회가 있다.


한국의 감리교


한국의 감리교는 가장 오래 된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하나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한국 기독교 2대교파(장로교·감리교)의 하나이다. 1884년 6월에, 미국 감리교의 선교사 R.S. 매클레이가 서울에 와서 1884년 7월 3일 고종으로부터 선교 개시의 허가를 받고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통해 선교를 시작하였다. 현재의 한국 감리교는 4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와, 총회 밑에 5개 연회(서울·중부·동부·남부·삼남)가 있고 연회 밑에 100여 개 지방회가 있는데 평균 한 지방회에 30여 개의 교회가 소속되어 있다(1983). 1984년 선교 1세기를 맞아 북한선교와 동양선교를 위한 도약적인 태세확립과 선교방법 개발에 힘쓰는 한편 교권 싸움을 지양하여 현대 실정에 맞는 선교신학을 확립하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고교회 (高敎會 High Church)


중세교회와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교회의 권위와 역사적 주교제(主敎制)·의식을 중시하는 교회.

고교회 (高敎會)를 지지하는 영국교회 중의 한 파를 고교회파(高敎會派)라고 한다.
중세교회와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교회의 권위와 역사적 주교제(主敎制)·의식을 중시하는 교회. 고교회 (高敎會)를 지지하는 영국교회 중의 한 파를 고교회파(高敎會派)라고 한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독일이나 스위스의 종교개혁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으나 신학적으로는 초기의 M. 루터와 그 뒤를 이은 U. 츠빙글리·J. 칼뱅등 대륙 종교개혁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교의적(敎義的) 입장을 확립했다. 국교회(國敎會)로서 확립된 엘리자베스왕조 때는 대륙의 신학자, 특히 칼뱅의 <교회론(敎會論)> <직제론(職制論)>이 지배적이었으나, 16세기 말에는 R. 반크로프트·R. 후커 등이 영국 국교회를 보편적(가톨릭) 교회의 한 파로서 위치를 굳히는 사도계승(使徒繼承)에 기초한 주교제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 후 고교회는 앵글리칸교회 안의 일대세력으로서 지속되면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공헌을 부정하고 예배·신앙생활면에서 가톨릭적 관행(慣行)을 대폭적으로 부활시켰기 때문에 저교회파(低敎會派)의 세찬 비난을 받았다.

 

광교회파 (廣敎會派 Broad Church)


영국 국교회에 있어서 고교회파(高敎會派)와 저교회파(低敎會派)의 중간에 있는 한 파. 옥스퍼드운동으로 격화된 영국 국교회의 고교회파와 저교회파의 항쟁을 혐오하여 쌍방의 처지를 물리치고 <39개조의 신앙고백>을 포함하는 교회의 교리적 입장을 넓은 의미로, 또는 자유롭게 해석하기를 제창한 T.
영국 국교회에 있어서 고교회파(高敎會派)와 저교회파(低敎會派)의 중간에 있는 한 파. 옥스퍼드운동으로 격화된 영국 국교회의 고교회파와 저교회파의 항쟁을 혐오하여 쌍방의 처지를 물리치고 <39개조의 신앙고백>을 포함하는 교회의 교리적 입장을 넓은 의미로, 또는 자유롭게 해석하기를 제창한 T. 아놀드 및 R.D. 햄프던 등의 입장을 일컫는다. 그 주장은 《소론과 평론(1860)》으로 발표되었는데, 오늘날에는 한낱 상식적이라고 판단될 수 있는 견해가 10년 넘게 대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모리스나 킹즐리도 이 파로 꼽을 수 있다.

 

구세군 (救世軍 Salvation Army)


대중전도·빈민구제·사회사업에 중점을 두는 그리스도교의 한 파. 1865년 7월 2일 영국 런던의 감리교 목사 G.
대중전도·빈민구제·사회사업에 중점을 두는 그리스도교의 한 파. 1865년 7월 2일 영국 런던의 감리교 목사 G.W. 부스와 그의 부인 C. 부스가 창립하였다. 감리교 신파에 속해 있던 부스는 지방교회를 크게 발전시켰으나, 전국적 순회 부흥운동을 염원한 그의 욕망이 1861년 연회(年會)에서 부결되자 감리교를 떠나 자유전도에 나섰다. <그리스도교 전도회>라는 이름으로 1865년 이후 런던의 빈민굴에서 구제사업을 주로 하는 전도를 시작하였다. 1878년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교 전도회>를 <구세군>으로 개칭했고, 군대조직을 취하고 부스 자신이 사령관이 되었다. 그 후 크게 성공하여 1880년에는 유럽·미국·오스트레일리아·인도·아프리카·남아메리카 등지에 퍼졌으며, 19세기 말엽에는 극동 여러 나라에 전파되었다. 한국에는 1908년 영국의 R. 호가트 정령(正領)의 전도로 성립되었다. 구세군은 민중사회를 목적으로 하며, 신학사상(神學思想)에 중점을 두지 않고 교회적 신앙을 중시하며, 특히 구원의 가르침을 중시한다. 따라서 회심(回心), 더욱이 급격한 회심의 경험을 소중히 여긴다. 훈련은 엄격하고 통솔자에게 절대복종을 요구하며, 구세군의 목적을 위하여 극기(克己)·헌신의 덕을 가르치고 모든 향락적 생활을 금한다. 군의 사업자금은 각 본영·지부에서 받는 기부금 외에 모금으로 충당한다. 특히 가두로 진출하는 사회자선냄비 등이 유명하다. 사업으로서는 출옥자 보호·부인운동·의료시설·무료숙박소·금주운동·소년과 실업자의 보호 및 구제 그리고 공창제 폐지 등 다방면에 걸친다. 이 밖에 각종 출판사업, 구세군사관학교 운영으로 다양한 종교·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구세군의 세계본영은 현재 런던에 있으며 군국본영(軍國本營)은 각 나라마다 설치되어 있다. 조직으로는 국제본부, 최고이사회 및 자문이사회가 있으며, 각국에는 총사령관에게 책임을 지는 지역사령관이 있다. 전체의 통솔자는 대장, 각군 지도자는 사령관, 교회는 소대, 교구는 연대라고 하여 군대와 같은 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군기(軍旗)·제복·계급제도가 있다. 1998년 6월 현재 회원국은 106개국이다.

 

그리스정교회 (-正敎會 Greek Orthodox Church)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를 수장(首長)으로 하여 정통적인 그리스도교회임을 자처하는 여러 교회의 일단.

그리스도교는 대체로 가톨릭교회·그리스정교회·프로테스탄트교회로 나뉜다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를 수장(首長)으로 하여 정통적인 그리스도교회임을 자처하는 여러 교회의 일단. 그리스도교는 대체로 가톨릭교회·그리스정교회·프로테스탄트교회로 나뉜다. 그리스정교회는 동방교회(東方敎會;Ecclesia Orientali)라고도 하며, 처음에는 로마교황을 수장으로 했으나, 지나친 국가주의·민족주의 등의 원인으로 교리의 차이가 생겨 로마교회에서 분리되었다. 이것을 동방이교교회(東方離敎敎會)라 한다. 이에 대해 현재도 로마교회에 충실한 교회를 동방교회 또는 동방귀일교회(東方歸一敎會)라 한다. 그리스정교회는 전자를 말하며, 신도수는 약 1억 5000만이다. 그리스정교회가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된 것은 로마제국의 동서분열의 결과로서 정치적 이유에 의해서였다. 즉 서로마에서는 교황과 황제가 대립하고 있었으나 동로마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협력하고 있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과는 점차로 멀어져 갔다. 11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로마교회의 의식과 교리를 크게 비난하여 당시의 교황 레오 9세는 화해의 사절을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교황사절은 그곳의 소피아대성당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를 파문했다. 그로써 분열이 확정되었고, 그 뒤 오늘날까지 여러 번 서로 화해를 시도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가톨릭교회와 그리스정교회의 차이는 교회관(敎會觀)의 차이에 있다. 즉 가톨릭에서 교회를 불가견적(不可見的) 신비체인 동시에 교황을 수장(首長)으로 하는 가견적(可見的) 통일체라고 하는 데 대해 그리스정교회는 사랑과 은총에 의한 불가견적 통일체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로마교황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회의 수장이며 신앙 개조(箇條)의 결정과 신앙 도덕에 관한 최고의 결정자라고 하는 교황 수위권(首位權)에 반대하고 있다.

 

대한성공회 (大韓聖公會 The Anglican Church in Korea)


기독교의 한 교파. 16세기 종교개혁 때 분리된 영국성공회의 한국교구로,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 E.
기독교의 한 교파. 16세기 종교개혁 때 분리된 영국성공회의 한국교구로,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 E.W. 벤슨이 선교를 위하여 영국 해군 군종 신부인 주교 고(高)요한(C.J. Corfe)을 보내어 1889년 9월 29일 설립되었다. 주교 요한은 91년 3월 서울 충무로에 선교본부인 <부활의 집>을, 또 5월에는 낙동성당을 축성하였고 인천교회의 건립과 함께 93년에는 강화도 선교를 개시하였다. 초대선교사들은 성공회의 토착화를 위하여 한국문화 및 종교연구, 사회복지활동·의료활동 등을 하였다. 1950년대 이후의 선교는 산업선교·학원선교·한국교회주체성확립 등에 역점을 두었다. 65년 5월 27일에는 신부 이천환(李天煥)이 첫 한국인 주교로 서울교구장에 취임하였다. 현재 대한성공회는 서울·대전·부산의 3교구가 전국의회로 통합되었는데, 전국의회는 2년마다 열리는 최고의결기구로서 선교·교육·예전·대외관계 등 기본적인 선교정책을 행하고 있다. 또한 지역적 특성에 따라 개방된 교회체제로서 민주적인 교회조직을 이루게 되었다. 출판부·신학원·수도단체·정신박약아특수학교·양로시설 등이 있다. 또한 성공회신학대학·성베드로학교를 설립·운영하고 있다.

 

대한예수교敎長老會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한 교파. 장로교는 16세기 스위스계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설립되어 영국에서 발전한 교파로, 한국 개신교 교파 중 가장 교세가 큰 교파이다.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한 교파. 장로교는 16세기 스위스계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설립되어 영국에서 발전한 교파로, 한국 개신교 교파중 가장 교세가 큰 교파이다.


연혁 성립


한국의 장로교회는 실질상 1876년 만주에서 이응찬(李應贊)이 세례를 받고 성서번역에 착수함으로써 그 초석이 놓여졌다. 그러나 선교역사는 84년 9월 미국 북장로교의 의료선교사 H.N. 알렌(1858∼1932)이 인천에 도착한 날로부터 시작되며, 한국 장로교회의 공식적인 기점은 85년 4월 H.G. 언더우드(1859∼1916)가 한국에 도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후 계속하여 마포삼열·이눌서·데이비스 등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였고, 황해도에서는 84년 이미 한국인 중심의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으며, 93년에는 남북장로회 선교회가 합하여 선교공의회를 조직하고 한국 장로교회의 조직체제를 갖추었다. 1901년에는 선교사들만의 공의회가 한국인 대표를 합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를 조직, 한국인과 선교사의 협의체제를 형성하였고,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치하였다. 1907년 9월 17일 예수교장로회 조선노회(朝鮮老會)가 평양에서 조직되었고, 신학교에서는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하여 목사안수가 있었다. 졸업생들은 제주도·블라디보스토크 등의 선교사로 파송돼 한국인에게 전도사업을 벌였다. 12년 9월 1일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가 평양(平壤)에서 조직되어 명실 공히 대한예수교장로회 시대가 출항하게 되었다.


수난


한국 장로교회는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면서 수난기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좌절과 허탈에 사로잡힌 한국민족에게 복음은 더 절실한 요청으로 부각돼 오히려 이때부터 장로교회는 예상 밖의 성장을 계속했다. 22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이 제정 공포되어 완전히 신앙 노선과 조직체계·교권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38년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한국 교회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은 구체화되어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계기로 더욱 심해졌다. 장로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거부하는 태도를 취해 조선총독부로부터 국가의식이라는 명목으로 신사참배를 강요당해 왔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이를 끝까지 거부하고 나섰으므로 조선총독부는 총회간부를 무력으로 협박 및 매수하여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불법으로 가결시켰다. 그러나 숭실대학·숭실중학 등의 예수교장로회 산하 학교에서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폐교조처를 당했고, 주기철(朱基徹) 목사 등 많은 성직자·신도들이 이 문제로 순교·피검 등을 당하였다.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해져 42년 조선예수교장로회는 해체되고 <조선장로교단>이라는 명칭으로 일본교단에 소속되고 말았다.


분열


광복과 함께 한국교회는 원상태로 복귀하여 1946년 남한의 모든 노회가 재조직되어 6월 12일 서울에서 총회가 열렸다. 그러나 여기에 북한노회는 참석할 수가 없어, 이북은 5도 연합노회가 잠정적으로 합하여 교회를 수습키로 하였다. 47년 남북총회가 대구(大邱)에서 열려 남북총회를 정식 장로회총회로 인정, 이 총회를 제33회 총회로 하였다. 한편, 장로회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전향의 문제, 신앙 보수의 문제가 엇갈려 51년 고려파 장로회와 예수교장로회로 갈라졌고, 뒤이어 신학방법론의 문제로 54년 근대주의와 에큐메니즘을 표방하는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장로회의 분립이 있었다. 그 후에 다시 59년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WCC)가 용공적(容共的)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분열이 생겨 제44회 총회에서 WCC 노선을 반대하는 합동파(合同派)가 60년 12월 13일 합동총회를 새로 조직하였다. WCC노선을 지지하는 통합파(統合派) 역시 60년 12월 17일 새문안교회에서 통합총회를 새로 조직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78년부터 여러 장로회의 재일치를 위한 접근이 강력히 추진되고 있으며, 83년 미국 연합장로교와 남장로교의 일치에 자극을 받아 계속하여 통합파·합동파는 각각 합동원칙을 마련하고 여러 차례의 접촉과 대화·절충을 시도하고 있다.


교리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기초한 12조항을 교리적 표준으로 삼고 있다.

즉 사도신경, 웨스트민스터신도개요서, 성경 대소 교리문답 등을 표준으로 삼고 믿는다. 12조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신구약성서를 정확무오(正確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② 하나님의 유일성과 무소부재(無所不在) 및 전지전능을 믿는다.
③ 삼위일체의 교리를 믿는다.
④ 하나님의 창조섭리와 거룩하신 뜻을 믿는다.
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인류를 지으시고 주관하심을 믿는다.
⑥ 모든 인간은 금세와 내세에 있어서 그 행한 대로 하나님의 공평한 진노와 형벌을 받음이 마땅하다.

⑦ 하나님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통하여 인류구원을 이루신다.

    그는 성령(聖靈)의 권능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죄가 없는 분이다.

    그러나 자기 몸으로 화목제물로 삼으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사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셔서 그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시며,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재림하신다.
⑧ 성령은 사람에게 죄를 깨닫게 하사 그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다.
⑨ 하느님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녀로 삼으셨다.
⑩ 그리스도가 세운 세례와 성찬의 성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합하는 표정으로 삼는다. 이 성례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지속하며 교우와 더불어 교통하는 표이다.
⑪ 신자의 본분은 입교하여 서로 교제하고 그리스도의 성례와 기타 법례를 지키며 주의 법을 복종하며 항상 기도하며 주일(主日)을 거룩하게 지킨다.
⑫ 최후의 심판을 믿는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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