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u'lo"(둘로스)


노예, slave

 

1. 고전헬라어 문헌의 용법.

 

둘로스는 데오(devw: 묶다)에서, 아니면 델로(delw:올가미에 걸다, 생포하다)에서 유래했으며(참조: Vanicek p.322), '노예, '을 의미한다. 둘로스에는 자기 자신이 자율을 파기하고 다른 사람의 뜻에 자기의 뜻을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둘로스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의지에 내맡긴 자로서, 자기 자신에 속해 있지 아니하고 어떤 다른 사람에 속해 있는 것이다. 대체로 노예의 삶은 집안일이나 공무에서 노동과 봉사가 강요되는 삶이었다.

 

헬라인들은 자유에 대한 의식이 강하다. 개인의 존엄이 자유로 되어 있다. 따라서 속박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 국가에 봉사할 수 있지만,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다. 노예 상태는 경멸 받고 거부당한다. 이것은 왜 헬라인들이 정치적인 독립을 얻기 위해 그토록 격렬하게 싸웠는지를 설명해 준다.

 

플라톤에 의하면 자유라는 이상은 궤변가들의 제멋대로의 결정에 반작용하는 것이라고 규정되었다: 그는 자주 도시 국가의 유지를 보증하기 위해서 노모스(율법)를 제창하였다. 둘류에인 토이스 노모이스("법에 복종하다")라는 구절에서만 둘로스 어군은 호의적이고도 명예로운 의미로 나타난다. 법은 인류의 목적을 나타내므로 법에 예속한다는 것은 결코 인격을 손상시키는 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예 상태에 대해 마찬가지로 경멸하였다. 그에게 있어 노예는 국가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거나 국가에 참된 봉사를 하지 못한다.

스토아 학파는 봉사에 대해 광범위한 견해를 가진다. 스토아 학파의 현자는 공동체를 섬기는 모든 의미가 면제되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이웃을 섬기는 자유로운 종이 되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대해 자유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매여있다. 그렇지만 스토아 학파는 결코 자신을 둘로스 데우(하나님의 종)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는 둘로스의 정반대인 바실류스() 및 데스포테스(노예의 주인)로서 세상을 살아간다. 이것은 현자의 특징이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속박의 형태가 무엇이든지 간에 노예들이다(참조: 에픽테투스, 플루타르크, 그리고 필로).

 

헬라 종교에서 신들과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제우스(Zeus)를 신과 인간의 아버지로 삼는 가족적 관계이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무릎 꿇는 것은 지하에 사는 신들 앞에서 무릎 꿇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종교적인 의식의 여하한 역할도 하지 못하며 여기에서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만 그렇게 한다. 예배자들은 둘로스라기 보다는 오히려 필로스(친구)이다. 따라서 신들을 섬기는 것이나 신들 앞에서의 삶을 둘레이아(douleiva, : 노예 상태)로 묘사한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신들에 대한 예배의 목적도 사실 모든 내적이고도 외적인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 이 둘로스 어군이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종교적 의미를 얻은 것은 근동의 종교들이 새로운 신봉자들을 얻고, 그래서 하나님 및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헬라인의 견해가 변화됨으로 인한 것이다. 유일하게 분명한 예외들은 유리피데스(Euripides)의 작품에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디오니소스 (Dionysus)에게 복종할 필요성, 혹은 오레스테스(Orestes)가 신들의 노예가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는 것과 같은 특별한 경우들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70인역본에서 둘로스 어군은 대부분 어근 아바드와 그 파생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이 관계를 통해서 둘로스는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a) 둘로스 어군은 노예와 노예 상태를 강조적으로 의미한다. 이 단어는 노예의 일인 섬김, 곧 윗 사람의 철저한 통제 아래에서 억압적이고 강제적이거나 혹은 적어도 예속적인 모습을 띤 섬김의 자세를 강조한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종살이(13:3; 14:5; 26:13 )를 나타낸다. 야곱은 라반에 대한둘로스의 상태를 수락한다(29:18).

노예법에는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인 노예의 처우와 석방 문제가 규정되어 있다. 그 종의 주인만이 이 일에 대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 속해 있는 자는 이를 거역할 수 없었다(21:1-11; 25:35 이하; 15:12 이하). 다른 한편 유대인이 아닌 가나안인 노예는(25:44 이하) 주인의 나머지 가재 도구와 같은 가치를 지녔고 또한 그렇게 대우를 받았다.

 

(b) 둘로스 어군은 왕에 대한 신하의 관계 및 제한적인 섬김을 의미한다. 이 어군은 세력에 의해서, 때때로 자발적으로 의존하고 섬기지만 항상 종속과 구속을 겪는 관계를 나타낸다. 왕은 항상 그의 신하들의 절대적 통치자이며, 그들은 그 아래서 노예와 같은 것이다. 사울의 신하들은 그의 종들이다(삼상18 :5). 요압은 다윗의 둘로스이며 (삼하14:9 -10), 전 백성은 왕의 종이다(왕상12:7). 흥미로운 점은 예속된 자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이 용어들을 사용하는데 반해, 통치자들은 이 어군으로 그 관계를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c) 이 어군은 하나님에 대한 종속과 섬김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 어군이 이 관계에 대해 사용될 때, 발전의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또한 헬라 및 헬레니즘 개념과 가장 날카롭게 대립된다. 70인역본에서 종은 개별적인 행동에서 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위임 임무에서 하나님에 대한 봉사를 뜻하는 가장 일반적인 용어이다. 이 단어는 또한 바알이나 다른 신들에 대한 봉사에 대해서도 사용되었지만(10:6), 선민들에게 있어서 옳은 유일한 것은 오로지 여호와만을 섬기는 것이다(10:16; 2:11 ). 이런 이유로 종들이 모세(14:7), 여호수아(2:8), 아브라함(105:42), 다윗(89:3), 그리고 야곱(이스라엘을 대표함,48:20)과 같은 유명한 인물들에게 사용될 때, 명예의 칭호로 사용되었다. 둘류에인(예속하는 것)의 반대는 불순종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둘로스는 신약성경에서 124회 나오며, 그 중에 30회는 바울 서신에, 30회는 마태복음에, 그리고 26회는 누가복음에 나온다.

 

(a) 일반적인 용법.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군의 일반적 용법에 대해 단지 조건부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 단어가 종교적 문맥에서 나타나는 구절들을 제외하면, 비유와 비교, 특히 예수님의 비유에서 사용된다. 문자적 용법은 대부분 서신들에서만 발견되는데,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주인에 대한 그리스도인 종들의 태도에 대한 언급(3:22 이하 등)이나 종들에 대한 그리스도인 주인들의 태도(4:1; 6:8 이하)나 공동체 안에서 종들의 지위에 대한 언급에서 나타난다.

 

여기에서 이 용법은 전적으로 당시의 사회적 틀 안에서 사용되었다. 여기서 또한 이 단어군은 한편에서의 둘로스()의 전적인 헌신이 퀴리오스(주인)의 전적인 주장에 부합하는 절대적인 의존 관계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이 절대적 의존 관계는 퀴리오스의 단순한 존재에 완전히 근거하며, 이 법적 근거를 넘어 어떤 특별한 종교적 혹은 도덕적 정당성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8:9; 7:2 이하). 예수님의 비유는 이 주인과 종의 컴플렉스(complex)에 관하여 극도로 억제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 곧 신자들의 책임의 무조건적임을 강조하려 할 때 둘로이(복수)를 언급한다(24:45 이하; 12:37 이하).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그의 인간과 관계에서 그가 만족시켜야 하는 어떤 전제 조건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를 원할 때 둘로이를 언급한다(18:23 이하; 25:14 이하; 병행구 눅 17:7 이하). 따라서 이 용어와 개념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일의 상태를 묘사하고, 형벌을 자초하지 않으려면 받아야만 하는 결과를 묘사한다.

 

신약성경의 기록에 어디를 살펴보아도 주인과 종, 자유와 속박으로 구분하는 사회적인 구분에 반대하는 내용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자주 노예들은 책임과 지휘권의 자리에 임명되곤 하였다(24:45). 그러나 노예는 그의 주인에게 오로지 순종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8:9). 노예는 일을 해서 이익을 얻게 되거나 답례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그가 종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17:7-10). 주인은 노예가 어떤 잘못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노예에게 무한한 힘을 행사하여 그를 너그럽게 봐주거나(18:27) 가혹한 처벌을 하기도 하였다(18:34; 25:30). 반복하여 종들은 모든 일에서 그들의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심지어 무자비한 주인에게도 복종해야 한다(벧전 2:18).

 

퀴리오스의 뜻과 위임(commission)과 나란히 우리 자신의 뜻이나 주도권(독자권)이 설 여지가 없다. 퀴리오스에 대한 관계의 배타성도 확증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6:24; 16:13).

 

6:24과 눅 16:13은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 때 두 주인은 그 종을 동일하게 소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있을 수 있었으며 실제 있었다. 사실로, 한 주인에게서는 자유하였으나 다른 주인에게서는 그렇지 못하여 반은 자유인이고 반은 노예 상태인 종들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관계에서 한 종이 두 주인에게 똑같은 헌신을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주인들이 원하는 바와 관심사가 매우 폭넓게 변할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예수님은 이것을 예수님 당시의 언어와 그의 백성의 언어로 표현하셨다. 즉 종이 한 주인을 사랑하고 다른 주인을 미워할, 다시 말하면 덜 충성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한 주인 혹은 다른 주인에 대한 배타적 봉사라는 의미에서 종됨의 파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재물과의 관계를 끊지 않은 채 하나님의 둘로스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시도는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배타적인봉사와 의무라는 의미에서 둘레이아(douleiva,: 종살이)를 행하는 것에 힘을 집중시키지 않고서 둘류에인이 암시하는 바를 행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진 사람을 공격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둘로스에 대한 묘사는 고전적인 것이긴 하지만 멸시하고 경멸하는 식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이 점에 있어서 신약성경은 헬라 세계와 구별될 뿐만 아니라 유대교와도 차이가 있다. 노예에 대한 재판은 항상 물질적이며, 그 재판이 엄격할 때도 그렇다(18:32; 25:26; 25:30; 19:22). 둘로스는 단지 노예라는 이유로 결코 멸시 당하거나 거부 당하지않는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에게 노예는 헬라 세계에서와 같이 보다 낮은 차원의 인간에 속했다. 법률로써 (가나안 족속)노예들은 부동산으로 분류되었으며, 법적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다. 심지어 가족까지도 자기에게 속하지 않았다.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었으며, 주인은 결혼시 마음에 드는 노예를 선물로 줄 수 있었다. 이것은 제의적 영역에서 노예는 제한된 범위에서만 제의적 의무를 지녔음을 의미했다. 이 점에서 노예는 아내와 같았다. 노예의 제의적 복종은 따라서 강력히 강조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노예는 윤리적으로 열등하였으며 제한적 정도까지만 법률에 예속했다. 그들은 자연히 자손을 가지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들의 태생을 제어할 가능성이 없었다.

 

노예에 대한 대우는 이러한 평가(estimation)에 상응한다. 노예는 가재(家財)였으므로 주인은 원하는대로 노예를 다룰 수 있었다. 아무도 그 주인을 저지할 수 없었다. 심지어 주인이 노예의 신체를 훼손했을 때도 오직 증언할 목격자가 있을 경우에 법의 요구에 따라 해방시키는 것으로 그만이었다(21:26 이하). 랍비의 비유담에서도 종들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중요한 문제이다. 때때로 성난 주인이 식탁에서 시중드는 종에게 잔을 내던지거나 종의 따귀를 갈기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종이 최선을 다하더라도 주인이 의도하는 바대로 정확한 의미에서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랍비에서 "노예, "이라는 말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최악의 모욕 중에 하나이다. 이웃을 종이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파문 당할 수도 있었다. 종과 주인과의 특별히 좋은 관계를 보여주는 몇몇 언급이 있다면(Ber., 2, 7), 이것들은 단순히 법률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어두운 모습을 확실히 해줄 뿐이다.

 

종들이 기독교 공동체 속으로 (차별없이) 통합된 방식은 예수님과신약성경이 노예에 대해 생각하고 언급한 태도와 일치한다. 노예 신분이 기독교 입장에서 거부되지 않는다면 이것을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노예가 자유의 기회를 얻었을 때 최종적 분석에서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차이가 없음을 인정할지라도(고전 7:21) 그는 기쁘게 그 자유를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종들은 모든 신자들과 함께 공동체의 생활을 형성하는 법에 능동적,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이 법은 사랑의 법으로서, 공동체의 모든 성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관계에 서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차원에서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 법은 일단 적용되면 결국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노예제도의 폐지 및 종말을 가져온다. 만일 노예 제도를 폐지하려는 운동이 없다면, 다시 말하면 노예 신분이라는 사회적 현실 안에서 신약성경이 보여준 관심의 상대적 결여는 근본적으로 초기 기독교 삶의 내세관이나 종말론적 긴장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죄와 마찬가지로 구속도 기존의 사회 구조 안에서 일어나므로, 최우선 순위는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에 일치할 수 있는 삶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런 삶은 적당한 때에 기존 사회 구조를 전복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교제는 사회적인 구별을 상대화하기 때문이다. 좀 더 설명을 한다면 예수님의 구속 행위는 지위와 태생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똑같이 예수님의 구속 행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은 개개인에게 있어서 그가 처하여 살아가는 실재적인 관계 내에서만이 중요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가 오로지 신약성경에서 하마르티아()라고 하는 것을 범하는 이 실재적인 관계 내에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죄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실재적인 불순종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선포의 목적은 예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개인의 상태의 통제(control)이며, 개개인 자신의 시간과 장소에서 이 행위에 일치하는 태도와 행위를 낳는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한 노예의 우선 목적은 자유의 획득이 아니다. 노예로서 그는 예수님께서 위하여 죽으신 모든 사람들 같이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다(고후 5:15; 4:17 이하 등).

 

그렇지만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다른 사회적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관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관계와 함께, 각각의 개개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은사와 임무에 종속되어 있다면 주인과 종과의 차이는 양자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함께 참여함으로 생기는 교제와 비교할 때 단지 상대적 의미만을 지닐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한편으로는 가정 생활에서 취한 개념의 견지에서 주인/ 종 관계를 정리하고(아델포스, 1:16),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주인과 종의 관계에 우선함으로 후자 곧 주인과 종의 관계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일부분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6:5 이하; 3:22 이하; 4:1; 딤전 6:1; 2:9; 벧전 2:18 이하).

 

우리는 또 왜 신약성경이 상대방이 그리스도인이 아닐 때에도 똑같은 규칙을 적용하는지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의무는 인간의 책무들과 상관없이 적용되어서, 이러한 모든 책무를 그대로 채택하여 그 책무들을 신적인 통치로 처리하고 적합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왜 자유를 결코 요구하지는 않으나 자유가 허용될 때는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외적인 자유도 가치있다. 그러나 그 자유의 가치는 그리스도와 교제가 가져다 주는 것과 비교할 때, 또 자아와 삶을 해치는 모든 조건들로부터의 자유와 비교할 때, 하나님과 그의 뜻을 위한 자유-이 자유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선물이다-와 비교할 때 단지 상대적이다(참조: 고전 7:22).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믿음의 자유는 피상적으로는 스토아 철학자가 외적 환경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것과 유사하지만 세가지 점에서 그것과 다르다. 믿음의 자유는 (1) 우월감이 없다. (2) 이것은 노예와 주인을 형제가 되게 만드는 어떤 행동에 근거한다. 그리고 (3) 이 행동은 양자 모두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부활이다.

 

(b)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둘로이(종들)로서의 기독교인들.

둘로스 데우라는 관용구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적게 사용되며, 토 데오 둘류오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의 둘류오(douleuvw)에 대한 대부분의 언급은 신약성경 기독론이라는 견고한 기초 위에서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언급된다. 둘로스 데우라는표현은 거의 항상 하나님과 관련하여 구약성경의 의인에 대한 용법과 결합하여, 혹은 인용문에서 나온다. 둘레(douvlh,)도 마찬가지다 (참조: 1:38; 1:48; 2:18).

 

특별히 계 1:1; 2:20; 7:3; 10:7; 19:2; 19:5; 22:3; 22:6에서 항상 그렇게 사용되었다. 15:3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종(둘로이 투 테온)이란 칭호를 받았으며, 10:7(참조: 4:29)에서도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종들(둘로이 투 테온)이라고 부른 것이다. 16:17에서도 동일한 용법이 사용되었는데,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을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종"이라고 불렀다. 벧전 2:16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여기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1:1과 딛 1:1에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묘사는 특별한 주목을 요하며, 어쨌든 보통 유대인의 용법 이상 나아간다. 여기서 그 문구가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종이라는 칭호를 의식적으로 채용하여 직함으로 전용한 것인지 혹은 하나님께 절대적인 의탁에 대한 개인적 고백인지 결정하기 어렵다.

 

초기 교회에서 이 문구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점차 사용되어 새로운 생명을 획득한다(참조: 2Cl., 20, 1; Herm. m., 5, 2, 1; 6, 2, 4; 8, 10 ).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이 과정을 가속시켰다. 첫째는 그리스도교가 참 이스라엘이라는 사상의 일반적 용인이었고, 둘째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둘로스라기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예수님과의 어떤 있을 법한 경쟁을 일축해 버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 곧바로 기여한 또 하나의 사실은 이 전체적인발전과 함께 공로의 사상이 둘로스 데우 어구와 결합하여 또 다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진지하게 시도한 사람들에게만이 이 호칭이 적용될 수 있었고 그들만이 이 호칭을 주장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문구가 신중하게 취해질 때,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된 혹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닌 자기 헌신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인 것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둘로이(종들)이고, 따라서 그들의 생명이 부활하여 승귀하신 주님께 바쳐진다는 사상이다. 특별히 바울은 이런 사상을 대표한다.

모든 곳에서 인간들은 신자가 되기 전에 둘로이였다고 가정한다. 이 가정은 둘레이아(douleiva: 종살이)가 다른 사람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암시한다는 통찰에 기초한다. 이 경우에 자발적이든 강요이든 엘류데리아(eJlivssw: 자유)는 상실되고 둘로스의 상황을 이루는 의존의 상태가 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6:16). 인간들이 그리스도를 떠나서 종노릇한다(둘레이아)고 바울이 생각하는 대상은 하마르티아(6:6 이하), 아카다르시아, 아노미아(6:19), 에피뒤미아(3:3),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4:8), "이 세상 초등학문"(4:3; 4:9) 따위와 심지어 유대교의 노모스(7:1 이하 등)이다.

 

이것은 그들이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이런 세력들에 지배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휘파코에("순종")가 완전한 둘레이아(종살이, 노예 상태)가 되는 것은 이 상태에서 인간의 삶이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다"(참조: 7:5)는 사실에 의해 알 수 있다. 인간 스스로가 자기 삶의 결과를 더 이상 결정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의 발전이다: "죄를 범하는자마다 죄의 종이라"(8:34).

 

예수님은 그의 구원하는 사역 곧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런 둘레이아(douleiva: 종살이, 예속)로부터 그들을 구출하여 해방시킨다. 이 구원은 노모스(율법)의 종살이로부터 구속인 것이다(3:13: "그리스도께서...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4:4 이하: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따라서 그들은 아들의 신분과 그에 따른 자유를 얻는다(4:5 이하; 8:15; 8:23). 그러나 아들됨은 자율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들됨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이 새로운 상태는 새로운 섬김이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헌신은 당연히 구속(redemption)의 목적(goal)으로부터 결과하며 그것은 자율(autonomy) 보다 오히려 순종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사역을 수행했을 때 그는 구속된 자를 자기 소유로 삼고, 그들에게 그들의 삶을 이룰 목적과 방향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 이러한 헌신은 어원학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이렇게 의무가 있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둘로이로 부름으로 표현되어진다(고전 7:22; 6:6; 참조: 14:18; 16:18; 3:25). 이 용어는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상태가 의(6:19), 거룩(살전 3:13), 새 생명(6:4), 사랑과 자기 희생에서 완성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 암시되어 있다. 특히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 외에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길도, 그를 기쁘시게 하는 섬김에 이르는 길도 없으며, 따라서 그의 역사와 말씀에 의하여 그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주관하고, 그리하여 일상적인 일련의 삶 속에서 인간의 전 행실을 주관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한 가지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계에 대해 둘류오 등을 사용할 때, 이 용법은 항상 무엇이 발생했다는 고백과 주어진 사실들의 결과를 가장 개인적 차원에서 받아들일 각오를 암시한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 둘류오(douleuvw,: 종이다)는 그리스도편에서의 아고라조(ajgoravzw, 59: 사다, 구속하다)에 상응한다. 여기서 후자는 그리스도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결과하는 태도를 묘사한다. 그리스도가 가져다 주는 것은 오로지 인간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결속시킨다면 오직 그것만으로 알 수 있는 자유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일단 이해하고 나면 요한복음의 몇몇 구절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들은 처음 언뜻 보기에 다소 모순이 있는 것 같은 바울의 진술들과 병행함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요 8:35 이하에서 죄에서 자유를 가져오시사 하나님의 오이키아(oijkiva,: , 거처)에 영원한 자리를 가져다 주시는 분으로서의 예수님이 부여 받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안전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아들(Son)로 불리운다. 그러나 특별히 요 15:15에서 예수님이 그의 죽으심과 관련하여 말씀하시고 계심을 생각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친구라 하였노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소유를 둘레이아의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완전한 친교로 이끄시고 계시는 것을 명백히 하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한 그와의 친교는 그의 소유가 그가 그들에게 명령하는 것을 행해야 하며(15:14), 순종하지 않으면 그 친교가 깨짐을 암시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 간단히 말하면 요한이 아들이 가져오는 자유에 대해 언급할 때(8:34 이하)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로이가 아니라 친구들이라고 부른다고 언급할 때(15:15) 아무런 모순이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바를 행하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둘로스 크리스투(그리스도의 종)라는 문구는 바울의 기록에서와 같이,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의 인사말에서 자기 호칭으로 사용될 때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바울이 동역자 에바브라를 둘로스 크리스투로 묘사하는 골 4:12에서도 그렇다.

둘로스 이에수 크리스투(예수 그리스도의 종)라는 문구를 자신의 칭호로 사용할 때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속(redemption)으로 해석하는 것에 의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이 문구는 먼저 이 문구를 사용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주장(claim)에 복종하는 것을 암시하고 따라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연합하는 것을 암시한다.

 

바울의 목적은 교회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서, 지정받은 자리에서 그의 직무를 이행하는 자로서 교회의 덕을 세우고자 한다. 그렇지만 모든 곳에서 이 문구가 강조하는 바는 단순히 예수님의 구원 행동에 대한 고백 뿐만 아니라 이 문구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주인 자신의 권세를 지닌 특별한 직분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것은 약 1:1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또한 갈1:10에서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라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는 표현을 확인할 수 있다. 안드로포이스 아레스케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분명히 바울이 기쁘게 하기 위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권위를 소홀히 하는 것, 따라서 그 권위와의 불화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 권위는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위임에 의해 일하는자들은 그리스도의 주장을 나타내고,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만 전심전력해야 하며, 당연히 그의 둘로이로 불리운다.

 

바울의 기록에서는 둘로스 이에수 크리스투(예수 그리스도의 종)는 아포스톨로스 이에수 크리스투(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와 나란히 병행된다. 후자는 외부 사람들을 향한 그 중요성과 일에 따라 바울의 직분을 묘사한다면 전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와, 따라서 그 결정적 기초, 곧 그리스도께서 세상으로부터 바울을 얻어서 그를 그의 소유로 삼은 사실로 되어 있는 기초에 따라 바울의 직분을 묘사한 것이다.

벧후1:1에서는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결합형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고 되어 있다.

 

(c) 둘로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최후 만찬이 있던 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13:1이하).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바 그의 직무는 권세나 영광을 구하기보다 그의 존재가 둘로스로서 섬기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다.

우리가 발을 씻기는 것이 종의 의무 중 하나요, 그것도 유대인 노예보다 비유대인 노예의 의무임을 깨닫지 못하면 이 장면, 혹은 예수님의 의도를 적절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섬김을 수행함에 있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직무를 이행해야만 하는 둘로스의 신분에 두신다. 비록 마데테스(제자)가 디다스칼로스(선생)에게 행해야 할 의무는 종이 상전에게 행해야 할 의무와 매우 흡사하였다 하더라도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행해야 할 의무가 없는 그러한 봉사를 이와 같이 제자들에게 베풂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의 임무가 포함한 겸양과 희생의 정도를 보여주셨다. 그의 위엄을 고려할 때 오로지 종의 상징적 지위만이 제자들의 눈을 열기에 적합했고, 예수님의 직무에 관한 그들의 환상(illusions)에서 그들을 지킬 수 있었다.

 

동시에 이 사건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사도로서 살아가는 그들 자신의 삶의 의미를 계시해 주었다. 한 사람의 사도는 그 사람 자신으로서 존재한다는 규칙에 비추어 예수님은 그들을 그가 취하신 것과 동일한 지위에 묶었다. 이 원칙 대신에 예수님께서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13:16)라고 하셨다면, 이것은 그 사건과 그것의 중요성에 의해 생겨난 그 상황에 일치하여 표명된, 기초가 되는 사상을 단순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 사건의 요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서 눈여겨 본 태도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워진 상호 봉사의 의무 및 공동체 안에서와 공동체를 위한 봉사의 의무의 영구한 기초를 구성한다.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사실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사실에 기초하여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권면할 수 있는 것이다(5:13).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자유는 그 자체 참되고 진정한 자유를 보여준다. 그 자유 안에서 우리는 둘로스의 경우이며, 둘로스의 경우가 당연히 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 의해 유발되는 봉사와 겸손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2:7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어구 "종의 형체"(몰페 둘루)는 한편으로 몰페 데우("하나님의 본체"), 다른 한편으로 본문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에게 부여된 퀴리오스라는 칭호와 대조되어 그 중요성을 가진다. 따라서 이 문구는 그리스도에게 있어 성육신이 그의 본래의 권세와 영광과 관련하여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그것은 그의 비움(케노시스)의 위대함을 표현한다. 둘로스의 용법에 따르면 몰페 둘루(종의 형체)는 예수님의 케노시스의 길에서 사람의 모양이 가능한 가장 낮은 지점까지 내려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둘로스보다 더 크게 퀴리오스 혹은 데오스와 대조할 수 있는 용어는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맥상 그 표현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인간이 됨에 있어서 스스로 취한 것에 대한 묘사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요 13:1 이하의 발을 씻기는 것의 저변에 놓인 의미와 일치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상을 통하여 볼 때 관용구 몰페 둘루를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 53장의 에베드 예호와(여호와의 종)를 상기할 필요가 없다.

 

또한 순종과-공동체와 관련하여-겸손(2:3; 2:8) 같은 단어들이 몰페 둘루의 내용을 표현하고 포괄하기에 정말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디아코네오(섬기다)라는 용어도 역시 마찬가지다. 댓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바울은 여기서 태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새 상황, 그의 새 존재 방식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전의 상황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른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의 태도와 행동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8)라고 묘사되었다. 이 차이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여 본문 전체를 바울의 권면(2:1-5)에 종속시킨다. 반면 빌 2:6 이하는 사실상 순전히 게리그마적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게리그마로서 권면의 재료의 도입을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자연히 예수님에 관한 메시지의 거부를 스칸달론(skavndalon: 함정, 걸림돌) 및 모리아(mwriva: 어리석음)로 이끄는 것은 예수님의 몰페 둘루이다(참조: K. H. Rengstorf).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상을입으셨을 때, 그는 죄와 율법 그리고 사방에 종속되어 있는 인간과 완전히 결속되신 것이다. 종으로서 예수님은 노모스(novmo") 아래에 있으며(4:4)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3:13). 그는 "죄있는 육신의 모양"(8:3)과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스스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2:15) 인간들의 형제가 되셨다. 정확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을 가장 심원한 자기 비하로 묘사한 것이 바로 종의 형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종의 형상으로, 자신을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을 위해, 자신의 죽으심의 대가로서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인간을 구속하신다. 성례전적인 해방이라는 비유가 여기에서는 주인의 변화의 개념과 연합되었다. 믿는 자들은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6:18; 참조: 6:22). 어떤 가상의 자립이라는 둘레에서 엘류데리아(자유 freedom)로의 해방은 결국 새로운 자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방 받는 자는 "신앙의 순종"을 위하여 자유케 된 것이다.

 

신앙에 순종함으로써 인간은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종으로 나타난다(12:11; 14:18; 3:24; 참조: 살전 1:9; 7:6). 그러나 이러한 주인과 종의 새로운 관계는 "무서워 하는 종의 영(프뉴마 둘레이아스)"에 의하여 주도된 것이 아니다. 믿는 자들은 "양자의 영(프뉴마 휘오데시아스)"을 받은 것이다(8:15).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는 "육체의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들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도록 부름을 받았다(5:13). 이렇듯 이웃에게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일은 종의 형상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다(참조: 2:1-4의 권고, 이는 빌 2:5 이하와 인과 관계에 있음).

(참조: R. Tuente).    - 바이블렉스 10.0에서 내용 임의 발췌 -

 

프로스원어성경연구

글쓴이: 염   찬 호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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