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신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법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주인이 있고 종이 있다. 다스리는 사람이 있고,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있다.

높은 사람이 있고, 낮은 사람이 있다.


우리는 사람이 가지는 이러한 법적인 지위들을 신분(身分)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사람이 되셨던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법적인 위치는 어떠했을까.

종교개혁 시대 이후로 많은 사람들은 이에 대한 큰 관심을 보여왔다.

왜냐하면 동일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신분의 여하에 따라서는

그 의미가 매우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의 신분의 양면성

 

빌립보서 2:6-11은

그리스도의 신분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여기에는 그가 본래 어떤 위치에 계셨었는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낮은 지위로 낮아지셨는지,

또 그 결과 어떻게 높임을 당하셨는지 하는 것들이 밝혀져 있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있던 분이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자기를 비우셨다,


하나님으로서의 높은 지위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입어 사람으로 낮아지셨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되시되,

죄인의 구속에 필요한 하나님과 사람의 모든 요구에 온전히 복종을 하셨다.


또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낮아지신 신분,

즉 비하(卑下)의 신분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대한 대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고,

그가 주(主)이심을 시인하게 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높아지신 신분,

즉 승귀(昇貴)의 신분이라고 부른다.

 

비하와 승귀의 신부 사이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높아지고 낮아지신 것이 아니다. 낮아지심이 먼저이고,

높아지심은 그 낮아지심에 대한 보상이다.


이 사실은 9절 첫 머리에 있는 "이러므로"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즉 "이러므로"는 두 신분 사이에 일정한 관계,

즉 인과적인 관계가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마치 먼저 옛 사람을 벗어버린 후에,

새 사람을 입는 성도들의 성화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성도가 축복 받기만을 목표로 삼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가슴을 찢으며 낮아져야 한다. 빈 그릇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은 적당한 분량으로 임하여지게 마련이다.


 

2. 비하의 신분

 

그리스도의 비하의 신분은 사람이 되심(성육신, 成肉身),

율법에 복종하심, 고난 당하심, 죽으심,

장사지낸 바 되심 등으로 세분된다.

이제 그 각각의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1) 성육신 

성육신은 화육(化肉), 수육(受肉), 도성인신(道成人身)이라고 불려진다.

 

성육신이라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다.

성육신이란, 영혼의 상태로 있던 예수라는 영혼 속에

하나님이 들어가서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게 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 이미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 살고 있던 예수라는 사람 속에

하나님이 들어가셨다는 뜻도 아니다.

모범적으로 살았던 예수가 하나님으로 신격화되었다는 뜻은 더욱 아니다.

성육신을 하시기 이전에는 예수라는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성육신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가 사람되신 것이다(빌 2:6).

하나님께서는 세 인격의 구분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제 2의 성자(聖子)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성자는 성부 하나님의 계시자가 되시기 때문에,

말씀(로고스)이라고도 한다.

이 성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께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하셨다(요 1:1, 14).

 

성육신은 범죄한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성육신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불구하고, 자기 모순을 범하시지는 않는다.

죄인의 구원에는 반드시 무죄한 사람의

대리적인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본체이신 성자께서 사람의 몸으로 낮아지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셨다(막 10:45).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방법은 매우 독특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일반적인 생육 방법을 따르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동정녀의 몸을 통해서 사람이 되셨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의 모든 죄에서 자유로우셔야 했기 때문이다.

 

2) 율법 아래 놓이심 

율법이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뜻한다.

바로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불법 또는 불순종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것을 명령하셨다.

그리고 불순종을 하면, 반드시 그에 대한 책임이 뒤따를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온 인류는 아담과 더불어서 율법을 어긴 나머지,

죄인이 되어 사망에 이르고 말았다(롬 5:12).

다시는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의 요구를 완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갈 4:4, 5).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지켜야 할 모든 형태의 율법을 다 지키셨다.

즉, 사람이 창조 때부터서 부여받았던 자연법과 도덕법(양심)을 지키셨다.

아담이 하나님과 맺었던 행위언약의 요구들도 지키셨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법인 십계명과 의식법과 시민법을 지키셨다.

문자적으로 뿐만 아니라, 그 정신까지도 철저하게 지키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어느 누구도 흠잡을 수 없는 순전한 어린양이셨다.

율법사들이나 빌라도는 그에게서 아무런 허물도 발견해내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스스로도 "다 이루었다" 하시기에 충분했다.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은 죄인을 위한 대리적인 순종에만 머물지 않았다.

속으로는 싫은데, 중보자이기에 마지못해서 억지로 율법을 지키신 것이 아니었다.

그의 순종은 자원적인 순종이었다.

그 결과로, 그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위인 되어졌다(롬 5:19).

 

그리스도는 율법을 지키셔야 할 분이 아니셨다.

오히려 그는 율법 위에 계셔야 할 분이셨다.

그는 사람에게 율법을 수여하신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율법 아래 놓이셨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신 비하이었다.

 

3)고난 

그리스도께서는 찔림을 당하셨다. 상함을 입으셨다. 채찍에 맞으셨다.

멸시를 받으셨다. 많은  질고를 겪으셨다. 주리고 목마름을 겪으셨다.

슬픔을 당하셨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셨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함이었다.

우리의 나음과 평화를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경건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 묵상하기를 즐겨한다.

그리고 그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도 갖는다.

사도 바울께서는 이러한 열망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를 채우노라"고 하셨다(골 1:24).


그리스도의 고난은 십자가를 지셨던 날이나,

그 한 주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고난은 이 땅에 태어나신 순간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생애는 점점 더 가중되는 고난으로 이어졌다.

 

사람들 중에는 간혹, 육체로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정신적으로는 희열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정신적으로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육체적으로는 만족을 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영혼과 육체의 고난을 겪으셨다.

단순히 부족함이나 실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죄인에게 쏟아지는 저주에서 비롯된 처절한 고난을 겪으셨다.

 

그리스도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셨다.

또 앞으로 일어날 일이나, 사람의 속마음까지라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당하신 고난은 어느 누구의 고난보다도 더 큰 것이었다.

고난 주간이 되면, 간혹 십자가 지기를 재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단한 열심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들이 십자가를 한 번 져보는 것으로는

도저히 비교할 수도 없는 고난이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성경의 예언들과 정확히 일치가 된다.

특히 시편 22편의 예언은 현장에서 목격을 하고 있는 것처럼 너무나도 생생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을 가리켜서

예언을 완성케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 26:53).

여기서 "그렇게 하면"은 열두 영도 더되는 천사를 보내게 하여서

자기를 붙잡으러 온 자들을 막아내는 것, 즉 고난을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4)죽음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죄의 결과인 죽음을 당하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 값은 다 지불이 되어졌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이라고 말씀했다(롬 5:10).

또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도 많은 삶의 죄를 담당하시려고"(히 9:28),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고 했다(12절).


이러한 이유에서,

기독교는 혐오스런 저주의 형틀인 십자가를 너무나도 중요하게 여긴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형태는 사고, 질병, 전쟁 등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매우 특이했다,

그는 로마법에 의해 심문을 받은 결과, 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형언도를 받고,

유대인들의 방식에 따른 수치와  저주의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다(갈 3:13).

우리가 사도시경에 얼핏보아 이해가 되지 않는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언급을 보게되는 것은,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대신해서

법적인 책임을 직 죽으셨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수많은 성경적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없지않다.

주로 죽었던 사람이 부활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경우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부활을 하신 것이 아니라,

기절을 했다가 깨어났다고 하는 생각을 고안해 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어서

조금도 의심이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성육신의 목적 자체가 대속의 죽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물과 피를 일정량 이상 흘리면 죽게 되는 데,

그는 물과 피를 다 쏟으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이 전문가들인 로마군인들에 이해서 확인이 되어졌다는 사실과,

그가 매장이 되었다는 사실도 그의 죽음이 분명한 사실이었음을 입증해준다.

 

5)장사(裝事) 

무덤은 몸을 가진 사람이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위치이다.

그리스도는 무덤에 묻히심으로서, 사람의 가장 낮은 자리에까지 낮아지셨다.


이보다 더 낮아질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의 가장 낮은 위치에까지 낮아지는

겸손의 본을 보이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다(마 11:29).

 

이 무덤이 엡 4:9에서는 땅 아래의 곳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시 16:10에서는 음부로 불려졌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무덤뿐만 아니라,

지옥까지 내려가셨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생각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지옥의 형벌을 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지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셨다.

이 사실은 그가 음부에서 썩지 않으셨다는 말씀에서 입증이 되어진다 

썩음이 있는 곳은 지옥이 아니라, 무덤이다.

지옥에서 썩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기에 새삼스레 언급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무덤에는 썩음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무덤에 있으면서도 썩지 않으셨다.

따라서 그가 썩지 않으심은 주목할 만한 일로 예언이 되고(시 16:10),

증거가 되어질 필요가 있었다(행 2:27, 31).


 

3. 승귀의 신분

 

비하의 결과로 얻어졌던 그리스도의 승귀의 신분은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에 계심, 재림 등으로 세분이 된다.

 

1) 부활 

사람의 상식으로는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증거하고 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그 내용을 각각 상세하게 기록을 해놓았다.


그의 부활은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과, 문을 잠그고 모여 있던 여러 제자들과,

엠마오로 가던 주 제자들,

그리고 오백이 넘는 허다한 형제들에 의해서 목격이 되었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이 엄청난 사건 때문에

철저했던 유대적 전통을 버리고, 안식 후 첫날에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살아나셨다(고전 15:20).

또 부활을 하여,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고전 15:40).


그러므로 그의 부활은 성도들이 장차 부활하게 될 것에 대한 상징이 된다?(롬 6:4).

그리고 성도의 의롭다 하심 곧,

성도의 구원을 위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4:25, 5:10).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인 하나의 사건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각자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실제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성도의 부활과 연관지어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음은

헛것이라고까지 단언하는 단호한 자세를 보였다(고전 15:14).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을 하신 이후에도 이전처럼 음식을 잡수셨다.

몸에는 여전히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의 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잠긴 문을 통과하셨다.

구름 위에 올라타실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걷고 대화를 했음에도 전혀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우리도 장차 부활을 한 이후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부활체와 동일한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2) 승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중에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 가셨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가 이전에 계셨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요 6:62).


그러므로 그의 승천은 그가 여러 차례 말씀하신 것처럼,

그가 본래 아버지와 함께 하늘에 계셨음을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그가 오셨던 성육신의 목적이 완수되었음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이 때문에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켜서,

그는 대제사장이 되어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이라고 말씀했다(히 9:12).

 

성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가심을 본 그대로 재림을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승천의 모습을 매우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시지 않고, 자신이 친히 승천을 하셨다.

육체를 가지고 승천을 하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영광스러운 광경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가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리라고 하셨다(요 16:7).

또 나는 너희의 있을 곳을 예비하러 간다고도 하셨다(요 14:2).

따라서 그의 승천은 성령의 사역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이루어지는 출발점이요,

장차 우리가 거하게 될 천국 건설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3) 하나님 우편에 계심 

사도 베드로는 편지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고 했다(벧전 3:22).


사도 바울께서도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셨다고 하셨다(엡 1:20).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에서도 중보자로서의 사역을 계속하신다.

모든 진리들을 생각나게 하시고,


증거할 말을 증거하게 하시는 선지자로서의 사역을 하신다(요 14:26; 마 10:19).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 되사,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대언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사역도 하신다(히 8:6; 요일 2:1).

그리고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권세를 가지고


만물을 그 발 앞에 복종하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는 왕으로서의 사역도 하신다(엡 1:20-22; 빌 2:11).

 

4) 재림 

그리스도의 승귀의 최종 단계는 재림이다.

재림은 최후의 심판을 위한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나라의 개시를 위한 것이다.

그 나라는 만물이 그리스도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재림은 그리스도의 승귀의 절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된다.

시대가 혼돈하고 악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 더불어서,

자칭 재림 예수라 하는 자들이 생겨나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심한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신 그대로 재림을 하신다.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친히 재림을 하신다.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도록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반대하고 찌르던 자들까지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라도 다 볼 수 있도록 육체를 가지고,

그리고 영광스럽고도 공개적으로 재림을 하신다.

 

그러나 재림의 정확한 시기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오직 아버지만  알고 계실 뿐,

아무에게도 그 날과 그 시를 계시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마 24:36).


다만 땅 끝까지의 복음전파와, 온 이스라엘 회심과, 적 그리스도의 나타냄과,

대배교와 환란 등의 징조가 그 날이 임박해 있음을 예고해 줄 따름이다.

우리는 주의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온갖 구실을 가지고 나타나는 시한부 종말론들에게 현혹 당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 날은 생각지 않은 때에 도적 같이 다가올 것이므로,

항상 임박한 의식을 가지고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의 신분은 성도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의 낮아지심으로 성도가 죄와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의 높아지심으로 성도가 의롭게 됨과 영화롭게 됨을 입기 때문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율법에 복종하심,

고난, 사망, 장사 등을 묵상하기 좋아한다.

그러나 이를 비하의 신분과 관련하여 묵상함으로써,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비하 이후에 승귀가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먼저 낮아지기를 힘쓴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감과 우리 위해 예비 된

온갖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영광에 이르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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