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스라엘의 연대 의식과 공동체 정신


선한 사회 조건의 한 보기-

글 / 한동구 교수 (평택대)

1. 머릿말

연대 의식과 공동체 정신은 선한 사회를 형성하는 데 필요하고 중요한 기초적 요소임에 틀림 없다. 이 연구는 공동체 정신과 연대 의식의 역사적 경험을 소개하며, 이를 통해 공동체 정신과 연대 의식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높이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하여 나타나는 범례적 경험을 논의하고자 한다.



2. 국가 이전 시대의 이스라엘 사회의 경우

1) 유목 사회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특징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유목적 또는 반유목적인 생활 환경에서 살았다. 유목민들은 목초지를 찾아 유랑하였기 때문에 지역에 묶여있지 않았다. 그 결과 지역적인 행정 조직이 없으며, 혈연-인적 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유목 사회에서는 개인적인 일과 공동체의 일의 차이가 없다. 모두가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정치적인 일은 도덕적인 일이다. 국가적 규범이라는 자리에 형제애로 표현되어지는 공동체 정신이 있었다.


유목 사회의 정치 조직 형태는 중앙 정부가 없으며, 의사 결정에는 관련된 자들의 동의를 필요로 하였다. 개체 사회에서도 지도적인 인물들이 있었다. 개인적인 성품이나 능력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주어진 사회적 인정이었다.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어떤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의무만을 졌다. 귀족들은 형제애의 이행 속에서 다른 모든 이에게 헌신해야 했다. 전쟁시에 피를 아껴서는 안되었으며, 평화시에는 선행을 아껴서는 안되었다. 공동체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부족이 있을 경우 자신의 물질을 베풀어 균등하게 하였다. 그의 중요한 의무는 공동체의 화합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유목 사회에서는 생산의 주된 목적이 가족 구성원의 생활용품을 조달하는 데 있었다. 자신의 필요와 친척들 사이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물품을 생산하는 생계 경제 체제였다. 자기 가족이 필요로 하는 것을 조달하는 것 외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친척들에 대한 경제적인 연대의 의무가 있었다. 가문 안에서는 생산의 차이가 자동적으로 소비의 차이를 가져오지 않게 되었으며, 동시에 가족 안에서는 상대적 균등(평등)을 이루게 되었다.

2) 사사 시대 사회 구조의 분화와 사회 통합
이스라엘은 다양한 기원을 가진 이질적인 집단들이 모여 민족으로 발전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면서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를 접하게 되었고,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열등한 자들이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에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민족으로 통합되었다.
이 시대에 사회 안의 각 개별 요소들을 통합시켜 주는 기능을 수행했던 것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가나안 땅의 정착 과정에서 보여준 군사적 연합
(2) 가나안적 요소와 비가나안적 요소와의 대립 구조에서 비가나안적 요소에 속하는 공동 운명 (또는 처지)
(3) 동일 지역에 거주한다는 "공동의 삶의 자리"
(4) 전쟁시 이웃 가문이나 지파가 혈연적 의무감에서 도움을 주는 행위
(5) 산악 지역에 살 경우 보다 많은 농경지를 얻기 위해 공동의 개간 사업 참여.

3) 이스라엘의 왕조 이전 시대의 종교와 사회
족장들의 하나님은 유랑하는 무리들의 하나님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이다. 신의 속성과 신앙 고백은 그 시대의 사회의 조직과 삶의 자리의 반영물이기도 하다. 어떤 사회의 종교 형태는 사회의 조직 양식의 본질적 요소로 통합적 기능을 수행한다.


가나안의 종교는 특정 성소와 결부되어 그 성소가 놓인 사회 조직, 그 시대의 세계관과 관계된다. 가나안의 신들은 사회 구조의 변화와 함께 풍요의 신에서 전투적인 신과 군주의 신으로 발전되었다. 가나안 성소의 하나님은 가나안의 계급적 사회의 가치 체계를 옹호해 주는 신으로 이해된다.


그와 달리 족장 시대의 유목민 사회는 계보론적으로 얽혀져 있는 혈연 공동체이다. 계보론에 나타난 혈연 관계를 보면 각 개체들은 평등하다. 곧, 상하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선조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탈계급적 공동체에 대한 신앙 고백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배 공동체에서 구성원 모두를 한 가족처럼 대할 것을 다짐하는 형제애를 보존하며, 한 공동체로 체험하며, 공동체 정신과 연대 의식을 다짐하는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정착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많은 가나안의 지역 성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동시에 그 곳 주민들의 제의 의식도 적응해 들어갔다. 이러한 적응과 확대는 많은 위험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유목 종교의 본질적 요소인 탈계급성, 형제애, 한 공동체성은 동행 사상 이면으로 사라지며, 신의 가호는 체제의 유지로 오인될 소지를 남겼다.



3. 왕조시대의 변화와 사회 통합

이스라엘 사회는 주전 12-11세기의 사사 시대에 영토를 가진 왕조 국가로 전환하였다. 이 전환은 이스라엘의 사회사와 종교사에 커다란 획을 긋고 있다. 이전 시대에는 지파들이 땅을 획득하는 일이 중요한 시대라고 한다면, 이 때에는 왕조 국가의 형성과 이로 인한 사회 변화의 시대이다.

1) 다윗-솔로몬 제국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
다윗과 솔로몬은 국가의 영토를 제국에 비할 만큼 확대시켰다. 이로 인하여 다양한 민족들이 제국 속에 편입되는 복잡한 정치 구조를 이루었다.
군사적 성공은 군대 조직의 개편을 가져왔다. 사사 시대의 전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주로 방어 전쟁을 하였다. 사울 왕권은 여전히 징집 부대에 근거하고 있었으나, 다윗은 옛 징집 부대를 직업 군인들로 구성된 부대(삼하 15, 18 아래.; 23, 13아래.; 15, 19 아래)로 전환시켰다. 솔로몬은 모든 지파에서 징집된 징집 부대와 직업 군인 부대 외에 전차 부대(왕상 9, 15, 17-19; 10, 26, 왕상 10, 28 아래.)를 창설하였다.


행정 관리 조직도 확대되었다(삼하 8, 15-18, 대상 18, 14-17, 삼하 20, 23-26, 왕상 4, 1-6, 7 아래; 왕하 18, 18). 다윗, 솔로몬 이전의 가나안의 도시 국가 출신이나 외국인 전문가를 등용하였다(삼하 23, 24-39; 15, 19 아래). 왕과 그 주변의 특권층, 관리, 군인, 상인들의 증가는 이스라엘 사회를 점차 평등적 사회 구조의 해체로 몰아갔다.
궁중과 행정 관리를 위해 필요한 물자와 재원의 증가는 점차 조세 제도의 필요성을 낳게 하였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12지방으로 나누어 궁중에 필요한 물자를 한 달씩 조달하도록 했다(왕상 4, 7-19; 5, 7; 5, 2 아래 볼 것). 왕권의 출현과 함께 나타나게 된 (가속하게 된) 대토지 소유는 극단적으로 이스라엘 사회를 빈익빈 부익부로 양분화시켜 나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주전 8세기부터는 항구적인 사회적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와 함께 이스라엘 사회의 내부 구조 또한 다계층적으로 변화되었다(삼상 22, 1-2). 이스라엘 사회는 왕권 제도가 태동하기 이전부터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배 계층과 몰락한 빈민 계층의 출현으로 다계층적 사회로 분화되어 이미 평등적 사회 구조를 상실하였다. 경제력의 차이가 사회적 차이로 나타나는 현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문제점은 계약법전에 잘 나타나 있다.


경제적-정치적 상황의 변화는 엄청난 국가적 건설 공사에서도 볼 수 있다. 솔로몬은 자신의 궁전을 확장했고(왕상 3, 7; 5, 15 아래.; 6 아래), 전 국토를 무기 도시, 전차 도시, 성곽 도시의 체계와 함께 조세 및 군사 관리 체계로 개편했다(왕상 9, 15 아래 볼 것). 동시에 국가 전체를 중앙 집권적 지배 밑에 두었다. 왕조 시대와 함께 도시화가 가속화되었다.


국가의 형성과 함께 엄청난 정치적, 경제적, 유화적 개방을 가져오게 되었다. 신생 국가는 주변 국가들과 외교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원거리 교역과 함께 고대 동양의 높은 수준의 예술과 문학이 이스라엘로 들어오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성전과 궁전은 페니키아의 건축술로 빛나며, 애굽과 아랍으로부터 지혜 문학이 궁중으로 흘러들어왔다(왕상 5, 9-13). 새롭게 계몽되어진 정신 세계는 자신의 생활 반경을 넓게 했으며, 이스라엘 자신의 문학 작품을 낳게 했다.

2) 왕조시대 초기의 시대적 과제
이스라엘 사회에서 '왕권'이라는 새로운 제도가 등장하게 되었다. 왕조 시대 초기의 시대적 과제는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제도를 정당화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 다윗 상승사화(삼상 16, 1-삼하 5, 12)와 왕위 계승사화(삼하 9-왕상 2)와는 같은 역사가 나왔으며, 여기에 담긴 신학적 특색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윗과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Gottes Designation)의 결과로 보았다. 궁중의 사학자(관리)들은 왕을 야웨에 의해 지명된 자로 묘사하였다. 이 점은 나기드 (Nagid) 칭호에 잘 드러난다(삼상 10, 1; 삼하 5, 2; 왕상 14, 7). 이로써 야웨 종교가 왕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사울의 실패와 다윗의 상승은 야웨의 신비로운 인도하심(삼상 20, 22; 22, 3, 5; 23, 14; 25, 26, 31, 33 아래.; 삼하 4, 9; 12, 15; 15, 31; 15, 32 아래.; 16, 12; 17, 14; 18, 19, 31; 왕상 1, 29; 2, 15)과 동행하심(삼상 16, 18; 17, 37; 18, 12, 14, 28; 20, 13; 26, 25; 삼하 5, 10; 14, 17; 왕상 1, 37)의 결과라고 서술하였다. 따라서 다윗과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예시된 길이며, 아무도 저지할 수 없었다 (삼상 18, 8; 20, 31; 21, 12; 23 17; 24, 21; 25, 28, 30; 삼하 3, 9 아래., 17, 18, 21; 왕상 1, 48; 2, 24■■). 이러한 방식으로 궁중의 사학자(관리)들은 "다윗 왕은 야웨가 선택한 자이며, 역사 속에서 이것이 입증되었다"는 왕신학의 주장을 주민들에게 주지시켰다(삼하 6, 21; 16, 18; 삼상 16, 8, 9, 10; 삼하 5, 15).


둘째, 궁중의 사학자(관리)들은 다윗과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은 백성들이 원하는 바임을 나타내고자 했다. 다윗은 백성들의 추대로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되었다(삼하 2, 1-4). 그리고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바램으로 북왕국의 왕까지 되었다(삼하 5, 1-3).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백성들은 기뻐 환호하였다(왕상 1, 39, 41, 45).


셋째, 사울과 다윗을 비교할 때, 모든 점에서 다윗은 사울 보다 훌륭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윗은 종교적으로 경건하며, 야웨 신앙에 충실한 반면에, 사울은 우상 숭배에 기울었다. 다윗은 사울과는 달리 모든 일에서 지속적으로 야웨의 뜻을 물음으로써 그의 경건성을 보여 주었다(삼상 22, 10, 13, 15; 23, 1-12; 30, 7; 삼하 2, 1; 5, 19, 23 볼 것).


군사적으로 다윗은 만만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사울은 겨우 천천의 승리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다윗은 그의 주인인 사울에 대하여 충실한 반면,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계속 추격하였다. 다윗은 사울의 몰락에 무죄하다는 점도 잘 보여주고 있다(삼상 26, 19; 27, 3f., 11 아래; 29, 7 아래; 30; 삼하 1, 11 아래; 2, 4■-7; 32, 22-39; 4, 9 아래). 왕신학과 전통적 야웨 종교와의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사울의 카리스마가 다윗에게 옮겨갔음을 보여준다(삼상 16,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권에 의하여 부정적인 경험은 왕권 자체를 비판적으로 대하게 했고, 주전 8세기의 예언자들과 (특히 호세아)와 신명기에서는 왕권의 종교적 존엄(권위)을 비판하였다.


이스라엘은 정복을 통해 거대한 제국을 이룩했다. 이로 인하여 제국 안에 매우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이 함께 병존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다양한 요소를 하나로 통합시켜야 했다. 통합을 위해 다윗과 솔로몬은 강력한 전제적 왕권을 형성하였고, 이를 위해 궁중 신학이 등장했다. 궁중 관리와 국가적 성소의 사제들과 예언자들에 의해 선전되는 왕조 신학과 성전 신학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왕조적 지배를 새로운 형태로 정당화시켰을 뿐 아니라, 왕의 강력한 전제적 지배를 뒷받침했다. 이러한 궁중 신학은 이스라엘 주변, 곧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의 왕신학의 궤도 위에서 움직인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고대 동양(서부 아시아)에서 왕은 지상의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의 피조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모형, 하나님 자신으로 통하였다. 그는 밖으로는 신적 지배를 펼쳤고, 안으로는 신적 질서를 세우며 동시에 국가의 존립을 보장하였다.


이스라엘은 왕신학에 대한 무수한 증거를 보존하고 있다. 보기를 들면 왕시편(시 2; 18; 20; 45; 72; 85; 101; 110; 132; 144, 1-11)과 삼하 7장 등이다. 이스라엘의 궁중 신학에서도 고대 동양의 왕신학을 볼 수 있다. "야웨께서 왕 자신을 낳았다"(시 2, 7; 110, 3). "왕을 하나님의 아들"(시 2, 7; 삼하 7, 14)이나 "맏아들"(시 89, 28)로 표현한다, 왕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자"(시 80, 18, 110, 1 볼 것)가 되게 하셨다, "그를 높이셨다"(삼하 23, 1), "보좌의 우편에 앉게 하시고"(시 110, 1), 왕을 더욱이 "신" 또는 "신적 존재"(시 45, 7)로 호칭할 수 있었다. 다윗은 자신의 고유한 신학적 기초를 놓았다. 소위 나단의 약속(삼하 2; 시 89, 20-38; 시 132, 114)에서는 다윗 왕조의 영원한 존속과 안전한 지배에 대한 하나님의 확약이 담겨져 있다.


궁중 신학에 따르면 포괄적인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에 왕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왕은 야웨의 정치적 역사적 행동을 이스라엘에 중재하며, 자연과 사회에서의 축복 행위를 중재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본질적인 요소들, 생산적, 정치적, 제의적 측면들이 왕이라는 인물에 집중되어 있고, 그 속에서 통일을 이룬다.

3) 맺음
다양성 속의 통일성의 과제는 전제적 왕권 강화의 방향으로만 흐르게 되었다. 개개인, 특히 지배 계층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만 흐르게 됨으로써 사회적 책임성이라는 과제는 약화되었다. 왕조 시대 초기 이스라엘 사회의 사회적 통합은 실패로 끝났다. 궁극에는 남북의 분열과 약소국으로의 축소로 이스라엘 역사의 제 일 막은 끝났다.



4. 신명기 개혁 운동과 국민적 연대와 공동체 정신

신명기는 구약 성서의 중심이다. 신명기 개혁 운동의 정신은 신약 시대 하나님 나라 운동과 원시 기독 공동체의 교회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 공동체의 신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신명기 개혁 운동은 정치, 경제, 종교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총체적 개혁이다. 신명기 개혁 운동은 기원전 714년부터 609년까지 100년 이상이나 지속된 개혁 운동이었다.

1) 신명기 개혁 운동의 태동과 역사적 배경
신명기 개혁 운동의 동기와 출발점은 반앗시리아 저항 운동 (또는 독립 운동)에서 찾는다. 기원전 745년에 디글랏빌레셀 3세는 칼라흐(Kalach)에서 앗시리아의 왕이 되면서 부흥하였다. 그는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여 조공을 바치도록 했다. 앗시리아의 정권이 불안정할 때--보기, 왕이 바뀔 때--마다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733년에 수많은 소수 민족들이 저항 운동을 폈다. 이 저항 운동은 사마리아가 몰락될 때까지 계속되었고,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시리아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33년에 반앗시리아 동맹을 맺어, 유다로 하여금 이에 가담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들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기까지 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왕하 15, 37; 16, 5). 유다 왕 아하스는 자진하여 앗시리아에 굴복하였고, 자비를 빌기 위해 조공을 바쳐(왕하 16, 8), 예속 상태에 빠져 들어갔다(왕하 16, 7-9).


왕하 16, 10-18은 두 개의 상호 대립적인 집단이 공존했음을 보여준다. 한 집단은 아하스 왕과 그의 궁정 신하들로서 친앗시리아 정책과 앗시리아 종교 형태를 수용한 집단이다. 또 다른 집단은 종교적 혼합주의에 거부감을 느끼면서, 국가의 주권을 상실한 책임이 궁중의 무리들에게 있다고 여기는 집단이다. 이 집단이 후에 신명기 개혁 집단으로 발전한다.


사마리아가 함락된 이후 기원전 701년 예루살렘이 포위되기까지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계속하여 반앗시리아 동맹 운동이 일어났다. 기원전 705년에 앗시리아의 왕이 바뀌자, 이번에는 유다의 히스기아 왕이 맹주가 되어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장시간에 걸친 준비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701년의 침공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2) 히스키야의 개혁 운동의 민족적 연대와 공동체 정신
앗시리아의 침공을 대비하여, 히스키야는 국민들을 동원하여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전 국민을 동원했다. 그리고 무기를 개선하여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그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보수했다. 유다의 많은 도시들에 새로운 성벽을 건립케 했다(대하 32, 1-5, 30; 사 22, 9-11■). 예루살렘의 용수 조달을 위해 실로아 터널과 실로아 저수지를 만들었다(왕하 20, 20; 사 22, 11; 대하 32, 4-5, 30). 그리고 그는 기혼 샘물을 메워버려, 적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히스키야는 앗시리아의 침공에 대비하여 외교적 측면에서도 적절한 준비를 하였다. 유다는 남 팔레스타인의 여러 나라들과 함께 반앗시리아 동맹을 체결하고 여기에서 맹주가 되었다. 특히 불레셋 도시국가들(아스칼론, 에클론, 가자)을 동맹으로 끌어들였다(왕하 18, 8). 애굽과 바벨론에 이르기까지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왕하 20, 12-19).

3) 신명기 종교개혁의 국민적 연대와 공동체 정신
신명기 종교 개혁의 내용은 예배의 정화와 예배의 중앙 통일화와 그리고 유일 신앙(신 6, 4-5)과 예배 개혁(신 12장)이다.

이 가운데 처음 두 요소는 신명기 역사서에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다음 두 요소는 신명기에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1) 예배의 정화
신명기 종교 개혁은 앗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립 운동에서 출발한다. 신명기 종교 개혁은 종교적 영역에 속하지만, 정치적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다른 나라의 신의 숭배가 여전히 행해진다면, 그것은 다른 나라의 권력이 아직 항존함을 말해주고 있다. 강압적인 수단에 의해 이방 신들의 숭배가 행해질 때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이방 신상의 제거는 종교 정화의 차원을 넘어서 이방 권력의 거부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신명기 종교 개혁에서는 앗시리아의 종교 상징들, 태양, 달, 별들을 위한 신상들과 제단이 제거되었다. 또 이들 신들에게 바쳤던 제사나 종교 관습도 중지되었으며, 앗시리아 종교를 위해 임명된 사제들도 폐위되었다.

(2) 예배의 중앙 통일화
신명기의 종교 개혁에서 가장 모호한 점이 예배의 중앙 통일화다. 이제까지의 연구에서는 그 동기와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해석을 내렸다. 모든 예배 처소를 예루살렘에 통일시켰다. 지방에서 활동하는 사제들을 모두 예루살렘에 오게 하여 활동하게 했다. 이와 같은 중앙 통일화가 성립되려면, 분명히 전제가 성립되어야 한다. 곧, 예루살렘의 사제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지방 사제와 동등한 권한만을 가질 때 가능하다.


예배 처소의 중앙 집권화는 권력 집중화 현상을 초래할 것이라는 사회학적 상식은 여기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기득권의 포기는 비단 사제 계급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각계 각층에서 일어났으며, 이 때에 비로소 국민 전체가 하나가 되는 연대감을 가졌다. 예배 처소의 통일화는 오직 야웨 한 분만을 섬기기 위함이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야웨를 민족의 신으로 예배했다. 한 예배 처소에서 한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직 야웨만의 신앙 고백이 필요했다. 민족 전체의 연대 의식을 고양하기 위하여,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필연적이었다. 오직 야웨에 대한 고백은 앗시리아 신에 대한 거부이며, 동시에 한 민족 공동체를 지향하는 신앙 고백이다.

(3) 유일 신앙

신명기 종교 개혁--특히 예배의 중앙 통일화--로 인해 나타난 매우 중요한 신학적 특징은 유일 신앙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오직 야웨만을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한다. 신명기 6장 4-5 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4■■) 들어라 이스라엘아, (4■) 야웨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야웨는 한 분이시다. (5■) 너희의 마음을 다하고, 너희의 생명을 다하고, 너희의 모든 것을 다하여, (5■■) 너의 하나님 야웨를 (5■■)사랑하여라.

4절의 틀(들어라 이스라엘아)은 지혜 문학과 예언 선포의 전통에서 전승되었다. 4절에서 야웨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라는 표현은 계약 양식의 한 부분이다. "야웨는 한 분이시다"는 유일 신앙에 대한 고백이다. 오직 야웨에 대한 헌신의 요구는 결코 종교사적, 철학적 사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시대적 요구"로 이해할 때만이 설명되어 질 수 있다. 외부의 적과 대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민족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주창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야웨이시지, 다른 어떤 신도 아니다. 계속하여 야웨만이 "하나님"임을 주장한다. 앞의 문장이 민족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뒤의 문장은 민족 공동체의 연대 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 분 하나님 야웨를 믿는 이스라엘은 하나된 신앙 공동체이다. 한 예배 처소--한 하나님--하나된 민족 공동체의 고백이다. 이와 같은 고백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민족 공동체 안 어떠한 특권층도 없어야 하며, 소외 계층도 없어야 한다. 야웨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고백이 있는 곳에서는 항상 한 민족, 공동체에 대한 정치적 목표가 확립된다. 따라서 5절의 헌신에 대한 요구는 필연적인 것이다.

(4) 예배의 개혁
신명기의 종교 개혁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은 예배의 개혁이다. 이제까지 예배의 참여는 개별 가족의 일이었다. 그러나 예배가 예루살렘 중앙에 통일되면서, 예배의 참여는 이제 개인, 또는 개별 가족의 차원을 넘어 국가의 일에 참여하는 일이 되며, 민족 전체의 공동체에 참여하게 되는 셈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예배 참석자가 확대된다. 민족 전체가 참여하는 예배가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양적인 확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배를 예루살렘에 통일시킨 것은 예배의 통일을 통해 민족의 통일, 곧 하나됨을 얻고자 했기에, 참석자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예배의 참석자들 사이에 어떠한 구별이나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 예배에 참석한 모든 이는 다같이 하나님 앞에서 즐겨야 한다. 기쁨을 공유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축제에 참여하여 먹고 마심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여흥을 갖도록 명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신 것을 함께 나누어 가짐으로 기쁨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함께 나누는 상징적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

4) 신명기 사회개혁의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 정신
주전 8세기의 전반기 동안 이스라엘 사회는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회는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의 차이를 보다 더 심화시켰다. 주전 8세기 동안에 대도시의 거주지가 크게 확대되었다. 앗시리아의 지배로 인하여 백성들은 조세와 부역 외에 조공을 위한 부담도 함께 져야했다. 조세, 부역 및 군사적 의무는 백성들에게 부담이 되었으며, 특히 경제적 약자들은 채무자로 전락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이유가 이스라엘의 소자유 농민들이 채무자로 전락된 후에 그들의 빛을 갚지 못하여 저당의 형식으로 맡겨졌던 그들의 땅과 집을 잃는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예언자들은 상류층의 부정한 부의 축적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사 5, 8=미 2, 2 볼 것). 사법의 차원에서 부패와 이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의 보도를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렘 22, 13 아래; 렘 34, 8 아래.; 야브네 얌(Yavne Yam)에서 출토된 오스트라콘 볼 것).



5. 제 2 성전 공동체 시대의 평화 운동

1) 국제 정세의 변화
주전 538년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정복한 때부터 주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두로를 멸망시킬 때까지 두 세기 넘게 유대인 공동체는 페르시아의 통치하에 있었다. 느부갓네살이 죽자 바벨론의 세력은 급속도로 기울었다. 더욱이 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인 나보나두스(주전 556-539)는 종교적 갈등마저 겪게되어 국정이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주전 539년 페르시아의 장군 고브리스는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바벨론을 점령하였고, 고레스는 개가를 부르며 바벨론에 입성했다. 주전 538년에는 애굽의 국경에 이르기까지 서아시아 전역을 그의 수중에 넣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유대인들은 물론 모든 약소민족들에게 해방에 대한 소망을 용솟음치게 했다. 이스라엘의 한 예언자는 기진 맥진한 자기 동포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선언한다(사 40, 1-11; 42, 9; 43, 19; 48, 3, 6-8 볼 것).

2) 유다의 해방과 공동체의 재건
고레스는 주전 538년에 칙령을 내려, 유대인의 귀환과 전통적 제의 복구를 허용했다(스 1, 2-4과 6, 3-5). 고레스의 관대한 조치는 자국의 문화와 종교적 자율성을 존중하는 식민지 통치 방식과 당시 애굽과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완충 지대로서의 유다의 위치에 기인한다.


세시바살의 영도 밑에 소수의 사람이 귀환하였다(스 2장과 느 7장). 많은 유대인들은 이미 바벨론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잡고 살고 있었기에 안정된 삶의 기반을 버려 두고 본국으로 귀환하기를 원치 않았다(Ant XI 1, 3; 8).


총독 세시바살은 고레스 칙령에 따라 성전을 재건하는 일은 시작되었으나(스 5, 14-16) 완성하지 못했다. 스룹바벨이 그의 직위를 계승했다. 아마도 고레스가 530년 동부 지역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의 아들 캄비세스가 왕이 되면서 가까스로 시작된 성전 재건 공사가 중단되었을 것이다. 제 1차 귀환 이후 18년이 지난 후, 총독 스룹바벨 치하에서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의 정력과 신앙으로 백성들을 분발시켜 성전 재건 공사를 재개하였다.


다리오 제 6년(주전 515 스 6, 15 볼 것)에 성전은 완공되어 엄숙히 봉헌되었다(주전 520-515). 이로서 이스라엘은 다시금 종교 중심지를 갖게 되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장래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적 독립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전은 이스라엘의 삶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종교 공동체였다.

3) 유대 공동체의 정신적 위기
많은 사람들이 다윗 국가의 재건을 꿈꾸며, 다윗에게 내려준 약속들을 다윗 언약으로 신학화시켰다. 에스겔 사제들이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를 웅대히 설계하기도 하였다(40-48장). 이사야는 '새 일'이 일어날 것을 선언하며(사 42, 9; 43, 19; 48, 3, 6-8) 바벨론에서의 해방을 새로운 출애굽으로 묘사했다(사 43, 16-21; 48, 20 아래; 52, 11 아래).


그러나 현실은 이와는 달랐다. 이사야의 휘황 찬란한 약속들과는 달리, 팔레스타인의 초기 상황은 참으로 '작은 일의 날'(슥 4, 10 볼 것)의 연속이었다. 귀환 후에 팔레스타인의 유대 공동체는 극히 미약한 규모였고, 대부분 폐허로 남아 있었다. 새로 돌아온 자들은 여러 해에 걸쳐 역경과 궁핍과 불안정에 시달렸다(학 1, 6).


재건 사업은 의기양양했던 새로운 출애굽과 시온에서 온 세상을 다스릴 야웨의 통치가 확립될 것이라는 휘황 찬란한 청사진과는 현실적으로 거리가 멀었다. 성전이 완공된 이 후에도 유대공동체는 여전히 작은 날의 연속이었다.

4) 유대 신앙 공동체의 증대의 신학
포로 전환기와 포로 후기의 이스라엘 사회는 다양한 이익 집단으로 분화되었다. 막스 베버 이래로 최근까지 많은 학자들이 포로 후기 시대의 이스라엘 사회 구조를 규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료의 빈곤으로 이 당시의 사회 구조를 정확히 규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성전 공동체는 새로운 신생 독립국으로서 화려한 이상과 꿈을 꾸었다. 그러나 현실은 국제적인 약소국으로서의 무수한 한계점을 노출시켰다. 따라서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 미래를 새롭게 개척하여 강한 나라가 되기를 희망하는 다양한 전승 집단에서 다양한 비젼과 희망을 제시하면서 증대의 신학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증대의 신학은 창세기 1장 26-28절(창 9장 1-7절 볼 것)의 언어적 표현 속에 잘 반영되어져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여러 가지 형태로 인간을 축복하여 주셨다. 그 축복의 내용은 5개의 명령형 동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곧, 생육하라( ), 번성하라( ), 땅에 충만하라( ), 땅을 정복하라( ), 그리고 동물 세계를 다스려라( )고 하였다(창 1장 26-28절).


먼저 생육하다( Qul 또는 생육케하다 Hi.), 번성하다( Qul 또는 번성케하다 Hi.)라는 두 동사는 이스라엘 또는 예루살렘의 회복과 시온으로 몰려오는 포로들의 귀향, 곧 포로기 동안 폐허가 되었던 곳에 다시 사람이 살게되며, 인구가 늘어날 뿐 아니라, 또 산업도 번성하게 되는 상황과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어 졌다(렘 3, 14, 16-18; 23, 3; 겔 36장). "땅에 충만하다( + )"라는 표현도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땅을 정복하다"( )라는 표현은 땅의 정복을 통해 인간은 땅위에 있는 동물 세계를 다스리게 된다. 이 두 표현의 의미는 인간의 통치 영역이 전세계를 포괄하여 우주적 영역(동물의 세계)에까지 미침을 말한다. 여기에 인간의 동물 세계에 대한 지배와 통치는 정치적 지배와 통치의 상징적 표현이며, 지배자의 세력이 강력하며, 절대적임을 말해주고 있다.


증대의 신학은 메시야 사상에도 나타난다. 성전 공사가 지연될 때, 학개와 스가랴는 메시야 운동을 통하여 성전 재건을 독려하였다. 성전 재건의 독려와 함께 (또는 독려를 위하여) 예언자 학개는 2장 20-23절에서 스룹바벨에 대하여 예언했다. 이 예언은 오래지 않아 제국의 세력이 멸망되고 유다 국가가 재건될 때에 스룹바벨을 통치자로 삼을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메시야 사상은 유다 국가의 정치적 회복과 관련되는 현실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대망이다. 스가랴도 메시야적 어투로 스룹바벨을 찬양했다(슥3, 8; 슥 6, 9-15; 렘 23, 5 아래 볼 것).


성전이 완공된 후에도 다윗 가문에서 메시아가 나와 독립된 국가를 다시 세울 것이라는 메시야적 대망이 계속적으로 확산되었다(사 11, 1-9과 사 9, 1-7 볼 것). 다윗 가문의 메시야는 역사적으로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을 전제하였다. 존 브라이트의 추론에 따르면, 페르시야는 유다에 퍼져있는 메시야 소동에 관한 소문을 듣고, 스룹바벨을 제거했다고 한다.


스룹바벨이 정치적 무대에서 소멸되기까지의 이스라엘의 메시아 대망 사상은 당시의 대부분의 다른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증대의 신학의 또 다른 표현으로 여겨진다.

5) 공동체 정신과 평화의 사상
성전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제의 규정의 정비와 국가의 힘을 증대시켜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을 기원하는 증대의 신학을 전개해 나갔다. 이와는 달리 소수의 지도자 집단에서는 정복과 지배의 철학을 포기하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공동체 정신과 평화 공존의 길을 제시하였다.


이사야서에 담겨져 있는 야웨의 종의 노래에서 이러한 정신을 본받을 수 있다. 야웨의 종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발견한다(사 50, 6). 비폭력 무저항만이 때리는 자와 억압하는 자와 화해하는 길이며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길임을 보여 주고 있다(사 55, 5; 사 49, 6). 그는 "올바름"으로 뭇 민족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며, 약한 자를 도와줌으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평화 공존의 길을 추구하였다(사 42, 1-3). 이로서 그는 뭇 민족의 빛이 되고자 하였다.


또 이사야에서는 민족의 생존을 다른 나라들과 평화 관계를 유지함으로 확실성을 얻고자 했다. 또, 국제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평화의 형성자로 설정했다(사 56, 3-7).
특별히 룻기에서는 이방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준다. 모압 여인 룻을 통하여 민족의 좁은 한계를 넘어서, 온 인류가 함께 한 가족이 될 수 있는 뜨거운 인간애를 보여주고 있다.


소수의 지도자들은 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한다. 법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들을 불러왔다. 역사적으로 볼 때, 법은 지배 계급의 이익을 대변해 주고, 그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구실로만 이해되었다(사 10, 1).


그러나 이와는 달리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경고해 왔다. 특별히 포로기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았기 때문에 국가 멸망이라는 참담한 파멸이 초래하게 되었다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법을 준수한다는 것은 구원의 상징이었다. 법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담겨져 있고, 동시에 이스라엘에게 내려준 구원의 선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사 2, 2-4 = 미 4, 1-4).

이러한 연대 의식과 평화 공존의 사상은 메시아 사상에도 나타난다. 이사야 65장 17-25절에서는 새 창조,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창조의 사상을 담고 있다. 여기서는 새롭게 출발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새 공동체의 이상과 지표가 담겨져 있다. 새 창조에 의해 탄생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새 공동체는 무엇보다도 평화의 공동체를 지향하고자 하였다(사 65, 25). 여기에서 추구하고 있는 "평화"는 "정의", 특히 "경제 정의"의 실현을 통하여 실현되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사 65, 21-22). 이러한 사상은 양분화된 사회 질서--소수의 부유한 지배 계급과 다수의 가난한 피지배 계층--속에서 배태되었다.


이와 같이 종말론적으로 발전된 평화의 사상의 한 보기를 이사야 65장 25절에서 볼 수 있다. 여기의 우화적 표현에서는 '정복자-피정복자', '지배자-피지배자'라는 관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평화 공존의 새로운 관계를 선포하고 있다. 정복과 지배가 없는 사회 (Ohne Obrigkeit)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이사야 65장 25절 보다 약간 확대된 표현으로, 동일한 우화적 표현을 이사야 11장 6-8절에도 담고 있다. 이 동물 우화는 메시아 대망 사상을 담고 있는 사 11, 1-5과는 달리 스룹바벨 이후에 새롭게 발전된 메시아 대망 사상이다.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없는 완전한 평화 공존의 세계를 선포하고 있다. 정복과 지배가 없는 평화 공존의 공동체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포로 후기에는 다양한 전승 집단들이 공존하였다. 그 가운데 한(소수의) 전승 집단에서는 공동체 정신과 평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평화 운동은 궁극에 신약 시대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집단에서는 정복과 지배의 포기를 통해 평화 공존을 주장하였으며, 폭력과 전쟁의 포기를 통해 평화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정복과 지배가 없는 사회에 대한 희망과 이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포로 전환기와 포로 후기의 초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품었던 원대한 꿈과 이상은 성전 공동체 안에서 실제 실현되지 않았다. 시간이 계속됨에 따라, 대다수의 민중들은 사회적 불의를 더 많이 체험하게 되었다. 이 평화 운동의 또 다른 한 특징은 물리적 힘에 의한 새 질서의 실현에 대해 강한 회의를 표명하고 있다. 진정한 구원의 빛은 고난의 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보여주는 바, 자신의 희생과 남을 위한 섬김 속에 있음을 천명한다. 따라서 정복과 지배의 포기는 불가피했다.



6. 추림과 맺음말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혈연과 지연의 전통적 가치관이 느슨해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가 경제 수단과 기능의 망으로 얽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사회에 도덕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는 역사적 전통과 종교가 커다란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의 한 전통인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회적 연대 의식과 공동체 정신"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도덕적 기반을 위한 중요한 토대를 제공해 주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는 각 시대의 상황의 차이로 인하여 문제의 양상들이 다르며, 또한 요구되어진 사회적 연대 의식과 공동체 정신도 다양한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살았던 고대 유목적 사회는 사회적 통합을 강제할 만한 중앙 정부와 같은 조직이 없었다. 따라서 사회적 연대 의식과 공동체 정신은 개인과 개별 가정의 도덕과 인도주의적인 정신에 기초한다.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의 자기 희생적 기득권 포기가 사회적 연대와 통합의 중요한 토대였다. 유목 사회의 중요한 특징은 중앙 정부의 부재와 이로 인한 정치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의 사회보다 더 민주적이며, 구성원들 사이의 사회적 차이가 더 적은 사회였다. 따라서 벨하우젠은 이러한 사회를 '지배 없는 사회'라 불렀다.


이스라엘 사사 시대에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약속의 땅에 정착함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문제와 씨름했다. 먼저 그들은 사방의 적과 대치해야 했고 경제적, 문화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적응해야 했다. 이러한 문제와 씨름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공동의 전쟁과 공동의 삶의 자리와 공동의 개간 사업과 공동의 운명을 경험하게 됨으로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사회에 왕권 제도가 등장함으로 사회적 분화가 발생하게 되며, 이와 함께 새로운 제도를 정당화시켜야 했고, 다른 한편 정복으로 인하여 다민족으로 구성된 복합 사회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다른 시대에 보여주었던 지도자들의 기득권 포기를 통한 사회적 통합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왕권을 강화시킴으로서 물리적 통합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제국은 분열되고 약소국으로 다시금 전락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위대한 정신적 유산을 남겼던 사회 운동은 신명기 개혁 운동이다. 외부로부터의 적을 방어하기 위해 민족 전체가 한 공동체로 연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대의 중요한 토대는 지도자들의 기득권 포기에서 출발한다. 정치권에서는 민중적 집단인 암 하 아레츠 집단을 적극 포용하였으며, 종교적 집단에서는 중앙 사제들의 기득권 포기로 전대미문의 예배의 중앙 통일화를 이루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약자 보호를 위한 사회 개혁이 단행되었다.


제 2성전 공동체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에 비하여 초라한 약소 식민 국가였다. 그럼에도 꿈과 이상을 지닌 시대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집단에서 다양한 꿈과 이상을 전개했다. 오늘 우리들의 눈길을 끄는 한 위대한 꿈과 이상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진정 소수의 무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국제 무대에서 초라한 약소 식민 국가의 존립과 역할을 평화의 전파자로 자리매김 하였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참모습을 평화의 사자로 설정하고, 그들은 먼저 지배와 정복의 철학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아가 국제적 연대와 공동체 정신은 자기 희생과 남에 대한 섬김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정신은 '고난의 종'의 모습에서 볼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에서 볼 수 있다.


허물어져 가는 전통과 도덕적 토대를 다시 세우는 일은 사회 구조와 조직의 변화만으로는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지도자들의 기득권 포기와 섬김을 주장한 종교에서 진정한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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