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유다지파에서 예수님이? 


창세기 44: 30 - 45:2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한 지파를 통해서 이땅에 오셨다.
신약 마태복음 1장에 있는 예수님의 계보를 보면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중에서 유다 지파 출신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유다지파에서 태어나셨을까?

장자 르우벤도 아니요,
제사장 계통의 레위도 아니요,
구약시대 예수님의 예표라 할 수 있는 요셉도 아니요,
무슨 이유로 야곱의 네째 아들 유다를 택하셔서 그 혈통으로 나신 것일까?

여기에 분명 어떤 메세지가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비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창44: 30 - 45:2)

이스라엘에는 열 두 지파가 있습니다. 이 열 두 지파는 야곱의 자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그 이스라엘의 한 지파를 선택해 그 혈통으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처음 마태복음의 계보를 보면 예수님은 야곱의 아들 중 유다 지파를 선택하여 그 계통으로 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장자인 르우벤도 아니요, 둘째 아들 시므온도 아니요, 제사장의 직분인 레위 지파도 아니요,

예수의 예표로 알려진 요셉의 자손도 아니요, 왜 하필 네째 아들 유다의 자손으로 태어났을까요?
레위 지파는 시므온처럼 똑같이 "잔해하는 칼"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그러나 성결한 제사장 지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7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 지파에서 나올 수 없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레위 지파에서 예수님이 오시면 구약의 레위 제사장 계통의 연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흠 있는 레위 계통이 아니라 전혀 다른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므로 레위 계통에서 나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장자 르우벤은 아비의 침상을 더렵혀서 장자권까지도 빼앗긴 자이고,

또한 시므온은 레위와 함께 칼을 잔혹하게 써서 잔해하는 칼이라는 말을 같이 들은 바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족보에는 여자들과 죄인들도 포함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허물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할 수 있는 요셉의 지파도 매우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레위 지파 이외에는 나머지 11지파가 모두 가능할 터인데 왜 하필 유다 지파에서 주님이 오셨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먼저 창세기 44장부터 더듬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1. 유다와 베냐민의 특별한 관계 1

때는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에 곡식을 사러 온 나머지 형들이 요셉 앞에서 무릎꿇고 있는 장면입니다.
요셉이 자기의 신분을 속이고 베냐민을 볼모로 잡아 두려는 것에 대해서 나머지 형제 중에서 유다가 국무총리 요셉앞에 나와서 애원을 합니다.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창44:30-34)

가나안 땅에 계시는 아버지 야곱을 생각해서라도 유다는 반드시 막내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돌아가야겠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자기가 볼모로 잡힐 테니까 동생 베냐민을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애굽 총리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유다의 이와 같은 희생 정신과 형제 사랑 및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의 말 한마디는

그 앞에 있던 국무총리 요셉의 마음을 일시에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은 드디어 정을 억제치 못하고 방성대곡하여 울면서 자기가 바로 그옛날 팔려갔던 요셉임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처럼 요셉까지도 감동시킨 놀라운 사랑와 희생정신을 발휘했던 유다는

과연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희생하시기 까지 하시면서 우리들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데려가시고자 하였던 예수님의 모습과 너무나도 비슷합니다.

* 바로 예수님이 그러한 일을 행하신 분이 아닙니까?
* 이는 예수님의 모습과도 정확히 어울리지 않습니까?
*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자기가 대신 죄를 지시고 우리를 구원시켜서 하늘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게 하시는 일을 하셨지 않습니까?
* 유다가 자기 형제 베냐민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이 모습이 주님의 모습과 그 성격에 있어서 정확히 일치됩니다.

놀랍게도 유다의 베냐민에 대한 이 아름다운 희생적 사랑은 성경속에서 계속됩니다.
이 때 이후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아주 특별한 사이가 됩니다.


2.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특별한 관계 2

사사 시대에 베냐민 지파가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못된 짓을 저지르고 이를 회개하라는 다른 형제들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전열을 정비해서 싸우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지파 연합군과 베냐민 지파가 싸우는 동족 상잔의 비극이 벌어졌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 중에서 누가 먼저 올라갈까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유다가 먼저일지니라.』(삿20:18)
『베냐민 지파에게 싸우러 가는데 하필 유다 지파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전쟁은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에 앞서서 분명히 하나님께 기도를 했고,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가 먼저 올라가라고 하시면서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선봉이 된 이스라엘 다른 지파 연합군이 패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며

『우리가 다시 나가서 우리 형제 베냐민 지파와 싸우리이까』하고 묻자 하나님께서는 또 올라가서 치라 하시면서 분명히 허락하셨습니다.(삿:23)

그런데 또 베냐민 지파한테 패배해 버렸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세 번째 올라가서야 비로소 베냐민 지파에 대해 승리를 거두게 되는데

그 때에 베냐민 지파의 남자들은 600명만 살아남고 다 죽어 버려서

이 지파가 궐이 날 정도가 되자 싸움에 참가했던 다른 지파 연합군들은 오히려 싸움 후에 기쁜 것이 아니라

안타까워하면서 그 베냐민 지파가 없어져 버릴까봐 그 600명에게 아내를 구해 주는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유다가 선봉이 되어서 베냐민 지파와 싸움을 하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싸움이면서도

유다 지파가 두 번이나 지게 했던 이상하게도 마음내키지 않는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유다와 베냐민의 독특한 관계 때문일 것입니다.


3.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특별한 관계 3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자 베냐민 지파인 사울 왕이 이상하게도 유다 지파인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원치 않는 싸움이 사울과 다윗 사이에 또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해하려고 하지만 유다 지파인 다윗은 사울을 해하지 하지 않고 끝까지 도망 다닐 뿐입니다.
또한 그 와중에서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서로 극진히 사랑을 합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상반되면서도 서로 사랑하는 묘한 관계를 여기서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특별한 관계 4

이와 같은 특별한 관계는 솔로몬왕 이후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질 때에도 나타납니다.

남 유다와 나머지 지파들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질 때에 다른 지파들은 모두다

여로보암을 좇아서 북으로 모여 북 이스라엘 나라를 형성하게 됩니다만 유독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를 쫓아서 남 유다로 합하게 됩니다.

"남쪽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 -- 북쪽은 나머지 열지파 "
이 두지파의 관계성이 정말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연이 결코 아닌 무언가 뜻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루어가신 사건입니다.


5.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특별한 관계 5

신약 시대로 넘어와서도 이 두 지파의 관계는 예수그리스도와 바울의 관계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이고, 놀랍게도 바울은 베냐민 지파입니다.
바울은 청년 사울 이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살기 등등한 대적자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지파의 예수님은 이러한 사울을 빛으로 만나 주셨고,

그 이후로 이 둘 사이는 싸움의 관계에서 사랑의 관계로 변하여서 바울은

신약의 제일가는 복음 전도자가 되고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고백을 한 놀라운 주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특별한 관계는 결국 신약시대에 예수님과 바울의 관계까지 이어집니다.
무언가 깊은 숨어있는 메세지가 있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죄인인 우리 모두를 상징합니다.

야곱의 베냐민 지파에 대한 예언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물어 뜯는 이리와 같은 성품을 지닌 우리들.

그러나 유다 지파의 희생정신과 사랑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게 만드시는

그 원리가 성경속의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와의 관계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총리가 된 요셉까지도 감동시킨 야곱의 아들 유다의 놀라운 자기 희생과 형제 베냐민 사랑의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의 본질을 창세기 때부터 성경은 우리에게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 지파가 주님의 지파로 채택된 이유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라고 하셨고 또 요한복음 5장 46절에서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하셨는데 과연 그 말씀이 실감납니다.

유다의 헌신적인 형제 사랑과 그 형제 베냐민을 구원하여 아버지께로 데려가려고 하는 간절한 열망 속에서

우리 주님의 나를 향하신 그 놀라운 희생적인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깊은 의도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 유다 지파를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게 하신 것입니다.

 

조수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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