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교회의 이단적 요소의 등장


기독교는 A.D. 313년 박해의 와중에서 자유롭게된 이후부터 오랜 기간 동안 점차 성서의 교회곤과 멀어지게 되어

카톨릭의 체제는 수많은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되었으며, 급기야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기독교가 이처럼 타락하게 된 이유는,


첫째로, 핍박의 기간에 존속되었던 기독교의 순교자적인 영성이 긴장을 풀게 되었으며,

둘째로는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실제적인 신앙의 규준의 틀은 성서를 훨씬 넘어서

당시의 풍습과 이방 종교의 분위기를 무제한으로 교회에 유입시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토록 타락한 카톨릭의 체제를 거부하고 순수한 복음의 교회(Protestant)를 이룩한 이후에도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 내지는 영성의 혼합적 분위기가 개신교에도 유입되었음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특히 한국의 교회에 있어서 더욱 심한데, 기복적인 신앙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는 언제나 원래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은 기독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했다. 그것은 긍정적이기도 하며 또 부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특히 기독교도에게 주어지는 혜택들을 누리기 위하여 수많은 이교도들이 진정한 회개 없이 교회 안으로 밀려듦에 따라 많은 비성경적인 교리들과 예배 의식들이 자리잡게 되었다. 예를 들면 귀신축출(exorcism)의식,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연옥(purgatory)설, 복을 받기 위해 초를 태우는 의식, 성인과 유물 숭배, 성모 숭배, 천사 숭배, 그림과 형상 등의 사용, 평신도와 직분간의 비성경적인 구분 등이 있다. 이러한 일들은 카톨릭을 더욱 의식 중심의 종교로, 미신적인 종교로 만들었다.


1. 성인(成人) 숭배


 1) 성인숭배의 시작

 성인을 숭배하는 풍습은 순교자를 숭배하고 그들의 무덤 앞에서 예배드리는 관습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더욱 발전하여 순교자들, 사도, 예언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후에 현존하는 감독과 신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갑바도기아의 세 신학자들은 성인들을 찬미하면서 인류를 수호하며 기도를 듣는 자들이라고 생각했으며, 암브로스나 제롬, 크리소스롬, 어거스틴 등도 그들 견해에 동의했다.


 2) 성인 숭배의 발전

 이러한 성인 숭배는 점차 발전하여 각 국가와 지방, 도시를 비롯하여 직업, 여행자, 병든 자를 위한 성인 등 모든 생활 가운데서 도움을 주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그들을 기념하는 날들을 축제일로 지켰는데, 후에는 너무 많아져서 같은 날에 2명 이상을 기념하기도 했다. 

 또한 이것은 더욱 발전하여 기념이 될 만한 장소에 교회를 세우고 그밑에 성인들의 유골이나 유물들을 간직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즉 뼈, 손톱, 머리카락, 의복, 책 등의 소유물들의 성물을 숭배하고 그것들이 어떤 실제적인 능력을 지닌다고 믿었다. 이러한 성인과 성물을 숭배하는 것은 이방 조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영역으로, 사실 이교도들에게 있어서의 영웅 숭배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지적 수준이 앉은 서민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 성모(聖母) 숭배


 성모 마리아에 대한 초기의 태도는 단지 예수그리스도를 낳은 신앙적인 여인에 대해 존경하는 것이었다. 바실(Basil)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후에 다른 자녀들도 낳았다고 생각했으나, 에피파니우스(Epiphanius)는 바실의 생각을 이단시하여 '영구처녀설'을 주장했다. 그는 어느 한 계절을 마리아를 '존숭'하는 데 보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에게 경배해야지 마리아에게 경배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마리아는 모든 성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로 부각되었다. 5세기에 들어서는 '하나님의 어머니'로 불려졌고, '영구처녀설'이 주장되었다. 암브로스는 창3:15에 근거하여 그녀를 인류구원에 있어서 힘있는 존재로 믿었으며, 점차 마리아에게 교회를 지어서 바치는 풍습이 생겨났다. 후에는 마리아가 출생시부터 사망 때까지 무죄했으며, '하늘의 여왕'이 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러한 마리아 숭배 역시 이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것은 이집트, 시리아, 소아시아의 '어머니 여신들'(Mother goddesses)에 대한 숭배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중세에 가서 더욱 발전하여 마리아에게 제의를 드리기까지 했는데, 동방에서 특히 발전되었다. 그녀는 '연민의 어머니'(Mother of Pity)로 불렀고, 트렌트(Trent) 회의는 마리아에게 중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유용'하다고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성경은 마리아를 단지 예수의 모친으로만 묘사하고 있을 뿐, 그녀는 전혀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하여 이 당시의 조비니안(Jovinian) 수도사는 마리아의 영구처녀설을 반대하기도 했으나, 이 사상은 계속해서 발전되었다.


3. 천사 숭배


 신약성서는 분명하게 천사 숭배를 정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고 있는 자들은 주저하면서도 그것을 행하여 점점 습관화되었다. 저스틴(Justinus Martyr)은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을 비롯하여 많은 천사들과 성령을 예배하고 숭배한다고 말하여 천사 숭배에 대한 동기를 제공했다. 암브로스(Ambrosius)는 더 나아가 천사에게 기도하는 것을 추천하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 이레니우스(Irenaeus)나 오리겐(Origen), 어거스틴(Augustine) 등은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787년의 2차 니케아 회의에서 요한네스는 천사는 얇고 가벼우며 불과 같은 몸을 가진 존재들로 기독교인들은 천사를 묘사하고 숭배한다고 발표했다. 그의 견해는 회의에서 승인되었고, 천사 숭배가 허용되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개인적으로 숭배하던 것이 공의회의 조치로 공식적인 승인을 받아 '공교회의 교리'(doctrina publica)가 되었다. 일례로 콘스탄티우스는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미카엘리온'(Micahlion)이라는 교회를 세워 천사장 미카엘에게 봉헌하고 매9월에 기념제를 가졌다.


4. 기타 요소들


 앞에서 언급한 성인 숭배, 성모 숭배 그리고 천사 숭배 외에도 여러 가지 이단적인 요소들이 발견되었다. 시릴은 화상(畵像)을 예배에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네슽리우스는 이것에 반대했지만 6세기에 들어서는 그리스도의 초상을 교회 안에 설치했다. 또한 황제의 초상화에 경의를 표하는 기존의 관습은 성상 숭배에 영향을 미쳤다. "형상에 바쳐진 존경은 그 원형에게로 전해진다"고 주장되어졌다. 그렇게 해서 제작된 그리스도의 초상과 성상은 모두가 왕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콘스탄틴의 영향력을 느끼게 한다. 한편 이 시대부터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시작되었으며, 성찬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에서 일종의 제사로 생각되어지기 시작했다.


 초대교회의 말기에 들어서서 기독교의 국교화, 교황권의 강화 등을 통하여 점점 이교적 요소가 보편교회(Cotholic church) 내에 침투되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중세에 들어서면서 더욱 발전되어 그 세기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단적 요소들이 등장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교의 유입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으며, 부수적으로 기독교인들도 범죄의 가능성을 가진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잘못된 흐름에 반대하여 일어난 운동이 수도원 운동으로 안토니(Anthory of Tebes)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또 비갈란티우스(Vigilantius)는 이러한 이단적 풍속들을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속한 교회 내에 이와 같은 이단적 요소는 없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소위 '전통'의 이름으로 비성경적인 관습과 행동이 묵인되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은 성경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다시금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적인 기독교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다.

 


 1. 영구처녀설


 로마 카톨릭에서는 눅1:34에 기록되어 있는 천사의 수태고지에 대해 마리아가 응답하는 구절,

즉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는 구절을 매우 중시하였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현재시제가 계속적인 행동을 나타내므로 그 당시 마리아는 영구적인 처녀성을 맹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은 결코 성적인 결합이 아니며, 이른바 예수의 형제들과 누이는 실상은 예수의 사촌들이었다고 주장한다.

눅1:34이 의미깊은 교리적 중요성을 가져올 수 있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이 간다.


만약 마리아가 영구적인 처녀성을 맹세했다면 왜 요셉과 약혼했던 것일까?

일부 로마 카톨릭 학자들이 대답처럼 마리아는 그녀가 상속인이었기에 모세의 율법(민27:1-11; 36장)과 관습에 따라 결혼해야 했다고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용 구절은 상속자의 결혼을 말하고 있지 않으며, 마리아가 상속자라는 생각은 근거 없는 가정이다.


마1:24,25에는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로 기록되어 있고

눅2:7에는 예수가 '맏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마리아의 영구적인 처녀성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구절을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2. 암브로스(339?-397)


 고대 카톨릭 교회의 4대 교회 박사의 한 사람이며 성인. 독일의 트릴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수사학적 재능 때문에 승진을 거듭하여 370년에는 집정관이 되었다. 밀라노에 있을 때 동지의 교회 소란을 수습하여 아리우스파와 카톨릭과 양쪽의 신망을 얻어 374년에는 주교가 되었다. 그 후 니케아 정통파의 입장에 서서 교회의 자유와 권위를 수호하는데 힘을 기울였으며, 신앙·전례·주교 활동의 실천 등 위대한 공적을 남겼다.


 그는 뛰어난 설교가로서 그 필기된 것이 곧 그의 저서가 되었다. 반아리우스파의 여러 저술이 있으며, 그외에도 「성직에 관하여」, 「6일간 천지창조론」등이 유명하다. 그는 A. 오리게데스나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이 한 성서의 우의적(寓意的) 해석을 섭취한 외에 로마의 히플리스, 이레나에우스,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 등을 배워 동방 신학을 서유럽에 인식하였고, 마리아의 무원죄(無原罪)를 주장하여 중세 마리아 숭앙(崇仰)의 시조가 되었다. 또 '암브로스 성가'로 불리는 찬미가집을 만들어 「암브로스 선법」(族法)이라는 4개 선법을 제정하여 '그리스도교 찬미가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성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는 그를 존경했으며,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고 전해진다. 밀라노에는 386년에 그가 창건한 성당이 12세기의 수리를 거쳐 현존하고 있다.


3. 안토니(Anthony)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금욕주의의 창시자'로 불려지고 있는 안토니는 '수도사들의 모범'으로 여겨진다. 그는 250년경 상부 이집트의 국경 지방에 있는 코마에서 출생했다. 그는 기독교인인 부유한 부모에 의해 신앙심 깊은 환경 가운데 자랐다. 부모가 죽은 후 예배중에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그대로 복종하기로 결심하고 실천했다. 그 후 마을로부터 멀리 덜어진 곳에 은거하며 군중들을 가르칠 때만 밖으로 나왔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폐위를 당하였던 막시미누스의 박해 시대 동안(A.D.311), 그는 그곳 기독교인들을 박해로부터 위로하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355년경에는 아다나시우스로부터 아리우스주의자들을 공박하여 달라는 끈질긴 요청을 받고 알렉산드리아를 재방문하였다. 이곳에서 군중들에 의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추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암자로 되돌아와 은둔 생활을 계속하였다. 이곳에서 두 명의 제자 아마디스(Amathas)와 마카리우스(Macarius) 곁에서 105세로 죽었다. 그가 보인 본보기가 기독교인들, 특히 동방교회 내의 기독교인들이 수도원적 삶을 받아들이는 데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5세기에 그는 희랍 교회에 의하여 성자로 존경받기 시작했으며, 9세기에는 라틴 교회에 의해서도 성자로 존경받기 시작했다.


4. 미가엘


 미가엘은 성경에 네 번 언급되는데 두 번은 다니엘서(단10:13이하와 단12:1)에서 택한 백성의 조력자로, 한 번은 유다서(유1:9절)에서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는 모습으로 그리고 다른 것은 요한계시록 (계12:7-9)에서 용과 싸우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는 또한 외경 문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일찍이 교회에서 이교 군대에 대한 기독교 군대의 조력자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기독교도 개개인을 임종시에 그 영혼들을 악마로부터 보호하며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수호자로 간주되었다. 그 믿음이 사자(死者)를 위한 로마 미사의 봉헌문에 1970년까지 반영된 것이다. 미가엘 숭배는 브루기아에서 비롯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주로 치료자로서 존숭되었으며, 희랍과 아시아 양쪽의 많은 온천이 그에게 봉헌되었다. 중세 전기간을 통해 볼 때 미가엘은 보편적인 숭배를 받았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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