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왕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입력 : 2018.01.10 03:04

[106] 태종 이방원의 두 아들, 권력 '양보' 전말기

남의 여자 빼앗고 남의 땅 빼앗고 악행 일삼은 양녕대군아버지 태종 눈 밖에
셋째 동생 충녕에게 왕세자 자리 빼앗겨
세종 등극 후에도 악행'단종 죽이라' 거듭 청도
'양보''박탈' 논란 200년 뒤에야 '양보' 평가
세종 또한 맏형 스캔들 고자질하기도

박종인의 땅의 歷史
한강 남쪽 관악산에 연주대(戀主臺)가 있다. 주군을 그리워한다는 바위다. 조선 3대 군주 태종 이방원의 두 아들 양녕과 효령대군이 올랐던 절벽이다. 셋째 동생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서 두 형이 올라 한양도성을 바라봤다는 절벽이다. 칼을 묶어서 세운 듯한 절벽 위에는 신라 승려 의상이 암자를 세워놓았다. 연주대를 바라보며 물어본다. 양녕과 효령, 정말 너그러이 권력을 양보하였는가.

1418년 6월 3일 어전회의

왕이 말했다. "백관(百官)의 소장 사연을 내가 읽어 보니 몸이 송연(然)하였다. 천명이 이미 떠나가 버린 것이므로, 이를 따르겠다." 태종은 이 말과 함께 세자 이제(李)를 폐하여 광주(廣州)로 추방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을 왕세자로 삼았다.(태종실록, 태종 18년 6월 3일) 1418년 6월 3일 어전회의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렇게 왕세자가 셋째 아들로 전격 교체되고 두 달 뒤인 8월 11일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세종대왕이다. 전광석화 같았다.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는 훗날 한글이라는 과학적인 문자를 갖게 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좋든 싫든 세 왕자에게는 날벼락이 떨어진 날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이틀 뒤 태종은 '제()를 강봉해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삼았다.' 평온하게 세자 위를 물려준 왕자라는 뜻이다.

과연, 평온하였는가.

괴물 어리(於里)와 왕세자

"어리(於里)는 마음을 미혹하는 화근이요 괴물이니, 법대로 처치하여 자손만세 경계를 보이소서."(태종 18년 6월 4일) 실록은 왕세자 제()의 퇴출 원인으로 어리라는
여자를 지적했다. 어리는 세자 시절 양녕대군 첩이다. 어리와의 만남은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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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경기도 과천 사이에 있는 관악산에는 연주대가 있다. 왕위를 동생에게 넘겨준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올라가 설움을 달랬다는 곳이다. 미담인가, 비정한 권력 투쟁인가. 조선 4대 임금 자리를 놓고 벌어진 이야기가 재미있다. /박종인 기자
"어리의 아름다움을 들은 적이 오래였다. 소문을 듣고 친히 그 집에 가서 나오라고 하니 어리가 마지못해 나왔는데, 머리에 녹두분이 묻고 세수도 하지 아니했으나, 한 번 봐도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타고 온 말에 태우고 나는 걸었다. 그날 밤 광통교(廣通橋) 가에 있는 오막집에서 자고, 이튿날에 어리는 머리를 감고 연지와 분을 바르고 저물녘에 말을 타고 내 뒤를 따라 함께 궁으로 들어오는데,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 아래 그 얼굴을 바라보니, 잊으려도 잊을 수 없이 아름다웠다."(세종 1년 1월 30일)

현대 하이틴 로맨스 소설을 보는 듯하다. 어리는 전 중추(中樞) 곽선이라는 자의 첩이다. 유부녀다. 양녕대군은 그 미모에 홀려 궁으로 끌어들였다. 이 같은 사실이 아버지 태종 귀에 들어갔다. 어리는 궁에서 쫓겨났다. 양녕은 혼꾸멍났다.

그런데 1년 뒤 양녕의 집에 유모(乳母)가 들락거리는 장면이 목격됐다. 양녕이 어리를 데려와 딸까지 낳은 것이다.(태종 18년 3월 6일) 태종이 불같이 화를 내자 양녕이 상소를 이리 올린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어리를 쫓아내시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외다(殿下侍女盡入宮中… 禁此一妾所失多而所得少).'(태종 18년 5월 30일) 태종은 "모두 나를 욕하는 것(此言皆辱予)"이라고 말했다. 사흘 뒤 왕세자가 교체됐다.

경기도 광주로 쫓겨난 양녕은 반년 뒤 담장을 넘어 야반도주했다. 태종은 양녕에게 현상수배령을 내렸다. 양녕의 허물을 모두가 어리에게 돌리니, 어리는 근심스럽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날 밤 목을 매어 죽었다.(세종 1년 1월 30일) 열여섯 살에 봉지련(鳳池蓮)을 시작으로 소앵, 초궁장(楚宮粧) 같은 기생과 놀아난 세자였다. 방미선이라는 자의 손녀가 예쁘다는 말에 이불보를 짊어지고 그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기도 했다.

끝없는 부조리

봉지련 사건 때 태종이 봉지련을 하옥시키자 양녕은 단식투쟁 끝에 그녀를 석방시키고 비단까지 선물로 받아냈다. 초궁장은 큰아버지 정종의 첩이기도 했다. 이 같은 악행 뒤에는 세자를 등에 업고 귀에 발린 말을 해대는 무리가 있었다. 방미선 손녀의 미색을 알려준 자도 그 무리였고, 그 집으로 세자를 끌고간 자도 그들이었다. 어리 사건 때 유모를 딸려준 사람은 양녕의 장인 김한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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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에 있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태종은 후계자를 놓고 큰 고민을 해야 했다.
여색(女色)은 성장한 이후 취미였다. 공부는 어릴 적부터 문제였다. "딱하다, 저 아이여! 내가 말하여도 캄캄히 알지 못하니, 슬프다! 언제나 이치를 알 것인가?"(태종 3년 9월 22일) 수업에 결석을 수시로 함은 물론 책을 읽어도 외우지 못했다. 태종은 차마 아들은 때리지 못하고 시중을 드는 내시 볼기를 때렸다. 내시는 "어찌 이게 나의 죄인가?" 하고 세자에게 대들기까지 했다. 열한 살 때 일이다.(태종 5년 10월 21일) 세자를 폐하고 벌하라는 상소가 장맛비처럼 쏟아졌다. '자식 못 이기는 아비' 태종이 마침내 어리 사건에 인내심을 놓아버린 것이다.

'평온히 왕위를 양보하다'

밤이 깊도록 세자가 기생 초궁장을 끼고 술을 마시다가 공주에게 이르기를, "충녕(忠寧)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忠寧非常人也)."(태종 14년 10월 26일) 실록에 보이는 몇 가지 언행과 '양녕(讓寧)'이라는 군호에 사람들은 그가 동생 충녕의 인품을 보고 미친 척을 하고 세자 위를 내놓았다고 말한다.

논리가 성립하려면 모든 악행은 세상 물정을 안 이후에 벌어졌어야 하고 동생이 왕이 된 이후에는 악행을 그치고 왕을 보필했어야 한다. 실록을 읽어본다.

'세자가 노하였으나 애써 충녕의 말을 따랐다. 이후 세자는 대군(大君)을 매우 꺼렸다.'(태종 16년 3월 20일, 충녕대군의 충고에 대한 반응)뿐만 아니다. 어리 사건으로 정신이 없던 양녕이 길에서 충녕을 만났다. 세자가 화를 내며 "어리의 일은 반드시 네가 아뢰었을 것이다" 하니 충녕대군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태종 18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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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상도동에 있는 양녕대군 묘.
세종이 왕위에 오른 뒤는 어떠하였는가. 쫓겨난 광주 땅에서 남의 첩을 내놓으라 행패를 부리고(세종 1년), 남의 논을 빼앗고(세종 2년), 백성을 동원해 집을 짓고 술을 먹여 죽게 한 뒤 '나를 벌하면 나와 전하 사이가 소원해질 것'이라 협박하고(세종 4년), 중국 사신 접대를 무시하고 창녀와 놀고, 아버지 태종이 죽고 20일 만에 논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세종 5년), 인명 피해를 이유로 금지된 집단 돌싸움을 아들들과 함께 진두지휘했다(세종 20년). 왕이 된 동생을 보필하는 행동은 아니다.

세종이 죽고 문종에 이어 단종이 즉위했다. 조카 손주다. 그즈음 자기 조카인 수양대군과 양녕이 절친하게 되었다. "수양(首陽)은 천명(天命)이 있는 사람이다."(단종 즉위년 윤9월 27일) 열흘 뒤 양녕의 집에서 술 파티가 벌어졌다. 모두 쓰러지고 수양만 멀쩡했다. 양녕이 이리 말한다. "천하의 호걸(豪傑)이다."

1453년 수양의 쿠데타, 계유정난이 성공했다. 양녕은 주요 국가행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세조가 동생인 안평대군 처리문제로 고민하자 양녕은 '주저치 말고 목을 베라'고 종용했다.(단종 1년 10월 13일) 4년 뒤에도 양녕은 "속히 결정해 보류함이 없기를 바라고 있다"고 거듭 청한다.(세조 3년 1월 29일) 조카 손주를 하루빨리 죽이라는 것이다. 재촉은 그해 겨울까지 거듭됐다. 단종은 큰할아버지 주청대로 되었다. 양녕의 처신이 '덕이 지극히 높은 평온한 권력 이양'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은 200년 뒤인 1675년이다. "양녕은 왕위를 스스로 양보한 지극한 덕이 있으니."(숙종 1년 3월 26일) 서울 상도동에 있는 양녕대군 사당도 지덕사(至德祠), 덕이 지극하다는 뜻이다.

'평온히 왕위를 양보받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세종대왕상.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세종대왕상.
세종은 어떠했는가. 학문을 밝히고 영민한 왕자였다. 권력에는 뜻이 없는 군자였다. 그런데 이상한 기록이 보인다.

금지된 사랑, 어리와 왕세자 양녕이 벌인 불륜을 도대체 태종이 어찌 알았을까. 저 아름답고 낭만적이기 짝이 없는 광통교의 사랑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을까. 사관(史官)이 왕세자의 뒤를 일일이 쫓아다닐 수는 없는 법. 실록을 본다. 세종 1년 1월 30일자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세자가 일찍이 금상(今上)더러 이르기를." 금상은 지금 왕이니, 세종이다. 그러니까 맏형이 동생에게 자랑스레 털어놓은 연애담이 한 자도 빠짐없이 아버지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러니 어리 일을 고자질했다며 자기를 다그치는 형에게 묵묵부답할 수밖에. 실록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임금(세종)은 이 사실을 다 상왕(태종)에게 아뢰었다.'왜 그랬을까. 문득 어릴 적 기록을 보니 짐작해 볼 구석이 있다.

'이 작은 왕자(王子)가 또한 장(長)을 다투는 마음이 있다.'(태종 9년 9월 4일) 왕자들의 교육을 담당한 김과(金科)가 한 말이다. 이 작은 왕자는 충녕과 효령을 가리킨다. 훗날 태종의 채근에 김과는 '왕자들이 네 살, 다섯 살 때 내가 그런 말을 분명히 했다'고 거듭 말했다.

땅에는 흔적이 남고 문헌에는 기록이 남는다. 미담이 괴담일 때가 있고 괴담도 미담일 때가 있다. 양녕, 정녕코 권좌에 뜻이 없었는가. 충녕, 당신도 야심이 없었는가.



출처 : http://new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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