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신익희·지청천·이범석.. 임정 요인도 建國정부 요직에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2018.01.01. 03:43


[정부 수립 70년―실록: 臨政과 건국] [上] 하나의 뿌리
이시영, 1948년 1월 北·소련이 유엔 위원단의 입북 거부하자 "남한 단독선거 불가피" 성명
신익희도 "통일 정부는 어렵다"
임정 광복군 사령관 출신 지청천, 신생 대한민국 軍事토대 구축
광복군 참모장 출신 이범석 '族靑' 만들어 청년 간부 육성


올해는 대한민국정부 수립 70주년이다. 내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1919년 3·1운동으로 터져 나온 민족적 독립 의지를 모은 임시정부 수립으로 시작된 대한민국 건국은 1948년 정부 수립으로 완성됐다.

임정 요인들이 1940년 중국 중경에 자리 잡은 뒤 복국(復國)과 건국 작업을 본격화하고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는 과정을

당시 선언문·성명서·신문·회고록 등 사료(史料)를 통해 살펴본다.

初代 부통령 이시영 취임사 - 1948년 7월 24일 대한민국정부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는 이시영 부통령.


"이번 기념일에는 우리 겨레가 거족적(擧族的)으로 대망하던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포하게 된 만큼 특별한 감명이 없을 수 없다. 물론 우리에게는 남북을 통일하는 역사적 대과업과 국제 우방들의 정식 승인을 얻어야만 될 정치적 대사명이 남아 있는 만큼 앞으로 더욱 민족적 단결을 공고히 하고 삼천만 일심(一心)으로 이 중대난국을 돌파해 나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정부가 공식 출범한 1948년 8월 15일 아침 조선일보는 1면에 이시영(1869~1953) 부통령의 기념사를 실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이래 법무·재무총장을 역임하며 임정을 지킨 원로 독립운동가인 그는 1945년 11월 환국한 뒤 대한민국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한 대표적 임정 요인이었다. 그는 한말(韓末)엔 명문가 출신의 고위 관료로 민족운동을 벌였고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둘째형 이회영 등 6형제가 가산을 정리한 뒤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신탁통치, 미·소공동위원회, 유엔 감시하 총선 등 커다란 쟁점이 제기될 때마다 격랑 친 정국에서 이시영은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확고하게 지지했다. 그는 1948년 1월 북한과 소련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入北)을 거부하자 남한 단독선거가 불가피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나는 금일 이 시간까지나 금후라도 남북통일 독립국가를 염원한다. 그러나 약소민족을 부식(扶植)한다는 신호를 잘 지켜왔다면 미소공위(共委)가 2년 전에 한국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금번에도 소련이 종시 거부한다면 우리는 다 죽어가는 동포를 그대로 볼 것인가. 우리의 주권(主權)을 세워놓고 동포 구제와 군정 철폐의 긴급성을 전제 삼아 재남(在南) 이천만 대중의 멸절(滅絶)을 만회함에 급선 착수하는 것이 현실에 적합한 조처라고 본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선포 - 1948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지 38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수립됐음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조선일보 DB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에 이어 제헌국회 의장이 된 신익희(1894~1956)는 임정 요인 중 반공(反共) 단정(單政) 노선을 가장 명확히 했다. 임정 출범 때 임시헌장을 기초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43년 임정으로 돌아와 내무총장을 맡았던 그는 1945년 12월 환국 후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위원회를 만들고 임정의 정치활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반공 의식이 강하고 국제 정세에 밝았던 그는 미·소(美蘇)의 역학관계나 남북한의 이념 분쟁을 고려할 때 통일정부 수립이 어렵다고 봤다. 절친한 사이였던 임정 외무총장 조소앙의 남북협상 참여를 만류했던 그는 제헌의원 선거에 참여해 경기도 광주에서 무투표 당선됐다.


이승만 정부 첫 내각의 무임소 장관 지청천(1888~1957)은 임정 산하 광복군 사령관 출신으로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군사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한말에 정부 유학생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한 그는 1919년 만주로 망명한 뒤 독립군 지휘관으로 혁혁한 활동을 보였고,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립되자 사령관에 임명됐다. 광복 후 중국에 남아 광복군 확대 책임을 졌던 그는 1947년 4월 귀국한 뒤 우파 청년단체들을 통합해 대동청년단을 만들었다. 그가 미 군정에 제출한 '건군(建軍) 계획서'는 당시 시국 인식과 국군 창설 구상을 보여준다.


"한국 문제에 관한 한 미국과 소련의 협정에 의한 해결은 불가능하다. 통일한국 수립에 국제적 추세가 유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군대의 건설이 긴요하다. 다양한 청년단체는 대동청년단으로 통일됨으로써 한국 군대의 조직을 위한 계획이 추진될 것이다."

(왼쪽부터)신익희, 지청천, 이범석, 김상덕

지청천은 독립운동을 벌이면서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남북협상이 어렵다고 봤다. 그는 김구에게 평양으로 가지 말고 이승만과 힘을 합치라고 권유했다. 그는 제헌의원 선거 때 서울 성동에 출마해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됐다. 대동청년단은 당선자 12명을 내서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55명), 김성수의 한국민주당(29명)에 이어 셋째로 많았다. 그는 여순반란 사건이 발생하자 대책위원장을 맡았고, 국회 국방위원장으로 국민개병(皆兵) 정신에 입각한 병역법을 발의했다.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 이범석(1900~1972)은 광복군 참모장 출신으로 광복 후 광복군 출신 청년들과 민족청년단(족청)을 만들어 대한민국에 청년 간부를 공급했다. 1946년 6월 광복군 500여 명과 함께 미군 병선을 타고 귀국한 그는 그해 10월 '민족지상(至上), 국가지상'을 내걸고 미 군정과 민족진영 지도자들의 후원 아래 족청을 출범시켰다. 족청은 창단선언문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청년의 정신을 작흥시키고 청년의 진로를 명백히 하여 건국성업(建國聖業)에 역군이 될 것을 제기하려 한다"고 밝혔다. 족청은 대한민국정부 수립까지 중앙과 지방에서 9만명에 가까운 청년을 교육시켰고 100만명에 이르는 단원을 확보했다. 그리고 제헌의원 선거에 참여해 6명을 당선시켰다.


제헌국회에 참여한 임정 요인으로는 또 김상덕·연병호가 있다. 임정 문화부장 출신인 김상덕(1891~?)은 환국 후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으로 활동했고 제헌의원 선거 때 경북 고령에서 당선됐다. 그는 1948년 구성된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임정의 입법부인 임시의정원 의원이었고 상해에서 일제에 체포돼 국내로 연행된 후 7년간 복역했던 연병호(1894~1963)는 충북 괴산에서 당선됐다.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김붕준(1888~1950)은 서울 성동에서 출마했는데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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