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본다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누구나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렇다고 바로 알고 있거나 그 의미에 대하여 깊이 있게 아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여러면으로 접근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知的)인 욕구를 만족케 하자는 것보다는 그 의미 하나 하나를 우리들의 신앙의 삶과 연관지어 점검하자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서 이룩하신 구원은 우리들의 삶 안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온 생애의 가치를 십자가와 부활에 두고 있는 우리들의 실제적인 삶 안에서 구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알고 있는 것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하고 열매를 맺어야 구원의 신앙이라는 점을 명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요셉의 신앙에 대하 여 깊은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역사 안에서 구원의 사역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살펴봄으로서, 비로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았던 것입니다.


특히 주의 사자가 꿈에서 계시한 이야기에 대하여 요셉은 명확하게 이해하였기 때문에 구속 역사를 진행함에 있어 중대한 시대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마 1:21)는 말에 대하여 깊이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예수'의 의미

예수(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to save, deliver)에서 나온 말 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또는 '여호와여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수님 당시의 문헌들을 보면 이 '예수'라는 이름은 평범하게 널리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 이름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적 성격 즉 '여호와여 구원하소서'라는 기대감이나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시대적인 요청이 그 시대 저변에 깊고 널리 깔려 있던 시기여서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다윗 왕국이 멸망한지 680여년이 흐르는 동안 유대인들은 속히 그 나라가 회복될 것을 소망하는 메시아적 대망이 강렬했던 기대감이 그런 현상을 유발했던 것입니다.


주의 사자는 이러한 일반적인 소망과 당시 시대적인 배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의미를 '예수'라는 이름 속에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사상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가 여호와께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메시아적 기대감에 가득차 있을 때에 주의 사자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예수의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적 기대감과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들의 압제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 군대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정치적인 소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히려 죄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한 천사는 영적인 구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임재는 정치적인 해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해방을 하는 영적인 구원을 위해 오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메시아의 사역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독특한 사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사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하실 수 있다고 믿어 왔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선 그에 합당한 제물을 제사로 드려야만 하였던 것입니다.
무언가 죄의 대가를 치르고 피를 흘려야 속죄가 된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공통적인 민족적 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태어나서 사람들의 죄를 사해 주고 죄로부터 구원케 한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사자가 명확하게 그러한 이야기를 했었기 때문에 요셉은 더욱 의미 심장하게 받아들이고 심사숙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한 말 가운데에는 예수가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됩니다.
 "자기 백성"이라는 표현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소유주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왕의 책무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로부터 구원한다는 것은 사실 하나님이 아닌 이상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다 해도 죄를 구속할 수 없는 인간이라면 도무지 주의 사자가 한 말은 신빙성이 없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백성의 죄를 구속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께선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력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마리아에게서 날 사람이었습니다.
법적으로는 요셉의 아들이 될 것이며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어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실 분입니다. 예수는 정상한 인간입니다.
 
이러한 논리의 귀결을 따라 생각한다면 예수라는 이름 속에는 3가지의 특성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첫째 예수는 영적인 해방을 위해 오셨으며
둘째, 그 분은 이스라엘의 소유주이신 왕이시자 하나님이시며
셋째, 요셉의 아들로서 태어난 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사자가 계시한 '예수'라는 이름 속에서 우리는 메시아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속성들을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아는 정상한 인간입니다.
그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런 메시아 관은 그때까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성육신(incarnation) 하실 수 있는가?"는 도무지 사람들의 이성으로선 생각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이 성육신 사건은 천사들도 알지 못했던 비밀(엡 3:9) 이었으며 하나님께서 보이신 지혜의 극치입니다. 사탄도 이것만은 생각을 못했습니다. '여자의 후손'(창 3:15) 즉 약속의 후손이신 메시아가 태어나 사탄을 정복하고 악을 제거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담과 하와에게 있은 이후로 줄곧 사탄은 인생들을 미혹하고 넘어뜨려 장차 태어날 '여자의 후손'을 제거하려고 숱한 방법을 다 동원해 왔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어 '약속의 씨(후손)'가 되실 줄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고작 소망하던 메시아는 로마로부터 정치적인 해방을 가져다 줄 비범한 사람일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르고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역사를 진행시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친히 몸을 입고 오시어 그 백성의 죄를 구속하심으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계획이 '예수'라는 이름 속에 계시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장 21절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를 사해준다는 말 가운데서 예수가 신성을 가졌음을 주의 사자가 선포했는데, 예수는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사상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전혀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마태는 이미 이러한 사상 곧 메시아께서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라는 성육신 교리가 이미 선지자들의 예언 가운데 있었고 그 예언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제시하여 더이상 오해하지 않도록 돕고 있습니다. 바로 그 예언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마 1:23)는 말씀입니다.


2. '임마누엘'의 의미

임마누엘( , )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할 때에는 아주 특이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BC 735년경 점점 강성해지는 앗수르를 제거하기 위해 아람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유다 왕인 아하스에게 동맹을 제의해 왔었습니다. 아하스는 오히려 아람과 이스라엘의 제의를 거부하고 친 앗수르 정책을 폈습니다. 그러자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아하스를 공격해 왔습니다(사 7:1-2, 왕하 16:5).

유다는 연합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함락당할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이런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때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의 계시를 받아 아하스에게 찾아와 결코 아람과 에브라임(북 이스라엘)이 이기지 못하고 패배할 것이며 북 이스라엘은 65년 내에 완전히 패망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사야는 아하스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격려하였습니다(사 7:3-9). 유다 왕국만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요동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의 계명에 따라 살 것을 권고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사 7:11)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유다를 보호하시고 이 위기에서 건지실 징조를 하나님께 구하면 그 증표를 보여주실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아하스는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사 7:12)고 하면서 이사야의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아하스가 여호와를 향하여 아무런 징조도 구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헤어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람과 이스라엘 군대가 침략한다고 할지라도 든든한 앗수르 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신을 보내어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원하소서"(왕하 16:7)라고 원군을 청한 상태였습니다.

그 대가로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많은 은과 금을 예물로 바쳤습니다. 이처럼 아하스는 이미 값진 보화를 보내어 든든한 원군을 사 놓았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을 의뢰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세움을 받은 유다의 왕으로서 이와같은 일을 꾸민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다 왕국은 결코 아하스의 소유가 아닙니다. 아하스의 왕권(王權) 역시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왕권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위임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왕권을 위임하신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자태를 드러내고 그 문화를 창달하여 이방에 구원의 빛을 비추는 제사장 나라로서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함이었습니다(출 19:5-6). 다윗은 평생을 다해 이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윗의 왕권을 승계한 후손들 역시 그러한 다윗의 뒤를 이어 자기들에게 주어진 왕권을 바르게 행사하여 유다가 하나님의 나라로서 영광스러운 자태를 온 땅에 드러내도록 하여야 합니다.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 가운데는 인류 구원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성취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지존하신 계획이 담겨 있음을 알고 그 약속의 후손답게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맞추어 경영하여야 했습니다(삼하 7:7-14).
 
이러한 사명을 승계한 아하스였기 때문에 세상의 막강한 군대의 힘을 의지하거나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자기에게 위임된 나라인 유다를 다스려 나가고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하나님의 율법으로 바로 서서 모든 이방에 대하여 구원의 빛으로서 우뚝 서서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자기에게 맡겨진 중대한 역사적인 직무임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유다의 왕이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이방의 군사력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세움을 받은 자가 세속의 왕을 향하여 '아버지'라 하고 자기를 '신하'로 격하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아 들로서 하나님을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는 아하스가 세속의 왕을 하나님 보다 위에 두었다는 것은 심각한 배도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심각한 위기를 느낀 이사야가 오히려 아하스에게 징조를 보여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뻐더와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 바 되리라"(사 7:13-16)고 말합니다.

이 예언을 통해 이사야는 한 아기가 태어나서 선악을 분별할 만큼 자라기도 전에 유다를 공격하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두 왕이 패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이 예언대로 얼마되지 않아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 의해 패퇴되고 말았습니다(왕하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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