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신학의 논쟁


 

1. 성서적 기독론에 대하여


*하나님과 신학에의 당위

신학이란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기독교의 신학 연구는 올바른 신앙을 말씀에 기초하도록 하기 위하여 필요하며 오늘날과 같이 이단과 사이비 학설이 난무하는 혼란한 때일수록 올바른 신학의 연구가 요청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에 대해 교회는 신학 논쟁에서 가장 정당한 진리를 가지기 위해 연구하고, 정당한 교회의 대표자들에 의해 규례 또는 교의를 확정한다. 신학 논쟁을 통해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들이 확정되기도 하였으나 이런한 논쟁의 과정을 통해서 교회가 분열하기도 하였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교리는 확립되어왔다.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신가

요즈음 다미 선교회 등 사이비적 말세론은 결국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독론에 대한 올바른 지식의 결핍에서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초대교회 시절부터 있어 온 것이다.

주후 4세기경 아리우스는 예수님은 존재하기 시작한 때가 있으므로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따라서 그는 성부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가진 하나님일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예수님은피조물이며 영원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는 사벨리우스의 이단적 주장을 경계하며 성부로부터 구분되는 성자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한 시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주장으로 인한 문제로 니케아 회의가 소집되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아다나시우스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이시요...본질과 위격은 같다”라고 하는 주장을 하였고 그의 주장을 수용하여 성부와 성자는 ‘동일본질’이라는 내용의 니케아 신조가 채택되었다.


* 이단적 삼위일체 주장들

성서적인 기독론에 대해 이단적 주장을 한 것은 영지주의, 말시온, 군주론 등이 있다. 영지주의는 그리스도께서 약한 육체를 입은 것이 아니고 육체를 입은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가현설을 주장하였고, 말시온은 구약의 하나님을 열등시하며 그리스도는 선한 신이라 하여 대립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 군주론은 예수께서 양자가 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고 하는 동태적 군주론과 하나니의 삼위란 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 세가지 다른 양식 또는 양태로 나타나시는 것을 말하는 양태론적 군주론이 있다. 양태론적 군주론은 성부 자신이 수난을 당하셨다고 하는 성부수난설과 사벨리우스주의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 그리스도의 성품과 의지론.

아폴리나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면 그의 무죄성을 보장될 수 없고 그의 속죄 사역도 보장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한 인격체 안에 신성과 인성이 똑같이 존재할 경우 변하기 쉽고 죄짓기 쉬운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와 조화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폴리나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교회는 칼케돈 공의회를 열어 그리스도께서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시고, 이성적 육체와 영혼을 가진 진정한 인간임을 확인하였다. 또한 신성과 인성이 별개라고 하는 네스토리우스파의 주장에 대하여 에베소 회의는 그리스도의 양성이 연합되었으나 완전한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이신 한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선언했다. 후에 칼케돈 회의의 결정에 대해 반발하며 소위 ‘단의론’의 주장에 대해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그리스도에게는 두 자연적 의지 혹은 의지 작용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 반대되지 않으며 인간적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한다”고 반박하였다.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와 꼭같은 인간이고 한 인격이신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함께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의 의지가 함께 존재한다고 하는 교리는 이러한 여러 논쟁들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 다미 선교회 이장림 목사를 중심한 이단적 기독론

이장림 목사는 그리스도 안에 두 인격이 존재하는 것처럼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아들은 모른다”는 제림의 때에 관한 성경의 기록은 예수가 사람의 아들로서는 모르는 것이라고 하여 정통적 기독론을 부정한 것이다. 또한 그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동일시하여 군주론의 주장을 다르게 된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므로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재림의 때도 아신다고 하는 주장을 한다. 이장림 목사의 기록론은 교회사에서 이미 이단으로 정죄된 교리들을 채택한 것이다.



2. 성령론에 관하여


* 성령론 논쟁

니케아 회의 이전의 성령론은 성자와 성령을 동일시하는 허마스와 성자는 하나님의 피조물 중 최고의 피조물이며 성자가 창조한 최초의 피조물이 성령이라고 하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있었다.니케아 회의 이후에는 아타나시우스 등에 의해 성령이 완전한 신성과 성부 성자와 더물어 동질의 신성을 가진 것이라고 주장했고 어거스틴은 성령에 관해 종속적 개념을 벗어나게 했다.


*성결론 논쟁

칼빈은 원죄는 죽을 때까지 여전히 남아 있는다고 가르치고 케직파는 신자가 성결을 체험할 때 원죄가 그 세력을 잃어버린다고 주장한다. 심프슨 등은 그리스도를 높이고 자기를 부정하여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인한 생활을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현재성을 강조하며 순간적 성결을 주장한다. 저자는 웨슬리의 성결은 성령 충만으로 온전한 헌신을 이루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3.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하여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하여 두가지 국면 즉, 타락 이전의 자유의지와 타락 이후의 자유의지를 나누어 설명한다. 타락 이전의 자유는 자기 책임하에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며 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결과에 대하여 인간은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완전히 상실되었다.


어거스틴은 은총론은 이러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타락과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구성된다. 펠라기우스 논쟁은 후에 루터와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란 영우너한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협동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인간의지의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이에 대해 루터는 장의지라는 용어는 신적인 것으로 오직 하나님에게만 사용될 수 있가도 보았다. 그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나 마귀의 의지에 의해 지배되는 노예의지일 뿐이고 이것은 의를 이루는 일에나 구원을 얻는데 가장 큰 적이 된다고 보았다. 저자는 에라스무스의 선행 은총론과 자유의지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웨슬리는 보편적 구원의 교리에 관해 설교하며 구원이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준비되어 있다고 하는 예정론을 반박한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는 인간의 능력을 자유의지라고 부른다. 웨슬리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주장하지만 선행 은총을 통해 초자연적으로 회복된 자유의지에 모든 사람에게 있음을 주장한다. 우리는 웨슬리의 주장을 신인 협동설이라고 부른다.



4. 죄의 기원


웨슬리는 죄의 기원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찾으려고 했다. 터툴리안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범죄하였는데 그의 타락한 본성이 후손들에게 전가된다고 하는 본성의 오염을 원죄라고 불렀다. 펠라기우스는 원죄의 가능성을 부인하였고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터툴리안의 주장을 더욱 심화시켰다. 후에 알미니우스는 죄란 자유의지의 남용을 통한 인간의 자발성과 고의성이 내포된 자범죄라고 하였다. 죄의 기원 특히 원죄의 기원에 관하여서는 연대설, 영혼과 육체가 결합할 때 인간이 죄성에 오염된다고 보는 간접 전가설 등일 있다. 저자는 인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협동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고 회복시켜주신 바 자유의지의 선용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신인 협동설을 옹호한다.



5.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 그리스도의 완전/종교 다원주의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향하여 “온전하라”고 하시는 명령은 죽음 이전에 현재적 삶 가운데서 이루어야 할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칭의 이후에 주시는 성결의 단계를 지칭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웨슬리는 그런한 견지에서 그리스도의 완전을 점진적인 면과 순간적인 양면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종교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신학자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기독교의 주장을 부정한다.종교 다원주의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한 구속사를 부정하고 신중심주의를 말하는데 이것은 인격적이 아닌 비인격적이고 추상적인 신개념이다.다시 말하면 종교 다원주의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며 기독교의 구원관을 부정하는 것이다.저자는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다른 방법을 찾으려 하는 것 자체가 타락한 것이라는 전통적 견해를 지지한다.


* 구원의 종류 그리고 시기/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행위론

교회사와 성경에 있어 십자가로 완성된 구원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있는데-율법주의, 에비온파, 노스틱주의, 반율법주의, 갈라디아인주의, 펠라기우스주의, 가톨릭의 구원관-이들은 성경적잊 못한 견해들이다. 이 견해들 가운데서 율법주의와 갈라디아인주의 등은 구원의 시작과 보존에 있어 율법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것들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이룩된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구원에 있어 의인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고, 동인은 성령이시다. 칼빈은 하나님이 제한적으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예정론을 말하지만 웨슬리는 하나님의 선행 은총을 말하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능력이 보편적으로 미침을 말하였다. 바울(믿음)과 야고보(행함)와의 문제는 그들의 저작 동기의 상황의 차이점과 그것들을 삶에 있어 조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이해할 수 잇을 것이다.



6. 성서적 성결론


* 성경적 성결론

칼빈은 성결의 진행성과 점진성을 강조하지만 웨슬레는 성결의 점진성과 즉각성을 강조하는데 즉각성은 칼빈과의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웨슬리가 말하는 성결은 하나님의 완전이나 천사들의 그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체험하고 이를 강조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마음의 악한 생각과 죄된 기질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성결이라고 불렀다. 결국 그가 말하는 성결이란 계속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점진적인 면을 내포하는 순간적인 경험을 말한다.



7. 교회와 복음 사역


* 성서적 교회론

동방 교회에 비하여 서방교회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을 통하여 성서적 교회론을 확립시켜 나갔는데 당시 교회론은 주로 어거스틴의 견해에 의한다. 어거스틴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아니하는 교회’를 나누어 설명하는데 그러한 분류에 의하여 예정론을 펴기도 한다. 어거스틴은 성례와 같은 예전 자체가 의미를 지니며 이 세상에서의 교회는 절대적인 거룩을 소유할 수 없고 특별히 박해 때에 배교했던 소수의 감독들이 신실치 못하다고 하여 교회가 부정해 지는 것은 아니며 교회의 성결은 장래에 완성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하여서도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기독교인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지상의 일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정치적 국가를 필요로 하며 국가와 교회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와 복리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특히 그는 “신의 도성”에서 주장하는 바 교회와 국가와의 김닐한 협력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 여성 안수와 교회의 사역론

사회적인 변화에 따라 여성 사역자의 안수 문제 등과 같은 사항들에 대해 올바로 부응할 수 있기 위해 여성에 관한 성경의 증언과 교회사에서의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이유로는 아담은 히브리어에서 남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로 이루어진 ‘사람’을 의미하며 동등한 관계로 묘사되므로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와 책임도 똑같이 부여맏은 것이라고 한다. 신약에서는 예수님도 여성을 사역에 사용하셨고 바울도 여서을 ‘동역자’로 보았다. 그래서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자들은 “여자는 잠잠하라”는 바울의 기록을 재해석 할 것을 주장한다. 바울의 이러한 명령은 여성을 차별하고 무시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질서가 여자들이 큰 소리를 내고 떠듦으로써 혼란해 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라 한다. 여성안수에 관해서 반대 또한 만만치 않다. 그러나 여성안수에 관해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다시 말하면 여러 부분에 있어 여성들이 은사를 발휘할 수 있는 전문적인 부분들에 대한 기능적 도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내일의 교회론

현대교회의 주요 특징 중에 하나는 교회의 대형화이다. 교회가 대형화되는 것은 신자개인의 이기적 사고, 대형 교회에서의 무명성을 즐기려는 이유 외에도 인구의 도시 집중화 현상으로 농어촌의 신자들이 유입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지역 교회’의 중요성 뿐만 아니라 ‘보편 교회’의 개념이 더욱 중요시되는 것이다. 교회는, 신자는 세상에 대하여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사회 문제나 정치에 냉담하여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고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도 문제이다. 내일의 교회상은 교파별, 지방회별 등 개교회주의를 벗어나 연합 사업을 확대하는 것이고, 선교 문제에 대한 공동 계획과 관리, 교육 문제와 부흥외 등의 개선이 필요할 것이다. 교회의 목회자는 영적, 지적으로 자기 향상을 꾀해야 한다. 내일의 교회는 깊은 기도와 성경 연구에 따라 특색있는 자기의 목회 스타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개성시대에 알맞는 목회 방법을 개발함으로 밀접한 교회 속에서 생존과 발전의 길을 모색할 것이다. 교회에는 교회의 역할을 올바로 이루어내기 위해 직분자들이 필요한데 직분자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의 자세이다.



8. 성례론


성례란 예수님께서 제정하시고 시행하라고 명령하신 세례와 성찬을 의미한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그 두가지 세례와 성찬 외에 몇가지를 추가하여 그리스도가 제정한 7가지 성사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성세, 견진, 성체, 신품, 혼인, 고백, 병자 성사 등이 그것이다.


저자는 천주교의 7성사에 대하여 논박하며 그것들이 다 성례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기독교에서 시행되는 두가지 성례, 즉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시행하라고 명령하신 세례와 성찬은 그 뜻을 바르게 가르치고 성실히 시행함으로 성례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운총을 받아 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이 늘 승리하도록 인도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9. 성만찬에 관한 소고


흔히 성찬이라고 부르는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기 전날밤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시며 친히 제정하신 성례이다. 주의 만찬에 관한 바울의 기록에서 볼 때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여 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만찬에 관한 논쟁은 실재설, 화체설, 공재설, 기념설 등이 있다.


실재설은 칼빈이 말한대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실제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화체설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 천주교의 견해이다. 공재설은 루터 등이 지지하는 견해로써 스콜라 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기볌설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사람은 쯔빙글리인데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햐석하는 것이다. 저자는 기념설을 지지한다.



10. 헌아식과 유아세례의 성서적 의미


유아세례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그 기원을 구약의 할례 내지 결례에까지 소급하나 이는 합당치 않으며 성경에서는 유아세례를 시행하라는 명백한 언급이나 사례가 없다. 세례는 죄를 없애는 표호나 교인되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닐찐대 어린 유아 시기에 자신의 신앙을 진정으로 고백할 수 없으므로 유아세레보다는 유아의 헌신과 축복의 의식으로서의 헌아식이 보다 성경적이며 의미있는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 명문 규정이 없기 때문에 교파에 따라 실시하고 있는 유아세례를 비성서적이라고 규탄할 수는 없고 헌아식과 같은 자격으로 인정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11. 세대주의 신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한국교회 초기의 선교사들 대부분이 근본주의와 세대주의적 신학에 젖어 있었으므로 초기 한국교회에 근본주의적이며 세대주의적인 모습이 심어지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다.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성경의 무오설과 미래적 전천년설을 신봉해 왔다.


그러한 산학 사상이 오늘날에는 현실의 삶을 부인하고 극단적인 염세주의의 성향을 띠기도 하였다. 한국교회는 성경의 중심인 그리스도와 그의 재림을 고대하는 바른 신앙을 성경에 기초하여 소유하여야 할 것이고 초기 한국교회의 순수함을 회복하려는 부흥운동이 있어야 하겠다.



12. 개방 사회에서의 보수신학


기독교에 있어 자유주의적 사고는 인간의 이성에 권위를 부여하려던 계몽주의 사상에 근거를 두기도 한다. 그러한 자유주의는 성경 기록의 초자연성과 역사성을 부정한다. 또한 하나님을 초월적인 분 보다는 내재적인 분으로 강조하여 범신론적이며 종교다원주의적인 성향을 띤다. 자유주의에 개한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적 신학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 그의 재림, 초자연적 증거의 확실성 등을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믿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보수주의 신학이다.



13.재림론을 중심으로 한 심프슨의 사중복음


심프슨의 사중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증거함으로써 세상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케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래서 그의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은 재림론을 중심으로 연결된다. 타락한 세상 나라가 정의로운 하나님의 나라로 대치되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왕중 왕이신 예수님께서 지상에 돌아오실 터인데 이 왕을 모셔오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심프슨 목사는 사중복음을 강조하고 세계 선교에 정렬을 쏟았던 것이다.



15. 휴거와 환란에 대하여


무천년설, 환란 통과설, 역사적 전천년설 등은 모두 환난 통과설인데 이 견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환난이 있음을 믿는다는 것이다. 블랙스톤, 김상준, 이명직, 김응조, 이성주 등의 견해를 살펴 볼 때 성결교회의 종말관은 성도들은 환난을 통과하지 않고 공중으로 들림받는다고 하는 전천년설임을 알 수 있다. 휴거라는 말의 의미는 성도들의 자발적인 노력이 아니고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지상의 성도들이 공중으로 납치되어가듯 이끌려가게 되는 순간적인 사건이다.



16. 개인의 종말과 심판

죽음이란 육체적 죽음과 영적 죽음, 그리고 둘째 사망이라고도 불리우는 영원한 죽음으로 그 의미를 나누어 볼 수 있다. 심판은 신자에게는 보상의 자리이고 죄인에게는 정죄와 영벌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고, 마귀를 멸하시며 교회를 영접하고, 왕으로써 이 땅을 통치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재림의 때를 알 수 없으나 깨어서 주의 일에 충성하는 이에게는 어느 날이나 관계가 없을 것이다. 주님은 그러한 자를 영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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