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믿어야 하는 열 가지 이유 

 

 

1. 창설자에 대한 신빙성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그를 믿는 자들을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려는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그는 거짓말쟁이, 정신병자, 전설의 인물, 혹은 하늘의 주님이십니다.

1세기에 그 분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결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분께서 물위로 걷고, 폭풍을 잠잠케 하고, 중풍병자를 고치고, 몇 개의 빵과 물고기로 오 천명을 먹이고, 죄 없는 삶을 사셨을 뿐 아니라,

아주 무서운 죽음을 죽으셨고, 다시 사신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분의 공생애 기간 동안 몇 명의 추종자들이 심각한 문제를 들은 이후 떠나버렸을 때, 그 분은 그 분을 가까이에서 따르던 사람들에게 그들도 가겠는가를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말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요 6:68-69).


 

2. 성경의 실제성

약 1천 6백년 동안 40 여 명의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기독교의 믿음에 관한 이 책은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영원의 문턱에 까지 이르는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이고 지리학적인 무오함은 이미 고고학을 통해서 입증된 바입니다.

우리에게 전달되기 까지 사람의 손에 의해서 베껴진 정확성은 쿰란의 사해사본으로 인해서 확인되었습니다.

동쪽도 아니고 서쪽도 아닌 문명의 요람인 중동지역에서 기원한 성경은 영적인 능력 뿐 아니라, 예언의 정확성을 가지고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3. 삶에 대한 이해

모든 종교 체제들이 우리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모두가 차이점에 대한 우리의 갈망, 고통의 문제, 그리고 죽음의 불가피함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모든 종교들은 우주의 설계를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적용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믿음은 자연 세계의 종(種)과 생태계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관심들을 반영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에도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마 10:29-31).

그리스도께서는 만드신 모든 것에 대해서 깊으 사랑을 보이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느끼는 바를 느끼시기 위해서 친히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우리 자리에서 고통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연 세계의 설계와 세부적인 사항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창조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십니다 (시 19:1-6; 롬 1:16-25).


 

4. 과거와의 연속성

기독교의 믿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깊은 조상적 근원과의 연속성을 제공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아담, 아브라함, 사라와 솔로몬이 섬겼던 같은 창조주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의 과거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요 1;1-14).

그 분께서 우리들 중에 사셨을 때, 원래의 계획대로 사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분께서 죽으셨을 때, 그 분은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를 완성시키셨습니다.

또한, 죽음에서 일어나셨을 때, 그 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의 자손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생겨진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행 2:22-39; 고전 15:1-8).


 

5. 근본적인 주장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 혹은 종교적 이견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은 도덕적이거나 사회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정평이 난 신학자들이나 사회적 철학가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증인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무고한 한 사람이 죽었다가 죽은지 삼일 만에 기적적으로 자신들 사이에서 걸어다시신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고 세상에 전했습니다 (행 5:17-42).

그들의 주장은 아주 강경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의 몸은 장사되고, 남의 무덤에 누워서 봉해졌습니다.

아무도 무덤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간수들이 배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삼 일 후, 그 무덤은 텅텅 비었고 증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내놓고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6.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

초대 교회의 제자들은 극적인 변화를 가졌을 뿐 아니라, 그들 중 한 명은 아주 심한 원수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을 잡아 죽이는 사람에서 기독교에 대해서 가장 열심히 증거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갈 1:11-24).

이후에, 그는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변화가 일어났음을 증거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전 6:9-11).


 

7. 인간 특성에 대한 분석

성경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문제들이 마음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보와 과학기술 세대에 살면서 인격의 실패는 곧 가정, 정부, 과학, 산업, 종교, 과학, 그리고 예술의 체면을 손상시켜 왔습니다.

인종 차별, 마약 중독, 학대, 이혼, 성병 전염 등은 우리 사회의 평판을 완전히 망쳐 놓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문제가 무지, 음식, 그리고 정부로부터 기인한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세대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 15:19-20).

 


8. 인간 공로에 대한 관점

세대를 지내면서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바랍니다.

우리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전쟁을 벌였습니다.

아이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그들을 비폭력적으로 키우기 위해서 교육 이론들을 개발시켰습니다.

우리를 일의 노예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기술 개발에 힘을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재 난리와 난리의 소문, 처처에 지진과 기근, 사랑의 결핍,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등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말세의 징조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마 24:6-7; 딤후 3:1-5).


 

9. 사회에 끼친 영향

나사렛으로부터 온 한 목수 랍비가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달력들과 날짜가 적힌 문서들이 조용히 그 분의 탄생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붕 꼭대기들로부터 목걸이, 귀걸이 등에 있는 십자가들이 그 분의 죽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서구 사회의 관점은 사회 도덕의 기본, 과학적 방법론, 그리고 직업 윤리에 대한 기반을 통해서 산업을 가속화 했는데 이는 철저하게 기독교의 가치를 뿌리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서를 막록하고, 사회 구호 단체들은 결코 힌두교, 불교, 무교, 혹은 세속적인 불가지론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성경의 가치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10. 구원의 제공

다른 종교는 여전히 무덤에 있는 구세주들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다른 체제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죽음을 정복한 구세주를 의지하는 이들에게 영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도움을 구하면서 구조원의 도움에 의지하는 것처럼 그들의 신을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용서의 확신, 영생,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는 특권 등을 주는 체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롬 10:9-13).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우리가 그 분을 위해서 한 일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해주신 일을 받아들임에 달려 있습니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수고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 구원은 다만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죄에 대한 고백을 요구할 뿐입니다.

개인적인 신앙의 업적보다는 실패의 고백을 요구합니다.


신앙의 다른 선택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 분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구원하신 분에 대한 감사, 사랑, 그리고 신뢰을 표현하기 위함일 뿐입니다 (엡 2:8-10).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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