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의 관계



조직신학 루이스 벌코프

A.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존재가 어떤 학문적인 정의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자명하다. 하나님을 논리적으로 정의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다른 개념들과 통합될수 있는 더 높은 개념을 찾음으로써 시작하고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만 적용될수 있는 특징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기원적이고 종합적인 정의는 하나님에 대하여 적용될수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단일한 속(屬/genus) 아래 포함될수 있는 신들의 여러 종(種/species) 가운데 하나가 아니기 때문 이다. 기껏해야 분석적이고 묘사적인 정의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것은 단순히 인격이나 사물의 특성들을 지적할 뿐이며 본질적인 존재는 설명하지 못한다. 게다가 그러한 정의 조차도 하나님을 철저하게 적극적으로 묘사할수 없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완성될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정의는 하나님의 모든 알려진 속성들을 열거하는데 있으며 이 속성들은 특성상 매우 소극적이다. ....

초대교회의 몇몇 교부들은 신론에 있어서 명백히 희랍 철학의 영향아래 있었으며 제베르그(Seeberg)가 표현하듯이 “하나님의 존재는 절대 무속성적인 존재라는 단순히 추상적인 개념의 한계를 넘어서”나아가지 못했다. 한동안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면서 신적인 본질의 정의나 어떠한 적절한 지식에 대한 가능성을 부인하려는 경향이 상당히 일반적이었다. 삼위일체론에 관한 논쟁의 기간중에는 신성(Godhead)안에 있는 한 본질(essence)과 세 위격(persons)들 사이의 구별이 강하게 강조되었으나 일반적으로 본질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으로 느껴졌었다. 그러나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e)는 과감히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인식할수 있는 한 존재(호 온)와 하나님(호 데오스)은 아무튼 다른 용어들보다 더 본질의 이름들인데 이중에서도 존재가 더 선택할만하다.” 그는 이것을 절대 존재의 묘사로 여긴다.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어거스틴의 개념도 그레고리의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중세에도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어떤 지식을 가질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거나 그러한 지식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어느 한 속성이 하나님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으로 선택되었다. 그렇게 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자존성을 둔스 스코투스는 하나님의 무한성을 선택했다. 하나님의 단순성을 고려하여 하나님을 순수 행동(actus purus)으로 묘사하는 일도 괘 일반적이 되었다. 종교 개혁자들과 그들의 후예들도 역시 하나님의 본질을 불가해한 것으로 말했고 루터는 이점에 있어서 매우 강조했지만 그래도 종교 개혁자들은 그것에 관한 지식을 모두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일성과 단순성, 영성을 강조했다. 벨기에 신앙 고백의 언어들은 매우 특징적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으로 부르는 한 분의 단순하며 영적인 존재가 있음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 후대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본질을 추상적인 존재나 보편적인 실체, 순수 관념, 절대 인과율, 사랑, 인격성, 장엄한 거룩성에서 발견했다.(the numinous)


B.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인식 가능성

앞 부분에서 이미 나타난 사실은 그의 본질적인 존재 안에 계신 하나님에 관한 인식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초대 교회 시대부터 교회 지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중세 시대를 거쳐 종교 개혁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일치된 견해응 존재의 깊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 불가해한 분이시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사용된 언어가 너무 강해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어떠한 지식도 허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그러한 언어를 사용한 사람들도 최소한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해야할 정확한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을 구별하는 일을 무시하는데서부터 쉽게 오해가 생겨날수 있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모든 사변들이 함축될수 있는 세가지 질문 즉 하나님은 계시는가?(An sit Deus)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Quid sit Deus) 하나님은 어떤 속성을 가지고 계신가?(Qualis sit Deus)에 관하여 말한다.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것이며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본성이나 본질, 세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본 단원에서 주목하는 것은 특별히 두 번째 질문이다. 그런데 그 질문은 하나님은 무엇인가, 무엇이 하나님의 내적인 본질을 특성인가 무엇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만들었는가이다. 이 질문에 적절히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신적 존재에 관한 만족스런 설명을 제공해야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유한자는 무한자를 파악할수 없다. 소발은 강한 부정의 어조로 “내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욥11:7)라고 질문한다. 또한 우리가 두 번째 질문을 세 번째 질문과 전적으로 별개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부정적인 대답은 훨씬 더 함축적인 것이 될것이다. 그의 속성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떠나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어떠한 지식도 가질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속성들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한 우리는 비록 우리의 지식이 인간의 한계에 예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신적존재에 관하여 다소 지식을 가질수도 있다.

루터는 매우 강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이나 존재에 관한 어떤 것을 알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숨어 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과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을 구분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계시된 하나님을 알 때 그를 단지 숨어 계신 가운데 알수 있을뿐이라고 주장한다. 루터는 이 표현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계시에서도 본질적으로 계신 그대로의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으시며 그분의 본질은 여전히 불투명한 어두움에 싸인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관계를 맺으실때에만 하나님을 알수 있다.

칼빈도 역시 하나님의 본질을 불가해한 것으로 언급하였다. 그는 존재의 깊이 속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될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본성(quid)과 속성(qualis)에 관한 지식을 말하면서 칼빈은 우리의 실제적인 관심이 후자에 놓여 있어서 전자에 대하여 숙고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그들의 정신은 하나님이 무엇인가(quid sit Deus)에 관한 문제에 고정되어 있어서 딱딱한 사변들을 가지고 장난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때에 우리가 실제로 알려고 힘써야 할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어떠한 종류의 인격(qualis sit)이시며 무엇이 그의 본성에 적절한가에 관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알려질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나 본성에 관한 어떤 것을 알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지식은 선천적인 방법(a priori)들에 의해서는 얻을수 없으며 단지 속성들을 통한 후천적인(a posteriori) 방법에 의해서만 얻을수 있는데 칼빈은 그것을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참된 결정으로 여긴다. 속성들은 적어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분이신가에 관한 약간의 지식, 특별히 우리와의 관계속에 계신 하나님이 어떤분이신가에 관한 지식을 전달해 준다.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다룰 때 철학사에서조차도 드문 쿠쟁(Cousin)의 입장과 같은 것은 분명히 피해야 하는데 그 입장은 존재의 깊은 곳에서 조차도 하나님은 조금도 불가해하지 않으시며 본질적으로 알려질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어떠한 지식도 가질수 없다는 헤밀턴과 맨셀(Mansel)의 불가지론도 역시 피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수 없고 하나님에 관한 절대적이며 철저한 지식을 가질수 없지만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상대적이거나 부분적인 지식은 분명히 가질수 있다. 하나님에 관한 이러한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의 도덕적인 피조물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으시고 자신을 그들에게 계시하셨으며 또한 이러한 지식은 인간에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적이고 참된 지식이며 적어도 하나님의 절대 본성에 관한 부분적인 지식이다. 절대 존재에 관한 절대지식과 상대적이거나 부분적인 지식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과 맺으시는 그러한 관계들만을 알게 된다고는 전혀 말할수 없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알지 못하면서 이러한 관계들에 대한 적절한 개념을 갖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수 없고 단지 관계들만을 알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하나님을 알수 없으며 하나님을 우리의 종교의 대상으로 만들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오르(Qrr) 박사는 말한다. “우리는 절대 존재 깊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알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맺으시는 관계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한 적어도 하나님을 알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의 존재의 심오한 속에 계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세계와 우리 자신과 관계를 맺으신 분으로 알수 있는가에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 속에서 그리고 절대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자기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참 하나님되심을 알고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고 겸손하게 주장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갖는 이 지식을 단순히 상대적 지식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것은 또한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절대적 본성에 관한 지식이다.” 마지막의 진술들은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이 인간의 정신에 대하여 상대적일뿐이라는 관념을 피하려고 의도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현실과 그 지식이 일치한다는 어떤 확신도 가지지 못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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