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 나타난 내세


글 / 김춘기 교수(영남신학대학교 , 신약학)

내세라는 말은 "지금 있는 세상"에 대비하여 “오는 세상”(the age to come)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이 내세에 관하여 말해주고 있지만 이 경우에 내세는 하나의 독립된 개념이 아니라 종말론이라는 큰 틀 안에 있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점에서 신약성경의 내세관은 종말론이라는 넓은 범주 안에서 논하여야 할 것이다.


1. “내세”의 정의


시대를 말하는 희랍어 aion은 신약성경에서 122번 나온다. 이 단어의 뜻은 “시대,” “세대,” “때,” “생명력,” “생애” 등 여러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구약성경과 연관하여 볼 때 aion은 히브리어 olam의 번역어로 칠십인역에서 사용되는데 그 뜻은 순간적인 시간(moment)에 대비하여 긴 시간(a long time)이나 어느 정도의 시간의 흐름을 말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이 단어가 하나님과 연관될 때는 “항상”(always), “영원” 등으로 사용되었다(사 40:28).


후에 유대묵시사상이나 쿰란문서에서는 이 단어가 여러 시대의 가름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유대묵시사상에 영향을 준 조로아스터교의 종말사상에는 이 세상의 기간을 400년 단위로 하여 네 시대로 구분하였다. 주후 일세기 말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위경에 보면(2 Esd. 6:7ff.) 시대를 셋으로 구분하고 있다. 첫 시대는 이삭으로 끝나고, 둘째 시대인 현재는 야곱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심판까지고, 세 번째 시대는 부활 시대이다. 두 번째 시대인 현시대의 마지막 400년은 메시야 시대인데 이 시대의 끝에 메시야가 모든 인류와 함께 죽으며 그 후 7일간 침묵의 기간이 있은 후 부활이 오게 된다고 믿었다.


이런 구약과 중간시대에 발전된 “시대”에 관한 여러 가지 사상들이 신약성경의 aion에서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전치사 eis(into)나 ek(from)를 동반하거나 aion이 복수로 사용될 때는 제한적인 시간과 무제한적 시간 모두를 포함하는 “긴 시간,” “시간의 과정” 등을 의미한다. 이 경우 구약에서 말하는 “영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게 된다(눅 1:70, 행 3:21, 요 9:32, 롬 16:26, 엡 3:21, 딤전 1:17, 유 13, 히 1:8).


둘째, “시대,” “시기,” “세대” 등을 의미하는 경우이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는 한 시대의 끝을 말할 때 aion을 사용하고 있다(마 13:39, 28:20). 또한 이 단어는 세상의 사건, 세상의 역사를 말할 때도 사용된다. 복수형으로도 사용되는데(히 9:26, 고전 10:11) 그것은 이 시대가 연속적으로 계속된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셋째, aion이 “시대의 시간”을 말한다는 의미에서 aion은 쉽게 “세상”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고(마 13:22, 고전 7:33), 그 결과 aion과 세상은 동등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이다(고전 1:20, 2:6, 3:19). 복수형은 “세상들”을 의미한다(히 1:2, 11:3).


넷째, 현재와 미래의 시대를 구분하는 aion이다.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유대묵시사상의 영향에서 발전한 경우이다. 현재의 세상과 오는 세상을 구분하여 새로운 의미에서 aion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우리가 고찰하려는 내세는 여기에 속한다.

2. 유대묵시사상과 영지주의에서 보는 시대(aion)에 대한 견해들


신약성경의 배경을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유대배경이고 또 하나는 헬라배경이다. 유대배경은 예수로 시작하여 초대교회에 이르기 까지 신약성경의 전반적인 배경이며 헬라배경은 예루살렘을 중심한 초대교회가 소아시아와 로마로 전파되면서 영향을 받은 배경이다. 이런 배경이 형성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관점이다.


신약성경이 쓰인 당시 시대를 보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었다. 하나는 유대묵시사상에서 보는 견해이고, 또 하나는 헬라배경을 이루는 영지주의에서 보는 견해이다. 유대묵시사상은 역사를 하나의 시간의 흐름으로 보고 그 시간을 두 시대로 구분하였다. 그것이 “옛 시대”(old aeon)와 “새 시대”(new aeon)이다. 옛 시대는 아담의 타락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 때까지를 말하고 새 시대는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에서 시작한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이 시대를 구분하게 해 주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구분된 옛 시대는 과거와 현재를 말하며 이 시기의 특성은 악함과 구원불능이다. 새 시대는 선함과 부패하지 않음이라는 특성을 지닌 미래의 하나님의 통치 세계를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에 대한 인식이다. 묵시사상에 근거하면 현재는 옛 시대에 속하고 있다. 아직 하나님의 나라라는 가시적 현상이 역사 안에서 나타나지 않았기에 현재는 악함과 구원불능인 옛 시대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영지주의적 관점의 특징은 역사적 시대로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의 구분은 역사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실체(reality)이다. 실체는 시간 개념이 아니므로 영지주의적 관점에서는 역사는 의미가 없게 된다. 실체란 지금 여기의 인간의 상태를 말한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범주에 사는 존재가 아니라 선을 의미하는 “영의 세계”(realm of spirit)와 악을 의미하는 “물질의 세계”(realm of matter)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물질의 세계에 속하면 그것이 악인 동시에 소멸이고 죽음이고 구원불능이며, 반대로 영의 세계에 속하면 그것이 선이자 불멸이며 생명이고 구원인 것이다. 이런 구분은 외부적인 하나님의 나라라는 하나님의 개입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인간의 깨달음, 즉 신령한 지식인 “영지”(gnosis)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영지주의적 관점은 동적이라기보다는 정적이고, 역사적(historical)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 (ontological)이다.


유대묵시사상은 하나님의 행위, 즉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의 마지막 때에 이루어진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개인의 삶이나 역사에 하나님이 활동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옛 시대라는 역사가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활동이 시작되며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하나님의 결정적 행위가 과거에 그의 사자들을 통하여 이미 행하여졌다고 본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그 사자들을 통하여 전해진 깨달음의 세계, 즉 영지를 얻게 되면 그 사람은 물질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반된 두 가지 관점이 신약성경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유대묵시적 관점은 바울뿐 아니라 신약성경 전반에 영향을 주었으며, 영지주의적 관점은 바울이 세운 고린도교회, 빌립보교회, 그리고 요한복음에 영향을 주고 있다.

3. 신약성경이 보는 시대에 관한 견해


유대묵시사상에 나타나는 시대에 관한 두 가지 관점은 예수의 말씀에서도 그대로 나오고 있다. 예수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판에 대하여 예수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즉 내세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는 것이다. 이런 구분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고 했을 때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재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눅 18:20)고 하였다. 누가복음 20:34-35에서는 부활에 관하여 말하면서 예수는 이 세상과 상반된 부활 후 세상을 “저 세상”으로 말하고 있다. 부활 후 오게 되는 “오는 세상,” “저 세상”은 이 세상의 물질적인 보상과 달리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이런 이 세상의 끝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메시아적 징조로 답하고 있을 뿐 아니라(마 24:3ff.) 비유로 설명하기도 한다(마 13:36-43). 하지만 당시 쿰란문서나 유대묵시사상과 달리 예수의 말씀이나 비유에서는 마지막 전쟁이나 이 두 다른 세계를 지배하는 통치자나 세력들을 이원론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는다. 인자는 참된 지배자이며 악은 인자에 의하여 멸절되지만 그 악은 인자의 반대에 있는 대응 세력이 아니다. 이 세상은 두 세력의 지배에서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 피조물로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수의 말씀에서 나타난 이 세상은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영과 물질이라는 두 세력에 지배받고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내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도 하나님의 지배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로 인식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에서는 유대묵시사상에 나오는 이 시대와 오는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바울도 유대묵시사상과 같이 이 시대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 세상의 신이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고후 4:4). 이 시대는 그리스도와 분리된 죄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그리스도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갈 1:4) 오신 것이다. 특히 영지주의적 관점에 빠져서 구원의 결과가 이미 이루어 졌다고 믿는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바울은 미래적 관점인 유대묵시적 관점을 강조하였다. 고전 13장에서는 부활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통치의 미래성을 강조하고 있다(고전 15:20ff.). 예수의 부활은 첫 열매이고 그가 강림한 후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4-26)는 말씀에 준하면 원수의 진멸은 미래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유대묵시사상이나 영지주의와 다른 결정적 차이는 현재에 대한 인식이다. 바울은 유대묵시사상이 보는 역사관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것을 옛 시대와 새 시대라는 이분법적 시대 구분에서 탈피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사건 때문이다. 유대묵시사상에서 하나님의 개입인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는데 반하여 바울은 예수의 오심이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그 결과 그는 새로운 역사관을 가지게 되었다.


 아담으로 시작된 악함과 구원불능의 옛 시대는 예수의 오심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옛 시대에 속하지만 예수가 오심으로 현재는 더 이상 옛 시대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을 예수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말씀과 “하나님의 나라는 …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는 말씀으로 이미 언급하였다. 예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이 점에서 바울은 현재가 세상의 신이 지배하고 있고 세상의 통치자가 힘을 가지고 있지만 구원의 역사가 현재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그것을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말하는 것인데, 그러므로 “나타났다”는 말에서 바울은 유대묵시사상에서 말하는 미래적 하나님의 계시, 즉 하나님의 개입이 이미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고 바울은 영지주의와 같이 현재를 구원의 완성으로 보지 않았다. 예수의 오심으로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의 완성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하였지만 그 왕국은 가시적이지 않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 가운데 이 나라가 있지만 그것은 완성이 아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가시적 통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미래에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역사에 대한 관점은 이 시대와 오는 시대로 구분하거나 물질의 세계와 영의 세계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오심 이 전의 과거라는 옛 시대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나는 현 시대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시작하는 새 시대라는 세 가지 시대 구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바울이 이해한 현재는 유대묵시사상처럼 옛 시대에 속하는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는 언제나 거부의 대상이 되고 모든 궁극적인 것은 미래에만 있게 된다. 이런 경우 신자는 현재를 부정하게 되고 미래로 도망하려는 탈 역사주의적 삶을 살게 된다.

 

그렇다고 여기서 현재는 영지주의처럼 현재에 모든 것들이 결정되는 완성의 시간도 아니다. 이런 경우에는 고린도교인들과 같이 미래를 부정하고 현재를 궁극으로 삼게 되어 윤리적으로 타락하거나 반대로 극단적인 금욕주의자가 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의 현재는 새 시대의 시작인 동시에 미래적 완성을 위하여 나아가야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현재와 오는 시대는 유대묵시사상처럼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과 완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는 오는 시대의 시작으로 연결되고 이 시대는 현재의 완성으로 현재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 예수가 그리스도기 때문에 예수의 오심이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현재는 옛 시대도 아니고 오는 시대는 현재와 다른 저 시대도 아니다.


현재를 새 시대에 포함된 시대로 보는 견해는 후기 바울 서신들에서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히브리서를 보면 그리스도의 사역은 이미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기”(히 9:11- 12) 때문이다(히 10:19, 13:14). 결국 내세의 모든 것이 현재에 포함되어 있기에 현재에서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히6:5)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이 시대와 오는 시대를 구분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현재라는 이 시대가 미래라는 오는 시대와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물론 오는 시대, 즉 내세는 현재의 궁극적 완성이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이나 바울의 가르침에서 내세를 말하고 있지만 내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한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의 궁극적 목적도 유대묵시사상처럼 미래에 모든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예수사건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런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대로 현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 때문이다. 현재는 메시아이신 예수가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상태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인 내세는 더 이상 현재와 분리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내세는 이 세상과 분리된 또 다른 세상이 아니다. 내세는 그리스도인 예수의 오심으로 이 세상과 연결된 세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시간의 전환점이 되었기에(갈 4:4) 내세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나 논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4. 현재와 내세를 연결하는 영생


신약성경에서 “오는 세상”의 특성을 말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면 “영생”이다. 이 “영생”은 유대묵시사상이나 영지주의에서 내세 혹은 영의 영역에서 얻게 되는 궁극적 인간의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영생”이란 지금 이 땅위에서 사는 생명과는 다른 생명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단 12:2). 그러므로 이런 영생은 내세나 영의 영역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바울서신(롬 2:7, 5:21, 6:22f., 16:25f., 갈 6:8, 살후 1:9, 2:16, 몬 15)과 공관복음서(마 18:8, 19:16, 19:29, 눅 18:30, 마 25:41), 목회서신(딤전 1:16, 6:12, 딤후 1:9, 2:10, 딛 1:2, 3:7) 등에서 이런 미래적 의미의 영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와서는 이런 영생을 지금 여기서 얻게 된다고 말한다. 영생은 예수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기에 더 이상 미래적이거나 영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요 3:15, 36, 4:14, 36, 5:24, 39, 6:27, 40, 47, 54, 68, 10:28, 12:25, 50, 17:2f.).


결국 신약성경은 오는 세상, 즉 내세를 강조하는 유대묵시사상과 이 땅의 세계와 다른 영적 세계를 강조하는 영지주의 사상 속에서 새롭고 궁극적인 내세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 세상인 현재의 강조이다. 메시아이신 예수의 오심으로 모든 세계가 새롭게 변화되었다. 그것은 현재와 내세는 연결되어 있으며 내세의 모든 의미는 예수의 오심으로 지금 여기서 시작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세에 얻게 된다는 가장 중요한 “영생”을 현재라는 지금 여기서 얻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세의 시작이고 내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의 완성인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내세


유윤종(평택대학교 교수 / 구약학)

시작하는 말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살면서 큰 업적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 그럭저럭 주어진 생을 살아가는 사람, 주어진 생을 범죄와 악으로 채우는 사람도 있다. 그 삶이 어떠하던지 간에 나이들면 누구든지 죽는다. 어떤 영적인 신비함을 얻어 죽음의 문제를 넘어섰다고 자처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허구성을 드러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 삶을 지속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인간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 스스로 그 해답을 찾은 사람은 없다.

 

그 해답은 종교의 세계에서 얻을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어떤 종교들보다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삶은 길어야 100년이지만 내세에서의 삶은 영원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유한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내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성에 참예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모든 인간은 사후에 다른 형태의 삶을 살게 된다고 고백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죽어서 몸은 썩을 지라도 그 영혼이 천국에 있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를 신앙하지 않은 자는 그 영혼이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사후의 내세에서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임을 믿는다. 일반적으로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이러한 신앙에 대해 성서는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이러한 전제에서 구약성서를 접하게 되면 당혹감을 갖게 된다. 먼저 죽은 후 몸과 영혼이 분리된다는 개념, 내세에서 가지게 될 삶의 형태에 대한 구약성서의 주장을 하나의 일관된 이론으로 이해하고 정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구약성서는 내세의 삶의 형태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처소로서의 내세


구약성서에서 죽음이란 현재 살고 있는 땅과 친지들과 친구들, 즉 모든 관계를 떠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시 6:5, 30:9, 31:18, 사 14:11, 38:18-19, 욥 3:13-19 등). 그럼 어떻게 되는가? 완전히 무로 돌아가는 건가? 아니면 다른 어떤 곳으로 가는가? 일차적으로 구약성서는 처소로서의 내세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 용어는 1) 스올(“음부”로 번역됨, 66회 사용, 용례는 아래를 보라), 2) 샤하트(욥 33:18, 시 16:10, 30:9, 사 38:17, 51:14, 욘 2:6 등에서 “구덩이,” “음부,” “무덤”으로 번역됨), 3) 보르(시 28:1, 88:4, 88:6, 사 14:15, 38:18, 겔 32:18 등에서 “무덤,” “웅덩이,” “음부,” “구덩이”로 번역됨), 4) 모트(욥 28:22, 30:23, 38:17, 시 6:5 등에서 “사망”으로 번역됨), 5) 에레츠(출 15:12, 시 71:20, 욘 2:6에서 “땅”으로 번역됨), 6) 아바돈(욥 26:6, 28:22, 시 88:11, 잠 15:11, 27:20에서 “웅덩이,” “멸망,” “유명” 등으로 번역됨) 등으로 나타난다. 위의 단어들은 사후에 인간이 가게 될 처소로서의 의미로 사용되며, 단어들 사이에 의미의 차이가 없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스올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구약이 말하는 처소로서의 내세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는 히브리어 “스올”이라는 단어이다. 구약성서에 66회 나타나며, 우리말로 “음부”라는 단어로 번역된다. 성서 이외에 이 단어는 이집트의 엘리판틴 섬에 발견된 유대인들의 아람어 파피루스에 한번 나올 뿐이다.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하여 아카드어 sualu “지하세계” 혹은 saalu “묻다, 질문하다”에서 그 어원을 찾으려는 시도는 있지만 아직 확실한 어원은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의미를 구약성서의 용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구약성서에서 “스올”은 정관사 없이 사용되므로 지하세계를 의미하는 고유명사이다. 에스겔 32:26- 27에 묘사된 것으로 보아 이 단어는 무덤의 의미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즉 스올을 죽은자들이 머물게 될 구체적인 실체로 지하세계의 가장 밑바닥의 습지에 존재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욘 2:3- 6, 시 42:8, 69:2-3, 15-16, 88:7-8). 또한 스올은 아카드어의 지하세계에 대한 표현인 mat la tari “돌아올 수 없는 땅”으로 묘사된다(시 88:10, 욥 7:9-10, 10:21). 스올에 대한 구체적 특징들에 대한 묘사는 무덤을 경험적으로 관찰한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어둡고 활동력이 거의 없는 상태로 묘사하고 있다. 이 경우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육체가 가는 곳이 스올이며, 영은 삶의 다른 형태를 띤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집트에서 볼 수 있는 영혼불멸설은 구약성서에서 그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삶의 끝이라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거기에는 의로운 자나 악한 자나 차이가 없다. 그러면 이 땅에서의 삶은 이 땅에서만 보상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땅에서 의롭고 선한 삶을 살고도 비참하게 살았던 사람과 불의하고 악한 삶을 살고도 풍족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 사이의 구별이 없다면 “하나님의 공의의 부재”라는 신학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스올에 대한 이해는 확대되어 구체성을 띠게 된다. 즉 두 번째의 주장으로 사람이 죽으면 일단 스올로 간 후에 두 개의 방으로 분리된다는 주장이다. 즉 의로운 자와 악한 자는 분리되어 각각의 처소에 머물게 된다는 사상이다. 히브리어 사전 BDB는 스올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아바? “유명,” 보르, “구덩이,” 샤하트, “타락, 구덩이”를 스올의 한 부분으로 패망한 죽은 자를 위한 곳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신구약 중간시대의 작품인 외경 에녹서 상 22:1-14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스올을 4가지 부분으로 나눈다: 1) 의로운 자를 위한 곳(22:9), 2) 이땅에서 처벌받지 않은 악한 자를 위한 곳(22:10), 3) 순교한 의인을 위한 곳(22:12), 4) 이땅에서 처벌받은 악한 자를 위한 곳(22:13).


두 번째 주장은 첫 번째 주장 보다는 신학적 난제의 해결에 많은 도움이 되지만, 그 근거가 외경이라는 점과 그 근거로 이용된 히브리어 단어들인 아바돈, 보르, 샤하트를 스올과 구별되는 악한 자를 위한 처소라는 해석은 설득력이 없다. 세 단어는 스올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주장은 하이델(A. Heidel)의 이론으로 스올은 지하에 존재하는 영의 세계를 의미한다(민 16:30-33, 신 32:22). 하이델은 지하의 이 공간은 영의 영역으로, 악한 영혼만 거주하는 공간이라고 주장한다. 하이델은 사후에 의로운 자와 악한 자의 운명을 분명히 구분하여 불경건한 영들은 스올로 내려가고, 경건한 영들은 천국으로 올라가게 된다고 보았다. 이와 유사하게 로젠버그(R. Rosenberg)는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은 영혼이나 악한 영이 스올로 가게 되고, 자연적으로 죽은 자들은 가족에게로 돌아간다고 주장하였다.


하이델의 이 주장은 의로운 자나 악한 자나 사후에 동일한 지하 세계에 공존하게 된다는 신학적 난제를 해결하는데 매우 유용해 보이지만, 그의 성서 해석 및 적용은 지나치게 임의적이다. 의로운 자를 위한 죽음을 지칭하는 구절에서, 스올은 “무덤”의 의미를 지니며(창 37:35, 42:38, 사 38:10), 악한 자의 죽음을 지칭하는 구절에서 스올은 단순히 “지하세계”(민 16:30, 사 14:13-15)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알렉산더(D. Alexander) 역시 하이델과 유사한 주장으로 스올을 악한 자들이 가게 될 장소로 이해한다. 그 주장의 근거로 알렉산더는 첫째, 스올이 항상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며 두렵고 피해야 할 장소라는 것이다(삼하 22:6, 시 16:10, 30:3, 86:13). 즉 천국의 반대 개념이다(욥 11:8, 시 139:8, 암 9:2). 둘째, 스올은 대개 악행 자들과 관련되어 나타난다는 점이다(민 16:30, 왕상 2:6, 9, 욥 24:19, 시 9:17, 31:17, 49:14, 잠 5:5, 7:27, 9:18, 사 5:14, 14:9, 11, 15, 겔 31:15-17, 32:21, 27). 그리고 의로운 자들도 스올에 가게 될 것이라는 구절인 창 37:35, 42:38, 42:29, 31에 대하여 하나님의 처벌을 받고 스올에 가게 될 것이라는 안타까움 내지는 두려움으로 해석한다. 이사야 38장의 경우도 히스기야가 자신의 죄 때문에 스올에 가게 될까 두려워하였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면 의로운 자들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이에 대하여 알렉산더는 의로운 자들은 궁극적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의로운 자들이 죽은 후부터 궁극적으로 부활할 때까지 거하게 될 장소는 어디인가? 여기에 대해 성서는 침묵하고 있다고 알렉산더는 말한다.


알렉산더의 주장 역시 의로운 자들이 스올로 가게 된다는 성경구절에 대한 해석이 임의적이다. 알렉산더가 인용한 구절 이외에도, 삼상 28:7-14에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부르자 죽은 사무엘의 영(히브리어는 엘로힘, “신들”)이 땅 속에서 올라온다. 알렉산더의 주장에 따르면 사무엘이 악한 자들이 거하게 될 스올이나, 하이델이 말하는 악한 영들의 거주지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즉 알렉산더가 스스로 구약성서에서 찾을 수 없다고 말한 의로운 자의 사후에서 부활까지의 거주지가 어디냐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알렉산더의 이분법적 주장 역시 사후세계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지나치게 임의적으로 구분하다 보니 일관성 있는 주장이 아니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스올 및 유사한 단어들은 죽은 자들이 가는 지하세계를 의미한다. 즉 처소로서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다만 지하세계 내에서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의 내세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정경 내에서 찾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다고 부활이나 내세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후대의 발전이라고 단순히 배척한다는 점도 성서적이 아니다. 또한 고대 근동지역의 길가메쉬 서사시에 등장하는 우트나피쉬팀의 이야기에 비추어 볼때 성서 시대 훨씬 이전부터 불멸에 대한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구약성서 자체도 스올이 내세에 모든 사람이 가야할 유일한 장소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내세에 맞이할 새로운 삶의 형태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세에 대한 새로운 이해들


“스올”로 대표되는 구약성서의 내세에 대한 주장은 대부분 암울하거나 부정적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 모두 스올로 가게 될 것이라는 사상과 함께 내세에 대한 새로운 이해들도 나타난다.

1. 승천
먼저 에녹과 엘리야에 대한 설명이다(창 5:24, 왕하 2:1-18). 에녹에 대한 설명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다”는 ?막한 서술만 있다. 하지만 엘리야의 경우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며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싶어하는 자는 직접 데리고 갈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2. 내세에 대한 확신
구체적인 내세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죽음을 너머선 세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죽음 이후의 세계가 스올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시편 49:14-15 “양같이 그들을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가 되리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그들의 형체는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라, 왜냐하면 그가 나를 취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사역).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동사 라카흐 “취하다”를 이용하고 있다. 이 동사는 에녹을 이야기할 때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이므로 에녹의 경우를 생각나게 한다. 따라서 구절은 사후 세계에까지 하나님의 통치와 능력이 계속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 때문에, 재물을 의지하는 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사후 세계의 삶에서 다른 보상이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시편 73:24-25에서도 찾을 수 있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여기에서도 “영접하다”로 번역된 단어가 히브리어 라카흐이다. 따라서 시편기자는 에녹과 엘리야에게 허락되었던 운명을 희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편 139:24에서는 “영원한 길”로 인도할 것을 믿고 있으며, 잠언 12:28은 “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라고 말한다. 잠언 15:24은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는 사망이후 새로운 세계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다.


구약에 나타난 내세를 증언하는 대표적 구절은 욥기 19:25-26이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하지만 위 구절은 욥기 14:10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욥 14:10)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나이다”(욥 14:12)에서 보인 욥의 반응과는 반대된다. 따라서 욥기 19:25-26을 사후세계를 언급하는 구절로 보기에 난점이 있다. 하지만 골디스는 이에 대해 욥기서는 논쟁적인 책이므로, 논쟁의 경우 맨 마지막에 오는 주장이 결론이자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이 구절을 사후세계의 존재를 긍정하는 구절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골디스는 하나님에 대한 욥의 신앙의 단계를 9:33 “중재자,” 16:22 “증인,” 19:25 “구속자”로 발전해왔다고 주장하였다.

3. 부활
바벨론 포로이후 패망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마른 뼈의 부활이라는 이상을 보여준다(에스겔 37장). 이에 대하여 에스겔은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족속”(겔 37:11)이라고 해석한다. 여기에서는 사후에 개인이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사상은 아니다. 호세아 6:2의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리니”에서도 이스라엘 국가의 부활을 의미한다. 사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라”(사 26:14)의 경우 논의는 다소 복잡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개체적 몸의 부활이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의 부활로 이해해야 한다.


사후 각 개인이 이 땅에서의 삶의 결과로 심판받게 될 것이라는 사상은 묵시문학의 절정인 다니엘 12:2에 비로소 나타난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이 구절에서 깨어날 집단은 의로운 자와 철저하게 악한 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따라 각자 상응하는 보상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깨어나지 않을 자들은 하나님의 정의가 이미 실현된 자들이다. 그들은 땅의 티끌 가운데 남아 잠자게 될 것이다. 이 구절은 내세에서의 구원은 “부활”이라는 형태를 지니게 될 것이라고 본다. 이 구절이 가지는 핵심적 논제는 공의의 문제가 어떻게 실현되느냐에 대한 관심이다.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공의는 사후에 내세에서도 계속 이어져 마침내 실현될 것이라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이라는 문제가 부활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해결된다.

맺는 말


구약성서는 사람이 죽으면 스올로 가게 된다는 일반적인 내세관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의로운 자는 궁극적으로 사후에라도 보상받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정형화된 교리로 설명할 수는 없다. 에녹과 엘리야의 예를 들어 의로운 자는 살아서 승천하게 된다고 주장할 수 없으며, 사후 세계에 보상 받으리라는 구절들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삶이 될 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 또한 죽은 후 의로운 자는 부활하게 된다고 일반화시킬 수 없다.

 

다만 구약시대의 일찍부터 새로운 형태의 삶이 있다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일반화시킬 수 없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이 내세에서도 계속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믿음에서 나온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전부일 수 있을까? 한편 이 땅에서의 이룬 삶의 가치가 내세에서도 이어질 것이라는 점은 하나님의 공의를 확신하는데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서 굴절된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이 땅 너머의 세계에까지 하나님의 공의는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내세에 대한 구약의 설명이 빈곤하다는 것은 구약성서의 주관심이 내세가 아니라 이 땅에서의 축복과 처벌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은 구약성서 자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위에서 말한 내세에 대한 새로운 이해들이 바로 그 증거들이다. 내세에 대한 보다 명확한 답변은 신약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세는 더욱더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다. 만세 전에도 계시고 만세 후에도 계신 분이 아니신가? 어찌 이 땅에서의 삶을 전부라 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내세에 대한 구약의 관점은 신약을 예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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