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음악과 예배음악


1. 교회음악과 예배음악의 차이


기독교 공동체에서 음악의 중요성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항상 강조되어 왔다.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부흥집회의 복음송과 예배의 성가대 찬양 등을 통해서, 교회음악이 한국교회의 성장에 기여한 공은 괄목할 만하다 하겠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서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복음송이 불러지면서 이러한 음악이 공예배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자 이에 대한 논란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면서 여러 가지 이론들이 생겨 나오게 되었지만, 교회에서는 이렇다할 정확한 기준을 제공해 주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복음송을 비롯한 교회음악의 사용에 관한 객관적인 기준을 제공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교회음악 혹은 예배음악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교회음악과 예배음악을 동일시하거나 혼동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 교회 안과 교회 바깥에서 불려지는 교회의 음악을 논할 때 우리는 자칫 예배음악을 인지하지 못한 채 교회음악에 관한 토론과 결론을 쉽게 내릴 때가 있다. 그러나 공적인 예배에서 불려지는 예배음악과 그 외의 교회음악이 분명히 구분되지 않으면 교회음악에 대한 정의를 바르게 내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음악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크게 예전음악(禮典音樂 Liturgical Music)과 비예전음악(非禮典音樂 Non-liturgical Music)으로 분류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교회의 공적인 예배에서 불려지는 교회의 음악을 예전음악 혹은 예배음악으로, 그 이외의 모든 교회의 음악을 비예전음악, 즉 복음적인 교회음악으로 규정한다. 우리는 간혹 예배음악까지 포함된 넓은 의미의 교회음악을 비예전음악인 복음적인 교회음악과 혼동하여 토론하기 때문에 쉽게 결론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이다.


비예전음악, , 복음적인 교회음악이란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부합되는 가사로 작곡되어진 음악으로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연주되어 지는 음악, , 교회에서 연주하든, 교회 바깥에서 연주하든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신의 신앙 체험을 노래하는 모든 장르의 음악을 포함한다.


반면에, 예배음악 (Worship Music) 혹은 예전음악 (Liturgical Music)은 특히 그 연주 장소와 시간이, 교회의 공식 예배에 한정되어지는 음악으로서, 사람이 주체가 아닌,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체가 된, 하나님께 올려 드려지는 음악이어야 한다.

 

 

 

 

 

전체 원: 광의의 교회음악

작은 원: 예전음악 (예배음악)

작은 원의 여집합: 비예전음악

 

 

이와 같은 예전음악과 비예전음악을 아래와 같이 도형으로 표시하면 쉽게 이해가 되어질 것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예배음악은 광의의 교회음악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전체 원에 해당하는 광의의 교회음악에서 작은 원에 해당하는 예배음악을 제외한 부분이 복음적 교회음악으로 분류된다.



(1) 비예전음악 (복음적 교회음악)

교회음악의 장르는 시대, 장소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므로 비예전음악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광범위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교회음악의 가사 내용이 성경에 입각한 기

독교 진리와 복음에 관한 것이라면, 시대, 장소, 문화에 따른 어떠한 다양한 장르라도 교회에서 불리어 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음악의 장르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계속적으로 변

해 왔기 때문이다.


교회음악의 장르는 초대교회 시대의 그레고리안 챤트부터, 다성음악의 기초가 된 오르가늄, 그리고 모테트, 칸타타, 수난음악, 오라토리오 등의 음악으로 끊

임없이 변화되어 왔었고, 종교개혁 이후에는, 독일의 코랄, 영국의 앤섬, 모라비안교도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영국의 웨슬리의 집회 찬송, 미국의 부흥사 무디와 그의 음악 동역

자 생키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부흥집회용 복음찬송, 오늘날의 복음송, 그리고, 최근의 C.C.M.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장르로 발전해 온

교회음악을 교회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하나의 장르에만 국한시킬 수 가 없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일 찬송가에서 이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통일찬송가 88, “내 진정 사모하는은 미국의 작곡가 윌리엄 헤이스의 세속곡 오솔길의 자그마한 낡은 통나무집에 구세군 밴드의 창시자인 챨스 프라이가 지금의 가사를

붙여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곡은 한때,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술집, 살롱의 무희들의 춤곡으로 즐겨 사용된 적이 있었다. , 술집의 댄스음악을 오늘날 교인들은 예배를

드리며 은혜롭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45, “오 거룩하신 주님16세기 독일 작곡가 한스 레오 하슬러(Hans Leo Hassler)의 세속곡, “내 마음은 그 소녀 때문에 설레이노라를 바하가 편곡하여, 그의 마태

수난곡에 삽입하고부터 회중의 관심을 불려 일으켜 찬송가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같은 곡조로 된 61주여 복을 비옵나니94예수님은 누구신가18세기 프

랑스의 철학자이자 음악가인 쟌 자크 루소(Jean J. Rousseau)가 작곡한 오페라 배경음악이다. 오페라 음악이라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비근한 예로 371장 남궁 억 작사의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은 도니제티의 오페라 루치아의 합창곡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61장과 94장의 작곡자인 루소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인 원죄설을 부정하여 당시의 교

회로부터 출교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미국의 댄스 음악, 외국의 대중가요, 심지어 이단 철학자의 곡까지 공인 찬송가에 삽입되어 사용되어지고 있는 현실을 비추어 볼 때 교회음악의 장르를 구체적으로

한정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시대와 장소에 따라 교회음악의 장르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결론적으로, 복음적 교회음악에 관한 정의는 보다 포괄적으로 내려질 수 있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예배음악에 있다. 실제적으로 가장

많은 쟁점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바로 예배음악이다. 그러므로 예배음악에 대한 정의가 먼저 바르게 내려지면, 교회음악 신학의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가 있다.

 

(2) 예전음악 (예배음악)


예전음악은 간단히 말해서 예배에서 불려지는 음악을 지칭한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의 예배에서 어떤 예배음악을 사용할 것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음악이 사용될 수 있는 예배는 어떠한 예배이어야 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우리는 먼저 수요예배, 금요예배, 구역예배(속회) 등에서 사용하는 음악을 주일 대예배에서도 사용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해답이 얻어지면, 예배음악에 관한 정의는 의외로 쉽게 얻어 질 수가 있다.


1) 기독교예배의 정의

한국교회는 예배에 대한 정의가 불확실하므로, 예배음악 또한 바르게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예배음악을 보다 구체적으로 토론하기 위하여서는,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배에 관한 잘못된 인식의 수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한국 개신교회의 예배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있지만, 여기서는, ‘예배라는 용어의 사용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한국 개신교회는 주일 낮 대예배뿐만 아니라, 주일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새벽예배, 구역예배 등, 일주일에 10여회 이상의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서 모든 집회에 예배라는 낱말을 붙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예배학적으로 논의할 때의 예배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일 공예배에 한정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시작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공예배는 일주일에 한번만 드려져 왔다. 물론, 주일 공예배 외에도 일요일이 아닌 다른 요일에 올 수 있는 교회력, 예를 들면, 성탄절, 성회수요일, 고난주간 등에는 그 교회력에 해당하는 예배를 드려야하지만, 그 외의 모임에는 예배 (Worship Service/Liturgy)’라고 이름 붙여져서는 안 된다.


기독교 교회의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예배 (A traditional and authentic Christian worship)는 일주일에 한번만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있다. 이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를 포함한 전 세계의 기독교가 지켜오고 있는 불변의 예배전통인 것이다. 예배는 많이 드릴수록 좋다는 생각은, 예배의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에서 초래된 잘못된 견해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축제로 시작되어진 기독교의 주일 (Lord's Day) 예배의 신학적 의미와 예배에 대한 존엄성이 희석되어지는 위험이 있다. 중세시대의 수도원에서는 하루에 여덟 번의 기도 모임이 있었다.


하지만, 이 모임을 예배 (Mass)’라고 칭하지 않고, ‘성무일과 (Daily Office)’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도 예전적인 교회의 기도원과 수도원에서는 성무일과의 형태가 남아있는데, 하루 여덟 번의 기도회가 두 번으로 축소되어, ‘아침기도(Morning Prayer)’와 저녁기도 ‘(Evening Prayer)’로 드리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개신교회도 새벽예배,’ ‘주일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구역예배라고 부르는 대신에, 각 교회의 특성과 지양하는 목표에 따라, ‘주일 저녁 찬양 집회,’ ‘수요 성경공부 모임,’ ‘새벽기도회,’ ‘금요 철야 기도회,’ ‘구역모임등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기도, 성경공부, 찬양모임은 많을수록 좋으나, 예배는 그렇지 않다.


예배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예배의 희소가치와 경건성이 결여된다. 하나님께서는 왜 성막과 성전의 지성소에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일년에 한번만 들어가게 하셨을까? 다른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이는 성막과 성전에서의 제사(예배)가 거룩하게 구별되며 보다 경건하고 엄숙하게 드려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의 전형인, 성경에 나타난 성막과 성전에서의 제사를 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세와 생각은 기독교 예배를 대하는 오늘날의 크리스챤들의 자세와 태도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다. 한국교회는 너무 남발되는 예배 환경 속에서, 진정한 예배에 대한 거룩함과 경건성이 결여된 채로 예배를 대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경건하고 엄숙하게 주일 공예배를 드려야 하며, ‘예배라 잘못 불리는 다른 예배 (집회, 모임)와는 분명하게 구별되어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예배음악에서 말하는 예배는 주일 공예배와 교회력에 따른 예배에 한정됨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예배에 대한 바른 인식이 정립된 이후에야, 비로소 예배음악에 관한 논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 주일 낮 공예배와 성탄절, 고난기간 등의 교회력에 따른 예배에서 사용되는 음악만이 예배음악으로 지칭될 수 있고, 그 외의 교회 집회와 모임, 기도회에서 사용되는 음악은 예배음악이 아닌 교회음악으로 칭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부흥집회나 교회모임에서 불려지는 복음찬송이 예배에 도입되어서는 아니 된다. 주일 저녁 찬양집회, 금요 기도회, 새벽 기도회 등에서 부르는 음악과 주일 공예배에서 사용되어지는 음악의 내용이 달라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2) 예배음악의 장르

예전음악과 비예전음악의 사용장소와 해당 음악의 가사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음악의 장르에 있다. 혹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면 되는 것이지 음악의 장르가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도 형식과 순서가 존재하며 그 순서 하나 하나에는 기독교 2천년의 역사를 통하여 논쟁하고 결론지어진 신학적인 의미와 예배에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러한 기능에 부합하는 음악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아무런 계획과 규모없이 단지 신령과 진정으로만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다. 노아에게 지시하시는 방주의 식양과 (6:13-22) 모세에게 지시하신 성막의 설계도 (25-28) 내용을 보면 야웨 하나님이 얼마나 치밀하시고 계획적인 분이신 가를 잘 알 수 있다. 신령과 진정은 기본으로 가지고 예배에 임하는 것이 당연하고 다음 단계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가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풀어가야 할 과제인 것이다.


복음적인 교회음악의 장르는 시대와 장소, 문화, 그리고 개인 성향에 따른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의 어려움이 없지만, 예전음악의 경우는 주일 낮 예배 혹은 교회력 기념예배에서 사용할 수 있는 특정한 장르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는 정확하게 해답을 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적으로 교회음악의 장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문화의 차이에 따라 음악사적으로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공예배에서 굳이 그레고리안 챤트형식의 단성성가만을 고집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그렇다고 오늘날 C.C.M.에서 사용하고 있는 재즈, , 록과 같은 장르의 음악을 주일 낮 예배에서 사용한다는 것도 일부 청년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성도들에게는 왠지 모르지만 거부감이 느껴지며 은혜가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목사, 장로와 같이 교회의 직책이 높고 나이가 많은 교인들이 단순히 왠지 모르지만은혜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현대적인 장르의 음악을 예배에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과연 왠지 모르지만은 무엇일까?

 

3) 에토스(Ethos) 이론

필자는 왠지 모르지만의 구체적인 이유를 고대 그리스의 음악이론인 에토스론에서 찾고자 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에토스(ethos)’특정의 집단, 민족, 시대, 지역 등의 사상, 관습, 도덕 따위를 특색 지우는 지도 원리, 문화적 특색, 도덕적 규범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에토스 이론을 특정한 고유명사로 규정하기보다는 단순히 고대 그리스의 음악에 관한 윤리적 규범, 다시 말하면 고대 그리스의 음악미학으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그리스의 음악관인 에토스론은 음악이 사람의 정신과 도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으로서, 그리스의 고대 철학자 플라톤(Plato, 427-347 B.C.)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384-322 B.C.)에 의해 주창되었다. 음악이 리듬, 음정, 멜로디, 화성 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보고 들을 수 있는 그러한 요소들이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힘(power)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에토스론은 음악이 가지고 있는 음정, 리듬, 템포, 볼륨 등의 변화가 사람들의 감정 (기쁨, 슬픔, 공포, 환희, 행복, 평화)과 정신(영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인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의 빠르기와 소리의 크기, 리듬의 변화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언급하면서, 음악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였다.


너무 빠르지 않고, 일정한 빠르기와 리듬, 적당한 볼륨은 인간에게 정서적인 안정감과 평온함을 전해줄 뿐만 아니라, 때때로 인간을 치유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반면에, 너무 빠른 템포와 일정하지 않고 불규칙적인 리듬, 그리고 지나치게 큰 볼륨은 인간을 흥분시켜 돌발적인 행동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전자의 음악을 좋은 종류의 음악 (the right kind of music), 후자를 나쁜 종류의 음악 (the wrong kind of music) 이라고 규정하였다.


당시의 좋은 으로 규정되었던 아폴로의 신전에서 사용되는 음악은 전자의 좋은 종류의 음악이 연주되었고 악기는 리라 (lyre)와 같은 현악기가 주로 사용하여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조용하고 차분하게 만들었으며, 나쁜 신으로 규정되었던 디오니시우스(Dionysus)의 신전 음악은 후자의 나쁜 종류의 음악이 연주되었으며, 악기는 아울로스 (aulos)와 같은 관악기를 주로 사용하여 빠른 템포와 과도한 볼륨으로 신전에서 제사드리는 사람들을 쉽게 흥분시켜 서로 행음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예는 구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울이 악신이 들렸을 때 다윗은 현악기 수금을 연주함으로서 사울의 악신을 제거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삼상 16:16-23).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정치학 (c. 330B.C.)에서 음악을 듣는 사람은 자신이 듣고 있는 음악의 특성에 따라 그의 정신과 영혼에, 그 음악이 지니고 있는 특성과 똑같은 영향을 미친다. , 부드러운 음악을 듣는 사람은 부드러운 감성을, 열정적인 음악을 듣는 사람은 열정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좋은 종류의 음악을 듣는 사람은 선한 사람으로, 나쁜 종류의 음악을 듣는 사람은 악인이 되는 경향이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플라톤은 그의 저서, 공화국 (c.380 B.C.)에서 부드러운 음악만을 너무 많이 들으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나약한 사람이 되고, 운동만을 많이 하면, 비사회적, 폭력적인 사람이 되기 때문에, 좋은 교육을 위해서는, 음악과 운동 두 가지를 조화 있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나약한 학생에게는 열정적인 음악과 운동을, 폭력적인 학생에게는 되도록 운동을 자제시키고, 부드러운 음악을 듣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음악가 (교육가)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너무 빠르지 않고, 일정한 빠르기와 리듬, 적당한 볼륨은 인간에게 정서적인 안정감과 평온함을 전해줄 뿐만 아니라, 때때로 인간을 치유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반면에, 너무 빠른 템포와 일정하지 않고 불규칙적인 리듬, 그리고 지나치게 큰 볼륨은 인간을 흥분시켜 돌발적인 행동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전자의 음악을 좋은 종류의 음악 (the right kind of music), 후자를 나쁜 종류의 음악 (the wrong kind of music) 이라고 규정하였다.


당시의 좋은 으로 규정되었던 아폴로의 신전에서 사용되는 음악은 전자의 좋은 종류의 음악이 연주되었고 악기는 리라 (lyre)와 같은 현악기가 주로 사용하여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조용하고 차분하게 만들었으며, 나쁜 신으로 규정되었던 디오니시우스(Dionysus)의 신전 음악은 후자의 나쁜 종류의 음악이 연주되었으며, 악기는 아울로스 (aulos)와 같은 관악기를 주로 사용하여 빠른 템포와 과도한 볼륨으로 신전에서 제사드리는 사람들을 쉽게 흥분시켜 서로 행음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예는 구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울이 악신이 들렸을 때 다윗은 현악기 수금을 연주함으로서 사울의 악신을 제거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삼상 16:16-23).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정치학 (c. 330B.C.)에서 음악을 듣는 사람은 자신이 듣고 있는 음악의 특성에 따라 그의 정신과 영혼에, 그 음악이 지니고 있는 특성과 똑같은 영향을 미친다. , 부드러운 음악을 듣는 사람은 부드러운 감성을, 열정적인 음악을 듣는 사람은 열정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좋은 종류의 음악을 듣는 사람은 선한 사람으로, 나쁜 종류의 음악을 듣는 사람은 악인이 되는 경향이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플라톤은 그의 저서, 공화국 (c.380 B.C.)에서 부드러운 음악만을 너무 많이 들으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나약한 사람이 되고, 운동만을 많이 하면, 비사회적, 폭력적인 사람이 되기 때문에, 좋은 교육을 위해서는, 음악과 운동 두 가지를 조화 있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나약한 학생에게는 열정적인 음악과 운동을, 폭력적인 학생에게는 되도록 운동을 자제시키고, 부드러운 음악을 듣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음악가 (교육가)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① 에토스 이론과 '사랑의 파장'

고대 철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된 이러한 에토스 이론을 굳이 교회음악에 적용하지 않더라도,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임상실험을 통하여 에토스 이론의 논리가 여실히 입증되어 일반사회에서 널리 적용되고 있다. , 최근에 머리가 좋아지는 음악,” “태교음악,” 혹은 동, 식물의 성장에까지 이러한 음악 기법이 널리 사용되어 지고 있는 추세이다.


그런데 이러한 임상실험에 사용되는 음악의 특징은 에토스 이론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템포가 심하게 빠르지 않고, 리듬의 변화가 일정하며, 볼륨이 지나치게 크지 않으며, 동원되는 악기로는 현악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빵을 반죽할 때 이러한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을 하면 빵이 한껏 잘 부풀고 한층 더 쫄깃쫄깃한 맛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는 빵속에 들어있는 효모(酵母 yeast)가 음악이 가지고 있는 소리의 파장에 반응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물에 대한 임상실험에서도 나쁜 종류의 음악을 들려준 물과 좋은 종류의 음악을 들려준 물의 분자구조에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다. , 좋은 종류의 음악을 들려준 물의 분자구조는 정상적이었던 반면에 나쁜 종류의 음악을 들려준 물의 분자구조는 이상한 형태로 망가진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나쁜 구조를 마신 물을 마시면 사람의 신체에도 좋지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임상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고 한다.


음악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얼마 전 텔레비전 뉴스에서 벼농사를 짓는 한 농부의 특이한 농사기법을 방영한 적이 있다. 이 농부의 농사작법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은 특별한 농사기술이나 뛰어난 효과를 지닌 비료를 사용하여서가 아니라, 이 농부는 모를 심을 때부터 논에 나갈 때마다 자라고 있는 벼를 향해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에게 대하듯이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벼들을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건강하게 자라거라.” “사랑해.”라고 말하면 놀랍게도 다른 벼들에 비해 이런 사랑을 받은 벼들이 병에 잘 걸리지도 않고 성장속도도 빠를 뿐더러 낱알도 풍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쌀로 밥을 지어먹으면 밥맛이 쫄깃쫄깃하고 영양가도 높아 다른 쌀에 비해 가격이 두 세배 비싼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쌀을 찾기 때문에 없어서 못 팔 정도라고 한다. 이 경우는 음악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면 음성이 가지고 있는 파장이 듣는 생물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음악이든 사람의 음성이든 좋은 종류의 소리가 가지고 있는 파장은 그것을 듣는 생물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고대 그리스의 에토스 음악이론은 단순히 음악에만 한정시키고 있지만 오늘날의 소리와 관련된 임상실험에서는 이를 소리이론으로까지 확대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이와 같이 좋은 영향을 미치는 좋은 종류의 음악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음성이 지닌 파장을 사랑의 파장이라고 이름짓고자 한다.


교회가 아닌 세상이 판단한 좋은 음악의 기준이 이렇다면, 하나님께 드려지는 교회음악은 더 이상 거론할 여지가 없이, 고대 그리스의 에토스론에 따라, 사람의 정서와 정신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좋은 종류의 음악(the right kind of music)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도 복음 선교와 친교를 위해 교회에서 필요한 것이지만, 적어도 공적인 예배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에토스 이론에 근거한 인간의 정서와 영혼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음악, 사랑의 파장을 가진 음악이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음악은 하나님께서도 좋아하실 것이므로 바로 그러한 음악으로 하나님께 찬양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실 줄을 믿는다.

 

에토스 이론에 비추어본 크리스챤 록

현대의 락 앤 롤 음악은 이 음악 특유의 빠른 템포와 불규칙한 리듬, 굉음에 가까운 볼륨을 가진 특징에 비추어 볼 때 에토스 이론의 후자에 속하는 나쁜 종류의 음악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일부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크리스챤 락 음악도 세속 락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이 전자악기를 사용하여 연주하고 있다. 드럼, 전기 기타, 신디사이저 등을 교회에서 사용할 때, 크지 않은 볼륨, 그다지 빠르지 않은 일정한 템포와 리듬의 음악을 연주한다면, 교회에서도 전자악기에 대한 거부감을 크게 가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락의 가장 큰 장점이 일반악기 보다 더 큰 볼륨을 낼 수 있는 전자악기를 이용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기대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굉음에 가까운 볼륨과 빠른 템포, 불규칙한 리듬의 음악을 교회에서 연주한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음악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시우스 신전에서 연주되는 인간을 감정적으로 쉽게 흥분시키는 나쁜 종류의 음악일 것이다. 그러므로 비둘기같이, 바람같이 임하시는 성령께서 이와 같은 광란적인 음악을 통하여 임하신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크리스챤 록의 또 다른 특징중의 하나는, 이 음악은 대중의 인기에 편승하며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교인들이 부르는 찬송가, 복음성가 등은 듣는 청중이 없이도,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노래할 수 있으며, 때에 따라 성령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크리스챤 록의 경우, 과연 청중이 없이도 자신들만으로 음악을 연주하면서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 청중의 인기를 얻지 못하더라도, 그룹의 단원들만으로 순수하게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연주를 지속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아마도, 청중의 인기를 얻지 못하는 크리스챤 록 그룹은 자체적으로 시들어 버리고 말 것으로 생각된다. 찬양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챤 락 음악의 중심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사만 교회 용어로 쓰여져 있을 뿐, 그 영광의 대상은 세상의 인기를 추구하는 연주자 자신들인 것임을 알 수 있다.


크리스챤 락은 마치 술과 같다고 정의하고 싶다. 술은 마셔도 괜찮으나 과음하여 취하면 위험해 지기 쉽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절제하기 어렵듯이, 크리스챤 락에 빠져들어 연주하거나, 청취하면, 절제하기 어려운 경우까지 이르게 된다. 모든 교회음악은 교회 안에서 보다, 교회 밖에서 불리어 질 때, 더욱 조심하여야 한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교회 밖에서의 찬양은 자신의 능력 과시나 인기관리가 아닌, 오직 선교의 수단으로만 사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비예전음악, , 복음적 교회음악과 예전(예배)음악의 차이는 전자의 목적이 개인의 신앙경험의 표현과 친교, 그리고 복음전파에 있으므로 복음 전파의 대상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수평적인 음악으로 다양한 종류의 장르에 따른 음악을 사용할 수 있다는 반면에, 후자는 인간들을 위한 음악이 아닌 오직 하나님 찬양에 그 목적이 있으므로 수직적이며, 그러한 음악의 종류와 내용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고전음악과 기독교의 전통적인 음악과 같이, 임상실험 결과 하나님의 피조물인 동물과 식물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음악으로 주일 예배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할 것이다.


 

2. ‘경배와 찬양에 대한 고찰


한국교회에서의 경배와 찬양1980년대 온누리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된 찬양 중심의 예배로서, 대체적으로 젊은 층이 주도해 나가며, 이 집회의 음악은 주로 복음성가와 C.C.M.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을 사용하고 있는 예배인 것으로 인지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열린 예배의 모범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며,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청년 위주의 복음송으로 주도되는 예배형태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므로 본 항에서는 앞에서 다루어 본 예배음악과 복음적 교회음악의 정의를 기준으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경배와 찬양을 두 가지 측면, , 첫째, ‘복음적 교회음악으로서의 경배와 찬양,’ 둘째, ‘예배음악으로서의 경배와 찬양의 측면에서 접근하여 교회음악과 경배와 찬양의 상관관계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복음적 교회음악으로서의 ‘경배와 찬양


복음적인 교회음악으로서의 경배와 찬양은 교회음악 장르의 측면에서 볼 때,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음악의 장르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계속적으로 변해 왔기 때문이다.


교회음악의 장르를 살펴보면, 초대교회 시대의 그레고리안 챤트부터, 중세이후 다성음악의 기초가 된 오르가눔, 그리고 모테트, 오라토리오, 칸타타, 수난음악 등의 음악으로 끊임없이 변화되어 왔었고, 종교개혁 이후에는 독일의 코랄, 영국의 앤덤, 모라비안 교도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요한 웨슬리의 집회 찬송, 무디와 생키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부흥집회용 복음찬송 (Gospel Hymn), 오늘날의 복음송 (Gospel song), 그리고 최근의 C.C.M. 등으로 변화되어 왔다.


이와 같이 교회음악의 장르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되어 왔으므로 경배와 찬양에서 사용되어지는 음악이 어떠한 종류인가는 그렇게 심각하게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경배와 찬양의 음악 소재가 대부분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많은 관심과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복음송 중심의 C.C.M.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관한 토의가 선행(先行)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배와 찬양에서 사용되어 지는 복음송 등의 C.C.M.이 앞에서 토의한 에토스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좋은 종류의 음악의 원칙만 지키고 있다면 경배와 찬양을 광의의 교회음악에 포함시키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2) 예배음악으로서의 ‘경배와 찬양


경배와 찬양에서 불려지는 음악이 포괄적인, 또한 일반적인 교회음악의 범주에 들어 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것이 예배음악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객관적인 결론을 섣불리 내릴 수가 없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며 또한 엄숙하고 경건하여야 한다. 물론 영적인 기쁨으로 드려져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흥분해서는 안 된다. 지나친 몸놀림이나 소음에 가까운 큰소리는 지양되어야 한다. 그러한 것은 부흥회나 기도모임, 찬양집회 등을 통하여 얼마든지 표현될 수 있다. 그렇다고, ‘경배와 찬양을 예배가 아니라고 속단하려는 것은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으로서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주관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일정한 형태의 예배가 모든 예배의 정형 (standard)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 특정한 시대, 장소, 문화와 관습에 따른 하나의 예배가, 모든 시대와 장소, 문화에 관계없이 똑 같이 적용되어 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성막이나 성전의 제사제도, 초대교회의 예배가 오늘날 현대교회의 예배형태가 될 수 없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예배는 주제가 있는 한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주제에 맞춰서 말씀과 성찬, 그리고 음악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교회음악 지도자나 교역자들은 이러한 예배의 주제에 맞춰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자기가 선곡한 음악과 준비된 말씀이 그 날의 예배주제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 예배의 순서 하나하나는 각각의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음악 또한, 그 자체의 의미와 기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예배와 음악을 따로 분리하여 설명해서는 아니 된다. 예배음악은 예배의 한 부분으로서 예배가 지향하고 있는 목적에 부합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오랜 시간을 통하여 기독교예배의 순서 하나하나가 각각의 의미와 기능을 가지게 된 것처럼 예배의 음악 또한 자체의 의미와 예배에서의 그 기능이 규정되어져야 한다.


경배와 찬양도 치유음악 목회차원에서 필요한 찬양집회이다. 이 집회를 통하여 믿지 않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나며 영적으로 방황하는 심령들에게 새로운 영적인 기쁨을 제공하여 삶에 대한 긍정적인 안목을 소유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구원받은 백성들에게는 찬양을 통하여 새로운 기쁨의 자리로 들어가는 경험을 제공해 주는 긍정적인 측면이 많이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항상 경배와 찬양의 열정 속에만 빠져 있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형태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성도는 영적 신앙의 성장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경배와 찬양의 집회로부터 얻은 이러한 영적인 기쁨이 진정한 예배로의 인도자 역할을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 찬양집회는 공예배로의 과정이 되어야지 예배자체로서의 목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정적이면서 거룩하고 경건한 예배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만찬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새로이 경험하며 기억하게 하고, 에토스론에 언급한 좋은 종류의 조용하고 경건한 찬양을 통해 우리에게 보다 높은 차원의 영적인 평안과 치유의 경험을 제공하여 준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10)”라고 신앙의 점진적인 단계를 언급하고 있다. , 마음으로 믿는 감성적인 단계에서 입으로 시인하는 이성적인 단계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게 됨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때 이성으로 판단해 보고 난 뒤에 결정하지 않는다. 우리도 알 수 없는 어느 순간에 우리의 가슴이, 우리의 감성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는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성도들은 이러한 구원의 감격을 항상 간직하고 기억하면서 이후로는 자신의 이성의 도움으로 성경 말씀을 통해 더욱 더 삼위일체 하나님을 깊이 알아 가기 위해 노력하여, 보다 차원 높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 성장하지 아니하고 항상 구원의 첫 단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닌 것이며,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이 아니다. 모유와 부드러운 음식을 받아먹기만 하는 유아기의 신앙에서 정체되어 있는 성도가 아니라, 딱딱한 음식을 씹기도 하고 나눠주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성장해 나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독수리는 참새가 높은 공중으로 따라 올라갈 수 없을 만큼 하늘 높이 올라간다. 모름지기 신앙의 성장을 원하는 성도들은 더 이상 참새 신앙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40:31)”라는 말씀처럼, 독수리의 날개 치고 올라가는 수준의 신앙을 갈망하고 추구하여야한다. (감성적인 부흥집회 후의 버스승차)


한국교회의 교회성장 프로그램에서 항상 표본으로 삼으며 연구대상이 되어왔던 새들백교회의 예를 들어보자. 새들백교회의 구도자예배는 한국교회의 교회성장의 모델이 되어왔다. 한국교회의 교역자들은 교회성장의 모델이 되는 이 구도자예배야 말로 열린 예배의 표본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적으로 새들백교회는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에 드리는 구도자예배를 통하여 많은 믿지 않는 자들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데에 성공하였다.


한국교회는 여기에 혼돈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일부 성격이 급한 목회자는 열린 예배라는 이름아래 새들백교회의 구도자예배형식으로 주일예배를 시도하였으나 결국에는 실패에 이르게 되었다. 그 이유는 릭 워렌 목사가 쓴, 새들백교회 이야기를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교회의 구도자예배에만 관심을 기울였지, 한 페이지 정도에만 간단하게 언급된 수요일 저녁에 드리는 헌신된 자들의 예배에는 무관심하였기 때문이다.


새들백교회가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로 하여금 항상 구도자예배에만 머물게 하였다면 오늘날의 새들백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도자예배에 참석한 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훈련시켜 결국에는 교회의 핵심멤버인 헌신된 자(The committed)’로 만들어, 보다 성숙되고 거룩한 헌신된 자들만이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수요예배를 별도로 드리고 있는데서 새들백교회의 숨겨진 성장요인이 존재하고 있음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실제적으로 초대교회로부터 4, 5세기까지는 기독교회의 예배가 말씀 중심의 초신자를 위한 예배와 성만찬 중심의 결신자 예배로 구분되어 드려져 왔다. 예배의 시작은 함께 하였지만 말씀이 끝난 후에는 결신자들만이 남아 별도로 성만찬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일요일이 아닌 요일에 주일예배를 드리는 문제)


결론적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경배와 찬양은 우리의 가슴에 즉, 감성에 호소하는, 마음으로 믿게 하는 신앙경험이자 표현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경배와 찬양에서 정체되어 있을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지향해야 할 다음 단계는 입으로 시인하는 단계 즉, 가슴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보다 성숙된, 이성에 의하여 주도되는 경건한 예배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3. 예전음악과 비예전음악의 요약


지금까지 예전음악과 비예전음악의 분류에 따른 교회음악의 정의에 따라 아래와 같이 도표로 간략하게 요약하고 또한 이러한 정의에 따라 한국교회의 통일찬송가에 수록된 찬송을 복음적인 찬송과 예전적인 찬송으로 구분하는 방법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물론 이러한 분류방법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될 수가 없다. 특정한 찬송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분류기준으로도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경우는 상당히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될 소지가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도표 2> 복음찬송과 예배용 찬송의 차이점

 

복음찬송

예배찬송

주로 부흥성회, 친목모임, 복음주의적 예배에서 사용하는 복음찬송의 특징을 살펴보면,

가사는 주로 간증, 경고, 촉구, 전도 등의 내용으로 되어있으며, “,” “,” “우리와 같은 대명사를 많이 사용하는 등의 주관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음악적인 특징은 템포가 빠르고, 리듬이 다양하며, 8분음표와 16분음표가 많이 사용되고, 엇박자(syncopation) 기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그리고 반복을 위한 후렴구를 가진 찬송이 많다. 이러한 이유로 찬송이 다분히 경쾌하고 열정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주로 정기적인 예배에서 불리어지는 예배찬송의 특징은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찬송의 가사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성만찬 찬송, 송영, 화답송 등과 같은 예배순서에 따른 기능적인 찬송들이 있다.

성탄기간, 수난절, 부활기간 등, 교회력에 따른 찬송들이 있다.

음악적인 특징은 대체적으로 템포가 빠르지 않고 리듬이 일정하며, 2분음표, 4분음표 등의 같은 길이의 음이 많이 사용되지만, 가끔씩 8분음표 혹은 16분음표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후렴구를 가진 찬송이 많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음악이 정적이며, 엄숙하고, 헌신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도표 2> 교회음악의 분류

 

광의의 교회음악

예전음악

비예전음악 (복음적 교회음악/협의의 교회음악)

예전(예배)음악이라고도 하며 교회의 공식예배에 한정되어 사용되는 예전적 (liturgical)인 교회음악을 말한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음악으로서 수직적인 성격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비예전(非禮典)음악 혹은 복음적인 교회음악이라고도 하며,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부합하는 가사로 작곡되어진 음악으로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모든 장르의 교회음악을 말한다. 주로 친교 혹은 개인의 신앙경험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수평적인 음악이다.

시편가, 예배찬송, 송가 등

복음찬송, 복음성가, C.C.M, 크리스챤 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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