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서 구약의 사용
(The Use of the Old Testament in the New)
신약내 구약사용보다 그리스도의 믿음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히브리와 아람 성서는 물론 초기 기독교 사상가와 기록자의 유일한 성서였다. 기독교는 유대인들과 히브리인이 알고 있는 것들을 변화시켰다.
초기 기독교는 단지 헬라판 유대 성서을 알았다. 그들의 언어에 개의치 않았다 할지라도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삶가운데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가장 중요한 관계 속에서 약속되었다.
기독교는 모든 관점들 신비, 죽음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새로운 빛 가운데 그들의 성서를 이해 할 것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신학을 입증하고 기독교문제를 풀기 위하여 구약을 사용하였다. 구약은 신약신학의 기초를 주었다. 구약 또한 언어와 신약사상의 많은 이미지를 주었지만 이것은 무심한 독자는 알기 쉽지 않다. 그러므로 구약 절로부터 신약개념은 이해되어야 한다. 사실상 모든 신약주제는 구약의 공헌으로부터 접근되어야 한다. 어거스틴의 연구와 같이, "신약은 구약에 감추어졌다;
구약은 신약 내에 계시되었다."
그러나, 모든 구약에서 새로운 믿음으로 가져가는 것은 아니다. 구약과 신약은 연속성과 불연속성 두 사이에 있다. 그것은 신약의 부분에 구약메시지의 직접적인 확산이 있었고, 구약메시지의 한 부분을 폐기하였다. 비록 그렇지만 신약기록자는 구약의 하나님에 말씀으로 덜하다고 제안하지 않는다.
이러한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분석은 많은 사람들이 실감하는 것보다 더욱 흥미있고 연구에 호기심을 자극한다. 게다가 흔히 구약본문은 많은 예언서들의 예측과 같이 경이로운 일로 깊이 생각되었졌다. 진지한 읽기로 볼 수 있는 신약의 구약사용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나 믿는 것으로부터 먼 차이가 있다. 신약기자는 구약이 사용가운데 독창성에 교란을 가져왔다.
구약에 있어 우리의 해석근거는 히브리와 아람성경으로부터 차이만이 아니라, 신약기자 또한 놀라운 방법 안에 본문을 적용하였다. 한 예로, 렘31:15과 같은 마2:18을 보면 헤롯의 흠없는 유아살해 예언으로 보지않고, 한편 예레미야의 말씀은 분명히 바빌로니아아 유대 침입으로 연결되지 않는가? 신약기자 는 구약성서와 합쳐서 어떤 논쟁을 가지는가?
매혹을 더하는 것은, 신약의 구약사용의 연구는 포괄적이며 큰 요구를 가진다. 이러한 각축장으로 들어가면 본문의 역사에 관한 연구가 교전중이다. 히브리, 헬라 그리고 아람지식의 진지한 연구를 필요로 하는데 왜냐하면 맛소라 히브리본문, Septuagint(구약헬라번역, 70인역), 사해사본으로부터의 자료, 타굼(구약성서의 아람번역), 그리고 다른 유대나 기독교가 구약의 사용하는 것을 신약의 언어와 비교해야한다. 이것은 권태로움을 생각하지 않으나, 신약내 구약의 사용은 또한 해석학적, 주석, 그리고 신학, 연구가 교전중이며 많은 사례에서는 결론에 앞서 수정이 요구된다. 어떻게 구약을 볼 것인가는 많은 기독인의 신학적 문제로 구분된다. 통치신학은, 시대 차이 안에 다른 방법을 운용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 관점이며, 언약신학은 역사을 통한 하나님의 일치를 강조하는데 각각 다른 그리고 이러한 과제 위에 특별한 다른 접근은 보인다.
우리의 주제는 또한 어떤 충돌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 과제는 충분하게 취급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이론적인 성서에 관한 우리의 신학들은 증명되어지나 그러나 신약기자를 통하여 구약의 사용은 우리의 신학들에 관한 물음들을 일어 나게 한다. 모든 틀림없거나 바른 선택의 관점 안에 다른 무관계한 부전에 관한 토의로 신약기자는 구약을 사용하였는가? 분명하게 수많은 구약본문은 있나 기독교을 통하여 무시되었고 그리고 우리는 수단이 많지 않다고 논의한다. 왜 그런가?
1. 간단한 역사적 고찰
예수의 가름침으로 이미 구약에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이다. 구약의 종교적 권위에 분내었는데 그는 안식일을 지키는데 촛점을 맞추지 않고 율법의 순수와 같이 행하였다. 사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나병자을 만지거나, 유혈문제의 여성, 그리고 시체를 만지거나 모욕받는 사람들(마8-9 민13; 15:19, 겔10:22)과 먹는 것은 법전을 업신여기도 위반하는 것이었다......분명히 이세상과 기독교에 문제가 되었는데 어떻게 히브리 성경을 정확히 해석할것이하는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적 권위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한 의문은 초기 교회를 삶을 지배하였다. 이사야 53장으로 부터의 분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것인지 묻게하는데 에디오피아 내시는 질문하기를, "나를 안내하는 이가 없으니 어떻게 알겠습니까?" 필립은 그 본문으로 부터 그리스도를 그에게 증거하였습니다(행8:26-35). 이러한 기술의 두 포인트는 초대교회의 구약을 해석하는 기독론적 방법이며 그리고 이해내에 안내를 필요로 하였다.
초대교회에어 하나의 중대한 문제는 구약의 할례에 관한 율법을 어떻게 취급할것인가 하는것이다.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놀랍게도 명백하게 구약의 할레에 관한 율법을 보호하였는데 왜냐하면 기독교의 경험과 다른 구약본문에 이방인의 포괄(행15)에 관한 논쟁의 촛점때문이다.......
2세기에는 근본적인 구약문제의 해결이 나타났다. Sinope의 마르시온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는데 주장하기를 구약의 어떤 장의 가치나 사상을 모두 거절하였다. 마르시온은 악의 창조와 어떤 유대인으로부터 기독교를 떼어놓기를 시도하는 구약의 하나님을 거절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바울의 서신과 누가의 복음서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였다. 게다가. 그는 구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느껴지는 책들의 장을 삭제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마르시온적 접근은 도처에 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감사하게도 마르시온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신약기자의 습관적 해석과 새로운 방법으로 구약을 향한 기독교적 접근을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구약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해를 통하여 조사되었다. 기독교는 구약의 윤리적 가르침을 사용하였고 예수는 설명하였으며 그리고 기독교사상의 실례를 제공하였다......
구약과 신약은 세기의 흐름가운데 해석에있어 신약의 두 갈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안디옥학파는 존 크리소스톰과 Mopsuestia의 데오도르에 의하여 나타났고, 알레고리적 배경과 아주 정직한 해석을 끌어내었다. 멀리 더 영향력있는것은 알렉산드리아 학파로 오리겐과 어거스틴을 통하여 나타났다. 이 학파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끌러내었는데 영적 의미를 본문에 할당하였고 특별히 그러한 본문은 까다로웠다. 알레고리는 구약본문내 기독교 신학을 쉽게 하였다......
개신교 개혁으로 알레고리적 해석은 마틴 루터의 알레고리 진정으로부터 본문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으로 돌아왔다. 루터와 칼빈 둘다 성서 사이의 일치와 차이점을 인식하였다. 루터는 성서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조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는 율법과 복음사이의 구별하였다. 칼빈은 한편 성서사이의 연속성에 촛점을 맞추었고 율법의 "세사용"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루터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율법은 여전히 기독교의 율법을 세우는 역할을 한다.....
구약은 신약을 관계에서 보여주는 것은 여전히 논쟁의 과제였다. 그의 두성서: 한성경을, D.L.Baker는 성서에 간계되는근대 8해결을 소개하였다.
근대 독자의 주요 문제는 신약내 구약을 사용하는것으로 신약기자의 구약본문 사용은 그들의 원 의미로부터 차이을 주는 경향이 있다는것이다. 어떤 특정한 표현은 해경을 제공하는데 사용된다. sensus plenior은 로마카톨릭과 또한 복음주의사이에 유명한 라틴 술어이다.
2. 신약내 구약사용의 분포와 빈도
구약인용의 조사로부터 흥미로운 결과는 유래되었는데 "헬라신약성서" 연합성경모임 초판의 대담한 출판은 암시를 출판하였다. 401인용의 37과 복음서, 사도행전, 로마서와 히브리서에 암시가 나타난다. 그러한 구약의 401사용은, 195는 공식적으로 따르는 전형으로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이것은 쓰여진"것과 같은 성서본문으로 인용되었다. 남아 사용된 구약은 구약성서의 본문으로 알려진 단어로부터 인용되었다.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구약은 저자의 목적에 의지하여 사용되었다. 마태는 구약의 실현과 같은 예수에 관하여 촛점을 맞추었는데, 바울은 이러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그는 이것(롬1:2)을 믿었다. 바울의 구약사용은 분명히 형편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유대에 그리스도안에 구원관계를 로마서신에서 구약를 54회 인용하였다. 그러나 몇몇 그의 서신에서 그는 구약을 언급하지 않는다. 골로새서의 예를 들면 분명히 구약을 인용하지 않았다. 계시의 저자는 구약을 결코 인용하지 않았으나 그러나 그는 다른 저자의 구약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단지 구약언어와 이미지를 그의 요점을 만들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저자는 예수의 정체성설명이나 유대 연설을 시도에 구약사용을 더 사용하는것 같았다. 예수의 정체성을 제시하거나 이방인 연설에 일반적으로 구약을 보다 적게 사용하였다. 신약서는 구약에 가장 의존하는 것은 히브리서, 계시록 그리고 베드로전서이다.
3. 방법과 해석학적 가설
이 주제의 흥미로운 관점은 방법으로 구약본문을 사용하는 것이다. 깨끗이 이미준비한것같이, 모든 신약기자가 우리가 생각하는 정직한 방법안에 구약을 사용것은 아니다. 정직한 사용은 물론 나타났다. 구약본문은 직접예언(마2:5-6)과 직접 논리상의 증거의 주장(마4:4; 롬4)에 사용되었다.
신약기자는 구약의 용어를 새로운 목적을 쉽게 이해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예수의 사역에 근거한 유사한 구약사건(욘3:14)이다. 호13:14에 심판의 언어는 고전15:54-55내 승리의 단어가 되었다. 이것은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구약본문을 사용하였는데 실례로 고전10:7이다. 신18:15-행3:22-23, 호11:1-마2:15, 사6:9-1, 욘12;39-41.
가정과 주석수단 이해의 열쇠로 신약의 기자는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구약을 사용하였다. 대부분의 이런한 필요 구조는 신약자신으로부터 수집되었는데 그러나 쿰란사본의 발견으로 조명을 돕고 신약기자의 실제와 필적할만한 것을 제공하였다.
첫번째 전제로 우리는 "공동체 결속"를 아는것이 필요했다. 예) 수7, 시118:10-사44:1,49:5, 고후5:14
예수 사역의 대리성격은 공동체 결속을 면밀히 연결하게 하는것으로 그의 이해와 그의 구약본문적용 방법으로 하나의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기독론적 주제 "종" "사람의 아들"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 이스라엘 처음 적용하는 대표 주제이다.
두번째 전제는 역사안에 일치로 때때로 모형론과 같은 것을 위탁받는다. 역사안에 일치는 실제로 하나님과 그의 사역의 방법의 확신이다. 예)사11:66, 시22, 마22:39-46.사40:3, 말3:1-눅3:4-6, 눅9:52-사40:3, 사49:6-눅2:32,행13:47, 사28:16,시118:22-벧전2:4-5,고후1:21, 삼하7:14-히1;5고후6:18.
세번째 초대교회의 전제로 그들은 종말론적 성취의 날가운데 살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거주동안에 끝이 올것이라 믿었다(고전10:11).이러한 가정은 쿰란 공동체 사람의 신뢰와 거의 유사하였다. 그들은 많은 유대인과 종말론적 촛점을 맞추고 히브리 성경을 읽었다.
4. 페세르와 미드라쉬
게다가 유대 전제에 구약을 사용하는 신약해석자들은 성서취급의 다른유대 방법의 인식을 필요하였다. 어떤 유대을 향한 성서접근의 한 방법은 쿰란으로부터 두드러진 유대인으로, 페세르(그말씀은 이러하다)이다.
5. 증명
1) 예1- 중요한 언급 요1:14-18
2) 예2- 중요한 인용 눅4:18-19
6. 지침
우리는 신약내 구약인용의 중요한 일부예를 보았다. 다른 예는 어렵지 않게 증가시킬수 있을 것이다.
신약내 구약사용은 신약내 가장 중요한 문제의 이해를 주고, 그러한 인용연구는 분명한 안내에 도움을 줄것이다.
1) 구약 절의 원 의미를 결정한다.
2) 본문의 양식분석
3) 결의, 가능성, 어떻게 구약본문을 이해하고 유대주의 내에 사용.
4) 해석학적 또는 주석적 가설의 결정으로 그것은 구약본문의 사용가능
5) 구약본문사용하는 신약기자의 방법분석
6) 신학적 중요성과 구약본문사용의 타당성 결정
7) 신약내 구약사용과 그렇지 않은 것에 의한 기록
<E. 얼 엘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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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신약의 용례의 성격
1. 총론
신약성서에서 구약어법은 종종 신약저자 사신의 표현형태가 구약의 영향을 받은 관용어법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살전2:4; 4:5). 그러나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은 구약의 인용, 의도적 암시, 혹은 회상의 형태이다. 하트만의 인용이유는 ①권위에 있어 지지를 얻기 위해서(마4:14)②연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막12:1) ③문학적 효과가 문체의 효과를 위해(딛1:12).
다른 헬라저작들에서 기대되는 것과 같이, 신약의 구약인용도 1세기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헬라어 역본인 70인역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다른 헬라어 역본, 아람어 타르굼, 또는 저자가 히브리 본문을 독자적으로 번역하는 것 등을 반영하고 아니다. 상이한 본문 형태를 사용한 것은 접어두고, 70인역을 사용하면서 다르게 인용한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기억의 실수에 의해서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이 과거에는 타당성이 있어 보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70인역의 인용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고의적인 변경인 경우가 훨씬 많다. 즉 특별한 번역과 정교화에 의해 또는 다양한 본문전승들의 사용에 의해 신약기자들의 의도에 부합하는 변경이 행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들은 구약성서의 개별문단에 대한 신약기자의 해석뿐만 아니라 구약전체에 대한 그의 시각을 보여주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2. 도입문구
일반적으로 "말하다"혹은 "기록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하는 신약의 인용문구들은 다른 유대문헌들, 즉 구약성서나, 쿰란문서들, 필로와 랍비의 저작들 같은 데서 발견되는 인용문구와 일치한다.
도입문구는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구약의 교훈을 적절히 해석하고 적용함으로써 구약의 신적권위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때때로 성경을 읽는 것과 아는것 내지 듣는것 사이에 명백한 구별을 하는 선이 그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에디어피아 내시 이야기에서 명백히, 그리고 나사렛회당에서의 예수의 이사야 주해에서 함축적으로 나타난다.
몇몇문구들은 기독교 공동체내의 특정 집단과 관련되어 있다. 아홉번의 "주께서 가라사대"인용들은 기독교 예언자들의 활동을 반영하는것 같다. 목회서신에 나오는 "미쁘다 이말이여"가 이끄는 달락들도 거의 비슷한 경우다.
3. 인용의 양식들과 기법들
(a) 두개 혹은 그 이상의 본문들이 결합된 인용은 다양한 양식으로 자주 나타난다. 구절들의 연결, 주석적 형태, 복합적이거나 뒤섞인 인용.
(b) 증언-예수의 메시야성을 "증언"하는 인용들은 초대 교회의 특별한 관심사였다. 다드에 의하면 "증언"인용들은 그 전체가 이미 기독론적으로 해석되어진, 더 큰 구약의 문맥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아졌고, 또 그렇게 사용된다.
4. 인용과 미드라쉬
(a) "미드라쉬"라고 하는 히브리어 용어는 "주석"이라는 뜻을 가지며 과거에는 구약성서에 대한 랍비적 주석과 관련해서 사용됨. 최근에는 문학의 장르로서 뿐만 아니라 주석행위까지, 또 주해의 결과 뿐 아니라 해석의 방법까지도 다리키는 것으로 폭 넓게 사용된다.
(b) 신약의 구약사용에 있어서, 암시적 미드라쉬는 두가지 의미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구약을 인용하면서 해석적 입장에서 변경을 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정교한 형태이다. 첫번째 형태는 언어유희를 포함한다. 두번째 형태는 로마서 10:11에서 볼 수 있다. 구약 본문에는 "누구든지"라는 말이 없다. 이는 바울이 자신의 해석을 인용구 속에 집어 넣어서 자신의 논지에 더 알맞게 만든것이다.
암시적 미드라쉬의 좀더 복잡한 형태는 ①다양한 구약성서의 본문이 병합된, 혹은 복합된 인용을 하면서, 그것들을 현재의 상황에 맞도록 수정하는 것과 ②(구약)성서의 상용구들을 사용하여 현재의 사건을 묘사함으로써 그 사건을 구약의 본문과 연결시키는데서 나타난다.
유아설화에서 수태고지는 사6:1-9:7을 암시하는데 다드는 이 부분이 초대교회 석의를 위한 일차적인 자료임을 밝힌바 있다.
복음서들은 재판 때의 우리 주님의 반응에 시편110:7과 다니엘7:13을 부여하고 있다. 역시 다니엘7:13의 사용을 포함하고 있는 묵시적 강화는 다니엘서의 특정구절에
대한 예수의 미드라쉬로 구성되었음이 분명하다.
(c) 신약성서의 명시적 미드라쉬는 쿰란의 페쉐르 미드라쉬, 그리고 랍비적 주해들에서 보이는 일군의 미드라쉬와 유사성을 갖는다. 고대의 랍비들의 주해들을 보존하고 있는 자료들은 신약성서보다 수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그 주해들은 일반적 구조에 있어서 초대 기독교 주해와의 중요한 병행을 제공해 주고있다. 왜냐하면①랍비들이 그들의 주해방법을 기독교에서 차용해 같을것 같지는 않고, ②비슷한 형태들이 1세기의 유대인 저술가 필로에게서도 관찰되기 때문이다. 그 기원은 "설교"나 "훈계"에서 뿐만 아니라 "주석"에서도 찾을 수 잇을 것 같다. 신약성의 주해들과 가장 큰 유사성을 갖는 강화의 형태는 "프로엠"(서문)미드라쉬이다. 회당에서 사용될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모양을 가졌다.
이러한 일반적 윤곽이 약간 변형된 형태로 신약에서 자주 나타난다.
예) 히10:5-39 롬9:6-29 고전 1:18-31 고전2:6-16 갈4:21-5:1 벧후3:5-13 고전1:18-3:20
마21:33-44 눅10:52-37 마15:1-9 마19:3-8
복음서들이 일치하게 증언하는 바와같이 성경의 의미에 관한 서기관들 즉 신학자들과의 논쟁들은 예수의 공적 사역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
랍비들의 석의와 신약의 석의의 분명한 차이점들도 간이 언급되어야 한다. 일상적인 랍비들의 석의와는 달리 신약성서의 미드라쉬들은 ①오경으로부터의 최초 본문이 없는경우가 많다. ②서문본문을 경여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③마지막 본문들이 최초 본문과 상응하거나 그것을 암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④종말론적으로 정향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구조에서 그것들은 랍비들의 용례와 유사성을 갖고 있다.
(d) 페쉐르 미드라쉬라고 일려진 종류의 주해는 쿰란문서(예 하박국 주석)에서 나타난다. 페쉐르라는 이름은 설명하는 문구, '그해석은 이러하다'에서 사용된 히브리 단어이다.
쿰란의 페쉐르는 랍비들의 미드라쉬와는 달리 초대교회의 미드라쉬에 휠씬 더 가까운데, 신약성서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이유는 거것이 카리스마적이며 동시에 종말론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적인 형태, 종말론적인 전망과 결합된 페쉐르문구는 상당히 많은 신약의 인용들에서도 나타난다.
예) 창21:12,창18:10-롬9:7-9, 신30:12-롬10:6-8, 창2:24-엡5:3, 창21-갈4:22-24,
출13,14,민20:14-고전10:1-5,6, 행2L4,16, 시11:22-행4:10
쿰란페세르는 공동체에 의해서 카리스마적 석의로, 의의 교사나 다른 지혜로운 교사들과 같이 영감받은 이들의 작업으로 간주되었다.
(e) 미드라쉬에서 증언으로: "성경의 문맥에서 떼어낸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결코 증언이 되지 못한다. 말씀이 무엇을 위한 증언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의미가 성경의 다른 부분들의 도움으로 끌어낸 것일 때 뿐이다." 더브는 다드의 이론을 넘어서서 신약의 '증언'인용은 미드라쉬로부터 즉 특정한 구약구절의 주해들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했다.
Ⅱ. 신약성서 해석의 전제들
1. 총론
신약의 구약해석은 유대인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구약성서의 이러한 기독교적 해석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은 본문들을 해설하는데 있어서 진지하고 일관성있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적-비평방법 역시 한계가 있다.
신약의 기자들이 구약을 해석하는 안목은 때로는 명시적으로 서술되나, 신약의 용례를 통하여 추론할 수 있을 뿐인 경우도 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당시유대교의 시각에서 연유한 것이며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부활에 대한 실제적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기독론적 초점을 가는 다는 거 이외에 그것을 주로 지배하는 네가지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별한 역사이해, 인간이해, 이스라엘 이해, 성경 이해가 그것이다.
2. 역사로서의 구원
예수와 제자들은 역사를 두세대, 곧 이시대와 다가올 시대의 틀안에서 이해했다. 이러한 전망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그 배경으로 갖는다. 그 예언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의 최종적인 구원과 그 대적들의 명망으로서의 "마지막날"과 "주의날"을 예언했엇다.
묵시적 유대교의 중요한 특징을 이루던 심판과 구원이라고 하는 "양면적성취"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가르침에서는 "두단계의 성취"로 바뀌었다.
3. 모형론
(a) 모형론적 해석은 "구약성서에 대한 초대 기독교이 기본적 태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모형론적 해석은 널게 이야기하자면 언약모형론과 창조모형론으로
나타난다. 후자는 롬5장에서 관찰될 수 있을 것같다.
신약성서의 모형론은 그 초점에 있어서 철저하게 기독론적이다.
(b) 예수이 죽음에 의해 완성된 새계약이 그의 부활에 의해 시작된 새창조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언약모형론과 창조모형론은 결합될 수 있었다.
(c) 구약의 모형은 새로운 시대의 실재에 상응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반대되기도 한다. 예수는 아담과 같이 인류의 대표자이다.
(d) 구언의 역사는 동시에 멸망의 역사이기도 하기때문에 그것은 심판의 모형론도 포함한다.
(e) 신약 해석학에 대단히 중요한 공헌을 한 레온하르트 고펠트는 모형론적 해석의 분명한 특징들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4. 다른 전제들
(a)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도 인간을 개체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인 존재로 본다.
(b) 초대기독교선지자들이나 교사들의 구약해설은 카리스마적 석의, 혹은 세르보가 말한대로 영적인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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