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문화, 그리고 교회
-우리는 어떤 말을 할 것인가?
글 / 성석환 목사(문화선교연구원 책임연구원)
1. 언어와 문화
1) 언어는 문화를 반영한다.
언어를 연구하고 언어의 구조와 생성과정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소쉬르 이후 촘스키에 이르기까지 큰 발전을 거듭하였다. 초기의 연구의 관점은 주로 언어를 기호로 보면서 기호의 규정적 의미에 집중하였으나, 차차 언어의 유동적 특성으로 관심을 옮겨갔다. 소쉬르는 관계의 체계에 의해, 그리고 유사와 차이의 조직망을 만들어 냄으로써 의미를 생성한다고 보았다. 이로써 구조주의의 시작을 알린 소쉬르의 주장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언어는 곧 문화적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언어 기호의 경우 시니피앙(기표)과 시니피에(기의)는 어떠한 필연적인 관계도 갖지 않으며, 역사적인 우연을 통해 규범적으로 ‘그렇게’ 결합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자의적 관계를 갖는다고 보았다. 즉 ‘아빠’가 꼭 /아빠/라고 발성될 필요는 없다. 그래서 그가 주목한 것은, 언어가 어떻게 문화적으로 구성되는지 묻는 것이다. ‘아빠’가 왜 꼭 /아빠/가 되었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언어가 사회적 합의의 결과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서 ‘아빠’를 물론 우리는 /사슴/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아빠/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 합의와 인정을 획득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획득된 사회적 합의는 어떻게 다른 것들과 변별력을 획득하는가? 소쉬르에 의하면 그것은 ‘차이’를 통해서이다. 우리가 ‘아빠’를 /아빠/라고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사슴’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고, ‘동생’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시니피앙은 음소들의 구조적 결합을 통해서 특정한 발성을 내며, 이것은 곧 차이를 통해서 그 해당 기의를 획득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가 얻으려 하는 것은, 언어가 문화적 합의나 차이의 인정을 통해서 그 의미를 얻는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언어라는 기호를 다룬다면, 우리는 언어에 대한 공시적 연구의 성과를 거론해야 정당하다. 즉 ‘아빠’가 과거에도 /아빠/라고 기표되었는지, 아니면 혹시 /오빠/ 또는 /아바/라고 표기되었는지 연구하여 오늘날 /아빠/라고 표기되고 발성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 또한 언어가 살아있는 물리적 구조체계임을 증명한다. 이 변천의 과정이 문화적 의미를 갖는 것은, 사회문화적 조건들에 의해서 언어 기호의 변화가 추동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이러한 언어의 공시적 특성을 언어의 사회성, 통시적 특성을 언어의 역사성이라 말한다. 언어는 살아있다. 언어는 그것이 말과 기호로 표상되는데, 모두 역사적 과정이든 동시대적 의미에서든 문화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적 궤적이 있는 사회적 합의이기에 사회문화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언어를 다룸에 있어서 문화적 변화의 추세(trend)를 무시한다면 언어의 변화에 대해서 보수적인 태도를 갖게 될 것이며, 반대로 문화적 변화의 추세의 전적인 반영으로 언어의 역할을 해명한다면 규범적이고 규정적인 언어의 역할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게 될 것이다.
2) 문화는 언어를 재구성한다.
소쉬르를 이어 문화연구에 기호학을 도구로 도입한 바르트(R. Barth)는 언어를 말에 국한하지 않고,기호의 특성을 정립하여 사회 생활에서의 기호가 작용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우리가 옷을 입는 방식이나 먹는 것 등 사회화의 양식들이 바로 우리 자신과 우리 문화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며 그것들은 모두 기호이다.
우리는 여기서 앞서 다룬 명제, ‘언어는 문화를 반영한다.’에서 지나 문화가 어떻게 언어를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바르트는 기존의 기호(시니파앙1+시니피에1)가 새로운 시니피에를 획득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주목하였다. 요즘 한국이 명품 제조사의 ‘봉’이 되었다는 기사를 자주 신문에서 읽게 되었는데, 영국의 유명한 브랜드인 ‘버버리’는 그것이 고유한 체크무늬의 영국제 옷이라는 정의를 갖지만, 만약 누군가가 “내 애인은 버버리만 입어!”라고 했다면, 여기서 ‘버버리’는 ‘고가품’, ‘사회적 능력’ 등을 의미한다. 즉 비싼 물건을 사 줄 수 있는 능력과 신분을 은근히 지시하게 되는데, 이것을 바르트는 기호의 ‘내포적’ 의미라고 하였다. 명품은 그러한 이유로 한국에서 불황을 겪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국에서도 한국에서처럼 동일한 내포적 의미를 가질 것인가?
따라서 문화는 언어의 내포적 의미를 재구성한다. 그러므로 언어라는 기호는 그 기호를 해석하는 ‘코드’가 요청되고 ‘코드’는 특정한 ‘맥락’에서 ‘텍스트’를 구성한다. 즉 문화는 언어 기호를 텍스트로 구조화한다. 동시대의 문화는 기존의 언어를 재구성하여 내포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표명하도록 하며, 그것은 해당 맥락을 통해서 읽혀져야 한다. 만약 언어 기호가 기존의 의미와 다르게 쓰여진다면, 일단 우리는 그것이 혹시 다른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다른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이 경우 기존의 의미를 고수하려 한다면, 문화적 재구성 작업과 맞서게 되고 동시대 문화에 대해서 보수적이거나 배타적인 될 것이다. 반대로 문화의 기호의 재구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면 아마도 기존의 체계나 의미전달 경로가 와해되거나 많은 부분 수정, 변경되어야 할 것이다.
3) 이미지와 언어
언어의 규범적 의미에 대해서 포스트모던 문화는 많은 의심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후기 구조주의 계열의 연구에서는 구조주의가 기존의 구조를 보수적으로 옹호하거나 정당화시킨다는 점을 폭로하면서 언어의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밝히려 한다. 예컨대, 사회적 합의가 그 자체로 정당하거나 규범적인 것이 아니고,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전쟁 기념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 기호가 내포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폭로함으로써 우연적 결합이라는 ‘신화’를 제거하고 기존의 언어로 지시되는 일체의 대상을 상대화시킨다.
여기에 더해서 또 한 가지 주목한 흐름은, 언어를 ‘이미지’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언어와 상징, 그리고 그 내포적 의미와 연상작용 등을 망라한다. 포스트모던 문화의 기호연구는 대부분 이미지에 대한 연구이다. 이미지는 규범적 언어보다 더 많은 내포적 의미를 숨기고 있다. “그 사람은 참 파란 느낌이야”라는 말은 언어이지만, 이미지를 담고 있다. ‘파란’은 이미지를 통해서 ‘색’이 아닌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문제는 보드리야르가 지적하듯 이러한 이미지가 과도하게 겹쳐져서 ‘내파’가 일어나고 결국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들이 새로운 의미를 구축한다. 이제 실재는 시뮬라시옹에 의해 조작적일 뿐이다. 이미지의 내파, 즉 과잉은 이제 실재의 지시대상을 소멸시켜 버린다. 이제 실재는 기호로 대체된다. 이미지는 이제 자기자신의 모델을 죽인다. 사실 소쉬르 당시에만 해도 기호가 특정한 지시 대상을 명증적으로 연결한다는 믿음이 있었으나, 보드리야르가 보기에는 그러한 근대주의가 기대했던 이미지의 실재에 대한 재현력은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의 창조물, ‘시뮬라크라’는 이제 더 이상 실재와 교환되지 않고 그 자체로 교환된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종착역은, 결국 우리 시대가 기존의 가치를 용인하지 않는 시대임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특별히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는 보드리야르의 주장은 비껴가더라도, 우리가 이러한 포스트모던 문화에서 다루는 언어 기호에 대한 착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언어가 명증적이고 규범적으로 지시하는 것에 대한 의심이 왜, 어떻게 시도되는지에 대한 이해이다. 만약 기존의 언어 기호가 전혀 의심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만약 그것이 도대체 변할 수 없는 신념의 기호라면 더욱 고민은 가중된다.
2. 기독교와 언어
1) 기독교와 ‘말씀(words)’
기독교만큼 ‘말’과 관련된 종교는 없다.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우리는 종종 이 선언을 ‘말씀만으로’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을 동원하지 않으시고도 ‘말씀’만으로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고백한다. 그런데 우리가 앞서 살펴본 기호학적 관심으로 본다면, 하나님이 ‘나무’를 창조하실 때 말씀하시고 지시하신 ‘나무’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서에 명시된 ‘나무’는 하나님에 의해서 명명되고 그 의미가 최초로 부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후에 인간은 하나님의 위임에 의해서 다시 온 창조물에 대해서 이름을 짓게 된다.
기독교에서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 역시 인간의 문화적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말이 바르트(K. Barth)가 말하였듯 단지 ‘하나님만의’ 말씀이라면 태초로부터 인간의 문화적 활동은 위축되고 만다. 메츠거는 <The Word of Christ and the World of Culture>에서 바르트의 입장을 재해석하는데, 메츠거는 문화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바르트 신학을 통해 새롭게 규정하려고 한다. 한 마디로 줄인다면, 하나님의 메시지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세속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과 ‘긍정’을 모두 동반한다.
우리가 이러한 신학적 작업에 주목하는 것은, 기독교와 언어의 문제에 있어서 ‘성육신’ 사건을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인 성육신은 희랍의 ‘로고스’ 즉 이성과 진리의 개념이 어떻게 유대교적 전통인 하나님의 말씀과 결합되었는지 보여준다.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과 인간의 이성의 조화, 그것이 성육신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러한 전승에 알맞게 그리스도 예수는 말씀만으로 병을 치유하시고 기적을 베푸셨다. 즉 희랍의 의미인 로고스가 유대적 전통에 의해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여 기독교적으로 재구성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이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은 거룩한 언어의 세속화이다. 거룩한 언어는 늘 세상 가운데 존재하여 진리를 드러낸다. 거룩한 말씀은 문화 가운데 오셔서 문화의 자리에서 그 말씀을 문화화한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하나님의 말씀이 문화의 자리로 오셨듯이, 교회의 언어도 역시 문화의 자리에서 선포되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2) 교회와 언어의 역할
이제 우리는 기독교의 언어가 ‘말씀’이며, 이 ‘말씀’은 거룩과 이성, 문화를 연결하는 통로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교회의 언어는 어떠한가? 교회의 언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문화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가?
교회의 언어, 또는 오늘 우리가 다루려는 ‘용어’는 소쉬르의 입장에서 보면 독특한 구조틀을 가지고 있으며, 바르트에 따르면 특정한 내포적 의미를 가진다. 예컨대, “내일은 주일이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곧 교회에 다니는 사람,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이 의미를 모를 수 있다. 그러나 교인들끼리는 이러한 합의가 이미 존재하므로 그 맥락에서는 통하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점이 교회라는 특정한 공동체의 고유한 구조를 유지하거나 강화하려는 특성을 고수하도록 한다. 즉 ‘차이’를 통한 기호의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 다른 체계와는 다른 새로운 시니피에를 지나치게 많이 부여할 경우 이 의미의 사회적 합의는 매우 고립된다. 두 가지로 이 기호의 유용성의 확장을 시도하게 되는데, 한 가지는 내포적 의미가 더욱 확고하게 전달되도록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며, 또 한 가지는 공유된 의미의 영역을 더 확장시키기 위해서 공격적인 포교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경우이든 언어 기호가 갖는 소통적 기능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서 포스트모던 문화가 지적한 언어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강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즉 교회의 언어가 사회문화적 변화와 소통하지 못하거나 반영과 재구성이라는 언어 기호의 보편적 특성을 거부한다면 고립되거나 절대주의의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예컨대, 한국 교회에 잔존하는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용어들이나 권위적인 구시대의 용법, 나아가 어법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고수하려는 습성 등은 결국 언어 기호의 보편적 특성을 무시하고 ‘사문’을 만들고 말 것이다.
거룩한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을 통해, 우리는 교회의 언어 기호 역시 ‘세상’의 기호로 육화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말씀’의 거룩성을 보전할 것인가? 것은 또 다른 문제이나, ‘말씀’의 거룩성이 세속과의 단절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반영과 재구성을 통해서 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3) 교회의 언어는 어떻게 거룩해지는가?
예컨대,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 가운데 이해하기 어렵거나 문법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수정이나 변경을 거부하는 태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과거에 사용하던 교회의 용어들이 오늘날 사용하기에 부적절한 경우는, 대부분 ‘거룩’한 듯 보이려는 의도이거나 권위를 과시하려는 의도이다. 물론 우리는 앞서 기호학 일반에서 다룬 것처럼, 교회의 용어가 과거로부터 사용하던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입장에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보편적 의미에 있어서 사회문화적으로 그 합의의 영역이 축소되었다면 교회는 과감하게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교회의 언어를 여전히 거룩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말 자체의 거룩함보다는 발화자의 거룩함에 달려있다. 입으로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하늘 나라에 갈 수 없고,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복이 있으며, 거룩의 모양보다 거룩의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 성서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모세도 말을 못했고, 바울도 말을 못했지만 그들은 거룩한 사람들이었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소문은 거룩한 말의 능력이 삶의 자세를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되었기 때문이었다.
교회 언어의 거룩성은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성으로부터 연유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신 성육신을 따라 세상 가운데 그 거룩함을 희생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다. 교회의 언어는 사회문화적 변화에 대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목적은 단순히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목적은 거룩한 말씀의 능력으로 세상의 문화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거룩한 모양을 닮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언어를 볼 때, 용어의 용례와 의미의 점검과 재구성은 단지 말을 바꾸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사회적 변화와 시대를 분별하는 개혁의 작은 발걸음일 것이다. 말을 바꾸지 않고 사람의 인격의 변화가 없듯이, 교회의 말을 세상 가운데 능력있는 것으로 만들지 않고서 교회의 건강성은 보장할 수 없다. 교회의 언어가 남성중심적이고, 약자보다는 사회적 권력자와 기득권 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일 때, 이미 교회의 언어는 죽은 것이다. 교회의 언어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복종하고, 세상 속에서 말씀의 거룩함을 회복하며 세상의 변화와 개혁의 발걸음을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과제이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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