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무희' 최승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단발머리' 코치부터 공연 기획까지 헌신적 뒷바라지
“저놈은 ‘삼살방’이라 장차가 걱정이다.”
아버지 안기선(安琦善)이 아들 필승(弼承)을 두고 했던 말이다. 안필승은 최승희의 남편 안막의 본명이다.
살아남은 세 아들 중 첫째가 보승(輔承), 막내가 제승(濟承), 가운데가 필승이었다.
안보승은 어린 시절 필승을 “머리가 좋아 공부도 잘하지만 집집의 문패를 모조리 기억하는 등 암산능력은 주산보다 빨랐다”고 기억한다.
1935년 일본 도쿄의 한 식당에서 최승희와 안막 부부가 나란히 앉아 있다. 안막은 최승희에게 환상적인 인생 동반자였다. 안막은 무용가로서 최승희에게 부족한 점을 거의 완벽하게 채워 주었다. |
최승희에게 안막은 지금 보기에도 환상의 인생 동반자였다.
안막은 무용가로서 최승희에게 부족한 점을 거의 완벽하게 채워 주었다.
최승희는 ‘자서전’에서 결혼 전에 만났던 안막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1941년쯤 특유의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최승희의 모습. ‘최승희 스타일’의 상징처럼 알려진 단발머리도 안막이 신경 쓴 결과였다. |
안막은 당대 지식인으로 무용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승희가 춤꾼으로서 세상에 꽃을 활짝 피울 수 있도록 도운 충실한 조언자이자 안내자가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안막의 매니저 역할이 돋보였다.
최승희가 춤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공연 관련 기획, 홍보, 섭외, 재정 문제까지 온갖 궂은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최승희의 말대로 ‘무용가 최승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역할을 그렇게 설정한 것이다.
심지어 최승희의 헤어스타일까지 신경썼을 정도로 꼼꼼하게 챙겼다.
‘최승희 스타일’의 상징처럼 알려진 1930년대 단발머리도 안막이 코디네이팅한 결과였다.
안막은 결혼 4년차였던 1934년 최승희의 요청으로 안필승에서 개명까지 했을 만큼 희생적이었다.
안막은 프로문학의 이론가로서 문학활동까지 과감하게 포기하고 최승희를 위해 헌신했다.
1939년 유럽 순회 공연 중 프랑스 파리 트로카데로 분수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최승희. |
최승희는 잠시 동안 시댁이 있는 경기도 안성으로 내려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무용 공백 기간이 길어지면서 최승희는 삶의 의욕을 잃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최승희를 다시 제자로 받아주도록 이시이 바쿠를 어렵게 설득해 탈출구를 마련해 준 것이다.
당시 이시이 바쿠가 안막에게 오히려 최승희를 부탁했던 말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작가는 많이 있으나 최승희와 같은 무용가는 다시 나오기 힘들다. 부디 최승희를 좀 도와 달라.”
1939년 프랑스 파리에서 공연된 ‘화랑무’. |
유사한 상황이 1938년에 다시 일어난다.
최승희는 글로벌 성공을 꿈꾸며 그해 1월부터 미국 순회공연을 시작했다.
이 또한 최승희가 더 넓은 세계무대에서 제대로 평가받도록 하기 위해 안막이 기획한 것이었다.
그러나 뉴욕 공연장 앞에서 교포들을 중심으로 반일시위가 벌어지는 바람에 그해 2월에 공연이 중단되고 말았다.
이 여파로 실의에 빠진 최승희에게 유럽 순회공연이란 모험적 아이디어를 낸 것도 안막이었다.
최승희는 이 유럽 순회공연을 통해 일약 글로벌 스타로 발돋움한다.
1939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된 ‘세가지 전통적 리듬’. |
“무용이 국제적으로 수준이 높은데 저의 무용 공연이 생각보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얻게 되어… 유럽에서 상상 이상의 반향을 일으킨 것을 생각하면….”
1939년 2월 6일 프랑스 일간 르마르탱에 실린 최승희 기사. |
일제 말기 안막의 뛰어난 매니저 능력을 짐작하게 하는 증언도 있다.
안막과 친분이 두터웠던 일본 가토 구니오(加藤國生)가 했던 말이 그것이다.
1941년 11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무용공연 사전 허가제를 도입해 반드시 전쟁 수행 고무에 직결된 내용을 포함하도록 강요했다.
최승희는 결혼을 고민할 때 ‘절름발이 예술가’론을 편 적이 있다.
“개인 생활의 일부분을 희생하고 예술가가 되는 것은 절름발이 예술가와 같이 생각되었다”는 말이 그것이다.
‘훌륭한 예술가’가 되기 위한 이유로 여성이 ‘인생으로서 밟아야 할 일’, 곧 결혼을 피하기도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최승희 무용사에서 안막이란 존재가 없었다면 그 말 그대로 절름발이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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