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훈련이란?

 

글 / 구요한 목사 

 

 영성(靈性, sprituality)은 무엇이며 영성 훈련(spiritual training 또는 spiritual formation)은 무엇인가? 오늘날 한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영성 또는 영성 훈련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영성이란 말을 무비판적으로 선호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영성이란 말의 의미와 정의의 모호함 때문에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싫든 좋든 영성이란 말이 많은 신자들에게 관심을 끄는 것은 사실이다.

 

 왜 그런가? 무엇보다 먼저 지식과 교리와 외적 헌신 위주의 메마른 신앙생활,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반동으로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를 통한 관계의 회복, 세상적이고 인본주의적 것과 대조되는 초월성과 초월적인 체험을 강조하기 위해 영성이란 말이 생긴 것 같다.

 

 그러므로 영성 회복 또는 영성 훈련은 전통적인 기존의 교회나 신앙생활이 주지 못하거나 소홀히 취급한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 내적 영성 즉 성화 및 성령의 역동적인 은사와 능력의 회복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같은 영성이란 말을 사용해도 각 교파나 전통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다. 리차드 포스터는 [생수의 흐름](Streams of Living Water)에서 기도 충만의 삶인 명상 기도의 전통, 고결한 삶을 강조하는 거룩 운동의 전통, 성령의 능력을 발견하는 은사적 전통, 긍휼한 삶을 사는 사회 정의의 전통, 말씀 중심의 삶을 발견하는 복음주의 전통 및 성례적 삶을 발견하는 성육신적 전통으로 구분하여 각 전통의 장, 단점을 살펴보았다.

 

 오늘날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영성의 네 주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1. 캐톨릭의 영성 

 

개신교 입장에서 보면 로마의 캐톨릭 교회는 마귀의 집단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전에는 어거스틴과 같은 유명한 교부들도 ‘캐톨릭 신자’였다. 비록 기독교계에게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고 있지만, 오늘날 개신교에서 회복 중에 있는 캐톨릭적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마담 귀용, 아빌라의 테레사, 성 프란시스 및 십자가의 요한은 개신교의 영성에서 주지 못하거나 소홀히 취급한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 영성의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기도와 명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신비적 체험과 사랑을 통한 관계 회복, 이를 통한 이웃 사랑의 실천, 겸손, 헌신, 금욕 등이 특징을 이룬다.


 오늘날 영성가라고 불리우는 리차드 포스터, 달라스 윌라드 및 유진 피터슨 등은 강조점은 다소 다르지만 바로 이 분야들을 집중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물론 캐톨릭 영성의 단점이라면 객관적인 교리와 말씀을 무시하고 개인적이고 신비한 체험을 정도 이상으로 추구한 점이 있지만 이를 잘 살리면 말씀과 교리를 중시하는 정통 교회의 영적 메마른의 좋은 보완제가 된다.


 주요 성경 구절 :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0-21)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2. 정통 교회의 영성 

 

정통 교회로 불려지는 개신교의 영성은 말씀의 영성이다. 성경 공부, 제자 훈련, 교리 공부 등 말씀 중심의 영성이 곧 개신교 특히 정통 교회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교리는 신앙의 뼈대와 안정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이성주의, 사변주의 및 율법주의로 흘러서 교리 고백과 전통은 바르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한 관계가 빈약하여 인격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already’)을 소홀히 하고 미래성(‘not yet’)을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의 임재 체험과 은사 체험이 결여된 메마른 정통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주요 성경 구절 :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3).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3. 오순절 교회의 영성

 

오순절 교회의 영성은 은사의 회복을 통한 성령의 역동성, 사람의 믿음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already’)을 강조한다.
 단점이라면 객관성인 교리의 취약성, 내적 인격 성숙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보다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질 축복, 신유 및 외적인 은사의 지나친 강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사랑, 희생, 겸손의 미덕이 약하고 반(反) 지성적이고 반(反) 전통적인 성향이 짙어 정통 교회의 눈총을 받고 할 수 있다.

주요 성경 구절 :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4. 사회적 영성 

 

정통 교회의 또 다른 취약점은 개인 구원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사회성이나 사회적 윤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나치면 개인적 구복신앙, “나”만의 신앙으로 치우치게 된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가 사회의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도 이 부분에 대한 소홀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것이 소위 말하는 사회 복음(social justice)이다. 사회 복음은 가난한자, 억울한 자의 편에 서서 사회의 구조적인 악에 대항하여 사회 정의를 주창하는 복음이다.


물론 구제와 사회 봉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규모와 물량면에서 교회를 따를만한 다른 종교 단체가 아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위상이 낮아지고 있는 것은 교회 중직들의 사회적 윤리성 결여와 사회 문제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을 썩지 않게 하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부정과 부패에 연루된다면 그것은 당사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하나님 나라 확장에 치명젹인 폐해를 끼치는 것이다. 오늘날 교계에서도 이 문제의 결함을 인식하고 다각도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적 영성은 이런 점을 보완한다. 사회적 영성은 단체는 물론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없는 자, 핍박 받는 자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우리도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배워, 성공한 신앙인, 복 받는 신앙인의 자세에서 벗어나 주변에서 고통 받고 힘들어 하는 이웃에 자비와 긍휼을 베풀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나만의 신앙에서 벗어나, 사회적, 공동체적인 책임의식과 윤리의식에도 눈을 떠야 할 것이다. 그러할 때 신자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 복음의 단점은 개인의 변화가 없는 사회 정의의 실현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이루어질 수도 없다는 것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개인인데 그 구성원 자체가 구원을 받지 못하고 변하지 않은 채 아무리 사회 정의와 긍휼을 외쳐도 결국은 제자리에 맴돌 뿐이다. 이들은 사회 악은 개인 악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또한 자칫 잘못하면 특정 정당이나 정파와 연계되어 영혼 구원과 사람의 변화라는 복음 본래의 사명을 잊어버리기 쉽게 된다.


주요 성경 구절: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 2;10).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미 3:1-3).

"악인의 집에 오히려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그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였고 그 거민들은 거짓을 말하니 그 혀가 입에서 궤사하도다"(미 6:9-12).

 

* 성경적 영성 

성경적 영성은 위의 네 가지 영성 모두를 필요로 한다. 특히 신자들에게는 지성, 영성 및 덕성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개신교 영성이 지성을 강조한다면 좁은 의미의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 및 은사의 회복을 통한 역동성 회복이라고 할 수 있으며 덕성 즉 성령의 열매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분야는 4 가지 영성 모두에서 부족한 부분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캐톨릭적 영성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정통 교회의 영성인 말씀과 교리의 확립 및 내적 성숙 즉 성화의 강조, 오순절적 영성인 성령의 은사회복을 통한 역동성과 사람의 믿음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회복 및 성령의 열매를 통한 그리스도의 인격 회복, 가난한 자에 대한 긍휼과 사회 정의의 실천을 통해 균형 잡힌 영성 즉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 훈련이란 성경 공부나 교리 공부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과 성령의 역동성 체험이란 분야에 자연스럽게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성 훈련은 기본적인 말씀 공부와 신앙 훈련을 마친 사람들이 후속 과정으로 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제시하는 영성 훈련은 좁은 의미의 영성 훈련인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 및 성령의 역동성 회복이란 관점에서 초점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자유 의지 . 비록 우리가 영성 ‘훈련’이란 단어를 사용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에 대한  사람의 책임 있는 반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영성 훈련이란 말에 치우쳐 사람이 모든 것을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이나 공급하시는 능력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것에 민감하지 않은 훈련은 인간의 부질없는 노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하신다고 해서 우리는 가만히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도처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능력에 대한 사람의 책임 있는 반응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 4: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
경건의 연습의 연습하다는 말의 헬라어 “김나조”는 훈련하다, 운동하다인데 이 말에서 영어의 형용사 “훈련의,  단련의”(gymnastic), 체육가(gymnast), 체육관(gymnasium)이란 말이 파생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성 훈련을 통해 우리의 영적 근육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 훈련이란 성경 공부나 교리 공부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과 성령의 역동성 체험이란 분야에 자연스럽게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좁은 의미의 영성 훈련인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 및 성령의 역동성 회복이란 관점에서 몇 가지 영성 훈련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영성 훈련들은 이미 21세기를 주도하는 세계적인 교회나 사역 단체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분야들이라고 할 수 있다.


- 성령의 기름부음
- 찬양과 경배
- 성경적 치유
- 축사와 영적 청소
- 새마음 훈련
- 하나님의 임재 연습
- 하나님의 음성 듣기
- 중보 기도
- 영적 전쟁
- 리더십 훈련
- 영적 부흥 (이는 영성 훈련이라기 보다는 신자들의 열망이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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