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서에서 본 시간과 영원 

 

 

글 / 에른스트 예니 교수(스위스 바젤대학 구약학)

 

 

- 구약에 나타나는 시간의 성격

- 시간을 나타내는 표현들

- 시간을 표현하는 언어의 내용

- 계시와 시간의 관계

- 하나님과 영원 그리고 인간과 시간 

 

 

구약은 철학적인 체계나 조직신학적인 책도 아니다. 오늘 우리는 시간에 대해서 일반적인 체계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영원에 대하여 시간의 저편에 대한 추상성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나 영원에 대한 추상적 생각은 공간과 같이 희랍철학에서 나온 개념이며 오늘날까지 그렇게 이해되고 논의되고 있다.

 

구약에는 오늘 우리가 공간개념, 물리학적으로 시간이나 4차원을 이야기하듯이 추상적인 시간에 대한 이해를 찾아볼 수 없다. 구약에 나타나는 시간개념은 고대에서 나타나고 단순하며, 세계 어디서나, 어느 인간에게든지 공통적인 시간개념이다. 시간은 그 단위가 연속성으로 보는 것, 현재의 시간이 모든 사건에 관련되는 기본 시점이라는 생각, 그리고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우리와 멀리 있는지 가까이 있는지를 아는 기준이 되며, 지난 시간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구약에서 나타나고 있다.

 

구약에서도 언어라고 하는 도구를 통해 시간의 형태를 말할 도구가 준비되어 있다. 언어학자나 인류학자들은 구약에 나타나는 시간 개념의 표현은 모든 다른 민족에게 나타나며 이것을 가지지 않은 족속은 없다고 한다. 히브리어는 이런 시간의 개념을 표현하는데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 표현 방법은 달라도 일반적인 시간의 개념의 표현일 뿐이다.

 

강조하고 싶은 바는 언어적인 면에서 판단할 때 구약에는 특별한 히브리적 사고로 시간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는 대로 히브리적 사고와 그리스적 사고 사이에는 원칙적이 대비가 있다고 하나, 언어학적인 면에서는 지지할 수 없다. 히브리적 사고와 희랍적 사고사이의 차이를 주장하는 것은 노르웨이 신학자가 주장한바 있는데, 그가 주장한 것은 사고의 틀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고의 표현의 내용을 비교한 표면적인 것이다. 오늘 우리는 히브리적 사고나 희랍적 사고를 비교하는 것은 할 수 없고, 다만 구약이 어느 수단으로 시간과 영원을 표현하는지 알아보고, 어떤 신학적인 이해와 관련하는지 알아 보도록 하자.

 


< 구약에서의 일반적 시간개념을 나타내는 단어들 >

구약의 고대히브리어는 시간에 대한 일반적 단어인 현재, 과거, 미래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다. 시간 표현에 3-4개의 명사를 가지고 표현한다.

 

1. 먼저 소개할 단어는 '에트' 이다.

이것은 시간의 길이 곧 시간이 얼마나 긴지의 시간개념이 아니라 시간의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내일 이때에 내가 우박을 내리겠다' 에서의 내일은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일어나는 사건은 조금 길 수도, 짧을 수도 있으며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중에 어느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레미야 50:16에 '추수 때에' 라는 구절은 추수의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을 강조하는 것이다. '에트' 가 사용되는 때는 적절한 시점을 강조하고 있다. 시104:21 에 '주께서는 그들의 시간에 기다리는 자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신다.' 라는 표현이 있다.

 

2. '욤' 이라는 단어가 있다.

'날'이라는 말은 밤에 대비해서 쓰는 말이다. 또 24시간을 말할 때도 쓰인다. 어떤 일정한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을 말한다. '요셉이 집에 들어왔을 때' 에 '욤' 을 쓰는데 들어가는 날이 아니라 들어간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욤'이 나오면 ' ...는 때' 로 번역한다.


3. '욤'의 복수형은 '야미'이다.

번역하면 '날들'이다. 날들이라면 상당히 오랜 시간을 말한다. 아브라함의 때, 즉 아주 긴 시간을 말한다. 과거나 미래는 이 단어의 형용사를 추가하여 사용한다.


4. '올람' 영원이라고 번역된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히브리어에 없듯이 영원에 딱 들어맞는 단어는 없다. 영원을 이해할 때 추상적인 영원이 아니라 현재로 봐서 과거나 미래 어느 방향으로도 가능하며 양쪽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시점을 말한다. 이것은 단독으로 쓰이지 않고 전치사, 부사를 사용한다. '영원전 부터'로 번역하는데 '오래 전에서부터 영원까지' (먼 시간 까지)등으로 쓰인다. 우리가 표현하는 과거에서 미래까지의 영원까지는 히브리어로 '영원부터 영원까지'로 표현하는데 아주 멀리 떨어진 개념이다. 추상적이지는 않다. 전치사와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연계형으로, 올 시간을 표현하는 시간이 있다. '올라'를 영원으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계약이 아니라 미래의 먼데까지 계속되는 계약을 말하는 것이다. '영원의 하나님'은 과거에서 미래까지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올람'은 문맥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영원한 노예'는 일생을 노예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영원의 날들' : 오래 전 시대로 표현, 다윗 때나 창세 때를 표현하기도 한다. 지금 까지의 설명은 고전 히브리어의 '올람'의 뜻이다. 성서이후나 그 이후 히브리어 발전에서는 희랍어의 영향으로 '시대', '세상' 의 뜻을 가지게도 되었다.

 

다시 정리하자. 히브리어는 몇 개의 명사, 전치사, 부사 시간 표현으로 동사를 가지고 구체적인 시간을 표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 시간을 표현하는 언어의 내용 >

시간을 표현한 내용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가 가지는 내용과 비슷하다. 시간이나 시점을 말할 때 그 시간에 무엇이 일어났는지의 내용을 히브리어는 중시하고 있다. 현대인은 기하학에서 공간과 내용을 구분하듯이 시간과 시간의 사건을 구분하도록 훈련받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히브리인들은 시간에 일어난 사건들을 진행과 상태를 묶어서 표현한다. 가령 2차 대전 때를 말한다면 1940년대의 몇 년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좋은, 나쁜 시간을 말할 때에는 시간의 질적인 면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대상 29 :30 에 다윗왕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에 관한 시간들에 관해 역사를 썼다'고 말한다. 여기서 시간은 시간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애가 5:21에 '우리의 날들을 예전과 같이 새롭게 하소서'에 옛적의 좋았던 내용을 다시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시간과 시간의 내용을 구분하는 것이 그 두 가지를 일치시키는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도 연대기적인 시간도 나타난다. 다시 말하거니와 구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근거가 없다. 히브리 사람들이 시간에 독특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구약의 사건들이 동질성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시간적으로 전혀 상관 없이 사건의 질적인 내용을 가지고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기술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직선적인 시간의 구도가 원형적인 반복적인 시간의 반복성으로 대치되기도 한다고 하는 이가 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예배에서 경건한 사람이 구원을 현재적으로 경험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제례축제에서 해마다 달력에 따라 하나님의 구원행동이 재현된다고 보았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이 과거의 일어난 일에 몰입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런 반복 또는 재현되는 일들은 예언자들이 미래로까지 투사하였다고 본다. 독일 신학자 발리는 시간의 축약이라고 이것을 말하였다. 갈링은 현대의 우리에게는 3개의 시제가 있으나 구약의 예언자자적 시간으로는 지금이라는 시간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럴 듯 하기는 하지만 연대기적인 실존철학적인 범주가 구약에 투사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말한 대로 구약에는 다른 시간과는 구별되는 개념은 없다. 그래서 연대기적인 시간이 단순하게 연대기나 예언서에 들어가 있다. 예들 들면 율법선포, 출애굽을 이야기할 때 각 시대가 거명된 것은 아주 중요하게 여겨진다. 신11:18이 그것을 보여준다. "나의 말을 너희 영혼에 새기고 자녀에게 가르치라". 즉 자녀 시대의 연대기적 시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은 족보자 연대기에 많은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비록 하나의 단위로 취급 되지만, 아모스 2 :10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불러내었고 광야에서 40년을 인도하였다' 는 표현에서 과거의 하나님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모스 시대의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의 아모스 구절에서 출애굽을 아모스 시대 사람과 묶어 두는데 이것이 시간의 축약은 아니다.

 

구약에는 역사적인 시간의 개념이 발달되어 있다. 예언자들도 이런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고 있고 과거의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반복되기를 기대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일들을 기대한다. 사 43:18-19에 '예전 일을 생각지 말라. 보라 내가 새것을 창조하고 그것이 싹트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구약에서 시간에 대한 개념을 이해할 때 추상적, 희랍적 사고가 필요하다. 물론 시간의 사건을 강조할 때 연대기적 거리는 중요하지 않게 보일 때도 있다. 예언자들은 유명한 문체를 사용하는데 예언자적 완료를 사용했는데 일이 일어날 것을 믿어서 완료형을 사용했다. 그렇다고 예언자들이 연대기적 시간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예언이 이루어질 것을 사 7:16에 말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구약에서도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 계시와 시간의 관계 >

먼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보면 언제나 계시하실 시점을 택하시고 특별한 구원행동을 주신다. 자연의 세력과 밀착해서 구원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 듯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는 출애굽사건에 그 시작을 가지고 있다. 새 계시는 미리 약속을 하시고 그것이 성취되면 다시 새 약속을 주시며 구속사는 시작과 그것이 이루어지는 목표지점이 있다, 그러므로 구원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유스러운 시간의 선택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지 법칙성의 것이나 진화적인 것이 아니다.

 

역사속에서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건들은 개별의 의미와 함께 연결적인 의미가 있어서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나아간다.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사로 파악하는 것은 구약의 시간 개념을 이해하는데 영향을 주고 있다. 구약의 한편에서 보면 사랑의 구속사는 '카이로스'의 면에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현재를 강조하는 것이며 순종의 결단을 요구한다. 시 96:7에 '너희가 오늘 청종하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가 아니라 시간의 경과가 나타나면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시간의 경과를 이해하는 것은 구약의 시간 이해의 면인데 고대 중동의 시간 이해와 비교해볼 가치가 있다.

 


1. 애굽사람의 시간개념 

시간의 계속 상태를 믿었다. 애굽사람들은 끝없는 시간의 반복이며 어떤 목표나 종말이 없이 각 시대가 계속 새롭게 반복된다고 믿음.

 

2. 바빌론 

애굽과 비슷하였다. 그들은 시간이란 항구적인 리듬을 가지고 자연이 순환하듯이 순환한다고 보았다. 순환적인 시간 이해는 아마도 각 시대에 반복되는 사건들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세계사적 시각은 형성하지 못했다.

 

거듭 말하지만 직선적 시간은 구약에 나타나지만 어디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예로 전도서에는 역사적인 사건은 감추어져 있고 창조주의 전지전능성이 강조되어 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의식이 약화되었고 자연의 시간의 개념이 부각되어있다. 전도서1:4에 '한시대가 가고 한시대가 오는데 땅은 영원히 머물러 었다' . 또 1:5에 '태양은 어쩌구 저쩌구' 라고 하고 또 전도서 1:9에 '해 아 래에는 새것이 없다'고 한다.

 

전도서를 기록한 저자는 아마도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내용을 이해 못한 듯 싶다. 이사야 49 :1에 '보라 내가 새것을 창조....' 라고 했다. 구약의 다른 부분에 보면 성경의 역사적인 문맥에 순환적인 시간개념이 들어가 변형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의문을 가진 사람에게는 사11:6-8 낙원이 돌아오고 동물의 세계가 평화를 되찾은 그림이 그 예이다. 반복적인 시간이 지나간 후 나타나는 낙원은 고대중동에서의 보편적인 시대이론인데 변형된 것이 있는데, 마지막 도래한 평화가 다시 새로운 것의 시작이 아니라 하나님을 지향하는 마지막 국면이다 라고 하여 일반적인 순환논리를 깨고 있다. 지금까지 시간과 계시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 하나님과 영원 >

구약은 시간에 대해서 추상적이지 않으며 하나님과 시간과의 관계에서의 교리적인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구약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시간 속에서 전능하신 주님으로, 시간을 초월하시는 주님으로 보이신다. 모든 것 위에 계시고 시간을 창조한 한 분이신 하나님에서 출발할 때 시간과 관련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다스리신다는 것은 그가 시간을 창조했고 실존적인 형태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창1장의 창조 역사 기록에 분명히 나온다. 시간은 비로소 시작을 가지게 된다. 시간은 자체로 신성한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하나님 편에서 매우 긍정적인 것이며 시간은 결코 범죄타락으로 세계에 들어오게 된 악한 것이 아닌 선한 것이다. 그래서 시간성이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나누어지지만 왜 시간성이 있느냐는 것은 피조물을 창조주와 구분하기 위해서이고 창조자는 시간에 얽매이는 자가 아니다. 시90:4에 '천년이 하나님에게는 하루와 같다'고 한다. 전도서에 '시간을 주시고 뺏어가기도 한다'고 한다. '모든 피조된 세계가 마지막이 있듯이 시간도 마지막이 있다'고 사 16:9에서 말하고 있다. '태양은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고 ...그러나 주님이 너의 영원한 빛이 되실 것이다'. 라고 하고 있다. 사66:23에는 마지막 종말의 시간이 어찌 되는지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상상하기는 힘들다.

 

우리는 모두 피조물이며 시간성에 얽매여 살고 있으며 시간이 하나님 편에서 어찌 이해되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인용한 구절들이 여러구절에 산재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시간에 대한 생각은 신학적으로 발전된 것이 아니고 제2 이사야가 처음으로 시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에 대해 잘 말했다. 창21:33에 초기에 하나님의 이름인 엘 올람(영원한 하나님)이 브엘세바에 나타난다. 이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오기 전에 사용하던 이름이다. 이 이름은 아마도 팔레스틴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브엘세바에서 경배된 엘 신이 야훼와 동일시 된다고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이름이 페니키아 비문 ,우가릿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렇게 우가릿 등에 나타나는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영원성은 결코 변할 수 없는 힘, 활동성을 강조하면서 태양이 영원성의 상징이라고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보듯이 '엘 올람'은 가나안의 자연종교에서 나온 이름이고 제 2 이사야가 말하는 영원한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것이다. '엘 올람'은 피조물과 연관되어 생각했지, 별개로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제 2 이사야에 영원의 개념이 니오는데 계시신앙과 창조 신화에서 나온 것이며 그렇게 자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제2 이사야가 사 44:6에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특성이 나타난다.

 

여기서 영원한 하나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주석을 잘 해보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겁을 내고 용기를 잃고 바빌론으로 잡혀갔던 이들에게 해방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메시지는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주게 되었다. '그는 결코 피곤하거나 지치지 않는다'고 하신다. 제 2 이사야에서 야훼께서 땅의 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며 바벨론도 지배하시지 않겠느냐 그리고 아무 희망없는 바벨론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는 논리이다. 그래서 그들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과 영원하신 하나님은 같은 뜻이다. 그래서 희랍적 영원하신 하나님과는 그 뜻이 비교될 수 없다. 자기 백성과의 언약을 덧 없는 피조세계 이지만 영원한 선물로서 주시는 것이다. 영원의 개념은 점점 하나님의 성격과 동의어가 되었고, 하나님의 활동과 동일시 되었다.

 


< 인간과 시간 >

우리가 말했듯이 시간성이라는 것은 피조세계의 실존의 양식이다. 욥1:21에 '주님이 주셨으니 주님이 취하신다. 그의 이름이 찬양 받으실 것이다' 라고 한다. 그 외에도 시 90편의 인간과 시간에 대해서 말한다. 2-3 : 산들이 생기기 전부터 주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다. 인간으로 흙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너희 인간들아 돌아가라 하셨다. 인간은 그러므로 '불멸의 존재가 아니며 피조물'이라고 창6:3에 말하고 있다. 인간은 그의 생명을 창조주로부터 받았고 다시 반환해야 한다. 오래 살다가 수명이 다해서 죽게 되면 좋지만 누구나 주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 생명을 드린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구약은 말하지 않고 있다. 영원한 인간의 삶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성경에 왕들에 대해서 '다윗왕이여 만세수를 누리소서' 라는 것은 고대 동양의 궁중에서 사용하던 문체양식의 과장된 표현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피조물로서의 인간, 타락한 인간이지만 이 인간의 창조된 시간성안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뚫고 들어왔다. 그것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시간에 들어왔다. 하나님의 은혜를 주면서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계시를 시간속에 나타내시므로 피조물의 시간성을 매우 진지하게 고려하고 계신다. 구약에 있어서 시간이나 역사는 매우 본질적인 것의 하나이며 의미아 크다. 시간과 계시의 역사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만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의 의미가 있을 수 있고 그 수수께끼 같은 가면을 벗을수 있다.

 

시간이 인간에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주신 구원을 우리가 붙들도록 하는것이다. 다음과 같은 강조된 것을 보면서 시편 9장이 '이스라엘아 조용히 귀를 기울여라 오늘 너는 주님의 백성이되었다. 너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규례를 따라서 행하라' 고 한다. 여기에 시간이 강조되었다. 시간은 인간이 결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계시를 자기의 소유물로 만들 수 없다.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하는 부르심에 대해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인간은 하나님의 자의적인 행동이나, 변덕스런 하나님께 맡겨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역사 속에서 계속되었다는 것은 그의 성실과 구원 의지를 분명히 알게 해주고 인간에게 마지막이 온다는 것과 구원이 성취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제나 출애굽 사건을 자기들의 시대로 현재화했던 것과, 예언자들이 이미 에언이 일어났다고 성취된 것으로 표현한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이 언제나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무시간적이나 신비주의적인 것이 아니고 신적인 것에 대항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시간에서의 구원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의 구원은 시간을 넘어서는 것이고 더 이상은 아니라는 제한을 넘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의 경지로 가는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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