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직의 세속화

 

            글 / 이정석 교수(풀러신학교 조직신학)

 

한국교회의 급성장과 부실한 교육제도는 자연히 자질이 부족한 목사와 장로의 양산을 결과하였다. 흔히 목사의 저질화를 많이 비판하지만, 장로의 저질화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과거에 장로는 고매한 신앙인격을 소유하여 교회와 사회의 존경을 받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런 장로들이 소수로 전락하였다. 급성장으로 인해 갑자기 많은 장로들이 필요하였고, 따라서 선출절차나 교육절차가 형식화되고 자질에 대한 기준도 격하되었다. 이것이 불가피한 현실이기는 하였으나, 그 결과 한국교회는 심각한 혼란과 갈등에 직면하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목사와 장로의 갈등으로 침체 혹은 감소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의 책임은 양자에게 공히 있지만, 목사의 협력자로 부름받은 장로가 목사의 견제자 혹은 대립자가 되면서, 교회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른 것이며, 이런 지도자들의 갈등상황에서 교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교인들은 무고한 피해자가 된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런 것도 아니며, 모든 장로가 그런 것도 아니지만, 이것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된 데에는 성경적 원리보다 세속적 원리가 장로의 선택과정과 자기 이해에 미친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한국교회는 이를 심각하게 반성하고 성경적 원리로 돌아가야 교회라는 수레의 두 바퀴인 목사와 장로가 나란히 한 마음이 되어 성령의 이끄심이 원활하고 힘차게 효력을 발생하게 될 것이다.

 

영수제도의 기원

 

선교사들이 초기 선교과정에서 교회사에 나타나지 않는 영수라는 제도를 수용하였다. 영수는 지교회의 대표격이었으며 사실상 장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가, 영수들이 ‘안수받지 않은 장로’로서 장로들과 갈등을 빚게 되면서 이 제도가 폐지되고 영수들이 대부분 장로가 되었다. 그러나, 영수라는 호칭은 교단에 따라 20세기 후반까지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그보다 더 심각한 영향은 영수제도가 한국 장로이해의 근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영수(領袖)란 ‘우두머리’라는 뜻으로서 다분히 세속적인 사고를 함축하고 있는 용어이다. 물론 모든 영수가 이러한 자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한말의 유교적 사회상황에서 이러한 직명의 채택이 자타에게 미친 무의식적 혹은 의식적 영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조 말의 한국상황은 기존의 사회제도가 여러모로 붕괴되고 새로운 사회계층이 발생하였으나, 사고방식은 여전히 유교적이며 계급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들어와 전국적인 조직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는데, 영수가 지역교회를 대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영수들이 장로가 되면서 자연히 영수의 개념은 장로에게 전이되어 새로운 종교계급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성경은 장로에게 존경을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며 결코 계급적 혹은 신분적 고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유교적 사고방식과 사회구조는 장로를 계급화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상당수의 장로들 자신도 그러한 사회적 구조에 적응하여 고자세를 취하는 병폐를 초래하였다.

 

유교의 신분주의

 

기독교는 인간을 사회적 신분에 따라 차별하는 것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인의 평등을 가르치지만, 유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인생관에 따라 정치적 입신양명을 추구한다. 그 결과, 한국인에게는 신분이 중요하며 직함이 그 사람을 규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인생을 한마디로 정리하는 묘비에도 직함을 쓴다. 심지어 벼슬을 못한 사람은 늙어도 계속 과거를 치르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학생’이라고 쓴다. 그리고 종들은 묘비도 없다. 요즘 장관을 며칠하고 물러나는 사람들이 많지만, 한번 장관은 영원한 장관이며, 비록 아무 일도 못했고 불명예 퇴진을 했다 할지라도 그는 죽을 때까지 장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대대로 그 집안의 명예가 된다. 그리고 그의 묘비에는 장관이라는 직함이 기록된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한국인들은 이러한 전통적 사고방식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 단적인 예가 호칭에서 나타난다. 한번 장로가 되면 이름과 ‘장로’라는 직함은 불가분리의 관계가 되며, 심지어 시무를 중지한다든지 교회 밖에서도 장로가 호칭이 된다. 직분이 영원한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장로를 ‘항존직(恒存職)’으로 보는 장로교 전통과 결합될 때, 이러한 신분화가 정당시된다. 따라서, 장로교회의 모체가 된 개혁교회가 인격과 직분을 구별하여, 직분자의 존경과 인정이 그의 인격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역 때문이라고 보는 교회정치적 원리나 거기에 근거하여 직분자의 임기제를 시행하는데 거부감을 가진다. ‘감독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는 감독중심적 교회관이나 장로중심적 교회관은 차별 없이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를 교회로 보는 사도신경의 성도중심적 교회관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행 15장 23절이 보여주는 대로, 목사나 장로도 모두 한 형제일 뿐이다. 그러나, 상하구별과 신분주의가 깊이 뿌리 박힌 한국사회에서 장로직이 겸손히 수용되기란 쉽지 않다.

 

개혁교회를 비롯한 서구교회의 경우, 유교전통에 영향 받은 한국교회의 장로 호칭은 이해될 수 없는 관습이 아닐 수 없다. 미국교회에서 장로를 부를 때는 성이 스미스일 경우 ‘스미쓰씨(Mr. Smith)’라고 부르지 ‘스미스장로님(Elder Smith)'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는 하나의 교인이며, 그의 현재 직분이 장로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임기가 끝나서 평교인으로 돌아가면 그대로 ’스미스씨‘라고 부르기 때문에, 피차에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경우 장로라고 부르지 않고 서구와 같이 ’씨‘라고 부르게 되면 이는 큰 모욕이며 분노를 유발시키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장로와 자기를 이미 일체화시켜 버렸기 때문에, 즉 장로가 그의 영원한 신분이라는 의식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다른 직분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에 유례가 없는 직분 과잉현상을 산출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교회에는 교회가 커도 장로 몇 명, 집사 몇 명이 있을 뿐이지만, 한국교회는 전교인의 과반수에게 직분을 남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직분과 신분을 혼동하는 상황에서, 장로야말로 평신도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신분으로 생각하여 장로가 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고, 한번 장로가 되면 영원히 그 신분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러한 유교적 신분주의 사고는 자연히 섬기려는 겸손한 자세보다는 지배하고 주장하려는 자만한 태도를 가지도록 만든다.

 

교회의 민주화

 

한국사회가 왕정에서 일제시대를 거쳐 민주사회로 전환하면서, 교회에도 민주정신이 도입되었다. 사실 교회는 국가가 민주정치를 시행하기 이전부터 건전한 성경적 모범을 보여 왔으나,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 이후 교회에도 도전적이고 비판적인 부정적 형태의 민주정신이 교회로 유입되어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는 주로 장로를 중심으로 독재적인 목사에 대한 저항운동 혹은 심지어 축출운동으로 전개되면서, 목사와 장로의 협력관계를 파괴하는 주된 원인이 되어 왔다.

 

과연 기독교와 민주주의는 정치사상적으로 동일한가? 그리고, 교회정치는 민주주의를 모방해야 되는가? 비록 성경적 교회관에 민주적 요소가 있으며 민주주의의 태동과정에서 만인평등을 가르치는 성경적 영향이 지대하지만, 교회의 정치원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민주주의(democracy)와 다르다. 첫째로, 민주주의는 국민이 원하는 대로 나아가지만, 교회 정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이 원하면 정권뿐 아니라 헌법까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지만, 교회에서는 교인이 모두 원한다고 해서 성경을 고치거나 교회의 주인을 바꿀 수 없다. 현대교회의 세속화는 교인들의 마음대로 교회를 운영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함으로서 발생한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성경을 해석하는데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성경의 가르침 대부분은 평이하고 명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나 장로들이 원하는 대로 교회의 방향을 바꾸어나가면 더 이상 거룩한 교회라기 보다 인간들의 집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둘째로, 민주정치에서는 공직자가 국민의 결정권에 의해 선출되지만, 교회의 직분자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소명된다. 비록 교회도 외형적으로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투표는 형식일 뿐이고 하나님의 소명이 결정적이다. 따라서, 교회의 직분자는 선거운동도 하지 않으며, 선출되었다고 해서 교인들에게 사례를 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의 부르심을 따를 뿐이다. 비록 장로교회는 대의정치(代議政治)를 주장하지만, 민주주의의 투표 만능주의는 성경적이 아니며, 과연 교회의 모든 직분자를 투표로 선출하는 것이 성경적인가도 재고되어야 한다. 성경은 맛디아의 선택에서만 제비를 시행하였다고 명시할 뿐, 장로나 감독이나 집사의 선택이 투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며, 그 후계자는 지명되었다.

 

바울이 디모데를 후계자로 지명하였으며, 디모데에게도 그 후임자의 지명을 지시하였다. 비록 혹자는 행 14장 23절의 ‘케이로토네오’를 투표의 근거로 제시하지만, 그 성경적 용례는 ‘지명한다’, '임명한다‘ 혹은 ‘안수한다’는 뜻이다. [BAGD 881, on the other hand, the presbyters in Lycaonia and Pisidia were not chosen by the congregation"; TDNT IX: 437, "The reference is not to election by congregation. The presbyters are nominated by Paul and Barnabas and then with prayer and fasting they are instituted into their office."] 딛 1장 5절의 ‘카씨스테미’는 더욱 그러하다. 물론 현대에 지명권이 부여될 경우 악용될 소지가 있지만, 투표도 결과는 비슷하다. 많은 부정한 선출이 투표를 통해 이루어진다.

 

민주주의의 선거가 가지는 문제는 자기가 집단의 대표라는 우월감과 지배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로도 예외가 아니다. 과연 장로가 교인의 ‘대표(代表)’인가? 한국교회의 경우, 대표적인 네 교단의 헌법에서 장로교 합동측과 성결교는 장로를 ‘교인의 대표자’라는 언급하고 있는 반면, 장로교 통합측과 감리교는 대표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적으로 생각하면 장로가 교인 30명당 한사람씩 선출되었으므로 30명의 대표라고 볼 수 있으나, 교회에서는 전체적인 장로의 수를 제한하려는 목적일 뿐 대표가 아니라 일꾼을 선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출구역이나 대표하는 교인들을 분리하여 규정하지 않는다. 구약에서도 백부장이나 천부장 같은 대표들과 장로들은 구별되었다.

 

실은 만인평등사상에 근거한 민주주의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우월의식을 가지고 군림하려는 것 자체가 비민주적이며 봉건적인 사고로서, 올바른 민주정신을 가진 피선자는 당연히 섬기는 종의 모습을 가져야 하지만,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민주주의적 사고는 흔히 장로에게 권력의식을 가지게 함으로서 겸손한 성경적 사고에서 이탈하게 만든다.

 

더욱이, 삼권분립적 사고에서 장로가 자신을 국회의원과 같이 생각하는 경우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된다. 국회가 국민의 대표로서 대통령과 행정부를 견제하듯이 장로가 목사를 견제해야 된다는 사고는 교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교회의 혼란과 분쟁을 야기한다. 물론, 목사가 무리하게 독주하는 경우 장로들이 말려야 하지만, 한국의 국회의원들 같이 대통령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로 나뉘어 무조건 한편은 지지하고 한편은 반대하는 형국이 된다면, 더 이상 장로의 직분을 올바로 감당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상당수의 교회들이 그와 같은 상황에 있다.

 

셋째로, 민주주의에서는 주인이 국민이라는 주권재민사상에 근거하지만, 교회에서는 교인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주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의 명령에 따라 일하는 행동기관이다. 오늘날 세속화된 장로들은 자신들이 교회의 주인이며 목사는 일시적 피고용자라고 생각하며 ‘주인의식’을 강조한다. 섬기는 ‘종의식’을 가져야 할 장로들이 ‘주인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면, 과연 그 교회가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주인의식은 교회를 인간들의 집단으로 전락시키고 집단적 이기주의를 조장하며 지체의식을 상실하고 개교회주의에 빠지도록 만든다.

 

자본주의의 영향

 

현대 한국사회는 모든 면에서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성경이 장로의 자격을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딤전 3장 1-7절에 기록된 감독의 자격을 차용하여 사용하는데, 거기에는 경제적 능력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경제적 능력이 그 사람의 능력 지표로 인정되는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장로에게 경제적 능력이 요구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부자라고 해서 무조건 장로가 되는 것이 아니며 다른 요건들도 고려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교회가 지나치리 만큼 거대한 예산을 집행하며 모두 교인의 헌금에 의존해야 되는 상황에서 경제적 능력은 불가피한 조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대개 경제력을 갖춘 사람이 장로로 선출되며, 경제적인 능력이 부족한 장로는 특히 예산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소외 당하거나 스스로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향은 자연히 교회를 회사와 같이 생각하고 장로는 대주주와 같은 책임과 권리를 행사하게 되며, 무의식적으로 교회에 대한 ‘소유의식’을 가지게 만든다. 따라서, 교회 재정을 사용하는데 간섭하고 조종하게 된다. 이와 같이 과민한 재정 참여는 역시 무리하게 재정을 주관하려는 목사와 충돌하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성경적으로, 헌금은 본래 집사가 관장하도록 되어 있다. 초대교회의 헌금은 사랑을 실천하는 구제헌금이었으며, 그 분배를 위해 집사제도가 출범하였다. 그리고, 이런 집사의 재정관리와 분배는 교회사적으로 주된 전통이 되어 왔으며, 지금도 많은 서구교회들이 재정관리를 철저히 집사들에게 맡기고 목사나 장로는 이에 개입하지 않는다. 헌법에서 규정한 장로의 직무 어디에도 재정관리가 들어있지 않다. 단지 감리교 헌법에서 ‘장로는 교회의 재정 유지에 힘쓴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도 재정관리나 집행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물론 현대와 같이 교회의 재정이 복잡하고 비대해진 상황에서 장로가 재정에 무관심해서는 안되지만, 장로가 지나치게 교회재정에 민감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나 교회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자본주의적 영향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젊은 장로의 출현

 

현대사회가 경제 중심적 사회로 전환되면서 어른을 존경하던 과거의 전통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으며, 교회의 지도력도 노년층에서 장년층 혹은 중년층으로 낮아졌다. 이런 경제중심적 사고가 젊은 장로들의 출현을 부추긴 것이다. 20세기 후반 한국이 산업화되고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장로의 년령이 낮아지기 시작하였다. 과거에 장로들은 연세가 많은 분들이었으나, 오늘날은 년령기준이 30세까지 낮아지게 되었다. 물론 30대나 40대의 장로들이 활력적이고 적극적인 면을 가지고 있으나, 젊은 장로들의 출현은 성경적 원리보다 세속정신의 유입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되며, 따라서 많은 문제들이 교회 안에 발생하게 되었다.

 

본래 장로란 구약의 ‘자켄’이든 신약의 ‘프레스뷔테로스’이든 모두 백발의 ‘노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젊은 장로’란 말 자체가 자체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말로 성립될 수 없다. 심지어 현대의 사회적 변화를 고려한다 할지라도 30대의 장로란 성경적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젊은 장로의 출현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발생시켰다. 첫째, 사회가 경제적 생활력을 중심으로 노인을 무시하고 부담스러워하는 세속적 풍조를 교회 안으로 끌어드리고 정당화하는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교회에서 노년층은 소외 당하고 정상적으로 장로직을 감당할 수 있는 노년에 도달한 장로는 은연중 퇴출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둘째, 젊은 장로의 출현은 동년배 혹은 년상의 집사들을 실망시켜 교회봉사를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특히, 우리와 같이 계급적 신분주의가 강한 사회에서 50대 집사에게 30대 장로는 부담스럽고 자존심 상하는 존재일 수 있다.

 

더욱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젊은 장로들의 미숙성이다. 성경에서 노인을 장로로 임명한 것은 백발의 노인이 가지는 오랜 경륜에서 오는 심오한 지혜와 온유한 덕성과 원숙한 신앙 때문일 것이다. 젊은 장로에게는 그런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활력과 열심은 있으나, 일반적으로 지혜가 부족하고 혈기가 많으며 신앙이 미숙하다. 따라서, 교인들을 덕스럽게 지도하고 돌볼 능력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장로의 주요한 직무는 교인들을 돌보고 섬기는 것이다. ‘치리한다’든가 ‘감독한다’든가, 또는 ‘다스린다’는 표현이 세속적 사고에서는 ‘지배한다(rule)' 혹은 심지어 ’군림한다(dominate)'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지만, 그 성경적 의미는 오히려 ’형편을 살핀다‘, ’관심을 가진다‘, ’돌보아 준다‘, 또는 ’사랑으로 이끌어준다‘는 뜻이다. 장로는 목사가 교인들을 다 돌볼 수 없기 때문에 목사를 도와 교인들을 심방하고 관심을 베풀며 대화하고 도와주는 봉사자들인 것이다. 그런 일을 하려면 교인들보다 덕성이나 신앙에서 원숙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젊은 장로의 관심은 년령의 성격상 교인들을 돌보는 자상한 일보다 사업과 조직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며, 따라서 장로 본연의 직무보다 교회 업무와 회의에 치중하게 된다. 더욱이, 젊은 장로는 아직 혈기가 강하고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단순한 열심으로 목사나 다른 장로와 충돌하거나 과격하게 행동할 위험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영광스러운 장로

 

그리스도의 구속이 완전히 실현되기 위하여 그의 몸된 교회는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힘차게 발전해야 하는데, 장로는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중심적인 직분이다. 따라서, 요한이 환상 중에 하늘에 갔을 때 하나님 보좌 주위에 24장로의 보좌가 있음을 보았다: "또 보좌에 둘러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계 4:4). 올바른 장로는 성도의 이상이며 교회의 기둥으로서, 영광이 약속되어 있다. 장로는 세속적인 지배자나 권력자와 달리 목사를 도와 덕과 사랑으로 교인들을 감화시키고 교회의 화평을 도모하며 형제들을 돌보고 세워나가는 교회의 겸손하고 온유한 봉사자들로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고난과 수고를 자취하는 충성스럽고 헌신된 어른들이다. 따라서, 성경과 교회사가 증거하는 대로, 올바른 장로의 몰락은 교회의 몰락을 결과하며, 교인들에게 존경받는 덕스러운 장로의 존재는 교회의 평화와 성장을 가져온다.

 

실로, 장로가 그토록 교회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장로의 순종 여부에 따라 교회의 발전이 좌우된다. 예수님 당시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될 장로들이 소위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 중시하여 그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는데 앞장섰다. 장로들은 세속적 직업과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속적 상식과 인간적 전통을 더 중시하기 쉽다. 이를 극복하고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늘의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장로의 길이다.

 

장로의 세속화는 교회의 세속화를 반영한다. 따라서, 여기 지적된 장로의 문제는 대부분 목사나 다른 직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어느 시대나 어는 상황에서나 교회는 세속화의 위험에 직면해 있으며, 세속적 영향을 막아내지 못하면 교회가 부패하고 퇴보하게 된다. 물론, 교회는 새로운 시대에 창조적으로 적응하며 발전해야 되지만, 세속정신에 복속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항상 성경적 원리로 돌아가 자신을 세속적 영향에서 돌이키고 개혁해 나가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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