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구원  

 

다음의 글은 도서출판 "두루마리"에서 펴낸 「다시 보는 성경」에 있는 글입니다.

무단으로 복제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고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려 할 때 악도 함께 거한다는 사실은 성경이나 그 밖의 도덕기준을 찾아보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양심과 행동 사이에 그리고 좀더 나은 판단과 자연적인 기질 사이에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도덕적 부조화"라고 부르지만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부릅니다. 사려 깊고 조심스러운 관찰자라면 누구나 동물과 사람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동물들은 악을 행하려는,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성향에 대항하여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연적으로 자기들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목표들을 달성하려는 본능에 의해 지배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하고 죄를 지으며 모든 종류의 잘못을 즐기려는 뿌리깊은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려는 것 자체가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입니다. 왜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동물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던 무엇인가가 인간에게 일어났습니다. 무엇인가 인간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만일 성경이 에덴에서의 "인간의 타락"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그 차이를 일으켰는지 압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I. 죄

죄는 이 세상이 안고 있는 "피속의 독"입니다. 나쁜 피는 인간의 몸 안에서 두 가지 모습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내부적으로는 당뇨병으로, 외부적으로는 염증, 종기, 등창 그리고 궤양 등으로 나타납니다. 전자는 눈에 보이지 않고 한동안 감추어져 있지만, 후자는 눈에 훤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죄"와 "죄들"의 차이점을 구별해야 합니다. "죄"는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것으로 죄를 지으려는 성향 내지는 본성입니다. 그리고 "죄들"은 죄를 지으려고 하는 우리 성향 때문에 범하게 되는 죄의 특별한 행위들을 말합니다. 당뇨병처럼 전자(죄)는 내부적으로 감추어져 있으나 후자(죄들)는 종기와 등창처럼 외부로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죄들"을 대속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본질적인 타락", 또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죄를 지으려는 본성을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방법은 인간의 마음에 죄를 지으려는 성향이 전혀 없도록 "새 성품"을 심어놓는 것이었는데, 이 "새 성품"은 죄를 지으려 하거나 특별한 행위들을 범하려는 어떠한 욕망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본질적인 타락이란 사람의 본성에 선한 것이 전혀 없어서 결코 친절하지도 않고 애정을 느끼지도 않으며 너그럽고 사랑할 만 하지도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인간 마음의 본성이 자연적으로 악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당신은 죄인이라고 말할 때, 그들이 화를 내는 것은 죄의 본질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인이라면 살인이나 도둑질 또는 간음하는 사람들처럼 어떤 특별한 죄들을 범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인은 죄를 지으려는 본성을 가진 사람 모두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죄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내리고 있습니다.

첫째, 불법이 죄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범하면 율법도 범하는 것이니,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요일3:4). 하나님의 법이나 또는 인간의 어떠한 법을 깨뜨리는 것도 죄입니다.

둘째, 태만함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죄가 되느니라"(약4:17).

셋째, 의심이 죄입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를 받나니, 이는 그가 믿음으로 먹지 아니함이라. 무엇이든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한 것은 죄니라"(롬14:23). 어떤 올바른 것을 행하면서 의심하는 것은 바로 죄인 것입니다.

넷째, 불신이 죄입니다.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8-9). 모든 죄 중 가장 큰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잃어버린 바 된 것은 그들이 죄인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려 하기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섯째, 모든 불의가 죄입니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요일5:17). 이것은 모든 종류의 죄를 포함하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잠시동안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의 "탐조등"을 비추어 보도록 합시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라고 말했습니다(시90:8). 여기서 시편기자는 "공개적인 것"과 "은밀한 것", 이 두 가지 계열의 죄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공개적인 죄들"은 신성모독, 무절제, 거짓말하는 것과 도둑질과 같이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 위에 모든 것을 보시는 "눈"의 "엑스레이"로 비추시며 모든 "생각의 방"을 조명하사, 불순하고 살인적인 생각, 시기, 자랑, 질투, 미움, 그리고 분노의 감정에 빛을 가져다주시기를 원하십니까?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요일3:15). 당신이 알고 있는 누군가가 죽어서, 당신이 그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살인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여자에게 음욕을 품으며 그녀를 바라만 보아도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27-28).

사람의 마음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들어보십시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17:9).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람의 마음을 해부해 놓으셨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보십시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간음, 행음, 살인, 도둑질, 탐욕, 사악함, 속임, 색욕, 악한 눈, 신성모독, 교만, 어리석음 등이니"(막7:21-22). 여기에 사람의 마음 상태를 요약하는 13가지 특성들이 있습니다. 어느 누가 그것들을 읽고서 "그것은 나의 마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열매는 썩고 부패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잘 보존하지 않는다면 곧 썩어 없어집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뿌리의 원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볼 때에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차이점도 없습니다. 정직하고 고상하며, 진실하고 예의 바르며, 자비로운 한 남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순수하고 순결하며, 사랑스럽고 온화하며, 온순하고 모든 사랑스러움의 구현인 한 여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백합처럼 순수하고 가정의 빛이며, 살아있는 기쁨인 어떤 귀여운 소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이 가정에 보내주신 천진난만한 아이, 방금 떨어진 눈처럼 깨끗한 한 어린아이를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사람들과, 죄로 물들어 있으며 미워하고 미움받는 사람들, 저주하고 저주받으며 신성모독적이며 지옥에서 몸부림치는 버려진 영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 차이란 단순히 누룩이 들어가 있는 빵과 그 누룩이 그 영향력을 발휘한 빵 사이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시기와 발달의 차이입니다. 누룩이 들어가 있는 빵은 스스로 그 누룩을 제거할 수 없으며, 그 누룩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의 궁극적인 상태는 단지 시간 문제인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의 누룩을 제거하지 않은 채 다른 세계에 간다면 죄의 누룩이 영원한 시대들 속에서 계속 작용할 것이며 점점 더 상태가 악화되어 마침내 그들은 지옥의 마귀들처럼 악화될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나병의 최초의 흔적이 그 사람의 몸에 들어올 때부터, 그가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도시밖에 앉아서 "불결하다, 불결하다"고 외칠 때와 마찬가지로 나병환자인 것입니다.

죄는 어떤 작용을 일으킵니까? 그것은 수치를 일으키고 분리로 인도합니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를 동산 밖으로 이끌어 내었습니다. 사악한 자들에 대해서는 성경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는 광명 중에서 흑암으로 몰려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며"(욥18:18).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주님, 제게서 떠나소서. 저는 죄많은 사람입니다"(눅5:8).

죄의 삯은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입니다. 죄는 우리에게 거저 죄를 지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값을 지불하게 하는데, 어떤 때는 분할지불 방식으로 또 어떤 때는 한번에 몽땅 지불하게 합니다. 우리는 그 값을 치르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값은 죽음인 것입니다. 이는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동물들도 의인도 모두 죽기 때문입니다. 만일 죄의 값이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이라면 저주라기보다는 축복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죄인들이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이 그가 받아야 할 형벌의 전부라면 말입니다. 그것은 또한 영적인 죽음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이미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엡2:1-3). 그 죽음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20:11-15에서는 사악한 자들이 심판을 받고 죄가 있다고 밝혀진 이후에 "둘째 사망"에 처해질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사망"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사망"은 무엇입니까? "첫째 사망"은 몸으로부터의 혼의 분리(육체적 죽음)를 말합니다. 사악한 자들은 첫째 사망 이후에 있을 부활의 시기에 몸과 영혼이 다시 합해지지만, 곧바로 다시 죽음에 처해져서 불로도 없어지지 않을 혼과 영의 상태로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어 불 호수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이를 일컬어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죄는 불행이 아니라 사악함입니다. 죄로 더럽혀진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에 대해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변명의 구실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받아들임으로써 죄의 본성을 제거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함으로써 여러분은 죄의 형벌을 받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죄는 우주에서 가장 비싼 값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사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가장 높았던 그의 위치를 상실하게 만들었고 결국은 하늘에서의 반란으로 그를 이끌었습니다. 죄는 인류로 하여금 낙원을 상실케하는 값을 치르게 했습니다. 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독생자이시며 사랑하는 아들의 생명의 피의 값을 치르게 했습니다. 죄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겟세마네의 고뇌와 피땀의 값을 치르게 했으며, 십자가의 엄청난 고통을 겪게 했고, 그분께서 죄인의 자리를 취하사 하나님께 버린바 되었을 때 영원한 죽음의 맛을 보게 했습니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사람이 세 가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제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제는 바로 죄의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세월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지나간 날들을 반복하여 다시 살 수 없으며, 또한 그 날들은 2-3배의 "선행"을 쌓는다 하더라도 보충하거나 메울 수 없습니다. 둘째는 오늘에 관한 것입니다. 만일 내가 어제의 죄에 잘 대비했다고 한다면, 오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일 오늘 나의 본성에 변화가 없다면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죄를 지을 것입니다. 셋째는 내일에 관한 것입니다. 내가 과거와 현재, 어제와 오늘을 위하여 대비할 수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내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내일에도 이전의 동일한 유혹들, 곧 악을 행하자는 동일한 제안들을 만날 것이며, 과거와 마찬가지로 죄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여전히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과거에 대해서는 용서를, 현재에 대해서는 정결함을,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는 권능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것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만일 죄가 세상이 안고 있는 피 속의 독이라면,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그 병을 유전으로 물려받았다면, 모든 질병을 위한 치료 약이 어딘가에 있듯이, "죄의 병"을 위한 치료 약이 있어야 합니다. 이 치료 약은 바로 복음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이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 됨이라"(롬1:16). 복음의 권능은 예수님의 피에 있습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7). 이것은 "속죄와 구속"에 대한 15장에서 잘 설명되어 있으므로 여기서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원은 세 가지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원은 "의롭게 되는 것"(칭의-Justification)으로 시작되고 "거룩하게 됨"(성화-Sanctification)을 통해 진행하며, "영화롭게 됨"(영화-Glorification)으로 끝이 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구원받고 있는 중이며,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구원의 시작: 칭의)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칭의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도다"(롬5:1). "의롭게 되는 것", 즉 "칭의"(Justification)라는 단어는 법률용어로 죄가 없다고 선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칭의는 다음의 예를 통해 잘 정의될 수 있습니다. 한 남자가 살인혐의로 재판을 받고 유죄로 판명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고 가정합시다. 사형집행 전에 한 사람이 감옥에 나타나 보안관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공식문서를 전달하였는데, 보안관은 그것을 읽고 그 사형수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발견합니다. 그 사형수는 한 번에 자유의 몸이 되고 자유인으로 그 감옥을 벗어납니다. 그렇지만 그는 의롭게 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 범죄로 인한 유죄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순히 용서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또 다른 예로, 어떤 사람이 여러 가지 상황의 증거들로 인하여 유죄임이 판결되었지만, 실제로는 무죄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사형집행 날짜가 되기 전에 실제 살인범이 보안관에게 자수하여 자신이 진짜 범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들을 제시합니다. 그러면 보안관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형수였던 사람은 이제 의롭게 된 사람의 신분으로 감옥을 걸어나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혐의를 씌운 범죄에 대하여 그가 무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칭의"의 법적인 개념이고 성경적 개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구원의 신비"가 있습니다. 아무리 무죄한 사람이라도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죄인의 위치에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유죄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한 죄인이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의롭게 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지고 있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5:24). 의롭게 된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갖게 됩니다(롬5:1).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평"과 "하나님의 화평"의 차이를 구분해야 합니다(빌4:7). 여기에 좋은 실례가 하나 있습니다. 남북전쟁이 진행될 때 링컨 대통령은 정부에 대항한 반란군 중 어떤 사람일지라도 남부로부터 올라오면서 "메이슨과 딕슨 라인"을 넘어서는 순간 용서받을 것이라는 선언을 했습니다. 남부에서 올라온 한 사람이 한밤중에 자신도 모르게 그 라인을 넘었다고 가정합시다. 그는 즉시 정부와 더불어 화평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라인을 넘은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체포와 투옥의 공포 속에 사로잡혀 있다가 새벽이 밝아왔을 때야 비로소 지난 몇 시간 동안 자신이 안전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매우 큰 기쁨과 마음의 평화가 그의 혼을 채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고 구세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그 순간 "하나님과의 화평"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며칠, 몇 주, 심지어는 몇 년이 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아는 그 순간 우리는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화평"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죄의 권능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구원의 진행: 성화).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한 아들을 가질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 죄들에서 구원할 것임이라"고 말했습니다(마1:21).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죄(sin)로부터의 구세주이실 뿐만 아니라 죄들(sins)로부터의 구세주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가 범하기 쉬운 죄들, 또는 흑인 설교자들이 말했듯이 마음을 혼란시키는 죄들로부터 구원시켜주는 구세주이십니다. 빌립보인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바울은 "이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늘 순종하였듯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오히려 지금 내가 없을 때에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힘써 이루라. 이는 너희 안에서 역사하사, 그분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을 원하게도 하고 행하게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이라."고 쓰고 있습니다(빌2:12-13). 이 구절은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은 후에 우리가 그 구원을 완성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즉, 죄의 "형벌"로부터 사함을 받은 우리는 죄의 "권능"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나약하다는 것을 인식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행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분께서는 자신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에 따라 뜻을 두고 행하게 하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화의 사역에 협력하여 그분께서 죄의 "권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필요한 것을 우리 안에서 뜻을 두고 행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죄는 점진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회심하고 난 이후 우리는 진실로 죄가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합니다. 새벽 여명에 잠을 깨면, 당신은 몇 개의 두드러지게 나타난 가구들만을 볼 수 있습니다. 점점 날이 밝아오면서 당신은 벽에 걸린 그림들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고 화장대 위의 화장품들을 알아봅니다. 하지만, 당신이 핀이나 실 조각들 그리고 먼지들을 알아보려면 해가 완전히 떠올라야만 합니다. 처음으로 그리스도께 갔을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두드러진 죄의 습관들만을 인식했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것들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 속에서 자라면서, 우리 삶 속의 다른 것들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고 그것들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해서 죄를 알게 되고 버리는 것이 진행되어 나갑니다. 우리가 5년 전에 행했던 것들을 지금은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행한 것을 지금으로부터 5년 후에는 다시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회심하고 난 후 18년이 지나서 고린도인들에게 쓰는 글에서 바울은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사도라 불리기에 합당치 못한 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15:9). 그로부터 6년이 지난 뒤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모든 성도를 중 가장 작은 자보다도 못하다"(엡3:8). 그로부터 5년 후에 그는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도대체 사도 바울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가 점점 더 악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단지 전보다 더 자신의 죄된 모습을 많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결코 성화를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완전해지지" 않았고 그것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빌3:12-14). 이로부터 우리는 성화가 점진적인 행위이며, 죄의 권능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은 우리 몸이 죽을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자신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행하시도록 내어드릴 때에 우리는 어느 정도 "죄를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3. 우리는 죄의 존재로부터 구원을 받게 됩니다(구원의 완성: 영화롭게 됨)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부터 우리의 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무덤으로부터 우리의 몸을 구속하사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또한 우리의 몸을 휴거 시에 불멸의 몸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에게는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구원이 "세 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칭의"로 시작해서 "영화"로 끝이 납니다. 칭의는 순간적인 것으로 죄의 "형벌"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이며, "성화"는 죄의 "권능"으로부터의 점진적인 구원이며, "영화"는 죄의 "존재"로부터의 최종적인 구원인 것입니다.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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