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성경 전래의 역사 

 

 

 

 

 

1) 한국 개신교선교의 개척자-존 로스선교사

 

존 로스는 1842년 7월 6일 스코트란드 북부의 닉(Nigg)이라는 지방에서 휴 로스(Hugh Ross)라는 양복업자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만 해도 그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릭어(Gaelic Language)를 사용했기 때문에 로스도 어렸을 때에는 갈릭어를 사용했고, 학교에 입학하면서 영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두 언어를 동시에 사용했던 것은 그가 만주에서 중국어와 한국어를 배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에 소속된 존 로스는 1871년 해외선교를 결심하게 되었고 교단 해외선교부는 그를 1872년 2월 27일 중국 선교사로 선택하였다. 그는 그의 고향의 채플힐(Chapelhill)교회에서 3월 20일 선교사로서 목사안수를 받고, 3월 25일에 스튜어트(M. A. Stewart)와 결혼한 후, 곧이어 4월에는 그의 선교사로서의 일생을 위해 중국을 향해 출발한다.1872년 8월 23일 중국의 지푸(Chefoo)에 도착한 존 로스는, 그 당시 스코트란드 성서공회의 산동반도의 책임자이자 연합장로교회의 중국 선교부 책임을 맡고 있던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 목사와 협의를 한 결과, 많은 외국 선교단체들이 있는 산동지역 보다는 아일랜드 장로교회의 의료선교사 1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던 만주를 존 로스의 선교지로 결정한다.

 

1866년에 제네랄 셔만호 사건으로 순교한 토마스(R.J. Thomas) 목사에게 조선선교를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다량의 한문성서를 제공하였으며, 본인 스스로 1868년 봉황성에서 조선인들에게 한문성서를 팔았던 경험이 있는 윌리암슨 목사는 존 로스와 함께 만주에서부터 조선에 이르는 장래의 선교지 확장의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존 로스 목사 부부는 1872년 10월 만주의 영구(營口)에 도착하여 만주선교를 위한 준비를 한다. 장기간의 여행과 중국의 혹독한 겨울 추위는 임신 중이였던 로스 목사 부인의 건강을 악화시켰고, 1873년 3월 첫아들 드러몬드(Drumond)를 낳고 3월 31일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존 로스 목사는 부인을 잃은 슬픔에 좌절하지 않고, 중국어를 배우는 데 정열을 쏟으면서 충격을 이겨냈다고 한다. 이것은 선교에 대한 존 로스 목사의 정열과 신앙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1873년 5월 11일에 중국어로 20분간 첫 설교를 하게 되는 결실을 낳게 되었다.

 

1873년 5월 13일부터 시작된 순회전도 여행으로 그는 본격적인 선교활동에 착수하게 되는데 1910년 선교사로 은퇴하기 이전까지 38년 동안 만주에 머물며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그의 노력과 선교의 성과는 심양의 동관(東關)교회 안에 있는 비문에 잘 요약되어있다.대영 신학박사 존 로스목사(羅約翰)는 스코트란드 사람이다. 1841년에 출생하여 신학을 마친 뒤에 주님의 뜻을 따라 멀리 바다를 건너 중국에 와서 전도하였으니 그때에 그의 나이 31세였다. 교회 초창기에 황무지를 개간할 때 여러 가지 노고와 어려움을 겪었으나 마침내 공이 이루어지고 기반이 서서 드디어 봉천, 요양, 흥경과 멀리 조선에까지 교회를 건설하니 신자의 수가 매우 많아졌다.

 

또한 고아를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어린이들을 가르쳐서 많은 인물을 길러내었다. 아울러 성경주석 약간의 책을 번역, 출판하였으며 신학교를 세우고 신학을 가르쳐서 친히 시취하여 세운 중국인 목사가 열 사람이 넘었다.

75세로 서거하였으니 때는 1915년 가을이었다. 부음의 서편으로부터 오매 교우들이 듣고 사무친 옛정에 울음이 쏟아지고 밤낮으로 잊을 길이 없어서 이에 찬하는 글을 써서 돌에 새겨 영원히 전케 하노라“

   

존 로스목사는 만주지역의 많은 중국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했으며(봉천/심양,개원,철령,안산,해성,영구,통화,환인등) 한반도에 복음과 한글성경을 전하여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기독교의 설립자로 칭송을 받고 있다.

 

이후 전생애의 대부분을 만주지역과 조선반도선교에 보냈으며 1910년 선교사에서 은퇴를 한 로스 목사는 에딘버러의 메이휠드(Mayfield) 교회의 장로로서 봉사하다가 1915년 4월 28일에 런던의 기독교 문학회(ChristianLiterature Society Conference) 에 참석했는데 그것이 공식적 행사로서는 최후의 것이었고, 같은 해 8월 6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 앞으로 갔다.

 

8월 11일 에딘버러의 뉴윙턴(Newington)묘지에 묻혔고, 그 위에 그의 사업을설명하는 비석을 세웠다. 중국에서는 교인들이 존로스목사의 죽음을 듣고 봉천의 동관교회 제단 뒤에 위패를 모셨다.

 

"존 로스 목사님은 스코틀랜드 분이시다.

그 음성이나 모습이 여전히 계시는 듯해 경의를 표하노라.

하나님게 충성하고 교우들을 사랑하기를 38년간 사방에 교회의 붐을 일으킨 관동(산해관 동쪽)의 한 분이시며 교회당을 신설하고 설교하시니 그 덕행이 받들림을 받도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만고에 보존하기 위해 돌에 비문을 새기니 길이 길이 남아 있으리라"

 

- 심양동관교회 추모비명

 

그의 38년의 선교사로서의 삶과 그의 독특한 선교활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

 

 

 

 

 

0.만주교회의 창시자

 

“중국인에 의한 중국인의 교회”를 강조하는 그의 선교정신으로부터 중국인 자신들에 의한 중국교회의 형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이러한 그의 선교방법이 만주교회가 굳건하게 형성되는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만주교회의 창시자로 평가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대중적인 선교보다는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현지인 지도양성에 크나큰 비중을 두고 교육선교에 그의 노력을 집중시켰다.

 

이러한 선교방식은 현재 제약이 많은 중국선교의 방법에 매우 좋은 교과서적인 모범이 되고있다.

특히 1842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서 팽배했던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배척현상이 두드러졌던 상황 아래에서, 중국인 지도자(설교자)의 양성은 최선의 선교방법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선교방법과 원리는 당시 그의 가르침과 지도를 받았던 많은 한국의 신앙의 선조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그것이 한국 개신교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영구우장장로교회

 

 

 

 

심양동관교회

 

 

 

 

 

 

 

 

   

0.연합선교운동가

 

산동지방의 많은 교파의 선교단체들과의 경쟁선교를 피해 만주에 온 존 로스 목사는 그의 뒤를 이어 시작된 다른 선교단체들과의 연합선교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1891년부터는 양교단의 허락을 얻어 아일랜드 장로교회의 만주선교부와 통합을 하고 하나의 장로교 선교부를 설립하였고 신학교를 공동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이 만주장로교선교부는 만리장성 동쪽에서 흑룡강변에 이르는 광활한 선교지역에서 로스의 연합정신이었던 “중국인을 위한 단 하나의 교회”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교파교회의 이식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교회의 정착을 위해 애쓰던 존 로스 목사의 선교정신은 오늘의 한국교회도 본받아야 할 점이다. 1912년 선교사로서 은퇴하기 전까지 그는 중국에 하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0.교육자

 

 

                                                (봉천신학원)

 

우선 존 로스 목사는 중국선교에 임하면서 초기부터 중국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중국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바탕 위에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했다.

1873년부터 영구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임할 때에도 학생들에게 성경과목을 강요하지 않고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중국의 학문을 먼저 가르치게 하는 원칙을 가지고 학교를 운영하였으며, 교사도 기독교인에게 국한시키지 않았다.

 

또한 본인도 사서삼경을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데 유교의 가르침과 가치관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중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사랑은 외국인과 기독교 신자의 박해로 나타난 1900년 중국 전역을 휩쓴 북청사변 후에도 변함이 없었고, 1904년 러/일 전쟁 당시에 중국인들의 구호에 힘쓴 그의 노력 때문에 1905년에 원세계(袁世凱) 총독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한다.

중국인을 위한 신학교육에도 강조점을 둔 존 로스 목사는 심양에 1883년부터 3년제 신학원을 개설하고 1890년에는 4년제의 정규신학교로 발전시켰다.

이것이 현재 한국교회가 관심을 갖고 지원하고 있는 심양의 동북신학교의 전신이었으며, 이곳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한국인들도 신학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0.학자

존 로스목사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위대한 학자는 아니었지만, 중국과 한국에 관한 귀중한 여러 논문과 연구서들을 남겼다.

선교적인 목적에 의해 저술된 중국어교본(1876)과 한국어교본(1877)을 필두로 해서 1882년에는 한국어 성경번역과정에서 집필된 한국어문법 및 단어집을 출판하기도 한다.

 

한국어교본은 영어로 기록된 최초의 어학교재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그의 선교사로서의 공적의 인정과 함께, 1879년의 한국의 역사, 1880년의 만주의 역사는 학문적으로 독특성이 인정되어 1894년 그는 글라스고우 대학으로부터 신학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만주지역을 동북아시아 역사의 중심으로 보는 시각으로 기술된 “한국의 역사”도 영어로 된 최초의 한국역사서였다.

그 외에 만주선교방법론(1903: 최성일 편역, 중국선교방법론, 한신대학교출판부, 2003 참고), 중국의 전통종교(1909), 그리고 그의 유고집인 중국인의 기원(1916) 등은 그의 주요 저서들로 선교방법 원리와 이론 및 중국이해를 위한 귀중한 자료들로 평가된다.

 

이밖에 중국어 성서번역과 성서주석에도 참여할 정도로 중국 내에서는 그의 실력을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

 

 

 

 

                                        (존 로스목사의 한글단어집)

 

 

                                            (존 로스 저 한국사)

 

0.한국 개신교선교의 개척자

 

존 로스목사는 그의 선교활동 초기부터 한국선교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의 한국선교에 대한 열정과 업적들을 자세히 소개할 수 없지만, 대표적인 일들만 간추린다면, 만주에서 신약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 접촉한 많은 한국인들을 개종시키고 훌륭한 교회의 지도자들로 훈련시켰다.

 

1879년에는 한국인 최초의 세례교인을 배출케 했으며, 서상륜, 백홍준, 김청송, 김진기, 이성하 등과 같은 인물들을 배출하여 한국 개신교의 형성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케 했다. 특히 1882년 누가복음의 출판 이후 1887년에 완성되어 출판된 최초의 한국어 신약성서인 [예수셩교젼셔]는 외국 선교사들이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개시하기 이전에 한국인들 스스로 기독교 복음을 접하고 받아들이게 한 성서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본인에 의한 직접적인 한국 내 선교에 대한 희망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만주의 집안현과 간도지방의 한국인 공동체 내에 굳건한 신앙공동체가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도 존 로스목사에게 가르침을 받은 자들에 의한 신앙공동체가 여러 지방에 형성되었는데, 의주와 강계의 신앙공동체는 물론 백낙준 박사가 “한국 개신교의 요람지”로 불렀던 황해도의 솔내교회와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의 형성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특히 존 로스목사의 성서번역에 관계하며 복음을 받아들였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주 출신이었기 때문에, 의주는 1906년 당시 상주 선교사가 없는 상황에서도 평양 다음으로 큰 신앙공동체(약 5000여 신자)를 형성할 수 있었다. 새로운 신약성서 번역의 일을 미국선교사들과 협의하기 위해 1887년 9월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한 로스는 새문안교회를 창립하는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으며, 14명의 세례자들 중 13명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서상륜에 의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고 증언한다. 이것은 초기 한국 개신교 형성에 그가 끼친 영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만주 한인촌의 신앙공동체로부터 소래와 새문안교회의 형성과정에 이르기까지 공동적인 특징은 존 로스목사에게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우리말로 번역된 성서와 전도지를 통한 자발적인 복음 수용이었다는 점이다.

 

1904년 새로운 신약성서가 출판되기 이전까지 존 로스역은 유일한 신약성서로서 사용되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존 로스역은 “한국의 초대교회가 세워진 토대“였다. 레이놀즈(W. D. Reynolds)는 존 로스의 신약성서가 한국 초대교회의 근간이었으며, 특히 서북지역에서의 경이적인 복음수용의 원인으로 인정했다.

 

이런 사실은 언더우드(H. G. Underwood)도 인정하였으며, “복음의 씨를 뿌리려고 한국에 온 그는 수확을 하고 있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한국인 자신들에 의한 자생적인 기독교인이 많았다. 이러한 경이적인 역사의 배경에는 한국 최초의 신약성서와 존 로스목사에게서 훈련을 받은 많은 한국인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신앙과 노력이 있었다고 하는 점에서 존 로스목사는 한국의 첫 선교사로서 불리어 마땅하며, 단순히 “최초의 성서번역자”로서가 아니라 한국교회에 대한 그의 영향은 앞으로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솔내교회와 서상륜 사도)

 

 

 

 

2) 존로스와 메킨타이어 목사의 고려문 전도

 

고려문이란 중국 요녕성 봉황성 바로 밑의 작은 촌 거리로서 '루카'라고도 하고 책문(柵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은 청태조가 중원을 통일한 후 조선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장책을 두른 후 설치한 6문중 하나이며, 조선의 사신이나 상인들의 내왕은 오직 고려문으로 제한함으로써 조․청 양국의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고려문은 옛날부터 중국으로 오가는 조선 사신들과 상인들이 반드시 들려야 했던 국경 관문이었다. 그리고 양국 세관이 나와 교역을 관리하는 합법적인?자유 무역시장이었다. 그래서 고려문은 두나라 상인들로 언제나 북적거렸다(현재는 요녕성 봉성시 변문진이다).

 

토마스목사의 순교이후의 큰 사건을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 두 목사의 “고려문 전도”라 한다.

여기에는 먼저 고려문 전도의 의의와 존로스 목사에 앞선 윌리암슨의 만주방문을 고려해 두어야 할 것이다.

 

고려문은 책문이라고 하며 조선의 북쪽 국경도시인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약 120리 지점에 있던 국제 교역지였다. 중국과 일본은 일찍이 문호를 개방하여 카톨릭과 뒤이어 프로테스탄트의 전교가 자유로웠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늦도록 쇄국정책에 갇혀 복음전래는 물론 일반 통상의 길도 막혀 있었다. 이와같은 쇄국정책은 병인양요이후 대원군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으므로 뜻이 있는 청년들은 국외로 도피해 나갔고, 그들의 집합처가 고려문이었다.

 

고려문에는 춘추로 교역시장이 개최되어 많은 중국인과조선인 그리고, 서양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므로 "고려문전도"란 단순히 고려문 시장전도만 가리키지 않는다. 이곳에 모여왔던 지역들, 즉 우장과 봉천등지를 포함한 초기의 국외전도를 가리키고, 한국교회 설립의 전초기지가 된 것이다.

 

윌리암슨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만주지방의 주재원으로 토마스목사의 한국방문에 협조한 분이었다. 그는 1866년 4월에 만주의 한국상인들을 만나 전도하였고, 4월 19일에는 귀국도상의 동지사를 만났으며, 그들 중의 두세명은 카톨릭 신자임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한다. 아마 이 동지사가 토마스목사와 만났고, 후일 그를 사형시킨 평양감사 박규수가 아니었든가 본다.

 

윌리암슨이 고려문을 방문한 직접적인 목적은 토마스목사의 정확한 안부를 알기 위함이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그의 보고서에서 대영제국의 무력으로 한국의 쇄국정책을 파쇄하고, 국교의 문을 열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존로스목사와 그의 매부 매킨타이어는 스코틀랜드의 자유일치교회의 목사들로써 1872년 이래 만주의 우장과 봉천지대에 주재하여 선교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두 스코틀랜드 선교사가 만주를 찾아 한국전도를 계획한 것은 영국인으로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목사의 선교를 계승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과연 토마스목사의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아 토마스-윌리암슨-로스, 매킨타이어를 이은 영국계 선교사들로 한국교회의 주초가 된 것이다.

실로 로스*매킨타이어는 두가지 의미에서 한국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다.

 

첫째는 국외선교를 통해 국내선교의 터전을 닦은 것이요, 둘째는 최초의 한국성서의 번역작업을 달성한 것이었다.

1873년 로스목사는 만주 일대를 순회전도하다가 압록강 상류지방인 임강에 이르러 한국인이 약 3천호가 모여 사는 군을 만났다. 그곳은 고구려의 고도였던 것이다.

 

존로스목사는 이곳에서 조선인들에게 전도하며 조선입국의 가능성과 안내인을 구했으나 아무도 응하질 않아 국내 쇄국정책의 철저함을 피부로느꼈다.

그는 다시 고려문에 이르러 더 많은 한국인을 만나 그의 한국전도의 비젼을 새롭게 하였다.

 

다음해인 1874년, 존로스목사는 중국인 서기를 동반하고 고려문을 방문했다. 그러나 한국내의 쇄국정책과 금교령이 너무 준엄하여 고려문의 한국인들은 서양인 선교사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서 존로스목사는 숙소에 머물고, 중국인 서기를 통해한국인을 숙소로 데려오도록 했으나 그것도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1876년 오랜 시도 끝에 중국인 서기를 따라 온 네 의주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이 곧 한국인 최초의 프로테스탄트가 된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였다.

네 청년은 상사를 핑계하여 고려문으로 왔으나 내심인즉 서양인을 만나보며, 서양 문화를 배우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존 로스목사와 네청년들 사이에는 청년들은 한국말과 역사를 가르쳐 주고, 존로스 목사는 후한 월급과 서양과학을 가르쳐 줄 약정이성립되어 그들과 같이 선교본부가 있던 우장으로 갔다.

 

최초로 한국청년 네 사람을 얻은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기쁨은 컸다. 네 청년은 약속대로 선교사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고 스스로 서양의 과학문명을 배우면서 지냈으나 신앙문제에서는 아주 완강했다. 이래서 그들이 우장으로 간후 1879년 드디어 그들의 마음이 열려 매킨타이어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들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는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이 된 것이다.

 

                                        (고려문의 옛모습)

 

 

 

 

 

                     (현재의 변문진-고려문을 변문진으로 개명하였다)

 

 

 

 

 

           (이곳 어느 여관에서 존로스 선교사는 처음으로 백홍준의 아버지를 전도하였다)

 

 

0. 1차 고려문 전도여행(1874년)

 

존로스 목사는 1874년 10월 9일 영구를 출발하여 첫 번째 고려문 여행을 하였다. 존로스 목사는 조선 상인들을 만나 한문성서를 팔며 전도하려고 하였으나 한국 상인들은 복음의 진리보다는 영국산 면제품인 '양목'에만 관심이 있었다.

 

실망하여 여관에 있는 존로스 목사에게 한국의 상인(백홍준의 부친)이 한 사람 찾아왔고 존로스 목사는 그에게서 한국정세와 한국인의 발음법 등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존로스 목사는 그에게 한문 신약성서와 《훈아진언》(訓兒眞言 Peep of Day)를 건네주고 돌아오게 되었다.

 

한편 존로스 목사에게 신약성경과 소책자를 받아간 한국 상인은 그것을 자신의 아들과 친구들에게 주어 읽게 하였으며, 그들은 후에 한국개신교의 최초의 수세자들이 된다. 그 상인이 바로 백홍준의 부친이었다.

 

“백홍준 아버지의 이야기”

 

어느 날 나는 여느 때와 같이 고려문(高麗門,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 양국사이의 합법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 물건을 사러 갔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생긴 사람을 보았다. 키는 크고, 피부는 하얗고, 코는 오똑하고, 머리색깔은 노란색이고, 눈은 푸르딩딩한, 한마디로 이상하게 생겼었다. '아! 저 사람이 말로만 듣던 서양사람인가 보다.'하고 생각했다. 청나라 사람은 그런 사람을 많이 보았는지 전혀 신경쓰지도 않았지만, 난 처음 본지라 신기해서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나에게 오는 게 아닌가? 그리고, 이야기를 했다. 영국에서 온 로스라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야소교(耶蘇敎) 선교사라고 했다. 야소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도리였다.

 

그 사람이 뭐라고 했지만, 야소니, 성령이니 하는 게 뭔지 몰랐다. 대신 그의 봇짐에 있던 옷감에 눈이 갔다. 그게 뭐냐고 물어봤다. 영국에서 만든 옷감이라고 했다. 양목(영국산 면제품)이라는 옷감. 그것만 조금 샀다. 의주에서 그 옷감은 커다란 인기였다. 무명보다 훨씬 나은 옷감이었다.

 

다음에 고려문에 갔을 때는 로스라는 사람을 찾아 다녔다. 그가 여관에 묵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관을 찾아갔다. 그리고 양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양목은 더 이상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또다시 그야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야소가 나의 죄를 위해서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이 하는 이야기는 정말 허무맹랑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난 괴로워했다. 야소가 과연 누구길래,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죽었다는 것인가?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저질렀던 죄가 얼마나 많은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고 나서 난 그 로스라는 서양인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달려갔다. 그에게 밤새 했던 고민을 이야기했다. 그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었다.

 

그리고 도움이 될거라며 訓兒眞言(훈아진언, 한문 신약전서, peep of Day)라는 책을 주었다. 나는 그 책을 집에 가져 와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나의 친구들에게, 아들(백홍준)에게도 읽게 했다.

 

강화도 조약이 맺어진 해(1876), 로스가 다시 고려문으로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달음에 가서 만나고 싶었지만 날로 늘어나는 일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에 訓兒眞言을 읽었던 마을청년 두명이 그를 찾아가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이 공식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다.(이 사람이 우리 민족의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지만, 그가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 아들(백홍준)이 도를 배우러 로스에게 가겠다고 이야기했다. 난 기꺼이 그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서너달 후, 홍준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전갈을 받았다. 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로스가 추진했던 성경번역사업을 돕던 이응찬도 세례를 받았다.

 

 

0. 2차 고려문 전도여행(1876년)

 

1876년 4월말과 5월 초에 고려문으로 두 번째 여행을 했다.

이번에는 준비를 미리 잘 했을 것이고, 이에 대한 비용은 영국 리즈(Leeds)시에 있는 로버트 아팅톤이 제공하였다. 그는 유명한 자선사업가였다.

존 로스목사는 세관으로 갈 때는 2년 전과 같은 길로 갔으나,세관을 지나 압록강과 북쪽 국경 사이에 있는 무인지경까지 갔고, 애하와 압록강의 합류점까지 갔다. 거기에 있는 모래밭과 더 비옥한 곳에 잇는 농장에서 중국인과 조선인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존 로스목사는 한권으로 된 전도지와 성경을 출판할려고 했고 ,나중에 반도로 들어 오는 방법을 찾을려고 했다. 두 강이 만나는 곳에서 로스목사는 의주시를 볼 수 잇어서 압록강변을 따라 구경하도록 뱃사공을 부르려 했으나, 조선의 변방 군인들이 두려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존 로스목사가 조선 국경으로 간 두번째 이유는,조선어 선생을 찾고 또 신약성서를 조선어로 번역하도록 그를 도울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존 로스목사는 동역자에게 성경을 번역할 수 있을 만한 지식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한약장수였고 그는 압록강을 건널 때 모든 물건을 잃어버렸다. 이 응찬은 동력자에게 관심을 나타냈으나, 존 로스목사와 일주일 있은 뒤에 존 로스목사의 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그런데도 봉황성을 떠날 때 그는 존 로스목사에게 은밀히 얘기했다.

 

외국인과의 접촉을 두려워해서 이 응찬의 동생조차도 그가 존 로스목사의 교사가 된다는 것을 몰랐다. 존 로스목사가 떠나기 전 이응찬은 하루 먼저 떠났고, 봉천으로 가서 다시 만났다.

 

봉황성에서 돌아 올 때 천산을 거쳐서 다른 길로 갔다. 관전과 환인을 지나 청나라 황제 조상의 능이 있는 흥경에 갔다. 거리서 그들은 봉천으로 가기 전 며칠 머물렀다. 고려문을 방문한 세번째 이유는 압록강으로 가는 봉천의 동쪽에 있는 지방을 탐색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이응찬은 존 로스를 도우면서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이응찬1876년 고려문에 가서 백홍준(白鴻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 등 의주 청년 세 사람을 포섭(包攝)하는 데 성공했다. 이응찬을 비롯하여 네 사람의 한국 젊은이들을 확보한 존 로스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성경 번역이라고 보고 그때부터 성경 번역을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이다.

 

존 로스목사는 ‘말씀’만이 기독교의 핵심이요 전도의 중심이라 보았다. 즉 성경 번역, 한글성서 간행에 전력하여야 한다고 믿었던 복음주의자로, 선교사로서는 가장 적절하고도 고귀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들 네 명의 의주 청년들은 선교사, 세관관리, 병원장 등 그곳 외국인들의 어학 선생으로 일하면서 이응찬과 함께 로스의 성경 번역 사업을 지원했다. 이들이 한 일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위해 한문 성경을 수차례 정독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예수를 믿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3년 후 1879년에 네 사람 모두가 맥킨타이어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복음의 전파는 예상보다 빠르게 진전되었다. 서상륜(徐相崙)이 1879년 만주 우장에서 로스에 의해, 4년 후 1883년에는 김청송(金靑松)이 그 뒤를 이어 세례를 받아 이제 세례를 받은 젊은이는 모두 여섯 명으로 늘어났다. 이미 이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인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3) 존 로스목사와 조선의 개척자들

 

0. 한국기독교 개척자 서상륜

 

 

- 福音書 이고 지고 만주서 서울까지 -

한국기독교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성서번역가인 서상륜(徐相崙)은 1848년(헌종 14년) 7월 26일 평북 의주(義州)에서 태어났다. 의주 명문 양반가에서 서석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13세때 부모를 잃고 조부모 슬하에서 성장했으며, 어려서부터 성격이 쾌활하고 풍류객의 기질을 지녔다.

1873년부터 서상륜은 홍삼과 몇가지 약재를 가지고 만주지역으로 행상을다니기 시작했고,이 무렵 친구인 백홍준(白鴻俊)으로부터 처음 기독교교리에 대해 전해 들었다.

 

그 뒤 1878년 그는 홍삼을 팔러 만주의 개항장인 영구(營口)에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에 이르렀다. 이때 친구들의 주선으로 영국인 헌터(Hunter, J.M.) 의사의 치료를 받게 된 서상륜은 병원에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의 만주선교사인 매킨타이어(McIntyre, J.․馬勤泰)목사를 만났으며,그의 병문안과 배려로 완쾌되었다.

 

몇달후 서상륜은 매킨타이어 목사의 본격적인 전도를 받았으며, 같은 선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존 로스(Ross,J.․羅約翰)목사도 소개받았다. 이때 그의 몇몇 친구들은 이미 존 로스목사를 도와 한문성서를 한글성서로 번역하는 사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서상륜도 그 작업에 참여하여 '누가복음'을 번역한 다음 세례받기를 요청하였으나, 존 로스목사는 그가 보다 확고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때를 기약하였다.

 

1879년서상륜의 친구들백홍준(白鴻俊),이응찬(李應贊),이성하(李成夏),김진기(金鎭基) 등이 매킨타이어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이에 따라 한국기독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881년 5월 존 로스목사가 1년여의 안식년 휴가를 고국인 영국에서 보내고 다시 만주로 돌아오자 서상륜은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때도 서상륜은 존로스목사의 권고로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한편 번역된 성경을 인쇄하는 일에 친구들과 함께 협력하였다. 특히 그는 나무활자를 파는 각인기술이 뛰어나 이를 친구들에게도 가르쳐 인쇄작업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서상륜이 성서번역과 출판에 참가한 기간은 불과 1년 미만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는 성서를 만들어내는 일 보다는 국내 반포에 더 열심이었다.

 

마침내 1882년 가을 쪽복음 형태로 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예수셩교요한복음젼서'가 간행되었다.

 

인쇄기는 상해에서 사들였고, 한글활자는 한국인 조역자들이 만든 목활자를 일본에 보내 4만여자의 아연활자로 만들어 1881년심양(瀋陽)에 설치했다. 출판소는 문광서원이었다. 이는 우리나라에 외국인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전 일로서 한국교회 성립의 기초를 이룬 것이다.

 

한편 의주지방은 1879년부터 백홍준의 열렬한 전도활동으로 인해 기독교신앙에 대한 열망이 생기면서 '성경'에 대한 요구가 차츰 늘어났다.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자 국내로 수입되는 폐지(廢紙)속에 미제본 된 복음서 낱장을 끼워 밀반입하기도 했으나 이것으로는 부족하였다. 이에따라 그해 10월 서상륜이 영국성서공회 소속 최초의 한국인 권서(勸書)로 임명되어 평북지역으로 파송되었다.

 

이듬해인 1883년 서상륜은 당시에는 금서로 규정된 성서를 가지고 입국을 시도하다 의주의 봉황성(鳳凰城) 책문에서 발각되어 감옥에 갇히기도 했는데, 다행히 의주부 집사이며 먼 친척이었던 김효순(金孝順)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이후 동만주일대에 산재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서상륜은 1884년 존로스목사의 요청에 의해 다시 한번 국내 포교 임무를 맡았다. 이 때 그는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심양을 떠나 일주일 만에 고려문(高麗門)에 당도하였다.

 

당시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점이 인식되어 기독교에 대한 전도는 어느정도 묵인던 시기였다. 그래서 무사히 국내로 들어온 서상륜은 3개월간에 걸쳐 다량의 복음서를 반포하면서 본래 목적지인 서울로 향했다.

 

상경한 서상륜400여권의 복음서를 약 6개월간 반포하면서 서울에서도 열심히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그는 여러명의 개종자를 얻었고, 존 로스목사에게 '서울로 와서 세례를 원하는 13명의 친구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교회를 조직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존 로스목사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서울 방문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지자 대신 상하이와 제물포간의 기선 항로를 이용하여,1884년 봄 이성하를 시켜 다량의 번역 출판된 쪽복음서,사도행전,소책자 등을 서상륜에게 보내 주었다.

 

그는 인천세관의 고문으로 있던 뮐렌도르프(Mollendorf)의 도움을 받아 화물을 찾아 전도에 사용했다.

한편 1883년에는 '옛후셩교젼셔 말코복음'이, 이듬해인 1884년에는 '예수셩교젼셔 마태복음'이 심양(瀋陽)의 문광서원에서 간행되었다. 이어 1887년에는 이른바 로스역 성서(Ross Version)라는 최초의 한글신약성서 번역본이 '예수셩교젼셔'라는 이름으로 영국성서공회와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재정원조를 얻어 간행되었다.

 

1885년 3월초 서상륜은 심양을 방문하여 존 로스목사에게 국내에 있는 70여명의 세례청원자의 존재를 보고하고 다시한번 그의 한국방문을 요청하였다. 이윽고 그해 말 그는 백홍준,최명오(崔明悟)와 함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의 월급을 받는 한국교회 최초의 유급 교역자로서 조사(助師․지금의 전도사에 해당함)에 정식으로 임명받고 활동하였다.

 

이후 서상륜은 의주를 거쳐 동생 경조(景祚․본명은 相祐․훗날 1907년에 한국 최초의 7인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이 됨)와 함께 당숙이 살던 황해도 장연현 대구면 솔내(松川) 마을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동생과 함께 전도활동에 주력하여 20여명의 교인들을 지도하며 성경과 교리를 가르쳤다. 또한 개인 집을 돌면서 예배를 드렸으며 늦어도 1886년까지는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매주일 정기예배를 드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상륜은 1886년 말 서울로 언더우드 목사를 찾아가 소래를 방문하여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선교사의 지방여행이 아직 불가능했기 때문에 서상륜은 교인 가운데 동생 경조와 정공빈,최명오 3명을 서울까지 데리고 가서 선교사들을 찾아가 세례문답을 받게 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887년 1월 23일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그들이 세례를 받았으며,계속해서 소래출신 교인들이 세례를 받게하여 그해 9월 초에는 소래출신 세례교인만 11명에 이르렀다.

 

1887년 9월 27일 서울 정동에 있던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방에서 14명의 세례교인으로 우리나라 장로회 최초의 조직교회인 정동교회(오늘의 새문안교회의 전신)가 설립될 때에 그 가운데 13명이 이미 서상륜의 전도로 교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한국에서의 첫 조직교회는 그 구성원이 외국인선교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서상륜을 비롯한 한국인 전도인들의 목숨을 건 전도활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해 10월말에는 언더우드 목사가 직접 소래에 와서 나머지 교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이 때 서경조의 석달된 아들 병호(丙浩)가 세례받아 우리나라 교회 최초의 기독교식 유아세례가 행해졌다.

 

그 뒤에도 서상륜은 1891년 평양,의주,회령,함흥,원산 등지를 여행하며 성서를 팔고 복음을 전하는 매서인(賣書人) 또는 권서인(勸書人)으로 활약했으며, 1893년 3월에는 평양의 개척선교사로 임명된 마펫(Moffett, S.A.),리(Lee, G.),스왈른(Swallen, W.L.) 등을 도와 평양에서 전도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선교사들의 전도여행때 길 안내자로 동행하기도 했고 때로는 단독으로 전도에 힘썼다. 특히 서상륜은 여행할 때 반드시 쪽복음서,해열제,감자씨 등을 보따리에 넣고 다녔다고 전한다.

 

무엇보다도 서상륜은 소래교회를 세움으로써 '한국개신교의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이 소래(松川)교회는 '한국 개신교의 요람지'로 불리는 자생된 최초의 한국인 교회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기독교회가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주체적이고 자립적으로 확립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후 해외 선교사들이 한국에 파송되면 소래교회에 와서 풍속과 어학훈련을 받았다. 처음에는 서경조의 사랑방에서 시작하여 교인 수가 늘자 예배당을 지었으며,동네의 사당터에 8칸짜리 기와집을 지어 1895년 7월에는 언더우드 목사의 인도로 헌당식을 가졌다. 이로써 동네 58세대 가운데 50세대가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서상륜은 말년에는 소래교회에 머물면서 신앙과 전도에 힘썼다. 그는 한국기독교 설립의 산파였으나,목사나 장로 등의 성직은 사양하고 오로지 한 사람의 평신도로서 복음의 씨를 이 땅에 뿌리는 일에만 전념한 전도자였다.

 

마침내 서상륜은 1926년 1월에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는 그의 전도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총회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였고,그의 유해는 황해도 장연군 태탄리에 안치되었다.

 

이후 1936년 9월 열린 제 25회 장로회 총회에서 그의 개척적 선교사업의 공을 기리는 기념비 건립이 결정되어 1938년 8월 그의 묘지에 높이 5척5촌의 기념비가 세워짐으로써 선구자적 선교사업을 기리게 되었다.

 

                                (한민족 최초의 솔내교회)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0. 한국인 최초의 기독교 교역자 백홍준

 

- '조선의 사도바울' 백使徒 -

 

 

한국인 최초의 기독교 신자 가운데 한 사람인 백홍준(白鴻俊)은 1848년에 평북 의주(義州)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북산(北山)이다. 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1874년 10월경 만주의 통화현(通化縣) 고려문(高麗門)을 방문하였다가 영국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인 존 로스(Ross, J.․羅約翰)목사를 만나 한국 정세와 발음법을 가르쳐주고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과 '훈아진언'(訓兒眞言)이라는 소책자를 받아온 일이 있었다.

 

아버지가 가져 온 책자를 몇몇 친구들과 함께 2~3년간 공부한 다음 북산은 1879년 순전히 '교리를 배울' 목적으로 존 로스목사를 찾아 만주 우장(牛莊)으로 갔는데, 그때는 존 로스목사가 안식년 휴가를 맞아 조국인 영국으로 귀국하고 없었다. 대신 같은 선교회 소속인 매킨타이어(MaIntyre, J.․馬勤泰) 목사가 그를 맞이하였고, 그곳에서 북산은 구도자로서 3,4개월을 지냈다.

 

마침내 그는 신앙을 고백하고 친구인 이응찬(李應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 등과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 장로교회의 신자가 되었다. 이 네 사람은 한날 한시 한꺼번에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시차를 두고 받았으며, 이름이 전하지 않는 첫 세례인이 배출된 직후에 북산이 두번째로 세례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 후 그는 친구들과 함께 다시 만주로 돌아 온 존 로스목사가 주도하는 중국의 한문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에 서너달 동안 착수하였다. 이처럼 여러 명의 한국인들이 힘을 모아 나라 밖에서 한글로 성서를 번역했다는 일 자체가 바로 한국기독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즈음 1880년 의주에 있던 10여명의 구도자들의 요청에 따라 매킨타이어 목사가 북산을 시켜 성경과 소책자 한 상자를 보낸 일이 있었다. 그랬는데 그가 머무르던 국경지역의 여관에서 짐보따리를 수상히 여긴 주인의 신고로 관헌에 의해 압수되고 동봉한 편지가 발각되어 약 3개월간 투옥된다. 당시 나라에서 금하던 천주교신자가 아닌 까닭에 풀려 나오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북산은 거의 모든 재산을 잃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만주의 영구(營口)로 매킨타이어 목사를 찾아가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주님을 위해 핍박받는 것이 즐겁다"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북산의 열렬한 신앙은 이듬해인 1881년 100여명의 조선인들이 매킨타이어 목사를 찾아와 그가 개설한 성경공부반에 참석해 일주일간 공부하고 돌아가는 일로 발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상당량의 한문으로 된 성경이 국내에 밀반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존 로스목사가 몇몇 조선인의 도움을 받아 오랫동안 추진한 한글성서 번역사업이 결실을 맺어 1882년 최초의 한글성서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 요한복음젼셔'가 심양(瀋陽)의 문광서원에서 간행되었다.

 

당시 한글성서 번역을 도운 핵심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북산은 이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가지고 만주 서간도(西間島)의 한인촌에 전도하여 75명의 신자를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마을마다 성경을 짊어지고 찾아가 팔거나 읽기를 권하면서 기독교신앙을 전파한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사람을 권서인(勸書人) 또는 매서인(賣書人)이라고 불렀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용어이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국어로 번역된 성서가 있어야 가능하다. 따라서 '성서중심적'이고 '자발적 복음 수용'이라는 한국기독교의 특색을 나타내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북산과 같은 개척적인 전도인의 활약으로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만주지역과 한반도 북부지역 몇 곳에 기독교 신앙공동체가 설립될 수 있었다. 당시 그가 뿌린 복음의 씨는 계속적으로 열매를 맺어 훗날 평안도 일대가 상당기간 동안 한국기독교의 중심지가 되는 초석을 놓은 것이다.

 

그리고 1883년 북산은 존 로스목사에게 전도인으로 인정받았고 국내전도를 위해 성서를 가지고 잠입하여 의주, 삭주, 강계, 구성 등지에서 전도한 끝에 10여명의 신자를 얻었다.

 

그는 주일마다 자기 집에서 이들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써 비록 조직된 교회의 형태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국내 최초의 개신교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때 북산은 의주에서 교리문답반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적어도 1885년에는 18명의 신자가 모인 예배처소가 마련될 정도가 되었다.

 

북산이 전도활동에 힘쓰고 있을 때인 1883년과 1884년에는 '사도행전' '마가복음' '마태복음'이 한글로 간행되었으며, 1885년에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가 간행되었다. 이어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셔'라는 이름으로 신약성서 전체가 한글로 번역되어 5,000부가 출간되었는데, 흔히 '로스번역본'(Ross Version)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북산은 1년 미만의 기간 동안만 성서의 한글번역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므로 번역가라기보다는 전도인으로평가될 수 있다.

그후 북산은 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G.․元杜尤) 목사가 서울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몇개월 후에 서울로 가서 그가 개최한 신학반에서 공부하였다.

 

한편 그해 말 북산은 서상륜(徐相崙), 최명오(崔明悟)와 함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의 월급을 받는 한국교회 최초의 유급 교역자로서 조사(助師․지금의 전도사에 해당함)에 정식 임명되어, 평북일대의 교회를 개척하는 중임을 맡았다.

 

훗날 1891년부터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매년 봉급을 받았으며 죽을 때까지 왕성하게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리고 북산은 1887년 9월 27일 서울에 있던 언더우드 목사가 자기 집 사랑방에 14명의 세례교인을 모아놓고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정동교회(현재의 새문안교회)를 창립할 때에도 참가했다. 그리고 그는 서울에 상경할 때마다 언더우드 목사에게 의주로 직접 와서 그곳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마침내 북산의 청을 받아들인 언더우드 목사는 드디어 1889년 의주까지의 신혼여행을 구실로 여행 허락을 정부측으로부터 받아냈다.

언더우드 목사의주에 도착하여 세례 지원자 100여명 가운데 세례문답을 통해 33명을 선발하여 세례를 베풀기로 작정했으나, 당시 국법상 공개리에 자국 영토내에서 기독교식 의례를 베푸는 일이 어려워 배 한 척을 빌려 타고 압록강의 중국편 연안으로 건너가서 세례를 베풀었다.

 

이들 대부분이 북산에 의해 전도받은 사람들이며, 이중에는 그의 딸과 사위 김관근(金灌根), 김관근의 부친 김이련(金利鍊) 등이 포함되었다. 이 때가 1889년 4월 27일이었으며 이를 '한국의 요단강 세례'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이 일이 정부에 알려졌으며, 곧 이어 선교사들의 여행금지령이 내려지고 서울에 있던 정동교회 예배도 일시 폐쇄되었다. 이 무렵 북산이 여러 서양인들과 자주 내왕하는 것을 보면서 당시 관가에서는 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과 적개심을 품었다. 결국 당시 평안감사 민병석(閔炳奭)의 지시로 의주에서의 기독교인 수색작업이 진행되었고, 북산은 서양인과 내통한 죄로 의주에서 체포되어 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다 겪으며 상당기간 동안 투옥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혹독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북산은 풀려나자마자 계속해서 중국의 심양까지 여러차례 왕래하면서 존 로스목사와 자주 연락을 취했다. 이러한 북산의 정성에 감동하여 1890년에는 존 로스목사가 의주에 와서 그의 집에 한 달이상 머무르면서 신도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마펫(Moffett,S.A.․馬布三悅), 게일(Gale, J.S.․奇一) 두 선교사가 전국 순회여행을 하면서 의주에 들렀던 일이 있었다. 이 때도 북산은 두 선교사를 몸소 안내하면서 의주와 강계 일대에서 전도활동에 전념했다.

 

이와같이 열성적 전도인이었던 북산은 입국한 선교사들의 서북지역 전도여행을 길잡이하고, 스스로도 여러 지역에서 기독교 교리를 전할 동역자들을 길러내는 등 매우 정력적인 전도활동을 벌였다. 한국 최초의 기독교 전도사로 평가되는 북산은 당시 선교사들이 남긴 편지내용을 살펴볼 때 1893년 12월이나 1894년 1월경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선교사들은 온갖 환난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고 능동적인 신앙인과 전도인의 삶에 충실한 북산을 '백사도'(白使徒)라고 부를 정도였다. 한마디로 북산은 '사도 바울'에 비견할 만한 한국 기독교 개척기의 기초를 다졌던 중요한 인물이다.

 

 

0. 의주 압록강 쪽복음 이성하(李成夏)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세례교인, 최초의 한글판 성서인 《로스번역》 등의 협조자의 한 사람.평안북도 의주 출생. 1874년(고종 11) 이응찬(李應贊) ․백홍준(白鴻俊) ․김진기(金鎭基)와 함께 중국 둥베이[東北]로 가서, 스코틀랜드의 일치자유교회 소속 선교사인 J.로스(한국명 羅約翰)와 알게 되었고, 이어 로스의 처남인 J.매킨타이어(한국명 馬勤奉) 선교사도 사귀게 되었다.

 

1879년 마침내 이들 4인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고, 로스를 도와 최초의 성서 한글번역사업에 정열을 쏟았다. 그리하여 1882년에 《요한복음》 《누가복음》(쪽복음)을 찍어냈는데, 1881년에 세례를 받은 상인 서상륜(徐相崙)이 합세하여 1887년에는 《예수셩교전서》(신약전서)를 완역, 그 초판이 대영성서공회(大英聖書公會)에서 3,000부가 출간되었다.

 

그는 이후 《마태오의 복음서》 등 4복음서와 《사도행전》 등을 몰래 숨기고 귀국, 의주 ․서울 등지에서 비밀리에 전도를 하여 한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후 그의 아내는 백홍준의 아내와 함께 압록강에서 행해진 H.G.언더우드 집례의 대세례식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교회 최초의 여자 세례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성하(李成夏)가 1883년 성경을 등에 지고 심양을 떠나 안동(安東.현재의 단동)에 와서 국경을 넘을 계획을 세우던 중에 여관주인이 이성하의 짐을 몰래 열어보고 성경이 나오자 겁을 먹고 성경일부를 불에 태우고 일부는 압록강물에 던져버리게 된다.

 

낭패를 당한 이성하는 화도 못내고 다시 심양에 와서 존 로스목사에게 보고를 하자 엄하게 책망을 할 줄 알았던 존 로스목사는 오히려 담담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진 그 강물을 마시고 한국사람들은 생명수를 얻게 될 것이요.불에 탄 성경책의 재는 한국교회를 자라게 할 비료가 될 것이다!”라고 위로하며 예언의 말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로스 선교사의 예언을 오늘에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다.

 

                                      (쪽복음 도강현장)

 

 

 

 

0. 존로스 목사의 한글교사 이응찬

 

이응찬은 로스와 매킨타이어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6년 가까이 <예수셩교젼서>의 번역에 매달려 절반 이상 번역과 수정을 한 후인 1883년 9월 콜레라로 소천하였다. 예전에 술과 아편을 즐기던 그가 성경 번역을 몰입하여, 그 복음을 동족에게 전해주려고 애쓰다가 이국 땅인 만주 봉천에서 순교하였다.

 

성경의 번역은 로스의 계획과 추진, 감독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이 과정에서는 이응찬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이응찬은 1876년부터 존 로스목사의 어학(語學)선생으로 활동하다 수세(受洗)를 결심했다.

 

                                       (예수셩교 문답)

 

 

 

4) 성경의 한글번역과 발간

 

0. 성경의 번역과 발행

 

성경의 번역은 존 로스목사의 계획과 추진, 감독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이 과정에서는 이응찬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이응찬은 1876년부터 존 로스목사의 어학(語學)선생으로 활동하다 수세(受洗)를 결심했다.

 

 

 

이응찬은 존 로스를 도우면서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이응찬은 고려문에 가서 백홍준(白鴻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 등 의주 청년 세 사람을 포섭(包攝)하는 데 성공했다. 이응찬을 비롯하여 네 사람의 한국 젊은이들을 확보한 존 로스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성경 번역이라고 보고 그때부터 성경 번역을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이다.

 

초창기의 성경 번역 과정은 한국인 번역자들이 선교사들과 함께 한문 성경을 읽고 나서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선교사는 그것을 다시 헬라 원문과 대조하여 될 수 있는 대로 헬라 원문에 가깝게 다듬는 방식이었다. 1878년까지 존 로스목사이응찬, 김진기, 백홍준 공역으로 누가복음 초역이 완료되어 이것을 다시 맥킨타이어가 이들 한인 번역자들과 함께 원문에 가깝게 재수정을 가했다. 성경 번역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879년 5월 로스가 안식년을 떠날 때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로마서 원고를 지니고 갈 수 있었다.

 

1879년 존 로스 선교사는 안식년으로 본국에 머무는 동안 서방세계에 한국에 관한 문화․종교․지리․풍습 등을 소개한 한국관련서적 한국의 역사, 고대와 근대(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라는 책을 출판하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한국인 선교 및 한글 성경 번역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한국선교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새로 번역될 한글 성경의 출판에 필요한 비용을 보조받을 약속을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1880년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3천 권에 대한 인쇄비와 두 선교사의 번역 비용, 그리고 한국인 번역자들의 급료를 지불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881년 존 로스목사는 안식년을 마치고 만주 우장으로 돌아와 맥킨타이어가 수정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또다시 검토하여 최종 원고를 완성했다. 1881년에 봉천에 인쇄소(문광서원)를 설치하여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한글로 된 첫 개신교 문서인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을 그 해 10월에 인쇄했고, 이어 성경 인쇄에 들어가 1882년 3월에 예수셩교 누가복음뎨자젹을 처음 인쇄하고, 그리고 5월에 예수셩교요안복음을 발행했다.

 

한글을 전혀 모르는 중국인 식자공으로는 한글 성경전서를 완간(完刊)할 수 없어 한국인 식자공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서간도 한인촌(韓人村) 출신 김청송이었다. 비록 “그는 너무 둔하고 느려서 무슨 일이나 네 번 이상 가르쳐 주어야 비로소 깨달아 알았고 손이 너무 떠서 두 인쇄공이 3,000장을 인쇄하는 동안에 겨우 4페이지밖에 조판을 하지 못할” 만큼 천성적으로 느렸지만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한 치밀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 치밀함 때문에 인쇄되어 나오는 복음서를 자세히 읽게 되었고, 그 결과 마침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말씀으로 성경 번역 과정에 참여한 이들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께서 다시 성경을 인쇄하는 과정에서 전혀 예기치 않게 말씀을 통해 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성경 번역과 인쇄에 얽힌 이야기는 이뿐이 아니었다.

 

누가복음 최종 원고가 완성되어 인쇄에 들어가려고 할 즈음 동지사(冬至使)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돌아가는 길에 봉천교회에 들렸다. 이때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그 원고의 교정을 부탁해 그가 원고를 서울로 가지고 가서 교정을 완료한 후에 다른 동지사 편에 그것을 돌려보냈다.

 

이 사실은 1890년 로스가 이때를 회고하면서 누가복음이 출판되기 전 이미 동지사 일행에 의해 “번역원고가 한국의 수도에서 교정되었다”고 밝히면서 알려졌다. 이 사실은 곧 동지사 일행에 알려졌고, 이 일을 계기로 많은 동지사 일행들이 봉천교회에 들러서 한글 성서의 출판 상황을 견학하게 되었다. 존 로스목사에 의하면, 이름을 알 수 없지만 그 중의 한 사람은 말과 행동이 매우 민첩하여 한글성서 간행에 큰 도움을 주었다:

 

심지어 누가복음이 출판되기 전 번역 원고가 해외 서울의 수도에서 수정되었으며, 이는 너무 많은 흥미를 자아내 한국의 왕이 중국의 황제에게 바칠 조공을 나르는 동지사에 딸려 이따금씩 중국에 오는 한 수행원(an occasional underling)이 이곳의 성경 번역 사업을 보기 위해 들렀다.

 

이들의 방문은 점차 더욱 잦아졌고, 그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느리기 한이 없었던 그 식자공[김청송]과는 정확히 정반대 모델(exact antipodes of the compositor)이었다. 그는 손놀림이 민첩했고, 눈치가 빨랐으며, 말과 사고와 행동이 영특했다. 그는 식자공으로 종사했으며,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가 배운 지식을 가지고 더 잘 적응하리라고 여겨지는 한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자유를 얻었다.

 

몇 백 권의 복음서와 훨씬 더 많은 전도지를 가지고 그는 봉천에서 정 동쪽으로 약 4백 마일 떨어진 자신의 마을로 갔다. 그는 그 여행에 2주일이 걸렸고, 반년 만에 돌아와 보고하기를 그 책들을 팔았으며,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들을 읽었고, 그 중에 몇 사람은 내가[존 로스] 그들에게 세례를 주러 오기를 원했다고 했다.

 

처음에 존 로스목사는 와서 세례를 달라는 말을 반신반의해 주목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더 많은 책을 공급받고 다른 마을로 가 반년 후 돌아와서는 정확히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이처럼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과 사람들을 통해 성경 번역 사업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출판 후에도 성경 보급은 놀랍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성경 저자들로 하여금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성령께서 한글 성경의 번역과 보급에도 개입하시고 인도하셨음을 발견한다.

 

1882년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젼셔 요안복음의 출판은 한국성경 번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최초의 한글 성경이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뛰어난 번역자들과 수차례의 재교정을 통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원문에 충실하면서 순한글로 인쇄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값진 결실이었다.

 

존 로스목사는 끝까지 원고를 다듬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최종 원고가 완성된 뒤 1881년 영어개역성경(English Revised Version)이 출판되자 존 로스목사는 여기에 맞춰 다시 한 구절 한 구절 대조하면서 원고를 손질한 다음 1882년 3월 24일에 첫 성경, 예수셩교 누가복음뎨자젹을 출판한 것이다. 이어 1883년에 재교정된 예수셩교 누가복음뎨자젹과 뎨자젹[사도행전] 합본, 예수셩교셩셔 누가복음 뎨자젹 3,000권과 재교정된 예수셩교 요안복음 5,000권이, 1884년에 예수셩교 말코복음[마가복음]과 예수셩교맛 복음[마태복음]이, 1885년에는 로마인서, 코린돗젼후셔와 가라탸서, 이비소서가 출판되었고,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셔 즉, 신약 전권이 완간(完刊)되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성경 번역을 위해서 공식적인 모임을 시작한 것이 1887년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미 존 로스의 신약성경이 완간(完刊)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앞선 일이었다.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저본(底本)으로 사용한 성경은 중국어 성경 문리, 헬라어 성경, KJV, ERV 등 네 종류의 성경이었다. 당시 번역이 진행된 곳이 만주 우장이었고, 이미 오래 전에 한문 성경이 출판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한문 성경을 주된 저본으로 사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역은 독창적인 번역이라기보다는 중국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라고 할 만큼 중국어 성경을 모체로 번역한 성경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었다. 그러나 존 로스가 1882년에 본국에 보낸 보고서와 1881년 맥킨타이어의 보고서를 종합할 때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중국어 성경 외에 헬라어 성경과 앞서 언급한 두 권의 영어 성경을 저본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역 과정에서 헬라어 성경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인 조력자들이 한문 성경을 가지고 한글로 번역하면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헬라어 성경 및 영어 성경과 대조하여 수정하고 헬라어 성경사전 및 주석을 참고하여 어휘의 통일을 기한 후 수정된 원고를 헬라어 성경과 대조하여 읽어 가면서 마지막 수정 작업을 진행해 나아갔다. 한문 성경을 초본으로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헬라어 성경과 대조했던 것이다.

 

1882년 7월, 존 로스목사가 보낸 보고서에 기록된 번역과정

 

“이 문제[성경 번역]와 관련해서 내가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방법을 소개하겠다. 과거 고향의 행정관서에서 서기로 있다가 아편 때문에 해고당한 조선인 학자 한 사람이 최신 중국어 문리(文理) 성경을 가지고 번역하고 있다.

 

나는 그가 번역한 것을 헬라어 성경과 영어 개역 성경을 가지고 자자구구(字字句句) 대조한다. 이 일을 돕는 또 한 사람 조선인 학자가 있는데, 그는 이미 수년 전부터 번역인으로 우리와 함께 일한 사람이다. 중국어를 알 만큼 알았고 번역인으로서 그 번역 실무에 능숙하게 되기는 하였으면서도 수칭(數稱) 개념이라든지 존칭(尊稱) 개념, 또는 도치법 같은 것들은 명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다. 때론 절이 바뀔 때가 있고, 의미가 뒤바뀐 것도 있으며, 때론 행(行) 전체가 삭제되어야 될 것도 있었다.

 

이런 식이 되어 처음 번역된 원고는 마치 마마를 앓은 사람 얼굴처럼 되었다. 이렇게 수정된 원고를 다시 깨끗이 정서했다. 그 다음 어휘의 통일을 기하기 위해 헬라어 성구사전을 가지고 헬라어를 번역함에 가장 적당한 조선어가 무엇인지를 결정해 나갔다. 그러나 축자적(逐字的) 번역(literal rendering) 보다는 의미와 조선식 관용어구를 채택하는 경향이 강했다. 즉 조선어에서는 바늘에 귀(耳)는 있어도 눈(目)은 없는 것과 같은 것이 예이다.

 

이 같은 과정이 끝나면 번역 원고를 또 한 번 수정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처음보다 더 신중하게 헬라어 성경과 대조하며 읽어 나간다. 이 일을 함에 있어 앨포드(Alford) 편 헬라어 성경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반면 영어개역성경은 대단히 큰 도움을 주었고 메이어(Meyer)의 주석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역 한글 성경은 첫 작업치고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상당한 수작(秀作)이었다. 비록 로스 역이 평안도 사투리가 많아 서울 지역에서 사용하는 데는 불편이 많았지만, 고유명사를 헬라어 원문대로 표기한 것이나 또한 당시 이응찬이나 백홍준이 모두 의주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던 몰락 양반 가문이어서 한학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고, 한학이 훨씬 더 쉽고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성경 번역을 하는 데 한글과 한문을 혼용하지도 않고 아예 순한글로 번역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성경 번역에 기여한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권서인(勸書人)이 되어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들이 만든 성서를 보급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는 처음부터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파가 놀랍게 진행되었다.

 

0.한글성경

 

한글 성경의 탄생은 세계 교회사에 있어 주목할만한 의미를 가진다. 외국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한글 성경이 간행되었던 것이다. 한국교회 최초의 한글 성경은 1882년 3월 24일 중국 심양에서 간행된 《예수셩교누가복음전서》이다.

 

스코틀랜드 연합교회 목사로 중국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일찍부터 한국 선교에 관심이 깊었던 존 로스(J.Ross, 羅約翰) 목사와 그의 매제되는 매킨타이어(J. Maclntyre, 馬勤秦) 목사, 그리고 의주 출신으로 상업활동에 종사하던 서상륜(徐相崙)·이응찬(李應贊)·백홍준(白鴻俊)·이성하(李成夏) 등 한국인 개종자들의 산물이었다.

 

이들의 한글 성경 번역작업은 1887년 신약을 모두 완역한 《예수성교전서》로 일단락되었다. 한편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李樹廷)1884년 한문성경에 이두 토를 다는 방법으로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간행하였고, 1885년 국한문혼용체로 《마가복음》을 번역, 출판하였다

 

 

.요한복음

 

누가복음에 이어 간행된 두 번째 한글 복음서로 평안도 사투리가 특색이다. 본문은 대두법을 사용하여 '하나님' 앞에서 한 칸씩 띄어쓰기를 하였으며, 본문 뒷편에 '밥팀례'(세례), '사밧일'(안식일)과 같은 단어 설명을 붙였다. 이 성서는 1895년 서울에서 성서번역위원회역 4복음과 사도행전이 나올 때까지 사용되었다.

 

 

 

 

 

.제자행적

 

1882년 발행된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이어 세번째로 발행된 한글성서이다. 이 제자행적은 《누가복음》을 수정하여 《사도행전》과 함께 묶은 합본성서이다. '예수' 앞에서 띄어쓰는 대두법을 사용하였고 신(神)의 명칭을 '하나님'으로 표기하였다. 장·절 표시가 없으며 지명이나 인명을 원문 그대로 표기하려고 노력하였다.

  

 

.예수셩교젼셔

 

1887년 만주 봉천(奉天)에서 출판된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이다. 번역 주관자가 로스(J.Ross)였기 때문에 일명 '로스역성경'(Ross Version)이라 한다. 이 번역작업에 참여한 한국인 개종자들은 초기 기독교 신앙공동체 형성에 기여하였다.

 

이 성서는 중국어 음역표기에서 벗어나 서구식에 가깝게 정리되어 용어사적인 공로가 크다. 절 표시가 되어 있으나, 대두법 표기는 없어졌으며, 신의 명칭은 '하나님'으로 표기하였다. 짙은 평안도 사투리가 많은 특징이 있다. 이 신약전서는 국내에서 신약전서가 발간되는 1900년까지 한국교회에서 수많은 영혼에게 복음의 빛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다.

 

 

 

 

 

.마태복음

 

1892년 예수성교본 발행의 마지막 단편이며, 이후 선교사들의 성서위원회에서 성경번역이 본격화되었다. 순한글본으로 신의 명칭을 '하나님'으로 표기하였으며 띄어쓰기는 하지 않았고, 각 절 표시가 되어있다.

 

 

 

 

.누가복음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로 한국개신교 최초의 성서이다. 1878년 서상륜에 의해 처음 번역된 이래 몇번의 수정을 거쳐 1882년 발간되었다. 장과 절 표시가 없고 띄어쓰기가 생략되어 있으며, '예수' 앞에서 띄어쓰기를 하는 대두법(擡頭法)을 사용하였다. 신의 명칭을 '하나님'으로 표기하였다. 51페이지 분량의 작은 성서이나 한국기독교사에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된 것보다 훨씬 오래갈 기념비”로 평가된다.

 

 

 

 

 

 

5) 한글성경의 전파와 초기의 교회 및 공동체

 

0. 압록강을 넘어 한글성경 전파

 

(백홍준과 의주교회)

 

이렇게 찍어낸 한글성경은 옛날 조선의 사신들이 중국을 다니던 길을 따라 조선에 반입을 시도하게 된다.

성경번역과 출간을 완성한 존 로스 목사는 이 성경을 최초의 한국인 신자들에게 주어 각자 고향으로가서 전도하게 하였다.

 

한국인의 국민성은 가족과 나라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런 마음을 가진 한국의 청년들이 예수를 믿고 성경을 번역하면서 조국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솟아올랐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들 중 제일 먼저 이성하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많은 성서와 전도문서를 지니고 중국 봉천에서 의주를 향하여 목숨을 건 순례의 길을 떠났다. 당시에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은 나라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잡히게 되면 처형당하였다.

 

조선에서 청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하여야 하는 고려문에서 바로 존 로스 목사가 한국의 첫 기독교 신자가 된 서상륜,백홍준,이응찬,이성하,김진기등을 만난 곳이며 또한 심양에서 번역된 한글성경이 한국에 들어오는 바이블 로드의 중요한 입구인 것이다.

 

이성하(李成夏)가 1883년 성경을 등에 지고 심양을 떠나 안동(安東.현재의 단동)에 와서 국경을 넘을 계획을 세우던 중에 여관주인이 이성하의 짐을 몰래 열어보고 성경이 나오자 겁을 먹고 성경일부를 불에 태우고 일부는 압록강물에 던져버리게 된다.

 

낭패를 당한 이성하는 화도 못내고 다시 심양에 와서 존 로스목사에게 보고를 하자 엄하게 책망을 할 줄 알았던 로스목사는 오히려 담담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진 그 강물을 마시고 한국사람들은 생명수를 얻게 될 것이요.불에 탄 성경책의 재는 한국교회를 자라게 할 비료가 될 것이다!”라고 위로하며 예언의 말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존 로스 선교사의 예언을 오늘에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하의 실패후에 이제는 백홍준(白鴻俊)이 다시 성경책을 등에 지고 우장을 출발하여 10여일만에 의주의 건너편인 싸하지 마을에 도착하여 성경을 반입을 하기 위하여 계책을 세우게 된다.

 

즉 백홍준은 성경책을 한 장씩 뜯어 노끈을 만들어 그것으로 망태기를 만들어 갖고 들어오게 된다. 백홍준은 이렇게 반입한 성경을 다시 펴서 다리미질로 원상복구하여 전도에 사용하였으니 당시의 선교작업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의주에 도착한 그는 그 끈을 풀어 다시 성경을 고향과 이웃마을에 전파했고, 약 반년 후에는 10여명의 신자를 얻어 백홍준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의주교회요, 한국교회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정식교회는 아니었고, 기도소 정도였다.

 

후에 백홍준은 국경을 드나들며 복음을 전했는데 1892년 국법을 무시하고 외국인과 내통하며 이단 사설로 현혹한다 하여 체포되었다. 백홍준은 평양감찰사 민병석에게 배교(背敎)를 강요받았지만 2년간의 옥고끝에 끝내 순교를 당하니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것이다.

 

후에 그의 사위 김관근이 조사직을 맡았는데 그때부터 주일날 세 차례의 예배와 수요일 기도회를 하였고 그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전통이 되었던 것이다.

백홍준은 수개월만에 10여명의 신자가 생기자 자기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니 이교회가 바로 한국최초 개척교회인 “의주의 평신도교회”인 것이다.

 

 

0.만주지역의 한글성경 전파

 

(김청송과 집안현의 이양자교회)

이곳 출신 김청송이 영신환(靈神丸)이란 약을 팔러 다니다가 존 로스 선교사를 만나 심양의 성경 인쇄소 식자공으로 일하던 중 교인이 되었다. 1882년 3월 매서인이 된 그는 자기가 인쇄한 한글 쪽복음과 전도지를 들고 이양자를 비롯하여 집안 일대 28개 골짜기 마을을 돌며 전도했다. 그 결과 3년 만에 수 백명 개종자들이 생겨났고 1884년 12월 존 로스목사는 이곳 4개 마을에서 7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 중에는 임오군란(1882년) 때 정치적 이유로 이곳 이양자 골짜기까지 피신해 온 군인 출신 6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결과 집안을 중심으로 압록강 서쪽서간도 일대에 한인 신앙공동체들이 형성되었고 거기서부터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집안 이양자교회는 만주에 설립된 최초 한인교회라 할 수 있다.

 

이는 장로교회 역사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1928년)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1898년) 중국 남만주 집안현(楫安縣) 이양자(裡楊子)교회가 성립하다. 선시(先時)에 이성삼(李聖三) 임득현(林得賢) 등이 동지(同地)에 우거(寓居)하야 열심 전도함으로 수십인이 상계신주(相繼信主)하야 교회를 수성(遂成)하니라.?

 

1898년은 예배당 건물을 마련한 시점으로 보인다. 이미 1882년 김청송이 이 곳에 와서 전도하여 이성삼․임득현 등이 믿고 개인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898년에 이르러 독자적인 예배당 건물을 마련하였다는 말이다. 이양자 교회는 의화단 사건(1900년) 때 중국인들의 방화로 예배당을 잃고 교인들이 흩어져 위기에 처했으나 그 소식을 들은 평안도 선천 선교사 휘트모어와 안승원이 교인들의 헌금을 들고 찾아가 위로하며 예배당 재건을 도왔다. 이로써 폐쇄 위기의 교회는 다시 문을 열었고 계속해서 전도인과 선교사를 집안과 남만주 일대에 파송하였으니 이것이 한국 교회의 ?만주 선교? 기원이 되었다.

 

현재는 집안에서 남쪽으로 압록강 줄기를 따라 유림 가는 길로 달리다 태평을 지나 이양자 촌에 도착한다. 100호 정도 되는 작지 않은 마을이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거기서 오른쪽 샛길로 해서 다시 10리 쯤 가니 작은 마을이 나온다.

 

현지의 전도사가 처음 이 마을에 왔던 이야기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997년 9월 집안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이양자교회에 관심을 갖고 그 흔적을 찾아 나섰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작정 이양자를 찾아가서 노인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이 곳 안마을까지 들어왔더니 85세 된 한족 노인이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교당골?에 옛날 조선족들이 살았다는 말을 하더군요.

 

?교당골?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어요.? 안마을에서 다시 10분 쯤 달리니 차는 더이상 들어갈 수 없고 길은 골짜기 따라 세 갈래로 갈라지는데 제일 왼쪽이 ?교당골?로 가는 길이다. 여름에 오더라도 길 안내가 없으면 찾아가기 어려운 산길이다. 과연 임오군란 때 망명객들이 가족을 이끌고 들어왔음직한 곳이었다. 30분 쯤 갔을 때 그 바위를 만났다.

 

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수차례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찾았지만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뜨거운 여름에 한나절 이상 고생을 한 후 결국 포기하고 내려갈 생각에 여기 개울가에 앉아 얼굴을 씻고 나서 고개를 들었는데, 그 순간 건너편 바위에 이상한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개울가 나무 덤불 사이에 2미터는 족히 될 큰 바위가 있었다.

 

바위는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었는지 사람이 그랬는지 반 정도 떨어져 나갔고 그 떨어져 나간 안쪽 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자가 선명했다. ?耶蘇敎 初立 1898 됴선人?

 

1898년 조선인 최초 교회가 설립되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기록과 일치하였다.

그걸 보는 순간 감동이 솟구쳐 올라왔다. 비록 한인촌이나 예배당 건물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만 눈 속에 자태를 숨긴 바위에서 이 골짜기를 오가며 성경을 팔았던 김청송의 숨결과 그의 안내를 받으며 세례식을 거행하기 위해 이 곳을 찾았던 존 로스 선교사의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고향을 떠나 이 곳 산골짜기까지 피난 와서 마을을 이룬 후 예수 믿고 예배당을 세우면서 그 사실을 마을 입구 바위에 새겨 훗날 이 곳을 찾을 후손들에게 헛걸음을하지 않도록 배려한 평안도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에 고개가 숙여졌다.

 

 

0.한반도의 한글성경 전파

 

(서상륜과 황해도의 솔내교회)

서상륜은 본래 만주와 조선을 오가며 인삼장수를 하던 사람이었다. 순조롭게 약재상을 하던 그가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된 것은 30세 되던 1878년이었다. 만주에서 인삼을 팔던 그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열병(장질부사)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 소식을 듣고 고향친구 몇명이 달려와 그를 현지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그곳에서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존 로스 목사(John Ross)다. 또 그곳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매킨타이어 선교사의 끈질긴 전도도 받게 된다.

 

당시 서상륜의 병세는 매우 위독했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던 존 로스 목사는 ’서상륜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죽음의 문턱까지 이른 그는 결국 병이 완치되면 예수를 믿기로 약속한다. 여러달 동안의 정성어린 치료와 간호로 완쾌되자, 그는 약속대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는다.

 

그는 당장 존 로스 선교사를 도와 성경번역에 착수했다.

1883년 그는 이렇게 완성된 성경 100권을 지니고 압록강을 넘어 국내 잠입을 시도했다. 당시 조선왕실은 기독교를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기독교가 인정된 것은 후에 의료선교사 알렌이 고종의 시의가 되고 나서부터다. 하지만 밀입국을 시도하던 서상륜은 입국 도중 관헌에 발각되고 만다. 구사일생으로 성경 10여권만을 지닌채 탈출한 그는 가족의 고향인 황해도 솔내로 피신하여 그곳에 정착했다.

 

소래에 터전을 마련한 서상륜은 곧 만주의 존 로스목사에게 연락해 성경 6,000권을 선편(船便)으로 전해 받고, 마을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에 나섰다. 얼마 안있어 20명의 세례지망자가 생 겼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들이 기도할 장소였다.

 

서상륜 형제(동생 서경조)솔내(송천松川)에서도 열심히 전도하여 얼마 안가서 58호 중 50호가 믿게되고, 1885년에는 순전히 저들의 힘으로 초가 8간의 한국 최초의 교회당을 건축였다. 이 교회야 말로 "한국프로테스탄트의 요람지"라 불리우는 한국의 최초의 교회이다.

 

그후 언더우드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이곳에 와서 세례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래교회의 시작은 산간 구석에 세워진 초라한 초가집에서 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리 관청의 눈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작은 마을이지만, 국금(國禁)에 속하는 기독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남의 눈을 피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세는 이미 바뀌어 버렸다. 기독교는 급속히 전파됐다. 고종은 마침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소래교회가 세워진 것과 비슷한 시기에 입국한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알렌(H. N. Allen)은 고종이 기독교에 대한 문호를 개방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는 조선 땅에 최초로 내한 한(1884년 4월 5일) 정식 선교사로 기록된다. 1896년 7월 25일에는 한국교회가 고종탄신 기념 경축예배를 드릴 정도였다.

 

이 무렵 소래교회의 교세는 신도가 약 80여명으로 더 큰 예배당이 필요했다. 이미 마을주민 90% 이상이 기독교인이 된 소래에서 이제 예배당 증축은 마을 전체의 문제였다. 마을 공동회가 모인 자리에서 교회건축 문제가 제기됐다. 마을 유지가 선산의 소나무를 베어 건축목재로 제공했으며, 마을 사람들도 건축위원회를 조직하고 헌금을 모았다. 이 과정에서 서상륜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한 사람이 그의 동생 서경조다. 서경조는 후에 한국 장로교 최초의 목사 7인중 한사람이 되는 인물이다.

 

소래교회 소식을 접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건축자금을 마련해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서상륜과 마을사람들이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후에 소래 교인들이 교회의 역사를 남기고자 작성했던 대구면지(大救面誌)에 당시의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무렵 언더우드 목사는 교회의 재정적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경비 일부를 부담하겠노라고 제안했다. 이 말을 들은 서상륜 형제는 지극히 고마운 일이나 우리가 우리 교회당을 세우는데 외국인의 원조를 받는다는 것은 본의에 어긋나는 일이며, 후세에 전하는 데도 명예롭지 못한 일이므로 뜻을 받아들일 수 없노라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외국인이나 어느 선교사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순수한 우리의 힘으로 세우게 된 것이다."

 

기록은 계속된다. 도움을 거절당한 언더우드는 돕고싶어도 돕지를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미국에서 큰 양등(洋燈)을 다섯개 사다가 교회에 기증하는 것’으로 달래야 했고, 소래 교인들은 ‘그가 기증한 양등을 남녀방에 각각 두 개씩 걸고, 한 개는 강대상 위에 두어 아주 밝은 등불 밑에서 밤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해서 소래교회는 마침내 1895년 7월 8일, 8칸 기와집으로 거듭나게 됐으며, 그리고 약 1년뒤, 소래교회는 다시 16칸 32평으로 증축 상량했다.

 

 

(서상륜의 서울전도와 서울지역교회의 설립)

 

동만주일대에 산재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서상륜은 1884년 존로스목사의 요청에 의해 다시 한번 국내 포교 임무를 맡았다.

당시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점이 인식되어 기독교에 대한 전도는 어느정도 묵인던 시기였다. 그래서 무사히 국내로 들어온 서상륜은 3개월간에 걸쳐 다량의 복음서를 반포하면서 본래 목적지인 서울로 향했다.

 

상경한 서상륜400여권의 복음서를 약 6개월간 반포하면서 서울에서도 열심히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그는 여러명의 개종자를 얻었고, 존 로스목사에게 '서울로 와서 세례를 원하는 13명의 친구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교회를 조직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존 로스목사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서울 방문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지자 대신 상하이와 제물포간의 기선 항로를 이용하여,1884년 봄 이성하를 시켜 다량의 번역 출판된 쪽복음서,사도행전,소책자 등을 서상륜에게 보내 주었다.

 

그는 인천세관의 고문으로 있던 뮐렌도르프(Mollendorf)의 도움을 받아 화물을 찾아 전도에 사용했다.

1885년에도 다시 편지를 보내어 세례 지원자가 79명으로 증가된 사실을 보고하며 내한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역시 존 로스목사는 서울에 오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서상륜이 서울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1884년 가을, 알렌이 입국하였고, 그 다음 해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였다. 이 때 서울에는 서상륜의 권서활동으로 이미 3백여 명신앙인이 있었으나 다만 공개되지 못하였고, 교회도 없어 정식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참으로 그의 전도 결과는 경이적이었다. 이런 폭발적인 성과를 거둔 능력의 원천은 그가 만주에서 번역 출판한 복음서에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둔다.

 

 

(새문안교회와 연동교회의 설립)

 

1887년 9월 27일은 새문안교회 설립일이다. 설립자는 언더우드이다. 그러나 새문안교회 설립과 관련된 한국교회사의 기록들은 창립예배에 모인 14명의 신자들 모두가 서상륜의 전도를 받은 자들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이 교회의 설립에 "한 알의 밀"이 되어 땀흘려 희생한 실제적인 창설자이며 공로자는 서상륜이다. 사실 어느 날 갑자기 선교사가 교회를 설립한다고 광고를 하니 14명의 교인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클락크(Charles Allen Clark, 한국명 곽안련)는 그의 교회사에서 새문안교회 창립 예배시에 만주의 존 로스목사도 참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도한 결과 1887년 9월 12일에는 서울에 있어서 최초의 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방에서 집회하였다. 이 집은 원래 어느 정승의 집으로서 현재 감리교 여선교부 숙사, 곧 그레이 하우스가 서 있는 곳인데, 안채에는 언더우드 목사가 살고 사랑채 두 칸을 터서 약 3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을 만들어 예배 처소로 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 된 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릴 때 만주 봉천에서 한국의 복음사업을 위하여 그처럼 수고를 많이 하던 존 로스 목사가 참석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처음 날 모인 신자의 수는 14명이었다. 그 다음 주일에는 한 사람이 늘어 15명이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에는 서상륜과 서경조 두 분을 장로로 택하여 안수례를 거행하였다."

 

새문안교회의 설립에서부터 주동적 역할을 하던 서상륜은 활동무대를 동대문 방면으로 옮긴다.

동대문의 연못골에는 나막신바치, 찬우물골에는 갖바치, 방아다리에는 배추장수, 두다리목에는 병졸 등 주로 양민(良人)들과 천민(賤民)들이 살았다. 이들은 모두 양반들의 착취와 억압 속에 사는 계층들이었다. 이 곳에서 서상륜은 선교사 리(Graham Lee, 한국명 이길함)와 함께 전도하여 가난하고 눌린 자들에게 영혼의 안식처를 마련해 주며 천국의 소망을 깊이 심어 주기 위하여 노력한다. 연동교회의 설립에 서상륜이 주동적 역할을 한 것으로 "1894년 1월 8일 서상륜과 이길함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서상륜의 존재는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선교사업을 펼치는 과정에서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언더우드의 경우 자신은 이곳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러 왔지만 이미 뿌려진 씨앗으로 맺어진 열매를 거두는 일을 하고 있다는 고백을 할 정도였다. 서상륜은 이 선교사들과 적극적인 협력관계를 이루어 한국교회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특히 선교사들이 안식년 등으로 귀국하게 되었을 때, 그 선교사의 빈자리는 여지없이 서상륜의 몫이었다. 따라서 1907년 한국인 목회자가 배출되기 이전까지 서상륜은 실질적인 한국교회의 한국인 목회 지도자인 셈이었다.

 

1872년 존로스목사의 중국영구항 입국을 시작으로 1874년 첫 번째 고려문 방문에서 백홍준의 아버지를 만나 한문성경을 전해주며 시작한 조선의 복음화가 1876년 조선 의주 청년동역자들의 전도로 이어져 1879년 한국인 최초의 기독교 수세자를 배출하였으며 1882년 한글성경의 탄생으로 한민족에게 생명의 말씀이 전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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