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대하여 궁금하나요?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해서 육안으로 확인하려는 심리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일찍이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신(神)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는 이스라엘백성을 위해서 신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했다.
이때, 신께서는 "나는 나다"라고만 했을 뿐, 정확한 의미를 불문에 붙였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우리가 흔히 지존지고의 신으로 알고 있는 '야훼'(야호)라는 신의 불확실한 이름이 나온다.
흔히 알고 있다는 "스스로 있는자"라는 야훼의 뜻도 실상 보이지 않는 신을 구체화 시키려는 인간의 심리에 맞춰서 억지로 해석된 뜻이다.
원래는 이'야훼'라는 단어는 그 발음과 의미까지도 현대 신학자들 간에도 그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말은 구약시대에 나타난 절대자는 불확신한 미신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모세에게 "나는 나다"라고 하신 절대자가 인류의 빛으로 오셔셔, 빛이 되신 예수 자신이 곧 야훼(나다-IAM)라고 언급 해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8:58)

이름이란 당사자의 정체성과 품성, 명예까지 떠오르게 하는 고유명사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을 나타낼때 "I AM 진리,길,생명,빛"이라 하시면서,
그 동안 인간의 언어로 정확히 포착되거나 표상될 수 없었던 구약의 신, 모세에게 미신적으로 나타났던 전쟁의 신 여호와 예수자신을 평화의 왕으로 제자들에게 직접 생활로 소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는 예수가 처음 기독교를 설립 할때의 이념과는 엄청나게 달라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유일신 신앙이라는 기독교 유태교, 이슬람교와 같은 세계의 고등 종교로 갈 수록 많이 나타나는 독선적인 요소를 지적하려고 한다.

이런 유일신 신앙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작은 붓대롱이나 교회 유리창 너머로 하늘을 보고는,
자기가 본 하늘이 하늘의 전부라고 여기는 독선에 빠지는 미신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교회 유리창 너머로만 보아온 기독교인 자신의 미신적이고 독선적인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을 까?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모세가 들은 응답 즉, "I AM THAT I AM "라는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한 이름에 예수의 새계명을 깊이 연관시켜보는 일이라 생각한다.

흔히 유일신 신앙의 온갖 종교적 편견과 우월의식에 사로잡혀서 배타주의로 흐른 기독교는 예수를 주로 믿는 다고 입으로는 시인하고 있지만 새계명의 진정한 뜻을 모르고 있다.

예수가 제시한 새계명의 정신은 포용주의이며, 세계동포주의이고, 인본주의이다. 단언하건데, 이것이 현재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아이러컬하게도 현재 기독교의 보수주의, 근본주의, 신본주의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아연 실색하게 한다.

하나의 예로 포용주의를 무분별한 혼합주의로 터부시 한다. 인본주의를 무신론으로 매도 한다. 세계동포주의를 특정 종교의 에큐메니컬운동(교회일치운동)의 구호로만 일축해 버린다.

요한복음에 나온 새계명의 정신은 예수의 절대적 가치를 무작정 포기하자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유일신처럼,유일하게 하게 미치는 절대적인 가치인 예수의 희생과 부활을 이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증언하자는 취지에서 사도 요한이 재차 강조하여 여러 서신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런 새계명의 취지를 알 때, 지금껏 서구 신학의 울타리에 주로 안주해 온 미신적인 삼위일체/여호와 성부설의 신학담론에서 벗어나, 예수의 희생과 부활을 우리 겨레가 갖고 있는 "우리"라는 포용주의에까지 확장시켜, 사회 통합과 남북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 줄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민족의 구원이며 개인의 구원이라고 본다.

인류의 구원자라는 예수는 과연 어떤 분인가 ?
후대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신화인가?
이 세상에는 후대가 만들어 놓은 수 많은 신화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과학적인 이야기라도 미래/미지의 세계에 괸해서는 신화처럼 상상에 의한 허구들이다.

한 마디로 모든 인생은 미래의 허구와 과거의 신화속에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수많은 허구와 신화 속에서 무엇을 진실로 믿고 살것인가?

내자신을 비롯한 모든 인간의 이기심을 떠나서 생각해 보자.
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내린 결론은 "신은 사랑이다"라는 간단한 정의에서 부터 설명하겠습니다.
물론 부처도 대자대비를 주창하셨고, 단군도 홍익인간을 주장하셨다.

문제는 부처도 죽고 단군도 죽었다. 물론 예수도 죽었다는 사실 만큼은 모든 자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 만큼은 인간이 꾸며 놓지 않더라도 인정하는 이유는 결국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믿고 있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삶과 죽음을 이해하려면 현재 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부터 나온 것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데 무슨 탄생이 있고 죽음이 있단 말인가?

일찍이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 조차 부정한 토대위에 사색하다 내린 결론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 미친놈(?)의 수학자가 기꺼 해봐야 내린 결론이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신약성서에는 생각하는 갈대 인간의 생노병사의 삶에서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신의 독생자 예수로 잘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평화를 주러 온 줄 생각하자 말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시면서 독자이삭은 제단에서 죽지 않했지만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는다.

이러한 십자가 형장에서 덧없이 죽은 예수의 근본사상은 무엇인가?
예수는 "검을 주러 왔다"고도 말씀하시고, "율법을 폐하러 온 줄 생각하자 말라 완성하러 왔다"고도 말씀하셨다.
이 두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또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는 무슨의미이며, " 이 성전을 헐물라 내가 삼일만에 다시 짓겠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가나안 정복때 남여노소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이라 명하신 전쟁의 군신 여호와는 도대체 누구이며, 예수의 의(죽음과 부활)로 만민을 살리는 예수의 아버지, 평화의 신은 예수와 어떤 관계가 있을 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보목 정신을 율법으로 명문화한 구약성경의 의도하는 바는 무엇이며,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까지 돌려대라"는 무저항정신을 새계명으로 서슬한 신약성서의 최종 목적은 무엇인가?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신약과 구약, 새계명과 십계명의 관계이다.
이 두 관계에 대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주신 두 손, 누구나 갖고 있는 손/발로 깨달음을 얻어 보았다.

오른손은 주체와 실체 역할이고, 왼손은 보조와 그림자 역할로 성서에 나타난 전쟁과 평화의 관계를 풀어가려고 합니다.

전쟁과 평화, 죽음과 부활의 중심에 서 있는 예수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고난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의 근본 사상에 대해서는 열사람이면 열사람 다 십계명에 있는 신본주의라 생각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예수는 현재 기독교인들처럼 신본주의자였을까?
신본주의자들은 십중팔구 이기적인 작자들이다. 한 마디로 절대자를 이용하여 탐욕을 부리는 자들이다.

이 탐욕은 영생이든 교회헌금이든 이기심은 탐심이다.

예수도 한 때 전생(前生)에서는 분명히 시기하는 유일신이셨다.
구약성서에 있는 전쟁의 신 만군의 주였다는 뜻이다.
이런 군신예수가 죽고 부활할때는 평화의 사도 평강의 신,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나타나셨다.

이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예수는 인류에게 자신과 하나가 된 "우리 아빠"를 평화의 신, 구원의 신,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어필하려고 보니, 자신의 신분이 전쟁의 신이라는 불명예가 있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이러한 예수의 고민과 딜레마는 예수가 신본주의자가 아니고 인본주의자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오래 동안 오직 성경만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고 살았던 나로써는 다음과 같은 고민과 딜레마가 있었다.
지금까지 줄곧 믿었던 여호와 하나님은 만군의 주라는 표현 그대로 두렵고 강한 戰爭의 神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알게 된 신약의 평화의 신, 예수의 아버지와는 너무 다른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구약의 신은 전쟁광이었고, 신약의 신은 평화애호자였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속성 사이에 내 자신이 헷갈리고 고민 한적이 있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토로 안할 수 없다.
구체적으로 "십계명을 지키라" 하는 만군의 주예수와 "새계명을 지키라"하는 평화의 주예수 사이에 있는 엄청나게 깊은 심연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었다.

구약에 나타난 신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신으로 이방인들에게는 미움의 신, 저주의 신인데, 신약성경에 나타난 신은 자신의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인류를 사랑한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신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예전 구약시대에 만군의 주예수의 행적인 전쟁 명령에 대해서 변호해 보려고도 생각해 보았다.
과연 예수가 가나안 족속을 씨말리라는 살인 명령을 진정으로 하지는 안했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실상은 만군의 주예수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는 군신(軍神)으로 비춰질 만큼, 사랑의 본질을 완전히 숨기시고 미움의 神[신9;28]이었다.
이러한 불명예를 예수는 과연 어떻게 완전히 씻어 낼 수 있었을까?

아무리 만군의 주예수가 자신의 생부를 새로운 신으로 인류에게 소개한다하더라도 예수는 어디까지나 새로운 신의 아들인데, 그 아들을 보고 그 아버지를 판단하지 않겠느냐 하는 소박한 생각에서 나온 갈등이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내안에는 깊은 심연이 한 동안 짓눌러 있었다.
내 자신이 이런데, 당사자 예수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고민 거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고민에서부터 놀라운 깨달음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쟁의 신여호와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기로 작정했으며, 자신의 죽음으로 전쟁의 신이라는 오명을 말끔히 씻었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십자가 형틀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구약 시대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까지 모두 포함한 둘째사망이라는 깨달음이다.
사람도 죽으면 법적으로도 지난 행적에 대해서 어떻게 할 수 없듯이, 예수의 죽음으로 전쟁의 신이라는 오명을 말끔히 씻었던 것이다.
게다가 예수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영원한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의를 달거나 불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난 구약시대에 있었던 전쟁의 희생자들도 이제는 만군의 주 예수에 대해서 섭섭해 하지 않을 거라하는 역지사지의 소박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내마음 깊은 심연에서 도사리는 불가지론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고, 나의 모든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그래서 지금은 예전과는 달리, 예수의 이름으로 전쟁에서 죽은 자들의 넋에 대해서 심심한 애도를 표할 수 있게 되었고, 언젠가는 저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반드시 구원 받는다는 만민 구월 예정설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만민구원 계획이 있었기에 예수는 기꺼이 십자가 희생을 감내하여 둘째사망을 기꺼이 당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마음을 보시고, 예수의 아버지께서는 기뻐하셨고, 죽은 전쟁의 신예수를 "평화의 주, 평강의 신,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살리심으로 예수를 온 인류의 구세주로 만들어 영화롭게 하셨던 것이다.

예전에는 구약의 유일신이라 하면 실제로 구약백성들에게도 죽음의 신으로 보았기에[신9;28]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불러내어 죽게 하는도다"라고 원망했다.
하지만 지금에는 반기독교는 있어도 아무도 주예수를 험담하거나 원망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날을 위해서 예수는 예전 자신이 직접 만들고 모세에게 전해준 십계명과 그외 율법들의 원래 목적이 영원한 저주가 아니라,
영원한 축복을 주기 위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 율법의 완성이라는 마침표 도장을 찍어야 했던 것이 곧 대속죽음이었습니다.

대속이란 여호와 자신이 사람이 되어 인류를 대신하여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대속죽음이 있기전에도, 십자가형틀에서 죽기 전에도 죽은지 나흘? 나사로를 살리셨고,
병자,창녀.죄인.세리,마귀들린자들을 고쳐주셨고 또 우리와 함께하는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영생(영원한 생명)를 포기한 것이다.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란 귀절에는 예수의 만인구원 사명을 ?을 수 있고, 안식일을 어겨가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하셨고 또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13;1

이러한 예수의 언행과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이었습니다.

이러한 새계명을 주신 주예수는 우리의 선생이며, 우리의 맏형님이고, 우리의 아버지로써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구약시대처럼 신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먼저 사랑하는 인본주의를 가르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인간사랑이 예전 구약시대의 전쟁행적을 모두 대속 하게 된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예수의 사명감에서 나온 말이 "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이다.
예수가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이다.
이러한 세계명은 석가의 자비 정신과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과도 그맥을 같이 합니다.

이러한 새계명을 말씀하신 예수의 정신에 비추어 석가의 고행이나 단군의 100일간 탄생과정을 본다면 석가 역시 인도전통사상에서 비롯된 해탈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고,
단군 역시 우리나라의 전통사상(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성인군자들은 그 출생에서 예수만큼은 비천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예수의 태생은 인간적으로 가장 비천한 애비없는 고아였습니다.
아무리 석가나 단군의 고행과 고된 수련기간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만큼은 일생을 두고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고민과 수모를 당하지는 안했으리라 봅니다.

쉽게 말해서 누구는 애비 잘 만나서 행복에 겨워 출가하였고, 누구는 한가하게 산에나가서 호랑이 사냥이나 하고 곰사냥이나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냉철한 시각으로 본다면 예수는 이 세상 어느 사람보다도 가장 밑바닥 인생에서 인본주의 "도"를 깨우친 겁니다.
그것도 철저한 신본주의 유태사회에서 말입니다.
예수의 도는 "창세전에 감추어진" 자신과 예수의 아버지에 대한 "도"였습니다.

예수가 깨달은 도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빠"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류가 섬겨야 할 신은 군주도 아니고, 입법자(재판관)도 아니고, 여호와도 아니고, 하느님도, 부처도 아니고, 개신교에서 믿는 하나님도 아니라는 겁니다.

석가나 단군 역시 나약한 아비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약한 아비의 후손인 석가나 단군 역시 그 혈통에는 범죄한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석가나 단군도 옛사상과 옛생활을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자! 이제는 모든 이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가 나왔습니다.
우리주 예수는 석가나 단군 보고도 어린 자녀에게 하듯이 현재의 생활은 지옥같은 생활이니 생각을 바꾸어라 할 것입니다. 즉 회개하라 할 것이다.

여기서 더, 예수는 자신의 생부 즉 "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의 실체를 몸소 깨달았기 때문에 예수가 깨달은 "하늘에 계신 인류의 아버지"를 석가에게 소개 하였을 것이라는 겁니다.

석가는 자신의 고정관념과 자신의 생명까지 남을 위해서 모두 버렸다고는 하지만 그 생명은 무(無)와 공(空)으로 돌아가는 생명이었으니 생명을 준 것이 아니라 생명을 버린 것에 그친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생명버림은 예수가 갖고 있었던 스스로 있는자의 영원한 생명을 인류에게 준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한 예수의 생명이 석가의 생명과는 다르다는 증거는 곧 예수의 육적인 애비없음이 이를 역설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의 생명은 창세전부터 "하늘에 계신 인류의 아버지"의 품속에 있었던 영원한 생명이어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자신밖에는 아무도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예수자신이 직접 증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있는 자(I AM)예수는 "I AM 길이요, 진리요, 생명, 빛이요, 말씀이라" 고 선언하신 겁니다.
이러한 예수의 깨달음에 대해서 예수의 제자들도 하나 같이 같은 증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는 자신이 갖고 있던 "여호와"의 신분을 버리고 인간이 되신 분이며, 인류의 죄를 대신한 고행(십자가의 고난)을 하셨고, 자신의 영원자존하는 생명과 영멸하는 인류의 생명을 서로 맞바꾸신 것입니다. 이것이 석가의 자비와 예수의 박애가 서로 다른 차이점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고행(죽음)이 있었기에 예수의 생부"아빠"께서 예수를 평화의 주로 부활 시킨것이다.

예수의 成肉身에 의해 나타난 평화의 신아빠는 인류의 아버지가 되셔서, 예수를 모르고 죽은 석가나 우리의 조상 단군, 더 나아가 악인들을 위해서도 사후에는 심판의 부활로 또 다른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다시 이 심판의 부활을 새계명으로 재해석하겠습니다.
악인을 부활시킨 예수의 아빠 아버지께서는 그 어떤 악인일지라도 다시 살려 놓고 두번 죽이는, 무자비한 신이 아니라 재교육으로 영생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부활시킨신 분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신이 곧 예수가 우리에게 소개한 "자유의 신이고, 공의(公義)의 신이고 사랑의 신"이라는 겁니다.

만약 이러한 만민구원이 아닌 선택적 구원이라면 신약성서에는 "생명의 부활"과 상대적이고 이분법적인 헬라언어로 "사망의 부활"이라는 표현을 했을 것인데, 심판의 부활이라고만 업급한 것으로 보아 또 다른 기회의 여지를 주는 해석으로 보고 있습니다.

심판을 받아 보아야 유/무죄가 판가름되기 때문입니다. (계20:14)

이러한 사후 심판에서 일어나는 "심판의 부활"의 전형적인 모델케이스는 AD70년에 일어난 신본주의 유태인들의 멸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태인들은 일찍이, 인본주의를 주창하는 예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고정관념인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생각이 바뀌지 않아(회개하지 않아), 고정관념에 그대로 경직되어 있었던 생활을 일차적으로 현 세상에서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유태인에게 일차적으로 내린 민족적인 심판 곧 AD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은 사후 악인들의 심판을 예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유태인들이 받은 심판은 말그대로 " 지옥"(죡)같은 곳에 떨어진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저들도 사후 심판의 부활때(재심판할 때)는 말그대로 "작다"는 뜻을 나타내는 둘째 사망(계20:14)에 들어가는 개인적인 심판이 있다고 성서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째 사망은 곧 예수의 죽음이었다는 결론에서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사망을 당하신 예수의 죽음과 첫째 부활에 의해서 모든 사람 심지어는 마귀까지 재교육(심판)을 받아서, "죽음과 지옥" 없어져서 모두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우리 하늘아버지"의 최종적인 뜻이라는 결론입니다.
이것이 예수가 둘째아담이 되고 새벽별(루시퍼:원래는 마귀의 이름)이 된 뜻입니다.

쉽게 예를 든다면 내집 40평원룸은 확트인 공간이다. 이 공간안에 쓰레기만 널려 있어도 신경이 쓰이고, 내 자녀가 아파서 신음을 하면 애처롭다.
아물며 하늘아버지께서 우주 어느 공간에 무간지옥이나 아비지옥을 만들어 놓아서 영원히 고통받는 소리를 들으며 살겠는가? 사실 이 모든 이야기는 신화에 불과하다.

설령 성경에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가 있다 손 치더라도 좋은 목적에서, 잠시동안 허구(비유로)로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마치 자녀에게 사랑의 매를 드는 것 처럼. 성경에 자주 나오는 "영원"이라는표현은 강조하는 말이다. 예로 "영원히 꺼지지않는 불" "영원히 죽는다."라는 표현은 심판을 강조하는 상징어이다.

이러한 논리와 발상의 전환으로, 자비를 주장한 석가의 사후를 본 다면 심판의 부활때는 재교육(재심판)받는 기간이 아주 짧은 순간(?)이 될 것으로 본다.
쉽게 말하여 석가는 육신의 애비로부터 물려받은 고정관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버렸고, 예수처럼 인본주의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석가는 자신의 죄를 뉘우쳐서 예수을 쉽게 받아들여 구세주로 믿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평하게 신의 경륜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예수가 말한 영생이다.
따라서 영생은 곧 예수의 "아버지"와 그의 보내신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로 믿는 것이다.

이렇게 사후에도 구원의 계획은 취소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신의 정의가 되지 않겠는가?
이 말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생명 그 자체는 이미 모두 구원 받기로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만민구원 예정으로 보다면 이미 돌아가신 조상들이나 뱃속에서 죽은 아기들이나 심지어는 악인과 악한 천사까지도, 모두 구원받게 되는 능력이 곧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이며 놀라운 신의 역사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성서 최종장 22장 2절에 나온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이 곧 예수이며 예수는 구세주라는 결론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지금까지의 긴 설명이 곧 "신은 사랑이다"라는 정의에서 출발하여, 이 사랑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 신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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