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장례문화

 

장례 방법이 과연 부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흔히 매장(토장) 외 화장이나 수장 조장 풍장 등의 장법에 의해 치러진 죽은 자는 마지막 때 부활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런 생각은 에스겔이 계곡에서 본 환상(겔 37:1∼10)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에스겔은 계곡에서 뼈들이 가득 차 있는 환상을 본다. 그 뼈들은 바짝 말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살아난다. 뼈에 힘줄이 붙고 그 위에 살이 입혀지고 살갗이 덮인다. 그런 후 숨을 불어넣으니 마른 뼈들이 살아난다는 에스겔의 환상이 그것이다.

각 장법에 따른 시신 분해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의 장법에 집착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고정관념’인가를 알 수 있다. 먼저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매장의 경우 시신 분해 과정은 그야말로 생태계의 순환 과정 그 자체다.

생화학에 따르면 인체를 구성하는 원소는 일반적으로 25종에 달한다. 여기에 미량원소가 대략 22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인체를 구성하는 전체 원소는 47종에 이른다. 구성 원소 수는 인체 뿐 아니라 모든 생물체도 비슷하다. 흙의 원소는 지역과 토질에 따라 약간의 편차를 나타내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미량 원소까지 합해 총 86종에 이른다.


육체가 땅에 매장된 후에는 사람 몸속에 있던 다양한 미생물과 흙속에 있는 미생물에 의해 보다 단순한 구조의 물질로 분해된다. 시신 속의 탄수화물과 지방은 탄소 산소 수소 등 원소로 구성됐기 때문에 그 세 가지로 돌아가고 단백질은 질소가 하나 더 추가돼 있어 4가지 원소로 분해된다. 뼈를 제외한 살과 내장 등은 주변 흙의 성분과 수분의 정도 등에 다소 차이는 있으나 7∼15년이면 통상 육탈이 끝난다.

뼈와 같이 단단한 부분은 쉽게 분해되지 않지만 이것도 5세기를 넘기기 힘들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아무튼 분해된 물질 중 일부는 지하수에 의해 다른 곳으로 이동되고 다른 일부는 풍화작용에 의해 옮겨진다. 또 일부는 주변에서 자라는 나무나 풀과 같은 식물에 의해 흡수된다. 지하수에 운반된 물질은 강과 바다로 이동돼 수증기로 비나 눈으로 바뀌어 지구 곳곳으로 옮겨진다. 풍화작용으로 옮겨진 물질 또한 바람을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 시신의 일부를 흡수한 식물도 수명을 다하면 흙과 공기, 물 등으로 흩어지지만 결국 흙으로 모이게 된다.

육체를 구성하는 47종의 원소는 ‘생태계 순환 궤적’을 따라 다시 흙을 구성하는 86종의 원소 중 일부로 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성서 기자는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다고 기술하고 있다(창 2:7).

화장의 경우도 분해 과정을 거쳐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매장과 다를 바 없다. 일반적으로 화장은 섭씨 700∼800도의 고열로 시신을 태우는 것으로 이때 열에너지에 의해 시신은 산화된다. 이 과정에서 근육이나 내장, 피부 등은 이산화탄소와 수증기 등의 기체로 바뀌어 대기 속으로 날아가 버린다. 이렇게 흩어진 성분 중 일부는 대기를 떠돌다가 비가 내릴 때 빗물에 섞여 땅에 스며들기도 하고 또 다른 일부는 식물의 광합성 과정에서 흡수되기도 한다. 땅에 스며든 성분이나 식물에 흡수된 원소도 매장 때 이뤄졌던 생태 사이클에 의해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기체로 바뀌지 않은 단단한 뼈는 가루로 만들어진 후 납골당에 안치되거나 산, 혹은 강물에 뿌려지지만 이 또한 일정 시간이 흐르면 그 원소들의 종착역은 흙일 수밖에 없다. 조장이나 풍장, 수장 역시 이같은 생태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생태학자들의 견해다.

만약 에스겔의 환상에 집착해 뼈가 있어야만 부활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동안 화형에 처해진 순교자나 뼈가 분해돼 흙으로 돌아가버린 조상들의 부활 문제에 대해서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 때 어느 형태로 부활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신학자들에 따라 다소 견해가 다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차원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막 16:12∼13).

부활을 시사하는 사례는 신약에 종종 등장한다. 무덤에서 죽은지 나흘이 된 마르다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예수의 부름을 받고 살아난 사건(요 11:44), 병들어 다락방에서 죽은 다비다(도르가)가 베드로의 부름을 받고 살아난 사건(행 9:40),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이 예수의 부름으로 일어난 사건(눅 7:15) 등이 그것이다. 이는 호흡, 신진 및 물질대사, 종족 번식과 개체 유지를 위한 생식 등의 생명현상이 멈춰버렸으나 다시 작동된 사건이다. 현대과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사건으로 부활의 문제에 총체적으로 접근하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견해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과 ‘종말론적 부활’과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전자는 생명현상의 재작동으로 해석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예수와 함께 지금과 다른 차원의 영생을 뜻한다.

성도의 부활에 대한 모델은 역시 예수의 부활에서 찾을 수 있다. 의심 많은 도마 이야기는 이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준다.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도마는 예수가 부활했던 모습을 불행하게도 처음에는 목격하지 못했다(요 20:24). 이 과정에서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부활한 예수를 봤다고 주장한 것이다(요 20:25). 그러잖아도 의심이 많았던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맞받아쳤다.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이렇게 말하고 여드레가 지난 후 제자들은 다시 집에 모였다. 당시 집의 문은 굳게 닫힌 상태였다. 그런데 부활한 예수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도마에게 말한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7,눅 24:39∼40)밎 의심 많은 자의 대명사였던 도마의 고백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 그러자 예수는 도마에게 일침을 가한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는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 20:29)

문이 닫힌 상태에서 나타난 것은 시공을 초월했다는 의미다. 부활한 예수는 우리가 인식하는 3차원 공간에서 중력을 받으면서
이동한 것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예수와 함께 새로운 생명을 얻는 영적 의미로 다차원적 이해가 필요한 육체적 부활을 성서는 강조하고 있다(요 20:19·26,고전 15:42).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논쟁이나 이해 부족은 초대교회 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그들은 어떤 몸으로 나오게 되느냐”(고전 15:35)고 묻는 질문에 바울의 첫 대답은 “어리석은 자여”(고전 15:36)라고 꼬집는다. 그러면서 부활에 대한 바울의 결론은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고 변화되리라”(고전 15:52)는 것이었다.

부활의 영역은 분명 신비다. 하지만 장법이 부활에 영향을 미칠 것이란 막연한 생각은 적어도 쓸데없는 기우임에 틀림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도움말 주신 분 △김영호 연구원(한국표준과학연구원) △김문기 교수(평택대 신학과)

△박두환 교수(나사렛대 신학과) △박종수 교수(강남대 신학과)

국민일보/남병곤 편집위원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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