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철학의 도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 장인수 박사(D.Min., Ph.D.) >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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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꼽틱교회 설립자 마가 기념교회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설립자는 요한 마가(John Mark)로 알려져 있어”

 

무역도시 두로(Tyre)를 철저하게 파괴한 후 이집트로 향한 알렉산더는 이집트 해안지역의 한 장소를 지정하고 앞으로 새로운 철학과 문화의 꽃을 피울 교육도시를 세운다. 그리고 그 이름을 알렉산드리아라고 불렀다. 그후 이 도시는 그리스적 성격이 무척 강하지만 이집트의 최고 지식의 요람이 되었다.

 

당시 이 도시의 아름다운 수많은 건축물 중 하나가 도서관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2세 필라델푸스(Ptolemyos philadelphus, 285-246 BC)가 완공한 도서관으로 알렉산더 대왕의 문화의 도시를 세운다는 통치이념을 실천에 옮긴 건물이 알렉산더 도서관(Bibliotheca Alexandrina)이었다. 인쇄기가 없었던 시대의 문학, 역사, 지리, 수학 천문, 의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양피지(羊皮紙) 두루마리 책 70만권의 장서를 갖추고 있었다. 마네토(Manetho, 305-246 BC)가 쓴 36권의 “이집트 역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주전 200년에서 주후 300년까지 이 도시가 그리스 세계의 지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이곳 알렉산드리아는 세상의 어떤 도시보다도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70인역(LXX)이 이곳에서 번역된 이유도 그러한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이 도서관 이름은 무세이온(Mouseion)으로 불렸는데 이 말은 그리스어로 지식의 전당이라는 뜻으로 박물관(Museum)의 어원(語原)이 되었다. 그리고 유명한 학자 지식인 중에는 수학자 유클리드(Eukleides), 질량불변의 법칙 이론으로 유명한 알키메데스(Anchimedes), 유명한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 등 당대의 최고 지성인들이 활동하였던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은 헬라적 사고 방식을 가진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의 종교적 삶에 대한 가치관은 헬라적 사상과 생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특별히 로마와 카르다고처럼 이곳 알렉산드리아 기독교는 언제 시작되었는지 아직까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집트의 기독교, 특별히 알렉산드리아 기독교는 철학적 이데아(Idea)를 기초로 하여 교리적 체계를 세운 바실리데스(Basilides)와 발렌티누스(Valentinus)같은 이들은 영지주의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이곳 알렉산드리아 출신들이었다.

 

알렉산드리아 기독교에 대하여 처음으로 접할 수 있는 자료는 주후 180년경에 나타난다. 그러나 오래된 전승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설립자는 요한 마가(John Mark)로 알려져 있다.

 

요한 마가는 AD 64년 전후해서 사도 베드로가 순교한 이후 로마를 떠난다. 그후 베니스 근처에 있는 아퀼리아에서 2년을 보내며 복음을 전하다가 알렉산드리아에 이르렀다.

 

AD 68년 세라피스 축제일은 마침 부활주일과 같은 날이었다. 그날 요한 마가는 바우칼리스라는 곳에서 주일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이때 성난 폭도들은 마가를 체포하여 길거리에 끌고 다니며 채찍을 가하고 감옥에 가두며 모진 고문을 가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요한 마가는 순교하였다. 그후 마가의 시신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비밀리에 장사되었다(C.H.B.Swete. The Gaspel According to St.Mark(1998) pp.ix-xxxiii. Refutation of All Heresies VII.30).

 

주후 70년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봉기는 티도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후 73년경에 살아남은 반란 주모자들인 급진주의 계열의 열심당들은 알렉산드리아로 피신하였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대한 항전을 계속하게 하였다. 그러자 유대 자치기구인 원로회의는 이 사태를 막기 위하여 600명의 열심당들을 감금시켰다. 그때 나머지 열심당들은 상이집트로 도피햇다. 한편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는 유대 그리스도인과의 갈등이 싹트게 된다.

 

유대 반란을 진압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Vespasianus, AD 69-79)는 팔레스타인 안에서 다윗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인물들을 무조건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P.Eusebius. The Ecclesiastical History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엄성옥 역, 서울:은성(1990) 152).

 

세월이 흐른 후 콘스탄투누스 대제(Constantinus Ⅰ, AD 324-337)에 의한 기독교 공인이 비로소 AD 313년에 내려졌다. 오랜 박해가 종말을 고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공인을 받자 박해에서 해방이라는 기쁨보다도 분열이라는 또 다른 아픔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을 막기 위하여 황제는 AD 325년 니케아에서 종교회를 소집하여 삼위일체의 세 위격(位格)은 동일하다고 고백하고 동시에 세 위격이 한분이신 하나님을 고백한다고 선언하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이었던 아리우스(Arius)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2위되심을 부인하고, 성자는 하나님의 첫 번째 피조물로 보았다. 그러한 그의 주장은 단죄를 받았다. 이후 451년 칼케톤 공의회와 449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단성론(Monophysite)자인 아리우스파와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역시 정죄를 받았다.

 

또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알렉산더 대왕에게 하사한 수사학(Rhetorica ad Alexandrum)이라는 웅변지침서를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과 그 목록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리케이온 컬렉션의 자연철학 목록도 있었다. 심지어 페르시아의 죠로아스트교에 관한 서적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며 새로운 의술서적인 히포크라테스 의학서적도 목록 속에 있었다고 한다. 신비적 밀의 종교(mystery religion)도 유행하였는데 미트라교와 같은 것들이었다.

 

기원전 4세기에서 1세기 사이에는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철학이 대세를 이루었지만 다양한 학문을 탐구 수집하였는데 철학, 수학, 신학, 문헌학 등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의 진정한 보편적 가치(university)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정서 속에 후일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트는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율법이 히브리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듯이 철학은 그리스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교사(Schoolmaster)이다. 따라서 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함을 향한 길을 열어주는 하나의 준비이다.”

 

이렇게 언급한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위대한 교부 클레멘트(Clement)와 오리겐(Origen)은 보이지 않는 플라톤 주의자 들이었다(Gonzalalez.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Nashville(1970) 3vols. 194).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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