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감리교 민족운동가 열사 애국열사 (윤춘병)  
 
1. 충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준


이준열사는 1859년 1월 21일(음력,1858년 12월 28일) 함남 북청군 속후면 용전리 발열동에서 이병관과 청주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준의 18대주인 완풍대군 이원계공은 이씨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의 형이며 환조대왕의 맏아들로서 남에서는 왜군을 무찌르고 북에서는 홍건적을 쳐부순 공으로 벼슬이 영상에 이른 고려 말년의 공신이었다.

 

그러나 나라는 기울어져 가고 국민의 마음은 동생 성계에게로 쏠리게 되자 형인 완풍대군은 난처했다.동생 성계를 따르자니 지금까지 충성해온 고려조에는 역적이 될 것이요,고려왕의 편을 들자니 나라는 이미 기울어져 소용이 없었다.

생각다 못한 완풍대군은,
삼한 조국에 내 몸둘 곳 어디메뇨
지하에나 가서 형제들과 놀아나 볼가.
같은 곳에서 법이 다르다 마오
바다에 떼 띄우기는 싫어하노라

라는 시를 써놓고 음독 자살해 끝을 맺고 말았다.

 

한편 준의 어릴 때 이름은 성재(性在)라 했다.

조부와 부친이 지어준 이름이다.성(性)자는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뜻이요.재(在)자는 인간이란 그 하늘의 뜻을 따름에 있다는 뜻이다. 세 살때 부모를 잃은 준은 젊은 시절에 자신의 이름을 준(儁)으로 고치고 호는 일성(一醒)이라 했다. 준은 세상에 널리 빛난다는 뜻이요 일성은 세상을 한번 깨우친다는 뜻이었다. 대의를 위해서는 생명도 초개같이 여기는 선조의 숭교ㅗ한 정신이 조부와 부친을 통해 준의 혈맥 속에도 맥맥히 흐르고 있었다.게다가 젊은 날에 기독교에 들어와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희생한 그리스도의 뜻을 배웠으니 유럽의 한복판인 화란의 수도 헤이그에서 모인 만국 평화회의 석상에서 자기를 희생시켜 조국의 참 뜻을 세계에 보여 주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어린 준은 할아버지 이명섭과 작은 아버지 이병하밑에서 자라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2세에는 사서삼경에 이르렀다. 17세시에는 큰뜻을 품고 서울에 올라가 대원군을 비롯하여 형조판서 김병시등과 교제하다 일단 고향 북청으로 귀환했다.

1887년 29세 함경도시에 장원한 후 함경감사 조병식과 협의하여 경학원을 설립하고 인재를 양성하는데 주력했다.


2. 학문 연구와 구국운동 병행


1889년 다시 상경한 준은 김병시의 중매로 당시 이화학당 출신인 이일정양과 결혼했다.

준의 나이 35세였고 아내의 나이 17세였다. 비록 부부의 나이 차이가 좀 심하다고 할 수 있으나 피차의 정신은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뜨거운 애국심에 불타고 있어서 부부라기보다 동지적 결합이라는 것이 타당했다. 그러므로 일정은 생활이 곤란할 때에는 국책보상 부인회를 조직한 후 부인들의 반지를 빼서 바치는 탈환회 또는 찬거리 값을 절약하여 내는 감선회등을 조직,활동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가두 시위대에 뛰어들어 구국을 외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이준을 남편이라기보다 민족운동의 동지요 구국대열의 같은 투사로서 피차 협조하고 의지하는데 더 큰 의의가 있었던 것이다.

 

때는 1894년 전봉준의 난으로 정부에서 청을 끌어들이자 일본은 자진해 출병하여 한국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준은 김병시의 권고도 있고 또 시국 대세도 관망할겸 일단 함흥에 있는 선릉참봉의 벼슬을 맡아 가지고 하향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준은 박영호 서광범 등 개화당 인사의 권고로 상경하여 법관양성소에 들어가 6개월만에 졸업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에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취임했다. 그러나 고관의 비행을 탄핵한 죄로 1개월만에 면관이 되고 말았다.

당시 서울 정동에서는 새로운 구국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895년 미국에서 나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집에 묵으면서 배재학당에서 정치학 강의를 맡고있는 서재필 박사가 윤치호 남궁억 전덕기 이상재 등과 합하여 독립회를 조직한 후 중국 사신을 맞아들이는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고 중국을 사모하는 모화관을 개조하여 독립관으로 만들었으며 한국 민족에게 민주주의 사상을 깨우쳐 주기 위해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있었다. 준은 독립협회의 정신과 하는 일이 진정 구국의 길로 믿어 즉시 가입한 후 평의장으로 맹활약을 했다.

 

마침 그때 중국을 물리친 일본 군인들은 자기들의 생각에 거슬린다 하여 왕비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데 왕비 살해사건이 친일 내각에 뛰어들어 총리대신 김홍집,탁지부 대신 어윤중,농상공부대신 정병화 등이 살해당할 때 이들 각료들과 교계가 있던 준도 신변의 위험을 느껴 법무대신 장박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런데 그는 망명중에서도 와세다대학 법학부에 입학,1898년 졸업을 하자 마침 본국에서도 준의 체포령이 해재되었다.


3. 준의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구국운동


준은 귀국하는 즉시 다시 독립협회에서 일하는 한편 상동감리교회의 청년회장직을 맡아 청년운동에도 힘을 썼다. 준이 기독교회에 입교한 때는 알 수 없다. 다만 이화를 졸업하고 교회에 다니던 이일정과 1893년 결혼했으니 준도 그때부터 교회에 나오지 아니했을까.그때가 아니면 독립협회에 가입한후 신자였던 서재필 윤치호 등의 영향과 특히 상동교회 속장으로서 독립협회 총무 일을 보던 전덕기와 사귀면서부터 교회에 다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전덕기는 1894년 스크랜톤 의사의 권고로 신자가 되었고 1898년 그에게 세례를 받았으며,1901년에는 권사가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미감리교회 선교회에서 정식 직첩을 받고 상동교회 담임 전도사가 된 일꾼이었다. 전덕기는 준과 같은 유능한 일꾼을 교회로 인도한 후 독립협회의 구국운동과 을사보호조약 무효 투쟁을 거쳐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할 때까지 더불어 손을 잡고 계속 구국운동에 힘을 쓴 동지였던 것이다.

 

더욱 독립협회 해산시에 체포되었다. 석방된 이준은 1902년 민영환 이상재 등과는 개혁당을,1904년 송수만 심상훈 등과는 대한보안회(도총무)와 대한협동회,대한적십자,그리고 친일파의 일진회와 대항하기 위해서는 공진회(회장)등을 각각 조직하여 탐관오리를 규탄하며 항일 구국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황주 철도로 유배되어 6개월간 정배를 살기도 했다.

 

한편 준은 이 정배 생활에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중에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진실한 신앙에 몰입하게 되었다. 이준의 신앙에 관하여 이선준은 그의 저서[일성 이준열사]에서.

[그리고 일찌기 신앙을 가졌던 기독교에 대하여 더욱 굳은 신앙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치 생활의 구급피난소로 첫 출발하였으나 여러 신자들과 상종하며, 목사 전덕기와의 관계와 상동 예배당 만국청년회의 관계가 인연이 되어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이다.

 

이번 유배 가운데 더욱 예수의 성스러운 희생의 정신인 십자가의 피의 의의를 내 것으로 해야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것이다. 그러니까 일성(이준의 호)의 종교생활의 완전한 출발은 이 불우한 귀양살이 섬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이후부터는 많은 공사의 생활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준의 가장 불행했던 유배 생활은 가장 귀중한 하나님을 찾은 생활이 되었던 것이다. 1905년 1월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이준은 국민교육회장에 취임하여 보광학교를 설립했고 서북흥학회를 창설한 후 오성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쓰는 한편 법안연구회와 헌정연구회를 조직,회장이 되었고 평리원 검사에 취임했으나 법무대신과의 8개월만에 사임했다.

 

한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기해 한국은 사실상 일본의 수중에 들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준의 구국운동이 적극적인 투쟁 방법으로 나타나지 않고 온건한 국민교육 운동으로 전개되도록 사상의 전환을 가져온 것은 그가 기독교 신앙에 깊이 들어간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4. 을사보호조약 무효화 투쟁에서 자신을 버리는 이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전국 교회에서는 구국 철야 기도회와 금식기도회를 열었고 어떤 지역에서는 감리회 장로회 침례회 등이 연합 기도회를 열기도 했다. 전덕기 목사는 생각한 바가 있어 전국 감리교회 엡윗청년회 연합회를 소집하자 각 지역 엡윗회원들이 서울 상동교회로 속속 모여들었다. 진남포 엡윗회 대표로 김구도 상경했고 상동교회 엡윗회 대표로 준도 참석했으며 이동녕 조성환도 모여왔다.

 

전덕기 목사는 엡윗회원들을 5명씩 한 반으로 반을 짰다. 한반이 가서 상소하다 상소를 올리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1반으로 최재학,이준,김구 등이 상동교회에 모여 기도를 드린후 대한문으로 가서 고종 황제께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무장한 왜병으로 인하여 효과를 거둘 수 없어 중단하고 말았다.

 

한편 1907년 7월에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이 소식을 먼저 들은 양기탁은 즉시 상동교회 공옥학교 교감 이회영에게 알렸고 이희영은 전덕기 목사에게 알렸다. 전덕기 목사는 이 희영 이동휘 등 여러 동지들과 만국평화회의에 고종 황제의 특사를 파견하여 한일보호조약은 일본의 강압으로 되였고 결코 한국 황제의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 만방에 알려 무효화시키기로 합의했다. 특사는 이상설 이준,이위종으로 정한후 이 뜻을 고종 황제께 전하자 고종께서도 좋게 여기고 신임장을 써 주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종 황제의 신임장을 누가 가지고 궁궐을 나왔느냐 하는 것이 지금까지 문제로 남아 있다. 당시 일본 헌병들은 고종황제를 덕수궁에 가두어 있게 한 후 궁궐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일일히 몸수색까지 했다.

그런데 어떻게 신임상을 내어 왔을까. 이 문제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고종의 신임을 받던 감리회 선교사 헐버트가 가지고 나왔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전덕기 목사의 친척인 김상궁이 가지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거야 누가 가지고 나아왔던 전덕기 목사는 이준 대표에게 신임장을 전달한 후 상동교회에서 이준을 위해 간곡히 기도를 드린 후에 출발시켰다.

이준 특사는 그 길로 만주 용정에서 교육 사업에 힘쓰고 있는 이상설을 찾아 합류하였고 다시 주로서아 한국대사관에 통역으로 있는 이위종을 데리고 헤이그로 갔다.

그러나 이론의 간계로 회원이 되지못한 준 특사는 언권을 얻어 일본을 규탄하는 최후 연설을 한 후,

 

마지막으로, [대한독립 만세] [세계 약소민족 만세]를 부른 후 뽑아들었던 칼로 자기의 배를 가르고 쓰러져 숨졌다. 그리하여 감리교인 애국자,독립운동가,이준열사는 영원히 갔다. 그러나 그는 영원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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