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마포삼열 선교사

 

I.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 Moffett, 1864-1939)

마포삼열은 26세의 나이로 한국에 건너와 45년동안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초기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양성한 한국교회의 아버지이다.

그는 1889년 4월 15일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돼 1890년 1월 인천 제물포를 거쳐서 서울 마포강변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었다.

처음 6개월간은 한국어를 공부하였고,언더우드로부터 경신학교의 전신인「예수교학당」을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몰두하였다.

1893년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북도,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곳곳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1년 평양에서 신학교육을 시작하였으며 1904년에 정식으로 평양신학교 교장(1904∼1924)에 취임했다. 그는 한국인을 각별히 사랑하여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독립의 성취를 위해 기도하였다. 또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냈다. 1919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대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혼란기에 처한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1893년 10월 마포 삼열이 한국에 온지 9개월만에 평양 개척역사가 시작되었다. 개척 당시 평양은 인구 약 10만명의 도시였으며 복음의 불모지였다. 마포 삼열은 한석진과 함께 최치향이란 사람이 경영하는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여관 손님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여관주인 최치향은 술꾼이었으며 도박과 색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포 삼열과 가까이 지내면서 점점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성경을 공부하고 가장 확실한 신자가 되었다. 마포삼열은 석달동안 낮에는 거리에서 밤에는 사랑방을 찾아다니며 전도했다. 그리고 주일 아침에는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처럼 사랑방전도를 통해 3개월 후에는 7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한번은 깡패 청년 하나가 친구들을 동원하여 마포삼열이 살고 있는 방 창문으로 돌을 던져 넣었다. 그러나 집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후 그는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고 있는 마포삼열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오기가 생겨 다시 돌을 집어 그에게 던졌다. 날아간 돌은 마포 삼열의 턱을 정통으로 맞추었고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러나 마포삼열은 이 청년을 향해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포 삼열은 이미 그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였다. 그는 마침내 마포삼열을 찾아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다. 그가 바로 한국교회 초대 7인 목사중의 한 사람이며 제주도 개척 선교사가 된 이기풍목사이다.

이처럼 마포 삼열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하여 평양 개척 역사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 보고서에 따르면 평양에서 일어난 복음의 불씨는 점점 번져서 7명의 세례교인으로 시작하여 1949년에는 신도수가 7만여 명에 이르고 세례교인 수만해도 2만5천7백91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는 어떤 선교역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수 없는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라고 기록했다.

마포삼열은 한국의 독립과 발전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1919년 3월 17일 일본의 아사히 신문의 기사 내용이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외양으로는 그들(선교사들)이 사랑과 자비를 공헌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을 완전히 들추어 보면 술계와 탐욕으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복음전도를 위하여 한국에 와있는 듯이 가장하고 있으나 정치적인 혼란을 은밀히 충동하고 있다. …그 무리의 괴수는 마포(마포삼열)라는 미국 선교사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께 복종하듯이 마포의 말을 잘 듣는다. 이곳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봉기의 중심지이다. 그곳은 서울이 아니라 평양이다" ―'평양 서문밖의 죄악촌'중 [朝日新聞] 1919년 3월 17일자]

이를 통해 3·1운동 당시 마포 삼열이 지닌 한국인에 대한 공감과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잘 알 수 있다. 마포삼열은 한국인들을 자기 민족처럼 사랑했다.

그는 한국인들과 가까워지고자 한국 고유의 예법을 익히고 한국 음식을 즐겨먹었다. 그는 어디가든지 한국인처럼 침밀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그를 한국사람들은 "마포 목사님"이라고 부르기며 아버지처럼 섬겼다. 어느 한국인보다도 한국사람들과 한국을 더 사랑한 마포삼열목사는 196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과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II. "한국, 한국인을 사랑한 馬布 목사"  
  - 한국 개척선교사 마포삼열- 4男 헤이워드 마펫 박사 회고

마포삼열목사에 대해 취재하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그가 한국교회사에 알려진 대로 신병 치료차 귀국길에 올랐다가 별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포삼열목사는 일본 총독부의 암살 기도를 피해 아내 루시아 피시 마펫과 막내 아들 톰을 남겨둔 채 급히 귀국길에 올랐으며 한국내 사정이 더욱 악화되면서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취재중에 만난 넷째 아들 헤이워드 마펫박사(마포하열)는 이같은 새로운 사실을 증언하며 "아버지는 한국을 떠날 때 이미 돌아가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그의 이 말 한 마디에 마포삼열목사의 절절한 한국 사랑이 묻어났다.

일본 총독부가 밀어부치던 신사참배 문제를 정면에서 반대하고 나선 마포삼열목사는 한국내에서 활동하던 외국선교사들 중 가장 중심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런 그가 일본 총독부로선 언제나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던 것.

일본 헌병에 의해 감시를 받아오던 마포삼열목사에게 암살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가져다 준 사람은 뜻밖에도 일본 총독부 관리의 아내였다. 그녀는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자신이 우연히 듣게 된 정보를 평양 선교부에 급히 알려줬던 것이다.

그녀는 사태의 시급성을 알리며 어떠한 환송회나 모임 등을 일절 갖지 말고 무조건 떠날 것을 요청했으며, 마포삼열목사는 일 헌병의 검속을 피해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낮 시간을 택해 간단한 옷가지만 챙긴 채 황급히 평양역에서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부산에서 요코하마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던 기선 안에서 친 전보를 받고서야 아버지의 귀국 소식을 알게됐다는 헤이워드 마펫은 "아버지는 잠시 피신차 귀국한 미국에서 여러번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도했으나 한국내 정세의 악화로 이같은 노력이 번번히 무산되면서 심장 질환이 악화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와 막내아들을 남겨두고 온 것 뿐 아니라 자신의 평생의 선교 사역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한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된 상황에 더욱 절망했던 것이다.

마포삼열목사의 귀국후 별세하기까지의 3년여 삶에 대해 담담히 입을 연 헤이워드 마펫은 아버지가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뜻밖의 사실을 털어놨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막내가 돌아온 후 로스엔젤레스 몬로비아에 있는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 집은 당시 창고를 개조한 작고 허름한 집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그 집은 정식 번지 등록조차 안돼 00번지 2/1로 명기되었는데 아버지는 이 곳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다고 헤이워드 마펫은 증언했다. 당시 형(마삼락)은 신학교 재학중이었고, 자신은 의대 재학중이었으며, 막내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어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생활의 여유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현재 몬로비아 제일장로교회 바로 옆에 있는 그 집은 찾아오는 이 하나없이 역사 속에 묻혀있다.

1939년 10월 24일 일주일간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결국 숨을 거둔 마포삼열목사의 유해는 그의 처가 동네인 카핀테리아시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현재 헤이워드 마펫은 아버지의 무덤에서 멀지않은 곳에서 그의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지난 3월 28일 기자가 서정운목사(미주장신대 학장) 내외와 함께 자택을 방문했을 때 마펫 부부는 거실에서 우리 일행을 맞았다. 헤이워드 마펫은 고령에 폐질환이 겹쳐 의사로부터 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권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실 의자에 몸을 의지한 채 기자와의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그는 아버지 묘지에 최근까지도 한국인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것은 마포삼열목사의 미국내의 행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지만 언더우드 등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아버지가 주로 이북 평양에서 선교 사역을 펼쳤기 때문에 분단 이후 평양 선교에 대한 관심이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최근에 마삼락박사(셋째 아들)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들은 전 장신대 총장 서정운목사가 현지를 답사하고 미국내 한인신문이 기사로 다루면서 미국내 한인 크리스찬들의 관심을 불러모으게 됐고, 요즘은 가끔 묘소에 꽃을 놓고 가는 참배객까지 생길 정도가 됐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는다고 마펫박사 부부는 입을 모았다.


III. "아버지는 한국떠날 때 이미 돌아가신 것"  
    - 마포삼열목사 4남 헤이워드 마펫박사 증언 -

"마포삼열 선교사는 1864년 미국 인디애나주 매디슨에서 출생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한 그는 하노버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화학을 전공,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선교의 비번을 안고 다시 매코믹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889년 4월 15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돼 1890년 1월 인천 제물포를 거쳐 마포강변에 첫 발을 내딛었다.

처음 6개월간은 한국어 공부를 하였고, 언더우드로부터 경신학교의 전신인 예수교학당을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투신하였다. 1893년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곳곳에 교회를 개척 설립했다.

1901년 평양 대동문 옆 자택에서 방기창 김종섭 두 학생으로 신학교육을 시작한 것이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현 장로회신학대학교)의 효시가 되었으며, 1904년 제1대 교장으로 취임해 1924년까지 20년간 시무했다. 그는 한국인을 각별히 사랑하여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기도하였으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믿음으로 저항했다. 1919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대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혼란기의 한국교회를 선도하였다. 그는 병을 얻어 요양을 위해 귀국하였다가 1939년 10월 24일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별세했다".

이것이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마포삼열목사에 대한 삶의 기록이다. 그러나 본보의 확인 결과 마포삼열목사는 지병 요양차 귀국했던 것이 아니라 일제의 암살 음모를 간파하고 일시 피신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일제의 강압 통치가 더욱 거세지면서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다가 결국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LA의 미주장로회신학대학 서정운학장(전 장신대 총장)의 주선으로 마포삼열목사의 4남 헤이워드 마펫박사(88세)를 그의 자택에서 인터뷰한 기자는 그로부터 한국교회사에 기록되지 않은 그의 부친 마포삼열목사의 일화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헤이워드 마펫박사와의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김 훈 국장: 와병중이심에도 불구하고 취재를 허락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린다. 미국에 와서 마포삼열목사에 대해 그간 한국교회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얘기를 들었다.

헤이워드 마펫: 건강이 좋지 못하다. 폐에 염증이 생겨 거동을 전혀 못하고 있다. 서정운목사께 아무도 만날 수 없다고 했는데 멀리 한국에서 찾아오셨다니 어찌 그냥 돌려보낼 수 있겠나.

아버지 마포삼열목사는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1936년 가을 급히 귀국선을 탔다. 나는 그때 00에 있었는데 태평양을 건너는 기선안에서 아버지가 보낸 전보를 받고 깜짝 놀랐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신 후 아버지로부터 어머니와 막내 동생 톰을 평양에 그대로 두고 혼자 급히 귀국선을 탈 수밖에 없었던 경위를 그때 처음 들었다.

아버지는 당시 신사참배를 종교행위가 아닌 애국행위로 호도하며 강요하던 조선총독부에 맞서 신사참배는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므로 기독교인들은 절대로 복종해서는 안된다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 섰다. 당시 평양에서 선교 사역을 하던 선교사들 중에 가장 지도급 위치에 있던 탓에 아버지의 신사참배 반대 주장이 선교부를 비롯한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 훈: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마포삼열목사의 계획에 없던 귀국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인가?

마펫: 아버지는 그 당시 조선총독부의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아버지가 워낙 강경하게 신사참배를 반대한터라 당시 27명의 목사중 한 두 명을 제외한 모두가 신사참배에 대해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런 와중에 총독부내에 근무하는 일본인 관리의 부인으로부터 부친에 대한 살해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됐다.

그 부인은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사람을 보내 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단체(Black Dragon Society)의 암살 기도를 알리고 급히 본국으로 피신할 것을 당부했다. 아버지는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선교부 사람들 모두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급히 피신할 것을 권고하는 바람에 아무 준비도 없이 평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귀국하게 됐다. 이 길이 영영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마지막 길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김 훈: 당시 평양에 남아있던 부인과 막내아들 톰 마펫은 어떻게 됐나?

마펫: 당시의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고, 일본 경찰의 눈에 띄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잠시 지방으로 출타하듯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 떠나야 했다고 들었다. 그 일본 관리 부인은 환송회나 일체의 모임을 갖지 말고 무조건 기차를 타고 떠나라고 했다고 한다. 떠나는 시간도 검문을 피하기 위해 행인들이 가장 붐비는 점심 시간에 기차를 타고 떠나야 했다. 아버지가 한국을 떠난후 일본 경찰이 매일 자택에 들이닥쳐 집안을 수색하고 꼬투리를 잡기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는 소식도 후에 들었다. 아버지가 떠난 후 어머니가 어린 막내를 데리고 모진 곤욕을 겪어야 했다.

김 훈: 마포삼열목사가 귀국한 1936년부터 1939년 별세하기까지 어떻게 생활했는지...

마펫: 아버지는 몸만 미국에 있었지 마음은 언제나 한국에 가 있었다. 아들의 입장에서 그런 아버지를 볼 때 아버지는 1939년에 돌아가신 게 아니라 1936년 한국을 떠나올 때 이미 돌아가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모든 인생과 사역이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한국에 돌아갈 날만을 고대했다. 그러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일제의 강압정치가 더욱 심해지면서 돌아가기가 점점 어려워지자 매우 낙담하시고 괴로워하셨다. 그러던 와중에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었고 어머니가 귀국한 후 요양차 외가에서 가까운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지내시다 끝내 세상을 떠나셨다.


(김훈기자의 취재기사를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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