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관련된 행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남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목사님들이 예배시간에 축도하는 것을 보면 성경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 중 하나가 축도 안에 성령의 '교통'이라는 단어가 빠진 경우이다.

그 대신에 '감화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심'이라는 용어와 '감동 감화 충만하신 역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중대한 잘못에 속한다.

목사님들이 축도를 할 때그 배경이 되는 성경 구절은 다양하다.

민수기 6장 24~26절, 고린도후서 13장 13절, 히브리서 13장 20~21절,

데살로니가후서 2장 16~17절 중 한 곳을 선택하여 축도할 수 있다.

 

대부분의 목회자는 이들 성경 구절 가운데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말씀으로 축도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대로 해야 옳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로 되어 있다. 

 

원어에는 '함께'로 끝나지만,

우리 성경은 이를 번역하면서 작은 글씨로 '있을지어다'를 첨가하여 '함께 있을지어다'로 번역하고 있다.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의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성을 가장 잘 요약하여 우리에게 알려준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용어가 '은혜'이고, 하나님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용어가 '사랑'이고,

성령님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용어가 '교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간결한 용어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전해주셨고,

목회자들은 그 말씀을 가지고 그 말씀에 근거하여 축도하여야 한다. 
 

목회자들이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말씀으로 축도를 할 때,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빠지지 않고 그대로 잘 사용하지만,

성령의 영역에 있어서는 다른 용어들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성령의 감화, 감동, 역사, 충만, 인도하심이…'

이렇게 길게 다양한 용어들을 많이 사용하면서도 정작 성경에서 하라고 하신 '교통'을 빼버리는 실수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축도하는 사람이 기억해야 할 것은 '감화나 감동이나 역사나 충만이나 인도하심' 같은 용어들은 사용하지 않더라도

 '교통'이라는 용어는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축도할 때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라는 용어가 합당한가? 라는 점이다.

다음과 같이 축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중략)... 

여기 모인 성도들과, 그들의 하는 모든 생업 위에, 그리고 이 교회 위에 , 또한 여기 모인 성도들이 살고 있는 이 미국 위에,

우리의 조국인 한국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이런 종류의 축도는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한 축도다.

 

첫째로,

‘축도’는 (하나나님께 향한) ‘기도’가 아니다. 

‘축도’(benediction)는 축복의 ‘기원’(invoke), ‘축원’의 뜻으로 해석된다.

 

목사님들이 사용하는 축도문은 고후 13:13절의 말씀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개역). 

사도 바울이 쓴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편지 형식에서 말미에 적는 ‘후속사’이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다. '축원'이다.

 

영어성경에는 ‘...be with you all'이라고 했다.

’당신들 모두에게 있기를“이다. (개역개정 번역은 ”있기를 빕니다.“로 번역) 

 

그러므로 축도는 기도형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라는 식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축도자가 회중에게 축복을 ’기원‘하는 형식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축도에서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목사님들이 이 용어를 사용해서 축도를 한다. 

 

축도에서, 이 ‘영원토록’ 이란 용어가 어디에서 왔을까?

성경의 모든 축원, 특히 모든 ‘서신 서’ 말미에 나오는 ‘축원’을 찾아보면,

그 서신의 수신자 즉 ‘회중’을 대상으로,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할지어다’라고 표현한 구절은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축도의 원형인 고후 13:13에도 ‘영원‘이란 말은 없다.

그런데 서신서 중에 벧후 3:18 (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및

유다서 25절(“...영광과 위엄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등에는 ‘이제와 영원 까지’ 란 말이 있다.

아마 그런 말씀을 원용(援用)해서 “영원까지 함께..”라는 축도를 하게 된 것 같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모두 하나님께, 혹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축원이다. 

‘회중’에게 그런 영광이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목사님들이 축도에서,

성도들의 가정, 성도들이 하는 사업‘, 이 교회’, 미국, 한국, 등에게

‘영원히’ 라는 용어로 축원을 하고 있는 이런 것들은 이 땅에서 ‘영원한’ 것이 아니다.

다 유한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업’, ’한국‘이나 ‘미국’에 ‘영원히’ 축복이 있으라고 하는 것은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가? 영원한 존재일까? 한스 큉 교수는 그의 ‘교회’론에서,

“교회는 ‘펜테코스트’(오순절)와 ‘파루시아’(재림)사이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존재하는 ‘임시적’(temporary) 공동체” 라고 천명했다. 

 

이 땅에 있는 ‘교회’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파루시아’ 후에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교회 위에.. 영원히..“라는 축원도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끝으로, 축도는 현재 그 예배나 그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 회중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라는 축원을 할 때 그 대상은 누구인가?

바로 그 편지의 말씀을 받는 고린도교회 회중들이었다.

축도의 대상도 그 예배의 ‘회중’이다. 

장황하게 멀리 있는 사람까지 열거하면서 복을 비는 축도는 잘못된 것이다.

 

축도에 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님들은 ‘신학적으로, 또 성서적’으로 올바른 축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손을 높이 들고 당당하게 축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할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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