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제호/ 대신대 교수 

 

왜 하나님은 지옥을 만드셨을까?

 

이 질문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 한 분 뿐임을 곧 알게 된다 이 질문 자체에 하나님의 지옥창조의 고백이 들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의문은 왜 하나님이 지옥을 만드셨는가하는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해서 우리에게는 큰 빛이 주어져 있다 그 빛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깊으신 뜻 거의 모두를 성경에 담아서 우리에게 주신 사실을 말한다 따라서 이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면 지옥의 창조 이유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성경이 답하는 지옥 창조 이유

 

하나님이 지옥을 창조하신 이유를 성경에서 찾아보기에 앞서 오늘 우리와 대다수 현대인의 성경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잠시 짚어보는 것이 역시 지옥 창조의 이유에 대한 우리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민경배 교수는 그의 책 한국기독교회사에서 우리나라의 신학계에서는 진보진영(비보수계)에 속하는 두 학자의 견해들을 인용하면서 한국교계의 성경에 대한 회의의 심각성을 우려했다

 

먼저 김정준(金正俊)교수의 이런 견해가 소개됐다.

 

"한국교회의 신학은 성경이 말하는 신학이 아닌 '무엇과 관련된 신학' (Und Theologie) 혹은 '형용사의 신학' 이며, 지금까지의 신학자들이 전통적인 것은 무조건 일단 거부, 아니면 배척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오류에 단을 내려야 한다. 한국교회와 신학의 건전한 방향은 역시 올바른 성경신학의 재발견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때가 바로 1971년도 한국교회와 한국의 신학이라고 생각한다" 

 

또 민 교수는 안병무 교수의 다음과 같은 입장도 소개했다.

 

"신학파 예배에 대한 칼빈의 경건을 묵상하면서 사변적 유희가 아닌 실제적이고도 실천적인 훈련으로서의 신학을 표방한 한신대학의 안병무 교수에게서도 이 전통에의 경향은 짙게 표현되었다. 그는 요새 유행하는 신학은 한약의 감초 또는 경기장의 박수 같은 인상을 준다. 모든 분야에 간섭하지 않는 데가 없다"며 이것은 "신학이 제 할 과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분석하고, "신학은 필연적으로 해석하라는 계보에 서게 되는데, 교회의 전통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피력했다.

 

김정준, 안병무, 그리고 민경배 등의 교수들이 우려하는 한국 신학자들의 성경에 대한 회의가 그들 자신과 한국 기독교인 전체에 뿌리깊은 무력증을 가져온 원인이었다.

 

이 현상은 세계적으로도 일반화되어 있어서, 부루스(F.F. Bruce)교수는 다음과 같이 개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미니어(P.S.Minear)박사의 에큐메니즘에 관한 보고문을 인용하면서 "에큐메니즘은 거의 모든 문제들에 관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운운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역사적 메시지나 그의 사명에 대한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연구는 그 초보연구(initial study)도 거치지 않으며, 다만 예수를 사회혁명운동의 기수라고 주장하는 데만 급급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대다수 교회가 취하고 있는 성경에 대한 이와같은 회의적 태도는 그리스도와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도들과 근세에 들어와 성경의 전통에 굳게 섰던 칼빈과 그 후계자들의 태도와는 지극히 대조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 기록된 의인의 영생과 악인의 영벌에 관한 계시를 조금도 가감이나 수정 없이 그대로 선포하셨고, 사도들도 그의 전통을 따랐다.

 

핫지(C. Hodge) 교수는 "지옥의 교리는 자연인의 심정이 그것을 거부하고 그 앞에서 번민하는 교리인데, 이 심정은 오직 권위의 압력으로만 복종돼야 하는 것이다"(it submits only under stress of authority)라고 기록했다. 예수그리스도 자신부터 이 '성경 경위의 압력에 의한 굴복' 에 순종하신 사실을 우리들도 본받을 때에만 이하에서 상고하는 지옥 창조의 이유가 이해될 것이다. 

 

제롬, 오리겐,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issa), 암브로스 등 큰 교부들과 오늘의 세계적인 교계지도자의 한 분인 스토트 (J.Stott) 같은 이들이 지옥교리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는 결코 이 교리자체가 모호하거나 불합리하여서가 아니라, 오직 이분들이 성경을 성경답게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지옥창조의 이유에 관한 성경의 대답은 무엇일까? 

 

(1) 하나님의 새창조와 지옥과의 관계  

하나님께서는 첫 피조세계의 타락이 있은 직후부터 곧 새창조를 시작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새창조에는 무엇보다도 첫 창조를 타락시켰던 인간의 죄에 대한 철저한 징벌과 예방이 수반돼야 했다. 때문에 아담과 하와의 사소해 보이는 죄(선악과를 먹은 죄)를 비롯하여 가인의 죄와 노아시대의 인류 전체와 바벨탑을 세우려던 인류들에게 하나님은 실로 엄청나게 가혹해 보일 정도의 징벌을 내리신 사실이 기록됐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옥 창조의 원초적 의지와 이유를 볼 수 있다고 하겠다(이 부분은 지옥의 창조를 회의하는 이들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죄의 징벌과 지옥의 창조에 있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계에서 자신을 희생적으로 관여시킴(involve)으로 그의 지옥 창조의 이유를 보여주셨다.

 

 ① 지옥을 눈앞에 두신 하나님

모티어(J.A.Motyer)는 욥기 266, 시편 1398절 등의 성경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스올에 친히 임재하신다"고 해석했는데, 이 견해는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죄에 대한 깊은 노여움과 번민,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속죄자로 죽게 하신 사실에 비춰볼 때 타당한 것이다.(14:911, 19:13,20, 20:9,10 참고) 

 

R.니버, D.본회퍼, N.그럽 (Grubb) 등 기독교 사상가들도 죄의 원인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깊이 추론해 본 글들에서 모두 "하나님이 지옥을 그의 면전에 두신다", 즉 하나님의 영원한 지옥응시(凝視)의 고난을 말했다.

 

 최고의 책임적 존재이신 하나님이 죄인을 벌하시기 앞서서 그 형벌에 대한 자기투입(self-involvement)의 원리가 하나님의 본성 안에 있는 사실에서 지옥창조의 첫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② 그리스도의 존재와 하나님의 지옥창조와의 관계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하나님과 동등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교훈, 십자가의 부활, 그리고 그의 승천과 재림은 하나님의 지옥창조의 이유에 새롭고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그 내용은 다음의 두 가지로 먼저 예레미아스(J.Jeremias)"구약성경에서 하나님 자신이 곧 천국이라는 개념은 신약성경에서 예수 자신이 곧 천국(Christ is the Kingdom)이라는 개념의 확립성(consummaction)을 보았다"고 할 만큼 그리스도의 품성(person)과 사역(work)의 유일성을 강조한다. "요한복음 1613-15절에서 그리스도의 내림은 하나님의 삼위의 기본관계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종 사자이므로 모든 인간에게 그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 요구된다"고 해석한다. 

 

즉 대속자로서 그리스도의 본성 안에 '모든 인간의 절대적 복종이 요구되는' 죄에 대한 징벌의 원리가 들어 있어야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새창조를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그리스도 자신부터 절대 복종하신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옥창조의 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두번째로 그리스도와 성경의 진실성(authenticity), 또는 정경성(正經性)의 관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옥창조의 이유를 볼 수 있다.

 

부루스(F. F. Bruce)"성경의 정경성의 기본원리는 각각 다른 근원에서 생긴 여러 문서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그것들이 교회의 생활과 신앙에 통일성을 준다는 사실에 있다" 라고 규정한다. 즉 그리스도의 속죄만이 성경의 존재 원인이므로 지옥의 존재 이유를 이해하는 데 그리스도의 속죄와 그것을 계시하는 성경의 두 진실성의 권위(authenticity)를 수용해야만 한다. 첫 창조의 타락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서 빼앗으므로써 하나님을 인간에게서 빼앗았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해서만 말하는 실체이므로 성경을 거부하는 행위는 곧 그리스도의 속죄를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옥창조의 원인은 악인의 성경 거부에서도 찾을 수 있다. 

 

(2) 인간의 완전한 변화와 지옥의 관계

복음서들은 그리스도의 한번의 내림(one coming)으로 이뤄진 인간과 모든 피조물들의 완전한 변화를 보도한다.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새창조의 변화가 그리스도의 내림으로 '거의 모두' 성취된 사실은 예컨대 앞서 인용한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요한복음 1613 -15절의 해석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 한번의 내림에 의한 의인과 악인의 영원한 변화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파하는 복음의 수용 여부에서 결정된다. 이 논의는 후반의 교회의 사명에서 보충될 것이다. 

 

 ① 현세에서 의인의 완전한 변화와 지옥과의 관계

신자는 내세에 가서가 아니라 지금 현세에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완전히 입양(adoption)되고 변화되었다(요한 10:35 요일 3:13). 그러므로 그는 이제부터 비로서 천국을 향해 길을 떠난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에서부터 시작하는 신분이다. 

따라서 '지금'(신약시대)은 그에게 있어서 굉장한 '축복의 시대(The extra ordinary age)' 이다. 구약의 예언들이 그에게서 다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인의 이 현세에서의 완전한 영복의 신분으로의 변화는 반사적으로 악인의 현세에서의 이미 완전한 형벌의 신분을 증거하게 되며, 더 나아가서 의인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악인들을 정죄하게 되므로 여기서도 하나님의 지옥창조의 이유가 제공된다. 하나님의 구속행동 결정 이전의 깊은 주저와 번민(59:l518, 63:17, 11:8, 11:1214)은 의인의 무상구원(無常救援)과 함께 악인의 영벌에 대한 그분의 연민 때문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② 악인의 현세에서의 정죄와 지옥과의 관계

가롯 유다는 범죄 후에 즉시 자신의 "정죄됨을 보고" 깨달았을 뿐 아니라(27:3) 그는 그 이전에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던"(26:24) '마귀'였다.(요한 6:70). 이 예수님의 계시는 모든 불신자에 관한 계시로서 악인들은 사후에 지옥에 가기 이전 현세에서 이미 자신이 정죄 받았음과 지옥 가기에 합당한 자임을 인지하고, 그것을 나타냄을 이 말씀이 계시한다. 

 

이와같은 절망적인 악인의 죄의 현존(realization of sin)이 지옥의 창조 이유를 제공한다. 사실 악인은 자신의 죄를 자각했을 때 회개하는 대신 속히 죽기를 바랄 뿐 아니라, 죽은 후에 지옥에 가기를 희구하기까지 함으로써 지옥의 필요성의 원인이 자기 안에 있음을 증명한다(9:6). 하나님의 지옥창조의 이유는 죄인 자신에게도 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 받기를 자청하시면서 "모든 의를 이루시려고" 순종하셨던 순종을 배워야 한다.

 

(3) 지옥의 장소성과 시간성

개혁주의 성경학은 천국과 지옥의 시공적 의미(spatial significance)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내세의 생활 행동들과 환경들에 관한 신약성경의 묘사들을 문자적으로 보기보다도 '시간' "그리스도가 행동하는 곳에서 시간이 결정된다"(where Christ acts the time is decided upon)고 풀이한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의 시공성을 인정하되, 천국복락의 영원성과 지옥재난의 영원성을 동일한 시간적 영원성(perpetuity)으로 해석한다. 찰스 핫지 교수는 지옥에서 악인의 박탈상태의 공통적 특성을 그 시간적 영구성(perpetuity)이라 한다  

 

2. 지옥의 존재와 교회의 사명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옥창조의 이유를 성경에서 개괄적으로 찾아보았다 하나님의 새창조 자체와, 그리스도의 존재, 그리고 무엇보다도 악인의 영혼 자체 안에 지옥이 존재해야 할 당위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와같은 지옥의 존재 이유는 교회와 나에게 어떤 사명을 부여하는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하나님 자신과 그리스도와 그리고 죄인들의 지옥에 대한 책임은 바꾸어 말하면 모두 교회의 책임으로 귀착된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삼위와 모든 죄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 사명을 다해줄 것을 간절히 요망하고 있다는 말이다. 누가복음 1619-31절의 교훈에 나타난 부자는 지옥에서 결국 교회가 성경(모세와 선지자)을 속히 그의 다섯 형제에게 전해 줄 것만을 유일의 희망으로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옥의 현존 앞에서의 교회의 성경증거의 사명을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하고자 한다. 

 

(1) 현세의 가치의 중요성 계몽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 자연사가 아닌 영벌)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18:23) 하셨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복음을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명백히 기록하여 제시하고 외치라고 교회의 시급한 사명을 분부하셨다(2:23).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명하신다(14:21, 9:6062).

 

하나님과 예수님이 이처럼 교회에게 전도의 시급한 사명을 독촉하는 이유는 인간의 짧은 현세생활이 일단 끝난 내세에서는 다시 회개의 기회도 없고, 연옥(煉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옥의 현존 앞에서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있어서 현세의 중요성을 모든 사람에게 시급히 가르쳐야 한다.

 

개혁주의 성경학(the Reformed bibliology)은 복음서 기록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그 생략성(elliptic character)이라고 본다. 이 생략성이 복음의 내용, 특히 그리스도의 사실들을 소박성(sobriety), 긴축성(restraint)있게 보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역의 독특성(uniqueness)을 증명한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난 긴급성(urgency)이 곧 그리스도의 천국전파의 원동력이요 교회의 추진력이라고 개혁주의 성경학은 해석한다.

 

복음운동의 기본성격인 이 간결성과 긴급성은 첫째로 기독교 설교로 하여금 모든 비성경적 철학논의를 배제하고, 오로지 그리스도중심의 설교로 정돈되게 하며, 의식(儀式)과 생활의 간소화를 통하여 신앙의 표리일체성을 실현케 한다. 게할더스 보스가 기독교의 큰 특성의 하나를 '실제성(factuality)'으로 본다.

 

그리고 그 두 내용으로서 첫째는 하나님과 신자의 실질적인 가까움(neatness) (보스는 이것을 남편과 아래의 독방대좌(獨房對坐)같은 가까움으로 표시함), 둘째는 신자 생활의 표리일체라고 설명하는데 이것도 생략성 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이와같은 성경의 이해만이 교회를 하여금 인간의 짧고 덧없는 현세의 지극한 중요성을 깨닫도록 가르치게 하며, 따라서 지옥의 현존 앞에서의 신적(伸的) 긴급성 있는 전도에 교회가 모든 것을 투입하게 만든다. "십자가의 거치는 것"(5:11)"전도의 미련한 것"(고전 1:821)은 오직 이러한 교회의 현세 중시의 인식과 긴급성 있는 전도로만 극복되며,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의 신비한 섭리는 오직 이 상황에서만 진행된다(24:14). 

 

(2) 개혁주의 성경학의 진흥 

가블러(J.P. Gabler)(1753-1826)는 당시의 신학을 성경본문의 자구주의적(自救主義的)연구와 교리편 중에서 건지려고 성경신학을 시작했으나, 그의 윤리론(倫理論)은 그를 현대 인본주의적 성서학의 비조(鼻祖)로 머물게 만들었다. 그후 약 200년간 성경학계에서의 전통진영과 진보진영의 성경학을 둘러싼 싸움은 밴틸(C. Van Til)의 표현 그대로 '무서운 싸움(fearful war)' 이었다. 

 

그러나 이 싸움은 20세기 초엽부터 서서히 전통진영에 '좀 나은 형편'으로 전환되었다. 뿐만 아니라 금세기를 마감하려는 오늘에 이르러 세계의 신학계를 조망하면, 브롬리(G.W. Bromiley)교수의 말대로 "금세기는 교회가 성경을 되찾은 세기"로 변모했으며, 특히 개혁주의 주경학(Reformed exegetics)이 만개에 가까운 발전을 보았다. 

 

성경학을 문헌학(philology)편중으로 접근했던 이른바 현대주의 신학은 그 본질에 들어있는 목회성(牧會性)의 근본적 결여로 그 쇠망이 처음부터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이른바 성학들(聖學, the divines)만이 신학과 목회를 겸행하여, 기독교 본연의 성경학과 신학을 추진함으로써 교회를 계승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는 다행하게도 박형룡, 박윤선 두 분이 이루어 놓은 개혁주의 성서학의 기초와 전례(前例)를 가졌고, 지난 100년 동안 한국교회의 일차적이고 외적(外的)인 성장은 전적으로 두 분이 세웠던 개혁주의 성경학의 추진력의 열매였다. 

 

지옥의 그 존재의 이유를 더 확실히 규명하고, 거기로 달려가는 이웃들을 건져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먼저 현세의 중요성을 시급히 계몽하여 이웃들을 주님의 교회 안으로 모아들인 다음 교회가 할 일은 기독교 본연의 교화수단인 개혁주의 성경학의 진흥을 위해 힘쓰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교회가 여기에 대해 크게 눈떠가고 있으며, 이 분야의 양서들이 다수 공급되고 있는 현상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지옥을 만드신 이유와 이것과 관련된 교회의 사명에 대해 살펴보았다.

 

영원한 천국의 존재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 안에서 이해가 가능한 듯하다. 그러나 영원한 지옥의 존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어떻게 양립되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후크마(A.A.Hookema)교수는 "하나님의 속성들 중에서 상반되는 속성들이 서로 모순되지 아니함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모두 말씀하셨으나 칼 바르트나 에밀 브룬너 등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사랑만 수용하고 하나님의 진노는 거부함으로 성경을 오해했다. 바르트는 안셀름과 루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함께 취급하고, 그 둘을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성이라는 개념으로 애매하게 동일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 반대개념인 그의 공의에 의해서만 성립되며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공로에 따라 갚지 아니하시고 오직 은혜에 따라 갚으시는 하나님의 보상적 공의와 불순종자에게 내리시는 응보적 공의가 있다. 바르트는 이 하나님의 눈을 감으로써 '가장 철저한 만인구원론자' 의 입장에 선다. 브룬너 역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는 그의 정당한 사역이지만 하나님의 진노의 계시는 그의 이상한 계시로 봄으로써 루터와 함께 바르트적 오류에 빠진다. 특히 브룬너는 그리스도 없이 죽은 사람은 소멸된다고 봄으로써 여호와의 증인이나 잡다한 이단 종파들의 교리와 유사한 주장을 한다. 존 스토트도 이들과 궤를 같이하는 사상에 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맺는 말 

 

지옥을 말하는 것에 대하여 불신자들은 조야(祖野, impolitic)한 태도라고 말하나, 누구보다도 불신자 자신들이 그들 자신의 조야함을 잘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속가(贖價)를 지나치게 지불하지 않으신 것처럼 지옥의 죄인들도 지나치게 지옥고통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악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에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복음을 충성으로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힘찬 지적(知的), 윤리적 전진이다. 이 기운(氣運)이 세계적으로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감사하면서 붓을 놓는다.

 

 

한제호/ 연세대학교 신과대와 총신대신학연구원을 나와  하와이국제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대신대학교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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